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북방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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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북방 전쟁은 1655년부터 1660년까지 스웨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덴마크-노르웨이, 러시아 차르국 등 여러 국가가 참여한 일련의 전쟁이다. 스웨덴은 발트해 패권을 장악하려 했고, 주변 국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개입했다. 전쟁은 스웨덴의 초기 공세와 반(反) 스웨덴 동맹의 형성으로 전개되었으며, 1660년 올리바 조약과 코펜하겐 조약 체결로 종결되었다. 스웨덴은 발트해 패권을 확립했지만, 스코네 지방을 제외한 다른 영토를 잃고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쟁은 이후 대북방 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러시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등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지형에도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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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북방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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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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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명칭 | 제2차 북방 전쟁 |
영어 명칭 | Northern War |
기간 | 1655년 - 1660년 |
장소 | 덴마크-노르웨이, 스웨덴 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북아메리카 |
결과 |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렌이 스웨덴에 넘어감 프로이센 공국이 주권 국가로 격상됨 뉴스웨덴이 네덜란드에 넘어감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스웨덴 제국 [[파일:Flag of Brandenburg.svg|22px]]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1656년 ~ 1657년) [[파일:Flag of the Cossack Hetmanat.svg|22px]] 헤트만 국가 (1657년) [[파일:Transsylvanian Banner.svg|22px]] 트란실바니아 공국 [[파일:Flag of Wallachia.svg|22px]] 왈라키아 [[파일:Flag of Moldavia.svg|22px]] 몰다비아 리투아니아 대공국 |
교전국 2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덴마크-노르웨이 러시아 차르국 (1656년 ~ 1658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공국 (1655년 ~ 1656년, 1657년 ~ 1660년) 크림 칸국 합스부르크 군주국 네덜란드 공화국 |
지휘관 및 지도자 | |
스웨덴 제국 측 지휘관 | 칼 10세 구스타브 칼 구스타프 브랑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알비드 비텐베리 마그누스 가브리엘 데 라 가르디에 구스타프 오토 스텐보크 소 페르 브라헤 라코치 죄르지 2세 안톤 주다노비치 |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측 지휘관 | 얀 2세 카지미에시 바사 스테판 차르니에츠키 프레데리크 3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 라이몬도 몬테쿠콜리 스타니스와프 레베라 포토츠키 스타니스와프 란코론스키 (헤트만) 예지 세바스티안 루보미르스키 파베우 얀 사피에하 빈첸티 코르빈 고셰프스키 울리크 프레데리크 귈덴뢰베 안데르스 빌레 이우아르 크라베 마트베이 셰레메테프 장루이 라뒤이 드 수슈 |
병력 규모 | |
스웨덴 측 사상자 | 스웨덴 사망자 70,000명 (용병 제외) |
결과 및 영향 | |
영토 변화 | 스코네, 할란드, 블레킹에, 보후슬렌이 스웨덴으로 넘어감 |
정치적 변화 | 프로이센 공국이 주권 국가로 격상됨 |
식민지 변화 | 뉴스웨덴이 네덜란드에 넘어감 |
관련 전쟁 | |
러시아-스웨덴 전쟁 연관 | 노브고로드 공화국 모스크바 대공국 러시아 차르국 리보니아 에스토니아 잉그리아 제2차 북방 전쟁 러시아 차르국 대북방 전쟁 모자당 전쟁 구스타브 vs. 예카테리나 핀란드 전쟁 |
2. 명칭
이 전쟁은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폴란드에서는 스웨덴, 브란덴부르크, 러시아, 트란실바니아, 우크라이나 코사크와의 전쟁을 통틀어 "대홍수 시대"라고 부른다.[3] 덴마크에서는 "카를 구스타브 전쟁"이라고 부른다.[4] 이 전쟁에서 잉글랜드 왕국은 스웨덴의 동맹국이었고, 네덜란드 공화국은 잉글랜드에 맞서 전쟁에 참여했다.[4]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흐멜니츠키 봉기로 인한 대홍수 시대라는 내전에 휘말린 틈을 타, 주변 국가들이 개입하면서 북방 전쟁이 발발했다. 스웨덴은 폴란드와의 왕위 계승권 문제를 해결하고, 팔츠 가문의 왕위를 폴란드 왕에게 인정받으려는 의도가 있었다. 또한, 모스크바 대공국과 덴마크-노르웨이 등 주변 국가들을 견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3. 전개 과정
스웨덴은 초기 공세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며 여러 강화 조약을 통해 리보니아의 리프란드를 정식 영토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케다이니 합의(1655년)는 실패로 끝났고, 스웨덴 군의 약탈과 파괴 행위는 연합 왕국 국민들의 분노를 사 1657년에는 연합 왕국에서 쫓겨나는 결과를 맞았다.
1660년 초, 칼 10세가 사망하면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고, 올리바 조약을 통해 스웨덴은 Swedish Livonia|스웨덴령 리보니아영어의 주권을 인정받았다. 코펜하겐 조약으로 스웨덴은 보른홀름 섬과 트론데라그를 덴마크에 반환했지만, 덴마크는 발트해에서 스웨덴에 대한 해군 행동 금지를 약속했다. 러시아와는 카디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가 점령했던 스웨덴 영토를 반환받았다.
