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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즈메이니아 원주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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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약 4만 년 전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육교를 통해 태즈메이니아로 건너온 사람들로, 18세기 후반 유럽인 정착 이전까지 약 8,000년 동안 고립되어 살았다. 이들은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유목 생활을 했으며, 독특한 문화와 영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7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유럽인과의 접촉으로 인해 물개 사냥꾼과의 갈등, 질병, 학살 등 끔찍한 역사를 겪으며 인구가 급감했다. 현재는 팔라와(Palawa)를 중심으로 원주민성을 규정하고 있으며, 20세기 후반부터 원주민 권리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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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지리적 위치
기본 정보
그룹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원주민 이름팔라와 / 파카나 / 팔레바
거주 지역태즈메이니아
인구6,000–23,572명 (자신을 원주민으로 밝힌 사람)
언어영어
오스트레일리아 영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영어
팔라와 카니
이전 태즈메이니아 제어
종교기독교; 이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종교
관련 그룹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역사
시기1860년대
인구 추정리스 존스: 3,000–5,000명
N. J. B. 플롬리: 4,000–6,000명
헨리 레이놀즈: 5,000–7,000명
콜린 파도: 12,000명 이상
데이비드 데이비스: 15,000명
마지막 생존자 주장트루가니니
기타 주장수케 (약 1888년 사망)
패니 코크레인 스미스

2. 역사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역사는 수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빙하기 동안 육지로 연결되었던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태즈메이니아로 건너왔다. 이후 해수면 상승으로 고립되어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인들이 태즈메이니아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비교적 평화로운 접촉이 이루어졌으나, 19세기 초 영국이 태즈메이니아(타스마니아)를 식민지화하면서 갈등이 심화되었다. 특히, 백인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납치, 폭력, 성범죄를 저지르면서 원주민 사회는 큰 피해를 입었다.

조지 아서 경이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에게 발표한 선포문(1828~1830년경). 법 앞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04년 리스던 코브 학살(1804 Risdon Cove massacre)은 영국 군인과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1820년대에는 흑인 전쟁(Black War)으로 대표되는 원주민들의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조지 오거스터스 로빈슨에 의해 플린더스 섬(Flinders Island)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인구의 급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존재한다.

제프리 블레이니(Geoffrey Blainey), 키스 윈드슈틀(Keith Windschuttle) 등은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본토와의 오랜 단절로 인해 면역력이 약했던 원주민들은 독감, 폐렴, 결핵 등의 호흡기 질환과 성병에 취약했다.

벤 키어넌(Ben Kiernan), 콜린 타츠(Colin Tatz), 벤저민 매들리(Benjamin Madley)와 같은 많은 식민주의와 집단 학살 역사가들은 라파엘 렘킨(Raphael Lemkin)의 정의, 즉 UN 집단 학살 협약에서 채택된 정의에 따라 타스마니아의 인구 감소가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4]

19세기 중반, 유럽인들은 체질인류학적 연구를 목적으로 원주민들의 유해를 수집했다. 특히 트루가니니와 윌리엄 래니(William Lanne)의 유해가 무단으로 채취되어 전시되기도 했다. 원주민들은 이러한 행위를 영혼의 안식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 강하게 반발했다.

20세기 후반부터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정체성을 되찾기 위한 운동을 전개했다. 마이클 맨셀과 같은 활동가들은 원주민 혈통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노력했다. 2002년 영국 왕립 외과의 대학은 트루가니니의 피부와 머리카락 샘플을, 대영박물관은 2007년 두 후손에게 유골을 반환했다.[9] 2023년에는 유네스코(UNESCO)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멸종했다는 주장을 담은 문서를 삭제했다.[9]

오늘날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팔라와 카니라는 언어를 복원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역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 1. 유럽인 정착 이전

사람들은 약 4만 년 전 빙하기 동안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사이의 육교를 통해 태즈메이니아로 건너왔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섬의 인구는 고립되었다.[5] 쿠티키나(또는 프레이저) 동굴과 남서부 맥스웰 강 계곡의 워린 동굴에서 발견된 유물들은 원주민들이 오래전부터 거주했다는 것을 증명한다. 남서부와 중부 태즈메이니아에서 발굴된 풍부한 발견물은 기원전 35,000년에서 11,000년까지 "플라이스토세 대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풍부한 고고학적 증거"를 제공한다.

2. 1. 1. 이주 연대표

사람들은 약 4만 년 전 빙하기 동안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사이의 육교를 통해 태즈메이니아로 건너왔다. 유전학 연구에 따르면 바시안 평원이 침수될 정도로 해수면이 상승한 후, 섬의 인구는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유럽 탐험이 있을 때까지 약 8,000년 동안 고립되었다.[5]

쿠티키나(또는 프레이저) 동굴에서 발견된 19,000년 된 퇴적물은 빙하기 이후 고지대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1990년 고고학자들은 남서부 맥스웰 강 계곡의 워린 동굴에서 유물을 발굴하여 기원전 34,000년까지 원주민 거주 사실을 증명했으며, 이는 플라이스토세 시대에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인구임을 나타낸다.

빙하기 최대기에 해수면이 가장 낮았을 때, 오스트레일리아 남부에서 온 여러 차례의 원주민 이동으로 타스마니아가 식민지화되었다. 고고학적, 지리적, 언어적 기록은 타스마니아의 여러 차례의 점령과 세 가지 언어 집단이 하나의 광범위한 집단으로 합쳐졌음을 시사한다.

  • 플라이스토세 팔라와(Pleistocene Palawa) 언어 집단: 타스마니아 최초의 민족 및 언어 집단.
  • 퍼녹스(Furneaux) 화자들: 오포드(Orford)만큼 남쪽으로 북동부 타스마니아에서 팔라와(Palawa)를 대체.
  • 나라(Nara) 화자들: 침략했지만 서부 타스마니아로 밀려남.


바스 해협이 생길 정도로 해수면이 상승한 후,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와 타스마니아는 별개의 육지가 되었고,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은 본토의 친척들과 단절되었다.

2. 2. 유럽인과의 초기 접촉

1642년 아벨 야스퍼 타스만이 태즈메이니아를 최초로 발견하고 반 디멘스 랜드(Van Diemen's Land)라고 명명했지만, 상륙 당시 원주민들과 만나지는 못했다.

1772년, 마르크-조제프 마리옹 뒤프렌이 이끄는 프랑스 탐험대가 태즈메이니아를 방문했다. 처음에는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접촉을 했으나, 다른 배가 해안으로 향하자 원주민들은 불안해했다. 창과 돌이 던져졌고, 프랑스인들은 사격으로 응수하여 최소한 한 명의 원주민을 사망하게 하고 여러 명을 부상시켰다고 보고되었다. 뒤이어 브뤼니 댕트르카스토가 이끈 1792~93년의 탐험대와 니콜라 보댕이 이끈 1802년 탐험대는 원주민들과 우호적인 접촉을 했는데, 특히 댕트르카스토 탐험대는 장기간에 걸쳐 접촉을 유지했다.[1]

토비아스 퍼녹 선장이 이끄는 레졸루션(Resolution)호(제임스 쿡 선장이 이끄는 탐험대의 일부)는 1773년에 태즈메이니아를 방문했지만, 브루니 섬에서 무인 주거지에 선물을 남겨두기는 했으나 원주민들과는 접촉하지 않았다. 알려진 최초의 영국과 원주민 간의 접촉은 1777년 제임스 쿡 선장이 브루니 섬에서 이루어졌으며, 평화로운 접촉이었다. 윌리엄 블라이 선장 또한 1788년 브루니 섬을 방문하여 원주민들과 평화로운 접촉을 했다.[2]

2. 3. 물개 사냥꾼과의 접촉, 그리고 배스 해협 공동체의 형성

1790년대 후반부터 영국과 미국의 물개 사냥꾼들이 배스 해협의 섬들과 태즈메이니아 북부 및 동부 해안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호주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과 유럽인 사이의 접촉이 빈번해졌다.[6] 1800년경부터 물개 사냥철(11월~5월)에는 물개 사냥꾼들이 배스 해협의 무인도에 정기적으로 머물렀다. 이들은 섬에 반영구적인 캠프나 정착지를 세웠는데, 이곳은 작은 배로 태즈메이니아 본토에 도달하여 원주민들과 접촉하기에 충분한 거리였다.[6]

물개 사냥꾼과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부족 사이에는 무역 관계가 발전했다. 사냥개는 원주민들에게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고, 밀가루, 차, 담배와 같은 다른 외래품들도 마찬가지였다. 원주민들은 캥거루 가죽을 그러한 상품과 교환했다. 그러나 곧 원주민 여성을 대상으로 한 무역이 발전했다. 많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여성들은 물개 사냥과 바닷새와 같은 다른 음식을 얻는 데 매우 능숙했고, 일부 태즈메이니아 부족들은 물개 사냥철에 자신의 서비스, 그리고 더 드물게는 원주민 남성들의 서비스를 물개 사냥꾼들에게 제공했다. 다른 여성들은 영구적으로 팔렸다. 이 무역에는 무역에 종사하는 부족의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부족에서 납치된 여성도 포함되었다. 일부 여성들은 결혼을 통해 새로운 이주민들을 원주민 사회에 통합하기 위해 주어졌을 수도 있다.[6]

