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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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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르마니쿠스는 로마 제국의 장군이자 황족으로, 기원전 15년에 태어나 서기 19년에 사망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의 후계자로 지명된 티베리우스의 양자였으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명성을 얻었다. 게르마니아에서 군사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개선식을 거행했으나, 동방 임무 중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아 독살 의혹을 받았다. 그의 죽음은 로마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이후 문학 작품과 예술 작품에서 이상적인 로마인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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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쿠스
기본 정보
겔마니쿠스 흉상
겔마니쿠스 흉상 (Musée Saint-Raymond)
전체 이름겔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칭호겔마니쿠스
출생일기원전 15년 5월 24일
출생지로마, 이탈리아
사망일서기 19년 10월 10일 (34세)
사망 장소안티오키아, 로마 시리아 속주
매장 장소아우구스투스 영묘
가문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
가족 관계
배우자대 아그리피나
자녀네로 카이사르
드루수스 카이사르
가이우스 카이사르 (칼리굴라)
율리아 아그리피나
율리아 드루실라
율리아 리빌라
기타 요절한 3명
아버지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
티베리우스 (양아버지)
어머니소 안토니아
군사 경력
참전 전투대 일리리아 반란
이디스타비소 전투
앙그리바리아 성벽 전투
복무로마 군대
계급장군
정치 경력
직책집정관 (12년, 18년)
로마자 표기
로마자 표기Germanicus Julius Caesar

2. 이름

게르마니쿠스의 출생 시 이름은 확실하게 알려져 있지 않으나,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보통 "드루수스"라고 불림)나 아버지 쪽 삼촌의 이름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3] 일부 역사가들은 그의 ''디에스 루스트리쿠스''에서 아버지의 출생 당시 이름[4]이 "데키무스"였으므로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네로 또는 데키무스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로 이름 지어졌을 수도 있다고 주장한다.[5]

기원전 9년, 아버지 드루수스가 게르마니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사후에 "게르마니쿠스"라는 칭호를 받았고, 게르마니쿠스는 이 칭호를 물려받았다.[6][7]

서기 4년, 삼촌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아들이자 상속자로 입양하면서, 게르마니쿠스는 ''클라우디아 씨족''에서 ''율리아 씨족''으로 입양되었다. 로마식 작명법에 따라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이름을 채택하고 ''아그노멘''(별칭)을 유지하여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되었다.[8] 게르마니쿠스가 ''율리우스'' 가문에 입양되자, 그의 형제 클라우디우스는 아버지의 유일한 법적 대표자가 되었고, 새로운 가문의 수장으로서 "게르마니쿠스"라는 ''아그노멘''을 상속받았다.[9]

3. 가문 및 초기 생애

게르마니쿠스는 기원전 15년 5월 24일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와 소 안토니아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여동생 리빌라와 남동생 클라우디우스를 두었다.[10] 그의 아버지 쪽 할머니는 리비아 드루실라였으며, 어머니 쪽 조부모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 마이너였다.[10] 그는 초기 로마 제국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핵심 인물로, 삼촌인 티베리우스는 두 번째 로마 황제가 되었고, 그의 아들 가이우스가 그 뒤를 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또한 네 번째 황제 클라우디우스의 형제였으며, 다섯 번째 황제 네로의 할아버지였다.[11]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고려했으나, 리비아의 설득으로 티베리우스를 선택했다. 기원전 4년 6월 26일, 아우구스투스는 티베리우스를 입양했지만, 먼저 티베리우스에게 게르마니쿠스를 입양하도록 요구하여 그를 티베리우스 다음의 계승 서열에 두었다.[12] 게르마니쿠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손녀 대 아그리피나와 결혼하여 황실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했다.[11][13][14][15]

이 부부는 아홉 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출생 - 사망비고
네로 카이사르6년 - 31년성년까지 생존
드루수스 카이사르7년경 - 33년성년까지 생존
티베리우스 카이사르불명 - 유아기티베리우스 황제와 혼동하지 말 것
익명불명 - 유아기
가이우스 (장남)불명 - 유년기
가이우스 카이사르 (차남)12년 8월 31일 - 41년 1월 24일훗날 황제 "칼리굴라", 성년까지 생존
소 아그리피나15년 11월 6일 - 59년네로의 어머니, 성년까지 생존
율리아 드루실라16년 9월 16일 - 38년 6월 10일성년까지 생존
율리아 리빌라18년경 - 41년경성년까지 생존



