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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타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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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젠타 전투는 1697년 오스트리아군이 오스만 제국군을 상대로 거둔 결정적인 승리이다. 1683년 빈 전투 이후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간의 전쟁이 오스만 제국의 반격으로 이어지던 중, 오스트리아는 사보이 공자 외젠의 지휘 아래 티서 강을 건너려던 오스만 군을 기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로 오스만 제국은 막대한 피해를 입고,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인정하게 되었다. 젠타 전투는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을 가져왔으며, 유럽의 세력 균형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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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타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정보
명칭젠타 전투 또는 센타 전투
관련 전쟁대튀르크 전쟁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젠타 전투, 프란츠 아이젠후트 그림
젠타 전투 (프란츠 아이젠후트 그림)
날짜1697년 9월 11일
장소세르비아 젠타 근처 (당시 오스만 제국 점령 하의 헝가리 왕국)
현재 위치세르비아 보이보디나 센타
좌표45°55′34″N 20°05′53″E
결과신성 동맹의 승리
영향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대튀르크 전쟁 종결
교전 세력
교전국 1신성 동맹
합스부르크 군주국
헝가리 왕국
세르비아 민병대
교전국 2오스만 제국
크림 타타르
쿠루츠 반군
지휘관 및 지도자
신성 동맹사보이 공자 외젠
귀도 슈타렘베르크
지그베르트 하이스터
샤를토마 드 보데몽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
오스만 제국무스타파 2세
엘마스 메흐메트 파샤 (사망)
임레 퇴쾨이
병력 규모
신성 동맹50,000명 (보병 34,000명, 기병 16,000명)
포 60문
오스만 제국75,000–100,000명
포 200문
사상자 규모
신성 동맹전사 429명 (장교 28명, 사병 401명 포함)
부상 1,598명 (장교 133명, 사병 1,435명 포함)
오스만 제국사망, 부상, 익사자 30,000명

2. 배경

1683년 빈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국들은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되었다. 1688년에는 베오그라드판노니아 평원 대부분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프랑스(Nine Years' War)와의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병력을 분산해야 했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대재상은 군대를 재편하여 반격에 나섰다. 1690년 오스만 제국은 베오그라드를 탈환했고, 이후 몇 년간은 결정적인 전투 없이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1696년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고 대동맹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1697년 오스트리아는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더 많은 병력을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프린츠 오이겐을 도나우강 전선에 파견하여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고자 했다.

한편, 1697년 4월 18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스타파 2세는 10만 대군을 이끌고 에디르네를 출발하여 세 번째 원정에 나섰다. 무스타파 2세는 직접 군대를 지휘하여 8월 11일 베오그라드에 도착했고, 8월 18일에는 세게드를 향해 북쪽으로 진군했다.

2. 1.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빈 포위

1683년 빈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 빈이 구원받은 후, 오스트리아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1688년 베오그라드판노니아 평원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투르크 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새로운 오스만 제국의 와지르가 군대를 재편하여 반격하면서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1690년에는 베오그라드를 오스만 군에게 다시 빼앗기기도 했다.

2. 2. 빈 전투와 반격

1683년 빈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도를 구원한 후, 오스트리아군은 반격하여 1688년 베오그라드판노니아 평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투르크 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와지르(대재상)는 군대를 재편하여 반격을 개시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는 더 이상 진격을 계속할 수 없었다. 1690년 오스만 군에게 베오그라드를 다시 빼앗겼고, 이후 전투는 큰 변화 없이 진행되었다.

사보이 공 외젠은 처음으로 독립지휘권을 얻어 이후 뛰어난 활약을 시작하게 되었다. 1683년 빈 전투 이후,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의 전환점이 마련된 듯 했으며, 오스트리아와 그 동맹국들은 더 많은 오스만 영토를 점령했다. 1688년에는 베오그라드와 판노니아 평원 대부분이 합스부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병력이 부족했고, 새로운 대재상이 오스만 군대를 재편성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베오그라드는 1690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듬해의 작전은 합스부르크 군대가 두 번째 베오그라드 공방전 (1694)에서 실패한 후 비교적 결정적이지 못했다. 그 후 술탄 무스타파 2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군대는 루고스 전투 (1695), 울라시 전투 (1696), 체네이 전투 (1696)에서 3연승을 거두었고, 베네치아는 키오스 (1695)를 잃었다.

