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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크레드 드 오트빌 (107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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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탕크레드 드 오트빌(1072년)은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여 갈릴리 공국을 다스렸으며,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으로도 활동했다. 그는 외삼촌 보에몽 1세와 함께 십자군에 참여하여 킬리키아와 안티오키아 공방전에 참여했고, 예루살렘 점령에도 기여했다. 보에몽 1세가 포로로 잡히자 안티오키아 섭정이 되었고, 킬리키아와 알레포 지역을 확장했으며, 동로마 제국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했다. 탕크레드는 1112년 사망할 때까지 섭정으로 있었으며, 그의 생애는 캉의 랄프에 의해 기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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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72년 출생 - 뜨다오하인
  • 이탈로노르만인 - 보에몽 1세
    보에몽 1세는 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을 건설하고 지도자가 되었으나, 다니슈멘드에게 패배하여 포로가 되기도 했으며, 동로마 제국 공격에 실패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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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크레드 드 오트빌 (1072년)
기본 정보
19세기 메리-조세프 블론델의 탱크레디 묘사.
19세기 메리-조세프 블론델의 탱크레디 묘사.
이름탱크레디
다른 이름탄크레디
탱크레드
신분
작위갈릴레아 공작
통치
첫 번째 통치1099년 – 1101년
후임위그 드 팔켄베르그
두 번째 통치1109년 – 1112년
이전제르바즈 드 바조슈
후임조슬랭 1세 드 쿠르트네
가문
가문오트빌 가문
아버지선량후 오도
어머니엠마 드 오트빌
결혼
배우자프랑스의 세실
출생 및 사망
출생1075년경, 이탈리아
사망1112년 12월 5일, 안티오키아 공국, 현재의 안타키아, 하타이 주, 튀르키예
매장지성 베드로 교회, 안티오키아, 현재의 안타키아, 하타이 주, 튀르키예
종교
종교로마 가톨릭교회

2. 어린 시절과 가문 배경

탕크레드는 선량공 오도와 오트빌의 엠마의 아들이었다. 그의 외조부모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기스카르의 첫 번째 아내인 부오날베르고의 알베라다였다. 엠마는 또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탕크레드는 로베르토의 손자이자 보에몽의 조카에 해당한다. 남동생으로는 기예르모가 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전투에서 탕크레드와 보에몽.

2. 1. 가문 배경

탕크레드는 선량공 오도와 오트빌의 엠마의 아들이었다. 그의 외조부모는 로베르 기스카르와 기스카르의 첫 번째 아내인 부오날베르고의 알베라다였다. 엠마는 또한 안티오키아의 보에몽 1세의 여동생이기도 했다. 탕크레드는 로베르토의 손자이자 보에몽의 조카에 해당한다. 남동생으로는 기예르모가 있다.

3. 제1차 십자군 전쟁 (1096년 ~ 1099년)

탕크레드는 1096년 외삼촌 타란토 공 보에몽과 함께 제1차 십자군에 참가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정복한 땅을 모두 동로마 제국에 반환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이 맹세를 지키려 하지 않았지만, 탕크레드는 처음에는 맹세를 거부하다 나중에 맹세했다.

1097년 니케아 공방전에 참전했으나, 셀주크 투르크와의 비밀 협상 후 도시는 알렉시우스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일로 탕크레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 큰 불신을 품게 되었다. 1097년 말, 탕크레드는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타르수스킬리키아의 다른 도시들을 점령했고,[3] 1098년 안티오크 공방전을 도왔다.

1099년 예루살렘 공격 당시, 탕크레드는 베아르의 가스통 4세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최초의 십자군이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주장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처음 들어간 십자군은 투르네의 루돌프였으며,[6][7][8] 그의 형제 엥겔베르트가 뒤를 이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한 최초의 십자군은 투르네의 루돌프였고, 그 뒤를 그의 형제인 엥글베르가 이었다. 도시가 점령되자 탕크레드는 솔로몬 신전 지붕으로 도망친 한 무리의 시민들에게 그의 깃발을 주어 안전을 보장하려 했으나, 그들은 결국 학살당했다. 게스타 프랑코룸(프랑크의 업적)의 저자는 탕크레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굉장히 분노"(greatly angered)했다고 기록했다.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탕크레드는 갈릴리 공국의 공이 되었다.

