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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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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로이센은 중세 시대부터 발트족 프루스인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튜턴 기사단의 정복과 프로이센 공국, 왕국 시대를 거치며 군사 강국으로 성장했다. 1701년 프로이센 왕국으로 승격되었고, 프리드리히 대왕 시기에 실레지아를 병합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독일 통일을 주도하며 독일 제국을 건설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패배로 해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영토가 분할되고 해체되었지만, 독일 연방 공화국은 프로이센의 법적 계승 국가로 간주되며, 프로이센의 문화와 유산은 오늘날 독일 사회에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다.

2. 유래

프로이센(Preußen|프로이센de, Prussia|프러시아영어, Borussia, Pruteniala) 등의 지명은 중세 초 이 지역에 살던 발트어계 프루스(Pruss)인에서 유래했다.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발트족의 일파인 프루사(Prūsade)에서 따왔다.

비스와 강 하구 부근에 거주했던 원주민인 프러시아인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3] 민족 대이동 이후에는 솔브인이나 카슈브인과 같은 슬라브계 여러 민족도 이주해 왔다.[3] 다른 설로는 러시아 또는 루스 근처를 "프로이센"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3]

3. 역사

프로이센 지역은 서쪽으로는 포메라니아(폴란드어: 포모제, 독일어: 폼머른)를 통해 독일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네만 강(독일어: 메멜 강)을 경계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인접하며, 비스와 강(독일어: 바이크셀 강)으로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으로 나뉜다. 동프로이센 중앙에는 동서로 프레골랴 강(독일어: 프레겔 강)이 흐르며, 그 강어귀에 중심 도시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가 있다.[8]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비스와 강 하구 부근에 거주했던 프러시아인에서 유래한다. 민족 대이동 이후에는 솔브인이나 카슈브인과 같은 슬라브계 민족도 이주해 왔다. 러시아 또는 루스 근처를 "프로이센"이라고 불렀다는 설도 있다.[8]

1772년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 전역이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단치히를 제외한 서프로이센은 폴란드에 할양되었고, 동프로이센은 자유 도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에 의해 독일의 엑스크레이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폴란드 침공) 후, 전시에는 다시 전역이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대전 후에는 서프로이센 전역이 폴란드 영토가 되고, 동프로이센은 소비에트 연방(러시아, 리투아니아)과 폴란드에 분할되었으며, 그 이후 프로이센이라는 지역 명칭은 현지에서 사용되지 않는다.[8]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프로이센의 주민은 동방 식민으로 이주해 온 독일인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종전 전후 소련이 실시한 독일인 추방 또는 해외 탈출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독일로 이주했고, 현재 프로이센 주민의 대부분은 폴란드인, 러시아인 또는 리투아니아인이 되었다.[8]

3. 1. 초기 역사



고대에는 발트어계 프루스(Pruss)인이 이 지역에 살았는데, 이들의 이름에서 프로이센이라는 지명이 유래했다.[8] 이들은 발트족의 일파인 '''프루사'''(고대 프로이센어: Prūsa)였다.

서기 98년,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에 따르면, 스웨비족, 고트족과 다른 게르만 민족이 비스와 강 양안에서 북동쪽까지 거주하고 있었다. 약 800~900년 후, 이들은 고프로이센인(Old Prussians)으로 불리게 되었고, 997년 이후 폴란드족의 새로운 공국으로부터의 침략에 여러 차례 성공적으로 저항하였다.

10세기서슬라브 민족기독교화가 진행되면서, 977년 폴란드의 볼레스와프 1세는 아달베르트 주교를 군사적 목적과 기독교 전파를 위해 프로이센에 파견하였으나, 프로이센의 이교 사제에 의해 살해되었다.[73] 프로이센인들은 1015년, 1147년, 1161~1166년, 그리고 13세기 중반 여러 차례 폴란드의 침략을 물리쳤다.

12세기, 13세기경 동독일 식민운동 과정에서 튜턴 기사단이 프로이센 지역을 정복하면서 구츠헤르샤프트의 기초가 확립되었다. 1211년, 헝가리의 안드라스 2세 국왕은 튜턴 기사단에게 트란실바니아의 부르젠랜드를 봉토로 하사했다. 1225년, 안드라스 2세는 튜턴 기사단을 추방했고, 기사단은 활동 무대를 발트해 지역으로 옮겼다.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턴 기사단을 초청하여 국경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프로이센 부족을 정복하도록 했다.

13세기 후반 정복 이후의 상황. 보라색 지역은 튜턴 기사단의 수도원 국가 지배 하에 있던 지역


토른 제2조약 이후의 튜턴 기사단(주황색)


60년 동안 프로이센 부족과의 투쟁을 거치면서, 기사단은 프루사를 지배하는 독립 국가를 세웠다. 이후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이 튜턴 기사단에 합류하면서, 기사단은 리보니아(현재 라트비아에스토니아)도 지배하게 되었다. 1252년경에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프로이센 부족인 스칼비안과 서쪽 발트해 연안의 쿠로니아인의 정복을 마무리하고, 메멜 성을 건설했는데, 이 성은 나중에 주요 항구 도시인 클라이페다로 발전했다. 1422년 멜노 조약은 프로이센과 인접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최종 국경을 확정했다.