물개 사냥꾼들은 해안을 따라 습격을 가해 원주민 여성을 납치했고, 그 과정에서 원주민 남성들을 살해했다는 보고가 있다. 1810년까지 물개 개체 수가 사냥으로 크게 감소했기 때문에 대부분의 물개 사냥꾼들은 그 지역을 버렸지만, 약 50명 정도의 주로 "탈영 수병, 탈주 죄수 또는 전과자"인 소수의 물개 사냥꾼들은 배스 해협 섬들의 상주민으로 남았고, 일부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여성들과 가정을 이루었다.[6]

일부 여성들은 물개 사냥꾼들에게 강제로 섬으로 끌려갔고, Tarenorerer(영: Walyer)의 경우처럼 자발적으로 간 여성도 있었다.[6] Walyer는 나중에 물개 사냥꾼들의 잔혹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을 죽이려는 시도로 악명을 얻게 되었다.[6] Punnilerpanner 출신인 Walyer는 결국 탈출한 후 Plairhekehillerplue 부족에 합류하여 반 다이멘스 랜드 컴퍼니 직원들을 공격하는 것을 이끌었다.[6] Walyer의 공격은 원주민들이 소총을 사용한 최초의 기록이다.[6] 체포된 그녀는 일을 거부하고 펭귄 섬으로 추방되었다.[6] 나중에 스완 섬에 수감된 그녀는 반란을 조직하려고 시도했다.[6] 관습적으로 원주민 여성은 전쟁에 참여하는 것이 금지되었지만, 물개 사냥꾼으로부터 탈출한 여러 원주민 여성들은 지도자가 되거나 공격에 참여했다.[6]

린달 라이언에 따르면, 물개 사냥꾼들에게 팔리거나 납치된 여성들은 유럽인/백인 당국에 대한 "중요한 반체제 세력"이 되었다.[6] 역사가 제임스 본윅은 물개 사냥꾼들의 명백한 포로였던 원주민 여성들을 보고했지만, "새로운 남편에게 충실하고 애정을 보였던" 여성들, "만족스러워 보였던" 여성들, 그리고 "원주민 부족"을 방문할 수 있었던 여성들도 보고했으며, 물개 사냥꾼들은 그들이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6]

1816년 물개 사냥 선장 제임스 켈리는 물개 사냥꾼들의 관습은 각자 "자신의 사용과 이익을 위해 2~5명의 원주민 여성을 두는 것"이라고 썼다. "무역"에서 이용할 수 있는 여성이 부족해지면서 납치가 일반화되었고, 1830년에는 배스 해협 섬들에서 최소 50명의 원주민 여성이 "노예 상태로 지내고 있다"고 보고되었다.[6]

원주민 여성에 대한 습격과 무역은 태즈메이니아 북부 지역의 원주민 여성 수의 급격한 감소에 기여했으며, 따라서 태즈메이니아 순수 혈통 원주민 인구의 몰락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섬에는 부분적으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혈통을 가진 혼혈 사회가 형성되어 현재까지도 남아 있으며, 많은 현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19세기 배스 해협 물개 사냥꾼 공동체의 후손임을 추적한다.[7]

2. 4. 영국 식민화

1803년 영국이 태즈메이니아에 정착하면서 원주민과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초기에는 식량 자원을 둘러싼 갈등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백인 남성들이 원주민 여성들을 성적 대상으로 삼으면서 갈등이 더욱 악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원주민들은 학살과 납치를 겪어야 했다.[8]

1804년 리스던 코브 학살(1804 Risdon Cove massacre)은 영국 군인과 정착민들이 원주민들을 공격하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이다. 이 학살로 부모를 잃은 한 원주민 소년은 로버트 호바트 메이(Robert Hobart May)라는 이름으로 영국인에게 길러졌으며, 영국 식민 사회와 광범위하게 접촉한 최초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이 되었다.[8]

1814년 토마스 데이비(Thomas Davey) 총독은 원주민 아동 납치에 대한 "극도의 분노와 혐오"를 표명하는 선포문을 발표했고, 1819년 윌리엄 소렐(William Sorell) 총독도 이를 재발표하며 납치된 아이들을 정부 지원 하에 양육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원주민 아동 납치는 계속되었고, 많은 아이들이 정착민들과 함께 살거나 고아원으로 보내졌다.

제프리 블레이니(Geoffrey Blainey), 키스 윈드슈틀(Keith Windschuttle) 등은 유럽에서 유입된 질병이 원주민 인구 감소의 주요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본토와의 오랜 단절로 인해 면역력이 약했던 원주민들은 독감, 폐렴, 결핵 등의 호흡기 질환과 성병에 취약했다. 제임스 본윅(James Bonwick)은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들이 유럽인들로부터 성병에 감염되었다고 언급하며, 이는 직접적인 사망 원인뿐만 아니라 번식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적한다.

1825년부터 1831년 사이에는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의 게릴라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목축업의 확장과 식민지 인구 증가로 인해 원주민들은 생존을 위한 저항을 시작했다. 1828년 왕실 선포(Royal Proclamation)에 따라 국경에 군사 기지가 설치되고, 계엄령(martial law)이 선포되면서 원주민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

흑인 전쟁(Black War)(1828~1832)과 흑색선(Black Line)(1830)은 유럽 정착민과 원주민 관계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 사건들로 인해 많은 원주민들이 조지 오거스터스 로빈슨에게 항복하고 플린더스 섬(Flinders Island)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2. 4. 1. 문학에 언급된 원주민과 정착민 (1800–1835)

이 시기에 발생한 사건들은 문학 작품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럽인과 원주민 사상자 수는, 포로로 잡힌 원주민 주민들을 포함하여, 상당히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사살된 원주민 인구 수는 상당히 과소평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

부족포로사살사망한 정착민
오이스터 베이276750
북동부12437
북부288015
빅 리버314360
북부 미들랜드233826
벤 롬몬드353120
북서부96593
남서부 해안4700
남동부1412
합계313362183


2. 4. 2. 원주민 인구의 재정착

1830년대부터 생존한 원주민들은 플린더스 섬 등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과 질병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15][16]

2. 4. 3. 인류학적 관심

1860년대부터 오이스터 코브(Oyster Cove) 사람들은 국제적인 과학적 관심을 끌었고, 많은 박물관들이 소장을 위해 신체 일부를 요구했다. 과학자들은 체질인류학적 관점에서 호주 원주민 타스마니아인들을 연구하여 고인류학 분야에 대한 통찰력을 얻고자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개별 원주민 신체 부위와 전체 골격에 관심이 있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두개골은 두개안면 계측인류학 연구를 위해 국제적으로 특히 많이 찾았다. 트루가니니 자신도 사후에 자신의 시신이 악용될까 봐 우려했고, 그녀가 사망한 지 2년 후 그녀의 시신은 발굴되어 과학 연구를 위해 멜버른으로 보내졌다. 그녀의 골격은 1947년까지 타스마니아 박물관에 공개 전시되었고, 1976년에 화장을 통해서야 안치되었다. 윌리엄 래니(William Lanne)(킹 빌리(King Billy)로 알려짐)는 1869년 사망했는데, 그의 두개골과 음낭(담뱃갑용)이 제거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골격들 중 많은 수는 무덤에서 나온 원주민 "미라" 또는 살해된 사람들의 시체에서 얻은 것이었다. 아말리 디트리히(Amalie Dietrich)는 이러한 표본을 제공하여 유명해졌다.[1]

원주민들은 신체 부위의 분산을 존중심 없는 행위로 여겼는데, 원주민 신앙 체계의 일반적인 측면 중 하나는 영혼이 고향에 안치될 때만 안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5. 20세기부터 현재까지

1903년 호레이스 왓슨은 타스마니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마지막 화자로 여겨지는 패니 코크레인 스미스의 노래를 녹음했다. 왓슨의 후손인 브루스 왓슨 가수는 이 사진에 관한 노래를 작곡하여 스미스의 후손인 로니 서머스 가수와 함께 공연했다.

1903년 호레이스 왓슨이 타스마니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던 마지막 화자로 여겨지는 패니 코크레인 스미스의 노래를 녹음하는 모습.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체 일부와 장식품이 소장품에서 반환되고 있으며, 영국 왕립 외과의 대학은 2002년 트루가니니의 피부와 머리카락 샘플을, 대영박물관은 2007년 두 후손에게 유골을 반환했다.[9]

20세기 동안 순수 원주민 혈통의 원주민이 없고, 생존 인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비원주민들은 1876년 트루가니니 사망 후 그들이 멸종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마이클 맨셀과 같은 타스마니아 원주민 운동가들은 원주민 혈통에 대한 인식과 확인을 넓히려고 노력해왔다. 2023년 4월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의 캠페인 이후 유네스코(UNESCO)는 그들이 멸종했다는 주장을 담은 문서를 삭제했다.[9]

그러나 타스마니아 원주민 사회 내부에서는 무엇이 원주민성(Aboriginality)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주로 흰 남성 물개 사냥꾼과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의 후손인 팔라와(Palawa)는 주 정부 차원에서 타스마니아 원주민 혈통을 결정할 권한(정부 원주민 서비스에 대한 권리)을 부여받았다. 팔라와는 배스 해협 제도 지역 사회의 후손만을 원주민으로 인정하며, 구전 전통에 따라 타스마니아 본토 원주민 사회로부터 혈통을 주장하는 리아 푸타를 원주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리아 푸타는 팔라와가 통제하는 타스마니아 원주민 센터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2007년 이후로 후손 하위 그룹에서 가계를 확립하기 위해 DNA 검사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는 팔라와에 의해 강력히 반대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유전적 연관성의 존재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원주민성과 별개의 "영적인 연결"을 주장하면서 일부 분야에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리아 푸타는 현재 원주민성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는 검사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팔라와에게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며, DNA 검사는 리아 푸타의 인정에 대한 장벽을 우회하거나 그들의 원주민성 주장을 반증할 수 있다.

