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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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기원후 9년 게르만족 연합군이 로마 제국 군대를 격파한 전투이다. 로마는 게르마니아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확대하려 했으나, 케루스키족의 아르미니우스를 중심으로 결집한 게르만족의 저항에 부딪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로마는 3개 군단을 잃고 북서유럽으로의 팽창을 멈추었으며, 이후 게르마니아 지역은 로마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지 못했다. 이 전투는 로마 제국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독일 민족주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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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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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개요 | |
전투명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
다른 이름 | 클라데스 바리아나 (라틴어: Clades Variana) 바루스 참사 (독일어: Varusschlacht) 토이토부르크 숲의 전투 (독일어: Schlacht im Teutoburger Wald) |
위치 | 니더작센주 오스나브뤼크, 현재의 브람셰 부근 (추정) |
좌표 | N |
관련 분쟁 | 게르만 전쟁 |
결과 | 게르만족의 승리, 로마 제국의 게르마니아 지배 야욕 좌절 |
교전 세력 | |
교전 1 | 게르만족 연합 |
교전 1 상세 | 케루스키족 마르시족 카티족 브루크테리족 카우키족 시캄브리족 |
교전 2 | 로마 제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게르만 연합군 | 아르미니우스 |
로마 제국군 |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 |
병력 규모 | |
게르만 연합군 | 10,000–30,000명 (추정) |
로마 제국군 | 20,000–36,000명 (추정) |
로마 제국군 상세 부대 | 로마 군단 3개 군단 (로마 제17군단, 로마 제18군단, 로마 제19군단) 보조병 6개 대대 기병 3개 중대 |
피해 규모 | |
게르만 연합군 | 5,000명 (추정) |
로마 제국군 | 16,000–20,000명 전사 (거의 전멸)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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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기원후 4년, 훗날 황제가 되는 로마 장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로 진입하여 하게르마니아의 카나네파테스족, 베저강 상류의 카티족,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의 브루크테리족을 복속시켰다. 티베리우스는 세 부족을 정복한 후 베저 강을 건너 돌아갔다.[89][90]
기원후 6년 초, 총독대리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와[89][90] 집정관총독대리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는 13개 군단 10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에비 소속 부족인 마르코만니족 군장 마로보두스를 공격했다.[93][91] 이 군대는 중보병 65,000명, 기마병 10,000명-20,000명, 궁수, 민간인 10,000명-20,000명으로 구성되었다. 기원전 9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 패배한 마르코만니족은 보이족의 영토로 도망쳐 헤르문두리족, 쿠아디족, 셈노네스족, 루기족, 주미족, 부토네스족, 무길로네스족, 시비니족, 랑고바르드족과 동맹을 맺었다.[92]
같은 해,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통수권은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 바루스는 황실과 연이 닿은 파트리키아 가문 출신으로 행정 관료 경력을 쌓은 귀족이었다.[93][94] 그해 가을, 바루스는 신설된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했다.[93]
한편, 기원후 6년 일리리쿰 속주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났다. 다에시티아테스 사람 바토,[95] 브레우키 사람 바토,[96] 판노니아 사람 핀네스[97]가 반란을 이끌었고, 마르코만니족 잔당 일부도 가담했다. 반란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게르만족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 그는 마로보두스를 마르코만니의 왕으로 인정하고[98] 발칸 반도로 8개 군단(아우구스투스 제8군단, 아폴로 제15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탐욕스러운 제21군단, 쌍둥이 제13군단, 쌍둥이 제14군단, 갈리아 제16군단, 그리고 어느 군단인지 불확실한 군단 하나[99])을 파견했다.
일리리아족의 대반란은 로마의 세금 징수관들의 학대, 지속적인 멸시와 식량 부족, 높은 세금에 대한 불만으로 인해 일어났다. 이로 인해 로마 군단의 절반 가량과 지휘관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발칸 반도에 발이 묶였다. 게르마니아의 황제대리 법무관대행으로 부임한 바루스에게는 불과 3개 군단밖에 주어지지 않았는데, 이는 로마의 향후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인 요인이 되었다.
바루스는 유대 속주를 다스리면서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으로 제국 전체에 악명이 높았다. 민중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원로원에서는 바루스를 매우 신뢰했다. 라인 강변의 바루스는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군단들은 원래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의 지휘를 받던 군단이었는데, 사투르니우스는 개선식에 참여하기 위해 중앙 로마 시로 돌아가 있었다.[100] 모군티아쿰(오늘날의 독일 마인츠) 카스트룸에 주둔한 겨울 대비용 2개 군단은 바루스의 조카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지휘했다.[99]
기원전 11년-기원전 9년에 드루수스의 게르만족 정벌이 있은 후, 케루스키족 군장 세기메루스는 두 아들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102][103][104][105] 아르미니우스는 유년기를 로마에서 볼모 생활로 보내면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기사 자리까지 올랐다. 로마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조언자가 되어 신뢰를 얻었지만,[108] 뒤로는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동맹을 주선했다. 그는 체루스키족,[93] 마르시족,[93] 카티족,[93] 브루크테리족,[93] 카우키족, 시캄브리족, 그리고 기원전 58년 보스게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토벌당했던 수에비의 잔당들 등을 포섭했다.[109] 바루스의 폭압적 통치와 피정복민에 대한 잔혹함으로 인해 게르만족들 사이에 집단적 분노가 형성되었고,[101] 아르미니우스는 흩어진 부족들을 로마에 대한 증오를 공통점으로 이용해 하나로 결속시켰다.[110]
기원후 6년-9년에 일어난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을 위해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단 11개 중 8개 군단이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밖에 남지 않았다.[99] 아르미니우스는 이를 절호의 기회로 보았다.[98]
2. 1. 로마의 게르마니아 정책
로마 공화국은 기원전 1세기에 급격하게 팽창했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 치하에서 갈리아 전쟁(기원전 58년~50년)을 통해 서유럽 대부분과 브리튼 제도 일부를 정복했다. 이 전쟁에는 갈리아인뿐만 아니라 다양한 게르만족과의 전투도 포함되었다. 카이사르는 두 번 라인강을 건넜지만, 결정적인 전투는 없었다. 카이사르의 내전(기원전 49년~45년)이 다가오면서 그의 정복은 끝났다.이후 20년 동안 로마는 권력 투쟁에 휩싸여 유럽 대륙을 거의 소홀히 했다. 기원전 31년 악티움 해전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대결하기 위해 갈리아 주둔 군대가 철수했고, 갈리아인들은 즉시 반란을 일으켰다. 기원전 28년에야 로마의 통제가 회복되었다.
기원전 27년, 로마 공화국이 로마 제국으로 재편되고 옥타비아누스가 초대 황제가 되면서 갈리아와 로마 전체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 옥타비아누스는 라인 계곡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갈리아를 세 개의 작은 주로 분할하여 통제를 강화하고자 했다. 군대는 라인 강 근처에 유지되었지만, 게르만 영토에 대한 정책은 불분명했다.
롤리아누스 참패는 갈리아 군단을 재편하는 계기가 되었고, 기원전 12년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 1세를 갈리아 총독으로 임명하며 게르만 부족을 길들이려 했다.
푸블리우스 퀸킬리우스 바루스는 유서 깊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서기 7년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취임하여 아우구스투스의 친척이자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인척 관계를 맺었다. 그의 군대는 3개 로마 군단(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 아욱실리아(보조병) 6개 대대, 동맹군 기병 3개 대대로 구성되었다.
바루스는 게르만 부족들에게 공물을 요구했지만 정복하려 들지 않았다. 케루스키족 등은 이러한 평화주의를 이용하여 전쟁 준비 시간을 벌었다.
2. 1. 1. 드루수스와 티베리우스의 원정
기원전 12년부터 기원전 8년까지 드루수스 1세가 게르마니아를 침공했고, 기원전 3년경부터 서기 6년까지는 티베리우스와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게르마니아를 침공했다.[92]
기원후 4년,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 진입하여 하게르마니아의 카나네파테스족, 베저강 상류의 카티족,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의 브루크테리족을 복종시켰다. 세 부족을 정복한 티베리우스는 베저 강을 건너 돌아갔다.
