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프 샤이데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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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필리프 샤이데만은 독일의 정치인으로, 1865년 카셀에서 태어나 1939년 코펜하겐에서 사망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핵심 인물로서, 1903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 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18년 11월 독일 공화국을 선포했다. 1919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총리를 역임했으나 베르사유 조약 체결 문제로 사임했다. 이후 카셀 시장을 지냈으며, 나치 정권의 집권 이후 망명 생활을 하다가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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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프 샤이데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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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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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필리프 하인리히 샤이데만 |
출생 | 1865년 7월 26일 |
출생지 | 헤센 선제후국, 카셀 |
사망 | 1939년 11월 29일 (74세) |
사망지 | 덴마크, 코펜하겐 |
배우자 | 요한나 디베른 |
자녀 | 리나, 리제, 헤드비히 |
소속 정당 | 독일 사회민주당 (1883–1939) |
관직 | |
임기 시작 | 1919년 2월 13일 |
임기 종료 | 1919년 6월 20일 |
대통령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부총리 | 오이겐 시퍼, 베른하르트 데른부르크 |
이전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사실상) |
이후 | 구스타프 바우어 |
임기 시작 | 1919년 11월 19일 |
임기 종료 | 1925년 10월 1일 |
이전 | 에리히 코흐-베저 |
이후 | 헤르베르트 슈타들러 |
임기 시작 | 1918년 12월 13일 |
임기 종료 | 1919년 2월 13일 |
총리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이전 | 빌헬름 졸프 |
이후 | 요하네스 벨 |
총리 | 막스 폰 바덴 |
임기 시작 | 1918년 10월 4일 |
임기 종료 | 1918년 11월 9일 |
이전 | 직책 신설 |
이후 | 직책 폐지 |
임기 시작 | 1917년 10월 20일 |
임기 종료 | 1919년 6월 15일 |
같이 역임 |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
이전 | 후고 하제 |
이후 | 헤르만 뮐러, 오토 벨스 |
임기 | 1919–1920 |
하위 임기 | 바이마르 국민의회 |
임기 시작 | 1919년 2월 6일 |
임기 종료 | 1933년 3월 22일 |
이전 | 선거구 신설 |
이후 | 선거구 폐지 |
임기 시작 | 1903년 12월 3일 |
임기 종료 | 1918년 11월 9일 |
이전 | 루이 사빈 |
이후 | 선거구 폐지 |
기타 경력 | |
임기 시작 | 1919년 11월 19일 |
임기 종료 | 1925년 10월 1일 |
임기 시작 | 1918년 6월 |
임기 시작 | 1917년 |
임기 종료 | 1919년 |
임기 시작 | 1913년 |
임기 시작 | 1911년 |
임기 시작 | 1908년 |
임기 종료 | 1911년 |
임기 시작 | 1903년 |
임기 종료 | 1918년 |
2. 생애
필리프 샤이데만은 1865년 7월 26일 헤센-카셀 지역에서 태어났다. 1879년 아버지의 사망 후 인쇄공장 견습공으로 일하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1883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했다. 1889년 요한나 샤이데만과 결혼하여 세 딸을 두었다.[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샤이데만은 전쟁을 지지했으나, 이후 병합 없는 협상 평화를 주장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1917년 독일 사회민주당(MSPD) 공동 당 의장이 되었고, 1918년 막시밀리안 폰 바덴 내각에서 무임소 국가 장관을 역임했다.[1]
1918년 11월 9일, 샤이데만은 독일 국회의사당에서 독일 공화국을 선포했다. 이는 황제 퇴위 이전에 이루어진 선언으로,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당신은 공화국을 선포할 권리가 없어!"라며 격노했다.[15] 이후 샤이데만은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 대표 평의회 일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 승리 후, 샤이데만은 바이마르 연립 내각 총리로 취임했다. 그러나 베르사유 조약 수락 문제를 둘러싸고 내각 내 의견이 엇갈리자, 1919년 6월 20일 총리직을 사임했다.[19]
총리직 사임 후, 샤이데만은 1920년부터 1925년까지 카셀 시장을 역임했다.[2] 1926년에는 독일 국방군과 소련 붉은 군대 간 비밀 협력을 폭로하기도 했다.[2]
1933년 나치 집권 후, 샤이데만은 '11월의 범죄자'로 비난받으며 생명의 위협을 느껴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망명했다.[1] 1939년 11월 29일 코펜하겐에서 사망했으며, 1953년 유해는 고향 카셀로 이장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가족 관계
필리프 샤이데만은 1865년 7월 26일 헤센 선제후국의 수도 카셀에서 가구 제작자인 아버지 프리드리히 샤이데만과 어머니 빌헬미네 샤이데만 사이에서 태어났다.1879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가족은 가난에 시달렸고, 샤이데만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인쇄공장 견습공으로 근무하였다. 1883년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가입하였다.
