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
1. 개요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은 프랑스의 군인이자 작곡가로, 프랑스 국가인 "라 마르세예즈"를 작곡한 인물이다. 그는 1792년 오스트리아와의 전쟁 발발 당시 사기 진작을 위해 '라인 군을 위한 군가'를 작곡했고, 이 곡은 마르세유 의용군을 통해 파리에 알려지면서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으로 프랑스 국가가 되었다. 루제 드 릴은 왕당파로 활동하며 헌법 충성을 거부하여 투옥되기도 했지만, 이후 석방되어 공직에 복귀하여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그는 1836년 사망했으며, 그의 유해는 1915년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의 정신을 상징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애국가로도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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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 클로드 조제프 루제 드 릴 |
|---|---|
| 원어 이름 | Claude Joseph Rouget de Lisle프랑스어 |
| 출생일 | 1760년 5월 10일 |
| 출생지 | 롱르소니에 |
| 사망일 | 1836년 6월 26일 (76세) |
| 사망지 | 슈아지르루아 |
| 거주지 | 슈아지르루아 |
| 직업 | 군인, 작곡가, 작가 |
| 장르 | 클래식 |
| 활동 시기 | 1784년 ~ 1793년 |
| 소속 | 프랑스 |
|---|---|
| 군종 | 프랑스 육군 |
| 복무 기간 | 1784–1793 |
| 계급 | 대위 |
| 전투 | 해당 사항 없음 |
| 훈장 | 슈발리에 레지옹 도뇌르 훈장 (1831년) |
| 작품 | , "" (라 마르세예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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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관련자 -
올랭프 드 구주
프랑스 혁명 시대 작가이자 여성 인권 운동가인 올랭프 드 구주는 '여성과 여성 시민의 권리 선언'을 통해 여성의 권리 신장을 촉구하고 노예제 폐지 등을 주장했으나, 반혁명 혐의로 처형당했다. -
프랑스 혁명 관련자 -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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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0년 출생 -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
클로드앙리 드 루브루아 드 생시몽은 프랑스의 사상가이자 사회주의자로, 산업과 과학 기술 기반의 사회 개혁을 주장하며 산업 사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능력 있는 산업 계급이 사회를 이끌어야 한다고 역설했으며, 그의 사상은 생시몽주의로 이어져 여러 사상과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760년 출생 -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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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시인 -
정약용
정약용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실학 사상 집대성, 과학 기술 분야 업적, 500여 권의 저술을 통한 사회 개혁 주장 등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념인물에 선정되었다. -
18세기 시인 -
월터 스콧
월터 스콧은 스코틀랜드의 시인이자 소설가로, 소아마비 장애를 극복하고 스코틀랜드 민속과 전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역사 소설 장르를 개척하여 19세기 문학계와 스코틀랜드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말년에 재정적 파탄과 아내의 죽음을 겪었다.
2. 생애
프랑슈콩테 지역 쥐라주 롱르소니에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난 루제 드 릴은 군 학교에 들어가 장교 교육을 받고 공병 장교로 임관했다. 재학 당시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선전 포고를 했을 때, 스트라스부르의 라인 방면 군에 배속되어 있던 그는 스트라스부르 시장으로부터 행진곡을 만들 것을 권고받았다. 4월 25일 하루만에 "라인 군을 위한 군가(Chant de guerre pour l' armée du Rhin)"를 작곡하여 다음날 시장과 청중 앞에서 선보였다. 이 곡은 후에 마르세유의 의용군이 파리 입성 때 부르면서 유명해졌고, "라 마르세예즈"라는 제목으로 국가로 제정되었다.
왕당파였던 그는 새 헌법에 대한 충성을 거부하여 1793년에 해고되어 감옥에 갇혔지만, 테르미도르 반동 동안 석방되었다. 7월 혁명 이후 공직에 복귀하여 루이 필리프 1세로부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루제 드 릴은 발 드 마르네의 쇼아지르 루아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유해는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7월 14일에 쇼아지르 루아 묘지에서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2.1. 초기 생애
프랑슈콩테 지역 쥐라주 롱르소니에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인근 마을인 몽테귀에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관심을 가졌으며, 사관학교에 입학하여 장교 교육을 받고 공병 장교로 임관했다.
2.2. "라 마르세예즈" 작곡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선전 포고를 한 직후, 스트라스부르 시장 필리프 프리드리히 디트리히는 라인 방면 군의 사기 진작을 위해 루제 드 릴에게 행진곡을 만들어 줄 것을 제안했다. 4월 25일, 루제 드 릴은 하루 만에 "라인 군을 위한 군가(Chant de guerre pour l' armée du Rhin)"를 작곡했고, 다음 날 4월 26일 시장과 청중 앞에서 선보였다. 감격한 시장은 즉시 악보를 인쇄하여 군 사령관 니콜라 뤼크네르 원수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이후 이 곡은 마르세유 의용군이 채택하여 파리 입성 시에 부르면서 유명해졌고, "라 마르세예즈"라는 제목으로 국가로 제정되었다.
일설에는 이탈리아 작곡가 조반 바티스타 비오티가 11년 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궁정에서 작곡한 곡과 유사하다는 주장도 있다.
2.3. 혁명 이후의 삶
아버지처럼 왕당파였던 루제 드 릴은 새 헌법에 대한 충성 맹세를 거부하여 1793년에 해고되어 감옥에 갇혔으며, 단두대 처형을 간신히 면했다. 테르미도르 반동 동안 석방되어 몽타규로 은퇴했다.
1792년 8월 10일 사건 이후,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던 루제 드 릴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후에 석방되어 군에 복귀했다. 1796년 군에서 추방되어 론르소니에로 귀국했다. 1814년에는 루이 18세를 찬양하는 Vive le Roi !프랑스어를 작곡했다. 후에 루이 필리프로부터 별장과 연금을 하사받았다.
2.4. 사망과 유산
루제 드 릴은 발 드 마르네의 쇼아지르 루아에서 가난하게 생을 마감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인 1915년 7월 14일에 그의 유해는 쇼아지르 루아 묘지에서 앵발리드로 이장되었다.
3. 작품 활동
루제 드 릴은 라 마르세예즈 외에도 여러 노래와 시, 산문을 남겼다. 1792년 4월,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선전 포고를 했을 때, 스트라스부르의 라인 방면군에 배속되어 있던 루제 드 릴 대위는 스트라스부르 시장으로부터 방면군의 사기 진작을 위한 행진곡을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4월 25일 하루 만에 곡을 완성하여 '라인 군을 위한 군가'(Chant de guerre pour l'armée du Rhin러시아어)라는 제목으로 다음 날 4월 26일 시장과 청중 앞에서 선보였다. 시장은 즉시 악보를 인쇄하여 방면군 사령관 니콜라 뤼크네르 원수에게 이 곡을 헌정했다. 이후 마르세유의 의용군이 이 곡을 채택하여 파리 입성 시에 불렀기 때문에 유명해졌고, "라 마르세예즈"라는 제목으로 국가로 제정되었다.
1792년 8월 10일 사건 이후, 입헌 군주제를 지지했던 루제 드 릴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1794년 테르미도르 반동 후에 석방되어 군에 복귀했다. 1796년 군에서 추방되어 론르소니에로 귀국했다. 1814년에는 루이 18세를 찬양하는 노래(Vive le Roi !)를 작곡하기도 했다.
3.1. 음악 작품
루제 드 릴은 "라 마르세예즈"와 비슷한 종류의 노래를 몇 곡 더 작곡했다. 1825년에는 여러 작가의 시 50편에 곡을 붙여 Chants français프랑스어를 출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