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스 클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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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네스 클라크는 20세기 영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졸업하고 30세에 내셔널 갤러리 관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 미술 교수, 영국예술협의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주요 저서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술과 문명』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전쟁 예술가 자문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69년에는 남작 작위를 받았다. BBC의 "문명" 시리즈를 통해 대중에게 서유럽 문명을 소개하며 텔레비전 예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명성을 얻었고, 말년에는 요크 대학교 총장과 대영 박물관 이사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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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클라크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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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칭 접두사 | 각하 |
이름 | 케네스 맥켄지 클라크 |
작위 | 클라크 남작 |
존칭 접미사 | 메리트 훈장 컴패니언 오브 아너 훈장 대영 제국 훈장 영국 학술원 회원 |
출생일 | 1903년 7월 13일 |
출생지 | 잉글랜드 런던 메이페어 |
사망일 | 1983년 5월 21일 |
사망지 | 잉글랜드 켄트주 하이스 |
학력 | 트리니티 칼리지 (옥스퍼드 대학교) |
직업 | 작가 방송인 미술사가 |
결혼 및 가족 | |
배우자 | 엘리자베스 위니프레드 "제인" 마틴 (1927년–1976년, 사별) 놀웬 드 장제-라이스 (1977년–1983년) |
자녀 | 앨런 포함 3명 콜린 |
기타 | |
활동 시기 | 1918년경 |
2. 생애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애쉬몰린 미술관 미술부 부장을 역임했다. 1933년, 30세의 나이로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 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이다.[19]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전쟁 예술가 자문위원회(WAAC)를 설립하고 클라크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클라크는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많은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잃은 상황을 해결하고자, 상당수의 예술가를 공식적인 전쟁 예술가로 고용하도록 영국 정부를 설득했다.[118]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 퇴임하고, 1954년 독립 텔레비전 공사 회장에 취임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연구가 전문이었지만, 텔레비전을 통한 미술 계몽 활동으로도 유명하며,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69년에는 켄트주 솔트우드의 클라크 남작 작위를 받아 상원 의원이 되었다.
2. 1. 초기 생애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서른 살에 내셔널 갤러리 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후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미술 교수로 활동했다.
클라크는 런던 그로스베너 스퀘어 32번지에서 태어났다. 그는 케네스 맥켄지 클라크(1868–1932)와 그의 아내인 맨체스터 출신 제임스 맥아서의 딸인 (마가렛) 앨리스의 외동아이였다.[1] 클라크 가문은 섬유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스코틀랜드 가문이었다. 클라크의 증조부는 목면 감개를 발명했고, 클라크 실 회사는 페슬리에서 상당한 규모의 사업으로 성장했다.[2] 케네스 클라크(고)는 잠시 회사 이사로 일하다가 20대 중반에 은퇴하여 클라크(자)가 나중에 말한 대로 "빈둥거리는 부자"가 되었다. 비록 "더 부유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보다 더 게으른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그는 회상했다.[2][3] 클라크 가족은 서퍽 주의 수드번 홀과 아가일주의 아드남어칸에 시골 저택을 두고 겨울에는 프랑스 리비에라에서 보냈다.[1][4] 케네스(고)는 스포츠맨이자 도박꾼이었고, 기인이자 술고래였다.[1][6] 클라크는 아버지와 공통점이 거의 없었지만, 항상 아버지를 좋아했다. 앨리스 클라크는 수줍고 차가웠지만, 그의 아들은 헌신적인 유모에게서 애정을 받았다.