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코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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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홀로코스트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용어로, 나치 독일이 자행한 유대인 대량 학살을 특별히 지칭한다. 1960년대 이후 이 용어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1978년 TV 시리즈 "홀로코스트"가 대중적인 인식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나치는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이라는 은어를 사용하며 유대인 학살을 은폐하려 했으며, "홀로코스트"라는 용어의 사용에 대해 종교적인 이유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이 사건은 아리아인 우월주의를 바탕으로 한 이데올로기적 동기에 의해 발생했으며, 독일 사회 전반의 동조와 협력하에 조직적으로 이루어졌다. 600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이 학살당했으며, 슬라브인, 집시, 동성애자, 장애인 등 다양한 집단이 나치의 박해를 받았다. 홀로코스트는 집단 학살 수용소와 가스실을 통해 대규모로 자행되었으며, 수많은 유대인들이 저항하거나 숨어 지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맞섰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통해 나치의 만행이 드러났으며, 홀로코스트는 국제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스라엘 건국과 같은 정치적 변화를 가져왔다. 현재에도 홀로코스트는 기념되고 있으며, 그 비극을 기억하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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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원과 개념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홀로코스트(Holocaust)는 고대 그리스에서 신에게 동물을 태워 제물로 바치는 것을 의미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대량 학살을 지칭하는 데 쓰였지만, 이후 학자들과 유명 작가들에 의해 특별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78년 방영된 TV 시리즈 《홀로코스트》는 이 개념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42]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니라, 독일 사회 전체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한 구조적인 범죄였다.[88]
성경 히브리어로 재앙을 뜻하는 쇼아(Shoah(שואה), Sho'ah, Shoa라고도 표기됨)는 1940년대부터 유럽과 이스라엘에서 홀로코스트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단어가 되었다. 많은 유대인들은 홀로코스트보다 쇼아라는 표현을 더 선호하는데, 이는 종교학적으로 홀로코스트가 그리스 이교도의 문화에 어원을 두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45]
나치당은 홀로코스트를 순화하여 완곡어법을 통해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영어: Final Solution to the Jewish Question, 독일어: Endlösung der Judenfrage)이라고 표현하였고, “궁극적 해결(Final Solution)"이라는 표현은 유태인 학살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널리 쓰였다.[41] 또한 나치당은 '살 가치가 없는 생명'(lebensunwertes Leben)이라는 표현으로 유대인 학살을 정당화하고자 하였다.
"홀로코스트(Holocaust)"라는 용어는 '번제'(burnt offering)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되었으며,[44] 영어와 여러 다른 언어에서 나치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묘사하는 데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히브리어 단어 השואה|쇼아he( '파국적인 파괴')는 유대인 희생자만을 전적으로 가리킨다.[41] 가해자들은 유대인에 대한 집단 학살을 완곡하게 표현하는 말로 "최종 해결책"이라는 문구를 사용했다.[41]
3. 특징
미국의 유대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라고 기술했다.[88]
대학교들은 유대인 지원자들을 거부하고, 유대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대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 수용자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 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데호막(Dehomag, 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했고, 이는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라고 기술한다.[91]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대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92] 그는 반유대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88]
약 20만 명에서 25만 명의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했으며, 멸종 수용소 운영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50만 명으로 증가한다.[2] 대량 학살에는 수백만 명의 독일인과 비독일인들의 적극적이고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했다.[117] 홀로코스트를 조직한 SS 장교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은 나치즘에 대한 강한 이념적 헌신을 가지고 있었다.[124] 이념적 요인 외에도 많은 가해자들은 물질적 이득과 사회적 발전의 가능성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121][213]
수백만 명의 독일인과 다른 사람들이 대량 학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117] 홀로코스트의 수익이 국가 재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SS 내부의 부패는 만연했다. 서로 다른 독일 국가 기관들은 사망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학살된 유대인들이 비운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사업가들은 유대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거나 유대인 소유의 사업체를 인수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주택과 소지품을 인수했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근본적인 동기가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며,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93] 그는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93]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 성격으로는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점을 꼽았다.[94]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95]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1939년에 이 지역의 유대인 인구는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대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에서는 나치당이 “최종 해결책”을 영국,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96]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대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대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97] 유대인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대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98]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을 갖춘 수용소를 건설한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며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벨제크, 헬름노, 야세노바츠, 마이다네크, 말리 트로스테네츠, 소비보르, 트레블링카 등에 세워졌다.[100]
1939년부터 정신 질환자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가스 차량은 아인자츠그룹에 배치되어 1941년 11월 처음 사용되었으며, 희생자들은 차량에 강제로 태워져 엔진 배기가스로 살해되었다.[3][4] 최초의 절멸 수용소는 바르테란트에 있는 헬름노였는데, 1941년 12월 가스 차량을 사용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1941년 10월, 루블린 지역의 오딜로 글로보츠니크는 T4 작전을 기반으로 일산화탄소를 사용하는 고정식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목적 지향적 절멸 수용소인 벨제크의 계획 작업을 시작했다. 1941년 말 슐멜트 조직이 운영하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던 "노동에 부적합한"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1942년 초, 치클론 B가 절멸 수용소에서 선호하는 살해 방법이 되었다.[4]
수용소는 유대인들을 쉽게 죽음으로 수송할 수 있도록 철도선에 위치했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외딴 곳에 있었다.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인한 악취는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밀한 소떼 수송차로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최대 150명이 단일 화물차에 강제로 탑승해야 했다. 도착 후 희생자들은 남은 재산을 빼앗기고, 옷을 벗고, 머리를 자른 뒤, 가스실로 몰렸다. 가스로 인한 죽음은 고통스러웠고 30분이나 걸릴 수 있었다. 가스실은 원시적이었고 때때로 오작동되었다. 가스실이 작동하지 않아 일부 수감자들이 총살당했다. 다른 절멸 수용소에서는 수송된 거의 모든 사람이 도착 즉시 사살되었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약 20~25%가 노동을 위해 분리되었지만,[5] 이들 수감자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기아, 대량 총살, 고문 및 의학 실험으로 사망했다.[6]수용소 위치 살해된 유대인 수 살해 기술 계획 시작 대량 가스 살인 기간 헬름노 바르테란트 150,000 가스 차량 1941년 7월 1941년 12월 8일 – 1943년 4월 및 1944년 4월–7월 벨제크 루블린 지역 440,823–596,200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1941년 10월 1942년 3월 17일 – 1942년 12월 소비보르 루블린 지역 170,618–238,900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1941년 말 또는 1942년 3월 1942년 5월 – 1942년 10월 트레블링카 바르샤바 지역 780,863–951,800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1942년 4월 1942년 7월 23일 – 1943년 10월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 동상부 실레시아 900,000–1,000,000 고정식 가스실, 청산가스 1941년 9월
(포로 수용소로 건설됨)1942년 2월 – 1944년 10월
나치 학살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의학 실험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는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고 평가했다.[101]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하우,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 작센하우젠, 나츠바일러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 박사였다. 멩겔레는 피험자를 고압력 방이나 얼음 방에 집어넣는 실험, 약물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그리고 수많은 잔인한 외과 실험을 자행했다. 실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의 실험 기록은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 박사가 모두 파괴하여 현재 유실된 상태이다.[102]
멩겔레는 특히 집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으며,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이라고 불렀다.[103]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대인 수감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였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었고, 상처는 감염되어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엄마 이름은 스텔라였다)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와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88]
3. 1. 전국가적 동조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니라, 독일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88]
미국인이자 유태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태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태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태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태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88]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태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태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태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 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라고 기술한다.[91]
이스라엘 역사학자 자울 프리트랜더(Saul Friedländer)는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태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92] 그는 반유태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88]
약 20만 명에서 25만 명에 달하는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으로 가담했으며, 멸종 수용소 운영에 관여한 모든 사람들을 포함하면 그 수는 50만 명으로 증가한다.[2] 대량 학살에는 수백만 명의 독일인과 비독일인들의 적극적이고 암묵적인 동의가 필요했다.[117] 홀로코스트 가해자들의 동기는 다양했고, 이는 역사학적 논쟁으로 이어졌다.[117] 홀로코스트를 조직한 SS 장교들에 대한 연구에 따르면 대부분은 나치즘에 대한 강한 이념적 헌신을 가지고 있었다.[124] 이념적 요인 외에도 많은 가해자들은 물질적 이득과 사회적 발전의 가능성에 의해 동기가 부여되었다.[121][213] 독일 SS, 경찰, 정규군 부대는 거부에 대한 처벌이 없거나 가벼웠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민간인을 사살할 충분한 인원을 찾는 데 거의 어려움이 없었다.[211]
수백만 명의 독일인과 다른 사람들이 대량 학살로부터 이익을 얻었다.[117] 홀로코스트의 수익이 국가 재산으로 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SS 내부의 부패는 만연했다. 서로 다른 독일 국가 기관들은 사망 수용소에서 학살된 유대인들로부터 훔친 재산을 받기 위해 경쟁했다. 많은 노동자들은 학살된 유대인들이 비운 더 나은 일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사업가들은 유대인 경쟁자들을 제거하거나 유대인 소유의 사업체를 인수함으로써 이익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소유했던 주택과 소지품을 인수했다.
