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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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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허부원은 명나라 시대의 인물로, 담약수의 제자 당추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1562년 진사가 되었다. 남경 및 북경의 이부주사를 거쳐, 광동안찰사첨사, 복건안찰사첨사를 역임했다. 만력제 치세에 복건순무로 재직하며 임진왜란 발발 후 일본에 간첩을 파견하여 정세를 파악하고,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피살 사건을 처리했다. 이후 남경대리시경, 남경병부우시랑 등을 거쳐 병부좌시랑까지 올랐으며, 1604년에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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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부원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허부원
원어명許孚遠
군주만력제
출생일1535년 ?월 ?일
출생지절강성(浙江省) 덕청(德淸)
사망일1604년 8월 20일 (음력 1604년 7월 25일)
거주지명 북경
별명자는 맹중(孟仲) 혹은 맹중(孟中), 호는 경암(敬菴), 시호는 공간(恭簡)
경력문관, 문장가
국가명나라
직책복건순무
임기1592년 ~ 1594년
종교유교(성리학)
자녀아들 허대수(許大受)

2. 생애

저장성 호주부 덕청현 출신으로, 담약수의 제자인 당추(唐樞)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명나라 가정 41년(1562년) 임술과(壬戌科) 진사 시험에 제이갑(第二甲) 32등으로 합격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1]

여러 관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고, 만력제 시기인 만력 20년(1592년) 12월에는 도찰원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겸 복건순무로 임명되었다.[8] 당시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한 상태였기에, 허부원은 복건성 지역 책임자로서 전쟁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특히 병부상서 석성의 지시에 따라 일본에 간첩을 파견하여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일본 원정군 파견을 건의하기도 했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또한 복건순무 재임 중 스페인필리핀 총독 피살 사건과 관련된 외교 문제[15][16] 및 지역 내 흉년 문제[14] 등을 처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 참고)

만력 22년(1594년) 11월, 남경 대리시경으로 자리를 옮겼고,[9] 이후 남경병부우시랑[10]을 거쳐 만력 26년(1598년) 8월에는 병부좌시랑으로 승진하였다.[11]

만력 32년(1604년) 7월 25일 사망하였으며,[12] 당시 사람들은 그를 현인(賢人)으로 평가했다. 사후 이듬해인 만력 33년(1605년) 4월 9일, 남경공부상서로 추증되었고, 아들 한 명에게 국자감 입학 자격을 주는 음서 혜택이 내려졌다.[13] 저서로는 "경화당집"이 있으며, 그중 일부가 "명경세문편"에 수록되어 전해진다.

2. 1. 관직 생활

담약수(湛若水)의 제자 당추(唐樞)에게서 배웠다. 가정 41년(1562) 임술과(壬戌科) 제이갑(第二甲) 32등으로 진사가 되었다.

남경공부주사(南京工部主事)로 관직 생활을 시작하여 남경이부주사(南京吏部主事)를 거쳐 북경 이부주사(北京吏部主事)로 옮겼다. 당시 상서(尙書) 양박(楊博)은 허부원이 강학(講學)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인사 고과인 대계(大計)에서 허부원과 같은 저장성 출신 관료 절반을 파직시키면서도, 자신과 고향이 같은 산서(山西) 출신은 한 명도 파직하지 않았다. 이에 허부원이 불만을 나타내자 양박은 그를 좋지 않게 보았고, 결국 허부원은 병가를 내야 했다. 이후 대학사(大學士) 고공(高拱)의 추천으로 이부고공사주사(吏部考功司主事)가 되었다.[1]

융경 4년(1570) 5월, 이부고공사주사에서 광동안찰사첨사(廣東按察司僉事)로 승진했다.[2] 광동에서는 도적 이무(李茂)와 허준미(許俊美)를 회유하고, 왜구와 연관된 무리(倭黨) 72명을 투항시키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복건안찰사첨사(福建按察司僉事)로 자리를 옮겼다.

