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봉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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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현봉학은 일제강점기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학위를 받은 후, 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의학 석·박사 학위를 취득한 의학자이다. 한국 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에서 미군 지휘관을 설득하여 북한 피난민 98,000여 명을 구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의 쉰들러'로 불렸다. 미국 임상병리학회 이스라엘 데이비슨상 등을 수상했고, 2007년 미국 뉴저지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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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봉학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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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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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현봉학 |
출생일 | 1922년 6월 23일 |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함경북도 성진군 |
사망일 | 2007년 11월 25일 |
사망지 | 미국 뉴저지주 플레인필드 |
국적 | 미국 |
학력 |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의학 박사 |
직업 | 의사 교수 |
2. 학력
- 1941년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 194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 1956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의학 석사
- 1959년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대학원 의학 박사
3. 생애
함경북도 성진에서 태어나 함흥고등보통학교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를 졸업했다. 광복 후 가족과 함께 월남하여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근무하다 미국으로 유학,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서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국군 해병대 문관으로 복무하던 중 뛰어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특히 흥남 철수 작전 당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을 설득하여 약 9만 8천 명의 북한 피난민을 미군 군함에 태워 구출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는 인도주의적 업적을 남겼다.
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뉴저지주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장 등으로 재직하며 병리학 및 혈액학 분야에서 활동했다. 여러 미국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으며,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미국과 한국의 여러 의학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양국 의학계 발전에 기여했다.
2007년 11월 25일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동생으로는 문필가 피터 현과 대한민국 해군 제독 현시학이 있다. 현봉학 박사 본인은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 서울 세브란스 빌딩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흥남 철수 피난민의 아들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그의 인도주의적 공헌에 대해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3. 1. 초기 생애 및 교육
함경북도 성진 욱정에서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목을 지낸 현원국 목사와 한국 장로교 여전도회장을 역임한 신애균 여사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함경도의 명문 학교로 꼽히던 함흥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했다.연도 | 내용 |
---|---|
1941년 | 함흥고등보통학교 졸업 |
1945년 |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
광복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하였고, 1947년부터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의사로 일했다. 당시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버지니아주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서 유학할 기회를 얻었다. 유학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 과정을 수료했다.
1950년 3월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를 시작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3. 2. 해방 이후
해방 후 가족과 함께 38선을 넘어 월남했고,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다. 이화여대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윌리엄스 부인의 주선으로 미국 버지니아 주도 리치몬드에 있는 버지니아주립의과대학에서 유학하여 2년 후 임상병리학 펠로우십을 수료했다.1950년 3월 귀국해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다가 한국전쟁을 맞았다. 국군 해병대에서 문관으로 근무하던 중 1950년 10월 중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가 10군단 예하인 국군 해병대를 시찰했을 때 통역을 맡았다.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곧바로 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알몬드 장군에게 피난민들의 승선을 간곡히 요청하여 9만 8천여 명의 북한 주민을 미군 군함에 태워 남쪽으로 탈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며 인도주의적 업적으로 높이 평가받는다.
전쟁 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의과대학 장로교메디칼센터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같은 대학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의사 및 의학자로서 활동했다.
기간 | 소속 | 직책/활동 |
---|---|---|
1947년 | 서울 적십자병원 | 근무 |
1950년 3월~ | 세브란스 병원 | 근무 |
한국전쟁 중 | 국군 해병대 | 문관 |
한국전쟁 중 | 미 제10군단 민사부 | 고문 |
전후 | 펜실베이니아 의대 장로교메디칼센터 | 레지던트 |
1961년-1962년 | 뉴저지주 플레인필드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 병리전문의 |
1962년-1987년 | 뉴저지주 뮐렌버그 메디칼센터 연구소 | 소장 |
미정 | 버지니아 의대 |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
미정 | 콜럼비아 내과·외과의대 |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
미정 | 필라델피아 토머스 제퍼슨 의과대 |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
미정 |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 |
미정 | 연세대 의대 | 객원교수 |
미정 | 대한민국 보건부 (현 보건복지부) | 장관 고문 |
미정 | 미 의학회 | 편집위원 |
미정 | 미 병리학회지 | 편집위원 |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및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한미 양국 의학계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2007년 11월 25일 오후 1시 30분(현지 시각)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문필가 피터 현과 대한민국 해군 제독 현시학 제독이 그의 동생이다. 현시학 제독은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 2018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현봉학 박사 본인도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12월 19일에는 서울 세브란스 빌딩 1층에 그의 업적을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다.
