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와 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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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자와 시로는 일본의 전 프로 야구 선수로, 투수였다. 가마쿠라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67년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1964년 8승 10패, 평균자책점 3.07을 기록하며 팀의 주축 투수로 활약했으나, 1965년부터 어깨 부상으로 인해 이후 이렇다 할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1967년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음식점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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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와 시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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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정보 | |
선수명 | 한자와 시로 |
원어명 | 반자와 시로 |
로마자 표기 | Hanzawa Shiro |
국적 | 일본 |
출생지 | 가나가와현 |
생년월일 | 1945년 6월 19일 |
신장 | 181cm |
체중 | 88kg |
포지션 | 투수 |
투구 | 우투 |
타석 | 우타 |
프로 입단 정보 | |
프로 입단 연도 | 1964년 |
드래프트 순위 | 해당 정보 없음 |
선수 경력 | |
소속 구단 | 고쿠테쓰 스왈로스 산케이 스왈로스 산케이 아톰스(1964~1967) |
첫 출장 | 1964년 6월 2일 |
마지막 경기 | 1967년 10월 17일 |
등번호 | 해당 정보 없음 |
2. 선수 경력
한자와 가쓰마사는 가마쿠라가쿠엔 고등학교와 고쿠테쓰 스왈로스(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투수로 활동했다. 고등학교 시절 고시엔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1964년 프로 입단 후 빠른 공을 던지며 주목받았다. 그러나 잦은 부상으로 인해 1967년 짧은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했다.[1] 가네다 마사이치는 그의 빠른 직구에 대해 "나보다 빠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1]
2. 1. 고등학교 시절
가마쿠라가쿠엔 고등학교 시절인 1962년 2학년 때 팀은 춘계 선발 대회에서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한자와는 출전하지 못했다.[1] 같은 해 하계 고시엔 가나가와현 예선 결승전에서 게이오의숙 고등학교를 상대로 7회에 구원 등판했지만 팀은 3대 8로 패했다.[1] 1년 선배 팀 동료로는 다케노우치 마사시가 있었다.주전 투수가 된 1963년 하계 가나가와현 예선 준결승전에서 요코하마 고등학교에게 4대 8로 패하며 고시엔 진출에 실패했다.[1]
2. 2. 프로 입단 초기 (1964년)
1964년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그해 6월 2일 주니치 드래곤스와의 경기(주니치)에서 첫 등판했다. 3회에 시부야 세이지, 이시오카 고조에 이어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7이닝 동안 7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프로 첫 승리를 거두었다.[1] 다음날 3일에도 모리타키 요시미의 2번째 구원 투수로 호투했지만, 7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전(히로시마 시민)에서는 야마모토 이치요시에게 홈런을 맞고 첫 패전을 기록했다.[1] 같은 달 1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전(진구)에서는 3회부터 시부타니 세이지의 구원 투수로 등판, 8이닝을 1피안타로 막아내며 연장 10회 끝내기 승리의 승리 투수가 되었다.[1]7월 1일 주니치전(주니치)에서 첫 선발 등판했지만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고, 같은 달 25일 한신 타이거스전(고시엔)에서 첫 완투 승리, 같은 달 28일 다이요전(가와사키)에서는 두 번째 완투 승리를 거두며 첫 안타를 포함하여 3타수 2안타도 기록했다.[1] 이후 선발 투수진의 일원으로 기용되어 그해 8승 10패, 규정 이닝 (리그 13위, 방어율 3.07)을 기록했다.[1] 8승 중 6승은 다이요, 히로시마, 주니치에게서 각각 2승씩 거둔 것이다.[1]
2. 3. 부상과 짧은 선수 생활 (1965년 ~ 1967년)
1965년 4월 25일 히로시마전에서 연장 10회 완투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1] 5월 1일 주니치전(주니치)에 선발 등판한 후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여 등판 기회가 없었다. 이듬해인 1966년 이후에도 어깨 상태는 회복되지 않았다.[1] 1967년 10월 17일 다이요전(가와사키)에서 2년 만에 선발 등판했지만, 사토 이세이에게 홈런을 맞고 1회에 강판되었다. 이 경기가 현역 마지막 등판이 되었고, 그 해 은퇴했다.[1]가네다 마사이치가 "나보다 빠르다"라고 말했을 정도의 직구[1]와 배짱이 장점이었지만, 부상으로 꽃을 피우지 못한 비극의 투수였다.
