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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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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플랑드르 운동은 벨기에 플랑드르 지역의 언어적, 문화적, 경제적 자치 확대를 목표로 하는 사회 운동이다. 18세기부터 시작되어 벨기에 독립 이후 프랑스어 중심 정책에 반발하며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의 인정을 요구했다. 19세기 후반 문화 운동으로 발전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의 플라멘폴리틱에 영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침체기를 겪었으나, 1960년대 이후 언어 경계 확정과 자치권 요구를 통해 다시 활성화되었다. 현재는 분리 독립, 연방제 내 자치권 강화, 연합제 국가, 연방제 유지 및 개선 등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며, 여론 조사 결과에 따라 지지율이 변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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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운동
개요
국가벨기에
지역플란데런
목표플란데런의 문화적, 정치적 자치
벨기에 내 플란데런의 위상 강화
경우에 따라 플란데런의 독립
이념플란데런 민족주의
지역주의
보수주의
자유주의
사회주의
활동정치 운동
문화 운동
언어 운동
지지 기반플란데런 주민, 특히 중산층과 지식인층
관련 단체플람스 연대 (Vlaams Verbond)
플람스 국민연합 (Vlaams Nationaal Verbond, VNV)
플람스 블록 (Vlaams Blok)
신 플람스 연맹 (Nieuw-Vlaamse Alliantie, N-VA)
플람스 벨랑 (Vlaams Belang)
역사적 맥락
기원19세기 후반, 프랑스어 우위 정책에 대한 반발
주요 사건제1차 세계 대전 이후 급진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부 세력의 독일 협력
전후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 확대
현대벨기에 정치의 주요 변수, 분리주의 운동의 중심
주요 주장
언어 권리네덜란드어의 공용어 지위 확립 및 보호
문화적 자치플란데런 문화의 보존 및 발전
정치적 자치플란데런 지역 정부의 권한 강화
경제적 이익플란데런의 경제적 이익 보호 및 증진
논쟁점
벨기에의 미래연방주의 강화 vs. 독립
언어 갈등프랑스어 사용자와의 관계, 특히 브뤼셀 주변 지역
극우 성향일부 단체의 극우적, 인종차별적 성향 논란
영향
벨기에 정치주요 정당들의 정책 결정에 큰 영향
문화플란데런 문화의 부흥 및 정체성 강화
사회네덜란드어 사용자의 권익 보호

2. 역사

벨기에 건국 이전, 프랑스어는 유럽 부르주아와 귀족 엘리트들의 공용어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정복으로 1795년 프랑스에 합병된 벨기에는 프랑스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왈로니아와 플랑드르 상류층의 프랑스어 전환이 가속화되었다.[6]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에서 네덜란드 연합 왕국이 수립되었으나, 벨기에 혁명으로 15년 만에 막을 내렸다. 네덜란드의 빌럼 1세는 플랑드르 지역에 표준 네덜란드어를 강요하여 플랑드르인들의 분노를 샀지만, 1830년 혁명 전에 언어의 자유가 회복되었다.[10]

벨기에 혁명은 프랑스어 사용 벨기에인들의 주도로 일어났다는 주장이 있으나, 연구에 따르면 혁명가 대다수는 브뤼셀브라반트주 출신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당시 브뤼셀과 브라반트주는 주로 브라반트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플랑드르어 사용자들이 벨기에 혁명에 적극 참여했음을 보여준다.[14][15][17]

벨기에 독립 후, 네덜란드어는 신생 국가에서 배척되었다. 벨기에 관리들은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언하고 행정, 사법, 고등 교육(플랑드르의 초등학교 제외)을 프랑스어로 운영했다.[20] 브뤼셀에서조차 프랑스어 중심 정책이 시행되어 네덜란드어 사용 인구가 급감했다.[21][25]

