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윤동주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시인으로, 1917년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그는 명동소학교, 숭실중학교, 광명중학교,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릿쿄 대학과 도시샤 대학에서 유학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45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했으며, 1948년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출판되어 민족 시인으로 알려졌다. 윤동주는 섬세한 서정과 깊은 성찰을 담은 시를 통해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희망을 노래했으며, 그의 작품은 현재까지 널리 읽히고 있다. 그의 국적을 두고 한국과 중국 간에 논쟁이 있으며, 친일 논란에 대한 반박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윤동주 - 윤동주문학관
    윤동주문학관은 윤동주 시인의 삶과 문학을 기리기 위해 그가 하숙했던 누상동의 옛 가압장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2012년 개관한 문학관으로, 시인채, 열린우물, 닫힌우물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축 관련 상을 수상하고 현충시설로 지정되기도 했다.
  • 윤동주 - 서울 연세대학교 핀슨관
    핀슨관은 연세대학교에서 두 번째로 지어진 기숙사 건물로, 윤동주 시인이 생활했던 곳이며, 건축학적 가치를 지니고 윤동주 기념실과 기념관이 있는 건물이다.
  • 룽징시 출신 - 강문봉
    강문봉은 만주국 군인과 대한민국 국군 창설에 기여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한 군인이자, 김창룡 저격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4.19 혁명 후 석방되어 국회의원과 주스웨덴 대사를 지낸 정치인 겸 외교관이다.
  • 룽징시 출신 - 서대숙
    서대숙은 김일성 항일 운동 연구로 북한 연구에 기여한 한국의 정치학자이자 대학교수로, 미국 여러 대학교와 서울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활동하며 하와이 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 문익환 - 함석헌
    함석헌은 평안북도 출신의 인권운동가, 언론인, 재야운동가, 문필가로서, 일제강점기와 독재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펼치며 '씨알의 소리'를 통해 '씨알사상'을 알렸고, 비폭력·민주·평화 사상으로 '한국 간디'라 불리며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 문익환 - 박용길
    박용길은 '봄길'이라는 호를 사용한 대한민국의 여성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로, 목사이자 통일운동가인 문익환의 배우자로서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헌신하며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공동의장, 통일맞이 칠천만겨레모임 이사장 등을 역임했고, 김일성 주석 1주기 추모 방북으로 투옥되기도 했다.
윤동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2년 윤동주
윤동주 (1942년)
본명윤동주
해환 (海煥)
출생일1917년 12월 30일
출생지중화민국 지린성 룽징 명동촌
사망일1945년 2월 16일
사망지일본 제국 후쿠오카 후쿠오카 형무소
국적한국
민족한민족
직업시인
언어한국어
학력연희전문학교 문과 학사
중퇴릿쿄 대학 문학부 영문과 (1942년 1학기)
제적도시샤 대학 문학부
웹사이트연세대학교 윤동주 기념사업회
로마자 표기Yun Dongju
매큔-라이샤워 표기Yun Tongchu
예일 표기Yun Tongcwu
가족 관계
조부윤하현
증조부윤재옥
조카윤인석
외숙김약연, 김학연
고모부송창희
삼촌윤신영
고종사촌 형송몽규
고종사촌 여동생송한복
고종사촌 남동생송우규
작품 활동
장르
주요 작품《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기타

2. 생애

연희전문학교 졸업사진(1941년)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일제 강점기 북간도 용정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 윤씨이며, 어릴 적 이름은 해환(海煥)이었다.[23][24][25][26] 1932년 용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고, 1936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전학했으나, 같은 해 신사참배 거부로 학교가 폐교되자 용정의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1]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졸업했다.[2]

졸업 무렵, 틈틈이 썼던 시 19편을 모아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의 시집을 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3]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 도시샤 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으나, 1943년 7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57] 1945년 2월 16일 27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윤동주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여 그의 독립운동 공헌을 인정했다.[4]

2. 1. 유년 시절과 교육

1917년 12월 30일, 북간도 명동촌(明東村)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50] 명동촌은 함경도 이주민들이 세운 한인촌으로, 기독교 신앙과 민족 교육의 중심지였다. 할아버지 윤하현은 독실한 장로교 장로였으며, 윤동주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25]

윤동주 생가


19세기 말, 많은 조선인들이 함경도와 평안도 일대의 기근을 피해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간도로 이주했다. 이들 중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건설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구세동(救世洞), 영생동(永生洞), 낙원동(樂園洞), 명신동(明信洞) 등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윤동주의 증조부 윤재옥은 1886년 길림성 자동으로 이주하였고,[27] 할아버지 윤하현은 명동촌으로 이주하여 자리를 잡았다. 아버지 윤영석은 명동학교 설립자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하여 명동학교 교사로 일했다.