1356년, 북유럽에서 한자 동맹이 무역 도시들의 연합체로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유럽 본토와 스칸디나비아에서 나가는 모든 무역과 발트해의 모든 외국 선박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9]

독일 동방 식민 과정에서 정착민들이 초청되었고, 이로 인해 독일 영토 동부 국경의 민족 구성, 언어, 문화, 법률이 변화했다. 이러한 정착민들 대부분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저지 독일어가 주요 언어가 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가 지배하던 포메렐리아와 단치히를 1308년 정복한 후 폴란드 왕관과의 초기 긴밀한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크레보 연합(1385년)을 통해 동맹을 맺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13년 전쟁(1454~1466년)은 서프로이센의 한자 도시 연합체인 프로이센 동맹이 기사단에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르 4세 야기에우워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토른 제2조약에서 카지미에르 4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서프로이센을 폴란드에 잃었다. 토른 제2조약에 따라 두 개의 프로이센 국가가 수립되었다.[10]

튜턴 기사단의 수도원 국가 시대 동안,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에게 기사단이 토지를 하사했고, 점차 새로운 프로이센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에서 훈커가 등장하여 프로이센과 후대 독일의 군사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3. 2. 튜턴 기사단국 시대

1226년, 마조비아 공작 콘라트 1세는 튜턴 기사단을 초청하여 국경에 있는 발트해 연안의 프로이센 부족(Old Prussians)을 정복하도록 했다.[8] 이후 60년 동안 프로이센 부족과의 투쟁(Prussian uprisings)을 거치면서, 기사단은 프루사(Prūsa)를 지배하는 독립 국가를 세웠다. 1237년 리보니아 검의 형제단이 튜턴 기사단에 합류하면서, 기사단은 리보니아(Livonia)(현재 라트비아에스토니아)도 지배하게 되었다.[8] 1252년경에는 가장 북쪽에 위치한 프로이센 부족인 스칼비안(Skalvians)과 서쪽 발트해 연안의 쿠로니아인(Curonians)의 정복을 마무리하고, 메멜 성(Memel Castle)을 건설했는데, 이 성은 나중에 주요 항구 도시인 클라이페다(Memel)로 발전했다. 1422년 멜노 조약은 프로이센과 인접한 리투아니아 대공국 사이의 최종 국경을 확정했다.

1356년, 북유럽에서 한자 동맹이 무역 도시들의 연합체로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이 동맹은 유럽 본토와 스칸디나비아에서 나가는 모든 무역과 발트해의 모든 외국 선박 무역을 독점하게 되었다.[9]

독일 동방 식민 과정에서 정착민들이 초청되었고(초청한 자에 대한 정보 필요), 이로 인해 독일 영토 동부 국경의 민족 구성, 언어, 문화, 법률이 변화했다. 이러한 정착민들 대부분이 독일인이었기 때문에 저지 독일어가 주요 언어가 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가 지배하던 포메렐리아그단스크(Danzig)를 1308년 정복한 후 폴란드 왕관과의 초기 긴밀한 관계는 악화되었다. 결국 크레보 연합(1385년)을 통해 동맹을 맺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서 기사단을 패배시켰다.

13년 전쟁(1454~1466년)은 서프로이센의 한자 도시 연합체인 프로이센 동맹이 기사단에 반란을 일으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튜턴 기사단은 토른 제2조약에서 카지미에르 4세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쳐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서프로이센(Royal Prussia)을 폴란드에 잃었다. 토른 제2조약에 따라 두 개의 프로이센 국가가 수립되었다.[10]

튜턴 기사단의 수도원 국가 시대 동안, 신성 로마 제국 출신 용병들에게 기사단이 토지를 하사했고, 점차 새로운 프로이센 귀족 계급이 형성되었다. 이 계급에서 융커(Junkers)가 등장하여 프로이센과 후대 독일의 군사화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1]

3. 3. 프로이센 공국 시대

1525년, 튜턴 기사단국프로이센 공국으로 변경되었고, 호엔촐레른가의 지배하에 놓였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지기스문트가 공국을 상속받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동군연합이 성립되었다.[12]

얀 마테이코의 ''프로이센의 충성 맹세'' 그림.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공작이 1525년 지그문트 1세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폴란드 왕국 왕관에 대한 프로이센의 종속을 인정한 후 프로이센 공국을 봉토로 받았다.


1525년 4월 10일, 폴란드-튜턴 전쟁(1519-1521)을 공식적으로 종식시킨 크라쿠프 조약 체결 후, 폴란드 수도 크라쿠프의 중앙 광장에서 알브레히트 1세는 튜턴 기사단장직에서 사임하고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프로이센 공작" 작위를 받았다. 알브레히트는 봉신의 상징으로 폴란드 국왕으로부터 프로이센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받았다. 깃발에 새겨진 검은 프로이센 독수리에는 지그문트(Sigismundus)를 의미하는 "S"자와 폴란드에 대한 복종의 상징으로 목에 왕관이 추가되었다. 호엔촐레른가의 방계 가문 출신인 알브레히트 1세는 루터교 신자가 되었고 기사단의 프로이센 영토를 세속화했다. 이 지역은 비스툴라 강 어귀 동쪽에 위치하며, 나중에 "프로이센 본토"라고 불리기도 했다. 또한 기사단을 포기함으로써 알브레히트는 이제 결혼하여 합법적인 상속인을 낳을 수 있게 되었다.

1466년의 제2차 토룬 조약에 따라 서프로이센 전역과 동프로이센 일부는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동프로이센을 유지했지만 폴란드 국왕의 종속국 지위가 되었다.

종교 개혁 시대인 1525년, 마지막 독일 기사단장이자 호엔촐레른가 분가의 기사단장 알브레히트(프로이센 공)는 루터파로 개종하고 사임하여 프로이센 공작 칭호를 받았다. 마르틴 루터의 권유로, 프로이센 공국은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국가가 되어 폴란드의 속국이 되었다. 공작의 수도였던 쾨니히스베르크(프로이센)(현 칼리닌그라드)에는 1544년 알브레히트에 의해 설립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가 있었고, 프로테스탄트 교리의 중심지가 되었다.