이들 중 티베리우스와 익명은 유아기에 사망했으며, 가이우스 (장남)는 어린 시절에 사망하여, 여섯 명만이 성년이 되었다.[11]

4. 경력

티베리우스에 의해 서기 4년에 입양되었을 당시의 젊은 게르마니쿠스의 흉상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7년, 법정 연령보다 4년 일찍 퀘스토르(재무관)가 되어[16] 일리리쿰에서 티베리우스를 도와 바토니아 전쟁을 진압했다.[17] 소모전과 초토화 작전을 통해 반군을 진압하고, 마자에족을 격파했다.[19][20] 서기 9년에는 달마티아를 공격하여 여러 도시를 점령하고, 살로나 근처 안드레티움 요새에서 바토를 사로잡았다.[23][24]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방어를 담당했다.[43] 서기 12년에는 집정관에 임명되어 군대와 로마 시민들로부터 큰 인기를 얻었다.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라인강 방면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43]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티베리우스프린켑스가 된 후, 독일과 일리리쿰에서 군단 반란이 일어났다. 게르마니쿠스는 병사들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고 자신의 사비를 사용하는 등 협상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질서를 회복했다.[35][36][37]

협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구 사항협상 결과
20년 복무 후 완전 제대가결. 16년 복무 후에는 전투 참여를 제외한 군사 임무 면제(미시오 수브 벡실로)
아우구스투스가 군대에 남긴 도나티붐 지급두 배로 늘려 지급 합의.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마르시족을 기습 공격하고, 브룩테리족, 투반테스족, 우시페테스족을 상대로 승리했다.[38][39]

서기 15년, 게르마니쿠스는 라인강을 건너 카티족을 공격하고, 세게스테스를 구출하고 그의 딸 투스넬다를 포로로 잡았다.[43][44]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게르만족 연합군에 맞서 전투를 벌였으나,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45][48]

서기 16년, 게르마니쿠스는 다시 라인강을 넘어 이디스타비소 평원에서 베저강 전투를 벌여 승리했다.[50][51] 이어서 두 번째 전투에서도 승리했다.[54][55]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많은 병력과 말을 잃었다.[50]

게르마니아에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하여 개선식을 치르게 하고 동방으로 재배치했다.[58]

서기 17년, 게르마니쿠스는 개선식을 거행하고,[62] 동방으로 파견되어 혼란스러운 아시아 속주와 왕국을 재정비했다.[65] 아르메니아 왕을 임명하고, 카파도키아와 콤마게네를 속주로 조직했다.[71][72][73]

4. 1. 바토니아 전쟁 (서기 6년-9년)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7년, 법정 연령인 25세보다 4년 일찍 퀘스토르(재무관)가 되었다.[16] 그는 같은 해에 일리리쿰으로 파견되어 티베리우스가 판노니아인과 달마티아인의 반란, 즉 바토니아 전쟁을 진압하는 것을 도왔다.[17] 그는 징집된 시민과 전 노예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시스키아로 가서 티베리우스를 지원했다.[18][19]

게르마니쿠스가 판노니아에 도착했을 때, 반군은 이미 산악 요새에서 약탈하는 방식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로마 군단은 이러한 전술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티베리우스는 보조 부대를 배치하고 군대를 소규모 부대로 나누어 소모전을 수행하도록 했다. 로마군은 또한 반군을 시골에서 몰아내기 시작하여 무기를 내려놓는 부족에게는 사면을 제공하고, 적을 굶어 죽게 하기 위해 초토화 작전을 시행했다. 이 기간 동안 게르마니쿠스의 부대는 마자에족을 격파했다.[19][20]

서기 8년, 판노니아의 반군은 브레우치족의 바토가 지도자 핀네스를 로마인에게 항복시키면서 붕괴되었다. 그러나 브레우치족의 바토가 전투에서 패배하고 다에시티아테족의 바토에게 처형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이로 인해 판노니아인들은 서로 분열되었고, 로마군은 전투 없이 브레우치족을 진압할 수 있었다. 브레우치족의 평정은 로마인에게 중요한 승리였다.[21][19]

