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디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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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시디안은 히브리어 '하시드'에서 유래된 말로, '경건한 자'를 의미하며, 유대교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들은 마카베오 항쟁 시기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바리새인, 에세네파 등과 연관되었다는 설이 있다. 하시디안에 대한 역사적 해석은 다양하며, 이들이 유대교 내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논쟁이 존재한다.
히브리어 단어 ''하시드''(hasid)는 "경건한"을 의미한다. 따라서 다양한 개인과 집단에게 자연스러운 자기 동일화 용어였다. "하시딤"(Hasidim)이라는 이름은 "경건한 자"라는 의미로 시편의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1] 시편 79편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많은 ''하시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2] 시편 149편은 ''하시딤''을 "민족에게 복수하고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는" 전사로 묘사한다.[3] 이 시편들의 작곡 시기는 불확실하며, 일부 학자들은 이를 마카베오 시대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 당시의 ''하시딤''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고 이 시편들의 작곡 시기를 더 이전으로 추정한다.[4]
하시딤(히브리어: חסידים, 하시드, '경건한 자'라는 뜻)은 넓은 의미로는 유대교 율법의 내면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21] 이들은 정통파로부터 이단으로 여겨졌고, 지식 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었으나, 마르틴 부버에 의해 종교적 의미가 재평가되었다. 그러나 부버의 하시디즘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21]
2. 용어의 기원과 의미
이후 랍비 유대교의 탈무드 자료에서도 ''하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일반적으로 특정 집단이나 종파가 아닌 개별적인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 자료들은 일반적으로 마카베오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되었다.[5]
이 용어는 히브리어에서 유래했지만, 마카베오서는 그리스어 형태로만 남아 있었기 때문에 "아시데오이"(Asidaioi) 및 그 변형으로 나타난다. 이는 차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마카베오기 2서의 저자는 이 집단이 "아시데오이"라고 "불렸다"고 말하는데, 이는 그리스어가 아닌 단어를 단순히 발음하기 위해 도입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6]
이 말은 헤브라이어의 하시드, 즉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광의로는 유대 종교사에 나타난, 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 왔으나, M.부버가 다시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하시디즘과 선(禪)과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21]
2. 1. '하시드'의 어원과 성경에서의 용례
'하시드'는 히브리어로 "경건한"을 의미하는 하시드(hasid)에서 유래한 말이다.[1] 시편에서는 "하시딤"(Hasidim)이라는 "경건한 자"를 뜻하는 표현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1] 시편 79편에서는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많은 ''하시딤''이 살해당하는 모습이 묘사되며,[2] 시편 149편에서는 ''하시딤''을 "민족에게 복수하고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는" 전사로 묘사한다.[3] 이 시편들의 작곡 시기는 불확실하며, 일부 학자들은 마카베오 시대로 추정하여 당시의 ''하시딤''을 언급하는 것으로 보지만, 다른 학자들은 더 이전 시기로 추정한다.[4]
랍비 유대교의 탈무드 자료에서도 ''하시드''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지만, 특정 집단이 아닌 개별적인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했다. 이 자료들은 일반적으로 마카베오 시대보다 훨씬 후대에 작성되었다.[5]
마카베오서는 그리스어 형태로만 남아있어 "아시데오이"(Asidaioi) 및 그 변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차용어로 보인다. 마카베오기 2서의 저자는 이 집단이 "아시데오이"라고 "불렸다"고 언급하며, 이는 그리스어가 아닌 단어를 발음하기 위해 도입하는 일반적인 용어이다.[6]
넓은 의미에서 '하시드'는 유대 종교사에서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 이단시되고,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었으나, M.부버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하여 재평가했다. 그러나 부버의 하시디즘 이해는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으며, 하시디즘과 선(禪)과의 유사점은 본질적으로 다르다.[21]