[7] 부모와 특별히 가깝지 않은 외동아이였던 어린 클라크는 종종 고독한 소년 시절을 보냈지만, 일반적으로 행복했다. 그는 나중에 자신과 이야기하며 긴 산책을 하곤 했는데, 이 습관이 방송인으로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회상했다. "텔레비전은 일종의 독백이다".[8] 소규모였지만 케네스 클라크(고)는 그림을 수집했고, 어린 케네스는 그 수집품을 재배열할 수 있었다. 그는 그림 그리는 재능을 발전시켰고, 나중에 학생 시절 여러 상을 수상했다.[9] 일곱 살 때 그는 런던에서 열린 일본 미술 전시회에 데려가졌는데, 이는 그의 예술적 취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말문이 막힐 정도로 기뻐서 새로운 세상에 들어온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10][11]

클라크는 윅센포드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고, 1917년부터 1922년까지 윈체스터 칼리지에 다녔다. 윈체스터 칼리지는 지적인 엄격함과 – 클라크가 실망한 – 스포츠에 대한 열정으로 유명했지만, 학생들이 예술에 대한 관심을 발전시키도록 장려하기도 했다.[12] 교장인 몽태규 렌달은 이탈리아 회화와 조각의 애호가였고, 클라크에게 조토, 보티첼리, 벨리니와 그들의 동료들의 작품을 감상하도록 영감을 주었다.[13] 학교 도서관에는 존 러스킨의 저서가 전부 수록되어 있었고, 클라크는 열심히 읽었으며, 그의 예술적 판단뿐만 아니라 진보적인 정치적, 사회적 신념에도 평생 영향을 미쳤다.[14]
윈체스터를 졸업한 클라크는 옥스퍼드 트리니티 칼리지 장학금을 받아 근대사를 공부했다. 그는 1925년 2등급 우등으로 졸업했다. ''옥스퍼드 국립전기사전''에서 데이비드 파이퍼 경은 클라크가 1등급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었지만, 역사 연구에 전념하지 않았다고 언급했다. "그의 관심은 이미 예술 연구로 완전히 돌아섰다".[1]
옥스퍼드에 있을 때 클라크는 영국에서 최초의 후기 인상주의 전시회를 개최한 영향력 있는 미술 평론가인 로저 프라이의 강의에 큰 감명을 받았다. 프라이의 영향 아래 그는 현대 프랑스 회화, 특히 세잔의 작품에 대한 이해를 발전시켰다.[16] 클라크는 애슈몰린 박물관 미술부장인 찰스 F. 벨(1871–1966)의 눈에 띄었다. 벨은 그의 멘토가 되었고, 그의 B Litt 논문으로 건축에서 고딕 리바이벌에 대해 쓰는 것을 제안했다. 당시 그것은 매우 유행에 뒤떨어진 주제였고, 19세기 이후로는 심각한 연구가 출판되지 않았다.[17] 클라크의 주요 연구 분야는 르네상스였지만, 신고딕 양식의 가장 저명한 옹호자인 러스킨에 대한 그의 존경심이 그를 이 주제로 이끌었다. 그는 논문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연구를 첫 장편 서적 ''고딕 리바이벌''(1928)로 만들었다.[1] 1925년 벨은 클라크를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영향력 있는 학자이자 주요 박물관과 수집가의 자문이었던 버나드 베렌손에게 소개했다. 베렌손은 그의 책 ''피렌체 화가들의 그림''의 개정 작업을 하고 있었고, 클라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프로젝트는 2년 동안 진행되었고, 옥스퍼드에서의 클라크의 연구와 겹쳤다.[18]
2. 2. 학문적 경력
윈체스터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1931년부터 1933년까지 애슈몰린 미술관 미술부 부장을 역임했다. 1929년, 베렌손과의 작업을 통해 클라크는 윈저 성에 있는 방대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 컬렉션의 목록을 작성하라는 요청을 받았다.[19] 같은 해 그는 1930년 1월 1일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개막한 이탈리아 회화 전시회의 공동 주최자가 되었다. 그와 공동 주최자인 발니엘 경은 이탈리아 외부에서는 전례 없이 볼 수 있었던 걸작들을 확보했는데, 그중 상당수는 개인 소장품이었다.[19] 이 전시회는 "치마부에에서 세간티니"까지, 즉 13세기 중반부터 19세기 후반까지의 이탈리아 미술을 다루었다.[20] 이 전시회는 대중과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았고 클라크의 명성을 높였지만, 그는 많은 인기 그림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준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가 이 전시회에서 얻은 선전 효과를 후회하게 되었다.[21]1933년, 30세의 나이로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 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 있다.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전쟁 예술가 자문위원회(the War Artists' Advisory Committee, WAAC)를 설립하고 클라크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118] 클라크의 노력으로 에드워드 아디조니, 폴 내시, 존 내시, 마빈 피크, 존 파이퍼, 그레이엄 서덜랜드 등 최대 200명의 예술가가 고용되었고, 제이콥 엡스타인, 로라 나이트, 로렌스 스티븐 로리, 헨리 무어, 스탠리 스펜서 등은 단기 계약으로 고용되었다.[118]
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 퇴임하고, 1954년 독립 텔레비전 공사 회장에 취임했다.
