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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쓰네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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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쓰네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4대 싯켄으로, 1242년 19세의 나이로 싯켄직에 올랐다. 그는 소송 제도를 개혁하고 쇼군 교체를 시도했으나, 건강 악화와 반대 세력의 등장으로 동생 호조 도키요리에게 싯켄직을 넘겨주고 2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짧은 재임 기간과 미야 소동 등으로 인해 과도기적 싯켄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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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쓰네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조 쓰네토키의 초상
호조 쓰네토키 초상화
이름호조 쓰네토키
일본어 표기北条 経時
로마자 표기Hōjō Tsunetoki
생년1224년
사망일1246년 5월 17일
묘소가마쿠라시 사이모쿠자 렌게인 고묘지
계명렌게지 안라쿠
별칭다로
야시로
사콘노다이후
개명호쇼 고젠 (藻上御前, 호쇼마루藻上丸)
쓰네토키
안라쿠
가문
씨족호조 씨 (도쿠소케)
아버지호조 도키우지
어머니마쓰시타 젠니
배우자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딸
자녀류세이
라이조
형제자매호조 도키요리
호조 도키사다
히와다히메
아시카가 야스우지의 부인
도키후사류 호조 도키사다의 부인
관직
관위사콘노에노쇼칸
정5위하
무사시노카미
막부가마쿠라 막부
와카사 슈고
효조슈
싯켄
정치 경력
직위싯켄
임기 시작1242년
임기 종료1246년
쇼군후지와라노 요리쓰네
후지와라노 요리쓰구
선임자호조 야스토키
후임자호조 도키요리
주군후지와라노 요리쓰네
후지와라노 요리쓰구
기타 정보
서명null

2. 생애

1230년 아버지 도키우지가 사망하고 숙부 도키자네마저 암살되면서, 쓰네토키는 할아버지 야스토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9] 아버지의 사망으로 와카사 슈고(若狭守護) 직을 이어받았으나,[9] 너무 어려 실질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1234년 11세의 나이로 4대 쇼군 요리쓰네의 고쇼(御所)에서 원복(元服)을 행하고, 요리쓰네가 관을 씌워주고 상투는 도키후사가 틀어올려 주었으며, 쇼군의 헨기(偏諱)를 받아 '야시로 쓰네토키(弥四郎経時)'라는 이름을 받았다. '야시로'라는 이름은 초대 싯켄이었던 도키마사요시토키의 가명(仮名)이었던 '시로(四郎)'를 의식한 것으로, 도쿠소케(得宗家) 적류(嫡流)의 정당성을 보이려는 야스토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10] 같은 해 8월 1일부터 막부의 고사무라이도코로벳토(小侍所別当)에 임명되었다. 1237년 2월 28일, 사콘노에노쇼칸(左近衛将監)에 임명되고, 이듬해 종5위하 관위를 받았다.

1241년 할아버지 야스토키에 의해 효조슈(評定衆)의 일원이 되었고, 건강이 악화된 야스토키는 쓰네토키를 후사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야스토키는 쓰네토키에게 태평을 존중하려면 문치(文治)에 힘쓸 것이며, "특히 사네토키와는 어떤 일이든 상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는 쓰네토키와 사네토키가 동년배이며, 과거 야스토키를 숙부인 도키후사가 도왔듯이 쓰네토키에게도 사네토키를 배정하여 차대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1242년 야스토키가 사망하자 쓰네토키는 19세의 나이로 4대 싯켄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승계로 인해 정권 내부에는 어린 싯켄에 대한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존재했고, 렌쇼(連署)는 임명되지 않았다. 쓰네토키 정권은 호조 시게토키(北条重時) 등 호조 일족의 중진들이 지지하는 체제였다. 1243년 쓰네토키는 정5위하 관위를 받았고, 무사시노카미(武蔵守)에 임명되었다.

싯켄이 된 쓰네토키는 소송 제도를 개혁했다. 1243년 몬주쇼(問注所)에서 판결 초안을 작성할 때 중요 안건은 두 달, 그 다음 정도의 안건은 한 달, 그 외에는 20일로 기한을 정했다. 같은 달 효조슈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매달 5일씩 회의 날짜를 정하고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이는 기존에 모든 임원이 참가하던 효조슈에 결석하는 경우가 많아 재판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훗날 싯켄 도키요리 시대에 정해진 히키쓰케슈(引付衆) 제도의 선구가 되었다). 같은 해 몬주쇼 소송에서 원고와 피고 양측의 서류가 모두 갖추어진 경우 대결을 생략하고 판결하도록 했다. 또한 판결 원안(原案)을 쇼군에게 보여 재결을 받는 절차를 간소화했다.

1244년 구조 요리쓰네가 27세가 되면서, 호조 미쓰토키(北条光時)나 미우라 야스무라 등 싯켄에 반대하는 세력이 요리쓰네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도쿠소케와 대립했다.[2] 쓰네토키는 이들을 해체하기 위해 요리쓰네를 쇼군직에서 해임했다.[11] 요리쓰네의 아들인 구조 요리쓰구가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되었고, 요리쓰구는 서둘러 원복식을 치렀다. 이때 에보시오야(烏帽子親)는 쓰네토키 자신이었다.