융경 6년(1572) 8월, 융경제가 사망하고 만력제(萬曆帝)가 즉위하면서 고공이 실각하고 장거정이 내각을 장악하는 정치적 변화 속에서, 왕전(王篆)이 허부원을 고공의 세력으로 무고하여 인사고과에서 강등되어 양회도전운염사사판관(兩淮都轉運鹽使司判官)이 되었다.[3]

이후 병부낭중(兵部郞中)을 거쳐 건창부지부(建昌府知府)가 되었다. 건창부지부 시절에도 틈틈이 강학을 하였으며, 이때 공사(貢士) 등원석(鄧元錫)과 유원경(劉元卿)과 교류하였다. 만력 12년(1580) 8월, 급사중(給事中) 추원표(鄒元標)의 추천으로 건창부지부에서 섬서제학부사(陝西提學副使)로 발탁되었다.[4] 만력 15년(1583) 4월, 섬서제학부사에서 순천부부승(順天府府丞)으로 승진했다.[5] 만력 16년(1584) 3월, 응천부윤(應天府尹)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 이재(李材)의 소송 사건에 연루되어 2품 강등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만력 20년(1592) 4월, 광서부사(廣西副使)에서 통정사우통정(通政司右通政)으로 승진하였고,[7] 같은 해 12월에는 도찰원(都察院) 우첨도어사(右僉都御史) 겸 복건순무(福建巡撫)로 임명되었다.[8] 당시는 임진왜란으로 일본군조선을 침략한 시기였다. 북경병부상서 석성(石星)의 명령에 따라, 허부원은 복건에서 일본으로 밀정을 파견했다. 금의위 지휘 사세용(史世用)을 상인으로 위장시켜 오스미국 우치노우라(內之浦, 현재 가고시마현 기모쓰키초)에 잠입시켰다. 사세용은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를 보좌하던 명나라 사람 허의후(許儀後)를 통해 일본 정세를 파악했다. 그 결과, 시마즈 요시히사를 비롯한 많은 다이묘들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독재를 두려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반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사세용은 명나라 군대 20만 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반(反)히데요시 다이묘들과 연합하면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허부원에게 보고했다. 이에 허부원은 북경 조정에 일본 원정군 파견을 건의하고 두 번째 밀정을 보냈으나, 당시 심유경을 통해 일본과의 강화를 추진하던 석성은 비용 문제를 들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만력 21년(1593) 복건성에 흉년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자 허부원은 가격 인상을 금지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유발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속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도학(道學)을 자부하지만 경제에는 어둡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만력 22년(1594)에는 스페인필리핀(루손) 총독의 아들이 사신을 보내, 화교 상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총독을 살해하고 배를 탈취해 달아났다고 복주부(福州府)에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다. 허부원이 이를 조정에 보고하자, 루손 사신을 후대하고 일본 정세를 살피라는 칙허가 내려졌다. 이를 계기로 복주와 마닐라 간의 외교 접촉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1594년) 11월, 허부원은 남경 대리시경(南京大理寺卿)으로 전임되었다.[9] (명나라 시기 남경의 관직은 명목상 한직으로 여겨졌다.) 만력 23년(1595) 4월, 남경대리시경에서 남경병부우시랑(南京兵部右侍郞)으로 승진했다.[10] 이후 일본과의 강화 협상이 결렬되고 석성이 실각하자, 만력 26년(1598) 8월에는 병부좌시랑(兵部左侍郎)으로 승진하였다.[11]

만력 32년(1604년) 7월 25일 사망하였다.[12] 당시 사람들은 그를 현인(賢人)으로 평가했다. 사후 만력 33년(1605년) 4월 9일, 남경공부상서(南京工部尙書) 관직이 추증되었고, 아들 한 명에게 국자감(國子監) 입학 자격을 주는 음서(蔭敍) 혜택이 내려졌다.[13]

2. 2. 복건순무 시절의 주요 활동

만력 20년(1592년), 전임 복건 순무 장여제가 해임되면서 허부원이 그 자리에 기용되었다.[14] 복건순무로 재임하는 동안 허부원은 여러 중요한 사안들을 처리했다.

