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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틸리나 탄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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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틸리나 탄핵은 기원전 63년 로마 공화정 말기에 발생한 사건으로, 집정관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귀족 출신인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의 쿠데타 음모를 폭로하고 진압한 일련의 과정을 말한다. 카틸리나는 여러 차례 집정관 선거에서 낙선하고 빚에 시달리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리자 무력으로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하는 네 차례의 연설을 통해 카틸리나와 그 일당을 규탄하고 사형을 주장하여, 카틸리나 일당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카틸리나는 로마를 탈출하여 반란군을 이끌었으나, 이듬해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이 사건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키케로는 이 사건을 통해 공화정의 수호자로서의 명성을 얻었지만, 법적 절차를 무시한 처형으로 인해 비판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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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틸리나 탄핵
개요
키케로 데나리우스
키케로의 초상
제목카틸리나 탄핵 연설
원어 제목마르키 툴리 키케로의 카틸리나에 대한 연설
로마자 표기Marci Tulli Ciceronis orationes in Catilinam
저자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장르연설
언어라틴어
역사적 배경
사건카틸리나 모반 사건
연설 시기기원전 63년
장소로마 원로원
대상로마 원로원 의원
내용
목적카틸리나를 로마에서 추방시키고, 그의 모반 계획을 폭로
주요 내용카틸리나의 음모에 대한 비난
원로원 의원들에게 국가를 보호할 것을 촉구
카틸리나의 추방을 요구
공화국의 가치를 옹호
구성
연설 횟수4회
연설 제목제1 연설: 원로원에서 카틸리나를 직접 비난하며 로마에서 떠날 것을 촉구
제2 연설: 로마 시민들에게 카틸리나의 음모를 경고하고 그의 추종자들을 비난
제3 연설: 카틸리나의 동료들이 체포된 후, 원로원에게 그들의 처벌에 대한 결정을 촉구
제4 연설: 원로원에서 카틸리나 공모자들의 처벌에 대한 논쟁을 벌임.
중요성
역사적 중요성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적 격변기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
문학적 중요성키케로의 뛰어난 웅변술과 문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기타
관련 인물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추가 정보
인용구"오, 시대여! 오, 풍습이여!" (O tempora! O mores!)

2. 배경

카틸리나의 음모는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영어로는 카탈린)가 로마 공화정을 전복하려 한 사건이다. 카틸리나는 기원전 65년, 기원전 63년, 기원전 62년 선거에서 집정관에 세 번이나 낙선한 후, 기원전 63년에 이 음모를 꾸몄다.[2]

이 음모에는 여러 불만을 가진 집단이 참여했다. 귀족들은 주로 고위 관직 선거에서 실패했거나 파산한 사람들이었다.[2] 이들은 에트루리아를 중심으로 불만에 찬 이탈리아 농민들과 합류했다. 농민들은 술라의 숙청이나 식민화 정책으로 토지를 빼앗겼거나, 흉작으로 빚에 시달리던 술라의 퇴역 군인들이었다.[2]

기원전 63년 가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10월 18일 또는 19일에 받은 편지를 통해 음모의 첫 조짐이 나타났다.[2] 크라수스의 편지는 무장한 사람들이 음모를 지원하기 위해 모였다는 보고로 이어졌다.[2] 원로원은 tumultusla(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집정관들에게 위기 대응을 위한 모든 조치를 지시하는 senatus consultum ultimumla를 통과시켰다.[2] 10월 27일, 원로원은 전직 백부장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파에술라에 근처에서 무기를 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2]

카틸리나는 도시에 머물렀지만, 익명 편지에 크라수스의 이름이 언급된 것만으로는 기소하기 어려웠다.[2] 그러나 에트루리아에서 온 메시지가 카틸리나를 봉기에 직접 연관시키자, 11월 초 lex Plautia de vila(공공 폭력)에 따라 기소되었다.[2] 음모자들은 11월 6일에 만나 키케로 암살을 시도할 두 명의 자원자를 찾았다. 기원전 63년 11월 7일, 키케로 암살 시도가 실패한 후, 키케로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카틸리나의 음모를 폭로했다. 카틸리나는 즉시 도시를 떠나 에트루리아에서 만리우스의 부하들과 합류했다.[2]