3. 1. 배경
북방 전쟁은 스웨덴이 일으킨 것이지만, 수년 전에 발발한 코사크의 반란(흐멜니츠키 봉기)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이 휘말린 대홍수 시대라는 내전에 주변 국가가 개입한 것이다. 특히 스웨덴은 폴란드와의 왕위 계승권 문제를 안고 있었고, 스웨덴의 새 왕조 팔츠 가문의 왕위를 폴란드 왕에게 인정받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스웨덴은 주변 여러 나라도 견제하고 있었다. 동쪽의 모스크바 대공국은 서유럽으로 향하는 창구인 발트해의 출구를 빼앗긴 상태였다. 덴마크-노르웨이는 스웨덴과의 앙금이 전 세기로부터 이어져 왔다. 양국은 틈만 나면 스웨덴과의 전쟁을 엿보고 있었다.
흐멜니츠키 봉기에서 모스크바 대공국과 스웨덴은 공조 관계에 있었지만, 스웨덴이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케다이니아 조약을 맺어 연합 왕국(공화국)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스웨덴의 위협이 커지는 것을 의미했고,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대립 관계는 더욱 깊어졌다. 관망하는 입장을 취하던 덴마크도 연합 왕국에서의 스웨덴의 동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한편 스웨덴이 발트해 세계에서 영향력이 커질수록 새 왕가의 국왕은 주변 국가에 대한 야심을 키워갔다. 대홍수 시대라는 미증유의 내전은 주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한 국가 간 전쟁으로 이어졌고, 스웨덴의 침공은 결과적으로 북방 여러 나라 간의 항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2. 스웨덴의 초기 공세 (1655년 ~ 1657년)
이 전쟁은 처음에는 스웨덴이 압도하여, 이후 양국과의 강화 조약을 통해 팔츠 왕조를 인정받았고, 1629년에 성립된 Swedish Livonia영어 (리보니아의 리프란드)를 정식으로 스웨덴 영토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웨덴의 위협으로 인해, 연합 왕국의 철저한 항전과 주변 국가들의 대 스웨덴 전쟁을 불러일으켜 전역이 확대되고, 막대한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와의 동군 연합 하에 있던 리투아니아 대공국과의 케다이니 합의(1655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이는 스웨덴 국왕 자신의 과장된 야심과 연합 왕국의 분할, 그리고 스웨덴 군에 의한 연합 왕국의 도시, 농촌에 대한 약탈, 파괴 행위가 연합 왕국 국민들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5] 시기적으로 흐멜니츠키의 난이 일단락되면서 연합 왕국의 총력을 기울인 대반격으로 전환되어 스웨덴 군은 이후 군사적 패퇴를 겪고, 1657년에 연합 왕국에서 쫓겨나는 결과가 되었다. 이는 스웨덴의 신왕가인 팔츠 왕가에게는 큰 실책이었지만, 폴란드 측에게도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전환을 할 여유는 없었다. 스웨덴 군의 횡포로 인해 연합 왕국의 경제는 압박을 받고, 국토는 피폐해졌으며, 스웨덴 군을 몰아낸 후에도 우크라이나 코사크나 러시아와의 전쟁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3. 3. 종전 (1660년)
1660년 초, 칼 10세가 병으로 쓰러져 2월 23일에 사망했다. 칼 10세의 죽음으로 평화의 장애물 중 하나가 제거되어 4월 23일에는 올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Swedish Livonia|스웨덴령 리보니아영어의 주권을 인정받았고, 브란덴부르크는 프로이센 공국의 주권을 승인받았다. 얀 2세 카지미에슈는 스웨덴 왕위에 대한 청구를 철회했지만, 사망할 때까지 스웨덴 왕의 칭호를 유지하는 것은 승인받았다. 점령지는 모두 원상 복귀되었다.[8]
그러나 덴마크는 최근의 성공으로 스웨덴의 약점을 파악하고 평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봉쇄를 해제했지만, 설득되어 다시 덴마크 편을 들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스웨덴 편에서 개입하면서 다시 대전이 일어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덴마크의 정치인 Hannibal Sehested (governor)|한니발 세헤스테드|label=한니발 세헤스테드영어는 외국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개입을 배제하고 평화 조약을 교섭하여 코펜하겐 조약 체결에 성공했다. 이 조약으로 스웨덴은 보른홀름 섬과 트론데라그를 덴마크에 반환했다.[8] 또한 덴마크는 발트해에서 스웨덴에 대한 해군 행동 금지를 약속했다.[9] 1660년의 조약은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의 정치적 경계를 확정했으며, 이 경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더불어 스웨덴은 Dominium maris baltici|발트해의 지배권영어을 확보했다.[10]
러시아는 러시아-폴란드 전쟁을 계속했지만, 스웨덴과는 카디스 조약을 체결하여 러시아가 점령했던 스웨덴 영토를 반환했다.[8]
4. 전쟁의 영향