우선, 복주(福州) 지역의 기근으로 인한 민란 발생을 막기 위해 노력했으며, 승려들이 소유한 토지인 승전(僧田)의 6할을 관청으로 환수하는 조치를 취했다. 또한 백성들을 모집하여 해단(海壇) 지역의 황무지 약 83,000여 무(畝)를 개간하고, 그곳에 성을 쌓고 군영을 설치하여 병사들에게 지키도록 했다. 이러한 성공적인 개발 경험을 바탕으로 복건성의 남일(南日)과 팽호(彭湖), 절강성의 진전(陳錢), 금당(金塘), 옥환(玉環), 남궤(南麂) 등 다른 섬 지역에도 유사한 정책을 시행하고자 계획했다.

그러나 만력 21년(1593년) 복건성에 흉작이 들어 쌀값이 폭등하자, 허부원은 쌀값 인상을 금지하는 조치를 내렸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쌀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유발하여 굶주리는 백성들이 속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로 인해 일부 관료들로부터 "무신 허부원은 도학(道學)을 자부하지만 경제에는 어둡고, 군민 위에 서는 것이 어렵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허부원의 복건순무 재임 시기는 임진왜란 발발 초기와 겹쳤기 때문에, 그는 임진왜란과 관련된 여러 업무들을 처리해야 했다. 또한 만력 22년(1594년)에는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의 아들이 복주부에 사신을 보내 자신의 아버지가 화교 반란으로 살해당했다며 제기한 소송 사건을 조정에 보고하기도 했다. 이 두 사안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단에서 다룬다.

같은 해(1594년), 허부원은 남경의 대리시경(大理寺卿)으로 전임되었다. 이는 명나라의 부도(副都)인 남경에 설치된 명목상의 한직이었다.

2. 2. 1. 임진왜란과 일본

복건순무 재임 기간은 임진왜란 발발 초기와 겹쳤기에, 허부원은 임진왜란과 관련된 여러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당시 명나라 병부상서였던 석성(石星)은 지휘(指揮) 사세용(史世用)에게 일본 정탐 임무를 맡겼다. 사세용은 복건성 천주부 동안현 출신 상인 허예(許豫)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다음 해 허예가 먼저 귀국하여 허부원에게 일본의 정세를 보고했으며, 허예의 동료 상인 장일학(張一學)과 장일치(張一治)도 함께 보고에 참여했다. 허부원은 이 보고들을 종합하여 명 조정에 상주했다. 그는 일본의 여러 다이묘(大名, 당시 명나라 기록상 '추장')들에게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를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자는 일본 국왕으로 책봉하겠다고 설득할 것과, 간첩 활용(용간, 用間), 방어 준비(비어, 備禦), 토벌(정초, 征勦)을 적절히 구사하여 일본군을 물리칠 것을 건의하였다.[14]

사세용은 밀항선 선원으로 위장하여 오스미국 우치노우라(현 가고시마현 기모쓰키정)에 잠입했다. 그는 사쓰마의 시마즈 요시히사 밑에서 일하던 명나라 사람 허의후(許儀後)를 통해 일본 내부 사정을 파악했다. 당시 일본의 여러 다이묘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권력을 두려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품고 있었으며, 시마즈 요시히사를 포함한 많은 다이묘들이 히데요시를 싫어한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세용은 명나라 군대 20만 명을 일본에 파견하여 반(反) 히데요시 성향의 다이묘들과 연합하면, 히데요시가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허부원에게 보고했다. 허부원은 이 일본 원정 계획을 북경 조정에 건의함과 동시에 두 번째 간첩을 일본에 파견했다. 그러나 병부상서 석성은 자신이 기용했던 심유경(沈惟敬)을 통한 강화 교섭을 추진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용이 많이 드는 원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만력 22년(1594년) 10월 3일, 허부원은 다른 중요한 사건을 조정에 보고했다. 여송(呂宋, 루손) 추장의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가 중국인들에게 살해당하고 재물을 빼앗겼다며 소송을 제기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여송추장은 스페인령 필리핀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Goméz Pérez Dasmariñas)를 가리킨다. 사건의 전말은 다스마리냐스가 몰루카 제도 정복을 위해 필리핀에 온 중국인들을 노 젓는 선원으로 고용했으나, 스페인인들의 가혹한 대우에 불만을 품은 선원 반화오(潘和五) 등이 다스마리냐스를 살해하고 배를 타고 도주한 사건이었다. 그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Luis Pérez Dasmariñas)가 이 사건을 명나라에 알리고 책임자 처벌을 요구한 것이다.[16]