2. 1. 당시 로마의 정치 상황

카틸리나파트리키(귀족) 출신으로,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독재 시절부터 정치 경력을 쌓았다. 기원전 68년에는 프라이토르(법무관)으로 선출되었다.[2] 이후 집정관 지위를 목표로 선거에 출마하려는 의욕을 보였다. 그러나 기원전 66년기원전 65년 선거에서는 속주 담당 시절의 부정행위가 고발되어 입후보를 포기해야 했다.[2]

기원전 64년 선거에 드디어 입후보 자격이 인정되었으나, 2명의 집정관 자리를 두고 7명이 경쟁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키케로의 방해 공작(네거티브 캠페인)까지 겹쳐 낙선했다. 이 해에 당선된 사람은 키케로와 가이우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였다.[2]

기원전 63년에 다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한 카틸리나는 빈곤층을 끌어들이기 위해 '빚 탕감'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선거를 주재하던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급진적인 정책과 무력 봉기 가능성을 폭로하며 견제했고, 결국 카틸리나는 또다시 낙선했다. 이러한 일련의 선거 활동으로 카틸리나는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다. 정치적, 경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카틸리나는 무력을 통한 쿠데타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2]

하지만 카틸리나의 쿠데타 계획은 허술했고, 키케로는 풀비아라는 여성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키케로가 정보를 날조했을 가능성도 제기한다.[2]

2. 2. 카틸리나의 음모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는 빚 탕감 등 급진적인 정책으로 빈민층을 선동하고, 불만을 품은 귀족, 몰락한 농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의 퇴역 군인 등을 규합하여 무력 쿠데타를 계획했다.[10]

키케로는 풀비아라는 여성을 통해 카틸리나의 계획을 입수했다고 주장했으나,[2] 일부 학자들은 키케로가 증거를 조작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키케로는 원로원에 카틸리나의 위험성을 알리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이끌어내 비상 대권을 확보했다.

카틸리나는 키케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로마를 탈출하여 에트루리아에서 반란군에 합류했다.[2]

3. 키케로의 연설

키케로는 총 4차례의 연설을 통해 카틸리나의 음모를 규탄하고, 로마 시민들에게 그 위험성을 알리며, 카틸리나와 그 일파에 대한 엄벌을 촉구했다.[11]


  • '''제1 연설''':기원전 63년 11월 8일, 원로원 의회
  • '''제2 연설''':기원전 63년 11월 9일, 시민 집회[8]
  • '''제3 연설''':기원전 63년 12월 3일, 시민 집회
  • '''제4 연설''':기원전 63년 12월 5일, 원로원 의회


키케로는 연설에서 카틸리나의 뻔뻔함과 로마의 위기를 강렬하게 드러냈으며, 특히 첫 연설의 "카틸리나여, 그대는 얼마나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할 것인가?"[4]라는 문장과 "오 이 시대여! 오 이 도덕들이여!"라는 유명한 절규는 오늘날까지도 널리 알려져 있다.[5]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로마를 떠나 반군에 가담했음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공모자들의 다양한 구성(빚을 진 부자, 부와 권력을 갈망하는 자들, 술라 장군의 정예 병사들, 변화를 희망하며 파괴된 자들, 범죄자, 난봉꾼, 카틸리나 일가의 사람들)을 설명하며 시민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또한 카틸리나 공모자들의 자백을 증거로 제시하고, 로마가 구원받았음을 강조하며 자신의 공적을 내세웠다.