서기 9년, 로마군은 공세를 취해 달마티아로 진격했다. 티베리우스는 군대를 세 부대로 나누었는데,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달마티아 내륙을 지휘했다. 레피두스와 실바누스 휘하의 부대는 페루스타이족과 다에시티아테족을 거의 전멸시켰다.[22] 로마군은 많은 도시를 점령했으며,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하는 부대는 라에티눔, 스플로눔, 세레티움을 점령했다.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 휘하의 로마군은 바토를 살로나 근처의 안드레티움 요새까지 추격하여 포위하고, 공격하여 사로잡았다. 티베리우스가 항복 조건을 협상하는 동안 게르마니쿠스는 주변 지역을 징벌하기 위해 파견되었고, 아르두바 요새와 주변 마을의 항복을 받아냈다. 그는 부관을 보내 나머지 지역을 진압하도록 한 후 티베리우스에게 돌아갔다.[23][24]

4. 2. 바루스 참사 이후 (서기 9년-12년)

Germania Inferior|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la와 Germania Superior|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la에서 군단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게르마니쿠스는 반란 진압을 위해 협상을 진행했다.[35][36][37]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요구 사항협상 결과
20년 복무 후 완전 제대가결. 16년 복무 후에는 전투 참여를 제외한 군사 임무 면제(미시오 수브 벡실로)
아우구스투스가 군대에 남긴 도나티붐 지급두 배로 늘려 지급 합의.



서기 9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바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이 게르만족에게 대패한 후,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게르마니아 방어를 담당했다. 서기 11년과 12년에 게르마니쿠스는 티베리우스와 함께 라인강을 넘어 게르만족을 상대로 원정을 수행하며 로마의 위상을 회복했다.[43]

서기 10/11-13년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의 원정. 분홍색은 아르미니우스가 이끄는 반로마 게르만 연합군, 짙은 녹색은 로마가 직접 통치하는 영토, 노란색은 로마의 속국


서기 12년, 게르마니쿠스는 집정관에 임명되었다. 아버지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의 인기와 유능한 지휘관으로서의 자질 덕분에 군대의 지지가 두터웠으며, 로마 시민들로부터도 전공과 성실한 인품으로 절대적인 인기를 얻었다.

4. 3. 게르마니아 사령관 (서기 13년-16년)

서기 13년, 아우구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라인강 방면 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지휘한 군단은 8개로, 이는 로마 전체 군사력의 약 3분의 1에 달하는 규모였다.[43] 서기 14년 8월,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9월 17일 원로원티베리우스프린켑스로 확정했다. 같은 날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에게 사절단을 파견하여 애도를 표하고 프로콘술 ''임페리움''을 부여했다. 사절단은 10월이 되어서야 도착했다.[33]

독일과 일리리쿰에서는 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 독일에서는 하 라인에 주둔한 제5 알라우다이, 제21 라팍스, 제1 게르마니카, 제20 발레리아 빅트릭스 군단이 반란을 일으켰다.[43]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약속한 보너스를 받지 못했고, 티베리우스의 답변이 없자 반란을 일으켰다.[34] 하 라인 군대는 봉급 인상, 군 복무 기간 단축(20년에서 16년), 백인대장들에 대한 복수를 요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병사들의 불만을 듣고 황제로 추대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티베리우스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가이우스 실리우스 휘하의 상 라인 군대(제2 아우구스타, 제13 게미나, 제16 갈리카, 제14 게미나)에도 반란 소식이 전해지자 회의가 열렸고, 게르마니쿠스는 다음과 같이 협상했다.[35][36][37]

  • 20년 복무 후 완전 제대, 16년 복무 후에는 군사 임무 면제(''미시오 수브 벡실로'')
  • 아우구스투스가 군대에 남긴 도나티붐을 두 배로 지급.


