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마카베오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마카베오는 하스몬 왕조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형제들을 포함한다. 이름의 어원은 아람어 '망치'에서 유래되었거나, 히브리어 성경 구절의 두문자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기원전 2세기 유대 지역은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아,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를 탄압하고 헬레니즘 문화를 강요했다. 이에 모딘 출신 제사장 마타티아스는 반란을 일으켰고,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게릴라전을 통해 승리하여 성전을 탈환하고 하누카 축제를 시작했다. 마카베오의 반란은 하스몬 왕조의 성립으로 이어졌으며, 이들의 이야기는 마카베오기 상, 하에 기록되어 있다. 기독교에서는 마카베오 순교자들을 성인으로 숭배하며, 최근 유적 발굴을 통해 고대 유대교에서도 마카베오를 숭배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셀레우코스 제국 사람 - 포세이도니오스
    포세이도니오스는 다재다능한 고대 그리스 스토아 학파 철학자로, 과학적 관찰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우주와 인간의 삶을 탐구하며 지리학, 천문학, 역사 분야에 기여했고, 로도스 학파를 이루어 폼페이우스, 키케로 등 유명한 로마인들을 제자로 배출했다.
  • 셀레우코스 제국 사람 - 메가스테네스
    메가스테네스는 헬레니즘 시대 이오니아 출신 그리스인으로, 셀레우코스 1세 니카토르의 대사로서 마우리아 왕조에 파견되어 《인디카》를 저술했으며, 이 책은 현재 소실되어 후대 인용을 통해서만 내용을 알 수 있고 고대 인도 사회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지만 신뢰성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 이스라엘의 역사 - 이스라엘 왕국
    이스라엘 왕국은 후기 청동기 시대 가나안 지역에서 형성되어 철기 시대 I기에 독자적인 정체성을 확립하고 성장했으나, 솔로몬 사후 남북으로 분열되어 각각 아시리아와 신바빌로니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 고대 국가이다.
  • 이스라엘의 역사 - 시온주의
    시온주의는 예루살렘의 시온산을 의미하며, 19세기 후반 동유럽 유대인들의 국가 재건 운동을 가리키며, 유대인의 이스라엘 귀환을 지지하는 운동이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라우토카
    라우토카는 피지 비치레부섬 서부에 위치한 피지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자 서부 지방의 행정 중심지로, 사탕수수 산업이 발달하여 "설탕 도시"로 알려져 있으며, 인도에서 온 계약 노동자들의 거주와 미 해군 기지 건설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피지 산업 생산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는 주요 기관들이 위치해 있다.
  • 한국어 위키백과의 링크가 위키데이터와 같은 위키공용분류 - 코코넛
    코코넛은 코코넛 야자나무의 열매로 식용 및 유지로 사용되며, 조리되지 않은 과육은 100g당 354kcal의 열량을 내는 다양한 영양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코코넛 파우더의 식이섬유는 대부분 불용성 식이섬유인 셀룰로오스이며, 태국 일부 지역에서는 코코넛 수확에 훈련된 원숭이를 이용하는 동물 학대 문제가 있다.
마카베오

2. 어원

마카베오[4]라는 이름은 종종 하스몬 왕조 전체를 뜻하는 말로 사용되지만, 엄밀히 말하면 마카베오 가문은 유다 마카베오와 그의 네 형제를 가리킨다. 마카베오라는 이름은 유다의 별명이었으며,[5] 그의 직계 후손이 아닌 후대 사람들은 마카베오 가문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 이름의 기원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유다가 전투에서 보여준 용맹함 때문에 아람어로 "망치"를 뜻하는 ''maqqəḇa''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6]

전통적인 유대교에서는 마카베오(מכבים|Makkabihe)가 토라 구절인 "''''M'''i '''k'''amocha '''ba''''elim '''Y'''HWH"'", 즉 "하늘의 권세 중에서 주와 같은 분이 누구시뇨, 오 하나님이여!"[7][8]라는 외침의 두문자어이자, ''"'''M'''atityahu ha'''K'''ohen '''b'''en '''Y'''ochanan"''(요한의 아들, 사제 마티아스)의 두문자어이기도 하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언급되는 토라 구절인 탈출기 15장 11절, ''바다에서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노래''[7]는 자연의 힘, 하늘의 힘, 전쟁 및 정부 권력과 같이 세속적인 개념을 가진 ''elim''을 언급한다. 학자이자 시인인 아론 카민카는 마카베오라는 이름이 다윗 왕의 군대에 있던 용맹한 전사 마크바나이에서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한다.[9]