3. 은퇴 후
은퇴 후 바를 경영했다.[1][2]
4. 플레이 스타일
가네다 마사이치가 '나보다 빠르다'고 평가할 정도의 직구[1](그 외 슈토, 커브도 던졌다)와 배짱을 가졌지만, 부상에서 극복하지 못한 비극의 투수로도 알려졌다. 그의 구속을 측정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실험을 한 적이 있다. 지름 60cm의 도넛 모양 원형 기계 안쪽에 포트 트랜지스터 20개를 끼워 넣고 방전시켜 전기 커튼과 같은 것을 만들었다. 이 원형 기계 2개를 36cm 간격으로 놓고, 투수가 던진 공이 2개의 구멍을 정확하게 통과하면, 공이 첫 번째 구멍에서 두 번째 구멍을 통과하는 36cm에 걸린 시간을 100만분의 1초까지 측정할 수 있었다. 이 실험을 통해 한자와의 공의 초속이 42.6m(시속 153km 초과)로 밝혀졌다. 게다가 이때 한자와는 스파이크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있었고, 바닥은 마운드가 아닌 콘크리트였다는 조건이었다. 한편, 천재적인 면이 있어 그를 귀여워했던 가네다가 때때로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2]
5. 상세 정보
한자와 가쓰마사는 가마쿠라가쿠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64년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했다. 6월 2일 주니치전(주니치)에서 첫 등판, 3회에 시부야 세이지, 이시오카 고조에 이어 3번째 투수로 등판하여 7이닝 동안 7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1] 다음날 3일 모리타키 요시미의 2번째 구원 투수로 호투했지만, 6월 7일 히로시마전(히로시마 시민)에서는 야마모토 이치요시에게 홈런을 맞고 첫 패전을 기록했다.[1] 6월 11일 요미우리전(진구)에서는 3회부터 시부야의 구원 투수로 등판, 8이닝을 1안타로 막아 연장 10회 사요나라 승리의 승리 투수가 되었다.[1] 7월 1일 주니치전(주니치)에서 첫 선발 등판했지만 승패는 기록되지 않았고, 7월 25일 한신전(고시엔)에서 첫 완투 승리, 7월 28일 다이요전(가와사키)에서는 두 번째 완투 승리와 함께 첫 안타를 포함, 3타수 2안타를 기록했다.[1] 그 후 선발 투수진의 한 축으로 기용되어 그 해 8승 10패의 성적을 기록했고, 규정 이닝 (리그 13위, 방어율 3.07)에도 도달했다. 8승 중 6승은 다이요・히로시마・주니치에게서 각각 2승씩 거둔 것이다.
은퇴 후에는 바를 경영했다.
5. 1. 출신 학교
가마쿠라가쿠엔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62년 봄의 선발 대회에서 팀은 준준결승에 진출했지만, 한자와는 출전하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의 고시엔 현 예선 결승에서 게이오고와 대결, 7회에 에이스 나가타 요시카즈(오마이)가 맹타를 당해 구원 등판했지만 3-8로 패했다. 1년 선배 팀 동료로는 2루수 다케노우치 마사시(세이부・태평양・크라운, 한신)가 있었다. 1963년 주전 투수가 된 3학년 여름의 고시엔 현 예선에서는 오버핸드에서 나오는 위력 있는 강속구로 한 경기 평균 10개의 삼진을 잡아냈지만, 준결승에서 이노우에 겐지(도에이), 히라오카 이치로(다이요, 롯데) 두 투수를 보유한 요코하마고에 4-8로 패했다.5. 2. 선수 경력
1964년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6월 2일 주니치전에서 첫 등판하여 7이닝 동안 7개의 삼진을 잡아내며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 해 8승 10패, 규정 이닝 (리그 13위, 방어율 3.07)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1]1965년 4월 25일 히로시마전에서 연장 10회 완투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5월 1일 주니치전에 선발 등판한 후 어깨 통증으로 고생하며 등판 기회가 없었다.[1]
1966년 이후에도 어깨 상태가 회복되지 않아, 1967년 10월 17일 다이요전에서 2년 만에 선발 등판했지만 1회에 강판되었다. 이 경기가 현역 마지막 등판이었고, 그 해 은퇴했다.[1]
가네다 마사이치는 한자와의 직구가 자신보다 빠르다고 평가했으며, 한자와의 구속은 실험 결과 시속 153km를 초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운동화를 신고 콘크리트 바닥에서 던진 결과였다. 하지만 부상으로 인해 선수 생활을 길게 이어가지 못했다.[1][2]
5. 3. 등번호
1964년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하여 1967년까지 등번호 33번을 사용했다. 입단 첫 해에는 8승 10패, 규정 이닝 (리그 13위, 방어율 3.07)을 기록하며 선발 투수진의 한 축으로 활약했다.[1] 1965년 4월 25일 히로시마전에서 연장 10회 완투승을 거두었지만, 이것이 현역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 이후 어깨 부상으로 고전하다가 1967년 은퇴했다.[2]6. 기록
7. 연도별 투수 성적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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