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데리크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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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레데리크 3세는 1648년부터 1670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다. 그는 크리스티안 4세의 아들로, 형의 죽음으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 그는 스웨덴과의 전쟁에서 코펜하겐을 방어하며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1660년 혁명을 통해 선거 군주제를 절대 군주제로 전환하여 덴마크의 절대 왕정을 수립했다. 통치 후반에는 행정 개혁과 재정 재편, 그리고 법률 제정을 통해 왕권을 강화했다. 그는 소피 아말리에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와 결혼하여 여러 자녀를 두었으며, 사생아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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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티안 4세는 1588년부터 1648년까지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통치한 국왕으로, 국방 및 경제 개혁을 추진하고 해외 진출을 시도했으나 30년 전쟁과 토르스텐손 전쟁에서 패배하여 발트 해에서의 세력을 상실했으며, 르네상스 군주로서 예술과 문화를 장려하다가 1648년 사망했다.
프레데리크 3세 |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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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덴마크 국왕 겸 노르웨이 국왕 |
통치 기간 | 1648년 7월 6일 – 1670년 2월 9일 |
대관식 | 1648년 11월 23일 |
선임자 | 크리스티안 4세 |
후임자 | 크리스티안 5세 |
배우자 |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소피 아말리에 (1643년 10월 1일 결혼) |
자녀 | 크리스티안 5세 안나 소피에, 작센 선제후비 프레데리케 아말리에,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부인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 팔츠 선제후비 요르겐 왕자, 컴벌랜드 공작 울리케 엘레오노라, 스웨덴 여왕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 (사생아) |
왕가 | 올덴부르크 가 |
아버지 | 크리스티안 4세 |
어머니 | 안네 카타리네 아 브란덴부르 |
출생일 | 1609년 3월 18일 |
출생지 | 헤데르슬레우후스 성, 헤데르슬레우, 덴마크 |
사망일 | 1670년 2월 9일 |
사망지 | 코펜하겐 성, 코펜하겐, 덴마크 |
매장지 | 로스킬레 대성당 |
종교 | 루터교 |
서명 | [[파일:Signature of Frederick III of Denmark.svg|프레데리크 3세의 서명]] |
이름 | |
덴마크어 | Frederik |
기타 정보 | |
스타일 | 더 보기... |
2. 생애
크리스티안 4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의 둘째 아들로 하데르슬레우의 하데르슬레우후스 성에서 태어났다. 셸란섬 소뢰(Sorø)의 소뢰 아카데미에서 교육받았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유학했다. 신학, 자연과학, 스칸디나비아 역사에 관심을 가져 많은 책을 수집했고, 1648년 덴마크 왕립도서관 건립에 영향을 주었다.
1647년 형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사망하고 1648년 아버지 크리스티안 4세가 사망하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초 덴마크 의회가 정치의 핵심 역할을 했으나, 1651년 코르피츠 울펠트, 한니발 세헤스테드를 숙청했다. 울펠트는 스웨덴으로 망명했고, 세헤스테드는 1660년 복권되었다.
제2차 북방 전쟁 중 1657년부터 1658년까지 스웨덴과 전쟁을 벌였으나 패했다. 1659년 스웨덴 군대가 코펜하겐을 점령하며 위기를 맞았지만, 네덜란드 군대의 지원으로 1658년부터 1660년까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
1660년 선거 군주제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를 도입했으며, 1665년 서양 역사학 최초로 전제군주제를 법제화했다. 덴마크의 전제군주제는 1848년 헌법 개정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1667년 먼 친척 올덴부르크 백작 안톤 귄터가 사망하여 올덴부르크 백작령을 상속받았다.