3. 1.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

3. 2. 킬리키아 원정과 안티오크 공방전

탕크레드는 1096년 외삼촌 보에몽과 함께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3] 그곳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탕크레드에게 정복한 땅을 모두 제국에 헌납하겠다는 맹세를 요구했다.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탕크레드는 맹세를 거부하지 않았지만, 이후 동로마 제국에 대한 불신을 품게 되었다.[3]

1097년 니케아 공방전에 참전했으나, 셀주크 투르크와의 비밀 협상 후 도시가 알렉시우스의 군대에 점령되면서 탕크레드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3] 같은 해, 탕크레드는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타르수스아다나, 몹수에스티아를 점령하고, 사르반디카르와 아나자르부스와 같은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에 합병시켰다.[4][5]

타르수스를 공격하는 탕크레드


1098년 안티오키아 공방전에 참여한 후, 1099년 예루살렘 공격 당시 탕크레드는 베아르의 가스통 4세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했다고 주장했다.[6][7][8] 그러나 다른 주장에 따르면, 최초의 십자군은 투르네의 루돌프와 그의 형제 엥글베르트였다.[6][7][8] 탕크레드는 솔로몬 성전 지붕으로 피신한 시민들에게 자신의 깃발을 주어 보호하려 했으나, 결국 이들은 십자군의 약탈 과정에서 학살되었고 탕크레드는 이에 분노했다.[9]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진 후, 탕크레드는 갈릴리 공국의 공이 되었다.

3. 3. 예루살렘 함락 (1099년)

1096년 탕크레드는 외삼촌 보에몽과 함께 제1차 십자군에 참여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 그곳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 콤네누스는 십자군 지도자들에게 정복한 땅을 모두 동로마 제국에 반환할 것을 맹세하도록 요구했다. 다른 지도자들은 그 맹세를 지키려 하지 않았지만, 탕크레드는 맹세를 거부했고, 후에 니케아에서 황제를 만났을 때 보에몽에게 훈계받고 나서야 맹세를 했다.

1097년 니케아 공방전에 참전했으나, 셀주크 투르크와의 비밀 협상 후 도시는 알렉시우스의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일로 탕크레드는 동로마 제국에 대해 큰 불신을 품게 되었다. 1097년 말, 탕크레드는 킬리키아 관문을 통해 남쪽으로 지나 레반트로 들어갔고, 타르수스, 아다나, 몹수에스티아 등 킬리키아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했다.[3][4]

그는 1098년 안티오키아 공방전을 도왔고, 1099년 예루살렘 공격에 참가했다. 7월 15일, 탕크레드는 가스통 4세와 함께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처음 들어간 십자군은 투르네의 루돌프였으며,[6][7][8] 그의 형제 엥겔베르트가 뒤를 이었다.)'' 도시가 점령되자 탕크레드는 솔로몬 성전 지붕으로 도망친 시민들에게 자신의 깃발을 주어 안전을 보장하려 했으나, 그들은 결국 다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 약탈로 인해 학살되었다.[9] 게스타 프랑코룸(프랑크인의 업적)의 저자는 탕크레드가 이 사실을 알았을 때 "굉장히 분노"(greatly angered)했다고 기록했다.[9]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지자, 탕크레드는 갈릴리 공국의 공이 되었다.

4. 안티오크 공국 섭정 (1100년 ~ 1112년)

1100년, 보에몽 (보에몽 1세)이 북방 원정 중 멜리테네 (현재 터키 남동부 말라티아)에서 튀르크계 국가 다니슈멘드 왕조와의 멜리테네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자,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로 향하여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으로서 자리를 지키게 된다.

탕크레드는 주변 셀주크 투르크계 정권과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킬리키아알레포 등의 영토를 빼앗아 공국의 영토를 확대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이러한 확대를 막고 탕크레드를 자신의 관리하에 두기 위해, 안티오키아 북쪽에서는 다니슈멘드 왕조와 결탁하고, 안티오키아 남쪽에서는 십자군 국가 트리폴리 백국의 성립을 돕는 등 10년 이상 압박을 가했다. 그러나 결국 탕크레드는 이후에도 동로마 제국에 복종하지 않았다.

