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성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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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역성혁명은 하늘이 덕을 잃은 왕조에 등을 돌릴 때 일어나는 혁명으로, 새로운 왕조가 천명을 받아 교체되는 것을 정당화하는 이론이다. 전 왕조의 부덕함과 마지막 군주의 악행을 강조하고, 피지배층 출신 통치자의 등장을 긍정하는 특징을 보인다. 중국에서는 왕조 교체 주기와 천명 사상에 따라 왕조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며, 한국사에서는 위만조선, 고려, 조선 건국이 대표적인 역성혁명으로 평가받는다. 현대 대한민국에서도 대통령 교체를 역성혁명에 비유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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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성혁명 | |
---|---|
개요 | |
개념 | 권력의 순환, 통치 정당성의 상실과 새로운 왕조의 등장 |
관련 개념 | 역성혁명 |
특징 | |
핵심 내용 | 기존 왕조의 부패, 천재지변, 민생고 등의 원인으로 민심 이반 → 반란 발생 → 새로운 왕조 건국 → 시간이 흐르면서 새로운 왕조도 부패하고 쇠퇴 → 다시 민심 이반과 반란 발생 → 왕조 교체 |
반복 | 위 과정이 반복되면서 역사가 순환하는 패턴을 보임 |
정당성 | 천명 사상과 연결되어 왕조 교체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됨 |
원인 | |
주요 원인 | 왕조의 부패와 무능 가혹한 세금과 부역 흉년과 자연재해 인구 증가와 토지 부족 외세의 침략 |
복합적 요인 | 위와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발생 |
영향 | |
사회적 영향 | 새로운 왕조의 등장과 사회 질서 재편 |
정치적 영향 | 권력 구조의 변화와 통치 이념의 변화 |
역사적 영향 | 중국 역사의 발전과 변화를 이끄는 주요 동력 |
사례 | |
중국 역사 | 하, 상, 주,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 등 여러 왕조 교체 각 왕조의 흥망성쇠 과정에서 왕조 순환의 특징이 나타남 |
기타 | |
참고 문헌 | Michael Dillon, Chin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1998) |
2. 개념 및 역사적 배경
역성혁명은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주창되었다. 천(天)은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덕을 잃은 왕조에 등을 돌릴 때 '혁명(천명을 바꿈)'이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군주가 스스로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선양, 무력으로 쫓겨나는 것을 방벌이라고 한다.
역성혁명론은 왕조 교체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 유방이나 주원장과 같은 피지배계층 출신이 지배자가 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이는 군주의 '혈통'을 중시했던 서유럽 사회와는 대조적이다. 서유럽에서는 한 국가의 군주 직계가 단절되었을 때, 타국의 군주 혈족에서 새로운 왕을 맞이할 정도로 혈통 원리가 지배적이었다.
역성혁명에 대한 비판도 있었다.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야마가 소코는 일본의 만세일계 사상과 대비해 《중조사실》을 저술하여 역성혁명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2. 1. 역성혁명의 개념
천(天)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덕을 잃은 왕조에 등을 돌릴 때 '혁명'(천'''명'''을 개'''혁'''하는 것)이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이를 깨닫고 군주(천자)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선양', 무력으로 쫓겨나는 것을 '방벌'이라고 한다. 맹자는 무력에 의한 왕위 찬탈인 방벌도 정당한 역성혁명의 방법으로 인정했다.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의 조비는 "요와 순이 행한 것을 알겠다"라고 하였다. 후한(유씨)에서 위(조씨)로의 선양처럼, 전 왕조가 덕을 잃고, 새로운 덕을 갖춘 일족이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것(''성이 역전되다'')이 역성혁명의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혈통'의 단절이 아니라 '덕'의 단절이 역성혁명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오행 사상과의 연관성도 찾을 수 있다. 왕조는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 오행의 덕 중 하나를 가지며, 왕조 교체는 오행의 순환에 따른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황건적의 난은 한나라(불)를 대신하여 흙의 덕을 가진 왕조가 들어서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황건적은 는 슬로건을 내걸었다.[9]
2. 2. 중국 역사에서의 역성혁명
주(周)나라 무왕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멸망시킨 때부터 역성혁명이 제창되었다. 하늘은 왕조를 통해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덕을 잃은 왕조에게는 '혁명'(천명을 바꿈)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군주가 스스로 자리를 물려주는 것을 '선양', 무력으로 쫓겨나는 것을 '방벌'이라고 불렀다.[8]진승·오광의 난을 일으킨 진승은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라며 역성혁명을 옹호했다.[8] 이 난은 초한전쟁을 거쳐 한나라가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새로운 왕조는 이전 왕조의 부덕함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방식으로 역성혁명론을 활용했다.[8] 예를 들어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의 폭정, 수나라 양제의 나쁜 시호, 조선 연산군의 묘호가 없는 경우가 있다. 반면, 청나라는 명나라 숭정제에게 시호와 묘호를 주었다.