당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과 전쟁 중이던 명나라 조정은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일본의 내부 사정을 정탐하고자 했다. 병부는 범인을 체포하여 처벌하는 한편, 루손에서 온 사신을 후하게 대접하여 명나라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하고, 이를 통해 일본의 정보를 수집할 것을 건의했다. 만력제는 이를 허락하였다.[15] 이 일을 계기로 복주와 마닐라 사이에 외교 교섭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2. 2. 2. 필리핀 총독 피살 사건 처리

만력 22년(1594년) 10월 3일, 당시 복건 순무였던 허부원은 여송(스페인령 필리핀) 총독의 아들이 보낸 소송 내용을 조정에 보고했다. 내용은 중국인 선원들이 자신의 아버지인 총독 고메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Goméz Pérez Dasmariñas)를 살해하고 보물을 빼앗아 달아났다는 것이었다.[15][16]

사건의 전말은 다음과 같다. 필리핀 총독 다스마리냐스는 몰루카 제도 정복을 위해 필리핀에 온 중국인들을 노 젓는 선원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의 가혹한 대우를 견디지 못한 선원 반화오(潘和五) 등이 다스마리냐스를 포함한 스페인인들을 살해하고 배를 빼앗아 도주했다. 이에 총독의 아들 루이스 페레스 다스마리냐스(Luis Pérez Dasmariñas)가 명나라 복주부에 사신을 보내 소송 형식으로 이 사건을 알린 것이다.[16]

허부원의 보고를 받은 명나라 병부(兵部)는 범인을 체포하여 처벌하고, 필리핀에서 온 사신은 잘 대접하여 명나라에 우호적인 감정을 갖게 하는 한편, 이 기회를 이용해 일본의 사정을 정탐할 것을 건의했다. 당시 명나라는 임진왜란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여 일본과 전쟁 중이었기 때문에 일본의 동향 파악이 중요했다. 만력제는 병부의 건의를 받아들여 이를 허락했다.[15] 이 사건을 계기로 복주와 마닐라 사이에 외교 교섭이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3. 가족 관계

wikitext

관계이름
증조부허종명(許宗明)
조부허보(許輔)
허송(許松)
심씨(沈氏)
서씨(舒氏)
동생허도원(許道遠)
동생허지원(許志遠)
동생허행원(許行遠)
아들허대수(許大受)
손자허원조(許元釗)


4. 평가

당시 사람들은 허부원을 현인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복건 순무 시절, 만력 21년(1593년) 흉작으로 쌀값이 폭등했을 때, 쌀값 인상 금지 조치가 오히려 상인들의 매점매석을 유발하여 굶주리는 백성이 속출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 때문에 일부 관료들로부터 "도학을 자부하지만 경제에 어둡고 백성을 다스리기 어렵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참조

[1] 서적 『明史』 「列傳171·儒林2」 中 許孚遠
[2] 서적 《大明穆宗莊皇帝實錄》 卷45 隆慶4년 5월 6일조
[3]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4 隆慶6년 8월 15일조
[4]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152 萬曆12년 8월 19일조
[5]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185 萬曆15년 4월 10일조
[6]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196 萬曆16년 3월 19일조
[7]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47 萬曆20년 4월 17일조
[8]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55 萬曆20년 12월 10일조
[9]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79 萬曆22년 11월 1일조
[10]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84 萬曆23년 4월 8일조
[11]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325 萬曆26년 8월 1일조
[12]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398 萬曆32년 7월 25일조
[13]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408 萬曆33년 4월 9일조
[14]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73 萬曆22년 5월 6일조
[15] 서적 《大明神宗顯皇帝實錄》 卷278 萬曆22년 10월 3일조
[16] 서적 張燮, 『東西洋考』, 卷5 「東洋列國考」 呂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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