2. 3. 내셔널 갤러리 관장
옥스퍼드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하고 서른 살에 내셔널 갤러리 관장에 임명되었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최연소 기록으로 남아 있다.[19] 1931년 벨이 은퇴하자 애쉬몰린 미술관의 미술과장으로 그를 계승하였다. 1933년, 30세의 나이로 내셔널 갤러리 관장이 되었다.2. 4.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전쟁 예술가 자문위원회(the War Artists' Advisory Committee, WAAC)를 설립하고 클라크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자문위원회 설립의 주요 추진자는 클라크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상업 갤러리가 잇따라 문을 닫고 예술가에 대한 사적인 의뢰가 없어지고 미술학교가 교육을 축소하거나 완전히 폐쇄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잃고 수입이 줄어든 것이 그 배경이었다. 클라크는 상당수의 예술가를 공식적인 전쟁 예술가로 고용하도록 영국 정부를 설득했다. 클라크의 노력으로 최대 200명의 예술가가 고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에드워드 아디조니, 폴 내시, 존 내시, 마빈 피크, 존 파이퍼, 그레이엄 서덜랜드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단기 계약으로 고용된 예술가로는 제이콥 엡스타인, 로라 나이트, 로렌스 스티븐 로리, 헨리 무어, 스탠리 스펜서 등이 있었다.[118]2. 5. 전후 활동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 정부는 전쟁 예술가 자문위원회(the War Artists' Advisory Committee, WAAC)를 설립하고 케네스 클라크를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자문위원회 설립의 주요 추진자는 클라크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로 인해 상업 갤러리가 잇따라 문을 닫고 예술가에 대한 사적인 의뢰가 없어지고 미술학교가 교육을 축소하거나 완전히 폐쇄되면서 많은 예술가들이 일자리를 잃고 수입이 줄어든 것이 그 배경이었다. 클라크는 상당수의 예술가를 공식적인 전쟁 예술가로 고용하도록 영국 정부를 설득했다. 클라크의 노력으로 최대 200명의 예술가가 고용되었는데, 여기에는 에드워드 아디조니, 폴 내시, 존 내시, 마빈 피크, 존 파이퍼, 그레이엄 서덜랜드 등이 포함되었다. 또한 제이콥 엡스타인, 로라 나이트, 로렌스 스티븐 로리, 헨리 무어, 스탠리 스펜서 등은 단기 계약으로 고용되었다.[118]1946년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1950년 퇴임하고, 1954년 독립 텔레비전 공사 회장에 취임했다.
2. 6. 《문명 (Civilisation)》
클라크는 1958년 ATV에서 "예술은 필요한가?"라는 첫 시리즈를 시작으로 텔레비전 예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67] 초기에는 텔레비전과 클라크 모두 서로에게 적응하는 과정이었으며, 프로그램은 다소 딱딱하고 스튜디오에 갇힌 듯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클라크와 헨리 무어가 밤에 대영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전시품에 손전등을 비추는 등의 실험적인 시도도 있었다.[68]1959년, 클라크와 제작팀은 "5명의 혁명적 화가" 시리즈를 통해 프로그램 제작 기법을 개선했고, 상당한 시청자를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69] 영국 영화 협회(British Film Institute)는 텔레비전 카메라가 고야, 브뤼헐, 카라바조, 반 고흐, 렘브란트의 작품 사이를 거닐며, 클라크가 명료한 영어로 방대한 지식을 전달하여 시청자들이 화가의 창작물에서 본 것의 본질을 접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흑백 텔레비전 시대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70]