2. 2. 랍비 문헌과 그리스어 번역
히브리어 단어 '하시드'(hasid)는 "경건한"을 의미하며, 시편의 여러 곳에서 "하시딤"(Hasidim), 즉 "경건한 자"라는 의미로 나타난다.[1] 시편 79편은 예루살렘 근처에서 이스라엘의 적들에게 많은 ''하시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으며,[2] 시편 149편은 ''하시딤''을 "민족에게 복수하고 백성에게 형벌을 가하는" 전사로 묘사한다.[3] 이 시편들의 작곡 시기는 불확실하며, 일부 학자들은 마카베오 시대의 ''하시딤''을 언급하는 것으로 간주하지만, 다른 학자들은 더 이전 시기로 추정한다.[4]
랍비 유대교의 탈무드에서는 ''하시드''라는 용어가 특정 집단이 아닌 개별적인 경건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5] 마카베오서에는 그리스어 형태인 "아시데오이"(Asidaioi) 및 그 변형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차용어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6]
3. 역사적 배경: 마카베오 항쟁과 하시딤
마카베오기 상 2장 42절은 하시딤을 "용감한 이스라엘 전사들"이자 "율법을 위해 기꺼이 헌신한 모든 이들"로 묘사하며, 이들이 마타티아스가 주도한 초기 마카베오 항쟁에 합류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서 싸웠다고 기록한다.[7] 이들은 할례와 유대 율법 등 유대교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자신을 방어하지 않고 살해당한 사람들의 사건은 마타티아스가 안식일에 전쟁을 허용하는 저항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다.[7]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이로 인해 하시딤 집단이 마타티아스의 반란에 합류하여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카베오기 상 7장에는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가 알키무스를 이스라엘의 대제사장으로 임명한 이후의 상황(기원전 161년경)이 기록되어 있다.[8] 알키무스는 유대교에 대한 가혹한 칙령을 철회하고 평정을 되찾으려 했지만, 마카베오 반군은 완전한 자치를 요구하며 그를 경멸했다.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일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지만, 그를 신뢰한 하시딤 60명을 붙잡아 죽였다고 기록하며, 그들에게는 진실이나 정의가 없다고 비판한다.[8]
일부 하시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임명한 대제사장 알키무스에게 속아 평화를 약속받았으나, 학살당했다.[8] 이 사건은 하시딤과 하스몬 왕조(마카베오 가문)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일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유인하는 데 কিছুটা হলেও 성공했지만("그들의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자들이 그[알키무스]에게 합류했다"), 셀레우코스 정부를 신뢰하라는 그의 주장은 기만과 거짓이었다고 주장한다.[8] 저자는 이러한 하시딤이 속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정부와의 협력은 배신과 죽음만을 가져올 것이고, 정당한 입장은 완전한 자치와 독립을 위해 하스몬 가문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구절은 또한 하시딤을 서기관(소페림)과 암묵적으로 연관시켜, 둘 다 알키무스와 협상 중이라고 말한다.[8]
마카베오기 하는 마카베오기 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알키무스는 유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데메트리오스 왕에게 설명하면서 유다 마카베오를 '아시다이'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카베오기 상 7장과는 대조되는데, 거기서는 그들이 유다의 추종자가 아니라 알키무스를 순진하게 환영한다.[6] 마카베오기 하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유다가 유다에서의 문제의 근원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독자에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이며, 악한 정보원으로서 문제아 유다가 그들의 지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진짜" 하시딤을 모함하는 것도 가능하다.[6] 마카베오기 하에서 이 용어가 특정 집단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대교인 일반을 의미하는 "충실한 자"라는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 선호된다.[6]
3. 1. 마카베오 항쟁 초기 하시딤의 역할
마카베오기 상 2장 42절에 따르면, 하시딤은 마타티아스가 주도한 초기 항쟁에 합류하여 셀레우코스 왕조에 맞섰다.[7] 이들은 할례와 유대 율법 등 유대교 전통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안식일에 공격을 받아 자신을 방어하는 것을 거부하고 살해당한 사람들의 사건을 통해, 마타티아스는 안식일에 전쟁을 허용하는 저항의 형태에 대한 지지를 결집했다.[7]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하시딤 집단이 마타티아스의 반란에 합류하여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마카베오기 상 7장에는 데메트리오스 1세 소테르에 의해 이스라엘의 새로운 대제사장으로 임명된 알키무스 이후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8] 알키무스는 유대교에 대한 가혹한 칙령을 철회하고 평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카베오 반군은 완전한 자치를 요구하며 그를 경멸했다.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일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유인했지만, 그를 신뢰한 하시딤 60명을 붙잡아 죽였다고 기록하며, 그들에게는 진실이나 정의가 없다고 비판한다.[8]