3. 2. 배경 사상과 규모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근본적인 동기가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며, 아리아인이 지배해야 할 세상에서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이 반동을 일으킬 것이라는 나치의 허황된 상상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93] 그는 여태까지 알려진 어떠한 학살도 이렇게 전적으로 미신, 환상, 추상적이고 비합리적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93]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1986년 저서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하였다. 그 성격으로는 국가가 지도자의 권한으로 노인, 여자, 유아를 포함한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이를 모든 국가 권력을 동원해 실행한 유례는 지금까지 없었다는 점을 꼽았다.[94]
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현재는 35개의 국가)에 걸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다.[95] 가장 심했던 지역은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이었다. 이 지역의 유태인 인구는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는데 약 500만 명이 학살당하였고, 특히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등지에서도 많은 수의 유태인이 죽었다. 반제 회의에서는 나치당이 그들의 “최종 해결책”을 영국과 아일랜드, 스위스, 터키, 스웨덴, 포르투갈, 스페인 등 중립 지역에서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96]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말살당하였다. 다른 학살의 경우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동화되면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유럽 점령지역 유태인에게 이는 적용되지 않았다.[97] 유태인의 조부가 1871년 1월 18일 이전에 개종한 것이 아니라면, 모든 유태인 혈통의 사람들은 독일 통치 지역에서는 말살당할 운명이었다.[98]
3. 3. 집단 학살 수용소
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학살하기 위해 가스실을 갖춘 수용소를 건설한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며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100]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벨첵(Belzec), 헬름노(Chełmno), 야세노박(Jasenovac), 마자넥(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100]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 명, 벨첵에서 60만 명, 소비보르에서 25만 명이 희생되었다.[100]
1939년부터 정신 질환자를 살해하는 데 사용된 가스 차량은 아인자츠그룹에 배치되어 1941년 11월 처음 사용되었으며, 희생자들은 차량에 강제로 태워져 엔진 배기가스로 살해되었다.[3][4] 최초의 절멸 수용소는 바르테란트에 있는 헬름노였는데, 1941년 12월 가스 차량을 사용하여 운영을 시작했다. 1941년 10월, 루블린 지역의 오딜로 글로보츠니크는 T4 작전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일산화탄소를 사용하는 고정식 가스실을 갖춘 최초의 목적 지향적 절멸 수용소인 벨제크의 계획 작업을 시작했다. 1941년 말 슐멜트 조직이 운영하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있던 "노동에 부적합한" 유대인들은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살해되었다. 1942년 초, 치클론 B가 절멸 수용소에서 선호하는 살해 방법이 되었다.[4]
수용소는 유대인들을 죽음으로 쉽게 수송할 수 있도록 철도선에 위치해 있었지만, 눈에 띄지 않도록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대량 학살 작전으로 인한 악취는 근처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알아챌 수 있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과밀한 소떼 수송차로 수용소로 강제 이송되었다. 최대 150명이 단일 화물차에 강제로 탑승해야 했다. 도착 후 희생자들은 남은 재산을 빼앗기고, 옷을 벗도록 강요받고, 머리를 자르고, 가스실로 몰렸다. 가스로 인한 죽음은 고통스러웠고 30분이나 걸릴 수 있었다. 가스실은 원시적이었고 때때로 오작동되었다. 가스실이 작동하지 않아 일부 수감자들이 총살당했다. 다른 절멸 수용소에서는 수송된 거의 모든 사람이 도착 즉시 사살되었지만, 아우슈비츠에서는 약 20~25%가 노동을 위해 분리되었지만,[5] 이들 수감자들 중 많은 수가 나중에 기아, 대량 총살, 고문 및 의학 실험으로 사망했다.[6]
벨제크, 소비보르, 트레블링카는 희생자들로부터 훔친 소지품으로 1억 7870만 라이히스마르크의 수익을 보고했는데, 이는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금액이었다.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유대인의 약 절반이 독가스로 사망했다. 수천 명의 로마인들도 절멸 수용소에서 살해되었다. 트레블링카와 소비보르에서의 수감자 봉기는 이 수용소들이 예상보다 일찍 폐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용소 | 위치 | 살해된 유대인 수 | 살해 기술 | 계획 시작 | 대량 가스 살인 기간 |
---|---|---|---|---|---|
헬름노 | 바르테란트 | 150,000 | 가스 차량 | 1941년 7월 | 1941년 12월 8일 – 1943년 4월 및 1944년 4월–7월 |
벨제크 | 루블린 지역 | 440,823–596,200 |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 1941년 10월 | 1942년 3월 17일 – 1942년 12월 |
소비보르 | 루블린 지역 | 170,618–238,900 |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 1941년 말 또는 1942년 3월 | 1942년 5월 – 1942년 10월 |
트레블링카 | 바르샤바 지역 | 780,863–951,800 | 고정식 가스실, 엔진 배기가스 | 1942년 4월 | 1942년 7월 23일 – 1943년 10월 |
아우슈비츠 II-비르케나우 | 동상부 실레시아 | 900,000–1,000,000 | 고정식 가스실, 청산가스 | 1941년 9월 (포로 수용소로 건설됨) | 1942년 2월 – 1944년 10월 |
3. 4. 생체 실험
나치 학살의 특징 중 하나는 인간을 대상으로 한 의학 실험이었다. 미국의 정치학자 라울 힐버그(Raul Hilberg)는 "독일 의사들은 다른 전문직에 비해 대단히 나치화되었다"고 평가했다.[101] 실험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다하우(Dachau), 부헨발트(Buchenwald), 라벤스브뤼크(Ravensbrück),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나츠바일러(Natzweiler) 등지의 수용소에서 이루어졌다.
이러한 생체 실험을 한 의사 중 가장 악명 높은 사람은 아우슈비츠에서 근무한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 박사였다. 멩겔레는 피험자를 고압력 방이나 얼음 방에 집어넣는 실험, 약물 임상 실험, 아이들의 눈에 염색약을 주사하여 눈 색깔을 바꾸는 실험, 그리고 수많은 잔인한 외과 실험을 자행했다. 실험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거의 즉시 살해된 뒤 해부되었다. 멩겔레의 실험 기록은 그가 기록을 보냈던 오트마 폰 페르슈어(Otmar von Verschuer) 박사가 모두 파괴하여 현재 유실된 상태이다.[102]
멩겔레는 특히 집시 아이들을 대상으로 많은 실험을 했다. 그는 아이들에게 사탕과 장난감 등을 주면서 가스실로 데려갔으며, 아이들은 그를 “멩겔레 삼촌(Onkel Mengele)"이라고 불렀다.[103]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50쌍의 집시 쌍둥이를 돌보았던 한 유태인 수감자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 쌍의 쌍둥이가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4살 정도 된 구이도(Guido)와 이나(Ina)였다. 어느 날, 멩겔레는 그들을 데리고 갔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는 끔찍한 상태였다. 그들은 샴쌍둥이처럼 등이 꿰매져 있었고, 상처는 감염되어 진물이 나왔다. 그들은 하루 종일 비명을 질렀다. 그것을 본 그들의 부모(엄마 이름은 스텔라였다)는 어딘가에서 모르핀을 구해와 아이들을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기 위해 아이들을 죽이고 말았다."[88]
4. 발달과 실행
유럽의 유대인들은 중세 시대부터 기독교 신학에 따른 반유대주의에 시달렸다.[104]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며[104], 이는 박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의사과학적 인종 차별주의를 기반으로 유대인을 아리아인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싸워야 할 인종으로 간주했다.[105] 이러한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와 달리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규정했다.[105]
1895년, 독일 제국 의회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으로 칭하며, 독일 국민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6] 1912년, 하인리히 클라스는 저서 "내가 황제라면"에서 모든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7] 그는 유대인들이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언론, 은행 업무, 자유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독일 제국 시기에는 민족주의와 의사과학적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했으며,[108] 교육받은 상류층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다.[109] 1912년 독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은 패배했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 잡았다.[110] 1920년,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한 나치당(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이 반유대주의를 채택했다.[110]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독일의 과학 기술 발전은 사회 문제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다.[111] 그러나 동시에 인종차별주의, 사회진화론, 우생학이 등장하여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이 나타났다.[112]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여러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져 대학살을 일으킨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11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관료들은 사회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다.[114] 이들은 점차 생물학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114]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 의학계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사람들을 안락사시키는 것이 치료 가능한 사람들을 위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가치 없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려는 사회 정책이 존재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독일의 정치, 교육, 문화에서 배제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는 유대인 몰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분명하게 밝혔다. 1922년, 그는 저널리스트 요제프 헬에게 "내가 힘 있는 사람이 되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115] 그는 뮌헨의 마리엔 광장에 교수대를 세워 유대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다른 도시들도 이를 따라 독일 전체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115]
나치 지도자들은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116] 나치 정책은 사람들을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렇지 않은 '이방인'으로 나누었다. 유대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분류했는데,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 그리고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상습범들과 같은 도덕적인 적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116]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는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116]
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로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116]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여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116]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119]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 불매운동이 일어났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났다. 같은 해,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을 비롯한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어 유대인의 공직, 의사, 법률가 활동, 농업 종사 등을 금지했다.