기원후 6년 초, 총독대리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와[89][90] 집정관총독대리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중보병 65,000명, 기마병 10,000명-20,000명, 궁수, 민간인 10,000명-20,000명으로 이루어진 13개 군단 10만여 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에비 소속 부족인 마르코만니족 군장 마로보두스를 공격했다.[93][91]
기원전 9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 패배한 이후 마르코만니족은 보이족의 영토로 도망쳐 헤르문두리족, 쿠아디족, 셈노네스족, 루기족, 주미족, 부토네스족, 무길로네스족, 시비니족, 랑고바르드족과 동맹을 맺었다.[92] 기원후 6년,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통수권이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 바루스는 황실과 연이 닿은 파트리키아 가문 출신으로 행정관료로 경력을 쌓은 귀족이었다.[93][94] 그해 가을, 신설된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바루스가 부임했다.[93]
같은 해 일리리쿰 속주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터졌다. 다에시티아테스 사람 바토,[95] 브레우키 사람 바토,[96] 판노니아 사람 핀네스[97]가 반란 지도자였고 마르코만니족 잔당 일부가 가담했다. 반란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게르만족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마로보두스를 마르코만니의 왕으로 인정해 준 뒤[98] 발칸 반도로 8개 군단(아우구스투스 제8군단, 아폴로 제15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탐욕스러운 제21군단, 쌍둥이 제13군단, 쌍둥이 제14군단, 갈리아 제16군단, 그리고 어느 군단인지 불확실한 군단 하나[99])을 반란 진압을 위해 파견했다.
로마의 세금 징수관들의 학대, 지속적인 멸시와 식량 부족, 높은 세금에 폭발한 일리리아족의 대반란으로 인해 로마의 모든 군단 중 절반 가량과 그 지휘관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발칸 반도에 발이 묶였다.
2. 1. 2. 바루스의 부임
기원후 4년, 로마의 장군이자 훗날 황제가 되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아에 진입하여 하게르마니아의 카나네파테스족, 베저강 상류의 카티족,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의 브루크테리족을 복종시켰다. 세 부족을 정복한 티베리우스는 베저 강을 건너 돌아갔다.[89][90]
기원후 6년 초, 총독대리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와[89][90] 집정관총독대리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중보병 65,000명, 10,000명-20,000명의 기마병, 궁수, 민간인 10,000명-20,000명으로 이루어진, 13개 군단 100,000 여명의 대군을 이끌고 수에비 소속 부족인 마르코만니족 군장 마로보두스를 공격했다.[93][91] 기원전 9년 네로 클라우디우스 드루수스에게 패배한 이후 마르코만니족은 보이족의 영토로 도망쳐 헤르문두리족, 쿠아디족, 셈노네스족, 루기족, 주미족, 부토네스족, 무길로네스족, 시비니족, 랑고바르드족과 동맹을 맺었다.[92]
기원후 6년,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통수권이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 바루스는 황실과 연이 닿은 파트리키아 가문 출신으로 행정관료로 경력을 쌓은 귀족이었다.[93][94] 그해 가을, 신설된 게르마니아 속주의 총독으로 바루스가 부임했다.[93]
같은 해 일리리쿰 속주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터졌다. 다에시티아테스 사람 바토,[95] 브레우키 사람 바토,[96] 판노니아 사람 핀네스[97]가 반란 지도자였고 마르코만니족 잔당 일부가 가담했다. 반란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게르만족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마로보두스를 마르코만니의 왕으로 인정해 준 뒤[98] 발칸 반도로 8개 군단(아우구스투스 제8군단, 아폴로 제15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탐욕스러운 제21군단, 쌍둥이 제13군단, 쌍둥이 제14군단, 갈리아 제16군단, 그리고 어느 군단인지 불확실한 군단 하나[99])을 파견했다.
지속적인 멸시와 식량 부족, 높은 세금, 로마 세금징수관들의 학대에 폭발한 일리리아족의 대반란으로 인해 로마의 모든 군단 중 절반 가량과 그 지휘관인 티베리우스와 게르마니쿠스가 발칸 반도에 발이 묶였다. 이러한 대규모 군단 동원으로 인해 게르마니아의 황제대리 법무관대행으로 부임한 바루스에게는 불과 3개 군단밖에 주어지지 않았다. 이는 결과적으로 로마의 향후 역사를 결정지은 치명적 요인이 된다.
바루스는 유대 속주를 다스리면서 반란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모조리 십자가형에 처하는 것으로 제국 전체에 악명이 높았다. 민중들은 그를 두려워했지만 반대로 원로원에서는 바루스를 매우 신뢰했다. 라인 강변의 바루스는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을 지휘하게 되었다. 이 세 군단은 원래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우스의 지휘를 받던 군단이었는데, 사투르니우스는 개선식에 참여하기 위해 중앙 로마 시로 돌아가 있었다.[100] 모군티아쿰(오늘날의 독일 마인츠) 카스트룸에 주둔한 겨울 대비용 2개 군단은 바루스의 조카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지휘했다.[99]
2. 2. 게르만족의 저항
기원후 4년,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 진입하여 카나네파테스족, 카티족, 브루크테리족을 복속시켰다. 기원후 6년,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통수권은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 바루스는 황실과 연이 닿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행정 관료 경력을 쌓았다.[93][94]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돌아와 바루스의 조언자가 되어 신뢰를 얻었지만,[108] 뒤로는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동맹을 주선했다. 그는 체루스키족,[93] 마르시족,[93] 카티족,[93] 브루크테리족,[93] 카우키족, 시캄브리족과 보스게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토벌당했던 수에비 잔당들을 포섭했다.[109] 바루스의 폭압적 통치와 잔혹함은 게르만족들의 분노를 일으켰고,[101] 아르미니우스는 이를 이용하여 부족들을 결속시켰다.[110]
기원전 11년부터 기원전 9년까지 드루수스의 게르만족 정벌 이후, 케루스키족 군장 세기메루스는 두 아들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102][103][104][105]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기사 계급까지 올랐다.