얀 프란스 빌렘스, 헨드릭 콘시앙스 등 플랑드르 지식인들은 벨기에 혁명 이후 수십 년 동안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 인정을 요구했다. 이 운동은 플랑드르 운동으로 알려졌으며,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지적인 운동이었다. 빌렘스폰드스(1851년), 다비드스폰드스(1875년) 등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를 장려하는 문화 단체들이 설립되었고,[1] 1861년 안트베르펜에서 최초의 플랑드르 정당인 '미팅파르티'가 창설되었다.[1]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플라멘폴리틱(Flamenpolitik)을 추진하여 플랑드르-왈롱 간 갈등을 이용하려 했다. 독일은 네덜란드어를 유일한 행정 언어로 지정하고, 겐트 대학교에 폰 비싱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플랑드르 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대다수 플랑드르인들은 독일 점령군과 협력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전쟁 후, 플랑드르 운동은 플랑드르 군인 조직인 ''전선 운동(Frontbeweging)''을 통해 사회적 지향성을 강화했다. 이들은 군대와 벨기에에서 자국어에 대한 배려 부족에 불만을 제기하며 평화주의적 감정을 품었다. 1930년대 플랑드르 운동은 더욱 커졌고, 네덜란드어는 처음으로 플랑드르의 유일한 언어로 인정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 사용을 보호하고 장려하며 플랑드르인과 프랑스어 사용 지역(Francophone) 사이의 반감을 조장했다.[35] 대부분의 플랑드르 민족주의자들은 더 많은 자치를 얻기 위해 협력을 받아들였고,[35] 이 때문에 전쟁 후 플랑드르 운동은 침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베르메일렌 기금이 설립되었지만, 플랑드르 운동은 거의 20년 동안 침체되었다. 1960년대에 다시 활기를 찾았고, 1962년 벨기에 내 언어 경계가 확정되어 브뤼셀이 이중 언어 도시로 지정되었다. 1967년 벨기에 헌법의 공식 네덜란드어 번역본이 채택되었다.[36]

1960년대 후반, 벨기에 주요 정당들은 플랑드르 또는 프랑스어권 분파로 분열되었다. 이와 함께 최초의 주요 민족주의 플랑드르 정당인 폴크스유니(인민 연합)가 등장했다. 1977년 폴크스유니에서 급진 극우파가 연합, 이전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과 플라암스 블록을 결성했다.[36]

2. 1. 초기 (18세기~19세기 초)

18세기 스페인령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에서 브라반트 혁명까지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의 언어는 스페인어였다가 점차 프랑스어로 바뀌었지만, 이는 방언과 함께 사용되었다. 당시에는 언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6]

1788년, 남부 네덜란드 출신의 법학자이자 정치인인 얀-밥티스트 페를로이(1747–1797)는 ''Verhandeling op d'Onacht der moederlycke tael in de Nederlanden'' (저지대 국가에서 모국어에 대한 무시 에세이)라는 제목의 에세이를 썼다. 이 에세이는 플라망어 옹호 운동의 시작으로 여겨지지만, 자유와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운동이기도 하다.[6]

벨기에가 건국되기 전, 프랑스어는 이미 수세기 동안 유럽 내 부르주아와 귀족 엘리트들의 공용어였다(벨기에가 될 영토 포함).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오늘날의 벨기에는 1795년 프랑스에 합병되었다. 프랑스는 벨기에 영토에 공식 언어를 강요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왈로니아와 플랑드르의 상류층이 프랑스어로 전환하는 속도가 빨라졌다.[6]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북부와 남부에서 게르만어군과 방언 (플라망어, 브라반트어, 림뷔르흐어, 룩셈부르크어)을 사용했으며, 영토 남부에서는 표준화되지 않고 통일되지 않은 로망스어군과 방언 (왈론어, 피카르어, 샹파뉴어, 로렌어)을 사용했다. 이러한 사람들은 종종 프랑스어를 이해하거나 말할 수 없었다.[6]

2. 2. 벨기에 독립과 프랑스어 중심 정책 (19세기)

벨기에가 건국되기 전부터 프랑스어는 유럽 내 부르주아와 귀족 엘리트들의 공용어였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정복으로 1795년 프랑스에 합병된 벨기에는 프랑스어 사용이 강요되었고, 이는 왈로니아와 플랑드르 상류층의 프랑스어 전환을 가속화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빈 회의는 네덜란드 연합 왕국을 수립했지만, 벨기에 혁명으로 15년 만에 종말을 맞았다. 혁명의 주요 원인은 종교적 차이(가톨릭인 벨기에와 개신교인 네덜란드)였다. 이 외에도 벨기에인의 의회 과소 대표, 네덜란드인의 행정부 및 주요 요직 과다 대표, 네덜란드의 공공 부채 부담, 언론 및 집회 자유 축소 등의 요인이 있었다.[7][8][9]

네덜란드의 빌럼 1세는 플랑드르 지역에서 표준 네덜란드어를 강제로 사용하게 하여 플랑드르인들의 분노를 샀다. 그러나 1830년 6월 4일(혁명 전)에 언어의 자유가 회복되었다.[10]