흥남 철수 피난민의 아들인 문재인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은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 축사를 통해 현 박사와 유족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3. 3. 한국 전쟁과 흥남 철수
1950년 3월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근무하던 중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피난길에 올라 부산에서 해군 입대를 고려하기도 했으나, 대구에서 지인의 소개로 해병대 문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미국 유학 경험 덕분에 뛰어난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 주로 통역관으로 활동했다.[1][2][3][4][5]1950년 10월 중순, 강원도 고성에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이 한국 해병대를 시찰할 때 통역을 맡았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은 알몬드 소장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즉시 미 제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다.[1][2][3][4][5]
민사부 고문으로서 흥남 철수 작전에 참여하게 된 그는 중공군의 공세 속에 위험에 처한 수많은 북한 피난민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는 알몬드 소장에게 피난민들도 군함에 태워 함께 철수시켜 줄 것을 강력히 설득했다. 알몬드 소장은 작전상의 어려움을 표하며 처음에는 주저했으나, 현봉학의 인도주의적 호소와 끈질긴 설득에 결국 피난민 수송을 결정했다.[1][2][3][4][5] 알몬드 소장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제10군단장)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敵은 흥남 남쪽 원산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1]
현봉학의 노력으로 약 98,000명의 북한 피난민이 미군 군함과 상선에 승선하여 남쪽으로 피난할 수 있었다. 이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한 기적적인 일로 평가받으며,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1][2][3][4][5]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50년 12월 23일, 흥남 부두는 철수하려는 미군과 한국군 105,000명, 그리고 피난민 약 90,000명이 뒤엉켜 극심하게 혼잡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막기 위해 미군 군함과 비행기가 엄호하는 동안, 약 200척의 함선이 철수 작전에 동원되었다. 피난민 승선은 원래 계획에 없었지만, 현봉학은 자신이 승선한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피난민들을 최대한 많이 태워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의 진심에 감동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와 군수 물자를 버리고 피난민을 태우는 과감한 결정을 내렸다.[1][2][3][4][5]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각자의 짐을 버리고 배에 올랐고, 그 결과 정원 2,000명의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무려 14,000명이 승선했다. 피난민들이 배에 오르는 동안 미 육군 제3보병사단 장병들은 후방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아내며 시간을 벌었고, 이 과정에서 3명이 전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의 항해 끝에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포화 상태라는 이유로 입항을 거절당했다. 결국 라루 선장은 약 80.47km를 더 항해하여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무사히 하선시켰다.[1][2][3][4][5]
이틀간의 항해는 극심한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배 안 구석구석, 심지어 차량 밑이나 장갑차 틈새까지 가득 메운 피난민들이 서로의 체온에 의지하며 버텨야 했던 고난의 시간이었다. 음식, 물, 의약품 등 모든 것이 부족했고, 선원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다. 일부 젊은이들은 굶주림에 식량을 요구하며 소동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항해 중에 5명의 아기가 태어나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극적인 철수 작전은 '모세의 기적'에 비유되며, 현봉학은 이 공로로 '한국의 쉰들러'라고 불리게 되었다.[1][2][3][4][5]
흥남 철수 작전은 영화 국제시장의 도입부에 감동적으로 묘사되었으며, 당시 피난민 가족이었던 문재인 전 대통령은 훗날 현봉학 박사와 유족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며 그의 인도주의적 업적을 기렸다.[1]
3. 4. 전쟁 이후의 활동
한국전쟁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이니아 의대 장로교메디칼센터에서 레지던트 과정을 마쳤으며, 펜실베이니아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1961년부터 1962년까지 뉴저지주 플레인필드에 있는 뮐렌버그 메디칼센터의 병리전문의로 일했고, 1962년부터 1987년까지는 같은 병원의 연구소장으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버지니아 의대, 콜럼비아 내과·외과의대, 필라델피아의 토머스 제퍼슨 의과대, 펜실베이니아 의과대 등 여러 대학에서 병리학 및 혈액학 교수를 지냈으며, 연세대 의대 객원교수도 역임했다.
학술 활동으로는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 및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한국과 미국 양국 의학계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았다.