기원후 6년부터 9년까지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나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단 11개 중 8개가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만 남았다.[99] 이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98]
2. 2. 1. 아르미니우스의 등장
기원전 1세기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이후, 로마는 라인강을 경계로 삼으려 했으나, 기원전 16년 롤리아누스 참패에서 보듯 게르만족은 저항했다. 아우구스투스는 드루수스 1세를 파견하여 게르만족을 정벌했으나, 드루수스는 기원전 9년 사망했다. 티베리우스가 뒤를 이어 수감브리족을 제압했지만, 정치적 문제로 망명했다. 루키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엘베 강을 건너는 등 로마는 게르마니아에서 우위를 점하는 듯 했다.기원후 4년,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 진입하여 여러 부족을 복속시켰다.[93][94] 기원후 6년, 가이우스 센티우스 사투르니누스[89][90]와 마르쿠스 아에밀리우스 레피두스가 이끄는 대규모 로마군이 마르코만니족의 왕 마로보두스를 공격하려 했으나,[93][91]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나 티베리우스는 마로보두스를 왕으로 인정하고[98] 발칸 반도로 군대를 돌려야 했다.[99]
이후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지휘권은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93] 바루스는 원로원의 신임을 받았으나, 과거 유대 속주에서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고 반란자들을 십자가형에 처한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100] 바루스는 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을 지휘하게 되었고,[100] 그의 조카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모군티아쿰에 주둔한 2개 군단을 지휘했다.[99]
한편, 케루스키족 군장 세기메루스는 두 아들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102][103][104][105] 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군사 교육을 받고 기사 계급까지 올랐다.[102][103][104][105] 그는 로마군 복무 중 로마군의 전술과 약점을 파악했고, 이를 바탕으로 게르만 부족들을 규합하여 로마에 대항할 계획을 세웠다. 아르미니우스가 로마에 등을 돌리기로 결심한 정확한 시점은 불분명하나, 바루스를 속이고 게르만 족장들을 포섭한 것은 서기 9년 초였다.[108]
로마에서 돌아온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신임을 얻었지만,[108] 비밀리에 게르만 부족들 간의 동맹을 주선했다.[109] 그는 체루스키족,[93] 마르시족,[93] 카티족,[93] 브루크테리족,[93] 카우키족, 시캄브리족 등 여러 부족을 포섭했다.[109] 바루스의 폭압적인 통치와 잔혹함은 게르만족들의 분노를 일으켰고,[101] 아르미니우스는 이를 이용하여 부족들을 결속시켰다.[110]
기원후 6년-9년에 일어난 일리리아 대반란으로 인해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단 중 상당수가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만 남았다.[99] 아르미니우스는 이를 기회로 삼았다.[98]
2. 2. 2. 게르만 부족 연합
기원후 4년, 로마의 장군 티베리우스는 게르마니아에 진입하여 하게르마니아의 카나네파테스족, 베저강 상류의 카티족,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의 브루크테리족을 복속시켰다. 기원후 6년, 게르마니아의 로마군 통수권은 푸블리우스 큉크틸리우스 바루스에게 넘어갔다. 바루스는 황실과 연이 닿은 귀족 가문 출신으로 행정 관료 경력을 쌓았다.[93][94]아르미니우스는 로마에서 돌아온 후 바루스의 조언자가 되어 신뢰를 얻었지만,[108] 뒤로는 게르만 부족들 사이의 동맹을 주선했다. 아르미니우스가 포섭한 대상은 체루스키족,[93] 마르시족,[93] 카티족,[93] 브루크테리족,[93] 카우키족, 시캄브리족, 보스게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토벌당했던 수에비 잔당들이었다.[109] 바루스의 폭압적 통치와 피정복민에 대한 잔혹함으로 인해 게르만족들 사이에 집단적 분노가 형성되었고,[101] 아르미니우스는 지리멸렬하게 흩어진 부족들을 로마에 대한 증오를 공통점으로 이용해 하나로 결속시켰다.[110]
기원전 11년부터 기원전 9년까지 드루수스의 게르만족 정벌 이후, 케루스키족 군장 세기메루스는 두 아들 아르미니우스와 플라부스를 로마에 인질로 보냈다.[102][103][104][105] 아르미니우스는 유년기를 로마에서 볼모로 보내면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기사 계급까지 올랐다.
기원후 6년부터 9년까지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나 게르마니아의 로마 군단 11개 중 8개가 발칸 반도로 이동했고,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만 남았다.[99] 이는 아르미니우스에게 절호의 기회였다.[98]
2. 2. 3. 일리리아 대반란
기원후 6년 일리리쿰 속주에서 일리리아 대반란이 일어났다. 이 반란은 다에시티아테스 사람 바토,[95] 브레우키 사람 바토,[96] 판노니아 사람 핀네스[97]가 주도했으며, 마르코만니족 잔당 일부도 가담했다. 반란은 거의 4년 동안 지속되었다. 티베리우스는 일리리쿰의 반란을 진압하느라 게르만족을 더 이상 공격하지 못했다. 티베리우스는 마로보두스를 마르코만니의 왕으로 인정하고,[98] 발칸 반도로 8개 군단(아우구스투스 제8군단, 아폴로 제15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탐욕스러운 제21군단, 쌍둥이 제13군단, 쌍둥이 제14군단, 갈리아 제16군단, 그리고 어느 군단인지 불확실한 군단[99])을 파견했다.로마는 일리리아족의 대반란으로 인해 전체 군단의 절반 가량과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등 지휘관들이 발칸 반도에 묶였다. 이 때문에 게르마니아의 황제대리 법무관대행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밖에 주어지지 않았고, 이는 로마 역사에 치명적인 요인이 된다.
기원후 6년-9년에 일리리아 대반란 진압을 위해 게르마니아 주둔 로마 군단 11개 중 8개가 발칸 반도로 이동하면서, 바루스에게는 3개 군단만 남게 되었다.[99]
3. 전투의 경과
푸블리우스 퀸킬리우스 바루스가 서기 7년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부임한 이후, 게르만 부족들에게 공물을 요구했지만 굳이 정복하려 하지는 않았다. 케르스키족을 비롯한 여러 부족은 바루스의 이러한 평화 정책을 이용하여 전쟁 준비를 위한 시간을 벌었다.
서기 9년 9월 8일 아침, 로마군은 야영지를 철수하고 숲이 우거진 지역을 따라 행군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이동이 늦어지고 군대가 점점 더 길게 늘어졌다.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이 칼크리제로 이동하도록 유도했고, 그곳에서 앙그리바리족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아르미니우스의 동맹인 브룩테리족이 늦은 아침에 로마군을 공격했다.
행군 대열은 15~20km 사이로 매우 길게 늘어져 있었다.[15] 게르만 전사들은 칼, 큰 창, 그리고 ''프레마''라고 불리는 좁은 칼날의 단창으로 무장하고 공격했다. 공격자들은 로마군 전체를 포위하고 투창을 퍼부었다.[21] 이는 로마 군인들을 지치게 하고 보급품에 최대한의 피해를 입히기 위한 짧은 교전이었다.
폭우가 쏟아지면서 로마군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진격을 할 수 없게 된 바루스는 군대에 야영을 명령했다. 견고한 야영지가 세워졌고, 바루스는 군사 회의를 소집했다.
로마군은 탈출을 위해 야간 행군을 감행했지만, 아르미니우스가 칼크리제 언덕 기슭에 설치한 또 다른 함정에 빠졌다. 그곳에는 로마군이 행군할 수 있는 모래가 깔린 탁 트인 지대가 언덕에 의해 좁혀져 숲과 대습지 가장자리의 늪지대 사이에 약 100m의 틈새만 있었다. 도로는 참호에 의해 더 막혔고, 숲 쪽에는 흙벽이 도로를 따라 건설되어 게르만 연합이 은폐된 곳에서 로마군을 공격할 수 있었다. 로마군은 벽을 공격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바루스 다음으로 높은 계급의 장교인 ''레가투스''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병대를 이끌고 병사들을 버리고 도망쳤다. 그는 게르만 기병대에 따라잡혀 곧 살해되었다. 게르만 전사들은 이어서 전장을 습격하여 붕괴된 로마군을 학살했다. 바루스는 자결했고,[15] 벨레유스 파테르쿨루스는 한 지휘관 ''프라에펙투스'' 케이오니우스가 항복한 후 자결했다고 전했으며, 그의 동료 ''프라에펙투스'' 에기우스는 그의 불운한 군대를 지휘하다 죽었다.
로마 측 기록들은 모두 로마의 패배가 완전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3. 1. 바루스의 함정
바루스의 병력은 3개 로마 군단(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과 보조군 6개 대대, 기마병 3개 중대로 구성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게르만 전사들과의 전투 경험이나 게르마니아와 같은 원시림 환경에서의 전투 경험이 없었다. 로마군은 전투용 진형을 갖추지 않았고, 군속들이 섞여 혼란스러운 상태였다. 오스나브뤼크 북동쪽 숲 속으로 진입하자 길이 좁고 질퍽해졌으며, 디오 카시우스는 격렬한 돌풍까지 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바루스는 본대에 앞서 수색대를 보내지 않았다.로마군은 15-20 킬로미터 정도의 긴 대열을 이루며 행군하고 있었다.[108] 이때 가벼운 검과 장창, 날이 좁은 단창(프레마에)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공격해왔다. 게르만 복병들은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했고, 투창이 비처럼 쏟아졌다.[112] 로마에서 교육받은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의 전술을 이해하고 있었고, 흩어진 로마 군단병들을 국소적인 수적 우위로 각개격파했다. 로마군은 간신히 요새화된 숙영지를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오스터카펠른 근교 비헨 구릉지 북쪽으로 탈출했지만, 그 과정에서 큰 손실을 입었고, 탈출한 곳도 울창한 숲이었다. 폭우로 인해 활의 힘줄이 젖어 활을 사용할 수 없었고, 방패도 물을 먹어 무거워져 로마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밤 동안 로마군은 탈주를 계속했지만, 칼크리제 언덕자락도 아르미니우스가 함정을 파둔 곳이었다. 이 곳은 숲과 늪 사이의 폭이 100 미터도 안 되는 좁은 길에만 모래가 덮여 있었고, 그 길도 게르만족이 파 둔 참호 때문에 숲속으로 이어졌다. 숲 속 길 가장자리를 따라 흙벽이 만들어져 있었고, 게르만족들이 그 뒤에 숨어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루스 다음의 최선임자인 총독대리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마병들을 이끌고 보병들을 버린 채 도망갔지만, 곧바로 게르만족 기병들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게르만 전사들은 숲에서 들판으로 뛰쳐나와 무너진 로마군을 학살했다. 바루스는 자결했다.[108] 발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지휘관급 중 케이오니우스라는 자만이 항복했으나 결국 죽었고, 그의 동료 지휘관 에기우스는 절망적인 부대를 이끌고 싸우다 죽었다고 기록했다.[113]
로마군의 사망자는 15,000-20,000 명 정도로 추산된다. 장교들은 대부분 자기 칼 위에 엎어져 자살했다.[108] 타키투스는 많은 로마군 장교들이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져 솥에 삶겨 죽고 그 뼈를 게르만족이 의식에 사용했다고 기록했다.[114] 그 외의 장교들은 몸값을 지불받고 풀려났고, 사병들은 노예가 되었다.