1696년 사보이아 공국이 프랑스와 비밀 조약을 맺고 대동맹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1697년 오스트리아는 대튀르크 전쟁에 병력을 증강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 레오폴트 1세는 프린츠 오이겐을 도나우강 전선으로 파견했다. 오이겐은 7월에 페트로바라딘에 도착했지만, 8월 19일 술탄 무스타파 2세가 베오그라드에서 북상하여 도나우강을 건너려 하자, 티서강을 따라 젠타로 후퇴했다.

오스만 제국군은 페테르바르다인을 포위했지만, 오이겐이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의 원군을 얻어 돌아오자 반격을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철수했고, 동맹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티서강을 건너 동쪽의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하려 했다. 오이겐은 북상 중인 오스만 제국군을 포착, 9월 11일 오전 9시에 기병 선발대가 전투를 시작했다. 오스만군은 무스타파 2세와 병참대·대포 부대와 기병 부대의 대부분이 티서강에 가설한 부교를 건너 동쪽 강안으로 이동했지만, 남은 대포와 보병 부대·기병 부대의 일부는 서쪽 강안에 머물러 있었다. 오이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행군으로 저녁에 젠타를 내려다보는 고지에 도착, 군을 이끌고 고지에서 돌격하여 급습했다.

티서강 서쪽 강안은 오스만군이 반원형의 진지를 구축, 토루와 참호 안에 수레를 연결한 진지와 대포로 수비를 굳게 하고 있었다. 오이겐도 자군을 반원형으로 펼쳐, 좌익의 기병대와 보병대로 적진을 북쪽에서 돌파하게 했고, 오스만군은 당황하여 티서강을 건너 허술해진 북쪽 돌파구를 확대시켰다. 좌익의 일부는 티서강을 따라 흘러 부교 부근의 얕은 여울에서 오스만군의 배후를 급습, 중앙과 우익도 혼란에 편승하여 진지의 방어선을 뚫고, 오스만군의 허를 찔러 이를 괴멸시켰으며, 2시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부교를 건너는 도중의 오스만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오스만 재상 엘마스 메흐메트 파샤는 오스만군 병사에게 암살당했다. 무스타파 2세는 습격 전에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오스만군은 전사자 2만 명, 익사자도 1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반격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놀라운 승리였다. 500명의 희생으로 30,000명을 격파하고, 87문의 대포, 술탄의 하렘·보물 상자와 국장을 빼앗았다. 주요 터키군은 뿔뿔이 흩어져 티미쇼아라로 패주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얻었고, 사라예보에는 불이 붙었다.

2. 3. 프랑스와의 전쟁과 오스만 제국의 반격

1683년 빈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가 승리한 후, 오스트리아군은 반격에 성공하여 1688년 베오그라드판노니아 평원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전쟁(9년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군은 투르크 전선에 병력을 집중할 수 없었고, 새로운 오스만 대재상은 군대를 재편하여 반격을 개시하였다. 이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1690년 베오그라드를 상실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사보이 공 외젠은 처음으로 독립지휘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후 뛰어난 활약을 시작하게 되었다. 1688년에는 베오그라드와 판노니아 평원 대부분이 합스부르크에 의해 점령되었다. 그러나 프랑스(Nine Years' War)와의 전쟁으로 더 많은 병력이 필요했고, 새로운 대재상이 오스만 군대를 재편성하고 활성화시키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베오그라드는 1690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탈환되었고, 이듬해의 작전은 결정적이지 못했다. 그 후 술탄 무스타파 2세가 지휘하는 오스만 군대는 루고스 전투 (1695), 울라시 전투 (1696), 체네이 전투 (1696)에서 3연승을 거두었고, 베네치아는 키오스 (1695)를 잃었다.