벨기에 혁명은 프랑스어 사용 벨기에인들의 의지였다는 주장이 있었으나, 연구에 따르면 혁명가들의 대다수는 브뤼셀브라반트주 출신의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존 W. 루니 주니어에 따르면, 사망자와 부상자의 73~88%가 브뤼셀 출신이었고, 91~95%가 브라반트 출신이었다.[14] 장 스텐제르도 전투원의 76%가 브뤼셀 출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15] 당시 브뤼셀과 브라반트주는 주로 브라반트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플랑드르어 사용자들이 벨기에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루니는 혁명에 참여한 노동자 중 60%가 플랑드르어 사용자들이었다고 결론지었다.[17]

벨기에 혁명 이후, 겐트 등 플랑드르 주요 도시에서 항의 시위가 발생했는데, 이는 새로운 정치 상황으로 인해 섬유 산업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19]

벨기에 독립 후, 네덜란드어는 신생 국가에서 배척되었다. 벨기에 관리들은 프랑스어를 유일한 공식 언어로 선언하고, 행정, 사법, 고등 교육(플랑드르의 초등학교 제외)을 프랑스어로 운영했다.[20] 브뤼셀에서조차 프랑스어 중심 정책이 시행되어, 네덜란드어 사용 인구가 급감했다.[21][25]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 정부는 브뤼셀에서 다른 플랑드르 지역보다 더 빠르게 네덜란드어를 정부의 모든 단계에서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23] 행정부가 브뤼셀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점점 더 많은 프랑스어 사용 관리들이 그곳에 거주하게 되었다. 브뤼셀의 교육은 프랑스어로만 이루어졌고, 이로 인해 젊고 숙련되지 않은 무학 플랑드르 남성들이 과잉 공급되었다. 프랑스 학교에서는 네덜란드어를 거의 가르치지 않았다.[24]

프랑스어 사용 부르주아는 플랑드르 인구를 존중하지 않았다. 벨기에 공동 설립자 샤를 로지에는 "좋은 행정의 첫 번째 원칙은 하나의 언어만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는 데 기반하며, 벨기에인의 유일한 언어는 프랑스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25] 또 다른 공동 설립자 알렉상드르 겐데비앵은 플랑드르인들을 "흑인과 마찬가지로 지구상에서 더 열등한 인종 중 하나"라고 폄하했다.[26]

당시 벨기에의 경제적 중심지는 플랑드르였지만,[27] 산업 혁명으로 왈로니아가 경제적 주도권을 잡았다. 벨기에 기득권은 플랑드르에 대한 투자를 불필요하다고 여겼고, 1830년부터 1918년까지 벨기에 GNP의 80%가 왈로니아로 흘러갔다.[28]

2. 3. 문화 운동의 성장 (19세기 후반~20세기 초)

얀 프란스 빌렘스, 헨드릭 콘시앙스 등 플랑드르 지식인들은 벨기에 혁명 이후 수십 년 동안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 인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운동은 플랑드르 운동으로 알려졌으며, 사회적이라기보다는 지적인 운동이었다. 귀도 헤젤레, Hugo Verriest|휘호 페리에스트nl, 알브레히트 로덴바흐 등 시인들이 이 운동에 기여했는데, 이들은 모두 로에셀라레 소신학교와 관련이 있었다.[1]

빌렘스폰드스(1851년)나 다비드스폰드스(1875년)와 같이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를 장려하는 문화 단체들이 설립되었다.[1] 1861년에는 최초의 '플라엠스 베르본트'(Constant Leirens, 겐트)와 '네덜란트세 본트'가 설립되었다. '리베랄 플라엠스 본트'는 1867년에 설립되었다. 율리우스 데 헤이터와 막스 로오스 같은 작가들은 '네덜란트세 본트'에서 활동했다. 1866년 9월 26일, 율리우스 데 헤이터는 안트베르펜에 '플라암스 본트'를 설립했다. 율리우스 부일스테케가 창간한 플랑드르 주간지 ''헤트 폴크스벨랑''은 1867년 1월 12일에 처음 출판되었다.[1]

1861년, 안트베르펜에서 급진 자유주의자, 가톨릭교도, 플라밍강트(얀 테오도르 판 레이스바이크, J. 데 라엣, E. 코레만스)에 의해 최초의 플랑드르 정당인 '미팅파르티'가 창설되었고, 1914년까지 존속했다. 1888년, 율리우스 호스테 시니어는 브뤼셀에서 플랑드르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온건 자유주의 플랑드르 신문 ''헤트 라스트 니우즈''를 창간했다. 1893년, 플랑드르 사제 아돌프 다엔스는 크리스테네 폴크스파르티를 창설했는데, 이는 가톨릭당의 급진화와 민주화를 야기했다. 최초의 플랑드르 정치적 성공은 1898년 '글레이크헤이드스웨트'(평등법) 통과였는데, 이는 사법 문제(법적 문서)에서 네덜란드어를 프랑스어와 동등하게 인정한 최초의 사례였다.[1]

