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열 남궁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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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열 남궁씨는 주나라 왕족의 후예로, 고려와 조선 시대를 거치며 많은 인물을 배출한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고려 시대의 남궁원청이며, 함열(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 함라면)을 본관으로 한다. 고려 시대에는 남궁민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조선 시대에는 정신옹주와 혼인 관계를 맺은 남궁식, 그리고 여러 문과 급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근현대에는 남궁석과 남궁진이 각각 정보통신부 장관과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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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열 남궁씨 - 남궁진
남궁진은 대한민국의 정치인으로, 학생운동과 민주화 투쟁에 참여하여 신민당, 평민당, 민주당 등에서 주요 당직을 맡았고, 제14대, 15대 국회의원과 김대중 정부의 문화관광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햇볕정책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 함열 남궁씨 - 남궁영 (1962년)
남궁영은 대한민국의 공무원 출신으로, 기술고시 합격 후 충청남도청 주요 보직, 행정자치부 정책기획관 및 대변인을 거쳐 충청남도 행정부지사, 도지사 권한대행을 역임하고 현재는 세종인재평생교육진흥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함열 남궁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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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지역 | 익산시 |
시조 | (남궁원청) |
관련 인물 | 남궁민 남궁도 남궁웅 |
웹사이트 | 함열 남궁씨 종친회 웹사이트 |
한자 표기 | |
한자 | (함열 남궁씨) |
주요 인물 | |
인물 | 남궁민, 남궁계, 남궁찬, 남궁숙, 남궁익, 남궁침, 남궁두, 남궁제, 남궁경, 남궁집, 남궁옥, 남궁옥, 남궁억, 남궁염, 남궁영, 남궁벽, 남궁현, 남궁석, 남궁진, 남궁근, 남궁옥분, 남궁영, 남궁연, 남궁민, 남궁도, 남궁웅, 남궁경호 |
기타 정보 | |
관향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열읍 |
중시조 | 남궁득희(南宮得禧) |
집성촌 |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서울특별시 도봉구 충청남도 공주시 경기도 가평군 강원도 홍천군 |
2015년 인구 | 20,715명 |
2. 기원
남궁씨(南宮氏)는 중국에서 유래되었다. 본래 주나라의 왕족인 희성(姬姓)이었다. 주나라 이전의 상나라 때 남(南)쪽 궁(宮)에 살았다 하여 남궁(南宮)으로 성씨를 정하였다고 한다. 남궁씨를 처음 사용한 인물은 주 문왕(周文王)의 사우(四友) 중 한 사람인 남궁괄(适=括)로 추정된다. 그는 대장군으로 있을 때 상나라 주왕(紂王)에 의해서 투옥된 문왕을 구출하기도 하였다. 그는 무왕(武王)을 도와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를 건국한 공신으로 이상서(二尙書)에 오르고 한 지방을 식읍으로 받아 다스리게 되었으며 그 곳의 지명을 그의 성씨를 따라 남궁현(縣)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춘추시대 공자의 사위가 된 남궁괄(括)과는 동명이인(同名異人)이다.
2. 1. 한국 남궁씨
한국 남궁씨의 원조(遠祖)는 주(周)나라의 '''남궁수'''(南宮修)이다. 남궁수는 기자(箕子)와 함께 조선에 동래(東來)하면서 평양을 중심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건국하고 사도(司徒)의 직(職)에 올라 백성들에게 시서(詩書)와 예악(禮樂)을 가르쳤으며, 음식의 예법과 제사에는 편두(祭器)를 쓰게 하며 의관제도와 직제를 중국과 같게 하였다고 한다.3. 역사
함열 남궁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성씨이다.
고려 성종 때 남궁원청이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까지 몰아내고 문하시중평장사에 오른 기록이 있으나,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남궁득희를 1세조로 한다. 남궁득희의 증손 남궁민은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대부를 지냈고, 경상도도민전 겸 안렴존무사로 활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남궁계가 좌명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고, 남궁찬은 성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하였다. 남궁찬의 아들 남궁숙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우윤 등을 역임하며 능력 있는 관리로 평가받았다.[4] 다른 아들 남궁익은 문음으로 한성부 가낭관, 수운판관, 동복 현감을 역임하였다. 남궁익의 아들 남궁침은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남궁제는 선조 때 임진왜란 중 류성룡의 추천으로 감진관에 임명되어 한양의 기근 문제 해결에 기여하였다. 남궁경은 광해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조실록』 찬수에 참여하였으나, 인조반정 직후 삭직되었다.[5] 남궁집은 인조·효종 때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며 붕당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6] 남궁옥은 효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숙종 때까지 문장과 서화에 뛰어난 청백리로 이름을 알렸다.[7]
중종의 서녀 정신옹주는 남궁식과 혼인하였다.