게르마니쿠스는 약속 이행을 위해 자신의 사비를 사용했고, 하 라인과 상 라인의 군대는 질서를 되찾았다. 그는 병사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시족을 기습 공격하여 마을을 학살하고 주변 영토를 약탈했다. 겨울 숙영지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르시족과 라인강 사이에 있던 적대적인 부족들(브룩테리족, 투반테스족, 우시페테스족)을 상대로 성공적인 진격을 이끌었다.[38][39]

로마로 돌아온 티베리우스는 소달레스 아우구스탈레스를 설립했고, 게르마니쿠스는 그 일원이 되었다.[40] 그의 기습 소식에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에서 그의 공로를 기념했고, 원로원은 게르마니쿠스에게 개선식을 수여하기로 결의했다.[41] 오비디우스의 ''파스티''는 게르마니쿠스의 개선식 원로원 결의일을 서기 15년 1월 1일로 기록하고 있다.[42]

4. 3. 1. 게르만족과의 1차 원정 (서기 15년)

서기 15년 초, 게르마니쿠스는 라인강을 건너 카티족을 공격했다. 그는 그들의 수도인 마티움(현재 구덴스베르크 근처의 마덴)을 약탈하고, 주변 지역을 약탈한 후 라인강으로 돌아갔다.[43] 같은 해, 아르미니우스에게 포로로 잡혀 도움을 요청하던 세게스테스로부터 소식을 받았다. 게르마니쿠스의 군대는 세게스테스를 구출하고, 임신한 그의 딸이자 아르미니우스의 아내인 투스넬다를 포로로 데려갔다.[43][44] 이후, 티베리우스의 지시에 따라 임페라토르 칭호를 받았다.[43][44]

아르미니우스는 자신의 부족인 케루스키족과 주변 부족들에게 무기를 들고 일어설 것을 촉구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육상 및 강을 이용한 공세를 조정하여, 군대가 라인강 동쪽으로 진격하고, 북해에서 엠스강을 거슬러 올라가 브룩테리족과 케루스키족을 공격했다.[45] 게르마니쿠스의 군대는 브룩테리족 영토를 통과했는데, 장군 루키우스 스테르티니우스가 전투에서 브룩테리족을 격파한 후 제19군단의 독수리를 되찾았다.[46]

게르마니쿠스의 군단은 북쪽에서 만나 엠스강과 리페강 사이의 시골을 황폐화시켰고, 토이토부르크 숲까지 진입했다. 그곳에서 게르마니쿠스와 그의 부하들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현장을 방문하여 로마 군인들의 유해를 매장하기 시작했다. 반나절 동안의 작업 후, 게르만족과의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유골 매장을 중단했다.[47]

그는 케루스키족의 중심부로 진격했다. 타키투스가 ''폰테스 롱기''("긴 둑길")라고 부르는 엠스강 근처의 늪지대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군대가 로마군을 공격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처음에는 게르마니쿠스의 기병대를 함정에 빠뜨려 피해를 입혔지만, 로마 보병이 지원하여 격퇴시켰다. 이틀 동안의 전투에서 어느 쪽도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게르마니쿠스의 군대는 철수하여 라인강으로 돌아갔다.[45][48]

4. 3. 2. 게르만족과의 2차 원정 (서기 16년)

서기 16년, 게르마니쿠스는 8개 군단을 이끌고 갈리아 및 게르만족 보조 부대와 함께 라인강을 넘어 엠스강베저강으로 진격했다. 그의 군대는 오늘날 린텔른 근처 베저강 유역의 이디스타비소 평원에서 아르미니우스의 군대와 만나 베저강 전투를 벌였다. 타키투스는 이 전투가 로마의 승리였다고 기록했다.[50][51]

아르미니우스와 그의 삼촌 잉귀오머는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지만, 포로로 잡히지는 않았다. 로마 군인들은 티베리우스임페라토르로 칭송하고, 패배한 부족들의 이름을 새긴 무기 더미를 전리품으로 세웠다.[52][53]

로마군의 전리품을 본 게르만족은 엘베강 너머로 퇴각하려 했으나, 분노하여 안그리바리안 벽에서 로마군을 공격하여 두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로마군은 이 공격을 예상하고 다시 게르만족을 격파했다.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만족을 상대로 한 전쟁의 유일한 결론은 절멸뿐이라고 생각하여 포로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승리한 로마군은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긴 둔덕을 세웠다. "티베리우스 카이사르의 군대는 라인강과 엘베강 사이의 부족들을 완전히 정복한 후 이 기념비를 마르스, 유피테르, 아우구스투스에게 바쳤다."[54][55]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일부 군대를 라인강으로 돌려보냈는데, 일부는 육로로, 나머지는 배를 이용해 엠스강을 따라 북해로 향했다. 그러나 바다에 도착하자 폭풍이 몰아쳐 많은 배가 침몰하고 병력과 말이 희생되었다.[50]

