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네다 마사이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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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네다 마사이치는 일본 프로 야구의 전설적인 투수로, 1950년부터 1969년까지 선수 생활을 하며 통산 400승을 기록했다. 고쿠테쓰 스왈로스와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활약하며 14년 연속 20승 이상, 통산 4,490 탈삼진을 달성했다. 1973년부터 1978년,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을 역임하며 1974년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가네다 마사이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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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가네다 마사이치
본명김경홍
출생일1933년 8월 1일
사망일2019년 10월 6일
사망 장소일본 도쿄도
포지션투수
투구/타석좌투/좌타
데뷔 리그일본 프로 야구
데뷔일1950년 8월 23일
데뷔 팀고쿠테쓰 스왈로스
최종 출장일1969년 10월 18일
최종 팀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 경력
선수고쿠테쓰 스왈로스 (1950–1964)
요미우리 자이언츠 (1965–1969)
감독롯데 오리온스 (1973–1978, 1990–1991)
통계 (NPB)
승패400승 298패
평균자책점2.34
완봉승82
투구 이닝5,526.2
탈삼진4,490
타율0.198
안타406
홈런38
타점177
수상 및 업적
주요 수상일본 트리플 크라운 (1958)
14× 20승 투수
3× 에이지 사와무라 상 (1956–1958)
10× 탈삼진 1위
3× 평균자책점 1위
2회 노히트 노런
1957년 8월 21일 퍼펙트 게임 달성
영구 결번요미우리 자이언츠 #34
명예의 전당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1988년)
출신 학교
학교나고야 전기 고등학교
교에이 상업 고등학교 (중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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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선수 경력

아이치현 헤이와정에서 재일 한국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가네다는 1950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고쿠테쓰 스왈로스(현재의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입단했다. 당시 스왈로스는 일본 야구에서 매우 약한 팀이었지만, 가네다는 직구와 트레이드마크인 드롭 커브를 바탕으로 빠르게 일본 최고의 투수로 성장했다.

스피드건이 일본에 도입되기 전이었지만, 가네다는 전성기 시절 자신의 직구가 시속 100마일(약 161km)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가네다의 루키 시절, 오사카 타이거스 선수 가네다 마사야스는 가네다의 공이 너무 빠르게 보이는 것은 마운드가 타석에 너무 가깝게 설치되었기 때문이라고 불평했다. 심판이 줄자로 거리를 측정한 결과, 마운드는 정확한 거리에 설치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아오타 노보루는 가네다의 직구가 사와무라 에이지의 것보다 더 빨랐다고 인정했다.

가네다는 선수 경력 동안 다음과 같은 주요 기록들을 달성했다.
* 1951년 9월 오사카 타이거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 기록
* 1957년 8월 21일 주니치 드래곤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 달성
* 1958년 시즌 개막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루키 나가시마 시게오를 네 번의 타석에서 모두 삼진으로 처리
* 1959년 자이언츠의 오 사다하루의 프로 데뷔 경기에서 상대하여 4타석 모두 삼진
* 14시즌 연속 20승 이상 (1958년에는 31승)
* 1965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팀의 9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
* 1969년 400승을 기록한 후 은퇴 (이후 등번호 34번은 1970년에 자이언츠에 의해 영구 결번)

가네다는 엄청난 투구량과 커브의 과도한 사용으로 선수 생활 마지막 몇 년 동안 투구 팔에 심한 통증을 겪었고, 결국 언더핸드 체인지업을 개발했다.

가네다가 보유한 주요 NPB 기록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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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 종류기록 내용
완투365
승리400
패배298
탈삼진4490
이닝5,526⅔
볼넷1,808
완봉승82 (NPB 역대 2위)
홈런 (투수)36 (일본인 투수 최다)


그는 10번의 탈삼진, 3번의 승리, 3번의 방어율 리그 1위를 기록했고, 사와무라 에이지 상을 3번 수상했다. 또한 터피 로즈가 2005년에 기록을 깨기 전까지 NPB 통산 퇴장 횟수(8번)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는 투수로서 5번의 리그 우승, 5번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개인적으로는 NPB에서 총 22개의 타이틀(16개) 및 주요 표창(6개)를 획득했다.

2.1. 아마추어 시절

1933년 아이치현에서 재일 한국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9년 일본에 귀화했는데, 귀화하기 전 한국 이름은 김경홍(金慶弘)이었다. 아이치 현 나고야시에 위치한 교에이 상업고등학교의 에이스 투수로 활약하면서 고시엔 대회 진출을 목표했지만, 1950년 예선 대회에서 팀이 패배하여 나갈 수 없었다. 이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센트럴 리그 팀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했다.