그러나 쇼군직에서 해임된 요리쓰네는 여전히 가마쿠라에 남아 요리쓰구의 보좌역을 맡았고, 반격도 이어졌다. 쓰네토키는 요리쓰네를 교토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1244년 막부 만도코로(政所)와 쓰네토키, 도키요리의 집이 화재로 소실되어 실패했다. 또한 쓰네토키는 요리쓰네, 미우라 집안과 친밀한 관계였기에 요리쓰네 일파를 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245년 쓰네토키는 요리쓰구에게 누이동생 히와다히메(檜皮姫)를 시집보냈다. 이로써 쓰네토키와 도쿠소케는 요리쓰구의 외척으로서 쇼군의 후견인이 되어 싯켄 반대파 세력을 일시적으로 억눌렀다.

1245년 전후로 쓰네토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황달을 앓았고, 병상에 눕기도 했다. 1245년 9월에는 정실인 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딸이 사망하고, 쓰네토키도 병이 재발하여 잠시 의식을 잃기도 하였다. 이후 쓰네토키는 차츰 건강이 악화되어 동생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대리를 맡겼다.

1246년 정월, 쇼군에게 오반(椀飯)을 헌상하는 의례를 치렀으나, 2월 즈음에는 누이동생 히와다히메가 병으로 쓰러졌다. 심로(心勞)가 겹쳐 3월 21일에 위독해진 쓰네토키의 치료를 위한 불사(佛事)가 연일 열렸다. 23일에는 쓰네토키의 저택에서 '심비(深秘)의 분부'라는 중대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쓰네토키의 두 자녀는 아직 어렸기에 동생 호조 도키요리에게 싯켄직을 넘겨준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3월 27일에 쓰네토키는 출가할 뜻을 전임 쇼군 요리쓰네에게 전했고, 4월 19일에 출가하여 법명을 안라쿠(安楽)라 하였다. 그리고 윤4월 1일에 향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3] 사망과 동시에 미야 소동이 발발하게 된다.

쓰네토키의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각기 류세이와 호조 요리스케가 되었다.

2. 1. 싯켄직 상속

1230년 아버지 도키우지가 사망하고 숙부 도키자네마저 암살되면서, 쓰네토키는 할아버지 야스토키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다.[9] 아버지의 사망으로 와카사 슈고(若狭守護) 직을 이어받았으나,[9] 너무 어려 실질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1234년 11세의 나이로 4대 쇼군 요리쓰네의 고쇼(御所)에서 원복(元服)을 행하고, 요리쓰네가 관을 씌워주고 상투는 도키후사가 틀어올려 주었으며, 쇼군의 헨기(偏諱)를 받아 '야시로 쓰네토키(弥四郎経時)'라는 이름을 받았다. '야시로'라는 이름은 초대 싯켄이었던 도키마사요시토키의 가명(仮名)이었던 '시로(四郎)'를 의식한 것으로, 도쿠소케(得宗家) 적류(嫡流)의 정당성을 보이려는 야스토키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10] 같은 해 8월 1일부터 막부의 고사무라이도코로벳토(小侍所別当)에 임명되었다. 1237년 2월 28일, 사콘노에노쇼칸(左近衛将監)에 임명되고, 이듬해 종5위하 관위를 받았다.

1241년 할아버지 야스토키에 의해 효조슈(評定衆)의 일원이 되었고, 건강이 악화된 야스토키는 쓰네토키를 후사로 확립하기 위해 노력했다. 야스토키는 쓰네토키에게 태평을 존중하려면 문치(文治)에 힘쓸 것이며, "특히 사네토키와는 어떤 일이든 상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타일렀다. 이는 쓰네토키와 사네토키가 동년배이며, 과거 야스토키를 숙부인 도키후사가 도왔듯이 쓰네토키에게도 사네토키를 배정하여 차대의 안전을 도모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2. 2. 싯켄 정치

닌지(仁治) 2년(1241년) 6월 28일, 할아버지 야스토키에 의해 쓰네토키는 효조슈(評定衆)의 일원이 되었다.[9] 같은 해 8월 12일에는 종5위상 관위를 받았다. 그 해에 야스토키는 건강이 악화되어 쓰네토키를 후사로 확립하기 위해 서둘렀는데, 11월에 쓰네토키를 불러 정무에 대한 훈계를 하며 태평을 존중하려면 문치(文治)에 힘쓸 것이며, "특히 사네토키(実時)와는 어떤 일이든 상담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당부하였다.[10] 야스토키는 쓰네토키와 사네토키가 같은 나이이므로, 자신이 숙부인 도키후사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쓰네토키도 사네토키와 협력하여 정권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듬해(1242년) 6월 15일, 야스토키가 사망하자 쓰네토키는 19세의 나이로 4대 싯켄이 되었다. 그러나 너무 이른 승계로 인해 정권 내부에는 어린 싯켄에 대한 불만을 품은 세력들이 존재했고, 렌쇼(連署)는 임명되지 않았다. 쓰네토키 정권은 호조 시게토키(北条重時) 등 호조 일족의 중진들이 지지하는 체제였다. 간겐(寛元) 원년(1243년) 6월 12일, 쓰네토키는 정5위하 관위를 받았고, 7월 8일에는 야스토키와 마찬가지로 무사시노카미(武蔵守)에 임명되었다.