1670년 2월 9일 코펜하겐 성에서 사망했으며, 시신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2. 1. 초기 생애
슐레스비히 공국의 하더슬레우에서 크리스티안 4세와 브란덴부르크의 안나 카타리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셸란섬 소뢰(Sorø)에 위치한 소뢰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네덜란드, 프랑스 등지에서 유학했다.[3] 형 크리스티안이 왕세자였기 때문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멀었다.[4]젊은 시절 신학, 자연과학, 스칸디나비아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많은 책들을 수집하여 1648년 덴마크 왕립도서관 건립에 영향을 주었다.[3]
어린 시절 브레멘 대주교령 (1635–45), 페르덴 주교령 (1623–29, 1634–44)의 행정관을 맡았으며, 할버슈타트 주교령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어 행정 경험을 쌓았다.[4] 18세에 브레멘 요새 슈타데의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3]
2. 2. 즉위
1647년 형 크리스티안 왕세자가 사망하고, 1648년 아버지 크리스티안 4세 국왕이 사망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3] 덴마크 신분회와 Rigsraadetda(왕립 평의회) 사이의 오랜 심의 끝에, 그는 마침내 아버지의 후계자로 받아들여졌다. 7월 6일, 프레데리크는 신하들의 경의를 받았고, 11월 23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그러나 크리스티안 4세의 통치에 대한 우려와 더불어, 프레데리크가 브레멘과 페르덴에서 보여준 대립적인 행정과 안데르스 빌레와의 불화 때문에, 그는 Haandfæstningda 헌장을 서명한 후에야 선출되었다.[3] Haandfæstningda에는 이미 축소된 왕의 특권을 Rigsraadetda의 영향력 확대를 위해 제한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4]즉위 초반에는 덴마크 의회가 덴마크의 정치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프레데리크 3세는 Haandfæstningda이 공식적으로 부여한 것보다 더 효과적인 권력을 행사했다. 그는 결국 1651년에 덴마크 의회에서 실권을 잡고 있던 의원인 코르피츠 울펠트와 한니발 세헤스테드를 숙청하게 된다.[3] 울펠트는 스웨덴으로 망명하여 배신자가 되었고, 세헤스테드는 1660년에 다시 총애를 받았다.

2. 3. 스웨덴과의 전쟁
칼 10세가 이끄는 스웨덴이 1656년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레데리크 3세는 이를 스웨덴과의 관계를 단절할 좋은 기회로 판단했다. 1657년 2월 23일 덴마크 의회는 군사비 지출을 승인했고, 4월 23일 프레데리크 3세는 스웨덴령 독일 공격에 대한 동의를 얻었다. 6월 1일 선전포고문에 서명했으나, 실제로 선전포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4]그러나 칼 10세는 독일에서 유틀란트 반도로 빠르게 진격해왔다. 1658년 1월과 2월, 릴레 해협과 스토레 해협이 얼어붙는 혹한이 닥치자, 칼 10세는 얼어붙은 해협을 건너는 빙상 침공이라는 전례 없는 작전을 감행했다. 이 기습에 덴마크는 큰 충격을 받았고, 프레데리크 3세는 즉시 항복했다.[4]
1658년 2월 26일, 로스킬레에서 로스킬레 조약이 체결되었다. 프레데리크 3세는 스코네, 트론헤임 지방, 보른홀름 섬을 스웨덴에 할양해야 했다. 특히 덴마크 인구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한 스코네 지방의 할양은 덴마크에 큰 타격이었다. 조약 체결 직후, 프레데리크 3세는 칼 10세를 프레데릭스보르 성으로 초대하여 연회를 열었고, 두 왕은 겉으로는 친밀한 모습을 보였다.[12]

하지만 칼 10세는 1659년 덴마크를 다시 침공했다. 7월 17일 스웨덴군이 셸란 섬의 코르쇠르에 상륙하자 덴마크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프레데리크 3세는 코펜하겐 사수를 명했고, 한스 난센 시장을 중심으로 한 시민들은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항전 의지를 굳건히 했다.[4]
덴마크는 네덜란드, 브란덴부르크,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원을 받아 반격에 나섰다. 10월 29일 외레순 해전에서 승리했고, 네덜란드군 덕분에 덴마크는 해방되었다. 칼 10세는 코펜하겐 포위를 풀고 스코네로 후퇴했지만, 전쟁은 계속될 것처럼 보였다.[4]

1660년 2월 13일 칼 10세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북방 전쟁은 종결되었다. 5월 27일 코펜하겐 조약이 체결되어, 프레데리크 3세는 트론헤임 지방과 보른홀름 섬을 되찾는 데 성공했다. 이 일련의 전쟁은 덴마크에서 "칼 구스타프 전쟁"이라고 불린다.
2. 4. 절대왕정 수립
프레데리크 3세는 제2차 북방 전쟁에서 스웨덴에 패배하여 위기를 맞았으나, 코펜하겐을 점령하려는 스웨덴군에 맞서 시민들과 함께 도시를 지켜내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3] 특히 "나는 내 둥지에서 죽을 것이다"라며 코펜하겐을 떠나라는 조언을 거부하고, 한스 넨센 시장을 필두로 한 코펜하겐 시민들의 지지를 받으며 도시 방어를 이끌었다.[3][4]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프레데리크 3세는 1660년에 선거 군주제를 폐지하고 절대왕정을 수립했다.[3] 전쟁 이후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신분제 의회에서 각 신분 간의 대립을 이용하여 세습 군주제와 ''Haandfæstning'' 헌장의 무효화, 그리고 칙령에 의한 절대 군주제 확립에 대한 지지를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3] 1661년 1월 10일에는 의회의 여러 신분이 왕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보장하는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절대 군주가 되었다.