3. 2. 토이토부르크 숲
바루스가 이끌던 병력은 3개의 로마 군단(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과 6개 대대의 보조군(비로마 시민 또는 동맹국 군대), 그리고 3개 중대의 기마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게르만 전사들과의 전투 경험이나 게르마니아와 같은 원시림 환경에서의 전투 경험이 부족했다. 로마군은 전투 진형을 갖추지 않은 채 숙영 준비 중이었고, 군속들이 섞여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오스나브뤼크 북동쪽 숲에 진입하자 길이 좁고 질퍽해졌으며, 디오 카시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격렬한 돌풍까지 불었다. 카시우스는 또한 바루스가 본대에 앞서 수색대를 보내지 않았다고 기록했다.[108]로마군은 15~20 킬로미터에 달하는 긴 대열을 이루며 행군하고 있었다.[108] 이때 가벼운 검, 장창, 날이 좁은 단창(프레마에)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공격해왔다. 게르만 복병들은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투창을 퍼부었다.[112] 로마에서 교육받은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의 전술을 이해하고 있었고, 흩어진 로마 군단병들을 국소적인 수적 우위를 이용해 각개격파했다. 로마군은 간신히 요새화된 숙영지를 구축하고 다음 날 아침 오스터카펠른 근교 비헨 구릉지 북쪽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고, 탈출한 곳도 울창한 숲이었다. 폭우로 인해 활의 힘줄이 젖어 활을 사용할 수 없었고, 방패도 물을 먹어 무거워졌다. 로마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밤 동안 로마군은 탈출을 계속했지만, 칼크리제 언덕자락은 아르미니우스가 미리 함정을 파둔 곳이었다. 이곳은 숲과 늪 사이의 폭이 100 미터도 안 되는 좁은 길에만 모래가 덮여 있어 제대로 걸을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길마저도 게르만족이 파 둔 참호 때문에 숲 속으로 이어졌다. 숲 속 길 가장자리를 따라 흙벽이 만들어져 있었고, 게르만족은 그 뒤에 숨어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루스 다음의 최선임자인 총독대리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마병을 이끌고 보병들을 버린 채 도망쳤으나, 곧바로 게르만족 기병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게르만 전사들은 숲에서 들판으로 뛰쳐나와 무너진 로마군을 학살했다. 바루스는 자결했다.[108] 발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지휘관 중 케이오니우스만이 항복했으나 결국 죽었고, 그의 동료 에기우스는 절망적인 부대를 이끌고 싸우다 영웅적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113]
로마군 사망자는 15,000~20,000명으로 추산된다. 장교들은 대부분 자결했다.[108] 타키투스는 많은 로마군 장교들이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져 솥에 삶겨 죽고 그 뼈가 의식에 사용되었다고 기록했다.[114] 다른 장교들은 몸값을 받고 풀려났고, 사병들은 노예가 되었다.
로마 측 기록은 로마군의 완전한 패배를 강조한다. 칼크리제에서 발굴된 로마군 군장은 6천 점 정도였지만, 게르만족 유물은 박차 조각 하나뿐이어서 게르만족의 손실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게르만족이 사망자들을 따로 장사 지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탈영한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이 로마 갑옷을 착용했을 수 있고, 게르만족은 금속보다 가죽을 방어구 재료로 사용했기에 유물이 썩어 없어졌을 수도 있다.
토이토부르크 숲의 승리 이후 라인 강 동쪽의 모든 로마군 요새, 주둔지, 도시(최소 두 개 이상)들이 사라졌다. 바루스의 조카 루키우스 노니우스 아스프레나스가 지휘하던 2개 군단만이 살아남아 라인 강 경계를 유지하는 데 힘썼다. 할테른암지에 위치한 알리소 요새는[115] 게르만족의 공격을 몇 주 또는 몇 달 동안 막아냈다. 그러나 가망이 없어지자 요새 주둔군은 요새를 버리고 포위를 뚫고 나와 토이토부르크 숲 생존자들과 합류해 라인 강 서쪽으로 도망갔다. 알리소 요새의 저항 덕분에 아스프레나스는 라인 강 서안의 2개 군단을 재정비할 수 있었고, 티베리우스가 증원군을 이끌고 돌아와 아르미니우스가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로 쳐들어오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116][117]
3. 3. 로마군의 궤멸
바루스가 이끌던 로마군은 3개 군단(제17군단, 제18군단, 제19군단)과 보조군 6개 대대, 기마병 3개 중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은 게르만 전사나 원시림 환경에서의 전투 경험이 없었다. 로마군은 숙영 준비 중이었기에 전투 진형을 갖추지 못했고, 군속들이 섞여 혼란스러웠다. 오스나브뤼크 북동쪽 숲 속으로 들어가자 길이 좁고 질퍽해졌으며, 디오 카시우스는 격렬한 돌풍까지 불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바루스는 본대에 앞서 수색대를 보내지 않았다.로마군은 15-20 킬로미터 정도 길게 늘어서서 행군하고 있었다.[108] 이때 가벼운 검과 장창, 날이 좁은 단창(프레마에)으로 무장한 게르만 전사들이 나타났다. 게르만 복병들은 로마군을 완전히 포위하고 투창을 퍼부었다.[112] 로마에서 교육받은 아르미니우스는 로마군의 전술을 이해하고 있었고, 흩어진 로마 군단병들을 국소적인 수적 우위로 각개격파했다. 로마군은 간신히 요새화된 숙영지를 만들고 다음 날 아침 오스터카펠른 근교 비헨 구릉지 북쪽으로 포위를 뚫고 탈출했다. 이 과정에서 큰 손실이 발생했고, 탈출한 곳도 울창한 숲이었다. 폭우로 인해 활의 힘줄이 젖어 활을 쓸 수 없었고, 방패도 물을 먹어 무거워졌다. 로마군은 거의 무방비 상태였다.
밤 동안 로마군은 탈주를 계속했지만, 칼크리제 언덕자락은 아르미니우스가 함정을 파둔 곳이었다. 이 곳은 숲과 늪 사이 폭이 100 미터도 안 되는 좁은 길에만 모래가 덮여 걸을 수 있었고, 그 길도 게르만족이 파 둔 참호 때문에 숲 속으로 이어졌다. 숲 속 길 가장자리에 흙벽이 있어 게르만족이 숨어서 로마군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벽을 무너뜨리려 했지만 실패했다. 바루스 다음 최선임자인 총독대리 누모니우스 발라는 기마병을 이끌고 보병을 버린 채 도망갔지만, 게르만족 기병에게 붙잡혀 살해당했다. 게르만 전사들은 숲에서 들판으로 뛰쳐나와 무너진 로마군을 학살했다. 바루스는 자결했다.[108] 발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는 지휘관 중 케이오니우스 혼자 항복했으나 나중에 죽었고, 에기우스는 절망적인 부대를 이끌고 싸우다 영웅적으로 죽었다고 기록했다.[113]
로마군 사망자는 15,000-20,000 명으로 추산된다. 장교들은 대부분 자기 칼에 엎어져 자살했다.[108] 타키투스는 많은 로마군 장교들이 게르만족의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져 솥에 삶겨 죽고 그 뼈를 게르만족이 의식에 사용했다고 기록했다.[114] 다른 장교들은 몸값을 받고 풀려났고, 사병들은 노예가 되었다.