1889년 요한나 디베른과 결혼하여 리나, 리제, 헤드비히 세 딸을 낳았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정치 활동
1903년 제국 의회 선거에서 뒤셀도르프 3 선거구(졸링겐 시와 지역구)를 대표하여 제국 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2] 1907년 1월과 1912년 1월에 재선되었다.[2] 1906년부터 1911년까지 고향인 카셀 시의회 의원을 겸임했다.[2] 1911년 SPD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1918년까지 위원직을 유지했다.[2]아우구스트 베벨이 1913년에 사망한 후, 휴고 하세와 함께 SPD 의원단 의장직을 맡았다.[2] 1912년 제국 의회 부의장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지만,[1] 황제에게 공식적으로 인사를 드리는 것을 거부하여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4]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달리 샤이데만은 대중 연설과 소규모 청중 연설 모두에 능숙했다.[5] 그의 현실적인 태도, 유머 감각, 쾌활함[6]은 당 외부에서도 인정을 받았다.[1]
그는 실용적인 정치 스타일을 추구하여, 성공 가능성이 낮은 갈등을 피하고 성공 가능성이 있을 때만 대의를 옹호했다.[7][8]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예산 및 군사 문제에 대해 정기적으로 연설했으며 당의 중도파를 대표했다. 1912년 제국 의회에서 호엔촐레른 가문에 대해 날카로운 공격을 가했고,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제국 재상과 분데스라트 의원들이 항의하며 회의장을 떠났다.[9] 샤이데만은 여러 차례 해외 회의에서 독일 사회 민주주의를 대표했으며, 프랑스, 스위스, 미국을 방문했다.[10]
1912년 파리에서 한 연설은 큰 파문을 일으켰고, 왜곡된 형태로 독일에서 출판되어 그를 비방하고 사회 민주당을 "조국 반역자"로 폄하하는 데 이용되었다. 1912년 12월 3일 제국 의회 토론에서 샤이데만의 당 동료인 에두아르트 다비트는 그의 발언을 다음과 같이 재현했다.