2. 4. 제1차 세계 대전과 플라멘폴리틱 (20세기 초)

제1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은 플라멘폴리틱(Flamenpolitik)을 추진하여 플랑드르-왈롱 간의 갈등을 이용하려 했다. 독일은 네덜란드어를 유일한 행정 언어로 지정하고, 겐트 대학교에 폰 비싱 대학교를 설립하는 등 플랑드르 운동을 지원했다. 이러한 독일의 지원을 바탕으로 1917년 12월, 플랑드르 활동가들은 플랑드르 평의회(Raad van Vlaanderen, RVV)라는 지역 정부를 구성하고 플랑드르 자치를 선언했다.

마르닉스 하이센, 파울 판 오스타이옌 등 젊은 활동가들은 점령군을 "해방하는 게르만 형제"로 환영하며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플랑드르인들은 독일 점령군과 협력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전쟁 중 플랑드르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처벌받은 플랑드르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 중 10명은 노르망디 오른에 있는 특수 임업 소대라는 군 형벌 부대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이 시행했던 언어 개혁은 유지되지 않았다. 플랑드르 운동 지도자들의 협력과 기소는 타협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899년 신문 ''De Vlaamsche Strijd''에서 발췌. 겐트 대학교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선전의 좋은 예이다.

2. 5. 양차 세계 대전 사이의 발전 (20세기 초~중반)

루이 프랑크, 프랑스 반 카우엘라르트, 카미유 휴이스만스 (이들은 '세 마리의 우는 수탉'이라고 불렸다)는 겐트 대학교에 네덜란드어 도입을 위해 함께 노력했다. 1911년 로데베이크 데 라에트의 제안이 받아들여졌지만, 1930년까지는 시행되지 않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플랑드르 운동은 더욱 급진화되었고, 제1차 세계 대전 중 일부 활동가들은 점령군을 "해방하는 게르만 형제"로 환영했다. 젊은 마르닉스 하이센과 시인 파울 판 오스타이옌은 전쟁 중 이 '활동가' 운동에 참여했다.

독일은 네덜란드어를 유일한 행정 언어로 지정하고, 겐트에 네덜란드어 폰 비싱 대학교를 설립하여 "게르만 형제"를 도왔다. 이러한 조치는 독일이 플랑드르-왈롱 간의 적대감을 이용하여 독일의 목적을 달성하고 점령국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전술, 즉 ''플라멘폴리틱''(Flamenpolitik)에 의해 결정되었다. 독일의 지원을 받아 플랑드르 활동가들은 1917년 12월 플랑드르 자치를 선언한 ''플랑드르 평의회''(Raad van Vlaanderen, RVV)를 구성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 여러 플랑드르 병사들이 플랑드르 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처벌받았다. 이 병사들 중 10명은 1918년 프랑스 노르망디 오른에 있는 특수 임업 소대라고 불리는 군 형벌 부대로 보내져 강제 노동을 해야 했다. 플랑드르 인구 대다수는 독일 점령군과 협력한 사람들을 비난했다. 독일 패배 후, 플랑드르 운동 지도자들의 협력과 기소는 타협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지 못했다.

플랑드르 운동은 플랑드르 군인들의 조직인 ''전선 운동(Frontbeweging)''을 통해 더욱 사회적으로 지향하게 되었다. 이들은 군대와 벨기에 전체에서 자국어에 대한 배려 부족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으며, 평화주의적 감정을 품었다. 전선 운동은 평화, 관용, 자율을 추구하는 정치 운동이 되었다(Nooit Meer Oorlog, Godsvrede, Zelfbestuur). 이제르탑으로의 연례 순례(IJzerbedevaart)는 오늘날까지도 열리고 있다. 시인 안톤 판 빌더로데는 이 행사를 위해 많은 글을 썼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플랑드르 군인들의 처우에 대한 많은 소문이 돌았다. 그중 하나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많은 군인들이 프랑스어 사용 장교들의 명령을 이해하지 못해 학살당했다는 것이다. 벨기에군은 프랑스어만을 공식 언어로 사용했으며, "et pour les Flamands, la meme chose" (플랑드르에게도 똑같은 것)라는 문구는 프랑스어 사용 장교들이 네덜란드어로 명령을 "번역"하기 위해 사용했다고 한다. 이는 프랑스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플랑드르 군인들에게 모욕감을 더했다.