2000년 4월 타스마니아 정부의 ''원주민 토지에 관한 입법평의회 특별위원회''는 구전 전통에 근거하여 원주민성을 결정하는 어려움에 대해 논의했다. 캐산드라 파이부스 교수가 제시한 예로는 두 명의 원주민 여성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구전 역사를 가진 휴온과 채널 원주민들의 주장이 있다. 연구 결과 두 여성 모두 비원주민 유죄 판결 여성으로 밝혀졌다.

타스마니아 팔라와 원주민 사회는 타스마니아 언어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바탕으로 팔라와 카니라는 타스마니아 언어를 재구성하고 재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른 타스마니아 원주민 사회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거주하는 언어 지역에 따라 전통 타스마니아 언어의 단어를 사용한다.

3. 부족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은 유럽인 정착 이전에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살았으며, 각 부족은 고유한 언어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약 4만 년 전, 빙하기 동안 섬과 오스트레일리아 본토 사이의 육교를 통해 태즈메이니아로 건너왔다. 바시안 평원이 침수될 정도로 해수면이 상승한 후, 섬의 인구는 약 8,000년 동안 고립되었다가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 유럽 탐험이 있을 때까지 고립된 생활을 했다.

쿠티키나 동굴에서 발견된 19,000년 된 퇴적물은 빙하기 이후 고지대에 거주했음을 보여준다. 1990년에는 남서부 맥스웰 강 계곡의 워린 동굴에서 기원전 34,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물이 발굴되어, 플라이스토세 시대에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인구였음을 나타낸다.

고고학적, 지리적, 언어적 기록은 타스마니아가 여러 차례 점령되었고, 세 가지 언어 집단이 하나의 광범위한 집단으로 합쳐졌음을 시사한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도착 당시 타스마니아에 서쪽의 나라(Nara)와 동쪽의 마라(Mara)라는 두 개의 주요 언어 및 민족 집단을 발견했다.

해수면 상승으로 바스 해협이 생기면서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와 타스마니아는 분리되었고, 본토에서 이주한 원주민들은 고립되었다. 킹과 퍼녹스 고지대에 남은 인구는 갇혀서 멸종한 것으로 보인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부족


타스마니아 원주민의 사회 조직은 가족 집단 또는 가족 단위와 사회 단위 또는 씨족(40~50명)이라는 최소한 두 개의 계층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씨족보다 상위의 더 큰 정치 단체("부족")가 존재했는지는 논란이 있다.

유럽인들이 타스마니아에 도착하기 전, 타스마니아 원주민의 총 인구수는 3,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유전학 연구 결과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시사하며, 이는 원주민들의 구전 전통과 일치한다. 하지만 1803년 이전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식민화 이전 물개 사냥꾼들과의 초기 접촉이 원인으로 추측된다.[5]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하며, 식량 공급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이동했다. 그들은 다른 씨족과 교류, 혼인, "전쟁"을 벌였다. 타스마니아 인구는 각각 6~15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9개의 국가로 나뉘었고, 각 씨족은 친척 관계인 2~6개의 확대 가족 단위로 구성되었다. 개별 씨족은 정의된 국가 경계를 넘어 넓게 활동했으며, 방문객에게는 정교한 입국 의례가 필요했다.[4]

3. 1. 오이스터 베이 (파레다르메)

파레다르메(Paredarerme)는 타스마니아에서 가장 큰 부족으로 추산되며, 10개의 부족으로 구성되어 700명에서 800명에 달했다. 파레다르메 부족은 빅 리버(Big River) 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내륙과 해안의 좋은 사냥터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노스 미들랜드(North Midlands) 부족과의 관계는 대체로 적대적이었으며, 더글러스-앱슬리 국립공원(Douglas-Apsley National Park) 지역은 드물게 방문하는 위험한 국경지대였을 것으로 보인다.

파레다르메 부족은 보통 봄과 여름에는 고지대(High Country) 내륙으로 이동하고 가을과 겨울에는 해안으로 돌아왔지만, 모두가 매년 영토를 떠난 것은 아니며 일부는 해안에 머물기도 했다. 이러한 이동은 해안의 풍부한 해산물, 물개, 조류와 내륙의 캥거루, 왈라비, 주머니쥐 사냥을 통해 다양한 음식을 제공했다. 고지대는 또한 북서부와 북부 사람들과의 황토 교역과 고원에서만 발견되는 유칼립투스 구니(Eucalyptus gunnii)의 환각성 수액 채취 기회를 제공했다. 야영지는 주로 강 계곡, 북쪽을 향한 경사면, 숲이나 습지에 인접한 완만한 경사면에 위치했다.

부족영토계절 이동
레터마이르레네머(Leetermairremener)세인트 메리스 근처 세인트 패트릭스 헤드(St Patricks Head)겨울에는 자체 영토의 해안 지역에 머문다. 8월부터 10월 사이에는 몰팅 라군(Moulting Lagoon)과 쇼텐 섬(Schouten Island) 주변에 모인다. 10월에는 세인트 폴스(St Pauls)와 브레이크 오 데이 강(Break o' Day Rivers) 또는 메러디스 강(Meredith River)을 따라 엘리자베스 강(Elizabeth River) 지역으로 내륙으로 이동한다. 1월에는 해안으로 돌아온다.
라인테마이르레네머(Linetemairrener)그레이트 오이스터 베이(Great Oyster Bay) 북쪽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룬티테터마이르렐호이너(Loontitetermairrelehoinner)노스 오이스터 베이(North Oyster Bay)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투어르노마이르레네머(Toorernomairremener)쇼텐 해협(Schouten Island, Schouten Passage)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포레다르메(Poredareme)리틀 스완포트(Little Swanport)겨울에는 자체 영토의 해안 지역에 머문다. 8월에는 서쪽으로 동부 습지(Eastern Marshes)를 거쳐 세인트 피터스 패스(St Peters pass)를 통해 빅 리버 지역(Big River Country)으로 이동한 다음 1월에 해안으로 돌아온다.
라레마이르레네머(Laremairremener)그라인드스톤 베이(Grindstone Bay)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타이레드데메(Tyreddeme)마리아 섬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포트마이르레네머(Portmairremener)프로서 강(Prosser River)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피다이르레메(Pydairrerme)타스만 반도레터마이르레네머와 같음.
무마이르레네머(Moomairremener)핏워터(Pittwater), 리스던다른 부족보다 늦게 내륙으로 이동하여 9월에서 10월 사이에 떠나 6월에 해안으로 돌아왔다.


3. 2. 북동부

북동부 지역에는 총 500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7개의 부족이 있었다. 이들은 벤 로몬드 부족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계절에 따라 북동부 해안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1]

부족영토계절 이동
피버랭너(Peeberrangner)포트 달림플(Port Dalrymple) 근처[1]
리너러터(Leenerrerter)부비알라 강(Boobyalla River) 지역의 플리무머러웨이(Pleemoommererway) 지역[1]
핀테라이러(Pinterrairer)머슬로(Mussel Roe)의 레이랩펜서(Layrappenthe) 지역[1]
트롤울웨이/트롤울루이(Trawlwoolway/Trawlwulwuy)빅 머슬로(Big Musselroe)에서 케이프 포틀랜드(Cape Portland)까지, 윌리엄 산[1]
피에마이레너페어레너(Pyemmairrenerpairrener)파이퍼스 강(Piper's River), 그레이트 포레스터 강(Great Forester River)[1]
리니스마이레너(Leenethmairrener)그레이트 머슬로 강(Great Musselroe River) 상류[1]
팜페카너(Panpekanner)에디스톤 포인트(Eddystone Point)와 케이프 내추럴리스트(Cape Naturaliste) 사이[1]



존 배트맨은 벤 로몬드 지역 부족과 북동부 지역 부족 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 two tribes ... they (the 'chiefs') are on friendly terms, and often meet, and stop for ten days together ...|[1]|... 두 부족이 있는데... 그들( '족장들')은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종종 만나서 10일 동안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영어

3. 3. 북부

북부 지역에는 총 200~300명의 네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영토에는 태즈메이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황토 광산이 있었으며, 불을 지펴 길을 유지하는 잘 정비된 길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인근 부족들과 황토를 거래하였다. 또한 바다표범 사냥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한 조개 채취를 위해 일 년 중 일부를 북서부 지역에서 보냈으며, 로빈스 섬에서 조개를 채취했다. 그 대가로 북서부 지역 부족들은 황토 광산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

부족영토계절 이동
펀닐러팬너(Punnilerpanner)포트 소렐겨울에는 해안에서 보내고 여름에는 내륙으로 이동.
팔리토레(Pallittorre)퀀비 블러프(Quamby Bluff)위와 같음
노에텔러(Noeteeler)햄프셔 힐스(Hampshire Hills)위와 같음
플레어헤키힐러플루(Plairhekehillerplue)버니 (Emu Bay)위와 같음



황토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태즈메이니아 황토는 흰색에서 노란색, 붉은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띤다. 그 용도는 의식적인 신체 문양, 목공예품 착색, 매듭염색 및 기타 공예와 예술 등을 포함한다.