유대인 변호사들은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120]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한 공무원은 자격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으나, 1937년 이 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 기자협회에서 제외되었고, 신문사 소유나 편집장 직책도 금지되었다.[119]
1933년 7월, 유전적 질병을 가진 자손 출산을 막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 불임화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로 인해 200여 개의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었고, 나치 통치 하에 40만 명 이상이 불임시술을 받았다.[121]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도입하여 아리아인과 유대인 간의 성관계 및 결혼을 금지했다. 이 법은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했으며, 나치는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선전했다. 히틀러는 유대인 문제가 법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국가사회주의 당이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고 말했다.[123] 1939년 1월, 그는 공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124]
이 연설 장면은 1940년 나치 선전영화 영원한 유대인(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발터 벤야민, 레온 포이히트방거, 브루노 발터 등 유대인 지식인들은 독일을 떠났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미국 방문 중 독일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 합병 후 영국으로 망명했다.[125][126]
1938년 11월 7일, 유대인 청년 헤르셸 그린슈판이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서기관 에른스트 폼 라트를 암살했다.[127]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깨진 유리의 밤(크리스탈나흐트)으로 알려진 대규모 폭력 사태의 구실로 이용되었다.[88] 유대인 상점과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이 파괴되었고,[128] 91명 이상의 유대인이 사망했으며,[88] 3만여 명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129] 이들은 재산을 나치에 양도하거나 이주가 확실한 경우에만 풀려날 수 있었다.[130] 독일 유대인들은 10억원가 넘는 "속죄 세금"을 지불해야 했다.[88]
나치는 전쟁 이전부터 유대인 대량 강제 추방을 고려했다.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수천 명의 유대인이 강제 추방되었다.[115] 히틀러는 독일 식민지였던 지역을 유대인 거주지로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국과 프랑스 등 다른 식민지 국가에 유대인 재정착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으나, 1941년 유대인 대량 학살 시작과 함께 폐기되었다. 1942년 2월 10일, 이 계획의 중단이 발표되었다. 나치는 유럽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시키는 계획도 세웠다. 하바라 협정을 통해 6만 명의 독일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고, 1억달러이 수송되었다.
나치 독일은 1933년 정권 장악 이후 강제 수용소를 설립하여 유대인을 비롯한 정치범, 사회 부적응자 등을 수용했다.[117] 1933년 3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117] 초기에는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위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118]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강제 수용소는 유대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장소로 변모했다. 독일과 동유럽 전역에 15,000여 개의 강제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세워졌다. 수감자들은 화물차로 이송되었으며, 많은 이들이 도착 전에 사망했다. 나치는 '노동을 통한 학살' 정책으로 수감자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감자들은 전쟁 물자 생산 등에 동원되었으며, 극심한 노동 조건, 굶주림, 질병, 폭력 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는 유대인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를 설치했다.[130] 이는 유대인들을 학살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중간 단계였다. 독일은 각 게토에 유대인 평의회(Judenratde)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130] 게토는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으며,[130] 유대인 평의회는 게토의 일상 운영을 책임져야 했다.[130] 독일 당국은 평의회에 몰수, 강제 노동 구성,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도록 지시했다.[130] 평의회는 나치 정권과 협력하여 손실을 최소화하려 했으나, 결국 많은 유대인들이 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130]
바르샤바 게토는 38만 명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만 명으로 두 번째로 컸다.[130] 게토는 좁은 공간에 많은 인구가 밀집되어 비위생적인 환경이었으며, 기아와 질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130]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지역 주민들은 나치의 격려에 의해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에서는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이 14,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95] 1941년 7월 예드바브네 포그롬에서는 나치 질서경찰(Ordnungspolizei)이 있는 가운데 300명의 유대인이 불타는 헛간에 갇혔다.[95]
1939년 12월 초,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대량 살인 방법을 도입했다. 실험용 가스차가 T-4 작전의 일환으로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96] 1941년 11월부터는 엔진 배기가스를 이용하는 더 큰 가스차가 사용되었다.[96] 이 가스차들은 헤움노 집단 수용소에 소개되었고,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점령된 소련에서 사용되었다.[96] 약 50만 명이 가스차로 살해되었다.[96]
반제 회의는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주재로 소집되었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 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 방법을 논의하고, 대량 살인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이 작성한 회의록은 "완곡 어법 언어"로 쓰여져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하이드리히는 유대인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을 통한 "최종 해결책"을 언급했다. 회의 참석자들은 유럽 내 약 650만 명의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수송하여 가스로 죽일 계획을 세웠다.
4. 1. 유래
유럽의 유대인들은 중세 시대부터 기독교 신학에 따른 반유대주의에 시달렸다.[104] 유대인들은 예수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았으며[104], 이는 박해의 주요 원인 중 하나였다.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등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의사과학적 인종 차별주의를 기반으로 유대인을 아리아인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싸워야 할 인종으로 간주했다.[105] 이러한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와 달리 유대인을 종교가 아닌 인종으로 규정했다.[105]1895년, 독일 제국 의회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으로 칭하며, 독일 국민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6] 1912년, 하인리히 클라스는 저서 "내가 황제라면"에서 모든 독일 유대인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권리를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07] 그는 유대인들이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언론, 은행 업무, 자유 직업 활동을 하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8]
독일 제국 시기에는 민족주의와 의사과학적 인종차별주의가 만연했으며[108], 교육받은 상류층이 이러한 사상을 받아들였다.[109] 1912년 독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민족주의 정당은 패배했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 잡았다.[110] 1920년,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 정당(나치당)이 반유대주의를 채택했다.[110]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 독일의 과학 기술 발전은 사회 문제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낙관주의를 불러일으켰다.[111] 그러나 동시에 인종차별주의, 사회진화론, 우생학이 등장하여 일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이 나타났다.[112]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의 유일한 이유는 아니지만, 여러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져 대학살을 일으킨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113]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 관료들은 사회 문제가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환멸을 느꼈다.[114] 이들은 점차 생물학적으로 부적합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적합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114]
경제 대공황으로 인해 독일 의학계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료 불가능한 사람들을 안락사시키는 것이 치료 가능한 사람들을 위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되었다. 1933년 나치가 권력을 잡았을 때,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고 가치 없는 사람들을 사회에서 제거하려는 사회 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유대인을 독일의 정치, 교육, 문화에서 배제시키려는 의도를 드러냈다. 그는 유대인 몰살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분명하게 밝혔다. 1922년, 그는 저널리스트 요제프 헬에게 "내가 힘 있는 사람이 되면,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115] 그는 뮌헨의 마리엔 광장에 교수대를 세워 유대인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다른 도시들도 이를 따라 독일 전체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라고 말했다.[115]
독일 가톨릭계에는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와 비교해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 데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유대인 대학살에 반대하는 가톨릭 시위는 없었다.
독일의 가장 독설에 찬 반유대주의는 민족주의 반유대주의 또는 인종 차별주의였으며, 이는 폭력을 정당화했다. 1938년이나 1939년에 히틀러는 독일 유대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것을 고려했지만, 이는 나치나 다른 곳에서 폭력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망설였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 두 번째 해까지는 공식적인 학살이 일어나지 않았다.
4. 2. 법적 탄압과 이주
나치 지도자들은 민족공동체(Volksgemeinschaft)의 존재를 공표했다.[116] 나치 정책은 사람들을 민족 공동체에 속하는 '같은 국민'과 그렇지 않은 '이방인'으로 나누었다. 유대인 탄압에 대한 나치의 정책은 사람들을 세 종류의 적으로 분류했는데, 혈통으로 인해 인종적인 적으로 간주된 유대인과 집시, 막스주의자, 진보주의자, 기독교 신자, 반동자와 같은 정치적인 적, 그리고 동성애자, 일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 상습범들과 같은 도덕적인 적이 있었다. 이들 모두는 다루기 힘든 국가적인 적으로 간주되었다.[116] 마지막 두 그룹은 재교육을 위해 강제 수용소로 보내졌는데, 이는 그들을 민족공동체로 흡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러나 도덕적인 적으로 간주된 몇몇 사람들은 불임시술을 받아야 했고, 그들은 유전적으로 하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116]인종적인 적으로 여겨지는 유대인들은 절대로 민족공동체에 속할 수 없었다. 그들은 철저히 사회로부터 배제되었다.[116] 독일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는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목표는 이상적인 민족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고, 모든 이단적인 행동과 그러한 모든 시도를 테러로 간주하여 완전한 경찰의 감시 하에 두는 것이었다고 말했다.[116]
1930년대에 유대인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권리는 꾸준히 제한되었다.[119] 1933년 4월 1일, 첫 국가적 유대주의 캠페인인 유대인 기업 불매운동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1주일을 계획하였으나, 지지자가 부족하여 하루 만에 끝이 났다. 1933년, 일련의 법률이 입법되었는데, 이 법률은 핵심 분야에서 유대인을 제외하는 것이었다. 전문 공무 회복에 관한 법은 나치 독일에서 통과된 첫 번째 반유대주의 법이었으며, 의사나 법률가가 되는 것, 그리고 농장을 소유하거나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이 제정되었다.