강속구에 대한 평가도 있지만, 커브를 칭찬하는 사람도 많다.

* 아리모토 요시아키는 전후 최고의 커브 구사자로서, 호리우치 츠네오, 에가와 스구루와 함께 가네다를 꼽고 있다.
* 사사키 신야는 "가네야마의 커브는, 바로 위로 던지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꺾여서 스트라이크가 됐다. 그런 커브는 다른 데서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 노무라 가츠야는 "타자 바로 앞까지 머리 높이로 공이 오다가, 볼이 될 줄 알았는데 스트라이크가 됐다. 같은 높이로 직구도 던지니까 쉽게 칠 수 없었다. (가네다와 대결할 때) 배트는 그립 엔드에서 두 뼘 정도 짧게 잡았다"라고 말했다.

가네다의 커브는 궤도의 차이에 따라 5종류가 있었다고 하는데, 특히 "2층에서 떨어지는"이라고 불린 "만들기까지 10년이 걸렸다"는 종 커브가 무기였다. 그 커브는 왼쪽 팔꿈치에 대한 부담이 컸고, 매년 팔꿈치 통증에 시달렸다. 입단 5년차 무렵부터 은퇴할 때까지 계속 팔꿈치가 안 좋았고, 장마철이나 가을 초입에는 특히 아팠다고 본인이 증언하고 있다. 초반에는 컨디션이 좋았던 시즌에도 장마철이나 가을 초입에 한 달 정도 이기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2.2. 고쿠테쓰 스왈로스 시절 (1950년 ~ 1964년)

金田 正一일본어는 1950년 8월 23일 히로시마 도요 카프와의 경기에서 프로에 처음으로 등판했다. 이 경기에서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며 패했지만, 고쿠테쓰 스왈로스는 17세의 金田 正一일본어를 즉시 전력감으로 보고 계속 기용하여 시즌 8승(6선발승)을 거두었다. 1951년 9월 5일, 오사카 야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만 18세 35일의 나이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며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이 시즌에 22승(19선발승)을 거두었고, 이후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달성했다(1955년 22선발승).

1957년 8월 21일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경기 전날 설사로 고생했지만, 9회말 1사 상황에서 타자의 스윙 판정에 대한 주니치 팀의 격렬한 항의로 경기가 43분 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이후 속개된 경기에서 나머지 두 타자를 모두 헛스윙 삼진으로 잡아내며 퍼펙트 게임을 완성했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에서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4타석 연속 삼진을 기록했다. 같은 해 6월 5일 통산 200승을 24세의 나이로 달성하며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웠고, 6월 20일에는 개막 70일, 51경기 만에 시즌 20승을 달성했다. 당시 기록은 9번의 완봉승을 포함한 20승 2패, 평균 자책 0.57이었다. 또한 64⅓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일본 최고 기록도 세웠다.

1962년 9월 5일,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월터 존슨의 기록을 깨는 통산 3,509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 1963년 6월 30일에는 통산 311승을 기록하며 벳쇼 다케히코의 310승을 넘어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최다승 투수가 되었다.

1964년 시즌까지 14년 연속 20승(1955년 22선발승, 9완봉승)을 달성했고, 통산 353승(239선발승)을 거두었으며,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통산 65승을 거두며 역대 1위 기록을 세웠다. 고쿠테쓰 시절 가장 많은 승수를 거둔 상대는 히로시마(83승)였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는 72패를 당했다.

金田 正一일본어는 선수 생활 초반 제구력이 좋지 않아 1951년과 1952년에 190명 이상의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선수 생활 동안 제구력이 향상되었고, 통산 볼넷 기록을 세웠다.

비록 팀은 약했지만, 金田 正一일본어는 14시즌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었으며, 1958년에는 31승을 기록했다. 그러나 여러 시즌 동안 2.00 미만의 방어율을 기록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 생활 처음 15시즌 동안 매년 최소 10경기 이상 패했으며, 6시즌은 20경기 이상 패했다.

2.3.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65년 ~ 1969년)

1965년 B급 14년 선수제도(지금의 프리 에이전트 선수 제도)에서 권리를 행사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가네다가 고쿠테쓰 스왈로스를 단념한 것은 1962년에 산케이 신문후지 TV가 구단 경영에 참가했을 때였다. 이때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의 경영 방식에 반발하면서 고쿠테쓰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뗀 1965년의 요미우리 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고쿠테쓰는 같은 해 5월 10일자로 산케이·후지에 구단을 매각했다).

