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준호 (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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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함준호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출신의 군인으로, 경성 경기도립고등상업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를 중퇴한 후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 광복 후 군사영어학교를 졸업하고 국방경비대에 임관하여 제3연대장, 제5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7사단 1연대장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했다. 동두천과 의정부 방어전을 치르다 서울 수비를 위해 창동 전투에 참여했으나, 1950년 6월 27일 수유동에서 북한군 정찰대와 교전 중 전사했다. 그는 한국군 연대장급 이상 장교 중 최초의 전사자였으며, 사후 태극무공훈장과 육군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중 민간인 학살 연루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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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준호 (군인)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씨명 | 함준호 |
한글 표기 | 함준호 |
한자 표기 | 咸俊鎬 |
가타카나 표기 | 함 주노 |
히라가나 표기 | 간 슌코 |
출생일 | 1921년 11월 17일 |
사망일 | 1950년 6월 27일 (향년 28세)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묘소 | 국립서울현충원 장군 묘역 1-7 |
군 경력 | |
소속 | 대일본제국 육군 대한민국 육군 |
복무 기간 | 1946년 - 1950년 |
최종 계급 (일본군) | 육군 소위 |
최종 계급 (한국군) | 육군 준장 (추증) |
참전 | 한국 전쟁 창동 전투 |
서훈 | 태극무공훈장 (추서) |
공직 정보 | |
원어명 | 咸俊鎬 |
출생지 | 일제강점기 경성부 종로구역 |
사망지 | 대한민국 서울 강북구 우이동 |
본관 | 강릉 |
국가 | 미군정청 국방경비대 |
직책 | 통위부 제5여단 제3연대장 |
임기 | 1948년 5월 1일 ~ 1948년 8월 15일 |
수상 | 안재홍 미군정청 민정장관 |
장관 | 존 리드 하지 미군정청 군정장관 |
형제 | 함건호 (첫째 아우) 함신호 (막내 아우) |
정당 | 무소속 |
배우자 | 없음 |
자녀 | 없음 |
군 복무 | 대한민국 육군 |
근무 | 육군 제7사단 1연대장 |
지휘 | 육군 제5사단 부사단장 육군 제5여단 3연대 육군 제7사단 1연대장 |
2. 생애
1921년 11월 1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태어나 경성 경기도립고등상업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전신)에 진학했다.[1]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2] 광복 이후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2월 18일 졸업하고 남조선국방경비대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했다.[1]
1948년 8월 제3연대장에 임명된 후 여순 사건 진압에 참여하여 여수와 순천 탈환에 공을 세웠다.[1] 1949년 1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전개, 김지회, 홍순석 등 제14연대 반란 주모자들을 사살하였다.[1] 이후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 제5사단 부사단장, 제7사단 1연대장을 역임하였다.
한국 전쟁 발발 후 동두천과 의정부 방어를 맡았으나, 1950년 6월 27일 우이동 쪽으로 가던 중 북한군 정찰대에 의해 사살되었다.[1][3]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육군 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되어 있다.[1]
2. 1. 초기 생애 및 학창 시절
1921년 11월 1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출생하였으며, 경기상업고등학교(경성 경기도립고등상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였다. 재학 중에는 일본인 학생들을 제치고 학생대대장을 지냈다. 이후 경성법학전문학교(오늘날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진학하였으며, 1944년 경성법학전문학교 재학 중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입대했다.[2]2. 2. 군 경력
군사영어학교에 입학하여 1946년 2월 18일 졸업과 동시에 국방경비대 육군 참위(소위)로 임관하였다.(군번 10050)[1]1948년 8월, 제3연대장에 보임되었으며, 여순 사건이 발생하자 부연대장인 송석하 소령의 남원 대대를 진압작전에 출동시켜 여수와 순천을 탈환하는데 공을 세웠다.[1]
1948년 12월 30일 작전을 종료하고 제15연대와 교대하여 원대로 복귀, 1949년 1월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토벌작전을 전개, 제14연대 반란 주모자인 김지회와 홍순석 중위 등을 사살하였다.[1]
이후 지리산지구전투사령관으로 공비토벌작전을 수행하였고, 1949년 4월 18일,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차장으로 복귀한 정일권의 후임으로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50년 4월 30일에는 제5사단 부사단장을 거쳐 제7사단 1연대장으로 부임하였다.[1]
2. 3. 한국 전쟁 참전과 전사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함준호는 동두천과 의정부 방어를 맡았다. 그러나 북한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려 후퇴해야 했다.[1] 이후 서울 사수를 위해 창동 전투에 참전하였으나, 1950년 6월 27일 제3대대 철수를 위해 우이동 쪽으로 이동하던 중 북한군 정찰대에 의해 사살되었다.[1][3] 그는 한국군 연대장급 이상 고급 장교 중 최초의 전사자였다.[1]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육군 준장으로 추서되었다.[1] 현재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되어 있다.[1]
2. 4. 사후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되고 육군 준장으로 추서되었다.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장군묘역 1-7에 안장되어 있다.[1] 휴전 후, 전사지인 서울특별시 수유동(당시 성북구, 현 강북구)에 현충비가 건립되었으나, 1969년에 서울 현충원으로 이전되었다.[4]3.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과 민간인 학살 논란
1948년 8월, 함준호는 제3연대장에 임명되었고, 그해 10월에 발생한 제14연대 반란 진압에 참여했다. 제3연대는 전주에서 남원으로 이동하여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김지회, 홍순석 등 반란 주모자를 사살하는 성과를 올렸다.[1]
그러나 토벌 작전 기간 중 제3연대 정보과와 제2대대는 산청군 읍면, 삼장면, 단성면과 하동군 옥종면 등지에서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학살 직전 게릴라와 민간인을 선별하는 장소에 함준호가 있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그가 휘하 부대의 학살을 묵인하거나 살해 명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민간인 학살에 직접적인 책임을 지고 있다고 발표했다.
4. 일화
함준호는 서예에 능하여 경기상업고등학교 재학 시절 전국학생서화전람회에서 최우수작품으로 입상했으며, 특히 중국 서예의 대가인 구양순의 필치를 능가한다는 찬사를 받았다.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에서는 공비들을 자수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국군에 의해 통비(通匪) 혐의를 받던 사람이 스스로 찾아와 "이틀만 석방해주면 국군이 탈취당한 무기를 찾아오겠다"고 하자 그를 풀어주었다. 이틀 후 그는 탈취한 무기와 함께 빨치산 16명을 연대 지휘소(CP)로 데려왔다. 이유를 묻자 그는 “함 선생의 말씀과 어진 성품에 감복하여 자수를 결정하게 되었다”고 답하였다.
5. 학력
- 경성 경기고등상업학교 졸업
- 경성법학전문학교 전문학사
- 군사영어학교 1기
- 대한민국 육군보병학교 졸업
참조
[1]
웹사이트
함준호(咸俊鎬)
http://people.aks.ac[...]
韓国学中央研究院
2018-08-03
[2]
서적
朝鮮戦争/韓国編 中巻
[3]
웹사이트
6⋅25전쟁사2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전투
http://medcmd.mil.kr[...]
国防部軍史編纂研究所
2018-08-05
[4]
웹사이트
함준호
http://dobong.grandc[...]
韓国学中央研究院
2018-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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