마카베오기 하에서 알키무스는 유다 마카베오를 ''아시다이''의 지도자라고 부르며, 이는 마카베오기 상 7장과 대조된다.[9] 마카베오기 하에서 이 용어가 특정 집단이 아니라 전통적인 유대교인 일반을 의미하는 "충실한 자"라는 해석이 학자들 사이에서 선호된다.[6]
3. 2. 알키무스와의 갈등과 분열
마카베오기 상 7장에 따르면, 일부 하시딤은 셀레우코스 왕조가 임명한 대제사장 알키무스에게 속아 평화를 약속받았으나, 학살당했다.[8] 이 사건은 하시딤과 하스몬 왕조(마카베오 가문) 사이의 불신을 심화시켰다.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일부 사람들을 그의 편으로 유인하는 데 কিছুটা হলেও 성공했지만("그들의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자들이 그[알키무스]에게 합류했다"), 셀레우코스 정부를 신뢰하라는 그의 주장은 기만과 거짓이었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이러한 하시딤이 속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정부와의 협력은 배신과 죽음만을 가져올 것이고, 정당한 입장은 완전한 자치와 독립을 위해 하스몬 가문과 협력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8] 이 구절은 또한 하시딤을 서기관(소페림)과 암묵적으로 연관시켜, 둘 다 알키무스와 협상 중이라고 말한다.[8]
마카베오기 하는 마카베오기 상과는 다른 방식으로 용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에서 알키무스는 유다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데메트리오스 왕에게 설명하면서 유다 마카베오를 ''아시다이''의 지도자라고 부른다. 이것은 마카베오기 상 7장과는 대조되는데, 거기서는 그들이 유다의 추종자가 아니라 알키무스를 순진하게 환영한다.[6] 마카베오기 하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유다가 유다에서의 문제의 근원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독자에게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이며, 악한 정보원으로서 문제아 유다가 그들의 지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진짜" 하시딤을 모함하는 것도 가능하다.[6]
3. 3. 마카베오기 하에서의 묘사
마카베오기 하에서 알키무스는 데메트리오스 1세에게 유다 마카베오를 '아시다이'의 지도자라고 칭하며, 이들을 선동 세력으로 묘사한다.[9] 이는 마카베오기 상에서 하시딤이 유다 마카베오의 추종자가 아니라 알키무스를 순진하게 환영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과 대조된다.[6] 이러한 차이는 하시딤 내부의 분열이나, 혹은 마카베오기 하에서 이 용어가 특정 집단이 아닌 일반적인 전통 유대인을 지칭하는 "충실한 자"를 의미하기 때문일 수 있다.[6]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알키무스가 일부 사람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지만("그들의 백성을 괴롭히는 모든 자들이 그[알키무스]에게 합류했다"),[8] 셀레우코스 정부를 신뢰하라는 그의 주장은 기만과 거짓이라고 보았다.[8] 알키무스는 하시딤에게 평화를 약속했지만, 그들 중 60명을 잡아 하루 만에 죽였다.[8] 마카베오기 상의 저자는 하시딤이 속고 있음을 분명히 하며, 정부와의 협력은 배신과 죽음을 가져올 뿐이고, 정당한 입장은 하스몬 왕조와 협력하여 완전한 자치와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8]
마카베오기 하에 따르면, 알키무스는 유다가 유다에서 문제의 근원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악한 정보원으로서 문제아 유다가 그들의 지도자라고 주장함으로써 "진짜" 하시딤을 모함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6]
4. 하시딤의 성격과 역사 해석 논쟁
이 말은 헤브라이어의 하시드, 즉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광의로는 유대 종교사에 나타난, 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21]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 왔으나, 마르틴 부버가 다시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재평가되고 있다.[21] 그러나 그의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21]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하시디즘과 선(禪)과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21]
대략적으로 말하면, 이러한 하시딤에 대한 언급은 그들이 누구였는지에 따라 세 가지 주요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 용어는 히브리어 '하시드'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건한' 자를 의미한다.[21] 넓은 의미로는 유대 종교사에서 율법의 내면성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지칭한다.[21]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고 지식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무시되었으나, 마르틴 부버에 의해 재평가되었다.[21] 그러나 부버의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21]