전통적으로, 원주민 여성들이 황토를 채취하는 배타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많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남성들은 여성에게서만 황토를 얻는 이 관습을 계속 존중하고 있다. 황토는 태즈메이니아 전역의 광산에서 채굴되지만, 가장 유명한 원산지는 태즈메이니아 북서부 고그 산맥의 툴룸버너(Toolumbunner)로, 팔리토레 족의 전통적인 땅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부족 회의, 축제 및 무역의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

3. 4. 빅 리버

빅 리버 부족은 5개의 족으로 구성되었으며, 인구는 400~500명이었다. 이들의 계절 이동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다섯 족 중 네 족은 데어웬트 강을 따라 오이스터 베이 지역을 지나 피트 워터 근처 해안 야영지에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이스터 베이 부족은 빅 리버 지역을 통과할 수 있는 상호 이동권을 가지고 있었다.

영역계절 이동
리누웬(Leenowwenne)뉴 노폴크
팽어닝헤(Pangerninghe)클라이드 강 – 데어웬트 강 합류점
브레일원여(Braylwunyer)우즈 강과 디 강
라르메어레머너(Larmairremener)디 강 서쪽
러거메어러너페어러(Luggermairrernerpairrer)그레이트 레이크


3. 5. 노스 미들랜드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했으며, 해산물, 육상 포유류, 토종 채소와 열매 등 식량 공급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인접한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다른 씨족과 교류, 혼인, "전쟁"을 했다.[1]

타스마니아 인구는 각각 6~15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9개의 국가로 나뉘었고, 각 씨족은 친척 관계인 2~6개의 확대 가족 단위로 구성되었다. 개별 씨족은 정의된 국가 경계를 넘어 넓게 활동했으며, 방문객에게는 정교한 입국 의례가 필요했다.[4]

북부 미들랜드 부족은 미들랜드 평원을 차지했는데, 이곳은 대규모 담수 호수 범람의 영향을 받은 비교적 평평하고 비옥한 땅이었다.[2][3] 이 비옥한 땅은 많은 생물량을 지탱하여 원주민들의 주요 식량원이 되었다.[3]

북부 미들랜드 부족은 여러 씨족으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일반적으로 세 개의 주요 씨족 분파가 있었다.[4][5][2] 총 인구는 300명[4]에서 500명[2] 사이로 추정되며, 이동 생활을 했지만 고고학적 및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미들랜드 계곡의 영구적인 수원 근처 지역에 계절적으로 거주했다.[2]

노스 미들랜드 지역에는 세 개의 주요 부족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은 부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Ryan (2012)은 두 개의 부족 영토가 더 있었을 가능성을 주장한다.[9] 노스 미들랜드 지역 구성에 대한 정보는 정착민들의 묘사, 현대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들로부터 직접 얻은 정보(로빈슨이 기록하고 플롬리가 정리), 라이스 존스의 연구를 통해 얻어졌다. 이를 통해 타마르 강에 위치한 포트 달림플 부족(레테레르메이레너 족), 노퍽 평원에 위치한 페니로열 크릭 부족(판니너), 캠벨 타운에 위치한 스토니 크릭 부족(티르르노테패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3. 5. 1. 경계

북부 미들랜드 부족은 미들랜드 계곡의 지리적 제약으로 경계가 정해졌다. 서쪽으로는 그레이트 웨스턴 티어스의 절벽이 경계를 이루었고, 북동쪽 경계는 불확실하다. 동쪽 타마르 강 유역은 파이퍼스 강까지 레터메이레너 부족이 점유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곳에는 북동부 부족의 포레메이레너너 씨족이 거주했다.[4]

서쪽 타마르 강 유역의 점유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민족지 기록에 따르면 이 지역은 북부 부족의 팔리토레와 파르닐러패너 씨족, 또는 레터메이레너 부족, 또는 아직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북부 미들랜드 부족의 씨족의 영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5] 서쪽 타마르 계곡 또는 미앤더 강 계곡이 북부 미들랜드 부족의 북북서쪽 경계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크다. 클루안 티어와 드라이스 블러프로 이루어진 고지대의 호는 그들의 영토의 북서쪽 끝을 이룬다.[4]

동쪽의 자연 경계는 사우스에스크 강과, 북쪽으로 이어지는 바로우 산, 아서 산, 티포고리 언덕의 높은 고지대였다. 그 너머에는 북동부 부족이 있었다. 사우스 에스크 강의 동쪽 굽이를 따라 남쪽으로 이어지는 지역에서 북부 미들랜드 부족은 에스크 강 남쪽 기슭을 따라 어느 정도의 땅을 소유했던 것으로 보이며, 적어도 아보카까지, 그리고 아마도 생 폴 강의 자연 경계(그 너머에는 오이스터 베이 부족이 거주했다)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6]

남쪽으로는 땅은 빅 리버와 오이스터 베이 지역으로 이어지는 평원이 좁아지는 터브리지 너머의 고지대에 의해 제한되었다.[7]

3. 5. 2. 언어

티에런노테패너어(Tyerrernotepanner language)는 북부 중앙 고지대 언어(North Midlands language)로 분류되며, 벤 롬몬드와 북동부 부족, 그리고 중앙 고지대의 루거메어레너페어러(Luggermairrenerpairer) 씨족이 사용했다. 이 언어군은 다른 세 가지 태즈메이니아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추정된다.[1]

3. 5. 3. 씨족

타스마니아 원주민 사회는 가족 집단과 씨족(40~50명)이라는 두 가지 계층 구조로 이루어져 있었다. 씨족보다 더 큰 정치 조직이 있었는지는 논란이 있는데, 역사적 문헌에 그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1800년대 초 민족지학적 자료를 수집한 로빈슨은 원주민의 정치 집단을 씨족 수준에서만 묘사했다. 그러나 지리적 지역과 언어 집단을 공유하는 씨족들은 현대 민족지학자들과 팔라와족에 의해 일반적으로 하나의 국가로 분류된다.[1]

유럽 식민지화 이전에는 60개 이상의 씨족이 있었지만, 48개만이 위치가 확인되고 특정 영토와 연관되었다.[1]

Ryan에 따르면,[4] 타스마니아 인구는 각각 6~15개의 씨족으로 구성된 9개의 국가로 나뉘었고, 각 씨족은 친척 관계인 2~6개의 확대 가족 단위로 구성되었다. 개별 씨족은 정의된 국가 경계를 넘어 넓게 활동했으며, 방문객에게는 정교한 입국 의례가 필요했다.[5]

북부 지역에는 총 200~300명의 네 부족이 거주하고 있었다.[6] 이들의 영토에는 태즈메이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황토 광산이 있었으며, 불을 지펴 길을 유지하는 잘 정비된 길을 통해 접근할 수 있었다. 그들은 인근 부족들과 황토를 거래하였다. 그들은 바다표범 사냥과 목걸이를 만들기 위한 조개 채취를 위해 일 년 중 일부를 북서부 지역에서 보냈으며, 로빈스 섬에서 조개를 채취했다. 그 대가로 북서부 지역 부족들은 황토 광산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다.[7]

부족영토계절 이동
펀닐러팬너(Punnilerpanner)포트 소렐겨울에는 해안에서 보내고 여름에는 내륙으로 이동.
팔리토레(Pallittorre)퀀비 블러프위와 같음
노에텔러(Noeteeler)햄프셔 힐스(Hampshire Hills)위와 같음
플레어헤키힐러플루(Plairhekehillerplue)버니(Emu Bay)위와 같음



노스 미들랜드 지역에는 일반적으로 세 개의 주요 부족 집단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부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Ryan (2012)은 두 개의 부족 영토가 더 있었을 가능성을 주장한다.[9] 노스 미들랜드 지역의 구성에 대해 알려진 내용은 정착민들의 묘사, 현대 원주민 태즈메이니아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얻은 정보(로빈슨이 기록하고 플롬리가 정리함), 그리고 라이스 존스의 후속 연구를 통해 얻어졌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타마르 강에 위치한 포트 달림플 부족(레테레르메이레너 족), 노퍽 평원에 위치한 페니로열 크릭 부족(판니너), 캠벨 타운에 위치한 스토니 크릭 부족(티르르노테패너) 등 세 개의 주요 부족 집단이 있었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벤 로몬드 지역의 부족들은 유목 생활을 했으며, 원주민들은 사우스 에스크 강과 노스 에스크 강 유역, 그 지류들과 북동쪽 고지대를 따라 사냥을 했고, 여름에는 고원 지대로 이동하기도 했다. 스택스 블러프 산기슭과 현대 매시나 근처 사우스 에스크 강 발원지 부근에서 원주민 오두막이나 주거지의 기록이 있다.[11] 벤 로몬드 지역의 부족들은 동해안과 북부 중앙 고지대의 이웃 부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어 이웃 지역에 대한 계절적인 채집 권리를 누렸다.[12]

부족영역계절 이동
플랜거메어리너벤 로몬드 고원 남동쪽, 세인트 메리 평원오이스터 베이 부족과의 밀접한 관계 추정
플린더메어히메너벤 로몬드 고원 남서쪽레테르메어리너 부족과의 상호 권리
토네너위너라르멘네아마도 사우스 에스크 강 상류 유역추정