로마 측 기록들은 로마군의 완벽한 패배를 고통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칼크리제에서 로마군 군장 6천 점이 발굴되었는데, 게르만족 유물은 박차 조각 하나뿐이어서 게르만족 측 손실은 거의 없었음을 시사한다. 다만 승리자들은 쓰러진 동료를 수습할 여유가 있었으므로 게르만족이 사망자들을 따로 장사 지냈기에 칼크리제에 남은 게르만 유물이 없었다는 추측도 있다. 로마군에서 탈영한 게르만족 출신 병사들은 로마 갑주를 착용했기에 발굴된 "로마" 군장 중 일부는 게르만족 것일 수도 있다. 이 당시 게르만족은 금속보다 가죽을 방어구 재료로 사용했기에 다 썩어 없어졌을 수도 있다.
3. 4. 전투의 결과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로마군은 15,000~20,000명의 병력을 잃었고, 지휘관 바루스는 자살했다. 대부분의 장교들 역시 자결했으며, 일부는 게르만족에게 인신공양 제물로 바쳐지거나 노예가 되었다.[108][114] 로마 측 기록은 이 패배를 매우 고통스럽게 묘사하고 있다. 칼크리제에서 발굴된 유물을 보면 게르만족의 피해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이 승리로 라인 강 동쪽의 모든 로마군 시설이 파괴되었고, 바루스의 조카가 지휘하던 2개 군단만이 간신히 살아남아 라인 강 방어선을 유지했다.[115] 알리소 요새는[115] 게르만족의 공격을 오랫동안 막아냈으나 결국 함락되었고, 생존자들은 라인 강 서쪽으로 후퇴했다. 이 덕분에 로마군은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고, 티베리우스가 증원군을 이끌고 와 게르만족의 갈리아 침공을 막을 수 있었다.[116][117]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패전 소식에 충격을 받아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들을 돌려내라(Quintili Vare, legiones redde|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la)!"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십이황제사》에 기록되어 있다. 로마 군단 번호 17, 18, 19는 영구 결번되었는데, 이는 다른 패전으로 잃은 군단들이 재건된 것과 비교하면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정복 전쟁 시대를 종결시켰다. 티베리우스가 군대를 재정비하고 라인 강 방어선을 강화했지만, 로마는 더 이상 게르마니아를 정복하려 하지 않았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머리를 마르코만니 왕 마로보두스에게 보내 반로마 동맹을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마로보두스는 바루스의 머리를 로마에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고, 이후 로마와 아르미니우스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로마가 물러간 후, 아르미니우스와 마로보두스는 전쟁을 벌였고,[118] 마로보두스는 패배하여 로마에 망명했다. 아르미니우스 역시 서기 21년 암살당했다.
4. 로마의 보복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대패한 후, 로마는 보복을 준비했다. 이 전투의 패배는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들을 돌려내라(Quintili Vare, legiones redde|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la)!”고 소리질렀다고 전해진다.[118] 이후 로마 군단에서 17, 18, 19 군단은 재건되지 않았는데, 이는 다른 전쟁에서 패배한 군단들이 재건된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인 조치였다.
아르미니우스는 마로보두스에게 반로마 동맹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마로보두스는 바루스의 머리를 로마로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고, 이후 로마와 아르미니우스 사이의 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로마가 물러간 후, 아르미니우스와 마로보두스는 기원후 17년부터 전투를 벌였다.[118] 마로보두스는 패배하여 로마에 연금되었고, 아르미니우스는 기원후 21년에 암살당했다.
게르마니쿠스의 원정 이후, 세 번째 아퀼라는 기원후 41년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에 카우키족에게서 회수되었다.[136]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50년경 카티족이 상게르마니아를 침공했을 때, 로마 사령관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는 군단병들과 보조군을 이끌고 카티족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포로가 되었던 로마인들이 40년 만에 풀려나기도 했다.[137]
회수된 ''아퀼라''는 로마의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있는 Via dei Fori Imperiali 옆 복수의 마르스 신전에 배치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 1. 게르마니쿠스의 원정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대패 소식을 들은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충격을 받아 벽에 머리를 찧으면서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들을 돌려내라(Quintili Vare, legiones redde|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la)!”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십이황제사》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로마 군단 단대호에서 17과 19는 영구결번이 되었다. 제18군단은 네로 때 재소집되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때 결국 해산되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정복전쟁 시대를 종결시켰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 티베리우스가 전쟁을 대비했고, 아우구스투스 제2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쌍둥이 제13군단이 라인 강 서안으로 보내졌다.
아르미니우스는 마로보두스에게 반로마 동맹을 제안했지만, 마로보두스는 거절하고 바루스의 머리를 로마로 보냈다. 이후 마로보두스는 중립을 지켰고, 로마가 물러간 후 아르미니우스와 전투를 벌였다.[118] 마로보두스는 패배 후 로마에 연금되었고, 아르미니우스도 기원후 21년 암살당했다.
게르마니쿠스의 게르마니아 전역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 대한 보복전이었다. 아르미니우스는 패배했고, 게르만족 동맹은 분쇄되었다. 타키투스는 티베리우스가 게르마니쿠스를 소환한 것은 그의 영광을 시기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했다.[134][135]
4. 1. 1. 주요 전투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충격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게르마니아 재정복을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기원후 14년, 아우구스투스 사후 티베리우스가 황제가 된 직후, 티베리우스의 조카 게르마니쿠스가 대규모 공격을 시작했다. 게르마니쿠스는 마르시족을 기습했고, 이에 자극받은 브루크테리족, 투반티족, 우시페티족이 게르마니쿠스를 습격했지만 큰 피해를 입고 패배했다.[119][120]
다음 해, 로마는 해군까지 동원하여 55,000-70,000명의 대군으로 두 차례의 큰 전투와 여러 차례의 작은 전투를 치렀다. 기원후 15년 봄, 총독대리 카에키나 세베루스가 25,000-3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마르시족을 다시 침공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한편 게르마니쿠스는 30,000-35,000명의 병력으로 카티족을 공격했고, 카티족은 숲 속으로 흩어졌다. 이후 게르마니쿠스는 카티족의 수도 마티움을 불태웠다.[121][122]
기원후 15년, 로마군은 아르미니우스의 아내 투스넬다를 포로로 잡았다.[123] 그 후, 로마군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가 일어났던 장소를 다시 찾아 뼈들을 수습해 매장했다. 그리고 "긴 방죽길(pontes longi|폰테스 롱기la)"이라고 불리는 곳(오늘날의 엠스 근교의 습한 저지대)에서 아르미니우스가 로마군을 공격했다. 처음에는 아르미니우스가 게르마니쿠스의 기마병들을 함정에 가두었지만, 로마군 보병들이 버티면서 전투가 이틀 동안 계속되었다.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게르마니쿠스는 라인 강 서쪽으로 후퇴했다.[124][125]
기원후 16년, 게르마니쿠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다시 한번 게르마니아로 진군했다. 게르마니쿠스는 아르미니우스가 베저 강을 건너게 만들어 오늘날의 민덴 근교에서 게르만족에게 약간의 피해를 입혔다. 그리고 이디스타비소에서 아르미니우스와 회전을 벌였다.(베저 강 전투) 이 회전에서 로마 군단은 게르만족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이후 오늘날의 하노버 서쪽의 앙그리바리 방벽에서 최후 결전이 벌어졌고, 로마군이 승리하여 게르만족들은 엘베강 동쪽까지 밀려났다.[126][127] 게르마니쿠스는 카이우스 실리우스에게 기마병 3,000기와 보병 30,000명의 혼성군을 이끌고 카티족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자신은 주력 병력을 이끌고 마르시족을 세 번째로 침공하여 초토화시켰다.[128]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고 겨울이 다가오자, 게르마니쿠스는 육군을 겨울 주둔지로 후퇴시켰다. 로마 해군은 북해의 폭풍을 맞아 약간의 피해를 입었다.[129] 몇 차례 더 라인 강을 건너 공격을 하면서 토이토부르크 전투 때 잃었던 세 군단 중 두 군단의 아퀼라를 회수했다.[130] 티베리우스는 로마군에게 라인 강 동쪽으로의 후퇴를 명령했고, 게르마니쿠스는 로마로 소환되어 개선식을 치르고 다른 군단을 지휘하게 될 것임을 통보받았다.[131][132][133]