2007년 11월 25일 오후 1시 30분(현지 시각)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동생으로는 문필가 피터 현과 대한민국 해군 제독 현시학이 있다. 현시학 제독은 2000년 4월과 2013년 7월의 호국인물, 2018년 3월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현봉학 박사 본인도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의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다. 2016년 12월 19일에는 서울 세브란스 빌딩 1층에서 그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피난민 가족이었던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 문재인은 동상 제막식 축사를 통해 현봉학 박사와 그 유족들에게 특별한 감사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
3. 5. 사회 활동 및 사망
미국 임상병리학회, 국제혈액학회, 미국 병리학회 회원으로 활동했으며, 한국임상병리학회 명예회원이기도 했다. 한국 보건부장관 고문, 미 의학회 편집위원, 미 병리학회지 편집위원을 지내며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한미 양국 의학계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았다.의학 분야 외에도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했다. 서재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맡았으며,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 민족 지도자 및 의인을 기리는 사업에도 힘썼다. 또한 중국에 방치되어 있던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찾아 단장하고, 그의 문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는 데 기여했다.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아 인도주의적 활동에도 참여했다.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피난민 구출에 기여한 공로로 널리 알려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북한을 탈출한 흥남 철수 피난민의 가족이었던 대한민국 제19대 문재인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현봉학 박사와 유족들에게 특별한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2007년 11월 25일 오후 1시 30분(현지시각) 미국 뉴저지주 뮐렌버그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사후에도 그의 업적은 기려지고 있다. 2014년 12월 국가보훈처에 의해 이달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되었으며, 2016년 12월 19일에는 서울 세브란스 빌딩 1층에서 그의 동상 제막식이 열렸다. 그의 동생인 문필가 피터 현과 현시학 제독 역시 호국인물 및 6·25전쟁영웅으로 선정된 바 있다.
4. 흥남 철수 작전에서의 역할
한국전쟁 중 국군 해병대 문관으로 근무하던 현봉학은 1950년 10월, 통역을 계기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의 눈에 띄어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다.[1][2] 그는 흥남 철수 작전 당시 피난민 구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현봉학은 알몬드 소장에게 몰려드는 북한 피난민들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구출해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했으며,[3]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도 최대한 많은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5] 그의 인도주의적인 노력과 설득은 미군 지휘관들의 결심을 이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그 결과 약 98,000명에 달하는 피난민이 미군 함선에 승선하여 남쪽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1][4] 이 사건은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며, 현봉학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게 되었다.[5]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은 당시 흥남 철수 작전의 긴박한 상황과 현봉학의 역할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4. 1. 알몬드 장군 설득
1950년 3월 귀국하여 세브란스 병원에서 일하던 현봉학은 한국전쟁 발발 후 피난길에 올랐다. 피난지 부산에서 해군에 입대했다가, 대구에서 지인의 소개로 한국 해병대의 문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1] 이후 부대 이동에 따라 강원도 고성에 머물던 중, 1950년 10월 중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이 예하 부대인 국군 해병대를 시찰했을 때 통역을 맡았다.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을 눈여겨본 알몬드는 그를 즉시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했다.[1][2]흥남 철수 작전 당시, 현봉학은 알몬드에게 몰려든 북한 피난민들을 외면하지 말고 함께 배에 태워 남쪽으로 탈출시켜 줄 것을 강력히 설득했다.[3] 알몬드는 현봉학의 인도주의적인 요청에 공감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알몬드 제10군단장)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敵은 흥남 남쪽 원산으로 急進(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1]
알몬드의 최종적인 결단으로 약 98,000명의 피난민이 미군 함선에 오를 수 있었으며, 이는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게 되었다.[1][4]
작전 당시인 1950년 12월 23일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105,000명과 피난민 90,000명으로 혼잡한 상태였다.[5] 중공군의 공세 속에 약 200척의 군함과 상선이 동원되었지만, 피난민까지 태울 여력은 부족했다. 이때 현봉학은 자신이 타고 있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피난민을 태워 구해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의 진심에 감동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을 태우라고 명령했다.[5]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최소한의 짐만 챙겨 정원 2,000명의 배에 14,000명이나 올랐다.[5]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의 힘겨운 항해 끝에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지만, 이미 포화 상태라는 이유로 입항을 거부당했다. 결국 배는 약 80.47km를 더 항해하여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거제도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무사히 내려놓았다. 음식과 물, 의약품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극한 상황 속에서도 배 안에서는 새로운 생명 5명이 태어났다.[5] 이 극적인 철수 작전 이후 현봉학은 '한국의 쉰들러'로 불리며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었다.[5]