알베르 1세 국왕은 플랑드르의 이중 언어 지위를 지지했지만, 전쟁 말기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기득권층이 거부한 플랑드르인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이 아닌 자국을 평화롭게 유지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1920년대에 최초의 플랑드르 민족주의 정당이 선출되었다. 1930년대에 플랑드르 운동은 더욱 커졌고 네덜란드어는 처음으로 플랑드르의 유일한 언어로 인정받았다. 1931년 요리스 판 세베렌은 플랑드르의 파시즘 운동인 ''디츠 국가 연대주의 연합''(Verbond van Dietse Nationaal-Solidaristen, Verdinaso)을 창설했다.

2. 6. 제2차 세계 대전과 협력 문제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은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 사용을 보호하고 장려하는 법률을 제정했으며, 플랑드르인과 프랑스어 사용 지역(Francophone) 사이의 반감을 조장했다. 예를 들어 플랑드르 출신 전쟁 포로만을 석방하는 방식(플라멘폴리틱 참조)이었다.[35] 나치는 독립적인 플랑드르 국가 또는 대 네덜란드(Greater Netherlands) 창설을 허용할 의사가 없었고, 대신 플랑드르를 포함한 모든 저지대 국가를 "인종적으로 게르만적인" 대 게르만 제국의 구성 요소로 완전히 병합하고자 했다.[35] 대부분의 플랑드르 민족주의자들은 더 많은 자치를 얻기 위한 수단으로 협력을 받아들였다.[35] 이러한 협력 때문에, 전쟁 후 플랑드르 운동은 적과의 협력과 연관되면서 침체되었다.

2. 7. 전후 재건과 언어 경계 확정 (20세기 후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인 1945년에 베르메일렌 기금이 설립되었지만, 플랑드르 운동은 거의 20년 동안 침체되어 있었다. 1960년대에 플랑드르 운동은 다시 활기를 찾았고, 1962년에는 벨기에 내 언어 경계가 확정되어 브뤼셀이 이중 언어 도시로 지정되었다. 1967년에는 벨기에 헌법의 공식 네덜란드어 번역본이 채택되었다.[36] 130년 이상 동안 벨기에 헌법의 네덜란드어 번역본은 법적 효력이 없는 단순한 번역본이었다.

2. 8. 현대 플랑드르 운동의 다양화 (20세기 후반~현재)

링케베크의 이중 언어 도로 표지판. 프랑스어 단어가 지워져 있고, 네덜란드어 단어만 남아 있다.


1960년대 후반, 벨기에의 모든 주요 정당은 플랑드르 또는 프랑스어권 분파로 분열되었다. 이와 함께 최초의 주요 민족주의 플랑드르 정당인 폴크스유니(인민 연합)가 등장했다. 1977년 폴크스유니에서 더욱 급진적인 극우파가 연합하여, 이전의 극우 민족주의 단체들과 함께 플라암스 블록을 결성했다.[36] 이 정당은 결국 폴크스유니를 넘어섰지만, 차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이후 플라암스 벨랑으로 이름을 변경해야 했다. 플라암스 벨랑은 현재 플랑드르 운동의 중요한 우익 정당으로 자리 잡았다.

3. 주요 특징

플랑드르 운동은 언어적 평등 및 자치권 확대, 문화적 정체성 강화, 경제적 불균형 해소 등을 주요 특징으로 한다.

3. 1. 언어적 평등과 자치권 확대

플랑드르 사람들은 이러한 시설을 영구적인 언어적 소수 집단의 인정이 아닌, 또 다른 언어로의 통합 조치로 보았다. 반면에 프랑스어 사용자는 이러한 언어 시설을 획득한 권리로 여겼으며, 비록 헌법에 위배될지라도 브뤼셀의 이중 언어 지역으로의 최종적인 추가 단계로 보았다.[37] 결과적으로, 이 지역(대부분 브뤼셀 주변)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감소하지 않았으며, 공식적으로 단일 언어 지역인 플랑드르에 거주함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벨기에인의 수가 증가하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어화는 플랑드르 운동에 의해 좌절감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며 분리를 요구하는 이유가 되고 있다.

상황은 프랑스어 사용 학교에서 네덜란드어 수업이 부족하여 더욱 악화되고 있다.[38]

3. 2. 문화적 정체성 강화

벨기에 혁명 이후 수십 년 동안, 얀 프란스 빌렘스, 필립 블로마에르트, 카렐 로데베이크 레데강크 등 플랑드르 지식인들은 벨기에에서 네덜란드어와 플랑드르 문화의 인정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귀도 헤젤레와 같은 시인들의 지지를 받으며 플랑드르 운동을 이끌었다.