요미우리에 입단할 당시 감독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다른 요미우리 선수들도 가네다의 좋은 점을 본받기를 바랐다. 실제로 가네다가 입단한 이후 요미우리 선수들은 “대단한 기록을 가진 선수임에도 자신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한다”라고 감탄했고 나가시마 시게오는 가네다로부터 몸 만드는 법을 전수받아 슬럼프에서 벗어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통산 47승(29선발승)밖에는 거두지 못했지만 기존 선수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9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대기록 달성에 기여했고, 가와카미 감독도 노장 투수의 경험을 높이 사서 일본 시리즈 1선발 투수로 등판시켰고, 요미우리에 있는 5시즌 동안 개막전 선발 투수로 4번이나 등판시켰다.

1969년 10월 10일, 시즌 마지막 경기인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첫 400승을 기념하는 은퇴 경기였다. 가네다의 등번호인 34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3. 은퇴 후

가네다는 1973년부터 1978년까지, 그리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롯데 오리온스 감독을 맡기 전까지 해설가로 활동했다. 197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중 하나인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를 설립했다. 쇼와 시대(1926–1988)에 태어난 선수들을 기리는 명구회는 일본 프로 야구에서 통산 2,000안타, 200승, 또는 250세이브(2003년 12월 추가)를 달성하면 자동 헌액된다.

닛폰 TV닛폰 방송에서 야구 해설을 맡았고, 탤런트로도 활동했다. 요미우리 OB임을 공언하며 요미우리에 유리한 발언을 많이 했다. 구계 활성화를 위해 "자이언츠는 퍼시픽 리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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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3일까지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 회장(대표 간사, 같은 회사 대표 이사 사장)을 맡았다. 2009년 11월까지는 자신의 개인 사무소 '카네다 기획' 내에 명구회 사무국이 설치되어 있었다.

2019년 10월 6일 8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1.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닛폰 TV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고, 탤런트로도 활동했다. 1973년부터 1978년, 그리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롯데 오리온스 감독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74년에는 롯데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1975년 4월 23일부터 5월 5일까지는 심장 발작으로 휴양했으며, 이 기간 동안 2군 감독이었던 다카기 기미오가 감독 대행을 맡았다. 선수 시절 고쿠테쓰 스왈로스에서 퍼펙트 게임,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400승, 감독으로서는 롯데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을 달성했는데, 이 모두 주니치를 상대로 이룬 기록이다.

롯데 감독 시절인 1978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를 설립하여 2009년 12월까지 회장 및 대표 간사를 맡았다. 198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롯데 감독(1차) 당시 한국 실업야구 우수 선수 스카우트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언론의 주목을 받았고, 파리그의 인기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태평양 클럽 라이온즈 감독 이나오 가즈히사와 상의하여 롯데 대 태평양 전을 흥미롭게 만들기 위해 서로를 비방하는 '유감스러운 경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선수 시절의 지명도와 독특한 언행, 오버 액션, '가네야마 댄스' 등으로 화제를 모으며 현역 선수 이상의 인기를 얻었다. 팬 서비스를 적극적으로 실시했고, 모회사 TV CM에도 출연하는 등 저조했던 파리그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호탕한 성격으로 인기를 얻었지만, 격한 성격으로 인해 여러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난투극에 앞장서는 일도 드물지 않았으며, 주로 발을 사용해 상대를 공격했다. 1991년 5월 19일 아키타 시립 야바시 구장에서 열린 대 긴테쓰전에서는 짐 트레이버의 얼굴을 스파이크로 걷어차는 사건도 있었다.

1990년 6월 23일 세이부전에서는 다카기 도시아키 심판에게 폭행을 가해 파리그로부터 벌금 100만 엔과 30일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다. 통산 8회 퇴장(고쿠테쓰 1회, 요미우리 1회, 롯데 감독 6회)은 일본인 최다 기록이다.

성격이 격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마음이 너그럽고 사람을 잘 배려했다는 평가도 있다. 선수들의 휴식을 고려하고, 맛있는 음식을 선수들에게 대접하는 등 따뜻한 면모도 보였다.

투수 분업제가 확립된 현재에도 "선발 완투가 왕도"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제2기 감독 시대에는 선발 투수를 조기에 교체하고 다수의 투수를 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감독 시절에도 선수 시절 등번호 34번을 사용했다.