1104년, 십자군 국가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와 안티오키아 공국의 보에몽 1세는 공동으로 유프라테스강 동쪽으로 원정하지만, 하란 전투에서 모술 등의 셀주크 투르크계 정권에 대패했다. 이를 기회로 본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을 공격하여 지중해 쪽 라타키아 항구를 회복하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도움을 받아 킬리키아를 되찾았다. 동쪽에서는 알레포의 시리아 셀주크 왕조계 군주 리드완이 세력을 회복하여 시리아 내륙부를 안티오키아 공국에서 탈환해 갔다.

사방에서 압박받는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보에몽 1세는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서유럽으로 떠났고, 탕크레드는 다시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이 되었다. 또한 에데사 백작 보두앵 2세가 하란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기 때문에, 에데사 백국의 섭정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105년에는 알레포의 리드완과 싸워 오론테스강 동쪽의 영토를 알레포로부터 되찾았다[13] . 보두앵 2세는 1107년에 석방되었고, 에데사 백국의 실권을 되찾으려는 보두앵 2세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라타키아를 다시 빼앗아 안티오키아 공국을 시리아 제일의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가 보석이 박힌 터번을 쓰고 칼을 휘두르는 모습을 묘사한 그의 섭정 시대에 탕크레드가 발행한 동전


이윽고 프랑크인(십자군 국가의 서양인)과 무슬림은 공통의 적을 상대로 때와 경우에 따라 손을 잡게 된다. 1108년, 문키즈 가문이 지배하는 시리아 중부의 샤이잘 성에서의 전투에서 탕크레드는 선물로 받은 말을 얻고 병력을 철수시켰다. 샤이잘 측 사자였던 시인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h ibn Munqidh)의 기록에 따르면, 말을 데려온 쿠르드 청년의 미모를 칭찬하며, 후에 그를 포로로 잡더라도 반드시 석방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 안티오키아 섭정은 약속을 어기고, 후에 그를 포로로 잡았을 때 가두어 고문하고 오른쪽 눈을 도려냈다고 한다[14] . 샤이잘은 안티오키아 공국과 트리폴리 백국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탕크레드는 자주 이 성을 포위했다.

1108년, 서유럽으로 돌아갔던 보에몽 1세는 다시 군대를 모아 이번에는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지만 패배했고, 알렉시오스 1세와 데볼 조약을 맺었다. 보에몽 1세는 알렉시오스 1세에게 신종할 것을 맹세했고,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의 봉신 국가가 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안티오키아에 남아있던 탕크레드는 이 조약을 거부했다. 이 후 수십 년 동안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게 된다. 1110년, 탕크레드는 홈스 서쪽의 고개를 억누르는 요충지인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점령했다. 이 성은 후에 트리폴리 백국의, 더 나아가 성 요한 기사단의 중요 거점이 된다.

크라크 데 슈발리에

4. 1. 영토 확장과 동로마 제국과의 갈등

탕크레드는 1100년 멜리테네 전투에서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에 포로로 잡히자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15]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킬리키아알레포 등의 영토를 빼앗아 공국의 영토를 확장했다.[15]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확장을 막고 탕크레드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고 10년 이상 압박했으나, 탕크레드는 이에 굴복하지 않았다.[15]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히자, 탕크레드는 에데사 백국의 섭정직도 겸임하게 되었다.[10] 1107년 보두앵 2세가 석방된 후 에데사 백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탕크레드와 싸웠고, 결국 탕크레드는 패배하여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10]

1105년 아르타 전투에서 알레포의 리드완을 이긴 탕크레드는 오론테스강 동쪽의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15] 1108년 샤이자르와의 전투 후, 탕크레드는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h ibn Munqidh;이슬람의 역사 기록가)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샤이자르 측 사자를 가두어 고문하고 오른쪽 눈을 도려내는 잔혹함을 보였다.[16]

1108년 탕크레드는 보에몽 1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데볼 조약을 거부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안티오키아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 1110년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점령하여 트리폴리 백국의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4. 2. 에데사 백국 섭정