1665년에는 유럽 최초로 전제군주제를 법제화한 왕의 법 (''Kongeloven'', 렉스 레기아)을 반포했다.[3] 이 법은 군주가 "오늘부터 모든 신민에 의해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최고의 인물로 존경받고 간주되어야 하며, 모든 인간의 법 위에 서고 영적, 세속적 문제에서 하나님 외에는 그 위에 재판관이 없어야 한다"고 규정하여,[7][8] 왕에게 다른 모든 권력 중심지를 폐지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에 따라 가장 중요한 기관이었던 국가 평의회가 폐지되었다.
2. 5. 통치 후반기
프레데리크 3세의 통치 후반기에, 왕은 새로운 군주제가 건설되고 국가가 전쟁 이후 회복을 시도하는 동안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위치에 있었다. 한니발 세헤스테드와 왕의 총신 크리스토퍼 가벨과 같은 대신과 고문들 사이의 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새로운 인물들이 정부에 들어섰다.[5] 1660년대 초중반에는 세헤스테드를 중심으로 프레데리크 아레펠트, 페터 뷜체, 한스 스바네, 야콥 페테르센, 테오도르 렌테와 같은 영향력 있는 집단이 있었으며, 이들은 가벨에 점점 더 반대하게 되었다.[6] 프레데리크 3세는 행정 구조를 재상청에서 부서별 합의로 변경하는 데 집중했으며, 봉건 영지의 행정 구역을 ''아므트'' 카운티로 대체했다.3. 업적
프레데리크 3세는 덴마크를 지키기 위해 보여준 용감한 모습으로 중산층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1660년 혁명을 일으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의회의 동의를 얻어 선거 군주제에서 절대 왕정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13] 카를 구스타프 전쟁에서 귀족 세력이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은 것이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9월에 소집된 신분제 의회에서 시민 측이 절대 왕정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프레데리크 3세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10월에 즉위 시 서명했던 헌장도 무효화하고 절대 왕정에 가까워졌으며, 다음 해 1661년 1월 10일에 의회의 여러 신분이 왕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보장하는 서류에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절대 군주가 되었다. 1665년에는 서양 역사학에서 최초로 전제군주제를 법제화했다. 덴마크의 전제군주제는 1848년 헌법 개정 이전까지 지속되었다.
치세 마지막 10년은 새로운 절대 왕정 확립과 전쟁으로부터의 회복에 힘썼다. 중앙 관청이 잇따라 설립되어 행정이 정비되었고, 지방도 귀족이 장관을 맡았던 기존 제도에서 중앙 정부가 관리를 지방 장관으로 파견하여 지배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전환하여 귀족 세력을 배제해갔다.[13] 1664년에는 토지 과세에 관한 세제 개혁으로 재정도 개편되었고, 새로운 인재가 시민 계층에서 지배 기구로 들어왔다.[13] 1665년 절대 왕정의 "헌법"에 해당하는 ''Kongeloven''이 작성되어 절대 왕정의 명문화로 지배 체제가 확립되었다.[13] 또한, 자국 방위에 힘을 쏟아 코펜하겐은 요새 도시화되었고 징병제도 채택되었으며, 재원이 부족한 가운데 가능한 한 국방 증강을 이루었다.[13]
1648년에는 덴마크 왕립도서관을 건립하였다.
4. 평가
프레데리크 3세는 덴마크를 위기에서 구하고 절대왕정을 수립한 군주로 평가받는다.[13] 그는 카를 구스타프 전쟁에서 소극적인 귀족들과 달리 국가를 수호하려는 용감한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는 중산층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를 바탕으로 1660년 혁명을 통해 선거 군주제에서 절대 왕정으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다.[13]
1661년 1월 10일, 의회는 왕에게 무제한의 권력을 보장하는 문서에 서명했고, 1665년에는 절대 왕정의 "헌법"에 해당하는 ''Kongeloven''이 작성되어 절대 왕정 체제가 확립되었다.[13] 중앙 관청 설립, 지방 제도 개편, 1664년 세제 개혁 등을 통해 행정과 재정이 정비되었다.[13] 또한 코펜하겐 요새화, 징병제 도입 등 자국 방위에도 힘썼다.[13]
한편으로는 귀족 세력을 억압하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치중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5. 가족 관계
프레데리크 3세는 1643년 글뤽스부르크 성에서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아말리에와 결혼했다.[4] 슬하에 크리스티안 5세 등을 두었으며, 마르가레테 파페와의 사이에서는 사생아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를 두었다.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크리스티안 5세 | 1646년 4월 15일 | 1699년 8월 26일 |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아말리에와 결혼, 프레데리크 4세를 포함한 자녀를 둠 |