1696년 사보이아 공국프랑스 왕국과 비밀 조약을 맺고 대동맹 전쟁에서 이탈하면서, 1697년 오스트리아는 대튀르크 전쟁에 병력을 증강할 수 있게 되었다. 신성 로마 황제레오폴트 1세는 오이겐 폰 사보이엔을 도나우강 전선으로 파견하였다.

오이겐은 1697년 7월 도나우강 연안의 페트로바라딘에 도착했지만, 8월 19일 술탄 무스타파 2세가 군을 이끌고 베오그라드에서 북상하여 도나우강을 건너 페테르바르다인을 함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티서강을 따라 북상하여 젠타로 물러났다. 오스만 제국군은 페테르바르다인을 포위했지만, 오이겐이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의 원군을 얻어 돌아오자 반격을 두려워하여 북쪽으로 철수했고, 동맹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티서강을 건너 동쪽의 트란실바니아로 진군하려 했다. 오이겐은 북상 중인 오스만 제국군을 포착하고, 제국 장군을 사로잡아 적군이 도하 중임을 알고 9월 11일 오전 9시에 기병 선발대가 전투를 시작했다.

오스만군은 무스타파 2세와 병참대·대포 부대와 기병 부대의 대부분이 티서강에 가설한 부교를 건너 동쪽 강안으로 이동했지만, 남은 대포와 보병 부대·기병 부대의 일부는 서쪽 강안에 머물러 있었다. 오이겐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강행군으로 저녁에 젠타를 내려다보는 고지에 도착, 군을 이끌고 고지에서 돌격하여 급습했다. 티서강 서쪽 강안은 오스만군이 반원형 진지를 구축, 토루와 참호 안에 수레를 연결한 진지와 대포로 수비를 굳게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오이겐도 자군을 반원형으로 펼쳐, 좌익의 슈타렌베르크 지휘하의 기병대와 보병대로 적진을 북쪽에서 돌파하게 했고, 오스만군은 당황하여 티서강을 건너 허술해진 북쪽 돌파구를 확대시켰다. 게다가 좌익의 일부는 티서강을 따라 흘러 부교 부근의 얕은 여울에서 오스만군의 배후를 급습, 중앙과 우익도 혼란에 편승하여 진지의 방어선을 뚫고, 오스만군의 허를 찔러 괴멸시켰으며, 2시간 만에 승패가 결정되었다. 부교를 건너는 도중의 오스만군은 공황 상태에 빠졌고, 오스만 재상엘마스 메흐메트 파샤는 오스만군 병사에게 암살당했다. 무스타파 2세는 습격 전에 다리를 건넜기 때문에 무사했지만, 오스만군은 전사자 2만 명, 익사자도 1만 명에 달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어 반격 불능 상태가 되었다.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놀라운 승리였다. 500명의 희생으로 30,000명을 격파하고, 87문의 대포, 술탄의 하렘·보물 상자와 국장을 빼앗았다. 주요 터키군은 뿔뿔이 흩어져 티미쇼아라로 패주했고, 오스트리아군은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얻었고, 사라예보에는 불이 붙었다.

전투도(17세기경의 그림)


젠타 전투

3. 전투의 경과

1697년 9월 11일, 사보이 공자 외젠이 이끄는 황제군은 티서 강을 건너려던 오스만 군을 젠타 근처에서 기습 공격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는 오스만 군의 움직임을 사전에 파악하고 외젠에게 알렸다.

오스만 군은 스제게드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외젠은 이를 추격하고 있었다. 오스만 군이 티서 강을 건너려는 순간, 외젠은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해 질 녘 두 시간 전, 합스부르크 군대가 10시간의 강행군 끝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 군은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술탄 무스타파 2세와 그의 짐, 포병은 테메슈바르 강둑에 있었고, 대부분의 보병은 대재상과 함께 다른 강둑에 있었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모든 방향에서 일제 공격을 시작하여 오스만 군의 방어 위치를 향해 초승달 모양으로 움직였다. 귀도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제국군 좌익은 오스만 군의 좌익과 다리 사이를 돌파하여 그들을 강에 가두었다. 군대의 우익은 지크베르트 하이스터 장군이 지휘했다. 동시에, 샤를-토마 드 보데몽이 이끄는 제국군은 정면에서 공격했고, 근거리 전투를 벌인 후 오스만 진지를 둘러싼 참호를 돌파했다.