"유럽 전쟁의 야만성으로 우리를 몰아넣으려는 자들에게 우리는 절망적인 용기로 스스로를 방어할 것입니다. 독일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 또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와 사회주의자들을 형제처럼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 우리의 적은 ... 다른 곳에 있습니다. 당신의 적도 거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입니다. 동지 여러분, 인류의 진보를 위해, 노동의 자유를 위해, 세계 평화를 위해 함께 투쟁합시다."[11]
2. 3. 제1차 세계 대전과 독일 11월 혁명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샤이데만은 전쟁을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이후 병합 없는 협상 평화를 옹호하는 쪽으로 입장을 선회했다. 그는 "프랑스 것은 프랑스에, 벨기에 것은 벨기에에, 독일 것은 독일로 남아야 한다"[12]는 발언으로 군국주의-민족주의 진영으로부터 반역죄로 비난받았다. 특히 독일 조국당 대표들은 샤이데만을 "목매달아" 죽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915년 1월, 샤이데만은 "조국"이라는 말을 듣는 것을 참을 수 없다는 독일 사회민주당(SPD) 내 일부 구성원들에게 분노를 표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1914년 12월 전시 채권 법안에 반대표를 던지며 당 기율을 위반했고, 후고 하세는 리프크네히트를 변호하며 SPD 내에서 많은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협상 평화 ("샤이데만 계획")라는 생각은 전쟁 지속 자금 지원 문제를 둘러싼 SPD 내 분열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17년 4월, 당의 반전 좌익은 독일 독립 사회민주당(USPD)을 결성했고, SPD는 독일 사회민주당(MSPD)으로 개명되었다. 샤이데만의 선거구인 졸링겐에서 SPD 조직은 USPD에 합류했고, 샤이데만에게 국회 의원직 사임을 요구했지만 샤이데만은 이를 거부했다. 1917년 10월, 뷔르츠부르크 당 대회에서 샤이데만은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와 함께 MSPD 공동 당 의장이 되었다.[2]
전쟁으로 인한 노동 계급의 사회적 고통이 심화되면서, SPD는 1917년 초부터 독일의 정치적 재조직에 대한 약속 이행을 압박했다. 샤이데만, 중도 좌파 독일 민주당의 콘라트 하우스만, 국민자유당의 구스타프 슈트레제만은 국회를 황제가 아닌 국회에 책임을 지는 각료들로 구성된 진정한 의회 정부를 구성하기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샤이데만은 부르주아 정당들을 수용하여, 필요하다면 국왕을 수반으로 하는 의회 제도를 구상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말했다.[13] 협상의 결과 중 하나는 1917년 7월 19일 국회 평화 결의안이 찬성 212표, 반대 126표로 통과된 것이다. 이 결의안은 병합 요구 없이 평화 협상을 촉구했다.
국내 급진화를 막기 위해 샤이데만,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오토 브라운은 1918년 1월 100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더 나은 생활 및 근무 조건, 전쟁 종식, 헌법 민주화를 요구한 1918년 1월 파업 지도부에 합류했다. 이들의 행동은 우익의 증오를 샀다.

샤이데만은 1918년 9월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제국 재상 정부를 몰아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샤이데만과 에베르트는 향후 계획에 대해 의견이 달랐다. 진보인민당 정치인들이 바덴의 막시밀리안 공을 제국 재상으로 논의에 참여시키자, 샤이데만은 사회 민주당이 정부 수반으로 공작을 내세울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1918년 10월 3일, 샤이데만은 사회 민주당의 정부 참여에 반대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결국 의회 그룹의 다수를 설득하여 MSPD가 폰 바덴 내각에 참여하도록 동의했다. SPD 구성원이 제국 정부에서 활동한 것은 처음이었지만, 1912년부터 이 당은 어떤 정당보다 국회에서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했다.
샤이데만과 의회 다수의 다른 주요 정치인들은 폰 바덴 내각에서 무임소 국가 장관이 되었다. 샤이데만은 더 큰 인기로 인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대신 그 직책에 선택되었다.[1] 각료들은 진정한 정치적 의사 결정자들이었고, 막스 폰 바덴은 주로 대외 대표였다. 정부의 일원으로서 샤이데만은 정치범 사면을 시작했다. 특히 그는 전쟁부와 군사 법원의 반대와 제국 재상의 이의에도 불구하고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석방을 직접 추진했다.[12]


전쟁에서의 패배가 임박하고 국내 혁명적 발전의 위협에 직면하여, 샤이데만은 1918년 11월 5일에 볼셰비즘을 외부의 적보다 더 큰 위험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 점에서 최고 육군 사령부와 의견을 같이 했다. 공산주의 선전과 역사학은 나중에 그날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관계를 단절한 책임을 샤이데만에게 돌리고 그를 "스파르타쿠스단에 대항하는 반소비에트 도발의 저자"라고 선언했다.