일부 학자들은 하시디안이 일관된 집단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10] 이들은 하시디안을 마카베오기에 등장하는, 마타티아스에게 합류하거나 알키무스와 협상한 이스라엘의 "충실한 자들"로 본다.[10] 이들은 다른 전통주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10]
다니엘 R. 슈워츠는 《마카베오기》 2장 42절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사이에 중요한 본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11] 알렉산드리아 코덱스,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 시리아어 번역본은 "하시디안"(아시다이온/Ἀσιδαῖωνgrc)으로 읽지만, 시나이 사본 등은 "유대인"(유다이온/Ιουδαίωνgrc)으로 읽는다.[11] 슈워츠는 "유대인" 판독본을 선호하며, 이는 히브리어 ''하시딤''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이거나 필사자의 간섭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11]
하시딤은 헤브라이어 '하시드'에서 유래한 말로,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21] 다른 학자들은 하시딤을 유다 마카베우스와 하스몬 왕조와 긴밀히 협력한, 종교적 열정을 가진 전사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유다와 초기에 동맹을 맺고 반란 기간 동안에도 그렇게 유지된 별개의 집단이었다. 마카베오인들은 베스-제카리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161년에는 바키데스의 작전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시디안은 유다의 진정한 동맹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알키무스를 온건파로 생각하고 양보와 구제를 협상하기를 희망했고, 정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타난 사람들을 처형했다. 유다는 개인적으로 협상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약한 입장에서 협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고, 더 장기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전에 전장에서 다시 승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다.
하시딤을 하스몬 가문과는 다른, 종교적 자유를 우선시한 온건파로 보는 견해도도 있다.[21]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화 정책에 호응하여 항쟁에서 이탈했다고 해석된다. 하시디안은 매우 종교적이었지만, 비교적 "온건파"였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관습을 금지한 칙령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박해와 대제사장 메넬라오스의 부패에 대한 분노 때문에 유다와 초기에 합류했다. 그러나 163~162 BCE에 이러한 칙령이 철회된 후에는 셀레우코스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더 이상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21] 미움을 받던 대제사장 메넬라오스는 162 BCE경에 처형되었다. 이것은 알키무스가 어떻게 일부 하시디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유대교가 받아들여졌지만 셀레우코스 정부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았던 이전 상태로의 복귀와 평화를 제공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21]
일부 역사가는 현존하는 사료의 부족과 편향성을 지적하며, 하시딤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주장한다.[21] 존 J. 콜린스는 다른 학자들이 했던 가설 설정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며, 1977년에 하시딤이 "최근의 학문에서 극도로 입증되지 않은 실체에서 반란 당시 마카베오 가문에 대한 유대교의 훌륭한 대안으로 성장했다. 증거에는 그에 상응하는 성장이 없었다."라고 썼다.
4. 1. 비조직적 신앙인
이 용어는 히브리어 '하시드'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건한' 자를 의미한다.[21] 넓은 의미로는 유대 종교사에서 율법의 내면성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지칭한다.[21]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 이단으로 간주되고 지식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무시되었으나, 마르틴 부버에 의해 재평가되었다.[21] 그러나 부버의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21]일부 학자들은 하시디안이 일관된 집단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10] 이들은 하시디안을 마카베오기에 등장하는, 마타티아스에게 합류하거나 알키무스와 협상한 이스라엘의 "충실한 자들"로 본다.[10] 이들은 다른 전통주의 유대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여겨진다.[10]