슈타렘베르크 장군의 제국 용기병대는 하차하여 오스만 진지를 에워싸는 해자를 향해 나아가 오스만 방어선을 곧 돌파했다. 참호 뒤에 있던 오스만 군은 혼란 속에 다리로 후퇴했고, 다리는 과밀해지고 심하게 폭격을 받아 곧 무너졌다. 혼란에 빠진 오스만 군 수천 명이 강에 떨어졌다. 오스트리아 포병은 탈출하려던 생존 오스만 군을 파괴했다. 술탄은 다른 쪽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았고, 남은 병력에게 다리를 확보하라고 명령한 후, 군대를 포기하고 후퇴했다. 합스부르크 군대가 건너편 강둑에 도착했을 때, 술탄이 87문의 대포, 9,000대의 짐마차, 6,000마리의 낙타, 15,000마리의 소를 남겨두고 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오스만 왕실의 보물 상자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와 이전에는 적에게 포획된 적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 대술탄 무스타파 2세의 국새가 들어 있었다.

총 30,000명의 터키인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오스만 군사 행정부의 고위 관계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재상은 반란을 일으킨 예니체리에 의해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반대로 신성 동맹은 불과 429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의 큰 차이는 제국군의 전술적 우위와 오스만 군과 달리 오스트리아 군이 크게 개선한 포병 기술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3. 1. 사보이 공 외젠의 지휘권 확보

1697년 7월 5일, 사보이 공자 외젠은 레오폴트 1세에 의해 헝가리 왕국의 오스트리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외젠은 약 7만 명의 병력을 지휘하게 되었으며, 이 중 3만 5천 명이 즉시 전투에 투입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국고가 비어있어, 외젠은 병사들의 임금을 지불하고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그는 5만 명 수준의 군대에 필요한 식량, 탄약, 장비를 요청했다.

술탄 무스타파 2세와 오스만 군대가 베오그라드를 떠났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외젠은 상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용한 모든 병력을 모아 페트로바라딘으로 진군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헝가리 반군을 처리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헤길리아 북쪽으로 보냈고, 나머지 군대를 재건하여 오스만 군에 맞섰다. 병력 집결 후, 외젠의 군대는 약 5만 명으로 구성되었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에스테르하지 팔 1세는 헝가리에서 1만 2천 명의 군인을 지원했다.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가 지휘하는 1만 명의 세르비아 민병대(대부분 기병)와 부사령관 요반 모나스테를리야가 이끄는 보병 1,000명과 기병 700명의 세르비아 징집병도 외젠의 군대에 합류했다.

3. 2. 양측의 초기 기동

1697년 7월 5일 헝가리 왕국 최고 지휘권을 갖게 된 사보이 공자 외젠은 북부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로부터 병력을 집결시켜 페트로바라딘으로 진군하였다. 외젠은 50,000-55,000명에 달하는 황제군을 통솔하여 무스타파 2세가 이끄는 오스만 군에 맞섰다.

8월 동안 외젠은 페트로바라딘 근교에서 오스만 군과 전투를 벌이려 하였으나, 오스만 군은 공성전을 원하며 교전을 회피하였다.

3. 3. 젠타에서의 기습

1697년 9월 11일, 오스만 군은 젠타 근처에서 티서 강을 건너려 시도했으나, 사보이 공자 외젠이 이끄는 황제군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는 오스만 군의 진격을 감시하고 외젠에게 즉시 알렸으며, 포로로 잡힌 오스만 파샤를 통해 이 정보를 확인했다. 테켈리야는 늪지대를 통해 제국군을 튀르크 군의 후방으로 이끌었다.