4. 2.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
한국전쟁 발발 후, 현봉학은 국군 해병대 문관으로 근무했다. 1950년 10월 중순, 미 제10군단장 에드워드 M. 알몬드 소장이 한국 해병대를 시찰했을 때 통역을 맡았는데, 뛰어난 영어 실력 덕분에 곧바로 미 10군단 민사부 고문으로 발탁되었다.[1][2][3][4][5]흥남 철수 작전 당시, 현봉학은 후퇴하는 미군과 함께 철수하는 것 외에도 수많은 북한 피난민들을 구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소장에게 피난민들도 함께 배에 태워 남쪽으로 이동시켜야 한다고 강력히 설득했다. 당시 알몬드 소장은 적군이 남쪽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는 급박한 상황 때문에 확답을 주저했지만, 현봉학의 인도주의적인 호소에 결국 동의하며 98,000여 명의 피난민 수송을 결정하게 된다.[1][2][3][4][5] 영화 국제시장의 첫 장면은 당시 현봉학이 알몬드 장군을 설득하는 모습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50년 12월 23일, 흥남 부두는 철수하려는 미군과 한국군 105,000명, 그리고 남쪽으로 가려는 피난민 약 98,000명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군함과 상선 약 200척이 동원된 철수 작전 속에서, 피난민 승선은 어려운 결정이었다. 현봉학은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P. 라루 선장에게 최대한 많은 피난민을 태워달라고 간곡히 요청했다. 그의 진심에 감동한 라루 선장은 배에 실려 있던 무기와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리고 피난민들을 태우라는 결단을 내렸다.[1][2][3][4][5]
피난민들은 살기 위해 가지고 있던 짐을 버리고 배에 올랐다. 정원이 2,000명인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무려 14,000명의 피난민이 승선했다. 배가 떠나기 전 피난민들이 승선하는 동안, 미 육군 제3보병사단은 중공군의 공격을 막으며 후방을 방어하다 3명의 병사가 목숨을 잃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28시간의 항해 끝에 12월 24일 부산항에 도착했으나, 이미 포화 상태라는 이유로 입항을 거절당했다. 결국 라루 선장은 거제도로 뱃머리를 돌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 장승포항에 피난민들을 무사히 내려놓았다.[1][2][3][4][5]
이틀간의 항해는 극한의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선박 구석구석, 심지어 차량 밑이나 장갑차 틈새에 몸을 웅크린 채 버텨야 했던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음식과 물, 의약품은 턱없이 부족했고, 일부 젊은이들은 식량을 달라며 폭동을 일으키려 하기도 했다. 선원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여성과 아이들에게 주기도 했다. 이 험난한 항해 중에 새로운 생명 5명이 태어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수많은 생명을 구해낸 '한국판 모세의 기적'으로 불리며, 현봉학은 '한국의 쉰들러'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1][2][3][4][5]
흥남 철수 피난민의 아들인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현봉학 선생 동상 제막식 축사를 통해 현봉학 박사와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원들의 인도주의적 결단에 깊은 감사를 표하기도 하였다.
5. 평가 및 영향
현봉학은 임상병리학 분야에서 뛰어난 연구 성과를 거두어 국제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이는 권위 있는 의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그는 학문적 업적 외에도 서재필,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윤동주 등 여러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사업과 인도주의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5. 1. 수상 경력
wikitext연도 | 상 이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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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 이스라엘 데이비슨상 (미국 임상병리학회) | 임상병리학 연구 공로로 한국인 최초 수상. 세계적 권위의 상으로 평가받음. |
1996년 | 제1회 연세의학대상 | |
2005년 | 제2회 서재필 의학상 |
5. 2. 추모 사업
서재필기념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으며, 안창호, 안중근, 장기려 등 여러 인물을 기리는 사업에 참여하였다. 또한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보건의료협력본부 고문을 맡기도 했다. 윤동주 시인의 묘를 찾아 단장하고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는 데에도 기여했다.6.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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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 이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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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 현원국 | |
어머니 | 신애균 | |
친형 | 현영학 | 1921년 1월 6일 ~ 2004년 1월 14일. 이화여대 신학대 교수, 문리과대학 학장 역임. |
형수 | 윤보희 | 이화여자대학교 음악과 교수, 명예교수 역임. |
동생 | 현시학 | 1924년 1월 3일 ~ 1989년 7월 18일. 대한민국 해군 소장, 주 이란 대사, 주 멕시코 대사 역임. |
동생 | 현순 | |
동생 | 현웅 / 피터 현 | 언론인, 뉴욕 거주. |
동생 | 현요한 |
7. 저서
- ''중공의 한인들'' (1984)
- ''나에게 은퇴는 없다'' (역사비평사 간, 1996년)
- ''한국의 쉰들러, 현봉학과 흥남대탈출'' (1999)
참조
[1]
저널
[한국기독역사여행] 흥남의 크리스마스 기적 … 9만 2000명 살리다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18-12-28
[2]
저널
보훈처, 내년도 '이달의 6·25전쟁영웅' 17명 선정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3-12-26
[3]
저널
일본군 장교 되어 독립군 토벌했는데, 독립유공자 묘역 옆에 잠들다니…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19-07-30
[4]
저널
“피난민 10만을 軍艦(군함)으로 철수시킨 세계史 최초의 쾌거!”
https://www.chogabje[...]
조갑제닷컴
2016-06-21
[5]
저널
흥남 철수 역사인가 선전인가
https://news.naver.c[...]
한겨레21
2018-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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