3. 역사적 배경

2세기경, 유대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형성된 왕국들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이집트)과 셀레우코스 제국(시리아) 사이에 있었다. 유대는 처음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파니움 전투 이후 기원전 197년경 셀레우코스 왕국에 넘어갔다. 당시 유대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었는데, 일부 유대인들은 그리스식 생활 방식을 따르려 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가 되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유대인 사회는 전통을 지키려는 이들과 헬레니즘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이들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특히 대제사장 직을 두고 벌어진 권력 다툼은 이러한 갈등을 심화시켰다. 안티오코스 4세는 유대교 전통을 억압하는 정책을 펼쳤고, 이는 유대인들의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3. 1. 헬레니즘 정책과 유대 사회의 갈등

2세기경, 유대알렉산드로스 대왕 사후 형성된 왕국들프톨레마이오스 왕국셀레우코스 제국 사이에 위치했다. 유대는 파니움 전투 이후 기원전 197년경 셀레우코스 왕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시작한 헬레니즘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특히 토비아드 가문을 포함한 도시 상류층 유대인들 중 일부는 유대교 율법을 버리고 그리스식 생활 방식을 채택하려 했다. 역사가 빅토르 체리코버에 따르면, 이들의 주된 동기는 경제적, 정치적 이유였다.[21] 헬레니즘 유대인들예루살렘에 체육관을 건설하고, 국제 그리스 경기에 참가했으며, "할례의 흔적을 제거하고 성스러운 계약을 거부"했다.[10]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75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 오니아스 3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직을 맡고 있었다. 안티오코스에게 대제사장은 단순한 지역 총독이었지만, 정통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직을 신성하게 임명된 것으로 여겼다.[11] 야손은 오니아스의 형제였는데, 안티오코스에게 뇌물을 주어 오니아스 대신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게 했다. 야손은 전통적인 신정 정치를 폐지하고 예루살렘을 그리스 ''폴리스''로 전환하는 허가를 받았다.[21][12] 그 후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뇌물을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야손은 메넬라오스를 몰아내고 다시 대제사장이 되었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는 성전을 약탈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13] 이 시점부터 안티오코스는 켈레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셀레우코스 속주에서 열성적인 헬레니즘 정책을 추구했다.[14]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안티오코스가 유대인들에게 국가의 율법을 폐지하고, 아이들을 할례 받지 않게 하고, 제단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치도록 강요했다고 기록했다.

마카베오기 1서의 저자는 마카베오 혁명을 셀레우코스 왕과 그를 지지하는 유대인들에 맞선 경건한 유대인들의 봉기로 간주한다. 마카베오기 2서의 저자는 이 갈등을 "유대교"와 "헬레니즘" 사이의 투쟁으로 제시한다.[15] 현대 학자들은 안티오코스 왕이 유대 시골의 전통주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의 헬레니즘 유대인들 사이의 내전에 반응했다고 주장한다.[16][17] 조셉 P. 슐츠는 "마카베오 혁명을 외국 압제에 대한 봉기라기보다는 유대 진영 내의 정통파와 개혁파 간의 내전으로 간주한다"고 말한다.[19] 그러나 존 J. 콜린스는 혁명이 그리스 관습의 도입이 아니라, 토라를 준수하고 자녀에게 할례를 행하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박해로 촉발되었다고 썼다.[18]

대제사장 직을 둘러싼 갈등에서 오니아스와 같은 히브리어/아람어 이름을 가진 전통주의자들이 야손과 메넬라오스와 같은 그리스 이름을 가진 헬레니즘주의자들과 다퉜다.[20] 일부 학자들은 갈등에서 사회적, 경제적 요인을 지적한다.[21][22] 내전으로 시작된 이 갈등은 시리아의 헬레니즘 왕국이 전통주의자들에 맞서 헬레니즘 유대인들의 편을 들면서 침략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23] 안티오코스는 전통주의자들의 관습을 금지했는데, 이는 일반적인 셀레우코스 관행에서 벗어나 한 민족의 종교를 금지하는 것이었다.[21]