탕크레드는 1100년 멜리테네 전투에서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에 포로로 잡히자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15] 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땅을 빼앗아 라틴 공국을 확장했지만, 알렉시우스 1세는 10년 동안 그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15] 1104년 하란 전투 이후 보두앵 2세가 사로잡히자 에데사 백국의 섭정직 또한 탕크레드가 차지했다.[15] 1107년 보두앵 2세가 풀려난 후, 에데사 백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해 탕크레드와 싸웠으나 결국 탕크레드가 패배하고 안티오크로 돌아갔다.[15]

1100년 보에몽이 멜리테네 전투에서 패배하여 포로가 되자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섭정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탕크레드는 킬리키아알레포 등의 영토를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계 정권으로부터 빼앗아 공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탕크레드를 압박했지만, 탕크레드는 굴복하지 않았다.[10] 1103년 보에몽 1세가 석방되자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 공국의 정권을 숙부에게 반환했다.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히자 탕크레드는 에데사 백국의 섭정까지 겸임하게 되었다. 1105년 아르타 전투에서 라드완 오브 알레포를 상대로 승리하여 오론테스 강 동쪽의 영토 일부를 회복했다.[10] 1107년 보두앵 2세가 석방된 후, 에데사 백국의 실권을 되찾으려는 보두앵 2세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탕크레드는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h ibn Munqidh;이슬람의 역사 기록가)에 따르면 1108년 사이자르(Shaizar)와 안티오크 사이의 전투 후, 탕크레드는 사이자르의 지배자 가족들로부터 말을 선물받았는데, 말을 배달한 쿠르드족 청년을 보고 감명받아 그를 붙잡더라도 풀어줄 것이라고 말했지만, 1년 뒤 그를 감옥에 넣고 고문하고 오른쪽 눈을 뽑아내기까지 했다고 한다.[16]

1108년, 탕크레드는 보에몽이 알렉시우스에게 충성 서약을 맹세한 데볼 조약(Treaty of Devol)을 따르는 것을 거절했고, 그 후 수십 년 동안 안티오크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해 있었다.[10] 1110년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차지했다.[10]

4. 3. 데볼 조약 거부와 독립 유지

탕크레드는 1100년 멜리테네 전투에서 보에몽 1세가 다니슈멘드에 포로로 잡히자 안티오키아의 섭정이 되었다.[15] 그는 킬리키아알레포 등 동로마 제국과 셀주크 투르크계 정권으로부터 영토를 빼앗아 공국의 영토를 확장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탕크레드를 견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15]

1104년 하란 전투에서 에데사 백국의 보두앵 2세가 포로로 잡히자 탕크레드는 에데사 백국의 섭정직도 겸임했다.[10] 1107년 보두앵 2세가 석방된 후, 에데사 백국의 지배권을 되찾기 위한 분쟁에서 탕크레드는 패배하고 안티오키아로 돌아왔다.[10]

1105년 아르타 전투에서 알레포의 리드완을 격파하여 오론테스 강 동쪽 영토를 회복했다.[10] 1108년 사이자르(Shaizar)와의 전투 후, 탕크레드는 우사마 이븐 문키드(Usamah ibn Munqidh)의 기록에 따르면, 샤이자르 측 사자로 온 쿠르드족 청년을 훗날 포로로 잡더라도 풀어주겠다고 약속했지만, 이후 그를 고문하고 오른쪽 눈을 멀게 했다.[16]

1108년, 보에몽 1세가 알렉시오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데볼 조약을 탕크레드는 거부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안티오키아 공국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했다. 1110년에는 크락 데 슈발리에를 점령하여 트리폴리 백국의 중요 거점으로 삼았다.

탕크레드는 1112년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보에몽 2세의 섭정으로 있었다. 그는 프랑스의 세실과 결혼했지만 자녀는 없었다. 캉의 랄프(Ralph of Caen)는 탕크레드의 전기 ''게스타 탕크레디''(Gesta Tancredi)를 라틴어로 저술했다.

니콜라 푸생의 ''탕크레드와 에르미니아'' (에르미타시 미술관).