감독으로서의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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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승률게임차
홈런

타율

방어율
나이
1973롯데3위130704911.5882위・2위139.2643.4340세
19741위130695011.5802위・1위114.2653.1841세
19754위13059656.4766위・2위108.2593.3342세
19763위130635611.5293위・3위99.2582.9643세
19773위130605713.5135위・1위111.2703.1744세
19784위130536215.4615위・3위115.2694.0145세
19905위13057712.44525.0132.2624.2257세
19916위13048775.38433.589.2604.2358세
통산: 8년101147146872.502A 클래스 4회, B 클래스 4회

* 굵은 글씨는 일본 제일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 제도로, 게임차 란은 전기, 후기 순위 순으로 표시
* 1973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
* 1975년 4월 23일부터 5월 5일까지는 병으로 인한 휴양. 감독 대행은 다카기 기미오
* 1990년 6월 24일부터 7월 23일까지 30일간 출장 정지. 감독 대행은 도쿠타케 사다유
* 통산 성적은 실제로 가네다가 지휘를 맡았던 경기에서의 성적

3.2. 해설가 및 기타 활동

은퇴 후 닛폰 TV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를 맡았고, 그 외에도 탤런트로서 활동하였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그리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78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를 설립하여 2009년 12월까지 회장과 대표 간사를 맡았고, 198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OB임을 공언하며, 해설자로 활동할 당시에는 요미우리에 유리한 발언을 많이 했다. 동시에, 일본국유철도 OB라는 사실도 공언하고 있다. 1987년 일본국유철도 분할 민영화 당시 신문에 기고한 코멘트에서는 노사가 일체가 되어 응원했던 것을 그리워했다.

자신이 감독을 맡았던 롯데에 대해서도 애착을 가지고 있어, 닛폰 TV 해설자 시절에 열린 오픈전에서는 롯데에 유리한 해설을 했고, 롯데 선수들에게는 전달되지 않았지만 흥분해서 방송석에서 롯데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구계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자이언츠는 퍼시픽 리그로 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이징 올림픽 야구 일본 대표팀의 감독을 맡아 4위로 끝난 호시노 센이치에 대해 "그 정도의 힘이 없다. 이름만 앞서 있을 뿐이고, 대감독 같은 건 아니다"라고 비판했다.

그가 출연했던 프로그램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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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프로그램 제목
닛폰 방송카네야마의 야루데 가요곡
니혼 TVFun!BASEBALL!!
후지 TV야구도
닛폰 방송닛폰 방송 쇼업 나이터
닛폰 방송필승 홈런 와이드 유라쿠초에서 만납시다 (화요일)
닛폰 방송꽃의 5대 스타 챔피언 대방송 (목요일)
닛폰 방송해피 버라이어티 호카호카 대방송 (목요일)
후지 TV프로 야구 뉴스 (제1차 롯데 감독 사임 직후 단기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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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플레이 스타일

가네다는 현역 시절 빠른 직구와 커브를 주무기로 사용했으며, 말년에는 제구가 잘 된 아주 느린 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가네다의 공을 받을 수 있는 포수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프로 선수들과 심판들은 전성기 시절 가네다의 구속이 150km 후반에서 160km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뛰어난 운동 능력을 바탕으로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였다. 통산 38개의 홈런을 기록했으며, 특히 투수로서 36개의 홈런을 기록해 역대 1위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입단 첫 해부터 11년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 가네다는 독자적인 몸 관리 방법을 개발했다. 왼팔 보호를 위해 잠잘 때 서포터를 착용하고, 난투극 상황에서도 왼손에 수건을 감았다. 아들을 왼손으로 안아준 적이 없으며, 운전기사를 고용하고 차 안에서는 왼쪽에 앉지 않는 등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체 단련을 위해 러닝 훈련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며, "하체가 튼튼하면 위기도 없다"고 강조했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철저한 달리기 훈련을 부과하여 체력 강화에 힘썼다. 또한, "좋은 것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며 훈련 캠프에서 직접 삼계탕이나 스키야키 같은 요리를 만들어 팀 동료들과 함께 먹었다.

4.1. 투구

가네다는 현역 시절 주로 빠른 직구와 커브를 던졌으며, 말년에는 제구가 잘 된 아주 느린 직구를 던지기도 했다. 직구의 위력이 굉장해서 고등학교 시절 가네다의 투구를 포구할 수 있는 포수가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포수를 마운드 위에 앉게 하고 자신은 홈 베이스 위에서 던지면서 투구 연습을 하였다.

프로 첫 해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한신의 가네다 마사야스가 “투수의 공이 너무 빠른데, 투수와 포수 간의 거리가 너무 짧은 거 아닌가?”라며 항의를 하였고, 경기는 일시 중단되었다. 이후 마사야스와 심판이 함께 자를 가져다가 거리를 측정했는데 이상이 없었다. 가네다 본인이나 상대한 선수들의 말에 의하면 “전성기 시절 틀림없이 150km 후반이나 160km 정도의 구속일 것이다”라고 한다.