3. 1. 고려시대
남궁원청(南宮元淸)은 비서랑(秘書郞)을 지내고, 991년(고려 성종 10년)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여진족을 백두산 북방까지 몰아내는 등 많은 공을 세워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임명되었으며, 감물아백(甘勿阿伯)에 봉해졌다. 이후 세보가 실전되어 그의 후손 '''남궁득희(南宮得禧)'''를 1세조로 한다.남궁득희의 증손 남궁민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지냈다. 1336년(고려 충숙왕 복위 5)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었을 때 정치관(整治官)에 임명되어 경상도도민전(慶尙道度民田) 겸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로 활약하였다.
3. 2. 조선시대
남궁계(? ~ 1446년)는 문음으로 벼슬을 시작하여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 3등에 책록되었다. 여러 관직을 거쳐 1436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한성부윤이 되었고, 1443년 중추원부사에 이르렀다. 세종은 그가 죽자 부의를 내리고 조문하였다.[3]남궁찬은 1477년(성종 8) 생원시에 장원, 1489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이조좌랑, 사간원헌납, 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499년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04년(연산군 10)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
남궁숙(1491년 ~ 1553년)은 남궁찬의 아들로, 1533년(중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 안산군수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경기도관찰사 홍섬의 장계에 따라 가자되었다. 이후 승정원 좌부승지, 황해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한성부우윤,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553년 동지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명리를 탐했으나 직무에는 근면하여 능력있는 관리로 평가받았다.[4]
남궁익은 남궁찬의 둘째 아들로, 문음으로 한성부 가낭관, 수운판관, 동복 현감을 역임하였다. 아들은 남궁희, 남궁침, 남궁개이다.
남궁침(1513년 ~ 1573년)은 남궁익의 아들로,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지평, 헌납, 홍문관 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548년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어 구황 실태를 조사하였고,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후 홍문관직제학, 승정원 좌승지, 동지중추부사, 개성부유수, 한성부우윤, 한성부좌윤, 형조 참판, 전라도관찰사, 함길도관찰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1567년 명종 승하 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다.
남궁제는 남궁숙의 아들로, 1568년(선조 1)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여 백천 군수와 연안 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류성룡의 추천으로 감진관에 임명되어 호남에서 조운된 곡식으로 한양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였다. 1596년(선조 29) 당상관으로 가자되었다.
남궁경(1562년 ~ ?)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급제, 1612년(광해군 4)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선조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삭직되었다가 1625년(인조 3)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5]
남궁집(1601년 ~ 1668년)은 1630년(인조 8)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 인조·효종 때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붕당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는 동·서 양당이 여러 파로 갈라져 인물 추천에 편당이 이루어지고, 바른 말을 하는 자를 배척하여 비루한 자가 등용된다고 지적하였다. 공정하고 식견과 도량이 있는 자를 삼공에, 재질과 기량이 적당한 자를 6조·3사의 장으로 삼아 책임 있는 인재 등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삼졸와유고』가 있다.[6]
남궁옥(1620년 ~ 1699년)은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9년(현종 10) 예조정랑으로 길재·김장생을 제향한 서원에 사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일곱 번 군현의 수령을 지냈고, 1690년(숙종 16)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 시정을 역임하였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고, 청백리로 이름이 높았다. 개풍천마산 대흥사중건비문의 글씨가 남아있다.[7]
정신옹주는 중종의 서녀이며, 남궁식과 혼인하였다.
4. 본관
옛 함열(咸悅)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함라면이다. 함라면 인근의 함열읍이 그 이름을 이어받았다. 마한 때 감물아현(甘勿阿縣)이라 불리다가, 통일 신라 경덕왕 때 함열(咸悅)로 고쳤다.
5. 인물
남궁민은 남궁득희의 증손으로 1336년(고려 충숙왕 복위 5)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1347년(충목왕 3) 정치도감(整治都監)이 설치되었을 때 정치관(整治官)에 임명되어 경상도도민전(慶尙道度民田) 겸 안렴존무사(按廉存撫使)로 활약하였다. 벼슬은 간의(諫議)에 이르렀다.[1]
남궁계는 6세손으로, 문음(門蔭)으로 출사하여 3품에 올랐고, 1401년(태종 1) 좌명원종공신(佐命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1413년(태종 13) 대호군(大護軍), 1426년(세종 8) 정주목사(定州牧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事)를 역임하였다. 1430년(세종 12) 동지총제(同知摠制), 1435년(세종 17)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 1436년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온 후 한성부윤(漢城府尹)이 되었다. 1439년 전라도 도절제사(全羅道都節制使)를 거쳐 경주부윤(慶州府尹)에 제수되었다. 1443년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에 이르렀고, 1446년 졸(卒)하자 세종이 부의(賻儀)를 내리고 조문(弔問)하였다.