세 번째 아퀼라는 기원후 41년 게르마니쿠스의 동생 클라우디우스가 황제였을 때 카우키족에게서 회수되었다.[136]
타키투스의 기록에 따르면, 기원후 50년경 카티족이 상게르마니아를 침공했다. 로마 사령관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쿤두스는 군단병들과 반기오네스족과 네메테스족에서 징병된 보조군들을 이끌고 카티족을 격퇴시켰다. 카티족에게 붙잡힌 로마인 포로들이 풀려났는데, 그중에는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싸웠다가 거의 40년간 포로 생활을 한 이도 있었다.[137]
4. 2. 원정의 중단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대패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아 벽에 머리를 찧으며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들을 돌려내라(Quintili Vare, legiones redde|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la)!”고 소리질렀다고 한다. 이는 수에토니우스의 《십이황제사》에 기록되어 있다.[118]이후 로마 군단 단대호에서 17과 19는 영구결번이 되었다. 제18군단은 네로 때 재소집되었지만 베스파시아누스 때 결국 해산되었다. 다른 전쟁들에서 참패를 겪은 군단들이 재건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이례적인 조치였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40여년 전 내전기 이후 서유럽에서 연전연승 팽창을 거듭하던 로마의 정복전쟁 시대를 종결시켰다. 아우구스투스의 양자로 입적된 티베리우스가 전쟁을 대비했고, 아우구스투스 제2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쌍둥이 제13군단이 라인 강 서안으로 보내져 소멸된 17-19군단의 빈자리를 메웠다.
아르미니우스는 바루스의 머리를 잘라 심하게 훼손시킨 뒤 로마에게 마르코만니 왕으로 인정받은 마로보두스에게 보내면서 반로마 동맹을 제안했다. 마로보두스는 아르미니우스의 제안을 거절하고 바루스의 머리를 로마로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후 마로보두스는 로마와 아르미니우스가 싸우는 동안 중립을 지켰다. 로마가 물러간 이후 기원후 17년부터 아르미니우스와 마로보두스가 맞붙어 싸웠다.[118] 패배한 마로보두스는 기원후 19년 이탈리아로 도망갔다가 로마에 의해 연금에 처해졌다. 아르미니우스도 기원후 21년 암살당했다.
5. 역사적 영향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 제국의 팽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전투는 서로마 제국에서 40여 년간 지속된 정복 전쟁 시대를 종결시켰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패전 소식에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로마 군단에서 17, 19군단은 영구 결번 처리되었다.[118]
15세기에 로마 측 기록이 재발견되면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북서유럽 팽창을 멈추게 한 분수령으로 평가받았다. 19세기에는 독일 국민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며, 라인 강이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국경이 된 것은 단순히 기능적으로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로마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이후에도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여러 차례 징벌 전쟁을 수행했으며,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너머 지역을 간접 통치하려 했다.
19세기 독일에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가 로마의 진군을 멈추게 했다고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로마는 참사 이후에도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여러 차례 징벌 전쟁을 수행했다. 로마는 야만 부족들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 이상의 정복이나 팽창 의도는 없었다.[141]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하르초른 고지 전투(기원후 235년)는 로마가 베저강 동쪽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준다.[142]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로마는 오늘날의 체코, 슬로바키아,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제했지만, 콤모두스는 재정 부담을 이유로 합병을 포기했다.[143][144][145]
아르미니우스 사후 로마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너머 대게르마니아 지역을 간접 통치하려 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조카 이탈리쿠스가 체루스키의 제후왕으로 임명되었고,[146][147] 쿼디족의 제후왕 반니우스가 마르코만니의 지배자로 인정되었다.[148][149] 91년-92년에는 로마의 제후로 포섭된 게르만 연맹국가 루기가 오늘날의 폴란드 지역의 수에비와 싸울 때 로마군이 파견되어 루기를 돕기도 했다.[150]
15세기 타키투스의 역사 기록이 재발견되면서 게르만족의 승리에 대한 유산은 부활했다. 아르미니우스는 헤르만으로 알려지면서 범게르만주의의 민족주의적 상징이 되었다.[79] 그 이후 토이토부르크 숲은 북유럽으로의 로마 군사 작전을 종식시킨 중요한 충돌로 여겨졌다. 이러한 개념은 특히 19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독일 민족주의 신화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했다.[79]
다음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와 관련된 예술 작품들이다.
제목 | 작가 | 제작 년도 | 비고 |
---|---|---|---|
아르미니우스의 무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 1812년 | -- |
헤르만 전투 |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1813년 | -- |
헤르만이 게르마니아의 사슬을 끊다 | 카를 루스 | 1818년경 | -- |
승리하여 진격하는 헤르만 | 페터 얀센 | 1873년 | --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 튜턴족의 분노 | 파야 요바노비치 | 1889년 | -- |
게르마니쿠스의 불운한 원정 | 작가 미상 | 1900년경 | -- |
최근 일부 학자들은 라인 강이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국경이 된 것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때문이 아니라, 라인 강이 기능적으로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38] 군수, 경제적 측면에서 라인 강은 지중해로부터 직접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이미 갈리아 정복 때부터 상당한 도시와 촌락을 부양하고 있었다. 반면 북게르마니아는 미개척지로, 로마가 조공으로 징수할 재화가 부족했다. 즉, 라인 강은 지키기 쉽고 군수, 경제적으로 적절한 경계였기 때문에 국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팽창이 중단된 다른 이유로는, 로마는 정복한 속주가 자급자족하여 세금을 낼 수 있기를 원했는데, 대게르마니아 지역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더 이상의 영토 정복은 재정 부담만 가중시키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39][140]
5. 1. 로마 제국의 팽창 중단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대패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아 벽에 머리를 찧으며 "퀸틸리우스 바루스, 내 군단들을 돌려내라!"(Quintili Vare, legiones redde|퀸틸리 바레, 레기오네스 레데la)라고 소리질렀다고 수에토니우스의 《십이황제사》는 전한다.이 전투의 패배로 로마 군단은 17, 19군단을 영구결번 처리하였다. 18군단은 네로 황제 때 다시 만들어졌지만,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 해산되었다. 다른 전쟁에서 패배한 군단들이 재건된 것에 비하면 매우 이례적인 조치였다. 이와 같이 제명 처리된 또 다른 군단은 데이오타루스 제22군단으로, 바르 코크바의 난 때 대패를 당한 뒤 폐지되었다.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40여 년간 서유럽에서 승승장구하며 팽창하던 로마의 정복 전쟁을 갑작스럽게 끝냈다. 티베리우스가 전쟁을 대비했고, 아우구스투스 제2군단, 승리의 발레리아 제20군단, 쌍둥이 제13군단이 라인 강 서안으로 이동해 전멸한 17-19군단의 빈자리를 채웠다.
아르미니우스는 마로보두스에게 바루스의 머리를 보내 반로마 동맹을 제안했으나, 마로보두스는 이를 거절하고 바루스의 머리를 로마로 보내 장례를 치르게 했다. 이후 마로보두스는 로마와 아르미니우스 간의 전쟁에서 중립을 지켰다. 로마가 물러간 후, 기원후 17년부터 아르미니우스와 마로보두스가 전투를 벌였다.[118] 마로보두스는 패배 후 기원후 19년 이탈리아로 도망갔다가 로마에 의해 연금되었고, 아르미니우스도 기원후 21년 암살당했다.