유대인 변호사들은 자격을 박탈당하였는데, 특히 드레스덴에서 유대인 변호사와 판사들은 그들의 사무실과 법정 밖으로 끌려나와 몰매를 맞았다.[120] 히틀러는 공무원들 중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이거나 그의 아버지나 아들이 참전했다면 자격을 박탈하지 않고 계속 사무실에 남아 일 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1937년 그 면제 제도를 취소했다. 유대인들은 학교와 대학(학교의 과밀을 방지하기 위한 법)에서 제외되었고, 기자협회에서도 제외되었으며 신문사를 소유하거나 신문사의 편집장이 되는 것도 금지되었다.[119]
1933년 7월, 유전적으로 병이 있는 자손을 낳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열등한 사람을 강제적으로 불임화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이러한 우생정책은 200여 개가 넘는 유전건강 법원이 설립되게 했고, 나치 통치 하에 400,000명이 넘는 사람이 불임시술을 받게 되었다.[121]
1935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법을 소개했는데, 이 법은 아리안이 유대인과 성적관계를 맺거나 결혼을 하는 것을 금지시키는 것이다. 비록 이 법이 나중에 집시와 흑인 그리고 그들의 사생아 또한 포함하게 되었지만(독일 혈통과 독일 명예를 지키는 법),[122] 이 법으로 인하여 유대인들은 그들의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이와 동시에 나치는 이러한 유대인 제한법을 정당화하기 위해 인종오염 개념을 널리 알리는 과장된 선전을 펼쳤다. 히틀러는 “혈통 법”을 문제에 대한 합법적인 규제가 미래에 일어나게 될 실패를 통해 법이 국가 사회주의 정당의 마지막 해결책이 될 것임을 말했다. 히틀러는 만약 유대인 문제가 이와 같은 법들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법에 의한 최후의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 국가사회주의 당이 이것을 맡아야 한다고 말했다.[123] “최후의 해결책” 또는 “궁극적 해결”은 나치에게 유대인 몰살정책의 완곡한 표현이었다. 1939년 1월, 그는 공개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약 유럽 내부와 외부의 국제금융 유대인이 또 다른 세계 전쟁에 빠지게 하는데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세계의 적화가 아니라 유대인의 승리를 말하므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은 몰살되어야 한다."[124]
연설 중 이 장면은 유럽에서 유대인을 몰살하기 위한 합리적인 근거와 청사진을 제공하기 위해 1940년 나치 선전영화인 영원한 유대인(Der ewige Jude)에 사용되었다.
유대인들 중 지식인들이 가장 먼저 고향을 떠났다. 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1933년 3월 18일 파리로 떠났다. 소설가 레온 포이히트방거는 스위스로 떠났다. 지휘자 브루노 발터는 그가 베를린 필하모닉 홀에서 콘서트를 하면 그곳이 불타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떠났다. 프랭크 펄터는 4월 6일 발터와 그의 동료 지휘자 오토 클렘페러가 "예술적 유대 청산인"[125]에 의해 불러 일으켜진 독일 대중의 분위기를 정부가 보호해 줄 수 없었으므로 떠나야 했다고 밝혔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1933년 1월 30일 미국에 방문 중이었다. 그는 벨기에의 오스텐더로 돌아왔고, 다시는 독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는 빌헬름 황제 협회와 프로이센 학술회에서 쫓겨났으며, 그의 시민권은 박탈되었다.[126]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했을 때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그의 가족은 비엔나에서 영국으로 도망가야 했다. 예술 프로이센 학술회의 명예로운 회장직을 맡은 막스 리버만은 회장직을 박탈당하고 그의 동료 중 그 누구에게도 위로의 말을 들을 수 없었으며 2년 후 죽을 때까지 그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1943년 경찰이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85세의 미망인을 강제 추방시키기 위해 들것을 들고 도착했을 때, 그녀는 들것에 실려 나가기보다 바르비투르 과다복용으로 자살하는 것을 택했다.[126]
4. 3. 크리스탈나흐트(1938)
1938년 11월 7일, 미성년 유대인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이 파리 주재 독일대사관 3등 서기관 에른스트 에두아르트 폼 라트(Ernst Eduard vom Rath)를 암살했다.[127] 이 사건은 나치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법적 탄압을 넘어서는 대규모 물리적 폭력의 구실로 사용되었다. 나치가 주장한 자발적인 '공공의 분노'는 사실 나치당에 의해 선동된 집단 학살이었으며, 이는 SA 멤버와 오스트리아, 주데텐 지방을 포함한 독일 나치와 연관된 사람들에 의해 행해졌다.[88] 이 집단 학살은 "깨진 유리의 밤"(Reichskristallnacht, 문자 그대로 '크리스탈 밤') 혹은 11월 집단 학살로 알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공격당했고, 유대인들의 공공재는 파손되었다. 7,000개가 넘는 유대인 상점과 1,200채가 넘은 유대교 회당(시나고그)은 피해를 입거나 파괴되었다.[128]
공식적으로 알려진 91명의 사상자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예상된다.[88] 약 30,000명이 다하우(Dachau), 작센하우젠(Sachsenhausen), 부헨발트(Buchenwald), 오라니엔부르크(Oranienburg)[129] 등에 있는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들은 몇 주간 수감되었는데, 곧 그들이 다른 곳으로 이주될 것이 확실하거나 그들의 재산을 나치에 양도할 경우 풀려날 수도 있었다.[130] 독일 유대인들은 학살을 피하기 위해 물질적으로 보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수백, 수천 마르크였으며 이뿐만 아니라 “속죄 세금”으로 10억원가 넘는 돈을 지불해야 했다.[88] 이러한 집단 학살 이후 독일로부터 유대인들의 이주는 가속화되었고, 독일에서 공개적인 유대인의 삶은 끝장이 났다.[88]
4. 4. 재정착과 강제추방
나치는 전쟁 이전에 유럽에서 독일 유대인을 대량으로 강제 추방하는 것을 고려했다. 1938~1939년 히틀러는 샤흐트 계획에 동의했고, 이 계획이 불필요해질 때까지 수천 명의 유대인 강제 추방이 이루어졌다. 이는 히틀러가 당시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대학살에 대한 관심을 보여준다.[115]이전에 독일의 식민지였던 탄자니아, 사우스 웨스트 아프리카 등에서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고자 했던 계획은 히틀러에 의해 중단되었다. 그는 세상 어느 곳도 용감한 독일인의 피가 흘려지지 않은 곳이 없으며, 그들의 식민지는 독일의 가장 악질적인 적을 위한 거주지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식민지 지배 국가(주로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 쫓겨난 유대인을 그들의 식민지에 살 수 있도록 하는 외교적인 노력 또한 행해졌다. 재정착이 허락된 지역으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영국의 로데시아, 프랑스의 마다가스카르, 호주가 포함되었다.
이 지역들 중 마다가스카르는 가장 심각하게 거론되었다. 하이드리히는 마다가스카르 계획을 "지역적인 최후의 해결책"이라 불렀다. 마다가스카르는 외딴 곳에 위치했으며, 생존하기에 악조건을 갖추어 죽음을 재촉했다. 1938년 히틀러에 의해 승인된 재정착 계획은 아돌프 아이히만의 사무실에서 시작되었으며, 1941년에 시작된 유대인 대량 학살이 시작될 때 폐기되었다. 이 계획은 홀로코스트를 향한 중요한 심리적인 단계로 여겨졌다. 1942년 2월 10일, 이 마다가스카르 계획이 중단되었음을 공표했다. 독일 외무부는 소비에트 연방과의 전쟁으로 인해 유대인을 동쪽으로 보냈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나치 관료들은 또한 유럽의 유대인을 시베리아로 이주하기 위한 계획도 세웠다. 오직 팔레스타인만이 나치의 재정착 계획에 대한 괄목할 만한 결과를 냈기 때문에 독일의 시온주의 연방, 나치 정부, 하바라 협정이 이 조약을 시작했다. 이 조약은 60,000명의 독일 유대인을 이주시켰고, 제2차 세계 대전 발발까지 독일에서 팔레스타인에 1억달러을 수송했다.
4. 5. 강제 수용소와 노동 수용소(1933-1945)
나치 독일은 1933년 정권 장악 이후 유대인을 사회에서 격리하고 억압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시행했다. 나치 강제 수용소는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 처음에는 정치범을 수용하는 시설로 사용되었다.[117] 1933년 3월, 다하우 강제 수용소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가 설립되었다.[117] 이 수용소는 초기에 민족 공동체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위협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118]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강제 수용소는 그 성격이 변화하여 유대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하고 강제 노동을 시키는 장소로 변모했다. 독일과 동유럽 전역에 15,000여 개의 강제 수용소와 보조 수용소가 세워졌으며, 이들 수용소는 나치의 인종 정책과 전쟁 수행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수감자들은 화물차에 실려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이 과정은 매우 비인간적이었다. 많은 수감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질병, 굶주림, 탈수 등으로 사망했다.
나치는 '노동을 통한 학살'이라는 정책을 통해 수감자들을 죽음에 이르도록 강제 노동을 시켰다. 수감자들은 전쟁 물자 생산 등에 동원되었으며, 극심한 노동 조건과 굶주림, 질병, 폭력 등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몇몇 수용소에서는 수감자들의 몸에 수감 번호를 새겨 넣어 관리의 편의를 도모했다. 수감자들은 하루 12시간에서 14시간 동안 교대로 일해야 했으며, 노동 전후에는 몇 시간 동안 점호를 받아야 했다.