당시 오스만 군은 스제게드 요새를 공략하려 북쪽으로 이동 중이었고, 외젠은 이를 추격하고 있었다. 오스만 군이 티서 강을 건너려는 순간, 외젠은 기습 공격을 감행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해 질 녘 두 시간 전, 합스부르크 군대가 10시간의 강행군 끝에 도착했을 때, 오스만 군은 강을 건너는 중이었다. 기독교 군대가 이렇게 빨리 도착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기에 오스만 군은 충격에 빠졌다. 술탄 무스타파 2세와 그의 짐, 포병은 테메슈바르 강둑에 있었고, 대부분의 보병은 대재상과 함께 다른 강둑에 있었다.

빛이 어두워지면서, 합스부르크 군대는 모든 방향에서 일제 공격을 시작하여 오스만 군의 방어 위치를 향해 초승달 모양으로 움직였다. 귀도 슈타렘베르크 장군이 지휘하는 제국군 좌익은 오스만 군의 좌익과 다리 사이를 돌파하여 그들을 강에 가두었다. 군대의 우익은 지크베르트 하이스터 장군이 지휘했다. 동시에, 샤를-토마 드 보데몽이 이끄는 제국군은 정면에서 공격했고, 근거리 전투를 벌인 후 오스만 진지를 둘러싼 참호를 돌파했다. 헝가리 출신 임레 토코리는 터키 기병대를 지휘하며, 쿠루츠 기병대와 함께 술탄을 지원했다.

슈타렘베르크 장군의 제국 용기병대는 하차하여 오스만 진지를 에워싸는 해자를 향해 나아가 오스만 방어선을 곧 돌파했다. 참호 뒤에 있던 오스만 군은 혼란 속에 다리로 후퇴했고, 다리는 과밀해지고 심하게 폭격을 받아 곧 무너졌다.

혼란에 빠진 오스만 군 수천 명이 강에 떨어졌다. 오스트리아 포병은 탈출하려던 생존 오스만 군을 파괴했다. 술탄은 다른 쪽에서 무력하게 지켜보았고, 남은 병력에게 다리를 확보하라고 명령한 후, 군대를 포기하고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기병 분대의 호위를 받고, 멘토인 셰이크-울-이슬람 페이줄라 에펜디와 함께 무스타파는 테메슈바르로 출발하여 가는 길에 말에 실을 수 있는 것만 가져갔다. 합스부르크 군대가 건너편 강둑에 도착했을 때, 술탄이 87문의 대포, 9,000대의 짐마차, 6,000마리의 낙타, 15,000마리의 소를 남겨두고 갔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오스트리아군은 오스만 왕실의 보물 상자를 발견했는데, 여기에는 와 이전에는 적에게 포획된 적이 없었던 오스만 제국 대술탄 무스타파 2세의 국새가 들어 있었다. 국새에는 "메흐메드 한의 아들 무스타파, 항상 승리한다"는 문구와 그의 즉위 해인 "헤지라" 1106년(서기 1695년)이 새겨져 있었다.

총 30,000명의 터키인이 사망했는데, 여기에는 오스만 군사 행정부의 고위 관계자도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대재상은 반란을 일으킨 예니체리에 의해 전장에서 살해되었다. 반대로 신성 동맹은 불과 429명의 사상자를 냈다. 사상자의 큰 차이는 제국군의 전술적 우위와 오스만 군과 달리 오스트리아 군이 크게 개선한 포병 기술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