이상설 등은 명동학교를 통해 신식 교육의 필요성을 알리고, 김약연은 장로교로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후 명동촌은 교회를 설립하고 신앙 교육을 실시하는 기독교 공동체로 변화하였다. 또한 이동휘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을 초청하여 부흥사경회를 열어 신앙 훈련과 민족 정신을 고취했다.

친구들과 함께
가운데는 문익환, 오른쪽은 윤동주


1925년 명동소학교(明東小學校)에 입학하여 재학 시절 고종사촌인 송몽규 등과 함께 문예지 《새 명동》을 발간하였다.[51]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화룡현립 제일소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수학했다. 이후 가족이 용정으로 이사하면서 은진중학교(恩眞中學校)에 입학했다.

1935년 평양의 숭실중학교로 전학하여, 그해 10월 학우지 숭실활천(崇實活泉) 제15호에 시 〈공상〉(空想)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1936년 1월 18일 숭실학교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서, 1월 20일 숭실중학교 교장 윤산온이 파면되고, 숭실중학교는 무기 휴교로 폐교되었다. 이에 윤동주는 문익환과 함께 용정에 있는 광명중학교로 편입하였다. 광명중에서 정일권 등을 만나게 된다.

2. 2. 연희전문학교 시절

1938년 경성(京城)으로 유학, 4월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1][28] 기숙사와 하숙생활을 하며 근처를 산책하며 시상을 떠올리고 시를 짓거나 벗과 담론을 하였다. 명동촌에서 같이 자란 문익환 목사에 의하면 윤동주는 신학을 공부하는 자신보다 쇠렌 키르케고르의 철학에 해박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 재학시기에 윤동주는 최현배 선생의 한국어 과목에서 만점을 받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고,[28] 불어, 중국어, 한국어(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조선어)등 다양한 언어를 공부했다. 1939년 연희전문 2학년 재학 중 조선일보 학생란에 산문과 시를 발표하고 그 해 《소년(少年)》지에 시를 발표하며 처음으로 원고료를 받기도 했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할 무렵,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출간하려 했으나, 영문학자 윤양하 교수의 만류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고를 정병욱에게 증정하고 일본 유학 준비를 하게 된다.[3][29]

2. 3. 일본 유학 생활과 체포

1942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교 문학부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같은 해 10월 교토 도시샤 대학교 영문학과로 편입하였다.[51] 도시샤 대학교는 윤동주가 가장 좋아하는 시인 정지용이 다닌 학교였다.[52]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57] 1944년 교토 지방 재판소는 윤동주에게 징역 2년 형을 선고했다. 판결문에는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취했으며 친구의 영향으로 민족의식을 갖게 되었고, 내선(일본과 조선) 차별 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을 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는 망동을 했다"라고 적혀 있다.[57] 이후 윤동주는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2. 4. 투옥과 죽음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교토의 카모가와 경찰서에 구금되었다. 이듬해 교토 지방 재판소에서 송몽규와 함께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44년 3월 31일 교토지방재판소 제1 형사부 이시이 히라오 재판장 명의로 된 판결문에는 "윤동주는 어릴 적부터 민족학교 교육을 받고 사상적, 문화적으로 심취했으며 친구의 감화 등으로 민족의식이 강해 일본과 조선의 차별 문제에 대해 깊은 원망을 품고 조선 독립의 야망을 실현하려 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57]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7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시신은 화장 후 가족에게 인도되어 지린성 룽징시에 안장되었다. 그의 조부 윤하현의 비석으로 마련했던 흰 돌이 그의 비석으로 사용되었다.