마카베오기 1서에 따르면, 안티오코스는 많은 전통적인 유대교 및 사마리아 종교 관습을 금지했다.[14] 그는 토라 소지를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로 만들고 발견할 수 있는 사본을 불태웠으며,[25][26] 안식일과 축제를 금지했고, 할례를 금지했고, 아기를 할례시킨 어머니들은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으며,[27] 전통적인 유대교 의식 제사가 금지되었다. 올림푸스의 제우스의 우상이 성전 제단에 놓였고, 이스라엘인들은 그리스 신들에게 제단을 세우고 그 위에 "부정한" 동물을 제물로 바쳤다고 한다.[28]

3. 2.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갈등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기원전 175년에 셀레우코스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을 때, 오니아스 3세는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직을 맡고 있었다. 안티오코스에게 대제사장은 단순한 지역 총독이었지만, 정통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직을 신성하게 임명된 것으로 여겼다.[11]

야손은 오니아스의 형제였는데, 안티오코스에게 뇌물을 주어 오니아스 대신 대제사장으로 임명되게 했다. 야손은 전통적인 신정 정치를 폐지하고 예루살렘을 그리스 ''폴리스''인 안티오크로 전환하는 허가를 받았다.[21][12] 그 후 메넬라오스는 안티오코스에게 뇌물을 주고 야손 대신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넬라오스는 오니아스를 암살했다.

이후 야손은 메넬라오스를 몰아내고 다시 대제사장이 되었다. 기원전 168년, 안티오코스는 성전을 약탈하고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여자와 아이들을 포로로 끌고 갔다."[13]

대제사장 직을 둘러싼 갈등에서 오니아스와 같은 히브리어/아람어 이름을 가진 전통주의자들이 야손과 메넬라오스와 같은 그리스 이름을 가진 헬레니즘주의자들과 다퉜다.[20]

4. 마카베오 반란

마카베오 1서》에 따르면,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린 후, 모딘 출신의 유대교 제사장인 마타티아스는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그가 그리스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마타티아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려 했던 헬레니즘 유대인을 죽였다. 그와 그의 다섯 아들은 유다 광야로 도망쳤다. 기원전 166년경 마타티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유대 반군을 이끌었다.[15]

마카베오 군대는 게릴라전 전술을 사용하여 셀레우코스 군대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승리 후, 마카베오인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전통적인 유대교 예배를 재건하고 요나단 마카베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대규모 셀레우코스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으로 인해 시리아로 돌아갔다. 셀레우코스 내부 문제에 몰두한 사령관 리시아스는 종교적 자유를 회복하는 정치적 타협에 동의했다.

유대교 축제인 하누카는 유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에게 승리한 후 성전을 재헌당하는 것을 기념한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승리한 마카베오인들은 봉인되어 오염되지 않은 작은 항아리의 기름만 찾을 수 있었고, 비록 그 기름은 성전 메노라를 하루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양밖에 없었지만, 기적적으로 8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동안 더 많은 기름을 구할 수 있었다.[31]

4. 1. 유다 마카베오의 활약과 성전 탈환

안티오코스 4세가 유대교의 종교적 관습을 금지하는 포고령을 내리자, 모딘 출신의 유대교 제사장인 마타티아스는 하스몬 왕조를 세우고 셀레우코스 제국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는 그가 그리스 신에게 경배하는 것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마타티아스는 자신을 대신하여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려 했던 헬레니즘 유대인을 죽였다. 그와 그의 다섯 아들은 유다 광야로 도망쳤다. 기원전 166년경 마타티아스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유대 반군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통해 셀레우코스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반란은 처음에는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을 겨냥한 것이었고, 당시 헬레니즘화된 유대인들이 많았다. 마카베오인들은 마을의 이교 제단을 파괴하고, 남자아이들에게 할례를 행하고, 유대인들에게 불법 행위를 강요했다.[15] "마카베오"라는 이름은 "망치"를 의미하는 아람어 단어에서 유래되었다는 설명이 있는데, 그들이 "적에게 망치질을 가했기" 때문이다.[30]

유다 마카베오 시대의 유대


이 반란에는 많은 전투가 포함되었고, 마카베오 군대는 게릴라 전술을 사용하여 셀레우코스 군대 사이에서 악명을 떨쳤다. 승리 후, 마카베오인들은 개선하여 예루살렘에 입성하여 성전을 정결하게 하고, 전통적인 유대교 예배를 재건하고 요나단 마카베오를 대제사장으로 임명했다. 대규모 셀레우코스 군대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으로 인해 시리아로 돌아갔다. 셀레우코스 내부 문제에 몰두한 사령관 리시아스는 종교적 자유를 회복하는 정치적 타협에 동의했다.

