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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알빈 라우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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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스 알빈 라우터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사회주의 단체에서 활동하다가 나치당에 입당하여 친위대에서 경력을 쌓았다. 그는 1940년 네덜란드 점령 시 네덜란드 주둔 친위대 사령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되어, 유대인 탄압과 레지스탕스 탄압을 주도했다. 전쟁 후 전범으로 기소되어 1949년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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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알빈 라우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39년의 라우터
1939년의 라우터
출생일1895년 2월 4일
사망일1949년 3월 24일
출생지클라겐푸르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사망지스헤베닝언 근처, 네덜란드
군사 경력
소속독일 제국
나치 독일
군종독일 제국군
자유군단
슈츠슈타펠
복무 기간1914년–1919년
1921년
1935년–1945년
최종 계급SS-오베르그루펜퓌러 운트 게네랄 데어 폴리차이 (친위대 대장 및 경찰 대장)
지휘네덜란드 SS 및 경찰 지도자 (1940년–1945년)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이름 (원어)
독일어Hanns Albin Rauter

2. 생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난 라우터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오스트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했다. 종전 후에는 의용군에서 활동하다가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단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1933년 사회주의 단체가 해산되자 나치당에 입당했고, 1935년까지 돌격대에서 활동했다. 이후 친위대로 이적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이 되었으며, 1940년부터는 네덜란드 주둔 친위대 사령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되어 독일 패전 시까지 재직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면서, 라우터는 네덜란드 통치를 담당했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탄압에 직접적인 책임을 졌다. 그는 유대인을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으로 보내기 위한 임시수용소를 짓고, 이송열차로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을 확보하여 약 3만 명 이상을 수용소로 보냈다. 안네 프랑크도 이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 중 한 명이었다.

1945년 3월 6일 밤, 라우터는 독일군으로 위장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의 습격을 받았지만, 목숨을 건졌다. 전후 영국군의 포로가 된 라우터는 네덜란드 정부에 인도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1949년 1월 12일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아 3월 2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

2. 1. 초기 생애 및 경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클라겐푸르트에서 태어난 라우터는 1912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라츠 공과대학교에서 엔지니어 훈련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 자원하여 ''게비르크스쉬첸레기멘트''에서 복무했으며, 육군 중위(1918년 7월)로 제대했다. 1914년 오스트리아 육군에 입대해 제1차 세계 대전 중 산악부대 중대장의 부관으로 종군하다가 1915년에 부상을 입어 전장에서 배제되었다.

전후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의용군(프라이코르)에서 활동한 후 오스트리아 사회주의 단체에 가입하여 그 리더가 되었다. 라우터는 케른텐 오스트리아-슬로베니아 분쟁에 참여했으며, 1921년 5월부터 7월까지 오버슐레지엔에서 ''자유군단 오버란트''에서 싸웠다.[1] 1933년 사회주의 단체가 해산되면서 나치당에 입당한 라우터는 1935년까지 돌격대에 재직하면서 돌격대 대령까지 승진했다. 1935년 2월 20일 친위대로 이적하여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이 되어 특무장교로 일했다. 1936년 4월 친위대 본부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1938년까지 힘러의 부관으로 일했으며, 이후 친위대 남동지구 사령관으로 근무했다.

전쟁 중 공로로 라우터는 오스트리아 군사 공로 훈장 3급 (전시 훈장), 용맹 은장, 상처 훈장, 카를 기병대 십자 훈장을 받았다.[1]