스웨덴은 이 전쟁에서 군사적으로는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북방의 패권을 확립하는 데 성공했다. 제2차 북방 전쟁은 발트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스웨덴과 교전국 간 40년간의 평화 이후 대북방 전쟁(1700년-1721년)을 재개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한 스웨덴의 재정에도 큰 부담을 주어, 전쟁 후 스웨덴의 국력 약화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11]
스웨덴은 발트해에서의 우위를 유지했지만, 식민지는 네덜란드에 의해 빼앗겼다. 팔츠 왕가 하에서는 스웨덴 해군의 갱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북미의 뉴 스웨덴 및 아프리카의 골드 코스트와 같은 식민지를 상실하면서 스웨덴의 식민 제국으로의 길은 끊어졌다.[12][13]
하지만 스웨덴에게 비옥한 스코네 지방의 획득은 북방 전쟁에서 몇 안 되는 성과였다. 1658년 로스킬레 조약에서 얻은 영토 중 남은 영토가 스코네였다. 스웨덴은 이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 다른 점령지를 덴마크에 반환했다. 스웨덴에게 북해로 진출하는 것은 간절한 소망이었다. 이 지방은 덴마크에게도 중요했으며, 과거 북해 제국의 수도는 룬드에 있었다. 스코네 지방을 스웨덴이 획득한 1658년 당시 덴마크의 인구가 스웨덴의 절반으로 감소했을 정도의 영향을 남겼다.[14]
이 때문에 덴마크는 발트해 패권 탈환뿐만 아니라 스코네 탈환을 위해 여러 차례 스웨덴에 대항해 전쟁을 벌였다. 1670년대의 스코네 전쟁, 1700년대의 대북방 전쟁, 19세기의 나폴레옹 전쟁에 따른 스웨덴 분할 의도 등이 있었으나, 모두 덴마크가 패퇴했고, 스웨덴의 지방 자치체인 스코네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15]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연합 왕국도 스웨덴과 평화를 맺었지만 피폐해졌고, 이후에도 계속된 전쟁으로 인해 더욱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폴란드에서는 흐멜니츠키의 사망 후, 반 두령의 반란이나 립카 타타르족에 의한 Lipka Rebellion (1672년) 등의 내전이 계속되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1649년에 헤트만 국가가 독립했지만, 모스크바 러시아의 세력 신장을 거쳐 1786년에 러시아 제국에 흡수되었다. 북방 전쟁에서는 반 스웨덴 측의 강력한 저항도 있었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의 분할" 계획이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았지만, 이 강대해진 러시아 제국이 이 정책을 계승하여 "폴란드 분할"을 실시했다. 1660년에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폴란드 왕국으로부터 프로이센 공국으로 독립하는 것을 승인받았지만, 프로이센 왕국을 거쳐, 강대한 독일 제국으로 변모해 갔다.
5. 주요 조약
- 쾨니히스베르크 조약 - 1656년 스웨덴과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간에 체결되었다. 브롬베르크 조약과 올리바 조약으로 무효화되었다.
- 브롬베르크 조약 - 1657년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과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에 체결되었다.
- 로스킬레 조약 - 1658년 스웨덴과 덴마크 간에 체결되었다. 코펜하겐 조약으로 무효화되었다.
- 올리바 조약 - 1660년 스웨덴,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오스트리아, 폴란드-리투아니아 간에 체결되었다.
- 코펜하겐 조약 - 1660년 스웨덴과 덴마크 간에 체결되었다.
- 카디스 조약 - 1661년 스웨덴과 러시아 간에 체결되었다.
참조
[1]
서적
Hrushevsky
[2]
서적
Karl X Gustavs Krig
Historiska Media
[3]
문서
入江、注p41。「ポーランド・スウェーデン戦争」とも呼ばれている。
[4]
문서
ミュラー、p24 - p27、p40。オランダは、戦前は経済的結び付きの強いスウェーデンの同盟国であった。しかしスウェーデンの[[重商主義]]政策は、結果的にオランダとの競争を招き、経済的にも政治的にも二国間の関係を悪化させることとなった。新たな同盟国となったイングランドは、スウェーデンの新たな市場となったがオランダほど強固なものとはならなかった。
[5]
문서
入江、注p41。
[6]
서적
物語 北欧の歴史
[7]
서적
物語 スウェーデン史
[8]
서적
Frost
[9]
서적
武田
[10]
문서
百瀬,熊野,村井, p. 150。この環バルト海世界の覇権は、以後、凡そ半世紀に渡って維持されることとなった。
[11]
문서
入江、p45 - p47、p69 - 70。
[12]
서적
物語 スウェーデン史
[13]
문서
ミュラー、p38 - p43。スウェーデンの重商主義政策は、植民地事業では失敗に終わり、[[海運]]業の奨励に留まった。国家財政の悪化とともにスウェーデン経済も停滞することとなり、結果的にスウェーデンの[[国力]]弱体化をもたらすこととなった。
[14]
서적
物語 北欧の歴史
[15]
문서
入江、p41 - p42。スコーネは当初、スウェーデン政府による[[同化政策]]による反発から[[ゲリラ]]活動も行われたが、大北方戦争期にはスウェーデン化が成功し、「良きスウェーデン人」となってい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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