같은 해 2월 26일,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를 가지러 오라'는 전보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시신을 인수, 수습하러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후 '동주 위독하니 보석할 수 있음. 만일 사망 시에는 시체를 가져가거나 아니면 큐슈제대(九州帝大) 의학부에 해부용으로 제공할 것임. 속답 바람'이라는 우편 통지서가 고향집에 배달되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는 "사망 전보보다 10일이나 늦게 온 이것을 본 집안 사람들의 원통함은 이를 갈고도 남음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윤동주의 죽음은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58]

2. 5. 창씨개명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했다.[53] 이는 일본 유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54][55] 창씨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으며,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후 참회록을 써서 고통과 비애를 표현했다.[56]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1990년대 이후에 널리 알려졌으며, 2005년 이후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일제가 한민족의 전통을 말살하려고 우리말과 글이 아닌 일본의 말과 글을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에 필요한 입출국 서류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한 것이다.[53]

3. 사후

1947년 2월 정지용의 소개로 경향신문에 유작 〈쉽게 씌어진 시〉가 처음 소개되었고, 동생 윤일주와 친구들에 의해 추도회가 거행되었다.[35] 1948년 윤동주의 3주기 추도식에 맞춰 윤동주의 유작 31편과 정지용의 서문으로 이루어진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초간본이 임시로 발간되었고, 같은 해 3월 정음사에서 정식으로 간행되어 서정시인,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59]

1962년 3월부터 독립유공자를 대량으로 발굴 포상할 때, 그에게도 건국공로훈장 서훈이 신청되었으나 유족들이 사양하였다.[59] 1990년 8월 15일에야 건국공로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4][59]

1968년에는 모교 연세대학교에 윤동주가 살았던 기숙사 앞에 “윤동주 시비”가 건립되었다. 1985년에는 그의 시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윤동주문학상이 한국문인협회에 의해 제정되었다.

전후 한국에서 시 작품이 소개되면서 한국 민족주의 교육에 도입되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2년경 대한민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5% 이상의 20대가 윤동주를 알고 있었다.[36]

어릴 적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서로의 나라를 싫어하며 가슴 아픈 비판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하며, 윤동주의 시 전체에 대해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시들뿐이라고 밝혔다. 특히 1940년 이후의 대표작들은 그 경향이 강하며, “단순히 과거 한 민족의 비애나 잘못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32]

한국은 중국이 윤동주를 조선족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34]

4. 작품 세계

윤동주는 일제 강점기 시인으로, 부드러운 서정성과 강인한 민족 의식을 겸비한 작품들을 남겼다. 그의 시는 순수한 어린아이의 시선,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그리움, 어두운 현실에서 양심적으로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독특한 희생양 의식을 특징으로 한다.[1]

초기작 "삶과 죽음" 등에서는 삶과 죽음, 빛과 어둠의 갈등을 다루었으나, 시적 구성은 다소 미숙했다. 그러나 1937년 이후, 시대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냉철한 자기 성찰과 불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후기 작품들은 자아 성찰과 민족적 현실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특히 불안, 고독,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를 통해 현실을 이겨내려는 강인한 정신을 보여준다.[1]

1948년 정음사에서 출간된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그를 서정시인,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 이후, 그의 작품은 한국 민족주의 교육에 도입되어 '민족시인'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2012년 조사에 따르면 20대의 95% 이상이 윤동주를 알고 있다.[36]

문익환 목사는 윤동주의 시, 특히 1940년 이후의 대표작들이 해석하기 어렵다고 말하며, "단순히 과거 한 민족의 비애나 잘못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32]

4. 1. 주요 작품

4. 2. 문학적 특징과 평가

윤동주는 민족적 저항 시인이자 강인한 의지와 부드러운 서정을 지닌 시인으로 평가받는다.[60][61] 1986년에는 20대 젊은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으로 선정되었다.[62] 북한에서는 '일제 말기 독립 의식을 고취한 애국적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63]

그의 시는 생활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 성찰의 의식이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64]