마지막 연설에서 키케로는 원로원에서 카틸리나 일당에 대한 사형의 정당성을 주장했고, 소(小)카토의 지지를 얻어 사형안을 통과시켰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형을 주장했지만, 키케로는 국가 반역자들에게는 시민권이 없으므로 사형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6]

3. 1. 제1차 카틸리나 탄핵 (기원전 63년 11월 8일, 원로원)

Oratio in Catilinam Prima in Senatu Habitala (제1차 카틸리나 탄핵)은 기원전 63년 11월 8일, 키케로가 유피테르 스타토르 신전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를 직접 공격하며 그의 음모를 폭로한 연설이다. 키케로는 "카틸리나여, 그대는 얼마나 우리의 인내력을 시험할 것인가?"[4]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연설을 시작하여 카틸리나의 뻔뻔함과 로마의 위기를 강렬하게 드러냈다.[5]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로마를 떠날 것을 요구하며, 그의 유죄를 확신시키고 원로원의 지지를 얻어내고자 했다. 그는 카틸리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하며 그의 행동을 비판했다.

  • "카틸리나, 당신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이요? 우리는 큰 죄악과 배반(음모)를 느낄 수 있소."
  • "오 이 시대여! 오 이 도덕들이여! 원로원은 이것들을 깨닫고 있고, 집정관도 다 알고 있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살아 있소."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원로원에 참석하고, 심지어 계획을 실행하려 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며, 원로원과 집정관이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카틸리나에게 로마를 떠나 친구들과 함께 갈 것을 요구하며, 그의 계획을 용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3]

카틸리나는 키케로의 연설에 반박하려 했으나, 원로원 의원들은 그를 반역자라 부르며 저지했다. 카틸리나는 원로원에 대한 험담을 하며 신전을 뛰쳐나왔고, 이후 로마 시를 빠져나가 반군 지도자인 만리우스의 캠프에 합류했다.[9]

이 연설은 카틸리나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었으며, 원로원 연설의 틀 안에 담겨 있었다. 학자들은 이 연설을 법정 수사학(사법 또는 기소)의 장르로 볼 것인지, 아니면 원로원 수사학(심의)의 장르로 볼 것인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키케로는 카틸리나의 유죄를 확신시키고 원로원의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로 연설을 진행했다.

키케로는 카틸리나가 좋지 않은 평판 때문에 로마에서 어떤 일도 붙잡혀 있지 않다고 주장하며, 이어서 비난을 퍼부으며 카틸리나를 간접적으로 다양한 성범죄, 임박한 파산, 그리고 과거 국가에 대한 음모를 저질렀다고 비난했다.

키케로 – 라틴어로 된 카틸리나에 대한 첫 번째 연설

3. 2. 제2차 카틸리나 탄핵 (기원전 63년 11월 9일, 시민 광장)

키케로는 로마 시민들에게 카틸리나가 망명이 아니라 불법 군대와 합류하기 위해 도시를 떠났다고 알렸다.[8] 그는 카틸리나의 지지 세력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유형설명
빚더미에 앉은 부유한 자들빚을 졌지만 재산을 가진 사람들
권력과 부를 갈망하는 자들더 많은 권력과 재산을 원하는 사람들
술라의 퇴역 군인들술라의 군대에서 복무했던 퇴역 군인들
몰락한 자들어떤 변화라도 바라며 현 상황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범죄자들범죄 경력이 있는 사람들
방탕한 자들방탕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카틸리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카틸리나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키케로는 콘술로서 자신과 신들이 국가를 보호할 것이기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확신시켰다.[8] 이 연설은 평민들에게 카틸리나가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을 것이며 그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 전달되었다.

그동안 카틸리나는 반군 부대의 사령관인 가이우스 만리우스와 합류했다. 원로원이 이 상황을 보고받자, 그들 둘을 공공의 적으로 선포했다. 안토니우스 히브리다(키케로의 동료 집정관)는 로마에 충성하는 군대를 이끌고 카틸리나를 뒤쫓았고, 키케로는 도시를 지키기 위해 집에 남았다.

