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루스키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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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케루스키족은 고대 게르만족의 일파로, 로마 제국과 대립하며 독립을 유지하려 했던 민족이다. 기원전 12년 로마의 지배를 받았으나, 아르미니우스를 중심으로 로마 군단을 격파하고 독립을 쟁취했다. 이후 게르마니쿠스의 보복 원정을 겪었으며, 아르미니우스 사후 내분으로 쇠퇴하여 로마에 족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결국 47년 이후 기록이 사라지며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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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루스키족 | |
---|---|
개요 | |
이름 | 케루스키족 |
로마자 표기 | Cherusci |
게르만어족 | *미확인* |
위치 | 현재의 독일 북서부 지역 |
역사 | |
기원 | 기원전 1세기 ~ 기원후 1세기 |
주요 사건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9년): 로마군에 대한 결정적인 승리 이드리스타비소 평원 전투 (16년): 게르마니쿠스의 로마군에 패배 |
지도자 | 아르미니우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영웅 |
문화 | |
사회 |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사회 구조 유지 |
종교 | 게르만족의 전통적인 종교 신앙 |
군사 | 뛰어난 전사로 명성을 떨침 |
기타 | |
현대와의 연결 | 현대 독일의 역사적 뿌리 중 하나로 여겨짐 |
추가 정보 | 고대 로마 문헌에 기록된 중요한 게르만 부족 |
2. 명칭
케루스키족(Cherusci)은 라틴어 이름이다. 라틴어 이름과 그리스어 형태인 ''케루스코이''(Χηροῦσκοι|케루스코이grc)는 다른 방식으로 증명되지 않은 고대 게르만어 민족명의 음역으로 추정되며, 그 어원은 불분명하다. 학계에서는 이 이름이 집단의 토템적 의미를 가졌을 수 있는 *herut|수사슴goh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1]
케루스키족은 게르만족의 일파로, 기원전 1세기와 서기 1세기 무렵 베저강 중부 지역에 살았다.[5]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에 처음 언급되었는데, 카이사르는 기원전 53년에 라인강을 건너 수에비족이 트레베리족에게 지원군을 보낸 것에 대해 처벌했다고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수에비족이 하르츠산맥으로 케루스키족과 분리되어 있다고 언급했다.[6] 플리니우스는 그들을 인근의 수에비족, 카티족, 헤르문두리족과 함께 만누스라는 조상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하는 부족인 이르미노네스로 분류했다.[7] 타키투스는 나중에 그들을 카티족과 초치족 사이에 위치시켰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베저강과 엘베강 사이의 영토를 나타내는 것으로 여겨진다.[8]
3. 역사
드루수스는 게르만 원정의 일환으로 기원전 11년에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켜 케루스키족의 영토에 진입했으며, 서쪽으로 돌아가는 길에 아르발로에서 매복 공격을 받았다. 케루스키족은 초기에 승리했지만 공격을 잠시 멈추었고, 살아남은 로마군은 포위망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9]
타키투스는 케루스키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초치족과 카티족의 한쪽에 거주하는 케루스키족은 오랫동안 평화를 지나치게 사랑하여 공격받지 않았다. 이것은 안전하기보다는 더 즐거웠는데, 왜냐하면 무법하고 강력한 이웃들 사이에서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강력한 손이 결정하는 곳에서 절제와 정의는 더 강력한 자에게만 적용되는 용어이며, 따라서 케루스키족은 항상 좋고 정의로운 것으로 여겨졌지만, 지금은 겁쟁이와 바보로 불리고 있으며, 승리한 카티족의 경우 성공은 신중함과 동일시되었다. 케루스키족의 몰락은 번영했던 시절에 그들보다 열등했던 이웃 부족인 포시족의 몰락과 함께했다."[28]
클라우디오스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리학''은 케루스키족, 칼루코네스, 카마비족을 모두 서로 가깝고 하르츠 산맥 근처에 배치한다.[29] 케루스키족의 이후 역사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3. 1. 로마와의 관계
기원전 12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앞장서 로마 군단을 무찌르고 로마의 지배에 반대하여 독립을 되찾았다.[9] 케루스키족은 티베리우스, L.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 M. 비니키우스의 원정에 "광대한 전쟁"[10]이 기원전 2년경에 시작될 때까지 저항을 계속했다.