남궁익은 남궁찬의 둘째 아들로, 문음(門蔭)으로 한성부 가낭관(漢城府假郞官)을 제수받았고, 중종조에는 수운판관, 명종조에는 동복 현감(同福縣監)을 역임하였다.
남궁제는 남궁숙의 아들로, 1568년(선조 1) 증광 생원·진사 양시(兩試)에 합격하여 백천 군수와 연안 부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다음 해인 1593년(선조 26) 류성룡이 감진관(監賑官)에 임명하여 호남에서 조운된 곡식을 이용해 한양의 기근 문제를 해결하였다. 1596년(선조 29) 당상(堂上)을 가자(加資) 받았다.
남궁경은 1606년(선조 39) 사마시에 급제, 1612년(광해군 4)에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16년 세자시강원필선으로 『선조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 직후 삭직되었다가 뒤에 풀려나 1625년(인조 3) 사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5]
남궁옥은 1646년(인조 24)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2년(효종 3)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1669년(현종 10) 예조정랑으로 길재, 김장생을 제향한 서원에 사액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일곱 번 군현의 수령을 지냈다. 1690년(숙종 16) 승문원판교 겸 춘추관편수관을 거쳤으며, 시정(寺正)까지 이르렀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특히 속필로 유명했다. 청백(淸白)하기로 이름이 높았다. 작품으로 개풍천마산(開豐天摩山) 대흥사중건비문(大興寺重建碑文)의 글씨가 있다.[7]
5. 1. 고려
남궁민은 고려 충숙왕 때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간의대부를 지냈다.[1]5. 2. 조선
남궁찬은 9세손으로, 1477년(성종 8) 생원시에 장원, 1489년(성종 20)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에 임명되었다. 1493년(성종 24) 이조좌랑, 1495년(연산군 1) 사간원헌납과 홍문관교리를 역임하였다. 1499년 봉정대부 의정부 사인 지제교 겸 승문원 교감으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고, 1500년 제주목사, 1504년(연산군 10) 강원도 관찰사가 되었다.[4]남궁숙은 10세손으로, 1516년(중종 11) 생원이 되고, 1533년(중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박사에 임명되었다. 1544년 안산군수로 재직 중 선정을 베풀어 가자되었고, 1547년(명종 2) 승정원 좌부승지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관찰사가 되었고, 1550년(명종 5) 한성부우윤, 1551년(명종 6) 함경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553년(명종 8) 동지중추부사로 사망하였다. 명리를 탐하였으나 직무에는 근면하여 능력있는 관리로 평가받았다.[4]
남궁침은 남궁익의 아들로,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1544년 사간원정언, 1546년(명종 1) 지평·헌납을 거쳐 1548년 홍문관 수찬으로서 강원도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중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이조좌랑과 부응교를 역임했다. 1552년 홍문관전한을 거쳐 경상도 어사로 파견되었고, 1553년 승정원 좌승지에 올랐다. 1557년 동지중추부사, 1558년 진위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같은해 장례원판결사를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었다. 1563년 형조참판, 1566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1567년 명종의 승하 시 부총관으로서 치안을 담당하였고, 선조 즉위 후 형조참판으로 재직하였다.
남궁집은 1618년(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 1630년(인조 8)에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인조·효종 때에는 대사헌·대사간을 역임하였다. 1660년(현종 1) 당시의 붕당정치를 비판하면서 붕당설(朋黨說)을 상소하여, 인물 등용에 있어 공정하고 식견이 밝고 도량이 있는 자를 삼공(三公)의 자리에 앉히고, 재질과 기량이 적당한 자들을 뽑아 6조·3사의 장으로 삼아 책임 있는 인재등용을 하도록 주장하였다.[6]
5. 3. 근현대
6. 항렬자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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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東) | 광(光) | 주(珠) | 종(鍾) | 승(承) | 口억(檍) | 口현(炫) | 口용(墉) | 口련(鍊) | 口원(源) | 수(秀) | 명(明) | 기(基) | 옥(鈺) | 영(永) |
7. 과거 급제자
함열 남궁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5명을 배출하였다.[8]
문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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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궁민 |
문과 | 무과 | 생원시 | 진사시 | 음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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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함열 남궁씨 咸悅南宮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논문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7
[4]
백과사전
남궁숙
[5]
백과사전
남궁경
[6]
백과사전
남궁집
[7]
백과사전
남궁옥
[8]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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