3. 6. 벤 로몬드

벤 로몬드 부족(Ben Lomond nation)은 최소 세 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총 150~200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벤 로몬드 고원 주변 약 260km²의 지역을 점유했다. 씨족 이름은 플랜저메어리너(Plangermaireener), 플린더메어헤메너(Plindermairhemener), 토네너위너러먼네(Tonenerweenerlarmenne)였다.[14]

플랜저메어리너 씨족은 벤 로몬드 지역 남동쪽에 거주했으며, 동쪽의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나 케이프 포틀랜드(Cape Portland) 씨족과도 관련이 있었다. 만날라르게나(Mannalargenna)는 오이스터 베이, 케이프 포틀랜드, 벤 로몬드 부족의 추장으로 묘사되기도 한다.[15] 플랜저메어리너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mairreener"를 붙여 벤 로몬드 부족을 통칭하는 용어로도 사용된다.[16]

플린더메어헤메너 씨족은 벤 로몬드 지역의 남쪽과 남서쪽에, 토네너위너러먼네 씨족은 화이트 힐스(White Hills)에서 노스 에스크 강(North Esk River)과 사우스 에스크 강(South Esk River)의 발원지 또는 상류 사우스 에스크 밸리(South Esk Valley)까지의 벤 로몬드 부족 영토에 중심을 두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팔라와(Palawa)족은 유목민이었으며 계절에 따라 이 지역을 점유했을 것으로 보인다.[14]

로빈슨의 일기장에 벤 로몬드 부족은 벤 로몬드/페니로열 크릭(Ben Lomond/Pennyroyal Creek) 부족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그러나 페니로열 크릭은 리피 강의 이전 유럽식 이름이었고, 페니로열 크릭 부족은 노스 미들랜즈 부족(North Midlands nation)의 팬니너(Panninher) 씨족을 지칭하는 당시 명칭이었기 때문에 이는 잘못된 명칭이다.

3. 6. 1. 계절 이동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했으며, 식량 공급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이동했다. 이들은 해산물, 육상 포유류, 토종 채소와 열매 등을 찾아 거주지를 옮겼다.[8] 다른 씨족과 교류하거나 혼인하기도 했고, 때로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8]

3. 7. 노스 웨스트

유럽인들이 태즈메이니아에 도착하기 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총 인구는 3,000명에서 1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4] 유전학 연구 결과는 이보다 훨씬 많은 인구를 시사하며, 이는 원주민들이 "백인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많았다"는 구전 전통과 일치한다. 그러나 1803년 이전에 발생한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감소했을 가능성이 있다. 식민화 이전에 물개 사냥꾼들과의 접촉으로 인해 전염병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5]

3. 8. 사우스 웨스트 코스트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주로 유목 생활을 하였으며, 인접한 지역에 거주하며 해산물, 육상 포유류, 토종 채소와 열매 등 식량 공급의 계절적 변화에 따라 이동하였다. 그들은 다른 씨족과 교류하고, 혼인하고, "전쟁"을 벌였다.[8]

3. 9. 사우스 이스트

리스던 코브는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로 남동부 지역에 위치했다. 목격자 증언에 따르면 남동부 부족은 최대 10개의 씨족으로 구성되어 약 500명에 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로빈슨의 1829년부터 시작되는 기록에는 주요 집단으로 4개의 부족, 총 160~200명만 공식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유럽인들은 남동부 부족의 거주지 대부분에 정착하여 그들의 땅을 빼앗고 식량 자원을 고갈시켰다. 그들의 땅에는 타스마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규암, 처트, 규암 광산이 있었다.[10]

남동부 부족은 오이스터 베이 부족과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종종 여성을 납치하기 위해 습격을 가했다.

트루가니니는 누에논 족 출신으로, 브루니 섬을 그들의 말로 루나와나-알로나(Lunawanna-Alonnah)라고 불렀다. 섬에 처음 세워진 두 개의 유럽인 마을은 루나와나와 알로나로 명명되었고, 섬의 대부분의 랜드마크는 누에논 부족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이 섬은 멜버른의 우체국과 의회 의사당과 같은 많은 건물을 짓는 데 사용된 사암의 원산지였다.[10]

씨족지역계절 이동
무헤니너 족호바트
누에논 족브루니 섬
멜루커디 족휴온 강
릴루이쿠니 족르셰르슈 만


4. 문화

19세기 토지 몰수와 와이발레나(Wybalenna) 및 오이스터 코브(Oyster Cove)에 대한 원주민 수감 이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문화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많은 전통 지식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지만, 일부는 퍼녹스 제도(Furneaux Islands)의 물개 사냥꾼들의 원주민 아내들을 시작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보존되었다.[10]

원주민 작가 그렉 레만(Greg Lehman)은 "원주민 문화는 과거 시제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다양한 형태로 자신들의 문화를 독특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들은 과거를 애도하는 동시에 미래로의 문화 지속성과 끈기를 기념한다.[10]

4. 1. 식민지 이전의 접촉

18세기 프랑스 탐험대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문화를 공식적으로 연구한 이후, 사회과학 분야에서 훈련받은 관찰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들의 의례와 문화 생활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제한적이다. 19세기에 원주민 생활을 가장 종합적으로 기록한 사람들은 식민지 접촉 이후, 그리고 그에 따른 폭력과 혼란이 전통적인 원주민 문화를 돌이킬 수 없게 바꾼 후에 기록하였다. 원주민 문화 관습을 가장 면밀히 관찰한 사람들은 그들이 관찰한 내용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 않았거나, 기록을 남겼더라도 19세기 유럽 남성들의 종교적이고 선교적인 시각이라는 민족중심적인 렌즈를 통해 문화를 관찰하였다.

원주민들은 최후 빙기 최대기 이후부터 타스마니아 남서부에 거주했으며, 여러 동굴에서 손바닥 스텐실과 황토 얼룩이 발견되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10]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이 남긴 가장 오래 지속되는 예술 형태는 암각화이다. 가장 정교한 유적지는 서해안의 프레밍하나에 있지만, 데번포트의 블러프와 그린스 크릭에도 다른 중요한 유적지가 있다.[9]

현대 식민지 개척자들은 오두막 안쪽이나 버려진 종이 조각에 그려진 여러 가지 회화 예술의 사례를 전한다. 이러한 디자인은 일반적으로 천체 또는 씨족 사람들의 모습을 나타내는 원형 또는 나선형 모티프였다.[8]

고인은 부족의 관습에 따라 화장하거나 속이 빈 나무 또는 바위 무덤에 매장했을 수 있다.[2] 원주민들은 또한 죽은 사람들의 뼈를 부적으로 간직했다는 기록이 있다.[3]

4. 1. 1. 신화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타스마니아인들의 신화는 복잡하고, 각 부족 집단마다 고유한 측면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창조 신화 중 하나는 태양인 파르누엔(Parnuen)과 인 베나(Vena)의 자녀인 두 창조신 모이니(Moinee)와 드로머데인(Droemerdene)을 언급한다.[5]

모이니는 최초의 창조주로 등장하여 타스마니아의 땅과 강을 만들고, 땅에 거주하는 정령에서 나온 최초의 인간, 파르레바르(Parlevar)를 만들었다. 이 모습은 캥거루와 비슷했고, 원주민들은 따라서 캥거루를 토템으로 삼았다. 모이니는 최초의 인간과 마찬가지로 땅에서 나온 캥거루를 창조했다.

드로머데인은 최초의 인간들이 캥거루와 같은 모습에서 변화하는 것을 도왔던 카노푸스 별로 등장한다. 그는 그들의 꼬리를 제거하고 무릎 관절을 만들어 "휴식을 취할 수 있도록" 했고, 그리하여 인간은 캥거루와 차별성을 갖게 되었다.

드로머데인이 최초 인간들의 모습을 바꾼 후 모이니는 그의 형제 드로머데인과 많은 "악마들"과 싸웠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져 콕스 만(Cox Bight)에 서 있는 돌로 변했다. 드로머데인은 그 후 루이사 만(Louisa Bay)의 바다에 빠졌다. 투지 로우(Toogee Low, 포트 데이비)는 신화 속에서 많은 "악마들"의 거주지로 남아있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신화는 또한 그들의 구전 역사에 최초의 인간들이 먼 나라에서 육지를 통해 이주했고, 그 후 땅이 침수되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이는 타스마니아인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당시) 반도였던 타스마니아로 이주하고, 마지막 빙하기 이후 육지 다리가 잠겼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5]

4. 1. 2. 영성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전통적인 영적 삶에 대해 기록된 바는 거의 없다.[4] 식민지 시대 영국인들은 원주민들이 계곡과 동굴과 같은 지형을 영적 존재가 서식하는 곳으로 묘사했다고 기록했다.[4] 로빈슨은 일부 씨족 구성원들이 자신들의 영역 내 특정 나무 종에 대해 애니미즘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고 추가로 기록했다.[4]

로빈슨은 그의 동료들이 능동적인 힘이나 물리적 세계를 항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해석력의 원천으로 묘사한 영적 존재에 관한 여러 논의를 기록했다.[4]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이러한 존재들을 "악마"라고 묘사하며, 이들이 원주민들 옆을 "횃불을 들고 걸어 다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고 말했다.[4]