안나 소피에 | 1647년 9월 1일 | 1717년 7월 1일 | 요한 게오르크 3세, 작센 선제후와 결혼, 자녀를 둠 |
프레데리카 아말리아 공주 | 1649년 4월 11일 | 1704년 10월 30일 |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과 결혼, 자녀를 둠 |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 | 1650년 6월 21일 | 1706년 4월 22일 | 팔츠 선제후 카를 2세와 결혼, 자녀 없음 |
프레데리크 | 1651년 10월 11일 | 1652년 3월 14일 | 유아기에 사망 |
요르겐 | 1653년 4월 2일 | 1708년 10월 28일 | 영국 여왕 앤과 결혼, 모든 자녀가 요절 |
울리카 엘레오노라 | 1656년 9월 11일 | 1693년 7월 26일 | 스웨덴 국왕 카를 11세와 결혼, 자녀를 둠 |
도로테아 | 1657년 11월 16일 | 1658년 5월 15일 | 유아기에 사망 |
5. 1. 배우자
1643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아말리에와 결혼했다.[4] 슬하에 크리스티안 5세, 작센 선제후비 안나 소피에,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부인 프레데리케 아말리에, 팔츠 선제후비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 영국 여왕 부군 요르겐, 스웨덴 왕비 울리카 엘레오노라 등을 두었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크리스티안 5세 | 1667년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아말리에와 결혼; 프레데리크 4세를 포함한 자녀를 둠 | ||
안나 소피에 | 1666년 요한 게오르크 3세, 작센 선제후와 결혼; 자녀를 둠 | ||
프레데리카 아말리아 공주 | 1667년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과 결혼; 자녀를 둠 | ||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 | 1671년 팔츠 선제후 카를 2세와 결혼; 자녀 없음 | ||
프레데리크 공자 | 유아기에 사망 | ||
요르겐 | 1683년 영국 여왕 앤 여왕과 결혼; 모든 자녀가 요절함 | ||
울리카 엘레오노라 | 1680년 스웨덴 국왕 카를 11세와 결혼; 자녀를 둠 | ||
도로테아 공주 | 유아기에 사망 |
5. 2. 자녀
1643년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조피 아말리에와 결혼하여 8명의 자녀를 두었다. 다음은 프레데리크 3세의 자녀 목록이다.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크리스티안 5세 | 1646년 4월 15일 | 1699년 8월 26일 |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 헤센-카셀의 샤를로테 아말리에와 결혼하여 프레데리크 4세를 포함한 자녀를 둠. |
안나 소피에 | 1647년 9월 1일 | 1717년 7월 1일 | 작센 선제후비. 요한 게오르크 3세, 작센 선제후와 결혼하여 자녀를 둠. |
프레데리케 아말리아 공주 | 1649년 4월 11일 | 1704년 10월 30일 | 홀슈타인고트로프 공작 부인. 크리스티안 알브레히트, 홀슈타인-고토르프 공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둠. |
빌헬미네 에르네스티네 | 1650년 6월 21일 | 1706년 4월 22일 | 팔츠 선제후비. 팔츠 선제후 카를 2세와 결혼. 자녀 없음. |
프레데리크 | 1651년 10월 11일 | 1652년 3월 14일 | 유아기에 사망 |
요르겐 | 1653년 4월 2일 | 1708년 10월 28일 | 영국 여왕 부군. 영국 여왕 앤과 결혼. 모든 자녀가 요절함. |
울리카 엘레오노라 | 1656년 9월 11일 | 1693년 7월 26일 | 스웨덴 왕비. 스웨덴 국왕 카를 11세와 결혼. |
도로테아 | 1657년 11월 16일 | 1658년 5월 15일 | 유아기에 사망 |
또한, 마르가레테 파페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를 두었다.[3]
5. 3. 서자
프레데리크 3세는 마르가레테 파페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를 두었다.[4]참조
[1]
간행물
Den Store Danske Encyklopædi
The Great Danish Encyclopedia
[2]
서적
Wars of the Age of Louis XIV
2008
[3]
웹사이트
Frederik 3
http://www.denstored[...]
[4]
웹사이트
Frederick III. of Denmark and Norway
[5]
간행물
Den ældre danske enevælde 1660–1730 Et historiografisk essay
http://www.tidsskrif[...]
2011-07-19
[6]
웹사이트
Jacob Petersen at Dansk Biografisk Leksikon - lex.dk
https://biografiskle[...]
[7]
웹사이트
Kongeloven af 1665
http://danskekonger.[...]
Danske konger
[8]
간행물
The Danish Royal Law of 1665
1957
[9]
웹사이트
Troværdighed er en konkret oplevelse
http://steensiebken.[...]
[10]
웹사이트
Kong Frederik III
http://www.danmarksk[...]
[11]
문서
[12]
문서
[1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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