1960년 파블로 피카소에 대한 프로그램을 선보이면서 클라크는 더욱 편안하면서도 권위 있는 발표 기술을 선보였다.[69] 이후 건축에 관한 두 개의 시리즈가 이어졌고, 1966년 ITV와 BBC의 합작으로 제작된 "영국의 왕궁들"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절정에 달했다. 이 프로그램은 "지금까지 영국 텔레비전에서 방영된 가장 중요한 문화유산 프로그램"으로 묘사되었다.[72] "영국의 왕궁들"은 이전 프로그램들과 달리 35mm 컬러 필름으로 촬영되었지만, 방송은 여전히 흑백이었고, 클라크는 이에 대해 불만을 가졌다. BBC는 컬러 방송을 계획하고 있었고, 이 영화를 위해 BBC와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결국 BBC 방송으로 복귀하는 길이 열렸다.[72] 그사이 클라크는 1966년 시리즈인 "프랑스의 세 얼굴"에서 쿠르베, 마네, 드가의 작품을 소개하며 ITV에 남았다.[73]
2. 7. 말년
BBC의 새로운 제2 텔레비전 채널인 BBC2의 책임자였던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영국에 컬러 방송을 도입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는 컬러 텔레비전의 대표적인 프로그램으로서 위대한 그림에 대한 시리즈를 기획했고, 클라크가 그 시리즈의 진행자로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75] 클라크는 그 제안에 매력을 느꼈지만, 처음에는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애튼버러가 시리즈의 내용을 요약하기 위해 "문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 자신이 참여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였다고 회상했다.[76]이 시리즈는 클라크가 집필하고 진행한 13개의 프로그램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프로그램은 50분 분량으로 암흑시대 말엽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유럽 문명을 다루었다. 고려 대상 문명에서 그리스-로마, 아시아 및 기타 역사적으로 중요한 문화를 제외했기 때문에, 포괄성을 부정하는 제목이 선택되었다. 비록 주로 시각 예술과 건축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연극, 문학, 철학 및 사회 정치 운동에 대한 상당한 부분도 포함되어 있었다. 클라크는 법과 철학에 대해 더 많이 포함하고 싶었지만, "시각적으로 흥미롭게 만들 방법을 생각해낼 수 없었습니다."[77]
처음에는 서로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클라크와 그의 주요 감독인 마이클 길은 즐거운 작업 관계를 맺었다. 그들과 제작팀은 1966년부터 3년 동안 13개국 117곳에서 촬영을 진행했다.[78] 당시 최고 수준의 기술 기준으로 촬영되었고, 예산을 초과했다. 완성될 무렵에는 500000GBP가 들었다.[79] 애튼버러는 방송 일정을 조정하여 비용을 분산시켰다.[80]
그 당시와 그 이후에도, 수 세기에 걸쳐 위대한 예술가들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선택함으로써(모두 남성) 여성을 소홀히 했고,[81] "경제적 또는 실용적인 정치적 힘에는 거의 신경 쓰지 않고 고귀한 이름과 숭고한 물건들의 이야기"를 제시했다는 비판이 있었다.[70] 그의 방식은 "위대한 인물 접근법"으로 불렸고,[81] 그는 자신을 화면에서 영웅 숭배자이자 보수적인 사람으로 묘사했다.[82] 그는 자신의 관점이 "눈에 띄는 것도, 독창적인 것도, 19세기 후반의 평범하고 해롭지 않은 부르주아가 썼을 수 없는 것도 없다"고 말했다.[83]

방송인 휴 웰던은 ''문명''이 "진정으로 위대한 시리즈, 주요 작품... TV라는 측면에서 시도되고 실현된 최초의 걸작"이라고 믿었다.[84] 클라크의 선택에 비판적인 일부 사람들을 포함한 비평가들 사이에서는 촬영이 새로운 기준을 설정했다는 널리 퍼진 견해가 있었다. ''문명''은 고급 예술 시리즈로서는 전례 없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영국에서는 250만 명, 미국에서는 500만 명의 시청자를 기록했다.[77] 클라크의 책은 절판된 적이 없으며, BBC는 매년 수천 장의 ''문명'' DVD 세트를 계속 판매하고 있다.[87] 2016년 ''뉴요커''는 존 베트제먼의 말을 인용하며 클라크를 "당신이 본 최고의 텔레비전을 만든 사람"이라고 묘사했다.[88]
영국영화협회(BFI)는 ''문명''이 문화 텔레비전의 형태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엘리스테어 쿡의 ''미국''(1972)과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의 ''인류의 상승''(1973)에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후속 다큐멘터리 시리즈의 기준을 설정했는지 주목한다.[70]
3. 사상과 신념