특히 만날라르겐나는 예지력이나 점술 능력을 제공하는 것으로 보이는 자신의 "악마"와 상담하는 것을 묘사했다.[4] "악마"는 원주민 우주관에서 악의적인 영적 존재를 묘사하는 데에도 사용될 수 있다.[4]

원주민들은 키가 큰 검은 피부의 남자로 나타나며 어둠과 관련된 ''레이지오래퍼''라는 주요 악의적인 영이 있다고 전했다.[4] ''레이지오래퍼''는 강한 바람을 타고 나타나거나 심한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4] 이 악의적인 영은 병든 사람의 피부를 절개하여 "밖으로 내보내" 제거할 수 있다고 여겨졌다.[4]

몇몇 연구자들은 밤낮으로 구분되는 "선한" 영과 "악한" 영이 있는 일종의 믿음이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관찰자들의 문화적 편향을 반영할 수 있다.[4] 윌리바레나의 당대인 밀리건은 "황혼의 사람"으로 번역되는 ''티가나 마라보나''라는 창조주 영을 묘사했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창조와 관련된 많은 초자연적 존재들이 있다.[5]

밀리건의 민족지학적 자료에 대한 어원학적 연구는 환경적 또는 초자연적 현상과 관련된 영적 존재들의 신화를 설명한다.[5]

이름설명
나마 부라그"천둥의 유령"[5]
라기 로바"존경받는 영" - 종종 경외, 존경, 공포와 관련되며, 라기라는 지시어와 연결될 때 고인의 유령 또는 환영을 나타낸다.[5]
라가 로바나"죽은 자의 무서운 영", 즉 죽은 사람, 일종의 무서운 영, 악의적인 유령[5]
마이안 긴자"살인자" – 악마 또는 마귀로도 번역됨: 죽음을 가져오는 자[5]
무란 부가나 루와나"밤의 밝은 영" – 일종의 자애롭거나 활기찬 존재로, 종종 "풀로 옷을 입은" 여성의 형태로 묘사된다.[5]
와라 와나"영적 존재" – 와라와는 초월적, 영적, 천체와 관련된 죽은 자의 영으로 번역되며, 악의적일 수 있다.[5]
바데날라"그림자 사람" – 유령 또는 영[5]
카나 타나"뼈 사람" – 죽은 자의 영에 대한 서부 국가 언어 용어[5]
낭기나"그림자/유령" – "요정" 또는 "엘프"와 현대적인 연관성 – "언덕에 살며 춤을 추고 아이들을 좋아하는" 초자연적 존재[5]
부가 누브라나"사람의 눈" – 태양과 관련됨 – 아마도 자애로운 존재일 것이다.[5]



전통적인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영적인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도 전했다.[5] 서해안 지역 원주민이 전한 한 가지 믿음은 죽은 자의 영혼이 바다 건너 멀리 북서쪽에 있는 ''무아이''라는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4] 그러나 다른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죽은 후 그들의 영혼은 전통적인 땅에서 사후 존재를 가질 것이라고 말한다.[6][7] 다른 언급으로는 "바스 해협에 있는 섬"으로 묘사되는 죽은 자의 섬 ''티니 드리니''가 있는데, 죽은 자들이 환생하거나 "백인으로 일어선다"고 한다.[5] 여기서 백인은 유럽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돌아온 죽은 자의 골격적이거나 환영적인 성격을 의미한다.[5]

4. 1. 3. 우주론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밤하늘을 창조주 정령들이 사는 곳으로 여겼다.[11] 부족 생활을 반영하는 별자리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싸우는 남자들이나 구애하는 커플의 모습 등을 묘사했다.[11]

4. 2. 물질 문화

약 4,000년 전,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식생활에 큰 변화를 겪었다. 비늘이 있는 물고기 대신 주머니쥐, 캥거루, 왈라비와 같은 육지 포유류를 더 많이 먹기 시작했으며, 뼈 도구 대신 더 날카롭게 간 돌 도구를 사용했다.[11]

이러한 변화의 원인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적응에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당시 환경 변화로 인해 육지 동물 사냥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광대한 관목지대가 초원으로 변하면서 식량 자원이 풍부해졌고, 상대적으로 물고기는 조개류나 물개보다 덜 중요한 식량원이 되었다는 것이다.[11]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시점에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유럽인들이 도착했을 때에도 그 과정은 계속 진행 중이었다.

4. 2. 1. 불의 사용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태즈메이니아의 습한 해양성 기후로부터 불씨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껍질로 불씨를 감쌌다.[1] 마지막 불씨가 꺼지면 이웃 마을이나 부족에게 불을 얻었지만, 마찰 발화법[1]과 아마도 광물 타격법[1]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이 불을 피우는 능력을 "잃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말이다.[1] 이들은 요리, 난방, 도구 경화 및 식생 제거를 통해 유대류 무리를 조절하고 촉진하기 위해 불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1] 이러한 관리로 인해 태즈메이니아 남서부의 버튼그래스 평원이 현재와 같은 규모로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1]

4. 2. 2. 사냥과 식단

태즈메이니아 원주민들은 약 4,000년 전부터 식단에 큰 변화를 겪었다. 이전에는 비늘이 있는 물고기를 주로 먹었으나, 이후에는 주머니쥐, 캥거루, 왈라비와 같은 육지 포유류를 더 많이 사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뼈 도구 대신 더 날카롭게 간 돌 도구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11]

물고기가 식단에서 사라진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이를 적응 실패의 사례로 보기도 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당시 환경 변화로 인해 육지 동물 사냥이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당시 광대한 관목지대가 초원으로 변하면서 식량 자원이 풍부해졌고, 상대적으로 물고기는 조개류나 물개보다 덜 중요한 식량원이 되었다는 것이다.[11]

조개껍데기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여성들의 중요한 문화적 전통이었다. 목걸이는 장식, 선물, 명예의 표시, 교역품 등으로 사용되었으며, 최소 2,600년 전부터 이어져 온 전통이다.[12]

4. 2. 3. 바구니 만들기

바구니 만들기는 전통 공예로서 현대 미술로 발전해 왔다. 바구니는 음식, 도구, 조개, 황토, 식기 등을 담는 데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바구니와 같은 운반구는 식물 재료, 다시마 또는 동물 가죽으로 만들었다. 다시마 바구니나 운반구는 주로 물을 운반하고 제공하는 데 사용되었다.

바구니를 만들기에 적합한 길이로 강하고 가늘고 좁은 섬유 조각을 만들기 위해 식물을 신중하게 선택했다. 흰 붓꽃, 파란 플랙스 백합, 골풀, 사초 등 여러 종류의 식물이 사용되었으며, 그 중 일부는 현대 바구니 제작자들에 의해 여전히 사용되고 있으며, 때로는 장식용으로 조개가 추가되기도 한다.[1]

4. 2. 4. 조개 목걸이 예술

조개껍데기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여성들의 중요한 문화적 전통이다.[11] 목걸이는 장식용, 선물, 명예의 표시, 교역품으로 사용되었다. 목걸이 제작은 최소 2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인 정착 이전부터 중단 없이 이어져 온 몇 안 되는 팔라와(Palawa) 전통 중 하나이다.[11]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박물관에는 여러 개의 조개껍데기 목걸이가 소장되어 있다.[11]

목걸이는 처음에 무지개 켈프(rainbow kelp)로 흔히 알려져 있으며, 보통 마이리너(maireener) 조개라고 불리는 ''Phasianotrochus irisodontes'' 달팽이의 조개껍데기로만 만들어졌다. 태즈메이니아 해역에는 세 종의 마이리너가 더 있다. 지난 20년 동안 기후변화로 인해 플린더스 섬, 케이프 배런 섬, 빅 독 섬 주변의 켈프와 해초 성장이 감소하면서 조개껍데기 수도 감소했다. 이는 해저 침식으로 이어졌다.[11][12]

4. 2. 5. 황토

황토는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문화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태즈메이니아 황토는 흰색에서 노란색, 붉은색까지 다양한 색상을 띤다. 황토는 의식적인 신체 문양, 목공예품 착색, 매듭염색 및 기타 공예와 예술 등에 사용된다.[1]

전통적으로 원주민 여성들은 황토를 채취하는 배타적인 역할을 맡았으며, 많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남성들은 여성에게서만 황토를 얻는 이 관습을 계속 존중하고 있다. 황토는 태즈메이니아 전역의 광산에서 채굴되지만, 가장 유명한 원산지는 태즈메이니아 북서부 고그 산맥의 툴룸버너(Toolumbunner)로, 팔리토레(Pallitorre) 족의 전통적인 땅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부족 회의, 축제 및 무역의 중요한 장소이기도 했다.[2]

4. 2. 6. 의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사회에는 다양한 의식이 있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여러 전통 의식들을 묘사했는데, 그중 하나는 "코로베리"라고 불렸지만, 이는 영국 정착민들이 호주 본토 원주민 단어를 차용한 것이다. 의식적인 춤과 노래는 전통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최근 사건들도 묘사했다.