3. 4. 오스만 군의 패배

1697년 9월 11일, 외젠 공작이 지휘하는 황제군은 티서 강을 건너려던 오스만 군을 기습하여 공격했다. 강력한 포격과 함께 많은 용기병 부대가 말에서 내려 오스만 군 진영을 포위하고 총격전을 벌였다. 해자 뒤에 있던 오스만 군은 혼란에 빠져 다리 방향으로 퇴각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 포병대는 오스만 군을 향해 계속 사격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황제군 좌익은 오스만 군 좌익과 다리 사이를 돌파하여 퇴로를 차단했고, 동시에 전면 돌격을 개시하여 치열한 백병전 끝에 오스만 군 진영을 둘러싸고 있던 참호를 돌파하였다. 오스만 군 진영 안에서는 보급마차들 사이로 끔찍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외젠 공작 휘하의 황제군은 끊임없이 공격을 계속하였고, 오스만 군은 간신히 퇴각하였다. 이 과정에서 10,000명에 달하는 오스만 군이 티서 강에 빠져 죽었고, 거의 20,000명에 달하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4. 전투의 영향

젠타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군은 500명의 적은 피해만 입은 반면, 오스만 군은 30,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술탄의 하렘, 87문의 대포, 왕가의 보물, 국새 등을 빼앗겼다. 오스만 군 주력은 궤멸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획득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는 무스타파 2세에게서 트란실바니아와 부다, 에게르, 카니즈사 등 주요 요새를 양도받았다. 이 지역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 슬로베니아 왕국, 국방 국경이라는 이름의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4. 1. 오스트리아의 대승

1697년 9월 11일 오스만 군은 티소 강을 건너려다 외젠 공작이 지휘하는 황제군에게 기습을 당했다. 강력한 포격과 함께 용기병 부대가 오스만 군 진영을 포위하여 총격전을 벌였다. 오스만 군은 혼란에 빠져 퇴각하다가 오스트리아 포병대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황제군은 좌익과 전면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오스만 군의 퇴로를 끊고 진영을 점령했다. 이 과정에서 끔찍한 살육전이 벌어졌고, 10,000명에 달하는 오스만 군이 티소 강에 빠져 죽고, 20,000명 가량이 전장에서 사망했다.

이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오스트리아 군은 500명의 적은 피해만 입은 반면, 오스만 군은 30,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술탄의 하렘, 87문의 대포, 왕가의 보물, 국새 등을 빼앗겼다. 오스만 군 주력은 궤멸되었고, 오스트리아는 사라예보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획득했다.

젠타 전투 기념비

4. 2.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는 술탄 무스타파 2세에게 트란실바니아와 부다, 에게르, 카니즈사 등 주요 요새를 양도받았다. 이 지역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 슬로베니아 왕국, 국방 국경이라는 이름의 합스부르크 영토가 되었다.

5. 전투 이후

젠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500명의 적은 피해로 30,000명의 오스만군을 궤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술탄의 하렘, 87문의 대포,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 등을 탈취하였다. 오스만 군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사라예보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군사 작전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는 술탄 무스타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부다, 에게르, 카니즈사와 같은 주요 요새를 양도받았다. 이 지역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국방 국경이라는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5. 1. 오스만 제국의 쇠퇴

젠타 전투는 오스만 제국에게 치명적인 패배였다. 오스트리아군은 500명의 적은 피해로 30,000명의 오스만군을 궤멸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술탄의 하렘, 87문의 대포, 오스만 왕가의 보물, 오스만 제국의 국새 등을 탈취하는 전과를 올렸다. 오스만 군의 주력은 궤멸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사라예보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군사 작전의 자유를 얻게 되었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을 통해, 오스트리아는 술탄 무스타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 부다, 에게르, 카니즈사와 같은 주요 요새를 양도받았다. 이 지역들은 이후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 슬로베니아 왕국, 국방 국경이라는 이름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가 되었다.

5. 2. 합스부르크 제국의 성장

젠타 전투의 승리로 오스트리아는 적은 피해로 오스만 제국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 오스만 군의 주력군은 궤멸되었고, 오스트리아군은 사라예보가 불타버린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획득하였다.

1699년 카를로비츠 조약 체결로 오스트리아는 술탄 무스타파 2세로부터 트란실바니아와 부다, 에게르, 카니즈사와 같은 주요 요새들을 양도받았다. 이 지역들은 후에 트란실바니아 공국, 헝가리 왕국, 슬라보니아 왕국, 국방 국경이라는 이름의 합스부르크 제국 영토가 되었다.

