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디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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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캔디즈는 이토 란, 후지무라 미키, 다나카 요시코 3인조로 구성된 일본의 아이돌 그룹이다. 1972년 NHK의 프로그램에서 마스코트 걸로 데뷔하여, 1973년 싱글 "당신에게 푹 빠져"로 정식 데뷔했다. "연하의 남자아이", "봄이 제일" 등의 히트곡으로 인기를 얻었으며, 1977년 히비야 야외 음악당 콘서트에서 갑작스러운 해산을 발표하여, 1978년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파이널 콘서트를 끝으로 해산했다. 캔디즈는 일본 최초의 전국 조직형 팬클럽을 가진 아이돌로, 1970년대 아이돌 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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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디즈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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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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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자 표기 | Kyandīzu |
구성원 | 이토 란(란) 후지무라 미키(미키) 다나카 요시코(스) |
활동 기간 | 1973년 – 1978년 |
장르 | 가요곡 틴 팝 |
레이블 | CBS 소니 |
웹사이트 | Sony Music/candies |
이전 구성원 |
2. 멤버
이름 | 애칭 | 생년월일 | 포지션 | 멤버 컬러 |
---|---|---|---|---|
이토 란 | 란 | 1955년 1월 13일 | 가운데 | 빨강 |
후지무라 미키 | 미키 | 1956년 1월 15일 | 왼쪽 | 노랑 |
다나카 요시코 | 수 | 1956년 4월 8일 ~ 2011년 4월 21일 | 오른쪽 | 파랑 |
2. 1. 이토 란 (伊藤蘭)
伊藤蘭|이토 란일본어 (애칭은 '''란''', 1955년 1월 13일 ~ )은 일본의 배우이자 가수이다. 캔디즈의 멤버였으며, 센터 포지션과 메인 보컬(주로)을 담당했다. 멤버 컬러는 빨강이었다.[2] 1978년 캔디즈 해체 후 연예계에서 은퇴했다가 배우로 복귀했으며, 2019년에는 솔로 가수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2. 2. 후지무라 미키 (藤村美樹)
藤村美樹|후지무라 미키일본어는 1956년 1월 15일에 태어났으며, 애칭은 '미키'이다. 캔디즈에서 왼쪽 포지션을 맡았으며, 멤버 컬러는 노랑이었다.미키는 캔디즈 해체 후 다시 노래를 불렀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2]
2. 3. 다나카 요시코 (田中好子)
田中好子|다나카 요시코일본어(애칭은 '''수''')는 1956년 4월 8일에 태어나 2011년 4월 21일 유방암으로 사망했다.[2] 캔디즈에서 오른쪽 위치를 맡았으며, 멤버 컬러는 파랑이었다.3. 역사
캔디즈는 연하의 남자아이, 봄맞이, 여름이 왔어!, 상냥한 악마 등 8곡을 톱 10에 진입시키며 핑크 레이디와 함께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으로 활동했다.
1977년,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가고 싶다"普通の女の子に戻りたい|후쓰우노 온나노코니 모도리타이일본어라는 유명한 문구를 남기며 음악계를 떠났다. 1978년 4월 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마지막 콘서트를 열었다.[2]
연예계 은퇴 후, 이토 란과 스에는 배우로 복귀했다. 미키는 다시 노래를 불렀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2]
2008년, 캔디즈 재결합 투어가 계획되었으나 스에의 연기 스케줄과 미키가 가족을 위해 대중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 무산되었다. 대신 기념 앨범을 발매했다.
스에는 2011년 4월 유방암으로 사망했다.[2] 란과 미키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했다.