3. 3. 제3차 카틸리나 탄핵 (기원전 63년 12월 3일, 시민 광장)

'''제3차 카틸리나 반박문'''(Oratio in Catilinam Tertia ad Populumla)에서 키케로카틸리나 일당의 음모가 로마 시내에서 발각되어 체포되었음을 알리고, 시민들에게 쿠데타가 미연에 방지되었음을 보고했다. 키케로는 카틸리나 공모자들의 자백을 증거로 제시하며, 이 사건을 통해 로마가 구원받았음을 강조하고 자신의 공적을 내세웠다. 또한 적이 이민족이 아닌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더욱 어려운 전투였음을 시인했다.[3]

키케로는 연설 서두에서 "'''로마 시민 여러분, 오늘 국가는 구원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다.[8]

3. 4. 제4차 카틸리나 탄핵 (기원전 63년 12월 5일, 원로원)

키케로는 콩코르디아 신전에서 열린 원로원 회의에서 카틸리나 일당에 대한 처벌 문제를 논의하며 사형의 정당성을 주장했다.[11]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종신형을 주장하며 사형에 반대했지만, 키케로는 국가 반역자들에게는 시민권이 없으므로 사형이 가능하다고 반박했다.[6] 소 카토의 지지에 힘입어 키케로는 사형안을 통과시켰고, 체포된 카틸리나 일당은 즉시 처형되었다.[7]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공식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수 없었지만, 교묘한 웅변으로 이 규칙을 우회했다. 그는 차기 집정관 데키무스 유니우스 실라누스의 사형 제안과 카이사르가 제시한 종신형을 비교하며,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는 사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국가에 반역을 꾀한 자들은 더 이상 로마 시민이 아니므로, 로마 시민의 사형에 대한 법적 권한이 민회에만 있다는 원칙은 적용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호민관이었던 소 카토는 키케로의 의견을 지지했고, 결국 원로원은 사형안을 채택했다. 체포된 카틸리나 일당은 즉시 교살형에 처해졌다.

4. 카틸리나의 최후와 그 이후

카틸리나는 로마를 탈출하여 에트루리아에서 반란군을 이끌었으나, 기원전 62년 1월 피스토리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2] 그는 패전이 확실시 되자 로마 병사들에게 돌진하여 전사했다.

키케로는 카틸리나 음모 사건을 진압한 공로를 인정받았으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카틸리나 일당을 처형한 것에 대해 비판받았다. 쿠데타 주모자들에 대한 사형 판결은 강압적이며, 시민의 생명과 관련된 판결은 민회의 법적 권한 아래 실시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반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키케로는 정적들에 의해 로마에서 추방되어 국외로 망명해야 했다.

5. 역사적 의의 및 평가

카틸리나 음모 사건과 키케로의 연설은 로마 공화정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건이다. 키케로는 이 사건을 통해 공화정의 수호자로서의 이미지를 확립하고, 뛰어난 웅변가로서의 명성을 얻었다.[7] 특히 첫 번째 카틸리나 탄핵 연설은 라틴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연설로 손꼽히며, "아, 시대여, 아, 풍속이여!"와 같은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3][5]

포지오 브라치올리니가 작성한 필사본에 있는 네 번째 카틸리나 연설의 끝부분. 피렌체, 메디치 라우렌치아나 도서관, Plut. 48,22, fol. 121r.


마지막 '''제4차 카틸리나 반박문'''(Oratio in Catilinam Quartum in Senatu Habitala)에서 키케로는 반역자 처단에 관한 연설의 기초를 확립했다.[6] 원로원 집정관으로서 키케로는 의견 표출이 금지되었지만, 교묘한 연설로 이를 빠져나왔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귀양과 시민권 박탈을 주장했지만, 키케로와 카토의 노력으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키케로가 지방 출신 신인(novus homo)이라는 점 때문에 자기 과시욕이 있었고, 카틸리나의 위협을 과장하고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이 사건을 이용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11][7]

카틸리나의 음모는 귀족 원로원 의원 루키우스 세르기우스 카틸리나가 로마 공화정을 전복하려는 음모였다. 그는 기원전 65년, 63년, 62년 선거에서 집정관에 세 번이나 실패한 후, 기원전 63년에 이 음모를 시작했다. 음모에는 술라의 숙청이나 식민화 프로그램으로 인해 토지를 빼앗긴 농민들과, 흉작 이후 빚에 시달리던 술라의 토지를 가진 퇴역 군인들, 고위 관직 선거에서 실패했거나 파산한 귀족들등 여러 불만을 가진 집단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에트루리아에 집중되어 있었다.