로빈슨은 기수가 원주민을 사냥하는 장면을 묘사한 "말춤"과 퍼녹스 제도 여성들이 공연한 관능적인 "악마춤"을 묘사했다.[1]

전투와 장례식에는 몸에 황토나 검은색 페인트를 칠했다. 론세스톤에서 "로버트"라는 원주민 남성의 장례식에서, 한 원주민 조문객에게 몸에 칠한 페인트의 의미를 묻자 그는 "당신은 왜 좋은 옷을 입습니까?"라고 대답했다.[2]

4. 2. 7. 시각 예술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이 남긴 가장 오래 지속되는 예술 형태는 암각화이다. 가장 정교한 유적지는 서해안의 프레밍하나에 있지만, 데본포트의 블러프와 그린스 크릭에도 다른 중요한 유적지가 있다. 미이나마타 블루 티어의 컵홀과 트라이얼 하버의 고립된 원형 모티프 등의 소규모 유적지도 있다.[1]

원주민들은 최후 빙기 최대기 이후부터 타스마니아 남서부에 거주했으며, 여러 동굴에서 손바닥 스텐실과 황토 얼룩이 발견되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2]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시각 예술을 통해 정체성과 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 예술은 식민지 역사, 인종 관계, 정체성에 대한 원주민의 관점을 표현한다. 현대 타스마니아 원주민 예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는 상실, 친족, 몰수의 서사이지만 동시에 생존도 포함된다. 이 예술은 섬유, 조각, 사진을 사용하는 현대적인 예술이지만, 조개 목걸이와 실용적인 공예품과 같은 고대 모티브와 기법을 종종 통합한다.[3][4]

사진작가 리키 메이너드(Ricky Maynard)는 그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전시해 왔으며, 그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이전에 부재하거나 왜곡되었던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냅니다. 그의 사진은 타스마니아와 본토 원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 사건, 인물들을 표시하며, 미묘하고 시적이며 강력한 방식으로 그들의 투쟁을 이야기합니다."[5]

타스마니아의 현대 회화는 호주 본토의 원주민 예술이 공유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나선형과 천체 표현과 같은 전통적인 타스마니아 모티브를 통합하고 있다.[6] 이는 호주 본토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예술이 역동적이며 확립된 식민지 이후의 선입견에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메이리너(Maireener) 조개를 채취하여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었다. 이러한 관행은 퍼녹스 제도에서 살아남은 가족을 가진 원주민 여성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원로 여성들에 의해 전승되어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중요한 연결 고리를 유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많은 여성들이 딸과 손녀들이 자신의 문화유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러한 전통 문화의 일부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이 예술을 유지하는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은 몇 명밖에 없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지역 사회의 젊은 여성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조개 목걸이 제작은 과거와의 연결을 유지하지만 현대 예술 형식으로 표현된다.[7]

4. 3. 현대 문화

영국 왕립 외과의 대학(Royal College of Surgeons of England)은 2002년 트루가니니(Truganini)의 피부와 머리카락 샘플을, 대영박물관(British Museum)은 2007년 두 후손에게 유골을 반환하는 등 오늘날에도 여전히 신체 일부와 장식품이 소장품에서 반환되고 있다.[9]

20세기 동안 순수 원주민 혈통의 원주민이 없고, 생존 인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많은 비원주민들은 1876년 트루가니니(Truganini) 사망 후 그들이 멸종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마이클 맨셀(Michael Mansell)과 같은 타스마니아 원주민 운동가들은 원주민 혈통에 대한 인식과 확인을 넓히려고 노력해왔다. 2023년 4월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의 캠페인 이후 유네스코는 그들이 멸종했다는 주장을 담은 문서를 삭제했다.[9]

그러나 타스마니아 원주민 사회 내부에서는 무엇이 원주민성(Aboriginality)을 구성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주로 흰 남성 물개 사냥꾼과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의 후손인 팔라와(Palawa)는 주 정부 차원에서 타스마니아 원주민 혈통을 결정할 권한(정부 원주민 서비스에 대한 권리)을 부여받았다. 팔라와는 배스 해협 제도(Bass Strait Islands) 지역 사회의 후손만을 원주민으로 인정하며, 구전 전통에 따라 타스마니아 본토 원주민 사회로부터 혈통을 주장하는 리아 푸타(Lia Pootah)를 원주민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리아 푸타는 팔라와가 통제하는 타스마니아 원주민 센터(Tasmanian Aboriginal Centre)가 자신들을 정치적으로 대변하지 않는다고 느낀다.

2007년 이후로 후손 하위 그룹에서 가계를 확립하기 위해 DNA 검사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있었다. 이는 팔라와에 의해 강력히 반대되었으며, 일부에서는 유전적 연관성의 존재만큼 중요하지는 않지만, 원주민성과 별개의 "영적인 연결"을 주장하면서 일부 분야에서 격렬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리아 푸타는 현재 원주민성을 증명하는 데 사용되는 검사에 반대하는데, 그 이유는 팔라와에게 유리하다고 믿기 때문이며, DNA 검사는 리아 푸타의 인정에 대한 장벽을 우회하거나 그들의 원주민성 주장을 반증할 수 있다.

2000년 4월 타스마니아 정부의 ''원주민 토지에 관한 입법평의회 특별위원회(Legislative Council Select Committee on Aboriginal Lands)''는 구전 전통에 근거하여 원주민성을 결정하는 어려움에 대해 논의했다. 캐산드라 파이부스(Cassandra Pybus) 교수가 제시한 예로는 두 명의 원주민 여성으로부터 혈통을 이어받았다는 구전 역사를 가진 휴온(Huon)과 채널(Channel) 원주민들의 주장이 있다. 연구 결과 두 여성 모두 비원주민 유죄 판결 여성으로 밝혀졌다.

타스마니아 팔라와 원주민 사회는 타스마니아 언어에 대한 다양한 기록을 바탕으로 팔라와 카니(palawa kani)라는 타스마니아 언어를 재구성하고 재도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다른 타스마니아 원주민 사회는 자신이 태어난 지역이나 거주하는 언어 지역에 따라 전통 타스마니아 언어의 단어를 사용한다.

19세기 토지 몰수와 와이발레나(Wybalenna)와 오이스터 코브(Oyster Cove)에 대한 원주민 수감 이후, 원주민 문화는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많은 전통 지식이 돌이킬 수 없이 사라졌고, 남아있는 지식은 퍼녹스 제도(Furneaux Islands)의 물개 사냥꾼들의 원주민 아내들을 시작으로 여러 세대에 걸쳐 보존되어 왔다.

그러나 원주민 작가 그렉 레만(Greg Lehman)이 말했듯이, "원주민 문화는 과거 시제가 아니다." 다양한 형태로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문화를 독특한 방식으로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다. 과거를 애도하는 주제를 표현하는 동시에 미래로의 문화의 지속성과 끈기를 기념하고 있다.[10]

조개껍데기로 목걸이를 만드는 것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여성들에게 중요한 문화적 전통이다.[11] 목걸이는 장식용, 선물, 명예의 표시, 그리고 교역품으로 사용되었다. 최소 2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목걸이 제작은 유럽인 정착 이전부터 중단 없이 이어져 온 몇 안 되는 팔라와(Palawa) 전통 중 하나이다.[12] 여러 개의 조개껍데기 목걸이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박물관 소장품에 보관되어 있다.[13]

목걸이는 처음에 무지개 켈프(rainbow kelp)로 흔히 알려져 있으며 보통 마이리너(maireener) 조개라고 불리는 ''Phasianotrochus irisodontes'' 달팽이의 조개껍데기로만 만들어졌다. 태즈메이니아 해역에는 마이리너 세 종이 더 있다. 지난 20년 동안 기후변화로 인해 플린더스 섬, 케이프 배런 섬, 빅 독 섬 주변의 켈프와 해초 성장이 감소하면서 조개껍데기 수도 감소했다. 이는 해저 침식으로 이어졌다.[14]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이 남긴 가장 오래 지속되는 예술 형태는 암각화 또는 암벽화이다. 가장 정교한 유적지는 서해안의 프레밍하나에 있지만, 데본포트의 블러프와 그린스 크릭에도 다른 중요한 유적지가 있다. 미이나마타 블루 티어의 컵홀과 트라이얼 하버의 고립된 원형 모티프 등의 소규모 유적지도 있다.

원주민들은 최후 빙기 최대기 이후부터 타스마니아 남서부에 거주했으며, 여러 동굴에서 손바닥 스텐실과 황토 얼룩이 발견되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것은 1만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4. 3. 1. 시각 예술

타스마니아 원주민들은 시각 예술을 통해 정체성과 문화를 주장하고 있다. 이 예술은 식민지 역사, 인종 관계, 정체성에 대한 원주민의 관점을 표현한다.[10] 현대 타스마니아 원주민 예술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주제는 상실, 친족, 몰수의 서사이지만, 동시에 생존도 포함된다.[10][11] 섬유, 조각, 사진을 사용하는 현대적인 예술이지만, 조개 목걸이와 실용적인 공예품과 같은 고대 모티브와 기법을 종종 통합한다.[10][11]

리키 메이너드(Ricky Maynard)는 사진작가로서 그의 작품을 국제적으로 전시해 왔다. 그의 다큐멘터리 스타일은 "이전에 부재하거나 왜곡되었던 원주민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드러낸다. 그의 사진은 타스마니아와 본토 원주민들에게 매우 중요한 역사적 장소, 사건, 인물들을 표시하며, 미묘하고 시적이며 강력한 방식으로 그들의 투쟁을 이야기한다."[12]