한국문학번역원은 윤동주 시인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윤동주의 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화자의 모습, 잃어버린 고향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 그리고 어두운 사회 현실 속에서 양심적인 삶을 살지 못했다는 자책감에서 비롯된 특이한 희생양 의식이 특징이다. "삶과 죽음"(Salmgwa jugeum)은 1934년부터 1936년까지, 그의 문학 수업 기간의 시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삶과 죽음 또는 빛과 어둠의 갈등을 묘사하지만, 시적 구성은 다소 미숙하다. 그러나 1937년 이후 그의 시는 시대의 어두운 현실에 대한 냉혹한 자기 성찰과 불안을 드러낸다. 이후 시기의 작품들은 시인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자아 성찰과 민족적 현실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명확한 문학적 결실을 맺는다. 특히 불안, 고독, 절망을 극복하고 희망과 용기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극복하려는 강인한 정신을 보여준다.[1]

1947년 2월 13일, 서울의 경향신문에 “쉽게 쓴 시”가 소개되었다. 윤동주와는 면식이 없었지만 동지사 선배였던 정지용이 소개 글을 썼다.[35] 1948년에는 시와 산문을 모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한국어)가 서울의 정음사에서 간행되어 서정시인, 민족시인, 저항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전후 한국에서 시 작품이 소개되면서 한국 민족주의 교육에 도입되어 대표적인 “민족시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2012년경 대한민국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5% 이상의 20대가 윤동주를 알고 있었다.[36]

어릴 적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에 대해 “서로의 나라를 싫어하며 가슴 아픈 비판을 되풀이하고 있다”고 말하며, 윤동주의 시 전체에 대해 매우 해석하기 어려운 시들뿐이라고 밝혔다. 특히 1940년 이후의 대표작들은 그 경향이 강하며, “단순히 과거 한 민족의 비애나 잘못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인간의 죄’를 고발하고 극복하려고 했던” 것이라고 말했다.[32]

5. 논란과 쟁점

윤동주 시인을 둘러싼 논란은 크게 국적 논쟁과 친일 논쟁 두 가지가 있다.

5. 1. 국적 논쟁

중국과 대한민국 사이에는 윤동주가 어떤 민족인가에 대한 논쟁이 있다. 대한민국 측은 그를 “한국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중국 측은 “조선족”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34][38]

현재 중국에서는 윤동주를 소수민족인 조선족 출신 애국시인으로 평가하고 용정시에 있는 그의 생가를 복원하는 등 여러 조치를 취했다.[37] 그러나 1980년대까지는 대한민국과 연변(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윤동주 시인의 고향이자 많은 조선족이 거주하는 연변에서조차 그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1985년 윤동주 시인의 묘소 위치를 40년 만에 확인한 와세다대학의 대무익후 교수는 "윤동주라는 시인에 대해서 연변의 문학가들은 전혀 그 존재를 몰랐고, 그의 작품도 몰랐다."고 기록했다.

2016년 4월 20일, 대한민국의 서울시인협회는 “중국 당국이 윤동주의 국적을 중국으로 왜곡하고 있다”며 중국을 강하게 비판했다.[38] 2020년 10월 JTBC 뉴스룸 보도에 따르면, 바이두가 운영하는 바이두 백과에서 윤동주를 포함한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조선족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윤동주는 국적도 중국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39] 이는 조선족이 중국 국적을 취득한 1954년보다 이전의 일이므로 명백한 사실관계 오류이다. 독립운동가들이 만주, 상하이, 길림성 등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러한 표기가 나타난 것으로 보이나, 이 경우 조선의 항일운동이 중국의 항일운동 역사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게 된다.[39]

5. 2. 친일 논란 반박

윤동주 집안은 1941년 말 '히라누마'(平沼)로 창씨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3] 이는 윤동주의 일본 유학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윤동주의 연보에 따르면, 윤동주가 전시 학제 단축으로 연희전문학교 4학년을 졸업하고 1941년 연말에 "고향 집에서 일제의 탄압과 동주의 도일 수속을 위해 성씨를 '히라누마'로 창씨하였다"고 한다.[54][55] 창씨개명 후 윤동주는 매우 괴로워했다고 한다.

창씨개명계를 내기 닷새 후, 윤동주는 창씨개명에 따른 고통과 비애를 담은 시 참회록을 썼다.[56] 윤동주의 창씨개명은 일제가 한민족의 전통을 말살하려고 우리말과 글이 아닌 일본의 말과 글을 강요하는 식민주의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유학에 필요한 입출국 서류를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유학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이었다.