클라크의 부모는 자유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고, 러스킨의 사회 및 정치적 견해는 젊은 클라크에게 영향을 미쳤다.[106] 메리 비어드는 가디언 기사에서 클라크가 평생 노동당 지지자였다고 썼다.[81] 그의 종교적 관점은 비전통적이었지만, 그는 신을 믿었고, 무신론을 거부했으며, 영국 성공회는 너무 세속적이라고 생각했다.[107] 클라크의 미망인은 남편이 항상 깊은 기독교적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고, 예술 작품을 찾아 교회에 갈 때마다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말했다.[108] 그는 사망 직전 로마 가톨릭교회에 입교했다.[108][109]
4. 유산과 평가
클라크는 1938년 대영 제국 훈장 작위 겸임 기사, 1949년 영국 학술원 회원, 1959년 명예 훈장 수여자, 1969년 종신 남작 (켄트 주 솔트우드 남작), 1974년 문학 동반자, 1976년 공로훈장을 받았다.[111] 해외 영예로는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사령관, 핀란드 사자 훈장 사령관, 오스트리아 공로훈장이 있다.[111]
클라크는 프랑스 국립 박물관 예술 위원회,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 미국 건축가 협회, 스웨덴 아카데미, 산 페르난도 왕립 미술 아카데미, 피렌체 미술 아카데미, 프랑스 아카데미, 프랑스 학사원의 회원 또는 명예 회원이었다.[111] 배스 대학교, 케임브리지 대학교, 글래스고 대학교, 리버풀 대학교, 런던 대학교, 옥스퍼드 대학교, 셰필드 대학교, 워릭 대학교, 요크 대학교, 미국의 컬럼비아 대학교와 브라운 대학교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111] 그는 왕립 영국 건축가 협회와 왕립 예술 대학의 명예 회원이었다.[111] 기타 영예와 수상으로는 영국 학술원 세레나 메달(이탈리아 연구), 뉴욕 대학교 금메달 및 명예 증서, 미국 국립 미술관 메달이 있다.[111]
클라크의 옛 학교인 윈체스터 칼리지는 케네스 클라크 상을 위한 연례 미술사 강연 경연대회를 개최한다. 우승자에게는 동문인 앤서니 스미스(조각가)가 조각한 금색 클라크 경 메달이 수여된다.[112] 런던의 코토드 연구소에는 클라크의 이름을 딴 강당이 있다.[113]
2014년 테이트 미술관은 "케네스 클라크: 문명을 찾아서" 전시회를 개최하여 클라크가 "20세기 영국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서 미친 영향을 조명했다. 이 전시회는 그가 "후원자이자 수집가, 미술사가, 공무원, 방송인으로서… 20세기 미술을 더 많은 대중에게 알린 역할"을 조사했다.[114] BBC는 그를 "20세기 영국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일 것이다"라고 평가했다.[115]
클라크는 자신의 광범위하게 전통적인 미술관에 대한 견해가 예술계의 마르크스주의적 요소들에게는 불쾌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특히 1970년대 존 버거와 같은 젊은 비평가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놀라지 않았다.[77] 21세기 비평가들 사이에서 클라크의 명성은 수집가로서의 일관성보다는 그의 저서와 텔레비전 시리즈에 대해 더 높다. 2014년 테이트 미술관의 클라크 기념 행사 당시, 리처드 도먼트 비평가는 클라크가 공적, 사적으로 많은 훌륭한 구매를 했지만 많은 실수도 저질렀다고 말했다.[16] 다른 비평가들은 클라크의 가장 지속적인 업적은 작가이자 대중화자로서의 역할이라는 결론에 동의했다.
그의 저서 중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예술에 대한 최고의 소개서"가 있다.[16] 재키 울슐라거 비평가는 2014년 클라크가 수집가라기보다는 작가로서 뛰어났다고 썼다. "존 러스킨 이후로 명료성, 박식함, 도덕적 확신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말했다.[116] 제임스 홀은 가디언지에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며 클라크를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 이후 가장 매력적인 미술 작가… 오늘날 대부분의 미술사가들이 변호사나 회계사처럼 즐겁지 않게 글을 쓰는 상황에서 그러한 활력은 절실히 필요하다"라고 불렀다.[117]
5. 주요 저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 예술가로서의 발전의 이야기』 제2판 (마루야마 슈키치(丸山修吉)・오가와치 켄지(大河内賢治) 역, 호세이대학출판국(法政大学出版局), 1981년, 신장판 20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