라우터는 1926년 8월 뮌헨에서 처음 아돌프 히틀러를 만났다. 1931년 11월 오스트리아 나치 운동에 가담했다. 오스트리아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1933년 7월 독일에 도망쳐야 했고, 나치당 부서의 일원이 되었다. 1933년 11월 23일 돌격대(SA)에 입대하여 SA-''오버그룹'' XI에 배정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 불법 활동을 계획하는 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34년 11월 SA-''오버슈투름반퓌러'' 계급으로 승진했다. 1935년 2월 27일, 친위대(SS)의 일원이 되었으며(SS 번호 262,958), SS-''오버퓌러'' 계급을 받았다. 1935년 5월 7일에 독일 시민이 되었다. 1936년 4월부터 6월까지 SS 본부에 배치되었고, 1936년 6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친위대 전국지도자''의 참모로 배정되었다. 1938년 11월부터 1940년 6월까지 브레슬라우의 SS-''오버압슈니트'' 쥐도스트(주요 지구 남서부)의 참모장이었다.[1]

2. 2. 나치 친위대 활동

1935년 2월 20일 라우터는 친위대로 이적하여 친위대 상급대령 계급을 받았다.[1] 처음에는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의 측근으로 특무 장교로 근무했다.[1] 1936년 4월 초에 잠시 친위대 본부에서 근무했지만, 곧 힘러의 부관으로 복귀했다.[1] 1938년 11월까지 힘러의 측근에서 근무했다.[1] 이후 지방 근무를 하게 되어 브레슬라우에 본부를 둔 친위대 지구 "남동"에 배속되었다.[1] 1940년 6월 26일에는 친위대 소장 계급으로서 네덜란드 주둔 친위대 사령관 및 경찰지도자로 임명되었고, 독일의 패전까지 그 직위를 유지했다.

2. 3. 네덜란드 점령 통치와 전쟁 범죄

1940년 5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라우터는 "보안 담당 최고 위원"(Generalkommissar für das Sicherheitswesen)과 "최고 SS 및 경찰 지도자"(Höherer SS-und Polizeiführer)로 임명되었다. 그는 네덜란드에서 경찰 사령관이자 최고위 SS 지도자로서 110,000명의 네덜란드 유대인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고(6,000명 생존),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책임을 맡았다. 또한 300,000명의 네덜란드인을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추방했으며, 1941년 2월 파업을 무력 진압하여 9명의 사망자를 냈다. 그는 즉시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약식 처형을 명령했다.

마켓 가든 작전에서 아른험에 대한 연합군의 공격 중에 라우터는 벨루베 지역과 이설 강의 다리 근처에서 작전 중 ''캄프그루페 라우터''의 적극적인 현장 지휘를 맡았다. ''캄프그루페 라우터''는 란트스토름 네덜란드, ''바흐바탈리온 노르트베스트'' 및 ''오르드눙스폴리차이'' 연대로 구성되었다. 아른험에 대한 공격이 독일군에 의해 격퇴된 후, 라우터는 무장친위대의 장군으로서 마스 전선의 지휘를 받았다.

1945년 3월 6일 밤, 라우터는 우에스테 호베에서 네덜란드 레지스탕스의 공격으로 중상을 입었지만, 죽은 척하여 살아남았다. 그는 독일군 순찰대에 의해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었고, 종전 후 영국 군사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네덜란드 정부에 신병이 인도되어 1949년 1월 12일 전쟁범죄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3월 25일 총살형에 처해졌다.[1]

2. 3. 1. 안네 프랑크와 유대인 학살

네덜란드 괴뢰 지도자 안톤 무세르트가 NSB 신병에게 연설하는 모습. 국가판무관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장군 헨드릭 세이파르트와 라우터가 뒤에 서있다. 헤이그, 1941년 10월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격렬한 유대인 학살에 책임이 있었다. 라우터는 네덜란드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경유 수용소로 네덜란드 북동부에 베스터보르크 경유 수용소, 네덜란드 남부에 헤르토겐보스 경유 수용소(:de:KZ Herzogenbusch)(퓌흐트 수용소)를 설치했다. 이송 열차 확보에도 힘써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 이송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라우터는 1942년 9월 24일 하인리히 힘러에게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했다.[3][4]

2. 3. 2. 레지스탕스 탄압

라우터는 네덜란드에서 경찰 사령관이자 최고위 SS 지도자로서 110,000명의 네덜란드 유대인나치 강제 수용소로 추방하고 네덜란드 레지스탕스를 탄압하는 책임을 맡았다.[1] 그는 네덜란드에서 약식 체포와 구금을 통해 테러를 조장한 주범이었다.