15세기에 로마인들의 기록이 재발견되면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북서유럽 팽창을 멈추게 한 분수령으로 평가받았다. 이 학설은 19세기에 널리 퍼져 독일 국민주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라인 강이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국경이 된 것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때문이 아니라, 라인 강이 기능적으로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38] 군수, 경제적 측면에서 라인 강은 지중해로부터 직접 보급을 받을 수 있었고, 이미 갈리아 정복 때부터 상당한 도시와 촌락을 부양하고 있었다. 반면 북게르마니아는 미개척지로, 로마가 조공으로 징수할 재화가 부족했다. 즉, 라인 강은 지키기 쉽고 군수, 경제적으로 적절한 경계였기 때문에 국경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팽창이 중단된 다른 이유로는, 로마는 정복한 속주가 자급자족하여 세금을 낼 수 있기를 원했는데, 대게르마니아 지역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더 이상의 영토 정복은 재정 부담만 가중시키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39][140]
19세기 독일에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가 로마의 진군을 멈추게 했다고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로마는 참사 이후에도 게르마니아 지역에서 여러 차례 징벌 전쟁을 수행했다. 로마는 야만 부족들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하는 것 이상의 정복이나 팽창 의도는 없었다.[141]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하르초른 고지 전투(기원후 235년)는 로마가 베저강 동쪽까지 진출했음을 보여준다.[142]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로마는 오늘날의 체코, 슬로바키아,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제했지만, 콤모두스는 재정 부담을 이유로 합병을 포기했다.[143][144][145]
아르미니우스 사후 로마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너머 대게르마니아 지역을 간접 통치하려 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조카 이탈리쿠스가 체루스키의 제후왕으로 임명되었고,[146][147] 쿼디족의 제후왕 반니우스가 마르코만니의 지배자로 인정되었다.[148][149] 91년-92년에는 로마의 제후로 포섭된 게르만 연맹국가 루기가 오늘날의 폴란드 지역의 수에비와 싸울 때 로마군이 파견되어 루기를 돕기도 했다.[150]
클라우디우스 황제 치하인 41년에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가 차우치족으로부터 세 번째 군단 표준기를 회수했다.[48] 회수된 ''아퀼라''는 아우구스투스 포룸에 있는 복수의 마르스 신전("복수의 마르스") 안에 배치되었을 것이다.
서기 50년경, 카티족이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의 로마 영토를 침입하여 약탈을 시작하자, 로마 사령관 푸블리우스 폼포니우스 세군두스는 로마 기병대와 군단 병력, 방기오네스와 네메테스에서 징집한 보조병들을 동원하여 카티족을 격파하고, 40년 동안 억류되어 있던 로마 포로들을 석방했다.[49]
아르미니우스는 계속 로마에 저항했지만, 갈등은 교착 상태에 머물렀다. 그는 서기 21년에 동족인 게르만족에게 독살당했는데, 그의 독재가 심화되는 것을 두려워한 가족에 의해서였을 가능성이 있다.
15세기에 로마 자료가 재발견된 이후,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북유럽 확장이 라인강에서 끝을 맺게 되는 결정적인 사건으로 여겨졌다. 이 이론은 19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독일 민족주의 신화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최근 일부 학자들은 로마 제국이 게르마니아의 다른 강이 아닌 라인강에서 확장을 멈춘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이유로 이러한 해석을 완화했다.[50] 물류 측면에서 라인강에 주둔한 군대는 론강, 손강, 모젤강을 통해 지중해에서 보급받을 수 있었다. 반면 엘베강에 주둔한 군대는 육로나 대서양 항해를 통해야 했다. 경제적으로 라인강은 갈리아 정복 당시 이미 도시와 마을을 지원하고 있었다. 북 게르마니아는 덜 발달되었고, 조공을 낼 능력이 적었다. 따라서 라인강은 로마에서 접근성이 좋았고, 수비대를 공급하기에 더 적합했다.
로마인들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자급자족 수준이 높은 지역을 정복하는 데 주로 관심이 있었다. 대부분의 대 게르마니아는 도시화 수준이 높지 않았다. 비용/편익 분석에서, 더 많은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위신은 정복으로 인한 재정적 이점의 부족보다 컸다.[51][52]
로마가 통제하던 영토는 노리쿰,[53] 라에티아[54] 및 게르마니아[55]의 로마 속주로 제한되었다. 서부 독일의 로마 속주인 게르마니아 인페리어(수도는 콜로니아 클라우디아 아라 아그리피넨시움)와 게르마니아 수페리어(수도는 모곤티아쿰)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시기에 시작된 오랜 군사 점령 기간 후, 서기 85년에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56] 카시우스 디오는 바루스가 더 큰 게르만 속주의 완전한 식민화를 진행하고 있었다고 강조하며,[57] 이는 발트기르메스 포럼의 바루스 시대 로마 속주 정착지와 같은 최근의 고고학적 발견으로 부분적으로 확인되었다.
전투는 "로마 제국의 진군"에 대한 외적 경계를 설정했고, 해당 영토는 공식적으로 주장되지 않았지만, 로마의 게르마니아에 대한 징벌적 원정은 계속되었으며, 이는 정복이나 확장을 위한 것보다는 게르만 동맹을 로마의 외교적 노력에 부합하는 정치 구조로 강제하기 위한 것이었다.[58] 로마 황제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이끈 원정은 서기 235년 하르츠호른 언덕 전투에서 로마의 승리로 이어졌다.[59]
아르미니우스가 21년에 부족 내 반대 세력에 의해 살해된 후, 로마는 속국 왕을 임명하여 라임스 너머의 게르마니아를 간접적으로 통제하려 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조카인 이탈리쿠스는 케루스키의 왕으로 임명되었고, 방기오와 시도는 수에비의 봉신 공작이 되었으며,[3][4] 콰디족의 속국 왕 바니우스는 마르코만니의 통치자로 강요되었다.[60][61]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로마인들은 마르코만니아와 사르마티아 속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코모두스는 해당 지역 점령이 제국 재무부에 너무 많은 비용이 든다고 판단하여 해당 영토를 합병하려는 최종 계획을 폐기했다.[62][63][64]
도미티아누스 황제 통치 시기인 91년에서 92년 사이에 로마인들은 폴란드에 있는 수에비에 대항하는 그들의 속국인 루기이를 돕기 위해 군사 부대를 파견했다.[65]
5. 2.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
15세기에 타키투스의 역사 기록이 재발견되면서 게르만족의 승리에 대한 유산이 부활했다. 이때 아르미니우스는 "헤르만"(종종 마르틴 루터에게 잘못 귀속된 "아르민"이라는 이름의 오역)으로 알려지면서 ''범게르만주의''의 민족주의적 상징이 되었다.[79] 그 이후 토이토부르크 숲은 북유럽으로의 로마의 팽창을 종식시킨 중요한 충돌로 여겨졌다. 이러한 개념은 특히 19세기에 널리 퍼졌으며, 독일 민족주의 신화의 필수적인 부분을 형성했다.[79]19세기 동안 전투가 벌어진 장소는 독일 국가들에게 독특한 정치적 의미를 지녔다. 역사가 마이클 맥날리는 프랑스가 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 대연합의 지휘관이었던 베르킨게토릭스를 로마 시대의 영웅으로 여겼다고 지적한다. 1865년에 그들은 그의 마지막 저항 장소에 베르킨게토릭스 기념비를 세웠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 대해 광범위하게 기록했기 때문에 갈리아 전쟁의 전투 장소는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은 비슷한 국가 영웅을 찾으면서 바루스 전투의 장소를 그렇게 쉽게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841년에 투에트베르크 근처의 데트몰트 마을 외곽에서 전투 기념비 건설이 시작되었다. 1875년에 완공된 기념비 꼭대기의 조각상은 서쪽, 즉 프랑스를 바라보며 두 국가 간의 경쟁을 반영했다.