3. 4. 프로이센 왕국 시대

1657년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이 폴란드의 종주권에서 벗어나 1701년 브란덴부르크를 중심으로 왕국이 되었으며, 프리드리히 1세로서 즉위하였다. 그 이후 급속히 중앙집권화를 추진시켜 관료제를 정비하고 군대를 강화하여 구츠해르를 중심으로 프로이센 형(型)의 절대주의 체제를 확립했다.[13]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1세), 프로이센의 국왕


1701년 1월 1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의 아들인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는 프로이센을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시키고 자신을 프리드리히 1세 국왕으로 즉위했다. 1700년 11월 16일 왕관 조약에서 레오폴트 1세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프리드리히가 "프로이센의 국왕"이 아닌 "프로이센에서의 국왕"이라는 칭호만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국가는 일반적으로 "프로이센"으로 알려지게 되었지만, 브란덴부르크, 폼머른, 서독의 대부분 영토는 프로이센 본토 밖에 있었다. 프리드리히 1세 치세 동안 프로이센 국가는 번영했으며, 그는 국고를 써서 예술을 후원했다.[14]

프리드리히 1세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1713~1740)는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검소하고 실용적인 "병사 국왕"이었다.[15] 그는 프로이센 관료제와 전문적인 상비군의 주요 창시자였으며, 이를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대 중 하나로 발전시켰다. 그의 군대는 단기간 작전에만 참여했다. 북방 전쟁에서 인구 대비 군대 규모를 고려하여, 미라보는 "프로이센은 군대가 있는 국가가 아니라 국가가 있는 군대입니다."라고 말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또한 인구 밀도가 낮은 동프로이센에 잘츠부르크에서 온 2만 명이 넘는 프로테스탄트 난민들을 정착시켰는데, 이는 결국 네만 강 서안과 다른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스톡홀름 조약(1720)에서 그는 스웨덴 폼머른의 절반을 획득했다.[16]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국왕, "병사 국왕"


18세기에 들어서자 프리드리히 2세는 국내의 절대주의를 강화하는 동시에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7년 전쟁 등의 외정을 통하여 슐레지엔, 서프로이센을 병합함으로써 분산적이었던 영토의 통일을 일보 진전시켰다.

1740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가 계승했는데, 그의 업적은 그를 "프리드리히 대왕"으로 명성을 얻게 했다.[17] 왕세자 시절, 프리드리히는 주로 철학과 예술에 집중했다.[18] 그는 뛰어난 플루트 연주자이자 작곡가였다. 1740년, 프로이센 군대는 방비가 허술한 실레시아 국경을 넘어 이 지역을 신속하게 정복했다. 실레시아는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가장 부유한 지역이었다.[19] 이것은 세 차례의 실레시아 전쟁(1740~1763)의 시작을 알렸다.[20] 제1차 실레시아 전쟁(1740~1742)과 제2차 실레시아 전쟁(1744~1745)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1740~1748)과 함께 묶여 있다. 신성 로마 황제 카를 6세는 1740년 10월 20일에 사망했고, 그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가 왕위를 계승했다.

1741년 4월 10일 몰비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군대를 물리침으로써, 프리드리히는 하부 실레시아(실레시아의 북서쪽 절반)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21] 다음 해인 1742년, 그는 상부 실레시아(남동쪽 절반)를 정복했다. 제3차 실레시아 전쟁(7년 전쟁의 일부)에서 프리드리히는 1756년 10월 1일 로보시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를 물리치고 승리했다. 그 후 몇몇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스트리아를 전쟁에서 몰아내려는 시도는 실패하고 점차 절망적인 방어전으로 전락하면서 그 이후 몇 년 동안 그의 상황은 훨씬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1760년 11월 3일 프로이센 국왕은 토르가우 전투에서 승리했다. 영국 왕국, 하노버 및 헤세-카셀과 동맹을 맺은 프리드리히는 작센, 합스부르크 군주국, 프랑스러시아의 연합군에 맞서 실레시아 전체를 지켜낼 수 있었다.[22] 볼테르는 프리드리히 대왕의 프로이센을 "...아침에는 스파르타, 오후에는 아테네였다."라고 묘사했다.

프리드리히 2세 국왕, "대왕"


비옥한 토양과 번영하는 제조 도시로 가득한 실레시아는 프로이센에게 매우 중요한 지역이 되어 국가의 면적, 인구, 부를 크게 증가시켰다.[23] 오스트리아 및 다른 강대국에 대한 전장에서의 성공은 프로이센의 유럽 강대국 중 하나로서의 지위를 입증했다. 실레시아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 내에서 활동하는 두 개의 가장 강력한 국가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사이에 1세기가 넘는 라이벌 관계와 갈등을 시작했다(두 국가 모두 제국 외부에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24] 1744년, 키르크세나 왕조가 멸망한 후 동프리지아 백작령이 프로이센에 넘어갔다.

