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들 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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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트라우들 융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였던 인물이다. 1920년 뮌헨에서 태어나 무용가를 꿈꿨으나, 비서로 일하다가 1942년 히틀러의 비서로 발탁되었다. 1945년 벙커에서 히틀러의 유언장을 타이프했고, 이후 연합군에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어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융에의 회고록은 히틀러와 나치 정권의 내부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으며, 영화 《몰락》 제작에 영향을 미쳤다. 2002년 회고록 출간 후 사망했다.

트라우들 융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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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의 융에
출생명게르트라우트 훔프스
출생일1920년 3월 16일
출생지뮌헨, 바이에른주, 바이마르 공화국
사망일2002년 2월 10일
사망지뮌헨, 바이에른주, 독일
국적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시민권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다른 이름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직업비서, 부편집자, 과학 기자
활동 기간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임기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전임자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후임자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정당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배우자한스 헤르만 융에(1943년 6월 결혼, 1944년 8월 13일 사망)
자녀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서명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웹사이트해당 사항 없음 (정보 없음)
경력
주요 경력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 (제2차 세계 대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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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트라우들 융에는 1920년 뮌헨에서 태어나 발레리나를 꿈꿨으나 가정 형편으로 인해 비서 교육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베를린으로 이주했고, 같은 해 알베르트 보어만의 소개로 아돌프 히틀러의 개인 비서 중 한 명으로 채용되었다. 그녀는 1945년 베를린 공방전 당시 총통 벙커에 머물며 히틀러의 마지막 순간을 지켜보았고, 그의 유언을 받아 적는 역할을 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는 프리랜서 기자 등으로 활동하며 나치 시대의 경험에 대해 여러 차례 증언했으며, 회고록 《마지막 순간까지》를 출판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만행에 대해 무지했던 과거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2002년 으로 사망했다.

2.1. 초기 생애

게르트라우트 "트라우들" 훔프스(Gertraud "Traudl" Humps독일어)는 1920년 나치의 요람이었던 뮌헨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맥주 양조 기술자이자 예비군 중위였던 막스 훔프스, 어머니 힐데가르트는 장성의 딸이었다. 그녀에게는 1923년에 태어난 언니 잉게와 여동생이 한 명 있었다.

아버지는 우익 활동 경력이 있었으며, 트라우들이 어릴 때 터키로 이주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외할아버지 밑에서 엄격하게 자랐다. 십 대 시절에는 발레리나가 되기를 원했으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아 꿈을 포기하고 실업 학교에 진학하여 비서 교육을 받았다.

실업학교 졸업 후 봉제 공장 등에서 비서로 일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던 1942년, 여동생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다.

2.2. 히틀러의 비서

1942년 12월, 알베르트 보어만의 소개로 동프로이센의 볼프샨체(Wolfsschanze)에서 히틀러의 비서직 면접을 보았다. 당시 히틀러의 비서 중 한 명이었던 게르다 크리스티안이 결혼으로 장기 휴가를 가게 되면서 생긴 공석을 채우기 위함이었다. 융에는 당시 22세였으며, 정치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녀는 나중에 "역대 최악의 범죄자를 좋아했다"는 사실에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융에는 히틀러에 대해 "나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료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는 쾌활한 상사이자 자상한 친구였다. 나는 내 안의 모든 경고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서 시간을 즐겼다"고 말했다.

1943년 6월, 히틀러의 권유로 그의 부관이자 무장친위대 장교였던 한스 헤르만 융에(Hans Hermann Junge, 1914–1944)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 한스 융에는 1944년 8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 전투 중 전사했다.

융에는 베를린, 베르히테스가덴의 베르크호프, 동프로이센의 볼프샨체,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를린의 총통 벙커에서 히틀러를 보좌했다. 그녀의 동료 비서로는 요한나 볼프(Johanna Wolf), 크리스타 슈뢰더(Christa Schroeder), 게르다 크리스티안 등이 있었다. 볼프와 슈뢰더는 히틀러의 지시로 1945년 4월 20일 밤 베를린을 떠났고, 크리스티안은 융에와 함께 벙커에 남았다.

1945년, 베를린 공방전이 치열해지자 융에는 총통 벙커에 머물렀다. 히틀러는 마지막까지 베를린을 떠나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시신이 소련군에게 넘어가지 않도록 자살할 것이라고 비서들에게 말했다. 융에는 히틀러가 자살하기 하루 전인 4월 29일, 그의 마지막 사적, 정치적 유언을 타자로 작성했다. 4월 30일 오후 3시 30분경, 히틀러와 에바 브라운이 자살했을 때, 융에는 옆방에서 요제프 괴벨스의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녀는 당시 상황을 "갑자기 크고 가까운 총소리가 들려왔고... 총통은 이제 죽었다"고 기록했다.