타스마니아의 현대 회화는 호주 본토의 원주민 예술이 공유하는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나선형과 천체 표현과 같은 전통적인 타스마니아 모티브를 통합하고 있다.[13] 이는 호주 본토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예술이 역동적이며 확립된 식민지 이후의 선입견에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메이리너(Maireener) 조개를 채취하여 목걸이와 팔찌를 만들었다. 이러한 관행은 퍼녹스 제도에서 살아남은 가족을 가진 원주민 여성들에 의해 계속되고 있으며, 원로 여성들에 의해 전승되어 전통적인 삶의 방식과 중요한 연결 고리를 유지하고 있다. 19세기 후반, 많은 여성들이 딸과 손녀들이 자신의 문화유산에 참여할 수 있도록 이러한 전통 문화의 일부를 살리려고 노력했다. 오늘날 이 예술을 유지하는 타스마니아 원주민 여성은 몇 명밖에 없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자신의 지식과 기술을 지역 사회의 젊은 여성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조개 목걸이 제작은 과거와의 연결을 유지하지만 현대 예술 형식으로 표현된다.[14]

4. 3. 2. 문학

타즈메이니아 원주민 작가들은 지난 세기 동안 역사, 시, 수필, 소설을 썼다. 아이다 웨스트[1]와 같은 작가들은 백인 사회에서 성장한 경험을 회고하는 자서전을 썼고, 필리스 피치포드, 에롤 웨스트[2], 짐 에버렛은 시를 썼으며, 에버렛과 그렉 레만[3]은 수필가로서 그들의 전통을 탐구했다.[4]

타즈메이니아 작가들이 쓴 것으로 여겨지는 가장 오래된 출판물은 데이비드 우나이폰의 저널리즘보다 100년 앞선 1836년 9월부터 1837년 12월 사이에 쓰여진 ''The Aboriginal/Flinders Island Chronicle''인데, 그 구성에 "사령관" 조지 로빈슨이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불분명하다.[5]

5. 집단 학살

많은 학자들이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인구의 급감을 집단 학살로 간주한다.[13] 이 문제는 주요 논쟁을 불러일으켰다.[2] 전통적인 견해는 전염병의 영향 때문이라고 주장했지만,[3] 헨리 레이놀즈는 블랙 워(Black War)에서의 손실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벤 키어넌, 콜린 타츠, 벤저민 매들리 등 많은 역사학자들은 라파엘 렘킨의 정의, 즉 UN 집단 학살 협약에 따라 태즈메이니아의 인구 감소가 집단 학살에 해당한다고 본다.[4] 렘킨 자신도 타스마니아를 가장 명백한 집단 학살 사례 중 하나로 간주했다. 로버트 휴즈는 이를 "영국 식민지 역사상 유일한 진정한 집단 학살"이라고 묘사했다.

다음은 유럽인과 원주민 사상자 수에 대한 표이다.

부족포로사살사망한 정착민
오이스터 베이(Oyster Bay)276750
북동부(North East)12437
북부(North)288015
빅 리버(Big River)314360
북부 미들랜드(North Midlands)233826
벤 롬몬드(Ben Lomond)353120
북서부(North West)96593
남서부 해안(South West Coast)4700
남동부(South East)1412
합계313362183



1997년 8월 13일, 태즈메이니아 의회는 원주민 아동 강제 이주에 대한 사과 성명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는 "잃어버린 세대(Stolen Generations)"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제공한 최초의 호주 주가 되었다. '''2006년 원주민 아동 잃어버린 세대 법(Stolen Generations of Aboriginal Children Act 2006)'''은 태즈메이니아 의회 모든 의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14]

6. 법적 정의

타즈메이니아 입법평의회는 2005년 6월 원주민 토지법에 개정된 원주민성 정의를 도입했다. 이 법안은 원주민 토지위원회 선거를 시작하기 위해 통과되었으며, 누가 "원주민"이며 따라서 투표할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했다.

이 법안에 따르면 다음 모든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은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 조상
  • 자기 확인
  • 공동체 인정

7.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정부 보상

1997년 8월 13일, 태즈메이니아 의회는 아동 강제 이주와 관련된 사과 성명을 만장일치로 지지했다.[14]

Parliament of Tasmania영어는 과거 정책으로 인해 원주민 아동들이 가족과 집에서 강제로 분리되어 입은 상처와 고통에 대해 깊고 진심으로 유감을 표하며, 그러한 과거 행동에 대해 원주민들에게 사과하고, 모든 호주인 간의 화해를 위한 지지를 재확인했다.

2006년 11월, 태즈메이니아는 1900년부터 1972년 사이에 호주 정부 기관과 교회 선교단체에 의해 가족으로부터 강제로 분리된 원주민인 잃어버린 세대에 대한 재정적 보상을 제공한 최초의 호주 주 또는 지역이 되었다. '''2006년 원주민 아동 잃어버린 세대 법'''은 태즈메이니아 의회 모든 의원의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14] 최대 40명의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후손들이 500만호주 달러 규모의 지원금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8. 주목할 만한 태즈메이니아 원주민


  • 유마라(Eumarrah)
  • 키카타풀라(Kikatapula)
  • 몰보이히너(Maulboyheenner)
  • 몽펠리아타(Montpelliatta)
  • 통걸롱에터(Tongerlongeter)
  • 투너미너웨이트(Tunnerminnerwait)
  • 트루거나너(Trugernanner) (트루가니니(Truganini))
  • 패니 코크레인 스미스(Fanny Cochrane Smith) (마지막 "순혈" 팔라와(Palawa)라고 주장함)[10]
  • 윌리엄 레인(William Lanne) ("킹 빌리(King Billy)"라고도 불림)
  • 마이클 맨셀(Michael Mansell) (변호사이자 운동가)
  • 마날라르게나(Mannalargenna)
  • 아라-마이다(Arra-Maida)
  • 라이언 맨셀(Rhyan Mansell) (오스트레일리아식 풋볼 선수)
  • 알렉스 피어스(Alex Pearce (Australian footballer)) (오스트레일리아식 풋볼 선수)
  • 데렉 피어던(Derek Peardon) (AFL에 기록된 최초의 선수)
  • 마커스 윈드헤이거(Marcus Windhager) (농구 선수이자 오스트레일리아식 풋볼 선수)

9. 문학과 엔터테인먼트

태즈메이니아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는 여러 문학 작품과 영화에서 다루어졌다.


  • 루이스 노우라(Louis Nowra)의 희곡 《황금시대(The Golden Age)》
  • 매슈 니일(Matthew Kneale)의 소설 《잉글리시 패신저스(English Passengers)》
  • 머드루루(Mudrooroo)의 역사 소설 《닥터 우레디의 세계 종말 견뎌내는 처방전(Doctor Wooreddy's Prescription for Enduring the Ending of the World)》
  • 귄 하우드(Gwen Harwood)의 시 《오이스터 코브(Oyster Cove)》
  • 베스 로버츠(Beth Roberts)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오스트레일리아 영화 협회상(Australian Film Institute Award, AFI Award) 수상작이자 1980년 영화인 《망가닌니(Manganinnie)》
  • 로한 윌슨(Rohan Wilson)의 소설 《떠돌이 일행(The Roving party)》 – 흑인 전쟁(Black War) 당시 마날라게나와 윌리엄 "블랙 빌" 폰손비(William "Black Bill" Ponsonby)에 대한 허구적 이야기[15]
  • 제니퍼 켄트(Jennifer Kent)가 각본, 연출, 공동 제작한, AACTA상 수상작이자 2018년 영화인 《나이팅게일(The Nightingale)》
  • 네이선 메이너드(Nathan Maynard)의 희곡 《어떤 대가로?(At What Cost?)》는 루크 캐롤(Luke Carroll) 주연의 벨보어 스트릿 극장(Belvoir St Theatre) 제작으로 2022년 시드니에서 초연되었으며, 재공연 후 2023년 브리즈번, 애들레이드, 호바트로 순회 공연을 가졌다.[15] [16]

참조

[1] 웹사이트 Aboriginal Tasmanians https://www.ourtasma[...]
[2] harvard Despite over 170 years of debate over who or what was responsible for this near-extinction, no consensus exists on its origins, process, or whether or not it was genocide
[3] harvard
[4] harvard In light of the U.N. definition, sufficient evidence exists to designate the Tasmanian catastrophe genocide.
[5] 논문 The archaeology of orality: Dating Tasmanian Aboriginal oral traditions to the Late Pleistocene 2023-11-01
[6] 서적 The Rise, Progress, and Present State of V. D. Land 1833
[7] 웹사이트 The 'Black War' http://www.hreoc.gov[...] 2007-10-10
[8] 서적 Australia on Horseback MacMillan 2014
[9] 웹사이트 Campaigns that Changed Tasmania https://commonslibra[...] 2024-04-06
[10] 간행물 Tasmania Lonely Planet 2008
[11] 웹사이트 Tasmanian Aboriginal shell necklaces https://australian.m[...] 2020-05-26
[12] 뉴스 Fears Indigenous Tasmanian necklaces could become lost art https://www.abc.net.[...] ABC News (Australia) 2020-08-09
[13] harvard
[14] 웹사이트 Tasmania shows leadership on Stolen Generations https://supportingwo[...] Australian Human Rights Commission 2023-07-10
[15] 웹사이트 At What Cost? https://belvoir.com.[...] 2023-05-04
[16] 웹사이트 ★★★★☆: Powerful play about descendants of Tasmania's "lost tribe" is essential viewing https://www.timeout.[...] 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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