유대교 축제인 하누카는 유다 마카베오가 셀레우코스에게 승리한 후 성전을 재헌당하는 것을 기념한다. 랍비 전통에 따르면, 승리한 마카베오인들은 봉인되어 오염되지 않은 작은 항아리의 기름만 찾을 수 있었고, 비록 그 기름은 성전 메노라를 하루 동안 유지할 수 있는 양밖에 없었지만, 기적적으로 8일 동안 지속되었으며, 그동안 더 많은 기름을 구할 수 있었다.[31]

4. 2. 반란의 지속과 하스몬 왕조의 성립

성전 재헌납 이후, 마카베오 지지자들은 계속 싸울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었다. 마타티아스의 지도 아래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이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종교적 자유를 위한 전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카베오 가문이 성공을 거두면서, 많은 이들이 반란을 계속하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을 정복하거나 그들을 개종시키고 싶어했다. 이러한 정책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와 같은 후기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들 아래에서 더욱 심화되었다.[32] 전쟁의 지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유다 마카베오가 이끌었다.

기원전 160년 전투에서 유다 마카베오가 죽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이 군 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이미 대제사장이었다. 요나단은 다양한 외국의 국가들과 조약을 맺어 단순히 종교적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과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기원전 142년,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왕좌를 찬탈하려던 디오도투스 트리폰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타티아스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시몬 마카베오가 뒤를 이었다. 시몬은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데메트리우스는 마카베오에게 공물을 면제해 주었다. 시몬은 이방인들이 '강제로 제거'된[33] 욥바 항구를 정복했고, 게제르 요새를 점령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크라에서 수비대를 몰아냈다. 기원전 140년, 그는 사제, 지도자, 장로들의 회의에서 대제사장, 군 사령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들의 법령은 하스몬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원로원은 하스몬 왕국과의 동맹을 갱신했고, 동지중해에 있는 동맹국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34] 마카베오 가문이 자치를 획득했지만, 그 지역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의 속주로 남아 있었고, 시몬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에게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시몬이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자, 안티오코스는 무력으로 그들을 점령했다.

시몬은 기원전 134년 그의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과 왕의 자리를 물려받았다. 안티오코스는 유대 전 지역을 정복했지만 성전을 공격하거나 유대교의 관습에 간섭하는 것을 삼갔다. 유대는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가 사망하면서 셀레우코스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15] 독립적인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기원전 63년까지 지속되었고,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조의 내전에 개입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스몬 왕조는 기원전 37년에 이두메아 출신인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종말을 맞이했고,[11]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지정되면서,[15][35] 하스몬 왕국을 사실상 헤롯 왕국으로 변모시켰다—로마의 속국.

5. 하스몬 왕조

셀레우코스 왕조에 대항한 반란이 성공한 후, 마카베오 지지자들은 계속 싸울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었다. 마타티아스가 반란을 시작했을 때는 종교적 자유를 위한 전쟁으로 여겨졌으나, 전쟁이 지속되면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었다.[32] 유다 마카베오는 전쟁을 지속하자는 입장이었다.

기원전 160년 유다 마카베오가 전투에서 사망하자, 그의 동생 요나단이 대제사장이자 군 사령관이 되었다. 요나단은 여러 국가와 조약을 맺어 종교적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기원전 142년, 요나단은 디오도투스 트리폰에게 암살되었고, 시몬이 뒤를 이었다. 시몬은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를 지원하여 공물을 면제받았다. 욥바 항구를 정복하고 게제르 요새를 점령했으며, 예루살렘의 아크라 수비대를 몰아냈다. 기원전 140년, 시몬은 대제사장, 군 사령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받았고, 이는 하스몬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 원로원은 하스몬 왕국과 동맹을 갱신했다.[34] 그러나 하스몬 왕국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의 속주였고, 시몬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에게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시몬이 영토 반환을 거부하자, 안티오코스는 무력으로 영토를 점령했다.