강속구뿐만 아니라 커브도 일품이었는데, 아리모토 요시아키는 전후 최고의 커브볼러로 호리우치 쓰네오, 에가와 스구루, 가네다를 꼽았다. 사사키 신야는 “가네다의 커브는 공이 높다고 생각할 때쯤이면 갑자기 아래로 꺾이면서 떨어져 스트라이크가 되었다. 저런 커브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의 커브는 대략 5종류가 있었는데, 특히 “2층에서 떨어진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낙폭이 큰 커브가 주무기였다.

가네다는 직구와 트레이드마크인 드롭 커브로 빠르게 일본 최고의 투수로 인정받았다. 선수 생활 초반 몇 년 동안 제구력이 엉망이어서 1951년과 1952년에 190명 이상의 타자에게 볼넷을 내주었다. 제구력은 선수 생활이 진행되면서 나아졌지만, 결국 통산 볼넷 기록을 세웠다.

스피드건은 가네다가 은퇴한 후에야 일본에 도입되었지만, 그는 전성기 시절 자신의 직구 속도가 시속 100마일에 달했다고 주장한다.

가네다의 엄청난 투구량과 커브의 과도한 사용은 선수 생활 마지막 몇 년 동안 투구 팔에 심한 통증을 유발했고, 결국 그는 후년에 언더핸드 체인지업을 개발했다.

4.2. 타격

가네다는 뛰어난 운동 능력으로 타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 주었다. 투수로 출전한 경기에 타석에 들어서면서 통산 36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역대 1위의 기록이다. 그 밖에 두 차례의 대타 홈런을 기록하면서 개인 통산 38개의 홈런을 기록하였다. 입단 첫 해(1950년)에 오가타 도시아키(니시니혼 파이레츠)로부터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홈런을 기록했는데 17세 2개월에서의 달성은 아직도 프로 야구 최연소 기록이다. 입단한 시즌부터 11년 연속 홈런을 기록하기도 했고 7번의 고의사구도 기록했다. 곤도 마사토시는 타자로서의 가네다가 제일 굉장하다고 평가했고 “가네다의 커브는 굉장했다”라고 말했다.

통산 등판 수는 944경기이지만 대타로서의 출전까지 모두 합하면 통산 1,053경기에 출전했는데 투수로서 등록된 선수(현역 선수 중에 본격적으로 투수에서 야수로 전향한 선수를 제외) 중에 통산 1000경기 이상을 출전한 것은 양대 리그가 출범한 이후의 가장 유일한 선수로 알려져 있다.

가네다는 투수로서 8번의 고의 사구를 기록했다. 1962년에는 시즌 4개의 고의 사구를 기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 후에도 1967년 8월 19일 주니치 드래건스 전에 대타로 등장하여 통산 8번째 고의 사구를 기록했다.

가네다가 타자로서 가장 대단하다고 생각한 투수는 다이요 웨일스의 좌완 곤도 마사토시로 "그의 커브는 대단했다"고 말했다.

1962년 8월 21일 요미우리 자이언츠 전(고라쿠엔 구장)에서 단 한 번 대타로 등장한 후 1루를 지킨 적이 있다(대타에서 투수는 몇 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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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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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이



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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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
통산10532054160406538385891777357119981236739.198.238.287.525

4.3. 몸 관리 방법

스포츠 의학이 발달하지 않았던 당시에 가네다 마사이치는 자신만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몸 관리 방법을 창안하였다. 특히 왼팔의 컨디션 조절을 위해 일상 생활에서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 잠을 잘 때 왼쪽 팔의 팔꿈치를 보호하기 위해 서포터를 착용하고 온도 저하에 대비했다.
* 현역 선수 시절 경기 도중 난투극이 벌어졌을 때에도 왼손에 수건을 감아 보호했다.
* 아들을 왼손으로 안아준 적이 없다고 한다.
* 운전 기사를 고용하여 경기장까지 이동했으며, 차 안에서는 왼쪽에 앉지 않았다.
* 수염을 깎을 때는 전기 면도기를 사용했고, 샌들을 신지 않았다.
* 시즌 오프에는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체 단련에도 중점을 두고 현역 시절 러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하체가 튼튼하면 위기도 없다. 하체가 약한 선수는 결코 투수가 될 수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롯데 감독 시절에도 선수들에게 달리기 훈련을 부과했다.