1786년까지 통치 마지막 23년 동안, "국가의 첫 번째 봉사자"로 여겼던 프리드리히 2세는 오더브루흐와 같은 프로이센 지역의 개발을 촉진했다. 동시에 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강화했고, 1772년 오스트리아와 러시아와 함께 폴란드 제1분할에 참여하여 브란덴부르크 영토와 프로이센 본토의 영토를 지리적으로 연결했다. 이 분할은 또한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을 왕국에 추가하여 프리드리히가 자신을 "프로이센의" 국왕으로 다시 칭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위그노를 포함한 이민자들에게 프로이센 국경을 열었다. 프로이센은 19세기에 미국이 자유를 추구하는 이민자들을 환영한 것과 거의 같은 방식으로 안전한 피난처가 되었다.[25]

프리드리히 대왕(재위 1740~1786)은 계몽 전제정치를 실천했다. 그는 세계 최고의 군대를 건설했고, 그의 많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는 일반적인 민법을 도입하고 고문을 폐지했으며 왕관이 사법 문제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원칙을 확립했다.[26] 그는 또한 김나지움(문법 학교) 시스템의 전신인 고급 중등 교육을 장려했는데, 이는 가장 뛰어난 학생들을 대학 연구를 위해 준비시켰다. 프로이센 교육 시스템은 미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에서 모방되었다.[25]

3. 5. 나폴레옹 전쟁과 독일 통일

18세기 말 프로이센은 프랑스 혁명에 대항하는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하였고, 폴란드 분할에도 가담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등장으로 예나-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패배, 1807년 틸지트 조약을 체결하여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28] 이 패배를 계기로 슈타인, 하르덴베르크 등에 의해 프로이센 개혁이 단행되어 농민 해방, 유대인 해방 등이 이루어졌고, 군사 제도 역시 개편되었다.[29]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프로이센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끊고 제6차 대프랑스 동맹에 참여, 해방 전쟁을 이끌었다. 게브하르트 레베레히트 폰 블뤼허 원수가 이끄는 프로이센 군은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28]

빈 회의(1815)에서 프로이센은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작센 왕국 일부 등 주요 영토를 획득하여 독일 연방 내 주도적인 위치를 확보했다.[28] 그러나 빈 체제하에서 자유·통일 운동은 억압되었고, 1848년 3월 혁명도 실패로 끝났다. 그럼에도 프로이센은 관세동맹을 주도하며 경제적 통합을 추진, 통일의 기반을 다졌다.

1862년, 빌헬름 1세는 비스마르크를 총리로 임명, 군비를 강화하고 독일 통일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했다.[34] 1864년 덴마크와의 전쟁,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 연방을 수립, 오스트리아를 독일 연방에서 배제했다. 1870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승리한 후, 1871년 독일 제국이 성립되었고, 프로이센 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를 겸임하게 되었다.[34]

3. 6. 세계 대전과 해체

1919년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하고 독일 제국이 붕괴되면서,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프로이센 자유주가 되었다.[39] 나치 등장 이후에도 군부 등에는 프로이센적인 요소가 남아 있었다.

1918년 독일 혁명으로 빌헬름 2세는 독일 황제와 프로이센 국왕 자리에서 물러났다.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자유주"(Freistaatde)로 선포되었고, 1920년 민주적인 헌법을 받았다.

베르사유 조약에 따른 독일 영토 손실의 대부분은 프로이센 지역이었다. 오이펜말메디벨기에로, 북슐레스비히는 덴마크로, 메멜 영토리투아니아로, 훌츠친 지역은 체코슬로바키아로 넘어갔다. 폴란드 분할로 합병했던 포제넨, 서프로이센 주, 동부 상실레시아는 폴란드 제2공화국에 넘어갔다. 단치히는 국제 연맹 관리하의 단치히 자유시가 되었다. 자를란트는 이전 프로이센 영토 대부분과 자르팔츠 지역(바이에른 왕국)으로 만들어졌다. 동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 해운 서비스나 폴란드 회랑을 통과하는 철도로만 접근 가능한 외딴 지역이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연방 주들 (프로이센은 연회색).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포제넨과 서프로이센 주는 대부분 폴란드 제2공화국에 편입되었고, 포제넨-서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 관구는 남은 지역으로 구성되었다.


독일 정부는 프로이센 분할을 고려했으나, 전통적인 감정으로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가장 큰 주(영토 60%)가 되었다. 프로이센 선거권 폐지로 좌파의 핵심 지역이 되었다. "레드 베를린"과 공업화된 루르 지역은 좌파 우세를 보장했다.[39]

1919년부터 1932년까지 프로이센은 사회민주당, 가톨릭 중앙당, 독일 민주당의 연합 정부에 의해 통치되었고, 1921년부터 1925년까지는 독일 인민당도 참여했다. 프로이센에서는 민주당의 다수당 통치가 위협받은 적이 없었다. 동프로이센과 일부 농촌 지역에서는 나치당 아돌프 히틀러가 1930년부터 중하층 계급의 지지를 얻었다. 상실레시아를 제외하고 1932년 나치당은 프로이센 자유주의 대부분 지역에서 가장 큰 당이 되었다. 그러나 연립 정부의 민주당들은 여전히 다수였고, 공산당과 나치당은 야당이었다.[40]

1920년부터 1932년까지 프로이센 총리였던 오토 브라운은 획기적인 개혁을 시행하여 독일 연방 공화국의 모델이 되었다. 프로이센 총리는 후임자에 대한 "긍정적 다수"가 있을 때만 해임될 수 있었다. 건설적 불신임 투표로 알려진 이 개념은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으로 이어졌다. 이 시기 프로이센 정부는 독일 전체 정부보다 훨씬 더 성공적이었다고 평가된다.[41]

프로이센은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민주주의의 기둥이었으나, 프란츠 폰 파펜의 ''프로이센 쿠데타''로 파괴되었다. 제국 정부는 프로이센 정부가 공공 질서를 상실했다는 구실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동 "쿠데타" 계획이라는 조작된 증거를 사용하여 1932년 7월 20일 프로이센 정부를 축출했다. 국방장관 쿠르트 폰 슐라이허는 프로이센 경찰이 공산당 로트프론트캠프퍼분트를 선호한다는 증거를 조작하여, 파울 폰 힌덴부르크로부터 프로이센에 대한 제국 통제 명령을 받았다.[42] 파펜은 자신을 프로이센 제국 위원으로 임명하고 정부를 장악했다. ''프로이센 쿠데타''는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쉽게 만들었다.[43]

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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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집권 후,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내무부 연방위원이 되었다. 1933년 3월 5일 제국 의회 선거에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지위가 강화되었다.[44]

2월 27일 제국 의회 건물 방화 후, 3월 21일 포츠담 주둔 교회에서 1933년 권한 위임법 지지를 위한 "늙은 프로이센과 젊은 독일의 결혼"이 기념되었다.