오행사상에 따르면, 황건적의 난은 "" (창천은 이미 죽었고, 황천이 마땅히 설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9] 이는 한나라가 불(火)의 덕을 가졌으므로, 흙(土)의 덕을 가진 왕조가 대신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3. 한국사에서의 역성혁명
한국사에서 역성혁명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사례는 위만조선 건국, 왕건의 고려 건국, 이성계의 조선 건국이 있다.
3. 1. 고대 국가의 건국
위만조선의 건국은 한국사 최초의 역성혁명으로 평가된다.[1] 위만은 준왕을 몰아내고 위만조선을 세웠다.[1]3. 2. 고려와 조선의 건국
왕건은 태봉의 장군으로 궁예의 '부덕'을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궁예를 내쫓고 즉위하여 고려 왕조를 개창하였으며, 신라 경순왕과 후백제 견훤의 귀부를 받아들여 삼한을 통일하였다. 이성계는 고려의 장군으로 위화도 회군이라는 쿠데타를 통해 우왕과 창왕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킨 뒤, 정비 안씨를 압박하여 공양왕의 선양을 이끌어내어 조선 왕조를 개창하였다.3. 3. 현대 한국 사회에서의 역성혁명
대한민국은 공화정 체제를 채택하고 있지만, 행정부의 최고 수장인 대통령 교체는 현대의 '역성혁명'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한다. 특히 국민의힘 등 보수 정당에서 더불어민주당 등 진보 정당으로 정권이 교체되는 것은 단순한 정권 교체를 넘어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성혁명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더불어민주당과 같은 진보 진영에서는 대통령 교체를 통해 적폐 청산, 사회 개혁, 민주주의 발전 등을 추진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4. 역성혁명에 대한 비판과 반론
에도 막부 시대 일본의 야마가 소코는 역성혁명론에 이의를 제기하며, 일본의 만세일계 사상을 옹호하는 《중조사실》을 저술했다. 서양에서는 군주의 '혈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하여, 역성혁명론은 동양 특유의 사상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5. 왕조 교체 주기
주(周)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하늘(天)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했지만, 덕을 잃은 현재의 왕조에 하늘이 등을 돌릴 때 '혁명'(즉 천'''명'''을 개'''혁'''하는 것)이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이러한 왕조 교체는 새로운 통치자가 새 왕조를 건국하고 천명을 얻는 것에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순환 과정을 거친다.[4]
순서 | 내용 |
---|---|
1 | 새로운 통치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천명을 얻습니다.[4] |
2 | 새로운 왕조 하의 중국은 번영을 이룹니다. |
3 | 인구가 증가합니다. |
4 | 황실에서 부패가 만연하고 제국은 쇠퇴와 불안정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
5 | 자연 재해가 농지를 휩쓸어 버립니다. 이 재해는 보통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부패와 인구 과잉과 더불어 기근을 초래합니다.[4] |
6 | 기근은 인구의 반란을 일으키고 내전이 시작됩니다.[4] |
7 | 통치자는 천명을 잃습니다.[4] |
8 | 폭력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합니다.[5] |
9 | 중국은 군웅할거 시대를 겪습니다.[5] |
10 | 한 국가가 승리합니다. |
11 | 그 국가는 새로운 제국을 시작합니다.[4] |
12 | 제국은 천명을 얻습니다.[4] |
이러한 순환 과정은 반복되며, 왕조는 세 가지 주요 단계를 거친다.