그는 가이우스 실리우스에게 기병 3,000명과 보병 33,000명의 혼성 부대를 이끌고 카티족을 공격하여 그들의 영토를 황폐화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더 큰 군대를 이끌고 세 번째로 마르시족을 침략하여 그들의 땅을 초토화했다. 그는 패배한 마르시족의 지도자 말로벤두스에게 서기 9년에 잃어버린 세 개 군단 독수리 중 다른 하나의 위치를 밝히도록 강요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그것을 회수했다.[56][57]

게르마니아에서의 이러한 성공으로 게르마니쿠스는 병사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그는 로마의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군대의 봉기를 진압했으며, 잃어버린 군기를 로마로 돌려보냈다. 그의 행동은 명성을 높였고, 로마 시민들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다. 티베리우스는 이를 알아차리고 게르마니쿠스를 로마로 소환하여 개선식을 치르고 다른 지휘로 재배치될 것이라고 알렸다.[58]

4. 4. 소환 및 동방 임무 (서기 17년-19년)

37년부터 41년까지의 두폰디우스, 앞면에는 게르마니쿠스의 개선, 뒷면에는 게르마니쿠스가 아퀼라를 들고 있는 모습


서기 17년 초, 게르마니쿠스는 로마로 돌아와 5월 26일에 개선식을 거행했다. 그는 몇 명의 중요한 포로를 잡았지만, 아르미니우스는 여전히 도망 중이었다. 그러나 당시 로마에 있었을 수도 있는 스트라본은 아르미니우스의 임신한 아내 투스넬다를 언급하면서,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승리한 그녀의 남편이 사로잡히지 않았고 전쟁 자체가 끝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http://penelope.uchicago.edu/~grout/encyclopaedia_romana/miscellanea/teutoburg/thusnelda.html]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은 그의 개선식의 장관을 훼손하지 못했다. 거의 동시대의 달력은 5월 26일을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가 개선식에서 도시로 들어온 날"로 기록하고 있으며, 그의 아들 가이우스(칼리굴라) 시대에 발행된 동전에는 그가 개선 전차를 타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었고, 뒷면에는 "깃발 회수. 게르만족 격파."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62]

개선 행진에는 아르미니우스의 아내 투스넬다와 그녀의 세 살 된 아들을 포함한 패배한 게르만 부족의 포로들이 길게 늘어섰다.[63] 행렬에는 산, 강, 전투의 복제품이 전시되었고, 전쟁은 종결된 것으로 여겨졌다.[64]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돈을 나눠주었고, 게르마니쿠스는 다음 해에 황제와 함께 집정관직을 맡을 예정이었다. 그 결과, 서기 18년에 게르마니쿠스는 아그리파와 티베리우스가 황제의 후계자였을 때 그랬던 것처럼, 제국의 동부 지역을 하사받았다.[36]

아르메니아와 로마의 동아시아 소국 지도


개선 후, 게르마니쿠스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인 아시아의 속주와 왕국을 재정비하기 위해 아시아로 파견되었다. 당시 상황은 아우구스투스 가문(domus Augusta)의 관심을 필요로 할 정도였다.[65] 게르마니쿠스는 그가 활동할 지역의 다른 총독들과 지휘관들보다 더 강력한 권한(imperium maius)을 부여받았다. 그러나 티베리우스는 시리아의 총독을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로 교체했는데,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조력자(adiutor)가 되도록 의도되었지만, 적대적인 인물로 밝혀졌다.[66] 타키투스에 따르면, 이는 게르마니쿠스를 그가 잘 아는 군대로부터 떼어내 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역사가 리처드 알스톤은 티베리우스가 그의 후계자를 약화시킬 이유가 거의 없다고 말한다.[67]