파울 폰 힌덴부르크


나치의 제국의 재건에 관한 법률(1934년 1월 30일)과 제국 총독 법률(1935년 1월 30일)로 주들은 법적으로 해산되었다. 주 의회는 폐지되었고, 주 정부는 제국 총독에 의해 통제되었다. 당의 지역 조직(Gau)이 중요해졌고, Gau 책임자(Gauleiter)는 총리가 임명했다.

1934년부터 1945년까지 프로이센의 거의 모든 부처가 통폐합되었다. 히틀러는 프로이센 총독이었지만, 헤르만 괴링이 프로이센 총리로서 직무를 수행했다.

대함부르크 법률에 따라 영토 교환이 이루어졌다. 1937년 4월 1일 프로이센은 뤼벡 편입으로 확장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단치히-서프로이센과 바르테란트의 별도 Gau에 배정되어 프로이센에 재통합되지 않았다.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의 한 주였지만, 연합국은 프로이센 해체를 결정하여 1947년 2월 25일 완전히 해체되었다.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의해 동프로이센(현 리투아니아 접경 북부와 칼리닌그라드주)은 소련에, 동프로이센 남부(바르미아), 서프로이센, 폼머른 동부(현 포모제)는 폴란드에 분할되었다.

발트 독일인 대부분은 독일인 추방으로 해외 이주했다. 그들의 방언과 관습은 고령자들 사이에서 유지되고 있다.

전후 추방되지 않은 소수는 공산주의 소련과 폴란드의 강제적인 소련화아이덴티티를 포기해야 했고, 토지와 재산은 몰수되었다. 독일 이주자 중 일부는 추방자 연맹을 조직하고 있다. 현재도 폴란드 정부는 재산 반환 및 배상을 거부하고 있다.[78]

3. 7.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당시 프로이센은 독일의 한 개의 주로서 존속하고 있었지만, 연합국은 프로이센을 해체시키기로 결정하여 1947년 2월 25일 프로이센은 완전히 해체되었다.[78]

1933년 프란츠 폰 파펜의 쿠데타로 프로이센 주 내각이 해산되었고, 나치당 정권하에서 대관구(가우)로 분할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로이센 지역은 독일군의 열세가 심해짐에 따라 동부 전선의 전장이 되었고, 프로이센 사람들은 패전 직전의 혼란 속에서 적군을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서쪽으로 몰려갔다. (독일인 추방) 그 땅에는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등이 이주했다. 전쟁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추방되었던 많은 폴란드인들도 프로이센으로 귀환했다. 독일인이 아닌 슬라브계 민족은 추방을 면했지만, 격렬한 인구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 지역 고유의 문화는 거의 사라졌다.[78]

1945년 포츠담 회담에 의해 프로이센은 동프로이센(현 리투아니아에 접하는 북부와 현 칼리닌그라드주)은 소련에, 동프로이센 남부(바르미아)와 서프로이센폼머른 동부폴란드에 분할되었다.

종전 직전까지 프로이센에 거주하던 발트 독일인의 대부분은 자발적으로 피난하거나 독일인 추방으로 인해 해외 이주를 하게 되었다. 독일 서부로 이주하거나 새로운 삶에 적응했고, 그들의 방언과 관습은 고향을 기억하는 고령자들 사이에서 조용히 유지되고 있다.

전후 혼란 속에서 추방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도 공산주의 소련과 폴란드의 지배하에서는 강제적인 소련화에 의해 독일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포기해야 했고, 토지와 재산은 모두 몰수되었다. 독일로 이주한 사람들 중 일부는 고향 추방자 연맹을 조직하고 있다. 현재도 폴란드 정부는 몰수한 개인의 재산과 토지의 반환 및 배상을 거부하고 있어 양국 간의 문제가 되고 있다.[78]

4. 프로이센의 상징

프로이센의 주요 프로이센 문장과 프로이센 국기에는 흰색 바탕에 검은 독수리가 그려져 있다.

흑백 국가색은 이미 튜턴 기사단과 호엔촐레른 가문이 사용하였다. 튜턴 기사단은 검은색 십자가(금색 삽입)와 검은색 제국 독수리가 수놓아진 흰색 외투를 착용했다.

프리드리히 1세 국왕이 1701년에 제정한 검은 독수리 훈장의 모토인 ''Suum cuique''(각자에게 그의 것을)는 종종 프로이센 전체와 관련이 있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국왕이 1813년에 제정한 군사 훈장인 철십자훈장 또한 일반적으로 프로이센과 관련이 있었다.