그는 헤르토겐보스시의 이름을 따서 헤르초겐부흐 강제 수용소를 설치했지만, 수용소는 인접한 뷔흐트에 위치했다. 캄프 뷔흐트는 총 31,000명을 수용했으며, 그중 735명이 사망했다. 또한, 그의 SS는 아머스포르트 근처에 "경찰 통과 수용소"(polizeiliches Durchgangslager) 또는 경찰 수용소로 불리는 캄프 아머스포르트를 운영했는데, 이 역시 강제 수용소로 약 35,000명이 구금되어 학대를 받았고 650명(네덜란드인 및 러시아인)이 사망했다. 라우터의 SS는 또한 캄프 베스터보르크(polizeiliches Durchgangslager Westerbork)를 관리했는데, 이곳은 약 110,000명의 네덜란드 유대인이 나치 강제 수용소절멸 수용소로, 주로 아우슈비츠와 소비보르로 추방된 곳이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국가 판무관(총독)으로서 네덜란드를 통치하였는데, 라우터와 함께 네덜란드에서 벌어진 격렬한 유대인 탄압에 책임을 져야 했다. 라우터는 네덜란드의 유대인을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경유 수용소로 네덜란드 북동부에 베스터보르크 경유 수용소, 네덜란드 남부에 헤르토겐보스 경유 수용소(:de:KZ Herzogenbusch)(퓌흐트 수용소)를 설치했다. 이송 열차 확보에도 진력하여 네덜란드 거주 유대인 이송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안네의 일기의 저자 안네 프랑크도 그 희생자 중 한 명이었다.

라우터는 또한 나치 관리와 그들의 네덜란드 협력자에 대한 공격에 대한 보복 시스템을 조장했는데, 나치 1명의 사망은 네덜란드 희생자 10명, 네덜란드 협력자 1명의 사망은 네덜란드 희생자 3명과 같았다. 1944년에는 레지스탕스의 폭력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숫자가 급격히 증가했다.[1]

라우터의 지시에 따라 스헤베닝겐 감옥에는 '정치범'(즉, 레지스탕스 운동가)을 위한 특별 구역이 건설되었다. 이들은 종종 재판 없는 무기한 구금 상태에 놓였다. 총 28,000명이 4년 동안 이곳에 구금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심한 학대를 받았고, 일부는 재판을 받았으며, 738명의 남성과 21명의 여성이 이곳에서 또는 인근 처형장인 바알스도르퍼플라크테에서 사망했다(현재는 국가 추모 장소).

2. 4. 전후 체포 및 처형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영국군은 병원에 입원 중이던 라우터를 체포하여 네덜란드 정부에 넘겼다. 그는 전쟁 범죄 혐의로 특별 법정에 서게 되었다.[5] 라우터는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지만, 1949년 1월 12일 법원은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2] 1949년 3월 25일, 라우터는 스헤베닝겐 근처에서 총살형에 처해졌다.[2][5] 그의 묘지는 현재까지 기밀로 유지되고 있다.[2] 라우터에게는 5명의 자녀가 있었다.[6]

1948년 헤이그에서 재판을 받는 라우터

3. 비판과 평가

(요약 및 원본 소스 내용 없음)

참조

[1] 서적 Surviving Hitler and Mussolini: Daily Life in Occupied Europe https://books.google[...] Berg 2006
[2] 웹사이트 Rauter is sentenced to death ! Anne Frank House https://www.annefran[...] 2024-04-19
[3] 문서 アンネのおもかげ
[4] 문서 ヨーロッパ・ユダヤ人の絶滅 上巻
[5] 문서 ドイツ武装SS師団写真史2
[6] 문서 Allgemei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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