몸 만들기의 일환으로 식사에도 신경을 썼다. "좋은 것을 먹지 않으면 안된다"라고 말하며, 훈련 캠프에서는 직접 식재료를 구입해 삼계탕이나 스키야키와 같은 요리를 만들어 팀 동료와 함께 먹었다. 특히 삼계탕은 그의 어머니로부터 직접 배운 것이다.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후에는 도이 쇼조나 다카다 시게루 등이 가네다의 모친에게 김치찌개를 비롯한 여러 한국 요리를 배우기도 했다.

5. 사망

金田正一일본어(한국명 김경홍)는 2019년 10월 6일 급성 담관염에 의한 패혈증으로 도쿄도 내 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6세.

6. 상세 정보

가네다 마사이치는 고등학교 시절, 그의 투구를 받을 수 있는 포수가 없어 투구 연습 때 포수를 마운드 위에 앉히고 홈 베이스에서 던졌다는 일화가 있다.

프로 데뷔 해인 1950년 나가노현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상대 타자 가네다 마사야스가 투구 간격이 너무 짧다고 항의하여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으나, 측정 결과 규정대로였다.

전성기 시절 가네다와 대결했던 선수들은 그의 구속이 시속 150km/h대 후반이나 160km/h대에 달했을 것이라고 증언한다.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가장 빠른 공을 던지는 일본인 투수로 가네다를 꼽으며, 젊었을 때 정말 빨랐다고 회상했다.

가네다의 라이벌 투수들도 그의 구속을 높이 평가했다. 350승을 거둔 요네다 테쓰야는 가네다의 구속이 당시 시속 160km/h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했고, 320승을 거둔 고야마 마사아키는 가네다와 요네다가 가볍게 던져도 시속 160km/h대였다고 말했다.

가네다는 현역 말년에 아오타 노보루에게 자신과 사와무라 에이지 중 누가 더 빨랐는지 질문했는데, 아오타는 사와무라가 더 빨랐다고 답했다. 하지만 아오타는 나중에 사와무라를 소중히 해야 하지만, 사실은 가네다가 더 대단했을지도 모르겠다고 회고했다. 아오타는 전전(戰前)의 스타루힌, 전후(戰後)의 가네다를 최고로 꼽았다.

6.1. 출신 학교

* 교에이 상업고등학교(중퇴)

6.2. 선수 경력

아이치현에서 재일 한국인의 아들로 태어나, 1950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센트럴 리그 팀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에 입단했다. 1959년 일본으로 귀화하기 전 한국 이름은 김경홍(金慶弘)이었다.

프로 첫 등판은 1950년 8월 23일 히로시마 카프와의 경기였는데, 끝내기 밀어내기 볼넷을 허용하며 패전 투수가 되었지만, 고쿠테쓰는 17살의 가네다를 즉시 전력감으로 보고 계속 기용하여 시즌 8승(6선발승)을 거두었다. 1951년 9월 5일, 오사카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했고, 만 18세 35일의 기록은 역대 최연소 기록이다. 이 시즌에 22승(19선발승)을 거두었고, 이 시즌부터 14년 연속 20승 이상을 거두었다(당시 20선발승 이상 - 1955년 22선발승).

1957년 8월 21일 주니치 구장에서 열린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에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다. 경기 전날 설사로 고생했지만 결국 기록을 달성했다. 9회말 1사 상황에서 타자의 스윙 판정에 주니치 팀에서 격렬하게 항의하면서 경기가 43분 동안 중단되기도 했다. 이어 속개된 경기에서 나머지 2명의 타자 모두를 헛스윙 삼진으로 잡으면서 퍼펙트 게임을 만들어 냈다.

1958년 4월 5일 고라쿠엔 구장 개막전에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특급 신인 나가시마 시게오를 상대로 4타석 연속 삼진을 빼앗았다. 그 해 6월 5일 통산 200승을 24세의 나이로 달성하여 역대 최연소 기록을 세웠다. 6월 20일에는 개막일로부터 70일, 51번째 경기만에 시즌 20승을 달성했으며, 그 시점에서의 기록은 9번의 완봉승이 포함된 20승 2패, 평균 자책 0.57이었다. 64와 1/3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일본 역대 최고 기록도 달성하였다.

1962년 9월 5일, 메이저 리그의 전설적인 투수인 월터 존슨의 기록을 깨는 통산 3,509번째 탈삼진을 기록했다. 1963년 6월 30일에 통산 311승을 기록하면서 벳쇼 다케히코가 가지고 있던 통산 310승을 넘어서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역대 최다승 투수로 등극했다.