5. 프로이센의 영토

프로이센 지역은 비스와 강(독일어: 바이크셀 강)을 기준으로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으로 나뉜다. 동프로이센 중앙에는 프레골랴 강(독일어: 프레겔 강)이 동서로 흐르며, 강어귀에는 중심 도시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가 있다. 서쪽으로는 포메라니아(폴란드어: 포모제, 독일어: 폼머른)를 통해 독일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네만 강(독일어: 메멜 강)을 경계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인접한다.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은 프러시아인에서 유래한다. 민족 대이동 이후에는 솔브인, 카슈브인 등 슬라브계 민족도 이주해 왔다.

1410년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이 튜턴 기사단을 패퇴시켰다.[75] 1411년 제1차 토룬 조약에서 기사단은 영토 일부를 잃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왕국은 1만 4천 명을 포로로 잡았다.[76] 폴란드 국왕은 막대한 몸값을 받고 이들을 석방하기로 했다.[77]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으로 서프로이센 전역과 동프로이센 일부는 폴란드 왕령 프로이센이 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동프로이센을 유지했지만 폴란드 국왕의 종속국이 되었다. 1772년 제1차 폴란드 분할에서 프로이센 왕국이 프로이센을 재통일할 때까지 동서 프로이센은 국경, 시민권, 자치권으로 구분되었다.

1467년 사제 전쟁이 발생했고, 1479년 피오트르쿠프 조약으로 폴란드 국왕이 지배권을 얻었다.

1618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1618년 - 1701년)이 성립되었다. 1660년 올리바 협정에서 프로이센 공령은 프로이센 공국(1525년 - 1701년)이 됨을 확인하였다.

1701년 프로이센 공국은 왕국이 되었다. 대북방 전쟁 후기에는 스웨덴으로부터 포메라니아(폼머른)을 획득했다.

1772년 프리드리히 대왕에 의한 제1차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영토가 되었다.

1807년부터 1871년까지 프로이센의 확장


프로이센 왕국은 1867년 북독일 연방의 맹주가 되었다. 1871년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독일 제국 황제가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동프로이센 남부에 러시아군이 침공했으나, 독일군은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승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전 프로이센 주민은 동방 식민으로 이주해 온 독일인이 대다수였다. 그러나 종전 전후 소련이 실시한 독일인 추방 또는 해외 탈출로 대부분의 독일인은 독일로 이주했고, 현재 프로이센 주민의 대부분은 폴란드인, 러시아인 또는 리투아니아인이 되었다.

5. 1. 1947년 폐지 이전



폐지되기 전, 프로이센 자유국의 영토는 동프로이센, 브란덴부르크, 작센(오늘날 작센-안할트 주의 대부분과 독일 튀링겐 주의 일부 포함), 포메라니아,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실레지아(오스트리아 실레지아 제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헤세-나사우 주와 프로이센 통치 가문의 발상지인 남쪽의 작은 분리 지역인 호헨촐레른을 포함했다.[5]

프로이센 지역은 서쪽으로는 포메라니아(폴란드어: 포모제, 독일어: 폼머른)를 통해 독일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네만 강(독일어: 메멜 강)을 경계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인접하며, 비스와 강(독일어: 바이크셀 강)으로 '''동프로이센'''과 '''서프로이센'''으로 나뉜다. 동프로이센 중앙에는 동서로 프레골랴 강(독일어: 프레겔 강)이 흐르며, 그 강어귀에 중심 도시 칼리닌그라드(쾨니히스베르크)가 있다.

1772년 폴란드 분할 이후 프로이센 전역이 프로이센 왕국(후의 독일국(독일 제국))의 영역이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단치히를 제외한 서프로이센은 폴란드에 할양되었고, 동프로이센은 자유 도시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에 의해 독일의 엑스크레이브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폴란드 침공) 후, 전시에는 다시 전역이 독일국의 지배하에 있었지만, 대전 후에는 서프로이센 전역이 폴란드 영토가 되고, 동프로이센은 소비에트 연방(러시아, 리투아니아)과 폴란드에 분할되었으며, 그 이후 프로이센이라는 지역 명칭은 현지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프로이센 왕국은 바이마르 공화국프로이센 자유주가 되었고, 서프로이센은 폴란드 회랑이 되었다.

1933년 프란츠 폰 파펜의 쿠데타로 프로이센 주 내각이 해산되었고, 나치당 정권하에서 대관구(가우)로 분할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로이센 지역은 동부 전선의 전장이 되었고, 프로이센 사람들은 패전 직전의 혼란 속에서 적군을 두려워하며 많은 사람들이 난민이 되어 서쪽으로 몰려갔다. (독일인 추방) 그 땅에는 폴란드인과 러시아인 등이 이주했다. 전쟁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추방되었던 많은 폴란드인들도 프로이센으로 귀환했다. 독일인이 아닌 슬라브계 민족은 추방을 면했지만, 격렬한 인구 교체로 인해 프로이센 지역 고유의 문화는 거의 사라졌고, 종전 후인 1947년 2월 25일, 연합국 관리 이사회 법령 46호에 따라 프로이센 자유주의 해체가 선언되었다.

5. 2. 독일 동맹 가입 10개 주 (1815년)

주도
브란덴부르크베를린
오스트프로이센쾨니히스베르크
베스트프로이센단치히
포메른슈테틴
슐레지엔브레슬라우
포젠
윌리히클레베베르크
니더라인
베스트팔렌뮌스터
작센마그데부르크


6. 사회

현재 독일 연방주 지도(진한 녹색) - 과거 독일 제국프로이센 왕국 영토와 완전히 또는 대부분 일치하는 지역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은 1945년 포츠담 협정에 따라 폴란드와 소련에 합병되었고, 주민들은 대부분 탈출하거나 추방당했다.[45] 서방 연합국은 프로이센 폐지를 추구했지만, 스탈린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1947년 연합 통제 위원회의 법률 제46호에 따라 프로이센은 공식적으로 해체되었다.