다니엘 R. 슈워츠는 《마카베오기》 2장 42절의 가장 오래된 사본들 사이에 중요한 본문 차이가 있음을 지적한다.[11] 알렉산드리아 코덱스, 불가타 라틴어 번역본, 시리아어 번역본은 "하시디안"(아시다이온/Ἀσιδαῖωνgrc)으로 읽지만, 시나이 사본 등은 "유대인"(유다이온/Ιουδαίωνgrc)으로 읽는다.[11] 슈워츠는 "유대인" 판독본을 선호하며, 이는 히브리어 ''하시딤''을 그리스어로 음역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오류이거나 필사자의 간섭일 수 있다고 추정한다.[11]
4. 2. 열성적인 전사 집단
하시딤은 헤브라이어 '하시드'에서 유래한 말로, 율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킨다.[21] 다른 학자들은 하시딤을 유다 마카베우스와 하스몬 왕조와 긴밀히 협력한, 종교적 열정을 가진 전사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이들은 유다와 초기에 동맹을 맺고 반란 기간 동안에도 그렇게 유지된 별개의 집단이었다. 마카베오인들은 베스-제카리아 전투에서 패배하고, 기원전 161년에는 바키데스의 작전에 간섭하는 것을 거부했다. 하시디안은 유다의 진정한 동맹이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알키무스를 온건파로 생각하고 양보와 구제를 협상하기를 희망했고, 정부는 그 기회를 이용하여 나타난 사람들을 처형했다. 유다는 개인적으로 협상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약한 입장에서 협상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판단했고, 더 장기적인 평화를 확보하기 전에 전장에서 다시 승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보았다.4. 3. 유대교 온건파
하시딤을 하스몬 가문과는 다른, 종교적 자유를 우선시한 온건파로 보는 견해도 있다.[21] 이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의 유화 정책에 호응하여 항쟁에서 이탈했다고 해석된다. 하시디안은 매우 종교적이었지만, 비교적 "온건파"였다. 그들의 주요 관심사는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 관습을 금지한 칙령을 철회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대교 박해와 대제사장 메넬라오스의 부패에 대한 분노 때문에 유다와 초기에 합류했다. 그러나 163~162 BCE에 이러한 칙령이 철회된 후에는 셀레우코스 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반란을 더 이상 필요하다고 여기지 않았다.[21] 미움을 받던 대제사장 메넬라오스는 162 BCE경에 처형되었다. 이것은 알키무스가 어떻게 일부 하시디안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는지를 설명해 준다. 즉, 유대교가 받아들여졌지만 셀레우코스 정부의 권위는 도전받지 않았던 이전 상태로의 복귀와 평화를 제공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었다.[21]4. 4. 역사 기록의 문제점
일부 역사가는 현존하는 사료의 부족과 편향성을 지적하며, 하시딤에 대한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주장한다.[21] 존 J. 콜린스는 다른 학자들이 했던 가설 설정에 대해 경멸적인 태도를 보이며, 1977년에 하시딤이 "최근의 학문에서 극도로 입증되지 않은 실체에서 반란 당시 마카베오 가문에 대한 유대교의 훌륭한 대안으로 성장했다. 증거에는 그에 상응하는 성장이 없었다."라고 썼다.5. 하시딤의 후대 영향
하시디안의 기원과 교리는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들의 이후 영향력 또한 불분명하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원전 100년경 하시모나이 정권 시대에 활동했던 세 집단을 묘사한다. 당시 주류 세력으로 하시모나이 정권에 회의적이었던 바리새인, 하시모나이 정권을 지지하며 상류층에 영향력이 있었던 사두개인, 그리고 노골적으로 하시모나이 정권에 반대했던 에세네파가 그들이다.[12] 하인리히 그레츠는 마카베오의 승리 이후 하시디안이 유다 마카베오에 불만을 품고 은둔했으며, 결국 에세네파가 되었다고 추정했다.[12] 이 이론은 에세네파를 지칭하는 그리스어 용어인 'Essēnoi' 또는 'Essaioi' (Ἐσσηνοά, Ἐσσαῖοι)와 히브리어 "Ḥasidim"에 해당하는 동 아람어/시리아어 하사인 / 하사야/Ḥăsayin / Ḥăsayyâsyc 사이의 언어적 유사성에 의해 뒷받침되지만, 이러한 유사성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3][17] 에밀 쉬러와 존 캠펜과 같은 다른 학자들은 바리새인이 하시디안에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14][15][16]
이 운동은 정통파로부터는 이단시되고, 또 지식계층으로부터는 미신적이라고 경시되어 왔으나, M.부버가 다시 깊은 종교적 의미를 발견함으로써 재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하시디즘에 대한 이해는 지나치게 주관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하시디즘과 선(禪)과의 사이에 유사점이 있다는 것인데, 본질적으로는 전혀 다른 것이다.[21]
5. 1. 바리새파, 에세네파와의 연관성
일부 학자들은 하시딤이 후대 바리새인 또는 에세네파의 기원이 되었다고 주장한다.[14][15][16] 역사가 요세푸스는 기원전 100년경 하시모나이 정권 시대에 바리새인, 사두개인, 에세네파 세 집단이 활동했다고 기록했다.[12] 하인리히 그레츠는 마카베오의 승리 이후 하시디안이 유다 마카베오에 불만을 품고 은둔하여 결국 에세네파가 되었다고 추정했다.[12]특히 에세네파와의 연관성은 하사인 / 하사야/Ḥăsayin / Ḥăsayyâsyc라는 동 아람어/시리아어 단어와 'Essēnoi' 또는 'Essaioi' (Ἐσσηνοά, Ἐσσαῖοι)라는 그리스어 용어의 언어적 유사성을 근거로 제시되지만,[13][17] 이러한 유사성은 다른 학자들에 의해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13][17] 에밀 쉬러와 존 캠펜과 같은 학자들은 바리새인이 하시디안에서 발전했다고 생각한다.