5. 3. 역사적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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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관련 인물

레오폴트 1세는 1697년 7월 5일 사보이 공자 외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외젠은 상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에서 병력을 모아 페트로바라딘으로 집결시켰다. 그의 군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출신 병사들로 구성되었으며, 에스테르하지 팔 1세가 이끄는 헝가리 군대와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병대도 합류했다.

무스타파 2세오스만 제국의 술탄으로, 젠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에 맞섰다. 젠타 전투 패배 후, 오스만 제국은 사라예보를 약탈당하고 카를로비츠 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6. 1. 사보이 공자 외젠

레오폴트 황제는 1697년 7월 5일, 판노니아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보이 공자 외젠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외젠은 약 7만 명의 군대를 지휘했으며, 이 중 3만 5천 명이 전투에 투입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국고가 비어있어, 외젠은 병사들의 임금과 의료 서비스 제공을 위해 돈을 빌려야 했다. 그는 5만 명 규모의 군대에 필요한 식량, 탄약, 장비 지원을 요청했다.

술탄의 군대가 베오그라드를 떠났다는 소식을 접한 외젠은 상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에서 가용한 모든 병력을 페트로바라딘으로 집결시켰다. 페트로바라딘은 베오그라드 상류 다뉴브 강변에 위치해 있었다. 외젠은 합스부르크에 반대하는 헝가리 반군을 진압하기 위해 일부 병력을 헤길리아 북쪽으로 파견하고, 남은 병력을 재건하여 오스만 제국에 맞섰다. 병력 집결 후, 외젠의 군대는 약 5만 명으로 오스만 제국군에 대항했다.

합스부르크 군대는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세르비아 출신 보병과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에스테르하지 팔 1세는 헝가리 왕국에서 1만 2천 명의 군인을 지원했다. 요반 포포비치 테켈리야가 이끄는 1만 명의 세르비아 민병대(대부분 기병)도 외젠의 군대에 합류했다. 요반 모나스테를리야 부사령관 휘하의 세르비아인 징집병 1,000명(보병)과 700명(기병) 역시 연합군에 포함되었다.

외젠은 제국군을 이끌고 페트로바라딘에서 남쪽으로 진군하여 티사 강을 건너 동쪽 제방을 따라 상류로 이동했다. 당시 오스만군은 적의 위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6. 2. 무스타파 2세

카를로비츠 조약, 사라예보 약탈 문서를 참고하라.

젠타 전투는 오스트리아의 놀라운 승리로 끝났다. 오스만 제국의 주력 부대는 흩어졌고, 오스트리아군은 오스만 보스니아에서 완전한 행동의 자유를 얻었다. 10월 22일, 오이겐이 사바의 세르비아 민병대를 포함한 6천 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급습을 감행한 후, 사라예보가 함락되었다. 오스만군은 항복을 요청하러 온 사자들을 살해한 후, 도시는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

14년간의 전쟁 끝에, 젠타 전투는 평화의 촉매 역할을 했다. 몇 달 안에 양측의 중재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주재 영국 대사인 윌리엄 패짓의 감독하에 스렘스키 카를로브치에서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1699년 1월 26일 베오그라드 근처에서 서명된 카를로비츠 조약에 따라 오스트리아는 헝가리(테메슈바르 바나트슬라보니아의 작은 지역 제외), 트란실바니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에 대한 지배권을 얻었다. 반환된 영토의 일부는 헝가리 왕국에 재통합되었고, 나머지는 합스부르크 군주국 내에서 트란실바니아 공국과 군사 변경지대와 같은 별도의 실체로 조직되었다. 튀르크는 베오그라드와 세르비아를 유지했고, 사바강은 오스만 제국의 최북단 경계가 되었으며, 보스니아는 국경 지역이 되었다. 이 승리는 궁극적으로 튀르크의 헝가리 대부분 지역에서의 철수를 공식화했고, 그 결과 카를로비츠 조약은 유럽에서 오스만 지배의 종말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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