게르마니쿠스는 17년에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그는 스페스 신전을 복원했고,[66] 그 해 올림픽에서 티베리우스를 위해 전차 경주에서 우승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대한 주요 참고 자료인 유세비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으며, 타키투스 역시 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게르마니쿠스가 1년 안에 그리스를 두 번 방문해야 했음을 의미한다.[68] 또한, 로마에서 집정관직을 수행하기 전에 그는 개선 후 서기 17년 말 전에 떠났다. 그는 아드리아 해의 일리리아 해안을 따라 그리스로 항해했다. 그는 악티움 해전이 있었던 근처 니코폴리스에 도착하여 서기 18년 1월 18일에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다.[69] 그는 양아버지 아우구스투스와 친할아버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관련된 장소를 방문한 후, 레스보스를 거쳐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그는 트로이 유적지와 콜로폰 근처의 아폴로 클라로스 신탁을 방문했다. 피소는 게르마니쿠스와 같은 시기에 출발했지만, 아테네를 거쳐 로도스로 직접 이동했고, 그곳에서 그와 게르마니쿠스가 처음 만났다. 거기서 피소는 시리아로 떠났고, 그는 즉시 부하들에게 충성심을 얻기 위해 장교들을 자기에게 충성하는 사람으로 교체하기 시작했다.[66][70]

다음으로 게르마니쿠스는 시리아를 거쳐 아르메니아로 가서 아르타시스를 파르티아아르타바누스의 요청에 따라 아우구스투스가 폐위시켜 가택 연금한 보노네스를 대신하여 왕으로 임명했다. 카파도키아의 왕도 사망했고, 게르마니쿠스는 퀸투스 베라니우스를 보내 카파도키아를 속주로 조직하게 했다. 이는 티베리우스가 판매세를 1%에서 0.5%로 낮출 수 있었으므로 수익성이 좋은 사업이었다. 새로운 속주에서 얻는 수입은 판매세 인하로 인한 차이를 메우기에 충분했다. 콤마게네 왕국은 자유를 유지할지 속주가 될지 결정하는 문제로 분열되어 양측이 대표단을 보냈고, 게르마니쿠스는 퀸투스 세르바에우스를 보내 속주를 조직하게 했다.[71][72][73]

이러한 문제를 해결한 후, 그는 안티오키아와 유프라테스 강 사이의 시리아 도시인 키루스로 가서 서기 18년의 나머지 기간을 제10군단 프레텐시스의 겨울 주둔지에서 보냈다. 분명히 피소는 여기서 게르마니쿠스에게 참석했고, 명령받았음에도 아르메니아에 군대를 보내지 않아 다퉜다. 아르타바누스는 보노네스를 아르메니아에서 더 멀리 옮겨 그곳에서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해달라고 게르마니쿠스에게 사절을 보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르타바누스를 기쁘게 하고 보노네스와 친했던 피소를 모욕하기 위해, 보노네스를 킬리키아로 옮겨 이에 응했다.[74][75]

5. 의문의 죽음 (서기 19년)



개선식을 치르고 로마로 돌아온 게르마니쿠스는 중동 지역으로 파견되었다. 이는 엘베강 진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리고 라인강까지 후퇴하는, 비판받을 수 있는 철수를 눈에 띄지 않게 하려는 티베리우스의 교묘한 책략이었다. 승리에 도취되어 있던 당시가 그 절호의 기회였다.

19년 안티오키아에서 게르마니쿠스는 갑작스러운 고열로 사망했다. 30세를 갓 넘긴 그의 너무 이른 죽음은 황제 티베리우스나 시리아 총독 피소에 의한 독살설을 불러일으켰다.[66] 티베리우스의 명으로 시리아 총독이 된 피소는 게르마니쿠스가 죽기 직전에 그와 말다툼을 벌였다.[74] 게르마니쿠스의 아내 대 아그리피나는 피소를 격렬하게 추궁했고, 피소는 재판을 받던 중 가문을 지키기 위해 자살했다. 현재는 게르마니쿠스의 사인이 말라리아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 사후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은 로마 시민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원로원은 그를 기리는 다양한 훈장을 수여했다.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로마와 라인 국경, 아시아에 기념 아치가 세워졌다. 그의 아들 칼리굴라는 9월을 '게르마니쿠스'로 개명하며 아버지를 추모했다.[65][66][67][68][69][70][71][72][73][74][75]