4. 4. 크라크 데 슈발리에 점령

탕크레드는 1110년 크라크 데 슈발리에를 점령했는데, 이곳은 나중에 트리폴리 백국의 중요한 성이 되었다.[10] 크라크 데 슈발리에는 홈스 서쪽의 고개를 억누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훗날 성 요한 기사단의 중요 거점이 되었다.[14]

5. 죽음과 유산

6. 평가와 영향

라울 드 캉은 자신의 연대기인 탕크레드의 행적에서 탕크레드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한다. 라울은 탕크레드가 기사 계급의 본질적인 죄악성과 그것이 수반하는 폭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노르만족이 지배하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무장 순례 요청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11] 탕크레드는 라울에 의해 매우 경건하면서도 폭력적인 매와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정복을 위해 길러진, 싸움에 능숙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사였지만,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예루살렘 사원 약탈 이후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그의 매우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12]

6. 1. 긍정적 평가

라울 드 캉은 자신의 연대기인 탕크레드의 행적에서 탕크레드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한다. 라울은 탕크레드가 기사 계급의 본질적인 죄악성과 그것이 수반하는 폭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노르만족이 지배하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무장 순례 요청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11] 탕크레드는 라울에 의해 매우 경건하면서도 폭력적인 매와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정복을 위해 길러진, 싸움에 능숙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사였지만,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예루살렘 사원 약탈 이후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그의 매우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12]

6. 2. 부정적 평가

라울 드 캉은 자신의 연대기인 탕크레드의 행적에서 탕크레드의 성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다. 라울은 탕크레드가 기사 계급의 본질적인 죄악성과 그에 수반하는 폭력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노르만족이 지배하는 이탈리아 남부에서의 삶을 포기하고 교황 우르바노 2세의 무장 순례 요청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언급한다.[11] 탕크레드는 라울에 의해 매우 경건하면서도 폭력적인 매와 같은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정복을 위해 길러진, 싸움에 능숙하고 기회주의적인 전사였지만, 1099년 십자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정복된 후 예루살렘 사원 약탈 이후 전리품을 부하들에게 공정하게 분배하는 매우 실용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12]

7. 대중문화 속 탕크레드

토르콰토 타소의 16세기 서사시 《해방된 예루살렘》에서 탕크레드는 이교도 처녀전사 클로린다에게 애정을 표현하는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안티오키아의 공주 에르미니아는 그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사랑은 보답받지 못한다. 니콜라 푸생의 그림 《탕크레드와 에르미니아》는 에르미타주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는 타소의 시 일부를 바탕으로 1624년 희곡 작품 ''Il combattimento di Tancredi e Clorinda''를 작곡했다. 탕크레드는 임레 마다흐의 《인간의 비극》의 한 장면에 등장한다. 톰 하퍼(Tom Harper's)의 "천국의 공방전"(Siege of Heaven)에서 그는 난폭한 사이코패스로 묘사되었다. 알프레드 더건의 소설 《보헤몬드 백작》에서도 비슷하지만 약간 더 유머러스하게 묘사된다.

월터 스콧 경의 소설 《파리의 로베르 백작》에서 탕크레드는 십자군 지도자 중 한 명으로 등장한다. 벤자민 디즈레일리의 소설 《탕크레드, 또는 새로운 십자군》은 갈릴리 공작의 가상 현대 후손의 모험을 중심으로 한다. 로시니의 오페라 《탕크레디》는 볼테르의 연극 《탕크레드》를 거쳐 타소의 작품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참조

[1] Britannica Tancred (crusader)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11
[2] Encyclopedia The Crusades - An Encyclopedia Grabois, Aryeh 2006
[3] Q
[4] 서적 The Fortifications of Armenian Cilicia: Dumbarton Oaks Studies XXIII Dumbarton Oaks, Trustees for Harvard University 1987
[5] 서적 Recueil des historiens des croisades, Documents arméniens Farnborough 1967
[6] 서적 The ethics of war: classic and contemporary readings https://books.google[...] Wiley-Blackwell 2006
[7] 웹사이트 Lethold of Tournai https://www.dhi.ac.u[...] 2016
[8] 서적 The First Crusade, A New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2004
[9] 서적 Tancred: A Study of His Career and Work in Their Relation to the First Crusade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Latin States in Syria and Palestine The University of Chicago 1940
[10] 서적
[11] 서적 Gesta Tancredi
[12] 서적 Gesta Tancred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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