6. 기념 및 추모 사업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68] 1992년 9월에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1995년에는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70]

윤동주 시비(도시샤대학이마데가와 캠퍼스)


교토예술대학 고원 캠퍼스 내에는 윤동주가 생활했던 하숙집 터가 있으며, 2006년 윤동주의 작품 서시의 시비를 건립하고 매년 기일에 추모법요를 올리고 있다.[41]

2010년, 리쿠교대학 교직원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리쿠교의 모임"이 리쿠교대학교 한국인 유학생을 위한 "윤동주 국제교류 장학금"을 설립했다.

도시샤대학은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하였고[46], 서거 80주년인 2025년 2월 16일에 명예학위 수여식을 개최하기로 했다.[47][48]

6. 1. 기념관

; 연세대학교

  • 윤동주의 연희전문학교 재학 당시 학생 기숙사로 이용되었던 연세대학교 핀슨홀 일부가 윤동주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다. 향후 핀슨홀 전체를 윤동주 기념관으로 개편할 계획이다.[65]


; 종로구

; 연변

  • 용정의 용정 중학교에 윤동주 기념관이 있다.[67]

6. 2. 기념물


  • 1968년 11월 2일 연세대학교에 유작 〈서시〉가 새겨진 ‘윤동주 시비(詩碑)’가 건립되었다.[68]
  • 1992년 9월, 모교인 용정 중학교에 〈서시〉가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69]
  • 1995년 일본 도시샤 대학에 친필 〈서시〉와 일본어 번역본이 새겨진 시비가 건립되었다.[70]

  • 교토예술대학 고원 캠퍼스 내에는 윤동주가 생활했던 하숙집 터가 있으며, 2006년 윤동주의 작품 『서시』의 시비를 캠퍼스 내에 건립하고 매년 기일에 추모법요를 올리고 있다.[41]

6. 3. 기타

교토예술대학(구 교토조형예술대학) 고원 캠퍼스 내에는 윤동주가 생활했던 하숙집 터가 있으며, 2006년 윤동주의 작품 《서시》의 시비를 캠퍼스 내에 건립하고 매년 기일에 추모법요를 올리고 있다.[41] 교토조형예술대학 설립자인 토쿠야마 쇼지키(徳山詳直)는 1950년 한국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여 폭탄 운반을 저지하려다 체포되었다. 토쿠야마 쇼지키는 "윤동주 선생님이 민족독립 투쟁 도중 옥사하신 지 5년 후, 저의 투쟁은 조선과 관련하여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 대학을 설립하여 예술을 통한 평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42] 2019년 2월 15일, 교토조형예술대학 측이 주최하는 시인 윤동주 추도회 및 교류회가 대학 캠퍼스 시비 앞에서 열렸으며, 이사장인 토쿠야마 유타카(徳山豊)와 총장인 오이케 카즈오(尾池和夫)를 비롯하여 재일 한국·조선인, 주오사카 대한민국총영사관의 오태규 총영사 등 관계자 약 80명이 참석했다.[43]

2010년, 리쿠교대학 교직원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리쿠교의 모임"이 리쿠교대학교 한국인 유학생을 위한 "윤동주 국제교류 장학금"을 설립했다. 각 학부 1명씩 총 8명[44](후에 10명[45])에게 유학생이 재학 중 필요한 연간 수업료(48.8만~67.9만)[44]와 거의 같은 금액인 60만을 지급하고 있다.

도시샤대학은 2024년 12월 윤동주에게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하였고[46], 서거 80주년인 2025년 2월 16일에 명예학위 수여식을 개최하기로 했다.[47][48]