1949년 동독에서는 이전 프로이센 영토가 브란덴부르크와 작센-안할트 주 등으로 재편되었고, 1952년 구역으로 대체되었다가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재건되었다. 서독에서는 이전 프로이센 영토가 여러 주로 분할되었고, 자르 보호령은 1955년 자르 통합 국민투표 이후 독립적인 주로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되었다.

1957년 서독에서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이 설립되어 프로이센의 문화 유산을 보호하고 있으며, 2021년 현재 베를린 본부에서 계속 운영되고 있다.

6. 1. 인구

1871년 프로이센의 인구는 2,469만 명으로, 독일 제국 인구의 60%를 차지했다.[55] 1910년에는 인구가 4,017만 명으로 증가하여 독일 제국 인구의 62%가 되었다.[55] 1939년 5월 프로이센의 인구는 41,915,040명이었다.

6. 2. 민족

프로이센의 주요 민족은 독일인이었다. 소수 민족으로는 폴란드인(카슈브인, 마주리인 포함), 프로이센 리투아니아인, 소르브인, 체코인, 모라비아인, 덴마크인, 유대인, 프리지아인, 네덜란드인, 왈롱인, 러시아인, 프랑스인, 이탈리아인, 헝가리인 등이 있었다.[58]

1871년, 약 240만 명의 폴란드인이 프로이센에 거주하여 최대 소수 민족을 구성했다.[55] 1905년 기준으로, 다른 소수 민족은 다음과 같았다.[55]

민족인구
카슈브인72,500명
마주리인248,000명
리투아니아인101,500명
기타왈롱인, 체코인, 쿠르셰니키인, 소르브인



폴란드 분할 이후 포제난 주가 된 폴란드 대공국 지역은 폴란드인이 다수(폴란드인 62%, 독일인 38%)였으며, 이들은 독일 통치에 저항했다. 상실레시아 지역의 남동부에도 폴란드인이 다수였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와 유대인은 프로테스탄트와 동등한 지위를 누리지 못했다.[63]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의 결과, 폴란드 제2공화국은 이 두 지역뿐만 아니라 서프로이센 주의 독일인이 다수인 지역도 할양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동프로이센, 폼메른 대부분, 실레시아, 그리고 브란덴부르크 동부는 소련에 합병되거나 폴란드에 할양되었고, 독일어를 사용하는 주민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과 이후 폴란드에서의 독일인 추방으로 강제 추방당했다.

1649년, 쿠르셰니키 정착지는 발트해 연안 동프러시아의 메멜(클라이페다)에서 단치히(그단스크)까지 뻗어 있었다.

6. 3. 종교

프로이센 공국은 1525년 루터교를 국교로 공식 채택한 최초의 국가였다. 종교 개혁 이후 프로이센은 루터교와 칼뱅교라는 두 가지 주요 개신교 종파의 지배를 받았다. 프로이센 인구의 대다수는 루터교였지만, 특히 브란덴부르크,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헤세-나사우 등 주의 중부와 서부에는 칼뱅교 소수 민족이 있었다. 1613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프로이센 대공 요한 시기스문트는 칼뱅교 신앙을 선포하고 베를린 대성당을 루터교에서 칼뱅교로 이전했다. 왕국 전역의 루터교와 칼뱅교 회중은 1817년 엄격한 왕실 통제하에 있던 프로이센 교회 연합에 의해 합병되었다.[59]

프로이센은 프랑스 루이 14세가 퐁텐블로 칙령을 발표하고 그 뒤를 이은 용기병 학살 이후 상당수의 위그노 인구를 받아들였다.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을 시작으로 프로이센 군주들은 망명한 프랑스 칼뱅교도 난민들에게 국가의 문을 열었다. 베를린에서는 겐다르멘마르크트에 프랑스 대성당이라는 그들 자신의 교회를 건립하고 예배를 드렸다. 시간이 흘러 프랑스 개혁파는 프로이센의 더 넓은 개신교 공동체에 동화되었다.

1814년 이후 프로이센은 서부와 동부에 수백만 명의 가톨릭 신자를 포함하게 되었다. 라인란트, 베스트팔렌 일부, 슐레지엔 동부, 서프로이센, 에름란트, 포젠 주에 상당한 인구가 있었다.[61] 19세기 문화투쟁 동안 프로이센 가톨릭 신자들은 국가의 어떤 공식 직책도 수행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대체로 불신을 받았다.

프로이센에는 상당히 큰 유대교 공동체가 있었는데, 대부분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다. 188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363,790명으로 독일에서 가장 큰 공동체였다.

1925년 프로이센 인구의 종교 분포는 다음과 같았다.[62]

종교비율
개신교64.9%
가톨릭31.3%
유대교1.1%
기타2.7%


6. 4. 교육

19세기 독일 여러 주들은 명문 교육에서 세계를 선도했으며, 프로이센이 그 흐름을 주도했다.[64][65] 남학생들을 위한 무상 공립 교육이 널리 제공되었고, 엘리트 학생들을 위한 김나지움(Gymnasium) 제도는 매우 전문화되었다. 현대적인 대학교 제도는 19세기 독일 대학들, 특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현재 훔볼트 베를린 대학교)에서 출발했다. 이 대학교는 교수직에 대한 명확한 경력 경로를 갖춘 연구 중심 대학 모델의 선구자였다.[66] 예를 들어, 미국은 독일 모델에 많은 주의를 기울였다. 가정에서는 아들의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전통적으로 여학생 교육은 주로 어머니와 가정교사에 의해 이루어졌다. 엘리트 가정에서는 딸들을 위해 가톨릭 수녀원 기숙학교를 점점 더 선호했다. 1870년대 프로이센의 문화투쟁 법률은 가톨릭 학교를 제한하여 많은 수의 새로운 사립 여학교가 설립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67]