플랑드르 문화와 네덜란드어를 장려하기 위해 빌렘스폰드스(1851년)와 다비드스폰드스(1875년) 등의 문화 단체가 설립되었다. 1861년에는 최초의 '플라엠스 베르본트'와 '네덜란트세 본트'가 창설되었고, 1867년에는 '리베랄 플라엠스 본트'가 설립되었다. 율리우스 데 헤이터와 막스 로오스 등의 작가들은 '네덜란트세 본트'에서 활동했다. 1866년에는 율리우스 데 헤이터가 안트베르펜에 '플라암스 본트'를 설립했으며, 율리우스 부일스테케가 창간한 플랑드르 주간지 '헤트 폴크스벨랑'은 1867년에 처음 출판되었다.

정치적으로는 1861년 안트베르펜에서 최초의 플랑드르 정당인 '미팅파르티'가 창설되어 1914년까지 존속했다. 1888년 율리우스 호스테 시니어는 브뤼셀에서 플랑드르 운동을 지원하는 신문 ''헤트 라스트 니우즈''를 창간했다. 1893년에는 아돌프 다엔스 신부가 크리스테네 폴크스파르티를 창설하여 가톨릭당의 급진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다. 1898년에는 '글레이크헤이드스웨트'(평등법)가 통과되어 네덜란드어가 법적으로 프랑스어와 동등하게 인정받는 첫 사례가 되었다.

하지만, 프랑스어 사용 학교에서 네덜란드어 수업이 부족한 점은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었다.[38]

3. 3. 경제적 불균형 해소

산업 혁명 이후 왈로니아가 플랑드르를 앞지르면서, 벨기에 기득권은 플랑드르에 대한 투자를 불필요하다고 여겼다. 1830년부터 1918년까지 벨기에 GNP의 80%가 왈로니아로 흘러갔으며, 이로 인해 왈로니아에는 탄광 및 철광 시설이 과잉 공급되었지만 플랑드르는 대부분 농촌 지역으로 남았다.[28]

1960년대 이후 현재까지 플랑드르는 왈로니아보다 훨씬 부유하다. 2007년 1인당 GDP는 플랑드르에서 28286EUR, 왈로니아에서는 20191EUR였다.[39][40] 부유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 간의 조정 지불은 연방 국가에서 흔히 발생하지만, 이러한 재정 이전의 규모와 투명성 부족, 수혜자들의 방만한 재정 운용은 플랑드르 운동의 주요 비판 대상이다.

루벤 대학교의 연구에 따르면, 2007년 플랑드르에서 왈로니아와 브뤼셀로의 연간 이전 규모는 57억유로로 추정된다. 국가 부채에 대한 이자 지급의 영향을 고려하면, 이 수치는 113억유로 또는 플랑드르 GDP의 6% 이상으로 높아질 수 있다.[42][43]

19세기에는 플랑드르가 더 가난한 지역이었을 때 플랑드르에서 왈로니아로의 순 이전이 있었는데, 이는 주로 농업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세금 부과 때문이었다.[44] 세금 제도는 왈로니아의 산업적 풍요를 반영하도록 조정되지 않아, 플랑드르(1832–1912년 평균: 인구의 44%, 총 세금의 44%)가 왈로니아(인구의 38%, 세금의 30%)에 비해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했다.[45]

4. 정치적 영향

벨기에 건국 이후, 무스크론, 코민, 특히 브뤼셀 (브뤼셀의 프랑스어화 참조) 등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은 점차 프랑스어 사용 지역으로 변화했다. 10년마다 시행된 인구 조사는 벨기에 내 프랑스어 사용 지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20] 1962년 언어 경계선이 그어지면서 프랑스어 사용자와 복잡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브뤼셀은 자치적인 이중 언어 지역으로, 플랑드르와 왈로니아는 단일 언어 지역으로 인정되었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프랑스어 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이 30% 이상인 특정 지역에서 ''언어 편의 시설''을 제공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해당 주민들이 자신의 출생 언어로 정부와 소통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4. 1. 정당 분열과 연립 정부 구성의 어려움

내부 갈등이 고조되면서 2000년에 Volksunie는 해체되고, Spirit와 N-VA(신 플라망 동맹)라는 두 개의 새로운 정당으로 분열되었다.[46] 두 정당은 모두 더 큰 정당과 연합을 시도했는데, N-VA는 CD&V의 기독교 민주당과, Spirit는 SP.a의 플라망 사회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었다.