1964년 시즌까지 14년 연속 20승(선발 20승 이상은 1955년(22선발승)이 유일했으며 그 해 9완봉승을 거두었는데 1952년 프랜차이즈 제도 시행 뒤 선발 20승 이상 좌완투수 최다완봉으로 남아 있음), 통산 353승(239선발승)을 거두면서 특히 요미우리 자이언츠를 상대로 통산 65승을 거두었는데 이는 역대 1위의 기록이다. 고쿠테쓰 시절 가장 많은 승수를 거둔 상대는 히로시마로 83승이고, 요미우리 자이언츠에게는 72패를 당하기도 했다.
1965년 B급 14년 선수 제도(지금의 프리 에이전트 선수 제도)에서 권리를 행사하여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가네다가 고쿠테쓰 스왈로스를 단념한 것은 1962년에 산케이 신문후지 TV가 구단 경영에 참가했을 때였다. 이 때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의 경영 방식에 반발하면서 고쿠테쓰가 구단 경영에서 손을 뗀 1965년의 요미우리 이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다(고쿠테쓰는 같은 해 5월 10일자로 산케이·후지에 구단을 매각했다).

요미우리에 입단할 당시 감독이었던 가와카미 데쓰하루는 다른 요미우리 선수들도 가네다의 좋은 점을 본받기를 바랐다. 실제로 가네다가 입단한 이후 요미우리 선수들은 “대단한 기록을 가진 선수임에도 자신들보다 더 열심히 훈련한다”라고 감탄했고 나가시마 시게오는 가네다로부터 몸 만드는 법을 전수받아 슬럼프에서 벗어났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고 통산 47승(29선발승)밖에는 거두지 못했지만 기존 선수들에게 좋은 귀감이 되어 9년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대기록 달성에 기여했다.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도 노장 투수의 경험을 높이 사서 일본 시리즈 1선발 투수로 등판시켰고, 요미우리에 있는 5시즌 동안 개막전 선발 투수로 4번이나 등판시켰다.

1969년 10월 10일, 시즌 마지막 경기인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경기는 일본 프로 야구 통산 첫 400승을 기념하는 은퇴 경기였다. 가네다의 등번호인 34번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통산 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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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사구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자책점 || WHIP
1950고쿠테쓰3020910812----.400727164.213212127--11431393723.941.57
1951564425402221----.5121488350.025722190--8233331591102.831.28
1952644123702425----.4901527358.028017197--10269821491263.171.33
1953473324612313----.6391233303.222210135--82291090802.371.18
1954533928272323----.5001435345.229019114--6269211281012.631.17
1955623734932920----.5921565400.027919101283502191791.780.95
1956682924522520----.5561393367.12222081323165086711.740.82
1957613525532816----.6361378353.02561793923061088641.630.99
19585631221163114----.6891252332.12161660433114063481.300.83
1959582514412119----.5251187304.12222679533130096862.540.99
1960573122422022----.4761253320.123827941612843197922.581.04
1961573223612016----.5561292330.12572781922623088782.131.02
1962483024112217----.5641342343.126525801082625078661.731.00
1963533025943017----.6381308337.02342083412872083741.980.94
1964443122422712----.6921221310.025036695323130100962.791.03
1965요미우리2817935116----.647542141.2951236401001038291.840.92
1966191210046----.40034184.172122533582036323.421.15
19673322611165----.762698170.01461357731323047432.281.19
196832194001110----.524585138.1122217130873057533.451.40
1969181110054----.55631172.16583510483039344.231.38
통산: 20년 || 944 || 569 || 365 || 82 || 39 || 400 || 298 || -- || -- || .573 || 22078 || 5526.2 || 4120 || 379 || 1808 || 85 || 72 || 4490 || 55 || 11 || 1706 || 1434 || 2.34 || 1.07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 통산 성적굵은 글씨는 NPB(일본 프로 야구) 기록

* 주요 타이틀
다승왕 : 3회 (1957년, 1958년, 1963년)
최우수 평균자책점 : 3회 (1957년, 1958년, 1965년)
최다 탈삼진 : 10회 (1955년 ~ 1959년, 1961년 ~ 1964년, 1967년)
* 주요 표창
사와무라 에이지상 : 3회 (1956년 ~ 1958년)
** 베스트 나인 : 3회 (1957년, 1958년, 1963년)

6.3. 지도자 경력

은퇴 후 닛폰 TV닛폰 방송의 야구 해설자로 활동했고, 탤런트로도 활동했다. 1973년부터 1978년까지, 그리고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롯데 오리온스의 감독을 두 차례 역임했다. 1974년에는 롯데의 퍼시픽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을 동시에 달성했다. 1975년 4월 23일부터 5월 5일까지는 심장 발작으로 휴양했으며, 감독 대행은 2군 감독이었던 다카기 기미오가 맡았다. 선수 시절 고쿠테쓰에서의 퍼펙트 게임 달성, 요미우리 시절의 400승 달성, 감독으로서는 롯데의 첫 일본 시리즈 우승 등 소속 구단에서 각각 위업을 달성했는데, 이 모두 주니치를 상대로 세운 기록이다.