군대와는 달리, 샤이데만은 극좌에 대한 성공적인 싸움은 빌헬름 2세 황제가 퇴위해야만 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은 당분간 군주제냐 공화국이냐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미뤘다. 샤이데만은 11월 6일에 당의 노선을 다음과 같이 정했다. "이제 우리는 운동의 선두에 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독일 제국에 무정부 상태가 올 것이다." 울티마툼을 사용하여 MSPD 의원 그룹은 베를린에서 혁명적 행동이 발발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최대의 주인 프로이센 자유국의 의회화를 밀어붙일 수 있었다.
1918년 11월 9일, 막스 폰 바덴 재상은 일방적으로 빌헬름 2세 황제의 퇴위와 황태자 빌헬름의 왕위 계승권 포기를 발표했다. 샤이데만은 오전 10시에 비서직에서 사임했다. 정오 무렵,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국회의사당에 도착하여 통치 권한을 자신과 MSPD에게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폰 바덴은 사임했고, 위헌적인 행위로 에베르트를 그의 후임 재상 및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지명했다. 에베르트와 샤이데만이 점심 식사를 위해 국회의사당으로 갔을 때, 그들은 각자 다른 테이블에 앉았다. 엄청난 군중이 밖에 모여 연설을 요구했다. 에베르트는 그들에게 나가기를 거부했지만, 샤이데만은 일어나 군중을 향한 창가로 달려갔다. 샤이데만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누군가가 스파르타쿠스 지도자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독일을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선포할 의도라고 그에게 말했다. 그러자 샤이데만은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맺는 즉흥 연설을 했다.
> "낡고 썩은 군주제가 무너졌다. 새로운 시대 만세! 독일 공화국 만세!"[15]
샤이데만이 국회의사당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 격노한 에베르트가 그와 대면했다. 에베르트는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외쳤다. "당신은 공화국을 선포할 권리가 없어! 독일이 공화국이 될지 다른 형태가 될지는 제헌 의회가 결정할 일이야!" 그러나 샤이데만에게는 막스 폰 바덴의 선언만으로는 새로운 지도부의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분명했다. 시위하는 노동자와 군인들은 제국 체제와의 완전한 결별을 기대했다.
그 시점에서 빌헬름 2세는 퇴위하지 않았지만 곧 네덜란드로 도망가 11월 28일에 퇴위 문서에 서명했다. 1918년 11월 9일 현재 독일은 법적으로 여전히 군주제였다. 이는 샤이데만의 연설이 법적 권한이 없었음을 의미했다. 그날 늦게, 샤이데만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에베르트는 막시밀리안 공에게 제국 섭정으로 남아달라고 요청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에베르트와 샤이데만 모두 에베르트 재상 하의 기존 정부 구조를 유지하고, 안정을 회복하며, 제1차 세계 대전의 연합국과의 휴전이라는 시급한 문제를 처리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혁명은 MSPD가 극좌 스파르타쿠스단 및 USPD와 권력을 공유하도록 강요할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11월 9일 오후, 에베르트는 마지못해 USPD에게 미래 정부를 위한 세 명의 장관을 지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날 저녁, 공식적인 노동조합과 독립적인 혁명적 관리자의 추종자 수백 명이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즉석 토론을 벌였다. 그들은 다음 날 병사 및 노동자 평의회를 선출하여 인민 대표 평의회라고 불리는 임시 정부를 지명할 것을 요구했다. MSPD 지도부는 노동자 평의회에 선출된 대부분의 구성원이 자신들의 측에서 나오도록 하여 11월 10일에 구성된 평의회의 6명 중 3명을 제공할 수 있었다. 에베르트, 샤이데만 및 오토 란츠베르크. 에베르트는 다른 세 명의 구성원(하세, 빌헬름 디트만 및 에밀 바르트)을 제공한 후고 하세(USPD)와 공동 의장이 되었다. 샤이데만은 1918년 11월 10일부터 1919년 2월 13일까지 인민 대표 평의회에 참여했다.[2] 그는 주로 재정 정책을 담당했다.