서기 4년, 티베리우스는 로마에 여전히 적대적인 케루스키족 파벌을 제압했고, 이듬해에는 부족을 로마 동맹으로 간주하여 특별한 특권을 부여했다. 족장 세지머는 최소한 두 아들을 보냈는데, 그들은 로마 시민이 되어 기병대 보조군으로 로마군에서 복무했다. 장남인 아르미니우스는 P. 퀸크틸리우스 바루스 휘하의 보조군 지휘관으로 돌아왔는데, 그는 서기 7년에 게르마니아를 새로운 속주 게르마니아 마그나로 조직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확대된 과세와 공물 요구가 포함되었고,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군단에 대한 연합 공격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세게스테스라는 케루스키족 귀족은 여러 차례 총독에게 경고를 시도했지만, 바루스는 그를 무시하고 서기 9년에 토이토부르크 숲과 늪에서 아르미니우스를 따라 매복했다. 케루스키족, 브룩테리족, 마르시족, 시캄브리족, 초치족, 카티족이 협력하여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을 완전히 파괴했다. 바루스와 많은 장교들이 전투 중에 자살했다. 카시우스 디오는 세지머가 전투에서 부사령관이었다고 보고하지만, 아르미니우스는 그 직후 스스로 족장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게스테스의 딸인 투스넬다를 납치하여 결혼했다.
로마인들은 마르코만니족이 케루스키족을 공격하도록 부추겼고, 잃어버린 독수리 깃발을 패배한 군단으로부터 회수하기 위해 자체적인 징벌적인 습격을 시작했다. 서기 14년, 게르마니쿠스는 12,000명의 군단병, 26개 보조군 대대, 8개 기병대대를 이끌고 카티족과 마르시족을 습격하여 "어떤 성별도, 어떤 나이도 연민을 찾을 수 없도록" 50 마일 너비의 지역을 체계적으로 황폐화시켰다.[11] 그 후 그는 케루스키족을 상대로 원정을 벌였고,[12] 세게스테스를 포로에서 해방시키고 임신한 투스넬다를 붙잡았다.[13][14] 아르미니우스는 케루스키족과 주변 부족을 소집했고, 게르마니쿠스는 일부 병력을 라인강에서 동쪽으로 진군시키고 다른 병력은 북해에서 엠스강을 거쳐 올라가 브룩테리족을 공격했다.[15] 이 두 세력은 만나 엠스와 리페강 사이의 땅을 황폐화시켰다. 그들이 토이토부르크 숲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죽은 로마인의 시신이 매장되지 않고 독일 제단에서 제물로 바쳐진 것을 발견했다. 군대는 반나절 동안 죽은 자들을 매장한 후 게르마니쿠스는 독일인과의 전쟁으로 돌아가기 위해 작업을 중단했다.[16] 게르마니쿠스는 케루스키족의 중심지로 이동하면서, 엠스강 근처의 늪지대인 폰테스 롱기 ("긴 둑길")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군대에게 공격을 받았다. 케루스키족은 로마 기병대를 함정에 빠뜨려 죽이기 시작했지만 로마 보병은 이틀간의 전투 과정에서 그들을 막고 격퇴할 수 있었다. 타키투스는 이를 승리로 간주했지만[17] 웰스와 같은 역사가들은 결정적이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생각한다.[18]
서기 16년, 게르마니쿠스는 8개 군단과 갈리아 및 게르만 보조 부대, 아르미니우스의 동생인 플라부스가 이끄는 병력을 데리고 돌아왔다. 라인강에서 진군하여 엠스와 베저강을 따라 이동한 로마군은 현대 린텔른 근처 베저강의 이디스타비소 평원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군대와 만났다. 타키투스는 베저강 전투를 결정적인 로마의 승리로 보고한다:[19][20]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삼촌인 잉구이오메르는 모두 부상을 입었지만 생포를 피했다. 로마 군인들은 티베리우스를 임페라토르la로 선포하고 패배한 부족의 이름을 새긴 전리품을 쌓아 올렸다.[21][22] 이 전리품은 독일인들을 격분시켰고, 그들은 엘베강 너머로 후퇴하는 것을 멈추고 앙그리바리안 성벽에서 로마인을 공격하기 위해 재집결했다. 이 전투 역시 결정적인 로마의 승리로 끝났고, 게르마니쿠스는 자신의 군대에게 게르만 부족을 완전히 전멸시키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비문이 있는 언덕이 세워졌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가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부족을 완전히 정복한 후, 이 기념물을 마르스, 유피테르, 아우구스투스에게 헌정했다."[23][24]