7.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비고
증조부윤재옥
조부윤하현1875년 3월 8일 (음력 2월 1일)1948년 9월 4일
조모강씨부인1875년1947년
아버지윤영석1895년 8월 1일1965년 4월 20일
어머니김용1891년 10월 1일1948년 9월 26일본관은 전주(全州)
누이윤혜원1924년2011년 12월 11일
매제오형범1924년2015년 3월 11일
생질 조카오철주
남동생윤일주1927년 11월 23일1985년 11월 28일성균관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아명은 윤달환
제수정덕희정병욱의 여동생
조카윤인석1956년성균관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남동생윤광주1930년 6월 19일1966년 10월 8일시인, 아명은 윤별환
고모윤신영1897년?
고모부송창희1891년1971년
이복외삼촌김약연1868년 9월 12일1942년 10월 29일한학자, 독립운동가
고종사촌송몽규1917년1945년독립운동가, 윤신영의 아들
6촌 재종윤형주1947년가수, 당숙은 윤영춘
사돈정병욱1922년 3월 25일1982년 10월 12일국문학자


8. 대중문화


  • KBS1 《마돈나여 광야에서 별을 노래하라》 제2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영상시극, 1984년 12월 22일 (방영시간 120분)[73]
  • KBS1 《영상기행3.1절 — 민족시인 尹東柱》, 1988년 3월 1일 (방영시간 60분)[74]
  • NHK 《NHK스페셜》 〈하늘과 바람과 별과 詩, 尹東柱, 일본통치하의 청춘과 죽음〉, 1995년 3월 11일 (방영시간 60분)[75]
  • EBS 《지식채널e》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1부: 별 (2006년 7월 31일 방영), 2부: 시 (2006년 8월 7일 방영)
  • KBS 《해피선데이 - 1박 2일》 백두산 탐방 특집 윤동주 생가 방문 (2008년 6~7월)
  • SBS 《그것이 알고싶다》 윤동주 그 죽음의 미스터리, 후쿠오카 형무소에선 무슨 일이 있었나 (2009년 8월 15일)
  • MBC 《MBC스페셜》 가을, 윤동주 생각 (2011년 11월 4일)
  • KBS1 《KBS공사창립특집》 불멸의 청년, 윤동주 (2016년 3월 6일)
  • 영화 《동주》 (2016, 강하늘 주연)
  • 영화 《시인의 방》 (2022, 이상윤 주연)
  • 뮤지컬 《윤동주, 달을 쏘다》 (2011, 서울 공연예술단체)[10]
  • 뮤지컬 《민들레피리》 (제18회 DIMF 창작지원작)
  • 노래 〈무서운 시간〉 (정민석, 고영월, 존 노, 김바울)
  • 노래 〈당신의 밤〉 (황광희, 개코, feat. 오혁)[13]
  • 노래 〈별 헤는 밤〉 (김민규, 윤현선)
  • 노래 〈소년〉 (홍이삭)
  • 2024년 드라마 《사랑 후에 남는 것들》에서 배우 이세영과 일본 배우 사카구치 켄타로가 출연,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극중 주요 소재로 등장한다. 교토 도시샤대학 내 윤동주 시비도 촬영 장소로 등장한다.
  • 이정명 소설 『검사외전』(The Investigation)은 윤동주를 위한 "상상력 넘치는 찬가"이다.[8]
  • 2007년 드라마 나는 삼≫(I Am Sam (TV series)) 13화에서 "샘"이 윤동주의 시를 낭송하였다.[9]