4. 6. 게토(1940-1945)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는 편입된 영토와 총독부에 유대인을 격리하기 위한 게토를 설치했다.[130] 이는 일시적인 조치로 보였지만, 실제로는 유대인들을 학살 수용소로 보내기 위한 중간 단계였다. 독일은 각 게토에 유대인 공동체 지도자들로 구성된 유대인 평의회(Judenratde)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130] 1939년 9월 29일, 하이드리히는 특수행동부대(Einsatzgruppen) 상부에 보낸 편지에서 이러한 위원회 설립을 첫 번째 명령으로 포함시켰다.[130] 게토는 다양한 시기와 이유로 형성되었으며, 외부 세계와 격리되었다.[130]
유대인 평의회는 주거, 의료, 난방, 물, 식량 배급 등 게토의 일상 운영을 책임져야 했다.[130] 독일 당국은 평의회에 몰수, 강제 노동 구성, 그리고 학살 수용소로의 추방을 용이하게 하도록 지시했다.[130] 평의회는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치 정권 또는 그 대행자와 협력했다.[130] 이들은 끔찍한 협정, 뇌물, 청원을 받아들였고, 사람들은 잔인함과 죽음을 피하기 위해 평의회에 언어, 돈, 노동력, 그리고 마지막으로 목숨을 제공했다.[130]
각 유대인 공동체의 궁극적인 임무는 살해될 추방자 명단을 수집하는 것이었다.[130] 대부분 이 과제를 준수했지만, 일부 지도자들은 사형 이상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은 넘겨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130] 리스트 작성을 거부한 리비우의 요제프 파르나스와 같은 지도자들은 총살되었다.[130] 1942년 10월 14일, 부아로짜의 전체 평의회는 추방에 협력하는 대신 자살했다.[130] 같은 해 7월 23일, 바르샤바의 아담 체르니아코프는 게토가 청산되어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때 자살했다.[130] 차임 룸코프스키와 같이 독재자에게 헌신한 사람들은 살 수 있는 유대인을 살리기 위해 다른 유대인들은 희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130]
독일에서도 게토의 박해와 살인을 용이하게 하는 위원회가 유지되었다.[130] 한 사무실은 유대인 평의회의 권위가 어떤 상황에서도 지지받고 강력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다른 사무실은 평의회 지시를 따르지 않는 유대인은 파괴자로 다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130] 바르샤바 게토에서처럼 협력 관계가 무너졌을 때, 독일은 통제력을 잃었다.[130]
바르샤바 게토는 38만 명으로 가장 컸고, 우치 게토는 16만 명으로 두 번째로 컸다.[130] 미하엘 베렌바움에 따르면, 게토는 거대하고 붐비는 감옥과 같았다.[130] 바르샤바 게토는 폴란드 수도 인구의 30%를 포함했지만, 면적은 수도의 2.4%에 불과했고, 한 방당 평균 9.2명이 거주했다.[130]
1940년과 1942년 사이, 기아와 질병, 특히 장티푸스로 인해 수십만 명이 게토에서 사망했다.[130] 바르샤바 게토에서는 1941년에 43,000명 이상, 테레지엔슈타트에서는 10분의 1 이상이 사망했으며, 1942년에는 거주자의 절반 이상이 사망했다.[130]
아브라함 말릭은 코브노 게토에서의 경험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독일인들은 경찰이 되었고, 그들은 집들을 두드리고 다니기 시작했다. “나가, 나가, 나가, 유대인은 나가(Raus, raus, raus, Juden raus)” 한 아이가 울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도 울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엄마가 그녀의 손에 오줌을 누어서 그 아이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음료로 주었다. 그 경찰이 갔을 때 나는 그 엄마들에게 나오라고 했다. 그런데 한 아이는 두려움 때문에 죽어있었고, 다른 엄마는 그녀 자신의 아이를 기절시켜 죽였었다."[130]
히틀러는 1942년 7월 19일에 추방 시작을 지시했고, 3일 후인 7월 22일에 바르샤바 게토에서의 추방이 시작되었다.[130] 9월 12일까지 30만 명의 사람들이 바르샤바에서 트레블링카 학살 수용소로 화물 기차를 통해 수송되었다.[130] 다른 많은 게토들도 완전히 인구가 줄어들었다.[130]
최초의 빈민가 폭동은 1942년 9월 남동 폴란드 라크바의 작은 마을에서 발생했다.[130] 1943년에는 바르샤바 게토 봉기와 비알리스토크 게토 봉기와 같이 큰 게토에서 무장 저항 시도가 발생했지만, 모두 압도적인 나치 군대에 의해 실패했고, 나머지 유대인들은 살해되거나 죽음의 수용소로 추방되었다.[130]
4. 7. 유대인 대학살(1939-1942)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의 격려에 의해 일부 지역 주민들은 자발적으로 유대인 학살에 가담했다. 1941년 6월 30일, 루마니아 이아시에서는 루마니아 주민과 경찰이 14,000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다.[95] 1941년 7월 예드바브네 포그롬에서는 나치 질서경찰(Ordnungspolizei)이 있는 가운데 300명의 유대인이 불타는 헛간에 갇혔다.[95] 같은 장소에서 독일인에 의해 40명의 유대인 남성이 처형되었는데, 이는 국립추모연구소가 2000년부터 2003년 사이에 실시한 공식 조사에서 발굴에 참여한 고고학 및 인류학 팀이 조사한 두 무덤의 피해자 수를 통해 확인되었다.[95]4. 8. 대량 살인의 새로운 방법
1939년 12월 초, 나치는 가스를 이용한 새로운 대량 살인 방법을 도입했다. 먼저, 가스 실린더와 밀폐된 트렁크 칸막이를 장착한 실험용 가스차가 T-4 작전(나치의 인종 정책 일환으로 안락사를 이용한 장애인 학살 계획)의 일환으로 포메라니아, 동프로이센, 점령된 폴란드의 요양원에 있는 정신 질환자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다.[96] 작센하우젠 수용소에서는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더 큰 가스차가 실린더 대신 엔진의 배기가스를 이용하면서 1941년 11월부터 사용되었다.[96]이 가스차들은 1941년 12월 헤움노 집단 수용소에 소개되었고, 그중 15대는 점령된 소련에서 대량 살상 조직인 아인자츠그루펜에 의해 사용되었다.[96] 이 가스차는 국가안전본부의 감독 아래에서 개발되었고 운영되었다.[96] 또한 대략 50만 명의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었는데, 그 사람들은 주로 유대인이었지만 집시와 다른 나라 사람들도 포함되었다.[96] 가스차는 신중하게 감독받았고, 한 달 동안의 관찰 후의 한 기록에서는 "기계에 어떠한 결함도 나타나지 않고 세 대의 가스차를 이용하여 9만 7천 번이 진행되었다"라고 쓰여 있다.[96]
새로운 다중 살인 기법의 필요성은 군사 정부의 통치자인 한스 프랑크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한스 프랑크는 다수의 사람들을 간단히 쏘아 죽일 수는 없다고 말했다.[96]
"우리는 그들을 제거할 방법으로 설계된 단계를 밟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나치 친위대가 독성 가스를 이용하여 거대한 규모의 살인이 동반된 실험을 하게 만든 문제였다. 크리스티안 비르트는 가스실을 발명한 사람으로 생각된다.[96]
4. 9. 반제 회의와 최종해결법(1942-1945)
이스라엘 역사학자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는 홀로코스트의 기본적 동기가 순수하게 이데올로기적이었다고 주장한다.[93] 독일 역사학자 에버하르트 옉켈(Eberhard Jäckel)은 국가가 특정 인간 집단을 속전속결로 죽일 것을 공포하고 실행한 유례는 없었다고 말한다.[94]학살은 독일 점령지역 전역에서 조직적으로 자행되었으며,[95] 특히 유럽 중부와 동부 지역에서 심했다. 1939년에 700만 명이 넘었던 이 지역 유태인 인구 중 약 500만 명이 학살당했으며, 폴란드에서 300만 명, 소련에서 백만 명이 희생되었다. 반제 회의(Wannsee Protocol)에서는 나치당이 중립 지역에서도 “궁극적 해결책(Final Solution)”을 실행할 계획이었다고 밝혔다.[96] 3대 혹은 4대에라도 유태인 조부가 있는 사람은 예외 없이 말살 대상이었다.[97]
반제 회의는 1942년 1월 20일 베를린 교외에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약 15명의 나치 지도자들이 참석했다. 회의의 목적은 유럽 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전반적인 해결 방법을 논의하고, 대량 살인을 계획하는 것이었다. 특히 장관급 관료들이 이 정책에 대한 지식과 책임을 공유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아돌프 아이히만에 의해 작성된 회의록은 "완곡 어법 언어"로 쓰여져 정확한 단어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하이드리히는 동쪽으로 유대인을 철수시키는 정책이 추방을 대체했다고 연설했다. 이는 임시적인 해결 방법에서 최종 해결책까지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이드리히는 "최종 해결책"은 '유대인들이 강제 노동과 대량 학살의 조합에 의해 전멸할 것이다.'라는 것을 분명히 했다.
관계자들은 소련 통제 하에 200만 명, 헝가리에 85만 명, 기타 점령 국가에 110만 명, 소련 내에 500만 명 등 총 약 650만 명의 유대인이 있다고 들었다. 이들은 모두 폴란드에 있는 절멸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기차에 의해 수송되어 가스로 죽을 예정이었다.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와 같은 일부 캠프에서는 일에 적합한 사람들은 잠시 동안 살 수 있지만, 결국 모두 살해될 것이었다.