CD&V – N-VA 연합은 2007년 6월 벨기에 총선에서 국가 개혁을 약속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다.[46] 그러나 프랑스어권 정당들이 개혁을 거부하면서 연립 협상은 매우 어려워졌다. 이브 레테름 CD&V 대표가 결국 정부를 구성했지만, 그의 개혁 계획은 약화되었고 2008년 금융 위기로 완전히 보류되었다. N-VA는 2008년 9월 연합을 해체하고 연방 정부 지원을 철회했다.

Spirit의 역할은 점차 줄어들었고, 2009년 말 Groen!(플라망 녹색당)과 합병했다.

2010년 6월 벨기에 총선에서 N-VA는 플랑드르와 벨기에 전체에서 선두 정당이 되었고, 플라망 투표의 28%를 득표했다.[46] 왈롱 지역에서는 Parti Socialiste(PS)가 37%의 득표율로 강력한 권한을 얻었다. 선거 후 N-VA, CD&V, SP.a, Groen!, PS, CDH, Ecolo 등 7개 정당이 연립 협상을 시작했지만, N-VA와 PS의 상반된 목표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48] 이는 18개월 정부 구성 위기로 이어졌다. 결국 CD&V, SP.a, Open VLD, PS, CDH, MR이 연립 정부를 구성했지만, 플라망 대표의 과반수를 포함하지 않았다. 2014년 선거에서 N-VA는 큰 이득을 얻었다.

4. 2. 벨기에 연방제 개혁

벨기에 건국 이후, 무스크론, 코민, 특히 브뤼셀(브뤼셀의 프랑스어화 참조) 등 네덜란드어 사용 지역이 점차 프랑스어 사용 지역으로 변화했다. 10년마다 실시된 인구 조사는 항상 벨기에 내 프랑스어 사용 지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20]

1962년, 언어 경계선 설정과 함께 프랑스어 사용자와 복잡한 타협이 이루어졌다. 브뤼셀은 자치적인 이중 언어 지역으로 인정되었지만, 플랑드르와 왈로니아는 단일 언어 지역으로 남았다. 프랑스어 사용자는 프랑스어 또는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소수 민족이 30% 이상인 지역에 ''언어 편의 시설''을 요구하여, 해당 주민들이 출생 언어로 정부와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플랑드르 사람들은 이를 언어적 소수 집단의 영구적 인정이 아닌, 다른 언어로의 통합 조치로 보았다. 반면 프랑스어 사용자는 언어 시설을 획득한 권리이자, 헌법에 위배되더라도 브뤼셀의 이중 언어 지역으로 편입되는 단계로 여겼다.[37] 결과적으로 브뤼셀 주변 지역의 프랑스어 사용 인구는 줄지 않았고, 공식적으로 단일 언어 지역인 플랑드르에 거주하는 프랑스어 사용 벨기에인이 다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는 플랑드르 운동에 좌절감을 안겨주었고, 분리 독립 요구의 원인이 되었다.

내부 갈등 심화로 2000년 Volksunie는 해체되고, Spirit와 N-VA (신 플라망 동맹)로 분열되었다. N-VA는 CD&V와, Spirit는 SP.a와 동맹을 맺었다.

2007년 벨기에 총선에서 CD&V – N-VA 카르텔은 국가 개혁을 약속하며 압승했지만, 프랑스어권 정당의 반대로 연립 협상은 어려웠다. Yves Leterme가 정부를 구성했을 때, 개혁 계획은 약화되었고 2008년 금융 위기로 보류되었다. N-VA는 2008년 9월 카르텔을 해체하고 정부 지원을 철회했다.

2010년 총선에서 N-VA는 플랑드르와 벨기에 전체 선두 정당이 되었다. 이들은 플랑드르 독립보다는 지역 자율성 확대를 원하는 온건 유권자들의 지지를 받았다.[48] 왈롱 지역에서는 PS가 37% 득표율로 강력한 권한을 얻었다. N-VA, CD&V, SP.a, Groen!, PS, CDH, Ecolo의 연립 협상은 N-VA와 PS의 상반된 목표로 18개월 정부 구성 위기를 겪었다. 결국 CD&V, SP.a, Open VLD, PS, CDH, MR이 연립 정부를 구성했지만, 플랑드르 대표 과반수를 포함하지 못했다. 2014년 선거에서 N-VA는 큰 이득을 얻었다.

5. 현재 동향

현재 플랑드르 운동은 크게 분리 독립, 연합제 국가, 연방제 유지 및 개선이라는 세 가지 흐름으로 나뉜다.