5월 1일, 융에는 무장친위대 장군 빌헬름 모른케가 이끄는 그룹과 함께 총통 벙커를 탈출했다. 이 그룹에는 히틀러의 개인 조종사 한스 바우어, 국가보안국(RSD) 경호대장 한스 라텐후버, 동료 비서 게르다 크리스티안과 엘제 크뤼거, 영양사 콘스탄체 만치알리, 의사 에른스트-귄터 쉔크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융에, 크리스티안, 크뤼거는 베를린을 빠져나가 엘베강까지 도달했으나, 강 건너 미국 점령 지역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베를린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그룹은 5월 2일 소련 붉은 군대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스메르시에 넘겨졌다.

벙커 탈출 이후 그녀의 행적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그녀의 자서전 내용처럼 소련군에게 억류되었다가 별 탈 없이 미군에게 인계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탈출 중 소련군에게 붙잡혀 강간당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치료 후 소련군 장교에게 보내져 수개월간 성노예(현지 종군처) 생활을 했다는 설이다. 자서전에는 언급되지 않았으나, 당시 정황상 후자의 가능성이 더 높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전후 융에는 '게르다 알트'라는 가명으로 살며 프리랜서 저널리스트 등으로 활동했다. 홀로코스트 등 나치의 만행에 대해 "그 당시에는 몰랐다. 하지만 몰랐다는 것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은 나치즘이나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나치스 활동 심사 위원회에서 심문을 받았지만, 죄는 묻지 않았다.

2.3. 전후 활동

전쟁 후 융에는 엘베 강까지 도달하려 했으나 서방 연합군 전선에 이르지 못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다. 1945년 6월 9일, '게르다 알트(Gerda Alt)'라는 가명으로 지내던 중 소련 군정 요원에게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감옥에서 소련 경비병들에게 독일군이 소련에서 저지른 만행에 대해 듣고, 자신이 알던 동부 전선 상황이 나치 선전이었음을 깨달았다. 여러 감옥을 거치며 히틀러 측근으로서의 역할과 그의 자살 전후 상황에 대해 심문받은 후, 1945년 12월 석방되어 베를린의 소련 점령 지역에 머물렀다. 그해 연말 디프테리아에 걸려 영국 점령 지역 병원에 입원했고, 1946년 2월 서류를 받아 바이에른의 미국 점령 지역으로 이동했다. 미군에게 잠시 구금되어 총통 벙커 시절에 대해 심문받은 후 풀려나 서독에서 살게 되었다.

전후 '게르다 알토'라는 가명을 쓰며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했다. 이 시기 홀로코스트에 대해 "히틀러는 유대인에 대한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고, 홀로코스트가 있었는지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그 당시에는 몰랐다. 하지만 몰랐다는 것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다"고 언급했으며, 뮌헨 프란츠-요제프 거리의 조피 숄을 기리는 명판을 보고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내가 히틀러의 시종이 된 해에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그렇게 어렸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달았다. 나는 아마도 그 일에 대해 알아내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융에는 히틀러를 다룬 여러 다큐멘터리에 출연하여 증언했다. 1973년 영국 템스 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세계대전의 두 편(16편 "제3제국 내부", 21편 "복수의 여신: 독일")에 출연했고, 1975년 제임스 P. 오도넬과 우베 반센의 책 벙커를 위한 인터뷰에 응했다. 또한 1989년 BBC 다큐멘터리 아돌프 히틀러의 치명적인 매력과 1991년 독일 ZDF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히틀러의 부하들에도 출연하여 히틀러의 개인적인 면모와 사생활, 총통 벙커에서의 마지막 날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이러한 증언들은 훗날 영화 《몰락》(2004) 제작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오랫동안 주간 삽화 잡지 Quick독일어의 편집부 수석 비서로 일했으며, 여동생이 사는 호주에서 두 차례 짧게 거주했지만 나치 관련 과거 때문에 영주권 신청은 거부되었다.