단계 | 내용 |
---|---|
1단계 | 왕조의 시작 |
2단계 | 왕조의 생애 중간 단계이며 왕조의 절정 |
3단계 | 정치적, 경제적으로 왕조가 쇠퇴하여 결국 붕괴되는 시기 |
천명은 군주가 중국을 통치하도록 하늘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상이었다. 천명에 대한 설명은 전국 시대 동안 중국 철학자 맹자에 의해 옹호되었다.[4]
6. 역성혁명의 형성과 의의
주(周) 무왕(武王)이 은(殷) 주왕(紂王)을 멸망시켰을 때부터 주창된 사상으로, 하늘(天)은 자신을 대신하여 왕조에게 지상을 다스리게 하지만, 덕을 잃은 현재의 왕조에 하늘이 등을 돌릴 때 '혁명(즉 천'''명'''을 개'''혁'''하는 것)'이 일어난다고 여겨졌다. 이를 깨닫고, 군주(천자, 즉 하늘의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자리를 양보하는 것을 「선양(禅譲)」, 무력으로 쫓겨나는 것을 「방벌(放伐)」이라고 한다.[8]
후한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위의 조비는 "요와 순이 행한 것을 알겠다"(요순의 선양 역시 이런 모습이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후한(유씨)에서 위(조씨)로의 선양처럼, 전 왕조(와 그 왕족)가 덕을 잃고, 새로운 덕을 갖춘 일족이 새로운 왕조를 세웠다('''성'''이 '''역전'''되다)라는 것이 기본적인 사고방식이며, ''''혈통'의 단절이 아니라 '덕'의 단절이 역성혁명의 근거'''라고 하고 있다. 맹자는 역성혁명의 방법론에 있어 전임자가 후임자에게 양보하는 형태의 '선양'뿐 아니라 무력에 의한 왕위 찬탈인 방벌도 인정했다.[8]
대부분의 새로운 왕조에서는 사서 편찬 등에서 역대 왕조의 정통한 후계임을 강조하는 한편, 그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전 왕조와 그 마지막 군주의 부덕과 악역함이 강조된다. 전형적인 예로서, 하의 걸과 은의 주의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또한 수의 양제처럼 나쁜 의미가 담긴 시호를 받거나, 조선의 연산군처럼 묘호 자체를 아예 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한편, 명에 대한 반역자인 이자성을 토벌하고 천하를 계승한 청 같은 경우에는,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를 높여 그에게 시호나 묘호도 주었다.
이와 같이, 역성혁명론은 '''왕조 교대를 정당화하는 이론'''이다.[8] 또한 이 이론이 있었기 때문에 유방이나 주원장 같은 피지배계층 출신자의 지배도 긍정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진의 진승은 '왕후장상(王侯将相)의 씨가 어찌 따로 있겠느냐'라는 명언으로 역성혁명을 긍정해 중국 역사상 최초의 농민 반란인 진승 · 오광의 난을 일으켰다.
오행 사상 면으로부터의 설명에서는 만물에는 목화토금수의 덕이 있고, 왕조도 이 가운데 어느 한 가지 덕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졌다. 예를 들어, 한 왕조 말기를 흔들었던 184년의 황건적의 난은 "" (창천은 이미 죽었으니 황천이 마땅히 설 것이고, 그 해가 갑자에 있으니 천하가 크게 길하게 될 것이다, 『후한서』 황보숭전[9])이라는 슬로건이 내걸렸다. 한 왕조는 불의 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며, 한조를 대신하는 왕조는 흙의 덕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중국 역사는 전통적으로 왕조 교체 주기로 표현된다. 왕조 교체 주기는 다음과 같이 순환한다.
순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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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새로운 통치자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고 천명을 얻는다.[4] |
2 | 새로운 왕조 하의 중국은 번영을 이룬다. |
3 | 인구가 증가한다. |
4 | 황실에서 부패가 만연하고 제국은 쇠퇴와 불안정에 빠지기 시작한다. |
5 | 자연 재해가 농지를 휩쓸어 버린다. 이 재해는 보통 문제가 되지 않지만, 부패와 인구 과잉과 더불어 기근을 초래한다.[4] |
6 | 기근은 인구의 반란을 일으키고 내전이 시작된다.[4] |
7 | 통치자는 천명을 잃는다.[4] |
8 | 폭력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한다.[5] |
9 | 중국은 군웅할거 시대를 겪는다.[5] |
10 | 한 국가가 승리한다. |
11 | 그 국가는 새로운 제국을 시작한다.[4] |
12 | 제국은 천명을 얻는다.[4] (이 주기는 반복된다.) |
천명은 군주가 중국을 통치하도록 하늘의 총애를 받는다는 사상이였다. 천명에 대한 설명은 전국 시대 동안 중국 철학자 맹자에 의해 옹호되었다.[4]
왕조의 순환은 세 가지 주요 단계를 거친다.