참조

[1] 웹사이트 Author Database : Yoon Dongju - Korea Literature Translation Institute http://klti.or.kr/ke[...] 2013-12-14
[2]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3] 웹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
[4] 웹사이트 공훈전자사료관 https://e-gonghun.mp[...]
[5] 뉴스 Top Ten Korean Modern Poets Selected https://www.koreatim[...] 2020-02-15
[6] 웹사이트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http://dna.naver.com[...]
[7] 뉴스 구순의 재미동포 변만식 씨 '윤동주 시' 영어번역판 출간 https://n.news.naver[...] 2020-05-28
[8] 서적 book review of ''The Investigation, ''p. 17 2024-04-12
[9] Youtube I am Your Teacher {{!}} 아이 엠 샘 - Ep.13 https://www.youtube.[...] 2021-03-17
[10] 웹사이트 Poet Yun Dong-ju's tale goes global in mystery novel http://www.korea.net[...]
[11] 웹사이트 DONGJU; The Portrait Of A Poet (2016) http://www.koreanfil[...]
[12] 웹사이트 Theaters to screen "Dong-Ju" with English subtitles http://www.koreahera[...] 2019-03-22
[13] 뉴스 Infinite Challenge Recap: Episode 513 - Korean Variety Recaps http://www.koreanvar[...] 2017-01-01
[14] 웹사이트 30 December: Remembering Yun Dong-ju on Birth Anniversary https://observervoic[...] 2022-12-30
[15] 웹사이트 Birthday of Yun, Dong-ju https://doodles.goog[...] 2022-12-30
[16] 웹사이트 尹東柱とは https://kotobank.jp/[...] 2022-12-31
[17] 서적 (정보 부족) (정보 부족) (정보 부족)
[18] 웹사이트 # 추가 故郷の家――満州でうたう https://dongju-fukuo[...] 福岡・尹東柱の詩を読む会 2007-08-19
[19] 기타 # 추가. 출처가 불분명하여 type을 기타로 지정.
[20] 서적 尹東柱 青春の詩人 筑摩書房 1991-10
[21] 서적 韓国と日本国 朝日新聞社 2004-11
[22] 서적 延邊朝鮮族:全中國「最聽話」的少數民族自治州 https://www.thenewsl[...] 關鍵評論網 2018-10-08
[23] 법원판결 平沼東柱の判決 1944-03-31
[24] 학술지 尹東柱 九大コレクション 九州大学附属図書館 https://hdl.handle.n[...]
[25] 학술지 尹東柱の詩とその根底にあるもの http://id.nii.ac.jp/[...] 福岡大学研究推進部 2018-12
[26] 웹사이트 (9)파평 윤씨(坡平尹氏)-713,947명 http://www.seoulecon[...] 2014-07-06
[27] 뉴스 西日本新聞セレクト九州の100冊【九州の100冊】~リクエスト編(中)『空と風と星と詩』 尹東柱 今宵も星が風に吹きさらされる http://www.nishinipp[...] 2017-04-27
[28] 뉴스 【コラム】韓日中が詩人・尹東柱を記憶する方法(1)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17-07-20
[29] 서적 空と風と星と詩: 尹東柱全詩集 1984
[30] 서적 空と風と星と詩: 尹東柱全詩集 1984
[31] 웹사이트 '윤동주 소개 내용' 리뷰(Review) https://www.chogabje[...] 2016-02-17
[32] 웹사이트 平和な世界を祈念して ― 詩人・尹東柱追悼献花式 http://uryu-tsushin.[...] 京都芸術大学 2023-01-24
[33] 웹사이트 尹東柱記事の間違い(産経新聞): 辻本武 tsujimoto blog http://tsujimoto.asa[...] 2021-07-15
[34] 웹사이트 中国ポータル「百度」で韓国詩人・尹東柱の「朝鮮族」表記削除…国籍は相変らず中国のまま https://s.japanese.j[...] 2023-11-28
[35] 뉴스 쉽게 씨위진 1947-02-13
[35] 논문 同志社大学の尹東柱詩碑建立過程の余談 https://www.doshisha[...] 2012-10
[36] 웹사이트 私と同志社と尹東柱 http://www.christian[...] 2012-05-30
[37] 뉴스 中韓でもめる愛国詩人? 存在していない国の国籍をつけられた尹東柱 https://www.koreawor[...] 코리아월드타임즈 2021-02-20
[38] 뉴스 韓国の詩人団体「中国、尹東柱の国籍わい曲是正を」 https://japanese.joi[...] 2016-04-21