주장주요 정당 및 단체내용
분리 독립플람스 벨랑, 신플람스 동맹왈롱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플랑드르 공화국을 건국하거나, 네덜란드와의 재결합을 주장한다. 신플람스 동맹은 점진적으로 권한을 유럽 연합으로 이양하여 유럽 회원국으로서 독립하는 방식을 추구한다.[47][48]
연합제 국가기독교민주당 (CD&V)현재의 연방 조직보다 벨기에 국가의 연합 조직을 선호한다. 플랑드르 정부가 거의 모든 정부 기능을 담당하고, 현재 벨기에 연방 정부의 일부 기능은 유지하는 방안을 구상한다.[1] 브뤼셀은 네덜란드어 사용 시민과 프랑스어 사용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공유하는 도시로 남는다.[1]
연방제 유지 및 개선사회당(SP.A), VLD벨기에를 연방 국가보다는 개선된 연방 조직으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여러 사회 문화 단체들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하며, 벨기에 기관의 기능 개선을 희망한다.[1]



2010년 기준으로 연합주의 정당은 플람스 의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분리주의 정당과 합치면 플랑드르 의회의 약 80%(벨기에 연방 의회 플랑드르 부분의 최소 80%)가 더 큰 자치권을 원하는 정당에 의해 점유된다.[2]

5. 1. 분리 독립 주장

플람스 벨랑과 같은 극단적인 단체는 왈롱으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플랑드르 공화국을 건국할 것을 옹호한다. 이들 중 일부는 네덜란드와의 재결합도 주장한다. 이러한 견해는 여러 네덜란드 우익 활동가 및 민족주의자, 그리고 루이 토백(전 뢰번 시장이자 전 국방부 장관), 유럽 위원 프리츠 볼케스타인 등 네덜란드와 플랑드르의 일부 주류 정치인과 공유된다.[47]

신플람스 동맹은 점진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며 플랑드르와 유럽 연합으로 권한을 이양하여 유럽 회원국으로서 독립 플랑드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48]

5. 2. 연합제 국가 주장

기독교민주당 (CD&V)을 비롯한 온건파 주요 플랑드르 정당들은 현재의 연방 조직보다 벨기에 국가의 연합 조직을 선호한다.[1] 이들은 플랑드르 정부가 정부의 거의 모든 측면에 대한 책임을 지도록 하고, 현재 벨기에 연방 정부가 담당하는 일부 중요한 정부 측면은 유지하는 방안을 구상한다.[1] 브뤼셀은 네덜란드어 사용 시민과 프랑스어 사용 시민이 동등한 권리를 공유하는 도시로 남는다.[1]

2010년 기준으로 연합주의 정당은 플람스 의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분리주의 정당과 합치면 플랑드르 의회의 약 80%(벨기에 연방 의회 플랑드르 부분의 최소 80%)가 더 큰 자치권을 원하는 정당에 의해 점유된다.[2]

5. 3. 연방제 유지 및 개선

사회당(SP.A)CD&V, VLD의 여러 대표들은 벨기에를 연방 국가보다는 개선된 연방 조직으로 유지하는 것을 선호한다. 베르메일렌펀드, 빌렘스펀드, 노동조합, 상호 건강 보험 조직과 같은 여러 사회 문화 단체들도 이러한 견해를 공유한다. 이들은 벨기에 기관이 제대로 작동하도록 개선되기를 희망한다.[1]

6. 여론 조사

2021년 5월 ''De Stemming''에서 의뢰한 여론 조사 시각적 표현


2006년 6월 VRT에서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0%가 플랑드르 독립을 지지했다.[49]

2019년 12월 Le Soir와 RTL에서 발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플랑드르 응답자의 37%가 플랑드르 독립에 투표하겠다고 응답했으며, 이는 왈롱의 14%와 브뤼셀 거주자의 17%에 비해 높은 수치였다.[50]

2021년 5월, VRT의 기사에서 ''De Stemming''De Stemming|더 스테밍nl에서 실시한 여론 조사가 게재되어 국가 운영 방식에 대한 선호도를 측정했다. 이 연구는 3월 말부터 4월 19일까지 진행되었다. 응답자들은 0에서 10까지의 점수를 선택할 수 있었으며, 0은 '더 많은 플랑드르'를, 10은 '더 많은 벨기에'를 의미했다. 이 연구에 따르면 63%가 '더 많은 벨기에'를 원했고, 27%만이 '더 많은 플랑드르'를 원했으며, 10%는 현 상태가 괜찮다고 답했다.[5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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