기원전 134년 시몬은 사위에게 살해되었고,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과 왕위를 계승했다. 안티오코스는 유대 전 지역을 정복했지만, 성전 공격이나 유대교 관습 간섭은 하지 않았다.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가 사망하면서 유대는 셀레우코스 통치에서 해방되었다.[15] 하스몬 왕조는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가 개입하여 로마의 속국이 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37년 헤롯 대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하스몬 왕조는 종말을 맞이했고,[11] 헤롯 왕국으로 변모했다.[15][35]

5. 1.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들

성전 재헌납 이후, 마카베오 지지자들은 계속 투쟁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로 분열되었다. 마타티아스의 지도 아래 반란이 시작되었을 때, 이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압제에 종지부를 찍기 위한 종교적 자유를 위한 전쟁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마카베오가 성공을 거두자, 많은 이들이 반란을 계속하여 유대인들이 거주하는 다른 지역을 정복하거나 그들을 개종시키고 싶어했다. 이러한 정책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의 분열을 심화시켰으며, 알렉산더 얀나이우스와 같은 후기 하스몬 왕조의 통치자들 아래에서 더욱 심화되었다.[32] 전쟁의 지속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유다 마카베오가 이끌었다.

기원전 160년 전투에서 유다 마카베오가 죽자, 그의 동생인 요나단이 군 사령관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그는 이미 대제사장이었다. 요나단은 다양한 외국의 국가들과 조약을 맺어 단순히 종교적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과 더 큰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 사이의 불화를 더욱 심화시켰다.

기원전 142년, 요나단은 셀레우코스 왕좌를 찬탈하려던 디오도투스 트리폰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타티아스의 마지막 남은 아들인 시몬이 뒤를 이었다. 시몬은 셀레우코스 왕 데메트리우스 2세 니카토르를 지원했고, 그 대가로 데메트리우스는 마카베오에게 공물을 면제해 주었다. 시몬은 이방인들이 '강제로 제거'된[33] 욥바 항구를 정복했고, 게제르 요새를 점령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아크라에서 수비대를 몰아냈다. 기원전 140년, 그는 사제, 지도자, 장로들의 회의에서 대제사장, 군 사령관, 이스라엘의 통치자로 인정받았다. 그들의 법령은 하스몬 왕국의 기초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원로원은 하스몬 왕국과의 동맹을 갱신했고, 동지중해에 있는 동맹국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명령했다.[34] 마카베오가 자치를 획득했지만, 그 지역은 여전히 셀레우코스 제국의 속주로 남아 있었고, 시몬은 안티오코스 7세 시데테스에게 군대를 제공해야 했다. 시몬이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는 것을 거부하자, 안티오코스는 무력으로 그들을 점령했다.

시몬은 기원전 134년 그의 사위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살해되었고, 그의 아들 요한 히르카누스 1세가 대제사장과 왕 자리를 물려받았다. 안티오코스는 유대 전 지역을 정복했지만 성전을 공격하거나 유대교의 관습에 간섭하는 것을 삼갔다. 유대는 기원전 129년 안티오코스가 사망하면서 셀레우코스 통치로부터 해방되었다.[15] 독립적인 하스몬 왕조의 통치는 기원전 63년까지 지속되었고,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가 하스몬 왕조의 내전에 개입하여 로마의 속국으로 만들었다. 하스몬 왕조는 기원전 37년에 이두메아 출신인 헤롯 대왕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서 종말을 맞이했고,[11] 로마 원로원에 의해 "유대인의 왕"으로 지정되면서,[15][35] 하스몬 왕국을 사실상 헤롯 왕국으로 변모시켰다—로마의 속국.

6. 성서 기록

마카베오 이야기는 마카베오기 상과 마카베오기 하에 보존되어 있는데, 이 책들은 예루살렘 성전 재헌납과 메노라 점등에 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 책들은 유대교 정경인 타나크(히브리 성경)에는 포함되지 않지만, 70인역이라고도 불리는 알렉산드리아 정경에는 포함되었다.[36] 두 책 모두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구약성경에 포함되어 있는데,[37] 이는 해당 교회가 이 책들을 제2경전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성경에서는 이 책들이 외경으로 간주되므로 구약성경에 포함되지 않는다.