다음 해에 게르마니쿠스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타키투스는 이것이 황제가 장군의 명성에 대한 질투심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보고했지만, 5월 26일에 개선 행진을 축하하도록 허용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살해 이후, 로마는 케루스키족을 그들의 뜻대로 내버려 두었다. 서기 47년, 케루스키족은 로마에 플라부스의 아들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조카인 이탈리쿠스를 족장으로 보내 내전을 통해 다른 귀족들이 파괴되었기에 요청했다. 그는 처음에는 호감을 받았지만, 로마 시민으로 로마에서 자랐기 때문에 곧 호감을 잃었다.[26]
3. 2. 내분과 쇠퇴
아르미니우스는 서기 21년에 내부 권력 다툼으로 인해 세게스테스와 그의 동맹에게 살해당했다.[25]
아르미니우스가 살해된 후, 로마는 케루스키족을 그들 마음대로 내버려 두었다. 서기 47년, 케루스키족은 내전을 통해 다른 귀족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로마에 플라부스의 아들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조카인 이탈리쿠스를 족장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처음에는 호감을 얻었지만, 로마 시민으로 로마에서 자랐기 때문에 곧 지지를 잃었다.[26] 그는 아마도 그의 아들인 카리오메루스의 뒤를 이었지만, 서기 88년경에 카티족에게 패배하여 폐위되었다.[27]
타키투스는 케루스키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4. 현대의 평가
케루스키족은 기원전 12년에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아르미니우스가 앞장서 로마 군단을 무찌르고 독립을 되찾았다.
4. 1. 대한민국과의 관계
대한민국에서는 아르미니우스가 로마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1]참조
[1]
서적
Reallexikon der Germanischen Alterturmskunde
[2]
서적
Die Germania des Tacitus
Winter
[3]
서적
Geschichte der Deutschen Sprache
[4]
서적
Reallexikon der Germanischen Alterturmskunde
[5]
서적
The Oxford Classical Dictionary
Oxford University Press
2012
[6]
문서
Commentaries on the Gallic War
[7]
문서
Natural History (Pliny)
https://www.perseus.[...]
[8]
서적
Dictionary of Greek and Roman Geography
https://www.perseus.[...]
[9]
서적
Eager for Glory: The Untold Story of Drusus the Elder, Conqueror of Germania
Pen & Sword Books
[10]
문서
Roman History (Velleius)
[11]
문서
Annals (Tacitus)
[12]
서적
The Works of Tacitus, Vol. 1: The Annals
https://archive.org/[...]
Bohn
[13]
서적
[14]
서적
[15]
서적
[16]
서적
[17]
서적
[18]
서적
[19]
서적
[20]
서적
[21]
서적
[22]
서적
[23]
서적
[24]
서적
[25]
문서
Annals (Tacitus)
[26]
문서
Annals (Tacitus)
[27]
문서
Epitome
[28]
웹사이트
Tac. Ger. 36
https://www.perseus.[...]
Perseus Project
2013-12-31
[29]
문서
Geography (Ptol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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