순서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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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왕조의 시작 |
2 | 왕조의 생애 중간 단계이며 왕조의 절정 |
3 | 정치적, 경제적으로 왕조가 쇠퇴하여 결국 붕괴되는 시기 |
주에 따르면, 우는 하늘이 오래 전에 그에게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에 하를 세웠다. 하늘은 그들의 통치자에게 끔찍한 군주가 나타났을 때 그 칙령을 철회하고 하 왕조 대신 상에게 주었다. 주는 상 왕조의 통치 역시 타락했기 때문에 하늘이 그들에게 천명을 부여한다고 주장했다. 왕조 주기라는 개념은 후대에 전통적인 중국 정치 철학에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진은 왕조 주기 모델을 거부했지만, 반고와 같은 일부 한 시대 역사가들은 사마천의 ''사기''와는 대조적으로 공자가 확립한 올바른 역사적 틀을 고수하는 것으로 여겨지는 ''한서''와 같은 저서를 통해 왕조 모델을 다시 받아들였다. ''한서''는 이후 왕조의 역사 모델을 설정했다.[6]
당은 중국 역사학적 전통의 발전에 중요한 시기였다. 이전에는 다양한 다른 경쟁적인 역사적 관점이 있었다. 당나라는 제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경''과 ''춘추''를 바탕으로 한 역사적 관점을 제도화하기로 결정했다. 역사 저술은 한나라 시대의 사마천과 반고의 다소 개인주의적인 역사와는 대조적으로 당나라 시대에 공식적인 제국의 사업이 되었다. 한나라의 멸망부터 당나라의 건국까지의 시기를 다룬 역사를 쓰는 것이 이러한 사업 중 하나였다. 이러한 각 국가는 건국자와 마지막 통치자의 도덕적 행위에 따라 흥망성쇠를 거치는 왕조로 묘사되었다. 이 모든 것은 왕조의 틀 안에서 쓰여졌다. 이러한 역사를 저술하는 주요 영감은 반고의 ''한서''였다.[7]
중국은 오랜 역사 동안 한 왕조가 아니라 여러 다른 왕조의 계승에 의해 통치되어 왔다. ''사기''와 ''죽서기년''과 같은 고대 역사 기록에 묘사된 중국 최초의 정통 왕조는 하나라였으며, 하나라는 상나라에 의해 계승되었지만, 하나라의 구체적인 존재는 아직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지 않았다.
이러한 왕조들 중에서 한나라와 당나라는 종종 특히 강한 시기로 여겨지지만, 다른 왕조들도 문화적 및 기타 업적으로 유명하다(예를 들어, 송나라는 때때로 급속한 경제 발전과 관련이 있다). 한나라와 당나라, 그리고 다른 길고 안정적인 왕조들 이후에는 혼란기가 이어지고 중국이 소규모 정권으로 분열되었다.
혼란 속에서 결국 한 지도자가 등장하여 나라를 통일하고 강력한 중앙 권력을 부과했다. 예를 들어, 한나라 이후 다양한 왕조가 중국의 일부를 통치하다가 양견이 수나라로 중국을 통일했다. 수는 길고 번영한 당나라의 무대를 마련했다. 당나라가 멸망한 후 중국은 다시 정치적 격변기를 겪었다.
16세기 소설 ''삼국지연의''에는 "오랜 분열 뒤에는 통일이 있고, 오랜 통일 뒤에는 분열이 있다"(分久必合,合久必分중국어)는 유명한 중국 속담이 있다. 이러한 통치자들은 각자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천명을 주장했다.
중국의 이러한 잘 알려진 왕조 시대 구분은 다소 전통적인 중화 중심주의 이념에 기반을 두고 있지만, 천명을 얻으려는 비한족 통치자들에게도 적용된다. 중국 역사에서 대부분의 지배 왕조는 민족 한족에 의해 건국되었지만, 한족이 지배하는 중국 본토의 전통적인 경계 밖의 정복 왕조도 있었다. 여기에는 몽골족이 건국한 원나라와 만주족이 건국한 청나라가 포함되며, 청나라는 나중에 중국 본토를 정복하고 중국 황제의 칭호를 얻었다.
참조
[1]
서적
The Pattern of Chinese History
D. C. Heath and Company
[2]
서적
Chin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https://archive.org/[...]
Curzon
[3]
서적
East Asia: The GreatTradition
Boston
[4]
서적
Ancestors: 900 Years in the Life of a Chinese Family
William Morrow and Company
[5]
서적
Mountain of Fame: Portraits in Chinese History
Princeton University Press
[6]
서적
A COMPANION TO GLOBAL HISTORICAL THOUGHT
John Wiley & Sons, Ltd
[7]
서적
A COMPANION TO GLOBAL HISTORICAL THOUGHT
John Wiley & Sons, Ltd
[8]
웹사이트
易姓革命(えきせいかくめい)とは
https://kotobank.jp/[...]
2019-08-29
[9]
위키
後漢書/卷7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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