[39] 뉴스 "한반도는 대대로 중국 땅"?…미 교재 '엉터리 세계사' https://mnews.jtbc.j[...] 2020-10-14
[40] 서적 言葉のなかの日韓関係 教育・翻訳通訳・生活 明石書店 2013-04-01
[41] 웹사이트 「尹東柱の夢」…美術家の姜益中氏が京都造形芸術大に寄贈 https://www.mindan.o[...] 2020-12-05
[42] 웹사이트 京都造形芸術大で尹東柱追悼会、統一と平和誓った参列者たち http://korea-np.co.j[...] 2020-12-06
[43] 웹사이트 京都造形芸術大学主催 詩人尹東柱追悼会(2.15) 상세보기{{!}}総領事館 活動駐大阪大韓民国総領事館 http://overseas.mofa[...] 2020-12-05
[44] 웹사이트 立教大・尹東柱奨学生1号誕生「韓日交流に貢献する」 {{!}} 韓国の社会・文化ニュース https://www.konest.c[...] 2018-05-27
[45] 뉴스 立教大学総長の郭洋春氏、「立教大の誇り、尹東柱…韓国の学生がもっと多く来てほしい」 http://japanese.dong[...] 2018-05-27
[46] 뉴스 韓国の「国民的詩人」尹東柱に同志社大が名誉博士号 戦時中の獄死から80年、命日に授与へ https://news.yahoo.c[...] 西日本新聞 2024-12-16
[47] 웹사이트 詩人・尹東柱(1917〜1945)に対する同志社大学名誉学位贈呈式について https://www.doshisha[...] 同志社大学 国際センター国際課・広報部広報課・コリア研究センター 2024-12-17
[48] 웹사이트 詩人・尹東柱(1917〜1945)に対して同志社大学名誉文化博士の学位を贈呈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 도시샤대학교 명예문화박사 학위를 수여 https://www.doshisha[...] 同志社大学庶務課 2024-12-17
[49] 웹인용 윤동주 https://terms.naver.[...] 2024-02-03
[50] 뉴스 ja:中韓でもめる愛国詩人? 存在していない国の国籍をつけられた尹東柱 https://www.koreawor[...] 2021-05-30
[51] 서적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52] 웹사이트 독립운동가 윤동주
[53] 뉴스 김기창과 윤동주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16-07-05
[54] 서적 나의 해방 전후:1940-1949 민음사 2004
[55] 서적 윤동주:겨레의 마음에 별이 된 시인 도서출판 아름다운사람들 2005
[56] 서적 오줌싸개 지도(윤동주 시집) 효리원 2005
[57] 뉴스 (단독) “윤동주, 조선독립 실현시키려 했다” http://www.segye.com[...] 세계일보 2010-07-15
[58] 뉴스 ‘민족시인’ 윤동주-폭압의 겨울, 봄을 그리며 별로 지다 http://news.khan.co.[...] 경향닷컴 2006-02-13
[59] 뉴스인용 윤동주 첫 시집표지는 파란색 아니라 갈색? http://www.sedaily.c[...] 서울경제 2017-03-01
[60] 논문 殉節의 詩人 尹東柱 동아일보 1965-03-04
[61] 간행물 저하늘의 빛나는 별로 경향신문 1965-02-17
[62] 뉴스 "가장 좋아하는 詩人은 尹東柱" http://dna.naver.com[...] 동아일보 1986-02-04
[63] 뉴스 尹東柱 遺稿詩 북한서 발굴 동아일보 1992-04-27
[64] 간행물 윤동주 서거 60년,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 http://www.donga.com[...] 신동아 2005-04
[65] 뉴스 연세대에 '윤동주 기념관' 문 연다 http://www.hankyung.[...] 한국경제 2013-02-06
[66] 웹인용 윤동주문학관 https://www.jfac.or.[...] 2018-07-09
[67] 뉴스 '윤동주 시인을 생각한다' ...낭만파클럽, 30일 다양한 행사 http://www.koreatime[...] 미주한국일보 2005-07-06
[68] 뉴스 시인 尹東柱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http://dna.naver.com[...] 경향신문 1990-08-15
[69] 뉴스 中國에「尹東柱 詩碑」건립 동아일보 1992-09-29
[70] 뉴스 윤동주詩碑 日서 내일 제막 경향신문 1995-02-15
[71] 뉴스 日도시샤大 정지용 시비 제막…오양호 인천대 교수 특별기고 http://www.donga.com[...] 동아일보 2005-12-28
[72] 뉴스인용 시인 윤동주도 축구 선수였다 일제강점기, 간도에서는 열띤 축구가 벌어졌다 https://storyfunding[...] Story funding 2023-07-10
[73] 뉴스 「詩(시)와 영상」이엮어낸 진한感動 동아일보 1984-12-24
[74] 뉴스 「영상기행—민족시인 윤동주」 동아일보 1988-03-01
[75] 뉴스 日 NHK 尹東柱특집…"京郷新聞서 대중에 첫 소개" 경향신문 1995-03-1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