7. 행정 및 헌법 체계

16세기 중반,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들은 종교 개혁으로 인해 성직자를 제외한 백작, 영주, 기사, 도시들을 대표하는 여러 계층(에스테이트)에 크게 의존했다.[46] 변경백국의 재정과 관련된 문제는 선제후가 아닌 ''크레디트베르크''(Kreditwerk)와 여러 계층의 ''그로서 아우스슈스''(Großer Ausschuß, 대위원회)가 담당했다.[47] 1604년, 요아힘 프리드리히는 ''게하임어 라트 퓌어 디 쿠어마르크''(Geheimer Rat für die Kurmark)라는 평의회를 설립하여 여러 계층의 영향력을 줄이려 했다. 이 평의회는 1613년에 영구적으로 설립되었으나, 삼십년 전쟁[47]으로 인해 1651년까지는 큰 힘을 얻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재위 1640~1688)은 중앙 집권화를 시도했으나, 여러 영토들은 여전히 독립적인 상태였다.[46] 그는 1651년 중앙 권위로서 ''게하임어 라트''를 설립하려 했으나 실패했다.[49] 대신 각 영토에 총독을 임명하고, ''암츠캄머''실을 설치하여 여러 계층의 정부와 균형을 맞추려 했다.[49]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는 소비세(''아키세'')를 도입하여 재정을 확보하고, 제2차 북방 전쟁 이후에는 귀족들의 헌법을 개혁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50] 그의 개혁으로 국가 수입은 3배 증가했고, 1인당 세금 부담은 프랑스의 두 배에 달했다.[50]

프리드리히 3세(1세) (재위: 1688~1713) 통치하에 브란덴부르크 프로이센 영토들은 사실상 군주국의 속주로 축소되었다.[48] 1689년에는 모든 영토를 위한 중앙 실인 ''게하임에 호프캄머''가 설립되었고, 총군사위원회가 세금과 경찰 업무까지 담당하는 중앙 기관으로 성장했다.[52]

프로이센 왕국은 1848~1849년 독일 혁명까지 절대 군주제로 기능했다.[53] 이후 입헌 군주제가 되었고, 1850년 프로이센 헌법은 양원제 의회를 설립했다. 하원은 모든 납세자를 대표했지만, 3계급으로 나뉘어 상류층의 지배를 보장했다. 상원은 국왕이 임명했으며, 장관들은 국왕에게만 책임이 있었다. 1918년부터 1932년까지의 프로이센은 독일 내에서 민주주의의 핵심 지역이었다. 건설적 불신임 투표는 훗날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의 일부가 되었다.

8. 현대 독일의 프로이센 유산

1945년 포츠담 협정에 따라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의 동프로이센, 서프로이센, 포메라니아, 실레시아 등 프로이센 영토는 폴란드소련에 합병되었고,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 브레슬라우, 슈테틴 등 주요 프로이센 도시들이 포함되었다. 이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추방되었다.[45]

1947년 연합 통제 위원회는 법률 제46호를 통해 프로이센을 공식적으로 해체했다. 스탈린은 처음에는 프로이센의 명칭 유지를 원했지만, 결국 프로이센 해체에 동의했다.[45]

1949년 동독 (독일 민주 공화국)에서는 구 프로이센 영토가 브란덴부르크, 작센-안할트 주로 재편되었고, 포메라니아 주의 나머지는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에 속하게 되었다. 이 주들은 1952년 구역(Bezirke)으로 대체되었다가 1990년 독일 재통일 이후 다시 복원되었다.

같은 해 서독 (독일 연방 공화국)에서는 구 프로이센 영토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니더작센, 헤센, 라인란트팔츠, 슐레스비히-홀슈타인으로 분할되었다. 뷔르템베르크-바덴과 뷔르템베르크-호헨촐레른은 바덴과 합병되어 바덴-뷔르템베르크 주가 되었다. 자르 보호령은 1955년 자르 통합 국민투표 이후 독립 주로서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했다.

1957년 서독에서는 프로이센 문화유산 재단이 설립되어 프로이센의 문화 유산을 보호하고 있으며, 2021년 현재 베를린에서 운영되고 있다.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주 등 구 프로이센 자유주 영토에 위치한 독일 연방 주들은 헌법 및 국제법상 프로이센의 법적 계승 국가이다.[68][69]

독일 연방 공화국1867년 북독일 연방으로 설립되어 1871년 독일 제국으로 확장된 프로이센 주도의 연방 국가와 동일시된다.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1871년 독일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1991년 통일 독일의 수도로 지정되었다. 연방참사원은 프로이센 상원 의사당 건물을, 연방 대통령은 벨뷰 궁전을 관저로 사용한다.[70]

건설적 불신임 투표는 프로이센 자유주의 국가의 헌법 규정을 따른 것이며, 프로이센의 전쟁 훈장인 철십자훈장은 독일 연방군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국빈 방문 시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행진곡이 연주되며,[71] 연방군의 그레이트 태투는 프로이센 군악의 전통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연방경찰과 연방군 헌병의 상징인 경찰 배지는 프로이센 근위병 배지를 계승한 것이다.

2002년 알빈 질은 베를린-브란덴부르크 연방 주의 이름을 "프로이센"으로 제안하기도 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연합은 구 프로이센 지역 교회들의 연합체였던 연합 복음교회에서 출발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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