2011년, ''뮤직 스테이션''은 캔디즈를 역대 아이돌 톱 50 중 32위로 선정했으며, 판매량은 500만 장을 넘었다.[3]
2019년, 란은 솔로 가수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3. 1. 데뷔 이전 (1972년 이전)
이토 란, 다나카 요시코, 후지무라 미키 세 멤버는 모두 도쿄 음악 학원 출신으로 스쿨 메이츠 멤버였다.[19] 1972년 4월 NHK 프로그램 『가요 그랜드 쇼』의 마스코트 걸로 발탁되며 '캔디즈'라는 그룹명을 얻게 되었다.[19]3. 2. 데뷔와 초기 활동 (1973년 ~ 1974년)
キャンディーズ일본어는 1973년 9월 1일 〈당신에게 푹 빠져〉로 데뷔했다.[19] 당시에는 수(다나카 요시코)가 메인 보컬을 담당했다. 1973년 4월 7일부터 TBS 《8시! 모두 집합》에 어시스턴트로 레귤러 출연했다.[19] 1974년 3월에는 히로시마 나탈리에서 CM에 처음 출연했고,[20] 같은 해 3월 17일에는 요요기 야마노 홀에서 첫 콘서트를 개최하여 800명을 동원했다.3. 3. 인기 상승과 전성기 (1975년 ~ 1977년)
캔디즈는 연하의 남자아이, 봄맞이, 여름이 왔어!, 상냥한 악마, 쇼추 오미마이 모시아게마스, 하나, 둘, 셋, 덫, 미소 돌려주기 등 8곡이 톱 10에 진입했다. 핑크 레이디와 함께 197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아이돌 그룹이었다.[2]1975년 2월 21일에 발매된 5번째 싱글 연하의 남자아이는 9위를 기록하며 처음으로 톱10에 진입했다. 이후, 봄이 가장 먼저(3위), 상냥한 악마(4위), 더운 날씨 문안 인사드립니다(5위)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발표하며 톱 아이돌로 자리매김했다.
발매 순서 | 발매일 | 제목 | 최고 순위 | 규격 품번 | 첫 수록 앨범 |
---|---|---|---|---|---|
5 | 1975년 2월 21일 | 연하의 남자아이 | 9 | SOLB-220 | 연하의 남자아이 |
6 | 1975년 6월 1일 | 수줍은 녀석 | 18 | SOLB-274 | |
7 | 1975년 9월 1일 | 그렇게 만들지 마 | 17 | SOLB-310 | 그렇게 만들지 마 |
8 | 1975년 12월 5일 | 하트의 에이스가 나오지 않아 | 11 | SOLB-348 | 봄이 가장 먼저 |
9 | 1976년 3월 1일 | 봄이 가장 먼저 | 3 | SOLB-388 | |
10 | 1976년 5월 31일 | 여름이 왔다! | 5 | 06SH-12 | 여름이 왔다! |
11 | 1976년 9월 1일 | 하트 도둑 | 17 | 06SH-54 | |
12 | 1976년 11월 21일 | 애수의 심포니 | 12 | 06SH-92 | 캔디즈 1 1/2 ~상냥한 악마~ |
13 | 1977년 3월 1일 | 상냥한 악마 | 4 | 06SH-128 | |
14 | 1977년 6월 21일 | 더운 날씨 문안 인사드립니다 | 5 | 06SH-163 | 캔디 레이블 |
15 | 1977년 9월 21일 | 앙・두・트와 | 7 | 06SH-204 | CANDIES 1676 DAYS ~캔디즈 1676일~ |
16 | 1977년 12월 5일 | 덫 | 3 | 06SH-245 | CANDIES FINAL CARNIVAL Plus One |
17 | 1978년 2월 25일 | 미소가에시 | 1 | 06SH-263 |
3. 4. 돌연 해산 선언과 마지막 활동 (1977년 ~ 1978년)
1977년 7월 17일,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열린 콘서트에서 캔디즈는 "평범한 여자아이로 돌아가고 싶다"普通の女の子に戻りたい|후쓰우노 온나노코니 모도리타이일본어는 유명한 말을 남기며 해산을 선언했다.[2] 해산 발표 이후 캔디즈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고, 마지막 싱글인 미소가에시는 오리콘 차트 1위를 기록했다.1978년 4월 4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5만 5천 명의 관객을 동원한 대규모 파이널 콘서트를 열고 캔디즈는 해산했다.[2]
3. 5. 해산 이후 (1978년 ~ 현재)
연예계를 떠난 지 몇 년 후, 란과 스에는 배우로 복귀했다. 미키는 다시 노래를 불렀지만 결혼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은퇴했다.[2]2008년, 캔디즈 데뷔 35주년과 대규모 고별 콘서트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캔디즈 재결합 투어를 계획했으나, 스에의 연기 스케줄과 미키가 가족을 위해 대중 앞에 나서기를 원치 않아 무산되었다. 대신 세 사람은 사진과 에세이를 기고하여 기념 "타임 캡슐"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지만, 제작 과정에서는 만나지 않았다.