7. 문학 활동

게르마니쿠스는 서기 4년에 아라토스의 《파이노메나》를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는 원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지 않고, 시작 부분의 제우스 찬가를 로마 황제를 기리는 내용으로 바꾸는 등 자신의 생각을 반영했다.[95] 그는 이전에 《파이노메나》를 번역했던 키케로의 문체를 따르지 않고, 오비디우스베르길리우스와 같은 당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스타일로 글을 썼다.[96] 게르마니쿠스는 이 작품으로 로마의 천문학 작가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었으며, 그의 작품은 중세 시대까지 주석이 쓰일 정도로 많은 인기를 얻었다.[97]

게르마니쿠스의 《파이노메나》 삽화 사본인 라이덴 아라테아에 수록된 《플레이아데스》, 9세기

8. 역사적 평가

고대 역사가들과 시인들은 게르마니쿠스와 티베리우스를 자주 대조했는데, 전자는 비극적 영웅으로, 후자는 폭군으로 묘사했다. 이러한 서술은 황제의 유능한 지휘관인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질투심 때문에 원수정의 존속이 위협받는다고 보았다. 특히 대중과의 관계에서 게르마니쿠스는 대중을 다룰 수 있는 유능한 지도자로 묘사되는 반면, 티베리우스는 우유부단하고 질투심이 많은 인물로 그려졌다.[98][99]

앤서니 A. 배럿과 같은 역사가들은 게르마니쿠스가 유능한 장군이었다는 점을 인정한다. 그는 티베리우스 휘하에서 판노니아인들과 싸웠고, 라인 강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했으며, 게르마니아로 세 번의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다. 서기 14년에 라인 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군단이 그를 황제로 추대하려 할 정도로 인기가 있었지만, 그는 충성을 유지하며 대신 그들을 이끌고 게르만 부족과 맞서 싸웠다.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인기를 질투했다고 주장하지만, 배럿은 게르마니쿠스가 게르마니아 원정 이후 동부 속주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는 사실로 볼 때, 그가 통치자로 여겨졌다는 점을 시사하며 이 주장에 반박한다. 아우구스투스가 세운 선례에 따라, 아그리파는 제국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을 때 같은 동부 속주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100]

타키투스의 《연대기》는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대한 가장 상세한 기록 중 하나이다.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쿠스를 친절하고 절제된 훌륭한 장군으로 묘사하며, 그의 조기 죽음은 로마로부터 위대한 통치자를 앗아갔다고 말했다.[46] 《연대기》 제1권은 판노니아와 게르마니아(서기 14년)에서 군단의 반란에 대해 광범위하게 다룬다. 대중의 분위기는 반복되는 주제이며, 게르마니쿠스의 운명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연대기》(《연대기》 3.19까지)에서 그와 티베리우스 사이의 관계의 두드러진 특징이다.[98]

이탈리아 움브리아 주 아멜리아의 Museo civico di Amelia에 전시된 게르마니쿠스 청동상


수에토니우스는 황실 기록 보관소뿐만 아니라 아우피디우스 바수스, 클루비우스 루푸스, 파비우스 루스티쿠스의 역사서와 아우구스투스의 친서를 참고했다.[101][102] 그는 게르마니쿠스의 성격과 도덕적 기질에 대해 숭배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다. 그는 《칼리굴라 황제전》의 상당 부분을 게르마니쿠스에게 할애하며, 게르마니쿠스의 육체적, 도덕적 우월함이 동시대인들을 능가했다고 주장했다. 수에토니우스는 또한 게르마니쿠스가 재능 있는 작가였으며, 모든 재능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 친절했다고 말했다.[103]

로마가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접했을 때, 원로원이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전에 시민들은 ''정지령''을 지키기 시작했다. 타키투스는 이것이 로마 시민들이 느낀 진정한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이 시점까지 시민들이 치안 판사의 칙령 없이 죽은 왕족을 기리는 적절한 방법을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83][84]