1947년부터 1948년까지 회고록을 집필했지만 출판하지 않았고, 1989년 피에르 갈란테와 유진 실리아노프의 책 벙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녀의 원고 일부가 실렸다. 2000년 작가 멜리사 뮐러를 만나 그의 도움으로 2002년 회고록 《마지막 순간까지》 Bis zur letzten Stunde - Hitlers Sekretärin erzählt ihr Leben독일어을 출간했다. 이 책은 1947-48년에 썼던 원고를 기반으로 한다. 출간 직전인 2001년에는 다큐멘터리 영화 《히틀러의 여비서》 Im toten Winkel - Hitlers Sekretärin독일어에 출연하여 인터뷰했는데, 이 영화는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았다. 이 인터뷰에서 그녀는 하얀 장미 단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그들에 비해 나치를 합리화하며 젊은 시절을 보냈던 자신의 과거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2년 2월 10일, 회고록 출간과 다큐멘터리 영화 시사회 직후 뮌헨의 병원에서 으로 사망했다. 향년 81세였다. 임종 직전 감독에게 시사회 이야기를 듣고 "그럼 이젠 제가 할 일은 다 끝났군요. 한결 홀가분해지겠어요."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뮌헨 노르트프리드호프에 묻혔다. 사후인 2003년에는 회고록 Bis zur letzten Stunde. Hitlers Sekretärin erzählt ihr Leben.독일어의 개정증보판이 출간되었다.

융에는 1944년 남편 한스 헤르만 융에가 전사한 후 재혼하지 않았다. 특이하게도 히틀러의 다른 여비서들도 전쟁 후 아무도 결혼이나 재혼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3. 평가 및 영향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은 히틀러나치 정권 내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는 개인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했지만,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을 상실하는 등 인격적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융에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홀로코스트에 대해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으나, 수십 년 후 "나는 22살이었고 정치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으며, 정치에 관심도 없었다"고 말하며 "역대 최악의 범죄자를 좋아했다"는 것에 대해 큰 죄책감을 느꼈다고 덧붙였다. 그녀는 히틀러에게 매료되었음을 인정하며 "내 안의 모든 경고의 목소리를 의도적으로 무시했고,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의 곁에서 시간을 즐겼다"고 회고했다.

전후 융에는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하며 히틀러에 대한 증언을 이어갔다. 1973년 템스 텔레비전의 세계대전 시리즈 두 편에 출연했고, 제임스 P. 오도넬과 우베 반센의 1975년 책 벙커를 위한 인터뷰에 응했다. 1989년에는 BBC 다큐멘터리 아돌프 히틀러의 치명적인 매력과 피에르 갈란테, 유진 실리아노프의 책 벙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통해 증언했으며, 1991년에는 ZDF의 다큐멘터리 시리즈 히틀러의 부하들에 출연했다. 이러한 활동들을 통해 1942년부터 1945년까지 곁에서 지켜본 히틀러의 개인적인 면모, 사생활, 그리고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화들을 제공했다.

1947년부터 1948년 사이에 회고록을 집필했으나 당시에는 출판하지 않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안네의 전기》 저자 멜리사 뮐러와 협력하여 2002년 회고록 《마지막 순간까지 - 히틀러의 여성 비서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다》(de)를 출간했다. 이 회고록은 사후인 2003년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융에의 증언과 회고록은 말년의 히틀러를 묘사한 2004년 영화 《몰락》(de) 제작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이 영화는 융에의 회고록과 요아힘 페스트의 저서를 원작으로 하며, 배우 알렉산드라 마리아 라라가 융에 역을 맡았다. 영화의 시작과 끝에는 융에가 출연한 2002년 다큐멘터리 영화 《블라인드 스폿: 히틀러의 비서》(de)의 인터뷰 영상이 인용되었다.

생을 마감하기 직전인 2001년, 다큐멘터리 《히틀러의 여비서》 인터뷰에서 융에는 하얀 장미 단원들을 언급하며, 자유와 진실을 위해 싸우다 죽어간 그들과 달리 나치를 합리화하며 젊은 시절을 보낸 자신의 과거를 비판하고 성찰하는 모습을 보였다. 특히 영화 《몰락》의 마지막 부분에 인용된 인터뷰에서 그녀는 조피 숄과의 비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며 역사적 성찰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뉘른베르크 재판과 관련하여 들었던 끔찍한 일들; 6백만 유대인의 운명, 그들의 살해와 다른 인종과 신념을 대표하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은 나를 매우 충격에 빠뜨렸지만, 그 당시에는 이러한 일들과 나의 과거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개인적으로 이러한 일들에 대해 유죄가 아니었고, 이러한 일들의 규모를 알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서만 기뻤다. 그러나 어느 날, 나는 프란츠-요제프 거리 (뮌헨)의 조피 숄을 기리는 벽에 있는 명판을 지나갔다. 나는 그녀가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났고, 내가 히틀러의 시종이 된 해에 처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내가 그렇게 어렸다는 것은 변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정말로 깨달았다. 나는 아마도 그 일에 대해 알아내려고 노력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4. 같이 보기

* 아돌프 히틀러
* 제2차 세계 대전
* 나치즘
* 홀로코스트
* 다운폴 (영화)
* 히틀러의 여비서
* 마지막 순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