스에는 2011년 4월 유방암으로 사망했다.[2] 란과 미키는 그녀의 장례식에서 조사를 낭독했다. 스에는 또한 자신의 마지막 생각을 녹음으로 남겼는데, 이 녹음(그리고 미키의 조사)에서 세 멤버는 다시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항상 다시 공연하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11년, 일본 음악 프로그램 ''뮤직 스테이션''은 판매량을 기준으로 캔디즈를 역대 아이돌 톱 50에 선정했다. 캔디즈는 32위에 올랐으며, 판매량은 500만 장을 넘어섰다.[3]
2019년, 란은 솔로 가수로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 해산 후에는 한 번도 재결성을 하지 않았지만,[16] 사적으로는 종종 3명이 모였다고 한다.
- 란은 1980년에 연예계에 복귀했다. 배우·가수인 미즈타니 유타카와 1989년에 결혼하여 1명의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실제 딸이자 배우인 슈리는 두 사람의 장녀이다). 부활 후에는 주로 배우로 활동했다. 또한 2019년에는 앨범 『My Bouquet』을 릴리스하여 캔디즈 해산 이후 41년 만에 솔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싱글 곡, 앨범, DVD 등을 발매했으며, 솔로 콘서트도 개최하고 있다. 2023년 제74회 NHK 홍백가합전에 46년 만에 출연하여 캔디즈 시절의 3곡("연하의 남자", "하트 에이스가 나오지 않아", "봄이 제일")을 선보였다.[17] 회장에는 150명이 넘는 팬들이 모여 콜과 종이 테이프 던지기도 행해졌다.[18][17]
- 수는 1980년에 복귀 후, 주로 여배우로 활동했다. 그동안 잠시 솔로 가수로 음악 활동도 하여 싱글 "카보샤르" 등을 릴리스했다. 1991년에 결혼(남편은 나츠메 마사코의 오빠)했으며, 아이는 없었다. 2011년 4월 21일에 유방암으로 55세로 사망했으며, 마지막은 란과 미키 두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 미키는 1983년에 솔로 가수로 기간 한정으로 복귀, 가네보 봄 캠페인 송 "꿈·사랑·사람"(싱글, 앨범 모두 동일)을 발표했다. 같은 해 2월 10일에 TBS 텔레비전 『더 베스트 텐』의 "이번 주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했고, 3월 14일에는 닛폰 텔레비전 『더 톱 텐』의 이번 주 화제곡 코너에 출연, 4월 4일에 10위에 랭크인했다. 1983년에 실업가와 결혼한 것을 계기로 연예계를 은퇴, 3명의 아이의 어머니가 되었다(배우 오미 미코토는 친딸이다). 연예계 은퇴 후에는 무대에 나서지 않았지만, 2011년 4월에 수의 장례식에 참석, 28년 만에 공석에 모습을 드러냈다.
4. 음악 스타일 및 특징
캔디즈는 다양한 음반을 발매하며 다채로운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다. 1974년 11월 1일 '캔디즈 히트 전곡집 -1974년판-'을 발매했는데, SQ4CH 방식으로 녹음되었으며 기존 발매 버전과 다른 보컬 테이크를 수록했다.[1] 1975년 6월 1일에는 '캔디즈 디럭스'를 발매, 「연하의 남자아이」를 포함한 2매 세트로 구성했다.[2]
이후 캔디즈는 매년 히트 전곡집을 발매하며 새로운 곡들을 추가했다. 1975년 11월 1일 '캔디즈 히트 전곡집 -1975년판-'을 통해 「그렇게 만들지 말아줘」, 「내성적인 녀석」을,[3] 1976년 6월 1일 'Best of Best 캔디즈의 모든 것'을 통해 「봄날 제일」, 「하트 에이스가 나오지 않아」를 수록한 2매 세트를,[4] 1976년 11월 1일 '캔디즈 히트 전곡집 -1976년판-'을 통해 「하트 도둑」, 「여름이 왔다!」를 선보였다.[5]
1977년 6월 1일 '결정반 캔디즈'를 발매, 「상냥한 악마」, 「애수의 심포니」를 포함한 2매 세트로 대표곡들을 담았다.[6] 11월 1일에는 'THE BEST / CANDIES' SHOP'을 발매, 「앙, 두, 트로와」, 「더운 날씨 문안 인사 드립니다」를 수록하고 포스터가 덮인 특별한 재킷을 선보였다.[7] 1978년 6월 1일에는 해산 직후 'THE BEST / 미소가에시'를 2매 세트로 발매했다.[8]
이후에도 캔디즈의 베스트 앨범은 1978년부터 1982년까지 매년 발매되며, 캔디즈의 다양한 음악적 색깔을 보여주었다.[9] [10] [11] [12] [13]
5. 대표곡
미발표곡 「안개의 이별」(「애수의 심포니」의 초기 버전)을 수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