타키투스와 수에토니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장례식과 사후 훈장을 기록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살리 시가(Carmen Saliare)에, 그리고 아우구스투스 사제직을 위한 명예로운 좌석으로 참나무 화환이 씌워진 쿠룰리스 안석 위에 새겨졌다. 그의 상아 조각상은 키르쿠스 게임(Circus Games) 동안 행렬의 선두에 섰고, 아우구스투스의 사제와 아우구르로서의 그의 직위는 황실 가족 구성원들이 채웠으며, 로마 기사단은 로마의 극장 좌석 구역에 그의 이름을 부여했고, 서기 20년 7월 15일에 그의 초상 뒤에서 말을 탔다.[85][86]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이 '세나투스 콘술툼 데 메모리아 호노란다 게르마니 카이사리스'(Senatus Consultum de memoria honoranda Germanini Caesaris)라는 기념 칙령으로 훈장을 수집했으며, 서기 20년의 집정관에게 게르마니쿠스의 죽음을 기리는 공법인 '렉스 발레리아 아우렐리아'(Lex Valeria Aurelia)를 발표하도록 명령했다. 타키투스는 그에게 바쳐진 훈장을 강조했지만, 장례식과 행렬은 가이우스루키우스, 아그리파의 아들들의 장례식을 신중하게 본떠 만들어졌다. 이것은 아우구스투스에서 티베리우스로의 전환을 통해 '도무스 아우구스타'(domus Augusta)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역할을 했다. 기념 아치가 그를 기리기 위해 로마뿐만 아니라 그가 생전에 통치했던 라인 국경과 아시아에도 세워졌다. 라인 아치는 병사들이 그를 기리는 장례 기념비를 세웠던 그의 아버지의 아치 옆에 세워졌다. 그와 그의 생부의 초상화는 로마 팔라티누스 언덕의 아폴로 신전에 걸렸다.[83][87] 소아시아의 여러 도시가 장군을 기려 게르마니코폴리스로 명명되었다(그중에는 강그라와 게르마니키아가 있다).



게르마니쿠스가 사망한 날, 그의 여동생 리빌라는 드루수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다. 맏이는 게르마니쿠스라고 명명되었으나 일찍 사망했다. 37년에 게르마니쿠스의 유일한 생존 아들인 칼리굴라가 황제가 되어 9월을 그의 아버지를 기려 '게르마니쿠스'로 개명했다.[88]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많은 로마인들은 게르마니쿠스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견하며, 그가 황제가 되었다면 알렉산더의 업적을 쉽게 능가했을 것이라고 믿었다.[2] 그의 저서 『박물지』 8권에서 플리니우스는 게르마니쿠스, 아우구스투스, 알렉산더를 동료 기수로 연결한다: 알렉산더의 말 부케팔로스가 죽자 그는 그를 기려 도시 부케팔리아를 명명했다. 덜 기념비적인 것으로, 아우구스투스의 말은 장례식 무덤을 받았고, 게르마니쿠스는 이에 대한 시를 썼다.[89]

9. 유산

게르마니쿠스는 제위 계승자로서의 두드러진 지위 때문에 많은 예술 작품에 묘사되었다. 그는 종종 전형적인 이상적인 로마인으로 문학 작품에 등장한다.[104] 그의 삶과 성격은 다음의 예술 작품들에서 묘사되었다.


  • 니콜라 포르포라의 이탈리아 오페라 ''게르마니코 인 게르마니아''(1732), 도메니코 아니발리가 연기했다.[105]
  • 영국 조각가 토마스 뱅크스의 대리석 조각 ''게르마니쿠스의 죽음''(1773–1774)[106]
  • 독일 화가 카를 폰 필로티의 그림 ''투스넬다 임 트리움프주크 데스 게르마니쿠스''(1873)[61]
  • 고전학자 로버트 그레이브스의 역사 소설 ''나는 황제 클라우디우스다''(1934)[107]
  • 필립 매키의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더 시저스''(1968), 에릭 플린이 연기했다.[108]
  • 잭 풀먼의 영국 텔레비전 시리즈 ''나는 클라우디우스다''(1976), 데이비드 로브가 연기했다.[10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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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Mileniul imperial al Daciei Editura Științifică și Enciclopedic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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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 웹사이트 Germanicus {{!}} Roman general https://www.britanni[...] Britannica 2024-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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