6. 다니엘서와의 관계
다니엘서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67~165년경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기간 중 어느 시점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17] 하스몬 가문의 지도력 아래 직접적인 군사 행동을 옹호하는 《마카베오 1서》의 좀 더 세속적인 입장과 비교해 볼 때, 다니엘은 위기에 대한 좀 더 영적인, 그리고 묵시론적인 접근 방식을 보이는 듯하며, 신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처벌하기 위해 직접 개입할 것이라고 제안한다.[17] 그것은 좀 더 소극적인 저항을 제안하고 순교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은총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교에서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7] 예를 들어, 이 책에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진수성찬을 먹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대신 채소 식단을 먹고 거기에서 더욱 건강해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17] 이는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카베오 시대에 유대교의 식단 규율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17]
한 가지 일반적인 추측은 다니엘서의 저자가 하시딤의 일원이었거나, 적어도 하시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는 학자로는 마틴 헹겔, 빅터 체리코버, 제임스 앨런 몽고메리가 있다.[17][18]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관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만약 하시딤이 "강력한 전사"였다는 《마카베오 1서》 2장의 구절이 정확하다면, 그것은 다니엘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9]
6. 1. 다니엘서의 저자와 하시딤
다니엘서는 일반적으로 기원전 167~165년경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 기간 중 어느 시점에 쓰여진 것으로 여겨진다.[17] 다니엘은 위기에 대한 좀 더 영적인, 그리고 묵시론적인 접근 방식을 보이는 듯하며, 신이 셀레우코스 왕조를 처벌하기 위해 직접 개입할 것이라고 제안한다.[17] 그것은 좀 더 소극적인 저항을 제안하고 순교를 칭찬하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신실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의 은총을 유지하기 위해 유대교에서 '순수'함을 유지하는 것이었다.[17] 예를 들어, 이 책에는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이 느부갓네살 왕의 진수성찬을 먹으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대신 채소 식단을 먹고 거기에서 더욱 건강해지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17] 이는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마카베오 시대에 유대교의 식단 규율을 지키도록 장려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17]한 가지 일반적인 추측은 다니엘서의 저자가 하시딤의 일원이었거나, 적어도 하시딤의 사고방식을 잘 보여주는 예시였다는 것이다. 이를 옹호하는 학자로는 마틴 헹겔, 빅터 체리코버, 제임스 앨런 몽고메리가 있다.[17][18] 다른 사람들은 이와 같은 연관성에 대해 회의적이다. 만약 하시딤이 "강력한 전사"였다는 《마카베오 1서》 2장의 구절이 정확하다면, 그것은 다니엘의 이념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19]
7. 참고 문헌
- 야코프 함부르거/Jacob Hamburgerde, R. B. T. ii. 132;
- 에밀 쉬러, ''Geschichte des jüdischen Volkes im Zeitalter Jesu Christi (1890)'' 190, 203, 217; ii. 404;
- 율리우스 벨하우젠, ''Israelitische und Jüdische Geschichte'' pp. 240, 277;
- Isaak Markus Jost, ''Geschichte des Judenthums und Seiner Sekten'', i. 199;
- Levi Herzfeld, '' Geschichte des Volkes Israel'', ii. 357, 384, 395;
- ''Ersch-Gruber'', Encyc. section iii., part 32, p. 18;
- Heinrich Grätz, Gesch. ii. 240-374; iii. 2, 7, 83, 99;
- 모리츠 프리들랜더/Moritz Friedländerde, ''Geschichte Der Jüdischen Apologetik Als Vorgeschichte Des Christenthums'', pp. 437 et seq.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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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논문
"The Identity of the Hasideans of 1 and 2 Maccabees: A Re-examination of the Topic with a Focus on the History of Schola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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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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