2. 4. 바이마르 공화국 총리 (1919년)
1919년 1월 치러진 총선에서 사회민주당(SPD)은 승리하였고, 샤이데만은 1919년 2월 13일 바이마르 헌법 채택 전까지 정부 수반의 명칭인 국가 재상으로서 바이마르 연립 내각의 총리로 취임하였다.[16]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 구성된 바이마르 공화국은 극좌와 극우의 갈등으로 혼란에 빠졌다. 재임 초기부터 샤이데만의 지지율은 낮았고, 극좌 세력의 계속된 파업이 이어졌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은 쉽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샤이데만은 중앙당과 중도좌파 독일 민주당(DDP)으로 구성된 내각을 이끌었다. 이 조합은 바이마르 연립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역사가들은 연립 정부의 비교적 갈등 없는 활동을 샤이데만이 진정한 리더라기보다는 중재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한다.
내각이 직면한 가장 어려운 국내 문제는 1919년 초의 파업이었는데, 이는 주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하락한 실질 임금을 인상하는 데 관련된 문제였다. 특히 루르 지역에서는 파업과 함께 광산 국유화 요구가 제기되었다. 샤이데만 정부는 부분적으로 자유군단 부대를 배치하고 협상으로 대응했다. 1919년 2월, 전체 노동자의 4분의 3이 참여한 중부 독일의 총파업에 대응하여, 샤이데만은 국방군 (독일군)으로 할레를 점령했지만, 동시에 경제 민주화를 위한 조치를 발표했다.
샤이데만 정부는 1919년 3월 6일 국회에서 "군사 정의 규정을 크게 수정하고 자유화"하는 법을 통과시켰다.[17] 1919년 2월, 루르 지역의 대중 운동에 대한 양보로 노동부 장관 구스타프 바우어는 광산업에 노동자 평의회 설립을 명령하여 이사회의 노동자 평의회 대표를 위한 정치 투쟁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18일 동원 해제 사무소에서 발행한 규정으로 사무직 직원에 대한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고, 같은 달 정부 선언에서 노동자 위원회를 "경제의 공식 대표"로 인정했다.
외교 정책에서 베르사유 조약의 수락 여부에 대한 결정은 샤이데만이 재임하는 동안 결정되었다. 샤이데만은 조약에 서명하는 것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1919년 5월 12일 바이마르 국회가 베를린에서 처음 회의를 열었을 때 그는 "이 족쇄를 자신과 우리에게 가하는 손이 어떻게 시들지 않겠는가?"라고 말했다. 처음에는 국민 대다수뿐만 아니라 정치권에서도 거부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고, 샤이데만의 발언은 유명한 말이 되었다.[18] 그러나 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중앙당), 구스타프 노스케, 에두아르트 다비트와 같은 정치 현실주의자들은 거부하면 연합군이 독일 전체를 점령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여전히 존재하는 최고 육군 사령부도 조약 수락을 촉구했고, 국가 원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신의 의회 그룹 다수가 수락을 지지했다. 정부 정당 간에 합의에 도달할 수 없고, 내각에서 통일된 입장을 도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 여러 장관들이 조약 수락에 분명히 반대했다 - 샤이데만은 사임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19] 결국 샤이데만은 연합국의 압박으로 1919년 6월 20일 총리직을 사임했다. 후임자는 구스타프 바우어이다.