기원전 63년 가을,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음모를 지원하기 위해 무장한 사람들이 모였다는 보고서를 받았다. 이에 원로원은 비상사태(tumultusla)를 선포하고, 집정관들에게 위기 대응을 지시하는 원로원 최종 결의(senatus consultum ultimum)를 통과시켰다. 10월 27일에는 가이우스 만리우스가 파에술라에 근처에서 무기를 들었다는 보고를 받았다.

카틸리나는 도시에 머물렀으나, 에트루리아에서 온 메시지가 그를 봉기에 직접 연관시키자 11월 초 공공 폭력(lex Plautia de vila)에 따라 기소되었다. 11월 6일, 음모자들은 키케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키케로는 원로원을 소집하여 첫 번째 카틸리나 연설을 했고, 카틸리나는 도시를 떠나 만리우스의 부하들과 합류했다.

이때 키케로는 현직 법무관 중 한 명이 알로브로게스라는 갈리아 부족을 카틸리나 지원에 끌어들이려던 음모를 발견했다. 키케로는 알로브로게스 사절을 이중 스파이로 활용하여 도시 내 음모자들을 확인하고, 12월 2일 또는 3일에 5명의 음모자들을 체포했다. 갈리아 사절과 5명의 자백으로 유죄가 확실해졌고, 12월 5일 원로원은 키케로에게 이들을 즉결 처형하도록 권고했다. 카틸리나 군대는 흩어졌고, 카틸리나는 기원전 62년 1월 초 피스토리아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2]

집정관 임기가 끝날 무렵, 키케로의 고별 연설은 두 명의 호민관에 의해 거부되었다.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 네포스는 키케로가 재판 없이 시민을 처형한 혐의로 고발하려 했다. 키케로는 법적 공격을 받았으나, 자신의 평판을 강화하고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집정관 연설을 출판했다. 카틸리나 연설은 기원전 60년에 약간의 편집을 거쳐 출판되었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는 카틸리나 음모 사건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한 경고로 해석될 수 있다.

참조

[1] 논문 Sallust and Catiline
[2] 논문 The last journey of L Sergius Catilina https://www.jstor.or[...] 1963
[3] 논문 Painting Cariline into a Corner: Form and Content in Cicero's in Catilinam 1.1 https://www.academia[...] 2022-10-10
[4] 서적 The Orations of Marcus Tullius Cicero https://www.perseus.[...] 2015-08-28
[5] 문서 Translations of ''O tempora, o mores!'' vary. Yonge translates it as "Shame on the age and on its principles!"; Blakiston instead has "Alas! What degenerate days are these!".
[6] 웹사이트 Cic. Att. 2.1 http://www.perseus.t[...]
[7] 간행물 Robert W. Cape, Jr.: "The rhetoric of politics in Cicero's fourth Catilinarian",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1995
[8] 문서 ローマ市民等に国政等に関する重要情報を広く伝えることを目的として開催される集会。今回はカティリナ一派の陰謀に関する報告を目的として開催された。
[9] 문서 当時、ローマ市からの追放はローマ市民が死刑を逃れるための唯一の手段であった。ただし、当時のローマにおいて、執政官も元老院議員も市民を処刑したりローマ市外から追放する法的権限はなく、ローマ市民で構成される「[[民会 (ローマ)|民会]]」の票決で決定された点に留意する必要がある。
[10] 문서 Dio Cassius XXXVII.29.1
[11] 간행물 Robert W. Cape jr.: The rhetoric of politics in Cicero's fourth Catilinarian, American Journal of Philology,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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