5. 반응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만의 범죄가 아닌, 독일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88]
미국의 유대인 역사학자 마이클 베렌바움(Michael Berenbaum)은 자신의 저서에서 “국가(독일)의 정교한 관료제의 모든 부서가 학살 과정에 관여하였다. 독일교회와 내무부는 유대인들의 출생기록을 제공하였고, 우체국은 추방과 시민권 박탈 명령을 배달했으며, 재무부는 유대인의 재산을 몰수하였고, 독일 기업들은 유대인 노동자를 해고하고 유대인 주주들의 권리를 박탈하였다”고 썼다.[88]
이와 더불어 대학교들은 유대인 지원자들을 거부하였고, 유대인 재학생들에게 학위를 수여하지 않았으며 유대인 교수들을 해고하였다. 교통부는 강제수용소로 이송할 기차편을 운영하였다. 독일 제약 회사들은 강제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에게 생체실험을 행하였고, 기업들은 화장터 건설계약권을 따기 위해 경쟁하였다. 또한 데호막(Dehomag)(독일 IBM 지사)사의 천공카드를 이용하여 사망 수치를 매우 정밀하게 측정하였다. 수용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 들어가면서 모든 개인 소지품을 반납하였고, 이는 다시 재분류되어 독일로 보내져 재활용되었다. 또한 독일 중앙은행은 비공개 계정을 통해 유대인학살 피해자들에게 갈취한 재산을 세탁하는 데 일조하였다. 베렌바움은 저서에서 이러한 궁극적 해결책이 “가해자들의 눈에는 ...독일의 가장 큰 업적이었다.” 라고 기술한다.[91]
이스라엘 역사학자 사울 프리들랜더(Saul Friedländer)는 저서에서 “독일과 유럽 전역의 어떠한 사회적 집단, 종교 집단, 학술 기관 혹은 협회도 유대인과의 유대 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고 기술한다.[92] 그는 반유대주의적 정책들이 일반적인 대항 세력(기업, 교회, 기타 이해관계자 등)의 별다른 반대 없이 펼쳐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홀로코스트가 독특한 현상이라고 주장한다.[88]
예후다 바우어(Yehuda Bauer)와 루시 다비도비치(Lucy Dawidowicz)에 따르면 중세시대부터 독일 사회와 문화는 반유대주의로 뒤덮여 왔다. 그리고 이것은 중세 대학살과 나치 수용소 간의 이데올로기적 직접 연결이 되었다.[104]
19세기 후반 독일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과 폴 드 라가르드와 같은 사상가에 의해 개발 된 민족주의 운동이 출현하였다. 이 운동은 의과학적, 생물학적 기반의 인종 차별주의인데, 이것은 유대인을 아리안 족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해 반드시 사투해야 하는 인종으로 여겼다. 민족주의적 반유대주의는 기독교적 반유대주의로부터 나왔지만, 유대인을 종교라기보다는 인종으로 여겼다는 점이 달랐다.[105]
1895년, 옛 독일 제국의 의회 이전에 행해진 연설에서 민족주의 지도자 헤르만 알바르트(Hermann Ahlwardt)는 유대인을 “육식 동물”과 “콜레라균”이라 칭하며 독일국민의 이익을 위해 처형해야 한다고 말했다.[106] 1912년 발간 된 그의 베스트셀러 "내가 황제라면 Wenn ich der Kaiser wäre"에서 하인리히 그룹의 민족주의 그룹 지도자 알 도이 버밴은 모든 독일 유대인들에게서 독일어 시민권을 박탈하고 외국인 법에 따라 이들의 권리를 축소시킬 것을 촉구했다.[107] 이 그룹은 유대인들에게 소유지를 갖거나 공직에 진출하거나 혹은 언론에 참여하거나 은행업무 그리고 자유로운 직업활동 등이 모두 금지되어 독일의 모든 삶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을 촉구했다. 이 그룹은 1871년 독일 제국이 선포된 이래로 유대인이였던 적이 있거나 적어도 조부모님이 유대인이었던 모든 사람을 유대인으로 명명하였다.[88]
독일 제국 기간 민족주의와 의과학적 인종차별주의는 독일에서 매우 만연했다.[108] 특히 교육을 받은 높은 계층의 사람들이 이 인간 불평등적인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109] 비록 민족주의 정당이 1912년에 독일 제국의회(Reichstag) 선거에서 패배하였지만 반유대주의는 주요 정당들의 기반에 자리잡았다.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Nazi Party; NSDAP)은 민족주의 운동에서 발전하여 1920년에 설립되었으며 반유대주의를 채택하였다.[110]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독일복지의 발전과 함께 나타난 엄청난 과학적, 기술적 변화는 모든 사회문제의 해결이 멀지 않았다는 유토피아적 희망을 만연하게 했다.[111] 그와 동시에 몇몇 사람들은 다른 이들보다 생물학적으로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세계관을 가진 인종차별주의자, 사회진화론 주장자, 우생학자들도 많이 있었다.[112] 역사학자 데틀레프 포이케르트(Detlev Peukert)는 반유대주의가 유대인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유일한 이유가 아니라 굉장히 많은 작은 흐름이 큰 흐름으로 이어졌고 이것이 대학살을 일으키게 된 축적된 과격화의 산물이라고 말했다.[113] 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전전의 낙관적인 분위기는 독일 관료들이 이전에 생각했던 것보다 사회적문제가 더 잘 해결될 수 없음을 알고 환멸로 변했다. 점차 생물학적으로 맞지 않는 삶을 구제하는 것보다 생물학적으로 알맞은 삶들을 구제하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114]
경제 대공황의 경제적인 압박들은 독일 의학계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을 안락사 시키는 것이 고칠 수 있는 사람들을 위해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는 주장을 옹호하게 했다. 1933년에 나치는 힘을 얻게 되었고 그 때쯤 독일에는 이미 인종적으로 가치 있는 사람들을 구하는 반면, 인종적으로 가치 없는 이들을 사회에서 없애자는 사회정책이 존재했다.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그의 증오를 공공연하게 드러냈다. 그의 책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그는 유대인들을 독일의 정치적, 교육적, 문화적 사회에서 배제시키고자 하는 그의 의도를 경고했다. 그가 유대인들을 몰살시키고자 했다고 쓰지는 않았지만 사적으로는 매우 분명하게 얘기 되었다. 이미 1922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그는 그 당시 저널리스트였던 마요르 요제프 헬(Major Joseph Hell)에게 말하기를
:"내가 정말 힘 있는 사람이 되면, 나는 제일 먼저 유대인을 몰살시킬 것이다. 내가 이것을 하게 될만큼 힘이 생기자마자 나는 교통 여건이 허락하는 한 뮌헨의 마리엔플레츠에 교수대를 차례로 지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유대인들은 무차별적으로 교수형을 시킬 것이고 위생에 문제가 없을 만큼 오랜 시간, 악취가 진동할 때까지 그들을 내버려둘 것이다. 그들이 교수대에서 내려오자 마자 다음 유대인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뮌헨에 유대인이 없어질 때까지 교수형을 행할 것이다. 다른 도시들은 이 관행을 따라 독일 전체의 유대인을 모두 몰살시킬 것이다. "[115]
보수적인 반유대주의에 견주어, 독일의 가톨릭에 보다 조용한 반유대주의가 존재했는데 이는 학대에 반대하는 가톨릭 신자들을 없애는데 영향력을 미쳤다. 따라서 학대에 반대하는 유명한 가톨릭의 시위는 유대인 대학살을 반대하는 시위와는 동반되지 않았다.