2. 5. 총리직 사임 이후
1922년 극우 테러 조직 '콘술'에 의해 청산 테러를 당했으나, 강한 바람 덕분에 생존하였다.[24] 이후에도 반복적인 살해 협박과 자택에 하켄크로이츠가 칠해지는 테러를 당해, 권총을 휴대하며 자구책을 강구해야 했다.[24]1920년부터 1925년까지 카셀 시장을 역임했다.[2] 시장 재임 중 극우 세력에게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혀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의 화신으로 여겨졌다.[24]
1926년 독일 국방군과 소련 붉은 군대 간의 비밀 협력을 폭로하여 제3차 마르크스 내각을 붕괴시켰다.[2]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 집권에 반대하였으며, 1933년 나치 집권 이후 덴마크 코펜하겐으로 망명하였다.[1]
2. 6. 망명과 죽음
1933년 나치 집권 후, 샤이데만은 '11월의 범죄자'로 비난받아 심각한 위험에 처했다. 1933년 2월 27일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며칠 후, 그는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도피했다.[25]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프랑스, 미국을 거쳐 1935년 덴마크에 도착했다. 1933년 8월 25일, 독일 제국은 그를 국외 추방자 명단에 올리고 독일 시민권을 박탈했다.[25]
건강 악화에도 불구하고, 샤이데만은 독일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하며 필명으로 덴마크 노동자 계급 언론에 글을 기고했다. 1939년 11월 29일 코펜하겐에서 사망했으며, 1953년 그의 유해는 고향 카셀로 이장되어 중앙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유산 및 평가
샤이데만은 독일 민주주의 발전과 사회 개혁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 속에서도 민주주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극우 및 극좌 세력의 위협에 맞서 타협과 중재를 통한 정치를 추구했다.[1]
그는 극우 세력에게 혐오의 대상이었으며, 민주주의 체제의 화신으로 여겨졌다. 재임 중에는 집에 하켄크로이츠 낙서 테러를 당하는 등 극우 세력의 괴롭힘을 받았고, 1922년 6월에는 딸과 공원을 산책하던 중 극우 테러 조직 콘술의 멤버에게 청산을 끼얹는 테러를 당해 중상을 입기도 했다.[1]
1926년에는 라팔로 조약을 근거로 독일 국방군이 소련군과 극비리에 무기 개발 등에서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회에서 폭로하여 제3차 마르크스 내각을 퇴진시키기도 했다.[1]
나치당 정권 성립 직후, 샤이데만은 프라하, 스위스, 프랑스, 미국을 거쳐 덴마크로 도피했으며, 1939년 코펜하겐에서 사망했다. 1953년, 코펜하겐 시 당국의 배려로 그의 유해는 고향 카셀로 돌아와 중앙 묘지에 안장되었다.[1]
샤이데만은 현대 독일 정치에서 민주주의와 사회 통합의 중요성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4. 저서
제목 | 연도 | 비고 |
---|---|---|
Es lebe der Frieden|평화를 영원히de | 1916년 | |
Der Zusammenbruch|붕괴de | 1921년 | |
Der Fürsten Habgier, Die Forderungen der Fürsten an das Notleidende Volk|군주의 탐욕, 고통받는 백성에 대한 군주의 요구de | 1926년 | |
Die Sozialdemokratie und das stehende Heer|사회 민주주의와 상비군de | 1910년 | |
Der Feind steht rechts!|적은 우익에 있다!de | 1919년 | |
Memoiren eines Sozialdemokraten|사회 민주주의자의 회고록de | 1928년 | 2권 |
Das historische Versagen der SPD. Schriften aus dem Exil|SPD의 역사적 실패. 망명 중의 글de | 2002년 | Frank R. Reitzle 편집 |
Kasseläner Jungen – Mundartliche Geschichderchen|카셀 청년 - 방언 이야기de | 1926년 | 필명 Henner Piffendeckel |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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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 Geschichte 1866–1918. Machtstaat vor der Demokrat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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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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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Bücherkr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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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ncker & Humbl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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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アンドレーア|アンドレーア(2006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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