롯데 감독이었던 1978년에는 일본 프로 야구 명구회를 설립하여 2009년 12월까지 회장과 대표 간사를 맡았다. 1988년에는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롯데 감독(1차) 당시 여러 차례 한국 실업야구 우수 선수 스카우트에 나섰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가네다 마사이치의 감독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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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구단순위경기승리패전승률게임차
홈런

타율

방어율
나이
1973년롯데3위130704911.5882위・2위139.2643.4340세
1974년1위130695011.5802위・1위114.2653.1841세
1975년4위13059656.4766위・2위108.2593.3342세
1976년3위130635611.5293위・3위99.2582.9643세
1977년3위130605713.5135위・1위111.2703.1744세
1978년4위130536215.4615위・3위115.2694.0145세
1990년5위13057712.44525.0132.2624.2257세
1991년6위13048775.38433.589.2604.2358세
통산: 8년101147146872.502A 클래스 4회, B 클래스 4회

* 굵은 글씨는 일본 시리즈 우승.
* 1973년부터 1982년까지는 전·후기제 도입으로 인해 게임차 란은 전기, 후기 순위 순으로 표시
* 1973년부터 1996년까지는 130경기 체제
* 1975년 4월 23일부터 5월 5일까지는 질병으로 인한 휴양. 감독 대행은 다카기 기미오
* 1990년 6월 24일부터 7월 23일까지 30일간 출장 정지. 감독 대행은 도쿠타케 사다유
* 통산 성적은 실제로 가네다가 지휘를 맡았던 경기에서의 성적

6.4. 수상 및 타이틀 경력

* 최다승: 3회 (1957년, 1958년, 1963년) ※2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최장 기록과 같음 (그 외에는 곤도 히로시, 무라야마 미노루, 히라마츠 마사지, 에가와 스구루, 엔도 가즈히코,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마사, 세스 그라싱어, 우쓰미 데쓰야, 스가노 도모유키, 아오야기 고요)
* 최우수 평균자책점: 3회 (1957년, 1958년, 1965년) ※스가노 도모유키에 이은 센트럴 리그 공동 2위. 2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최초이며, 현재는 스가에 이은 센트럴 리그 공동 2위
* 최다 탈삼진: 10회 (1951년 - 1953년, 1955년, 1956년, 1958년 - 1960년, 1963년, 1964년) ※(당시 연맹 표창 없음. 센트럴 리그에서는 1991년부터 표창) ※최다 기록, 3년 연속은 센트럴 리그 공동 2위. 2년 이상 연속을 여러 번 한 것은 사상 유일.
* 사와무라 에이지 상: 3회 (1956년 - 1958년) ※ 최다 타이기록 (다른 수상자는 스기시타 시게루, 무라야마 미노루, 사이토 마사키, 야마모토 요시노부). 3회 연속 수상은 최장 타이기록, 1956년은 쇼와 시대 출생 최초 수상
* 베스트 나인: 3회 (1957년, 1958년, 1963년)
* 야구 명예의 전당 경기자 표창 (1988년)
* 일본 선수권 시리즈 최우수 투수상: 1회 (1968년)
* 올스타 게임 최고 훈훈 선수: 1회 (1956년)
* 올스타 게임 MVP: 2회 (1960년 제2전, 1964년 제1전)
* 일본 프로 스포츠 대상 훈훈상: 1회 (1969년)
* 신어·유행어 대상 표현 부문 금상 (1991년, "가와사키 극장")

6.5. 주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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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소속팀주요 기록
1950年일본어고쿠테쓰
1951年일본어
1952年일본어
1953年일본어
1954年일본어
1955年일본어
1956年일본어
1957年일본어
1958年일본어
1959年일본어
1960年일본어
1961年일본어
1962年일본어
1963年일본어
1964年일본어
1965年일본어요미우리
1966年일본어
1967年일본어
1968年일본어
1969年일본어


* 14년 연속 20승 (1951년 ~ 1964년)
* 통산 400승
* 통산 4490탈삼진
* 통산 82완봉
* 통산 퇴장 횟수 : 8회
* 올스타전 출장 : 17회 (1951년 ~ 1964년, 1967년, 196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