미쉬나에는 하누카에 대한 언급이 여러 번 등장하지만(비쿠림 1:6, 로쉬 하샤나 1:3, 타아니트 2:10, 메길라 3:4 및 3:6, 모에드 카탄 3:9, 바바 카마 6:6), 구체적인 법률은 설명되어 있지 않다. 하루치 기름으로 8일 동안 버텼다는 기적은 탈무드에 처음 묘사되었는데, 이는 마카베오기 책에 묘사된 사건이 일어난 지 약 600년 후에 기록되었다.[38] 신약성경에는 예수가 하누카 기간에 성전을 방문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요한 10:22-23).

7. 기독교에서의 숭배

마카베오 2서와 4서는 일곱 명의 유대인 형제와 그들의 어머니, 그리고 그들의 스승이 순교한 이야기를 다룬다. 이들은 마카베오 가문 출신은 아니지만, 기독교에서는 "성 마카베오 순교자" 또는 "성 마카베오"라고 불린다. 한 전승에 따르면, 이들의 이름은 하빔, 안토닌, 구리아, 엘르아자르, 유세본, 하딤(할림), 마르켈루스, 어머니 솔로모니아, 스승 엘르아자르이다.[39]

마카베오 유물로 추정되는 유물은 독일 쾰른의 성 안드레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으며, '마카베오 성소'에서 숭배를 받는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정경인 메카비안의 세 권의 책(마카베오 4서와는 매우 다름)에서도 마카베오 순교자들에 대해 언급한다. 이 책들 중 첫 번째 책은 그들의 아버지가 마카베오라는 베냐민 사람이었고, 아비야, 실라, 펜토스라는 세 형제가 안티오코스 에피파네스에 대항하여 게릴라전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순교했다고 전한다.

성 마카베오는 트리엔트 달력 이전부터 로마 전례에서 성 베드로 사슬 해방 축일에 기념되었다. 1960년 교황 요한 23세가 성 베드로의 이 축일을 폐지했을 때 주중 전례에 남아 있었다. 9년 후인 8월 1일은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축일이 되었고, 마카베오 순교자에 대한 언급은 로마 전례 일반 달력에서 삭제되었다. 이는 1969년 개정에서 더 이상 기념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40] 이 성인들의 축일은 동방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 모두 8월 1일이다.

7. 1. 고대 유대교 숭배설

갈릴리 호수 근처 후코크 회당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발굴 조사 결과 발견된 바닥 모자이크를 연구한 러시아 연구원 니나 V. 브라긴스카야는 발굴 책임자인 조디 매그니스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41] 브라긴스카야는 모자이크가 마카베오기에 나오는 아홉 명의 마카베오 순교자들에 대한 고대 유대교의 숭배를 반영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나중에 기독교에서만 유지되었고, 유대교 전통에서는 하누카 때 아홉 갈래 촛대에 불을 밝히는 의식만 보존되었다고 보았다.[41] 그녀의 견해에 따르면, 유대교 상징물과 기독교 상징적 이야기 사이에는 직접적인 관계가 있으며, 하누카 메노라는 유대교에서 1500년 동안 2차적인 상징적 해석을 거치는 반면, 기독교 전통은 신앙을 위한 순교 전통이라는 원래의 의미를 유지했다.[41] 이러한 해석은 히브리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은 장면을 유대교 외경에서 묘사하고 있는 이 특별한 모자이크 카펫의 독특한 도상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데, 이는 이 시기의 회당에서 발견된 유일한 모자이크이다.[41] 브라긴스카야에 따르면, 후코크 모자이크의 발견으로 비로소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 간의 연관성을 인식하고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41]