통일된 낭만주의 민족주의의 상징으로서, 헤르만을 기념하는 동상이 올려진 ''헤르만 기념비''는 당시 전투가 벌어졌다고 믿었던 데트몰트 인근의 숲 지역에 세워졌다. 대부분 사적으로 기금을 조달하여 기념비는 수십 년 동안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었으며, 1870-71년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으로 국가가 통일된 후인 1875년에야 완공되었다. 완공된 기념비는 보수적인 독일 민족주의의 상징이었다.[79]
다음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와 관련된 예술 작품들이다.
제목 | 작가 | 제작 년도 | 비고 |
---|---|---|---|
아르미니우스의 무덤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 1812년 | -- |
헤르만 전투 | 프로이센 왕세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 1813년 | -- |
헤르만이 게르마니아의 사슬을 끊다 | 카를 루스 | 1818년경 | -- |
승리하여 진격하는 헤르만 | 페터 얀센 | 1873년 | -- |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 튜턴족의 분노 | 파야 요바노비치 | 1889년 | -- |
게르마니쿠스의 불운한 원정 | 작가 미상 | 1900년경 | -- |
5. 3. 전투 지역 비정 (논란)
15세기에 로마인들의 기록이 재발견되면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는 로마의 북서유럽 팽창을 멈추게 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받았다. 이러한 학설은 19세기에 널리 퍼져 독일 국민주의 형성에도 영향을 주었다.그러나 최근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들은 라인 강이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국경이 된 것은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 때문이 아니라, 라인 강이 기능적으로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138] 라인 강은 론 강, 사오네 강, 모젤 강을 통해 지중해로부터 직접적인 보급을 받을 수 있었던 반면, 엘베 강은 긴 내륙 수송이나 위험한 대서양 항해가 필요했다. 또한, 라인 강 유역은 이미 상당한 도시와 촌락이 발달해 있었지만, 북게르마니아는 미개척지나 다름없어 로마가 조공으로 뜯어갈 재화가 부족했다. 즉, 라인 강은 로마 입장에서 지키기 쉽고 군수적, 경제적으로도 적절한 경계였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로마의 팽창이 중단된 다른 이유로는 정복한 속주가 자급자족할 능력이 있어야 세금을 낼 수 있는데, 대게르마니아 지역은 그럴 능력이 없었다는 점이 있다. 즉, 더 이상의 영토 정복은 재정 부담만 가중시키는 한계에 이르렀다는 것이다.[139][140]
19세기 독일에서는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가 로마의 진군을 멈추게 했다고 해석했지만, 실제로는 로마는 이 전투 이후에도 게르마니아 지역 깊숙이 여러 차례 징벌 전쟁을 수행했다. 로마는 야만 부족들이 외교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만드는 것 이상의 정복이나 팽창을 할 의도가 없었다.[141] 기원후 235년 막시미누스 트락스 황제의 하르초른 고지 전투는 니더작센주에 있으며, 베저강 동쪽에 위치한다.[142] 마르코만니 전쟁 이후 로마는 오늘날의 체코, 슬로바키아, 바이에른, 오스트리아, 헝가리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제했지만, 콤모두스가 재정 부담을 이유로 합병을 포기했다.[143][144][145]
아르미니우스 사후 로마는 리메스 게르마니쿠스 너머 대게르마니아 지역을 간접 통치하려 했다. 아르미니우스의 조카 이탈리쿠스가 체루스키의 제후왕으로 임명되고,[146][147] 쿼디족의 제후왕 반니우스가 마르코만니의 지배자로 인정되었다.[148][149]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기인 91년-92년에는 로마의 제후로 포섭된 게르만 연맹국가 루기가 오늘날의 폴란드 지역의 수에비와 싸울 때 로마군이 파견되어 루기를 돕기도 했다.[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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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3. 1. 칼크리제 발굴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위치에 대한 이론은 타키투스의 저서 《게르마니아》와 《연대기》가 재발견된 16세기 초부터 대거 등장했다. 전투가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대한 추정은 주로 지명과 강 이름, 고대 작가들의 지형 묘사, 선사 시대 도로망 조사, 고고학적 발견에 근거했으며, 과학적 근거를 갖춘 이론은 극소수에 불과했다.1966년, 선사 시대 학자이자 지방 고고학자인 하랄드 페트리코비츠는 수백 개의 이론을 다음 네 가지로 통합했다.[67]
이론 | 위치 |
---|---|
북부 이론 | 비헨 언덕과 베저 언덕 북쪽 가장자리 |
리페 이론 | 토이토부르크 숲의 동쪽 절반 또는 이곳과 베저 강 사이 |
뮌스터란트 이론 | 토이토부르크 숲 남쪽, 베컴 근처 또는 그 동쪽 |
남부 이론 | 베스트팔렌 저지대 남동쪽의 구릉 지대 |
거의 2,000년 동안 전투의 정확한 장소는 밝혀지지 않았다. 타키투스의 《연대기》 제1.60–62절에 나오는 '살투스 테우토부르기엔시스'에 대한 언급은 중요한 단서였는데, 이는 중앙 베스트팔렌의 리페 강과 엠스 강 상류 사이의 땅에서 "멀지 않은" 지역을 의미했다. 19세기 동안 이 장소에 대한 여러 이론이 난무했고, 빌레펠트 근처의 오스닝이라고 불리는 길고 숲이 우거진 능선이 전투 장소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이곳의 이름이 토이토부르크 숲으로 바뀌기도 했다.[68]
20세기 후반, 영국인 아마추어 고고학자 토니 클런 소령이 금속 탐지기로 칼크리제 언덕에서 "이상한 로마 동전"을 찾던 중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동전(그리고 그 이후의 동전은 없음)과 타원형 납 로마 슬링 볼트를 발견하면서 연구와 발굴이 촉발되었다.[66] 칼크리제는 오스나브뤼크 북쪽, 니더작센의 언덕 능선인 비헨의 북쪽 경사면에 있는 브람셰 시의 행정 구역에 속한 마을이다. 19세기 역사가 테오도어 몸젠은 로마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연구를 통해 오스닝에서 북서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이 지역을 전투 장소로 처음 제안했다.[69][70][71]
1987년부터 볼프강 슐뤼터 교수가 이끄는 ''오스나브뤼크 문화사 박물관'' 고고학 팀이 초기 체계적인 발굴을 수행했다. 프로젝트 규모가 커지면서 발굴 조직, 박물관 건설 및 운영, 홍보 및 문서화를 중앙 집중화하기 위한 재단이 설립되었고, 1990년부터 수잔느 빌버스-로스트가 발굴을 지휘해 왔다.[69][70][71][72]
발굴 결과, 동서로 거의 24km에 걸쳐 있고 폭이 1km를 조금 넘는 복도에서 전투 잔해가 발견되었다. 이탄 덩굴과 촘촘한 모래로 만든 길고 지그재그형 벽이 미리 건설된 것으로 보이며, 벽 앞쪽에 전투 잔해가 집중되어 있고 뒤쪽에는 부족한 점으로 미루어 게르만 부족의 강력한 방어를 로마군이 뚫을 수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인골은 로마 군단의 사후 매장에 대한 타키투스의 기록과 일치하며,[73] 바루스가 배포한 VAR의 반각이 새겨진 동전도 이 장소가 전투 장소임을 뒷받침한다. 그 결과, 칼크리제는 현재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의 장소로 인식되고 있다.
칼크리제 박물관 및 공원[74]에는 전투에서 나온 흙벽의 일부를 재현한 산책로와 기타 야외 전시물을 갖춘 넓은 야외 공간이 있다. 실내 전시관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망대는 방문객들이 전투 현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해준다. 두 번째 건물에는 티켓 센터, 박물관 매장, 레스토랑이 있으며, 박물관에는 군단병이 잃어버린 징이 박힌 샌들의 조각, 창끝, 원래 은으로 도금된 로마 장교의 의식용 가면 등 현장에서 발견된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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