5. 1. 독일의 대중
이안 커쇼는 1983년 저서 《대중의 의견과 나치 독일의 정치적 반대》에서 나치 시대 바이에른 지역의 일상 생활을 연구했다. 커쇼는 대부분의 바이에른 사람들이 쇼아(Shoah)에 대해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유대인 문제의 최종 해결책"에 대해서는 상당한 우려를 표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우슈비츠로 가는 길은 증오로 만들어졌고 무관심으로 포장되었다"고 비유했다.[1]하지만 커쇼의 이러한 평가는 이스라엘 역사학자 오토 도브 쿨카(Otto Dov Kulka)와 캐나다 역사학자 마이클 케이타(Michael Kater)의 비판을 받았다. 케이타는 커쇼가 반유대주의의 인기를 과소평가했으며, 나치의 과도한 반유대주의가 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독일 사회의 상당수가 여기에 가담했다고 주장했다. 쿨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커쇼의 묘사보다 더 반유대적이었으며, "수동적 공모"가 독일인들의 반응을 더 잘 설명하는 용어라고 주장했다.[1]
나치 정권에 반대했던 독일인들조차도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진 경우가 많았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프 디퍼(Christoph Dipper)는 1983년 에세이에서 반나치 민족 보수주의자들 대부분이 반유대주의자였으며, 1938년까지 유대인에 대한 관료적, 의사 법적 박탈을 받아들였다고 주장했다. 디퍼는 독일 저항 세력 중 누구도 홀로코스트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들이 히틀러에 의해 전복된 후 유대인의 시민권을 회복할 의도는 없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유대인 문제가 존재하며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었다고 주장했다.[1]
2012년 연구에 따르면 베를린에만 3,000개, 함부르크에 1,300개의 다양한 기능을 가진 수용소가 존재했으며, 이를 고려할 때 독일 대중이 박해에 대해 알지 못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결론 내렸다. 로버트 겔라텔리(Robert Gellately)는 대부분의 독일 민간인이 가스실 사용을 제외한 모든 일에 대해 알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역사적 증거는 강제 수용소로 추방된 홀로코스트 희생자들 대다수가 자신들을 기다리는 운명을 알지 못했고, 재정착할 수 있다고 믿었다는 것을 보여준다.[1]
5. 2. 동기
독일 역사학자 Hans Buchheim은 1965년에 발표한 에세이 "Command and Compliance"에서 아우슈비츠 내에서 유대인을 비롯한 수감자들을 살해하는데 있어 가해자들에게 강압적인 명령은 없었다고 주장한다.[131] 그는 범죄나 다름없는 명령들은 충분히 회피할 기회가 있었으며,[88] 이러한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SS친위대원들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되거나 처형당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기록했다.[132] 하인리히 힘러가 대원들에게 '모범적이고 예의바른' 모습을 강조한 만큼 SS친위대는 불필요한 가학행위를 지양했으며, 가학행위는 잔인한 성향을 지녔거나 국가 사회주의에 과도한 충성을 증명하려는 개인들의 돌출행동으로 여겨졌다.[88] 결백한 사람들 중 그런 길로 빠져버린 이들 역시 소속감을 유지하거나, 명령을 거부할 경우 동료로부터 '약자'로 취급받지 않기 위해 그러한 선택을 한 것이지 피할 수 없는 명령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133]1992년, 홀로코스트 사학자 Christopher Browning은 저서 "Ordinary Men: Reserve Police Battalion 101 and the Final Solution in Poland"에서 유대인들을 체포하고 학살하며 수용소로 이송하던 경찰조직을 다뤘다. 101부대라 불린 이 경찰조직의 대원들은 대부분 병역에 부적합한 함부르크 노동계급 출신의 중년 남성들로, 학살에 대한 교육을 받지 않았다. 부대 지휘관은 학살임무가 주어지면 불쾌감을 가지는 부대원들에게 직접 참여하지 않을 선택권을 주었다. 대신 학살현장통제와 저지선형성 등의 간접적인 작업에만 참여하도록 하였다. 500여 명의 부대원 중 15명 미만의 대원만이 이를 선택했고, 대다수는 학살에 적극적으로 동참했다.[134]
스탠리 밀그램은 밀그램 실험을 통해, 응집력이 강한 그룹 내에서는 인정받은 권위자가 내린 명령이 도덕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더라도 대다수의 개인이 복종하듯이 따른다는 가설을 도출했다. Browning은 101부대의 사례가 개인과 집단의 광기와 폭력성보다는 권위에의 복종이나 동류집단 압력에 의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역사가 Sergei Kudryashov는 죽음의 수용소에 필요한 간수들을 훈련하여 제공하던 SS친위대의 트라브니키 훈련소에 대해 연구했다. 이들 중 일부는 포로수용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SS친위대에 자원한 공산권 출신 전쟁포로들도 있었다.[135] Browning은 이러한 Hiwis(자원자)들은 반공의식과 반유대주의를 기준으로 선발되었으며, 대부분 우크라이나 혹은 발트 3국 출신이었다고 전한다.[136] Kudryashov는 이들이 실제로는 반유대주의나 국가 사회주의에 별다른 애착이 없었다고 주장하며(Browning에 의해 확정되진 않음) 여전히 공산주의자로서 살았다고 한다.[137]
그러나 트라브니키 간수들의 대다수는 반유대주의에 관심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SS친위대의 유대인 학살지침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이들의 유대인 학살은 "별다른 감정이나 목적은 없지만 체계적"이었다고 묘사된다.[138] 일단 유대인 집단학살수용소에서 근무한 이 간수의 대다수는 기본적으로 각자 두 자리수 이상의 유대인을 살해했다.[139]
"트라브니키 사나이(Trawnikimänner)"들은 아우슈비츠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소비보르(Sobibór), 트레블링카 II(Treblinka II), 바르샤바(Warsaw)(3회), 쳉스토호바(Częstochowa), 루블린(Lublin), 리비우(Lvov), 라돔(Radom), 크라쿠프(Kraków), 비아위스토크(Białystok)(2회), 마이다네크(Majdanek) 등 "Final Solution"의 모든 주요현장에 파견되어 주도적으로 유대인 학살을 실시했다.[136][140]
5. 3. 집단 학살 수용소
나치독일의 유대인 학살은 히틀러 한 사람의 범죄가 아닌, 독일 사회가 인종차별주의에 동조하는 구조악에 따른 범죄였다.[88]사람들을 조직적으로 집단 말살하기 위한 목적으로 가스실을 구비한 수용소를 지은 것은 홀로코스트의 특징이자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현상이다. 즉, 집단 인간 살상이 유일한 목적인 장소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수용소는 아우슈비츠(Auschwitz)를 비롯해 베우제츠(Belzec), 헤움노(Chełmno), 야세노바츠(Jasenovac), 마이다네크(Majdanek), 말리 트로스테네츠(Maly Trostenets), 소비보르(Sobibor), 트레블링카(Treblinka) 등에 세워졌다.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90만 명, 베우제츠에서 60만 명, 소비보르에서 25만 명이 희생되었다.[100]
1942년, 아우슈비츠와 5개의 수용소들이 집단 학살 수용소(Vernichtungslager)로 지정되어 라인하르트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159][160] 이 중 헤움노(Chełmno)[161]와 마이다네크(Majdanek) 두 수용소는 이미 노동 및 전쟁 포로 수용소로 기능하고 있었기에 학살 기능만 추가하면 되었다. 그 외 베우제츠(Belzec), 소비버(Sobibór), 트레블링카(Treblinka) 세 곳은 오로지 유대인들을 더 많이, 더 빨리 살처분하기 위한 목적으로 건설되었다.
벨라루스의 말리 트로스티네츠(Maly Trostinets)에 동일한 목적의 일곱 번째 수용소가 건설되었고, 발칸반도의 야세노바츠(Jasenovac) 수용소에서는 주로 세르비아 민족이 처리되었다.
이 집단 학살 수용소는 나치 정권의 눈엣가시(주로 공산주의자나 우생학적 불합격자)들이 유폐되고 노동 착취를 당하던 다하우(Dachau)나 벨젠(Belsen) 등 독일 내부에 위치한 집단 수용소와는 구별해야 한다. 또한 독일의 괴뢰국들에 설립되어 전쟁 포로를 비롯한 수감자들의 노동력을 강제로 착취하던 수용소들과도 구별해야 한다.

물론 모든 나치 독일의 수용소에서 기아, 질병, 과로로 인해 매우 높은 사망률이 기록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집단 학살 수용소는 기존의 수용소와는 달리 수감자의 대량 학살만을 위해 설계된 수용소였다.
이러한 집단 학살 수용소는 SS 장교에 의해 운영되었지만, 대부분의 간수와 기간병들은 반유대주의와는 별 인연이 없는 우크라이나나 발트 3국 출신이었다.
5. 4. 가스실

가스실을 갖춘 모든 집단 학살 수용소는 기차를 통해 포로들을 받았다. 때로는 실려 온 그대로 가스실로 보내지기도 했지만, 대개 수용소 군의관이 검사하여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낼 극소수의 인부를 선별했다. 나머지는 접수 플랫폼으로 보내져 모든 소유품을 압수당하고, 알몸으로 가스실에 몰아넣어졌다. 간수들은 대개 방역을 위해 샤워를 시키는 것이라고 알리고는 입실이 완료되면 외부에서 ‘입욕’ 등의 신호를 주고받았다. 가끔씩 입실 전에 비누나 수건을 주어 유대인들의 공황 상태를 예방하기도 했으며, 긴 여정으로 갈증을 호소하는 이들에게는 샤워 후에 지급될 커피가 식고 있으니 빠르게 씻을 준비나 하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162]

아우슈비츠의 소장이었던 루돌프 회스에 따르면, 벙커1은 800명, 벙커2는 1,200명을 한 번에 ‘처분’할 수 있었다고 한다.[163] 일단 가스실에 입실이 완료되면 모든 문은 잠기고 고체 알갱이 상태의 치클론 B가 측벽의 환기구를 통해 투여되어 유독한 사이안화 수소를 내뿜었다. 1/3이 즉사하고 20분 이내에 환기구에 가까운 쪽부터 모든 입실자들이 사망했다.[164] 가스실을 감독했던 SS 군의관 Johann Kremer는 “고함과 비명이 가스실의 모든 틈새를 통해 들려왔고, 이를 통해 그들이 살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쳤는지 알 수 있었다.”고 진술했다.[165] 희생자들이 모두 숨을 거두고 난 실내는 대개 아비규환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뒤틀린 채 죽은 이들의 피부는 붉거나 푸른 반점들로 가득했고 일부는 거품을 물거나 귀에서 피를 흘렸다.[88]
잔여 가스를 모두 제거하고 시신들을 모두 치우는 등 가스실의 사후 처리 작업에는 최대 4시간이 걸렸으며, 화장하기 전 여성의 모발은 잘라내고 치과 의사 포로를 이용해 금니를 적출했다.[166] 비워진 가스실의 바닥을 청소하고 벽은 흰색으로 덧칠했다.[88] 이 모든 작업은 유대인 포로 작업반인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에 의해 수행되었다. 화장터 1과 2의 존더코만도는 화장 시설의 다락에서 살았고 3과 4는 가스실에서 살았다.[167] 이들에 의해 시신 처리 작업이 끝나면 SS 대원이 적출된 금니의 개수와 시신의 구강 상흔 수를 맞춰보고, 만약 금이 누락된 것으로 간주된다면 해당 포로는 그 자리에서 소각로에 던져졌다.[168]
초기에는 시신들을 가스실에서 꺼내 그대로 깊은 구덩이에 묻어 석회로 덮었지만, 1942년 9월에서 11월 사이에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에 의해 다시 꺼내어져 소각되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스실과 화장터는 1943년부터 유대인 학살이 본격화되면서 지어진 것들이다.[169]
5. 5. 유대인의 반발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맞서 유대인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1943년 1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켰으나,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다.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바르샤바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 주도로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했으나, 하인리히 힘러의 강경진압으로 봉기군과 시민 20만 명이 학살되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파르티잔으로 활동하며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이고, 게토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 탈출을 도왔다.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 명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유대인들이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
프랑스에서도 유대인들은 프랑스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며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유대인 청년조직 EEIF는 레지스탕스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을 지원했고, 시오니스트 조직 Armee Juive는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 탈출을 도왔다. 이들은 1944년 파리, 리옹, 툴루즈 등 해방에 참여했다.