참조

[1] 서적 The Mathematics of the Calendar Lulu.com
[2] 서적 Theatre, Sacrifice, Ritual: Exploring Forms of Political Theatre https://archive.org/[...] Routledge
[3] 서적 The Grand Finale: The Apocalypse in the Tanakh, the Gospel, and the Qur'an https://books.google[...] Wipf and Stock Publishers
[4] 문서 Latin: Maccabaeus; Greek: Μακκαβαῖος Makkabaios; from Hebrew maqqeb et, "hammer" ([[Oxford English Dictionary]]).
[5] 문서 See 1 Maccabees 2:4
[6] 간행물 The Machabees
[7] 서적 Tanakh = Tanach : Torah, Neviʼim, Ketuvim : the Torah, Prophets, Writings : the twenty-four books of the Bible, newly translated and annotated Mesorah Publications
[8] 문서 Book of Exodus 15:11
[9] 웹사이트 What does "Maccabee" mean? – Ask the Rabbi http://www.oztorah.c[...] Oztorah.com 2013-07-29
[10] 문서 I Maccabees, i, 15
[11] 문서 Oesterley, W.O.E., A History of Israel, Oxford, Clarendon Press, 1939.
[12] 문서 De Lange, Nicholas, Atlas of the Jewish World, Oxford: Andromeda, 1992
[13] 문서 I Maccabees, i, 30–32
[14] 웹사이트 Maccabean Revolt https://www.oxfordbi[...]
[15] 문서 Nicholas de Lange (ed.), The Illustrated History of the Jewish People, London, Aurum Press, 1997, ISBN 1-85410-530-2
[16] 서적 Jewish Literacy: The Most Important Things to Know about the Jewish Religion, Its People, and Its History W. Morrow
[17] 서적 The Jewish Way: Living the Holidays Simon & Schuster
[18] 서적 Religions of the Ancient World: A Guide Harvard University Press
[19] 서적 Judaism and the Gentile Faiths: Comparative Studies in Religion Fairleigh Dickinson Univ Press
[20] 서적 A Survey of the New Testament Zondervan
[21] 문서 Tcherikover, Victor Hellenistic Civilization and the Jews, New York: Atheneum, 1975
[22] 서적 Eerdmans Dictionary of the Bible https://archive.org/[...] Wm. B. Eerdmans Publishing
[23] 서적 A Survey of Israel's History Zondervan
[24] 문서 Jewish Life and Thought Among Greeks and Romans: Primary Readings, By Louis H. Feldman, Meyer Reinhold, Fortress Press, 1996, p. 147
[25] 문서 I Macccabees. 1:57
[26] 논문 The Samaritans during the Hasmonean Period: The Affirmation of a Discrete Identity? 2019
[27] 웹사이트 1 Maccabees 1:60–61 (New Revised Standard w/ Apocrypha) http://www.biblestud[...] biblestudytools.com
[28] 문서 I Maccabees, 1, 41–50
[29] 문서 Toras Menachem Melukat volume 2 pg. 162
[30] 웹사이트 Jewish Virtual Library https://www.jewishvi[...] Jewish Virtual Library 2013-07-29
[31] 웹사이트 Talmud, Tractate Shabbat https://www.jewishvi[...] Jewishvirtuallibrary.org 2013-07-29
[32] 문서 Cohen, Shaye J.D., From the Maccabees to the Mishnah (Second Edition. Westminster John Knox Press, 2006)
[33] 문서 Jews in the Mediterranean diaspora: from Alexander to Trajan (323 BCE – 117 CE) John M Barclay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pg 247
[34] 문서 Livy, Ab Urbe Condita, xlv.12. http://mcadams.posc.[...]
[35] 문서 Josephus' Jewish War 1.14.4: Mark Antony " …then resolved to get him made king of the Jews… told them that it was for their advantage in the Parthian war that Herod should be king; so they all gave their votes for it. And when the senate was separated, Antony and Augustus went out, with Herod between them; while the consul and the rest of the magistrates went before them, in order to offer sacrifices [to the Roman gods], and to lay the decree in the Capitol. Antony also made a feast for Herod on the first day of his reign;"
[36] 서적 Hermeneutics, Authority, and Canon Wipf and Stock Publishers
[37] 웹사이트 The Old Testament in the Orthodox Church http://www.orthodoxc[...] 2020-12-10
[38] 뉴스 The Truth(s) About Hanukkah http://www.huffingto[...] 2011-12-23
[39] 웹사이트 The Seven Holy Maccabean Martyrs http://www.holytrini[...] Holytrinityorthodox.com 2007-05-20
[40] 서적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 1969
[41] 웹사이트 Нина Брагинская о загадочной мозаике из библейской деревни https://iocs.hse.ru/[...] Higher School of Economics (HSE), Institute of Classical Orient and Antiquity 2017-12-19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