140만 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 50만 명은 붉은 군대에, 55만 명은 미군에, 10만 명은 폴란드군, 3만 명은 영국군에 소속되었다. 영국군에는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로 구성된 The Jewish Brigade가 있었고,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
수용소 내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 폭동으로 독일군 간수 다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이 불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되고 600여 명이 탈출했으나 40명만이 종전을 맞았다. 같은 해 8월 소비보르 수용소 탈출 시도로 11명의 SS대원과 간수들이 사망했으나, 300명이 사살되고 탈출자 대다수는 지뢰밭에서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60여 명만이 탈출에 성공하여 소련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944년 8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250명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하고 4번 화장터를 폭파했으나, 탈출 시도는 진압되어 전원 사살되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수동적 태도를 보였지만, 강제 이주에 순응하기보다는 탈출, 협상, 공무 방해, 뇌물 제공 등으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복종을 강제하도록 유도했고,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가 그 대상이었다. 이들은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하여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희생자를 늘렸다.
5. 5. 1. 저항의 정의와 평가
힐베르크는 유대인들이 수 세기 동안 압제자들에게 애원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극단적인 상황을 피함으로써 박해가 수그러들 때까지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적 경험 때문에 유대인 사회는 박해 시기에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바위처럼 다시 재기하며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힐베르크는 "이번만큼은 다르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너무 늦게 깨달았고, 순종의 역사가 각인시킨 타성에 갇혀버렸다고 지적한다.[173]반면 Yehuda Bauer 등 동료 사학자들은 유대인들의 저항 정신을 단순히 물리적 항쟁뿐 아니라, 존엄성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모든 행동을 포함하여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74]
힐베르크는 과잉되고 불명확한 정의로 유대인 저항을 과대평가하는 흐름을 경계하며, 실제로 실행되었던 저항 운동들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경고했다. 그는 유대 사회의 '순응하는 대다수와 행동하는 극소수의 혼재와 불통'을 문제 해결 과정을 흐리는 맹탕 공동체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이는 공동체 스스로 추론 능력과 생존 전략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판했다.[176]
1943년 5월 트레블링카 수용소에서 200명이 탈출하며 폭동이 발생, 독일군 간수 다수가 살해‧제압되고 수용소 건물이 불탔지만, 수감자 900명이 사살되고 600여 명이 탈출했으나 40명만이 종전을 맞았다. 1943년 8월, 소련군 전쟁포로 포함 600여 명의 유대인 수감자들이 소비보르(Sobibór) 집단학살 수용소에서 탈출을 시도, 11명의 SS대원과 간수들이 사망했으나, 중화기로 무장한 수용소 측 공격으로 300명이 사살되고, 탈출자 대다수는 지뢰밭에서 폭사하거나 사살되었다. 60여 명만이 탈출에 성공, 소련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1944년 8월 7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250명의 존더코만도(Sonderkommando)들이 간수들을 공격, 여성 수감자들이 밀반입한 폭약으로 4번 화장터를 폭파하고 3명의 간수를 살해했으나, 탈출 시도는 곧 진압되어 전원 사살되었다.
대다수 유대인들은 저항 활동과 무관한 수동적 태도를 보였지만, 강제 이주에 순응하기보다는 탈출, 협상, 공무 방해, 뇌물 제공 등으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사냥을 지연시켰다.
나치와 RHSA(국가보안본부)는 유대인들의 순종과 수동성을 이용하여 유대 공동체가 자체적으로 복종을 강제하도록 유도했다. 독일의 Reichsvereinigung der Juden(라이히 유대인 정부)와 폴란드 게토의 Judenräte(유대 의회)가 대표적 타겟 조직이었다. 나치는 유대인 권익 보호와 시오니스트 지원 등의 거짓 공약을 제시, 협조를 얻어냈고, 이 두 공동체는 유대인들에게 라이히 정부(나치 독일 정부)에 대한 순종과 협조를 강권, 도피에 전념하던 유대 사회에 혼란을 가중시키고 희생자를 늘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5. 5. 2. 무력봉기 및 연합군/저항군과의 연계
게토에서 비롯된 봉기의 일례로는 1943년 1월, 조악한 무장을 갖춘 유대인들이 SS부대를 4주나 지연시키다 독일 측 원군에 의해 패배했던 바르샤바 게토 봉기가 있다.[176] 이 전투로 유대인 13,000명이 전사하고 57,885명이 추방되거나 집단학살 수용소로 보내졌다.[176] 독일 측 피해는 진영별로 극명하게 갈리는데, 유대인 측 자료에는 독일군 수백 명을 사살했다고 적혀있지만 독일 측에는 17명 사망에 93명 부상으로 적혀있다.[176] 5월에는 비아위스토크 게토에서, 같은 해 9월에는 빌나 게토에서 단기간 봉기가 발생했다.[176]그 외에 가장 유명한 저항사례로는 바르샤바 봉기가 있다.[176] 1944년 8월 1일부터 2달간 지속된 이 봉기는 Tadeusz Bór Komorowski 장군에 의해 주도되어 하루만에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해방지구를 형성하는데에 이르렀다.[176] 하지만 또다른 대규모 봉기를 우려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강경진압이 결정되어, 봉기군 전원과 더불어 20만명에 가까운 시민이 학살되었다.[176] 결국 바르샤바는 1943년의 게토 봉기와 1944년의 무력봉기를 거치면서 초토화되었다.[176]

대전 중 50만명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소련군으로 복역했다.
동유럽에서는 약 2~3만의 유대인이 나치와 그 동맹들을 상대로 파르티잔으로서 활발하게 활동했고,[177][178] 리투아니아에서만 3천이 넘는 독일군이 이들에게 사살되었다.[178] 이들은 주로 게릴라전과 함께 독일군 기반시설에 대한 사보타주를 벌였고, 이따금 게토의 봉기를 유도하거나 수용소의 탈출을 돕기도 하였다.[178] 특히나 유대인 비중이 높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에서는 집단학살 수용소의 비극에서 수천명의 유대인들을 구출하기도 했다.[178] 암스테르담을 비롯한 네덜란드 전역에서도 활발히 게릴라를 벌였고 수많은 유대인들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에 가담하여 활동했다.[179]
프랑스에서 유대인들은 저항군 참여 뿐 아니라 유대 공동체의 자체 저항조직에서도 활발히 활동했었다.[180] 유대인 생존자들은 거의 대부분 프랑스 레지스탕스로서 나치와 비시 괴뢰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벌였다.[180] 이들의 참여율과 적극성은 상당히 높아서 당시 프랑스에서 유대인 비율은 1%가 채 안되었음에도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유대인 비율을 20%에 육박할 정도였다.[180] 유대인 청년조직이었던 EEIF는 비시 괴뢰정부에 의해 해산되자 그대로 레지스탕스 조직에 흡수되어 정보와 자금지원을 담당했다.[181] 시오니스트들 역시 Armee Juive를 결성하여 나치의 유대인 체포와 강제이송을 방해하고 국외로 탈출하는 작업을 수행했다.[181] 위 두 조직은 1944년에 연합하여 파리, 리옹, 툴루즈, 그르노블, 니스의 해방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181]
140만에 가까운 유대인들이 연합군에 지원하여 참전했다.[183] 이들은 각각 50만은 공산권의 붉은 군대에, 55만은 미군에, 10만은 폴란드군, 3만은 영국군에 소속되어 있었다.[183] 영국군에는 5천명의 팔레스타인 출신 유대인들이 모여 The Jewish Brigade을 결성하기도 했고,[183] 독일어에 능통한 이들은 Special Interrogation Group에 자원하여[183] 서부사막 전선 최전방에서 독일군에 사보타주나 특공작전을 벌였다.[1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