싯켄이 된 쓰네토키는 소송 제도를 개혁했다. 간겐 원년(1243년) 2월 15일, 몬주쇼(問注所)에서 판결 초안을 작성할 때 중요 안건은 두 달, 그 다음 정도의 안건은 한 달, 그 외에는 20일로 기한을 정했다. 같은 달 26일에는 효조슈를 세 그룹으로 나누어 매달 5일씩 회의 날짜를 정하고 소송을 담당하게 했다. 이는 기존에 모든 임원이 참가하던 효조슈에 결석하는 경우가 많아 재판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처리하기 위한 조치였다(훗날 싯켄 도키요리 시대에 정해진 히키쓰케슈(引付衆) 제도의 선구가 되었다). 같은 해 7월 10일에는 몬주쇼 소송에서 원고와 피고 양측의 서류가 모두 갖추어진 경우 대결을 생략하고 판결하도록 했다. 9월 25일에는 판결 원안(原案)을 쇼군에게 보여 재결을 받는 절차를 간소화하여, 쇼군에게 보이지 않고 원안대로 부교닌(奉行人)에게 하지장(下知状)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2. 3. 쇼군직 해임과 반대 세력

1244년 구조 요리쓰네가 27세의 성인이 되면서, 호조 미쓰토키(北条光時)나 미우라 야스무라 등 싯켄에 반대하는 세력이 요리쓰네를 중심으로 파벌을 형성하여 도쿠소케와 대립했다.[2] 쓰네토키는 이들을 해체하기 위해 요리쓰네를 쇼군직에서 해임했다.[11] 요리쓰네의 아들인 구조 요리쓰구가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되었고, 요리쓰구는 서둘러 원복식을 치렀다. 이때 에보시오야(烏帽子親)는 쓰네토키 자신이었다. 이는 요리쓰네의 해임과 요리쓰구의 옹립이 쓰네토키의 주도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쇼군직에서 해임된 요리쓰네는 여전히 가마쿠라에 남아 요리쓰구의 보좌역을 맡았고, 요리쓰구를 쇼군으로 임명한다는 조정의 선지(宣旨)를 받은 것도 요리쓰네였다. 요리쓰네는 '오오도노(大殿)', '전임 다이나곤케(前大納言家)'라는 존칭으로 불렸고, 미우라 미쓰무라(三浦光村)나 지바 히데타네(千葉秀胤) 등 싯켄 반대파가 새로 효조슈(評定衆)에 들어오는 등 반격도 이어졌다. 쓰네토키는 요리쓰네를 교토로 돌려보내려 했으나, 1244년 12월 막부 만도코로(政所)와 쓰네토키, 도키요리의 집이 화재로 소실되어 실패했다. 또한 쓰네토키는 요리쓰네의 에보시코(烏帽子子)로서 아들과 다름없었고, 고사무라이도코로(小侍所) 벳토(別当)직을 맡는 등[11] 요리쓰네, 미우라 집안과 친밀한 관계였기에 요리쓰네 일파를 대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

1245년 7월 26일, 쓰네토키는 요리쓰구에게 누이동생 히와다히메(檜皮姫)를 시집보냈다. 혼인 날짜가 길일이 아니라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쓰네토키는 이를 강행했다. 이로써 쓰네토키와 도쿠소케는 요리쓰구의 외척으로서 쇼군의 후견인이 되어 싯켄 반대파 세력을 일시적으로 억눌렀다.

2. 4. 사망

간겐 3년(1245년) 전후로 쓰네토키의 건강이 악화되었다. 5월 29일에는 황달을 앓았고, 6월 19일에는 잠시 병상에 눕기도 했다. 그러나 7월 24일에 쾌유를 비는 기도가 행해졌고, 7일 후 건강이 회복되었다. 8월 6일에는 쓰네토키의 병세가 꽤 악화되었다는 소문이 교토에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9월 4일에는 정실인 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딸이 15세로 사망하고, 27일에는 쓰네토키도 병이 재발하여 잠시 의식을 잃기도 하여 가마쿠라 전체가 떠들썩했다고 한다. 10월 11일에는 미나모토노 요리쓰네를 위한 주연을 맡았던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일시 회복된 시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후 쓰네토키는 차츰 건강이 악화되어 동생인 호조 도키요리에게 대리를 맡겼다.

간겐 4년(1246년) 정월, 쇼군에게 오반(椀飯)을 헌상하는 의례를 치렀으나, 2월 즈음에는 누이동생 미다이도코로(御台所) 히와다히메가 병으로 쓰러졌다. 쇼군 요리쓰구도 병약한 몸으로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심로(心勞)가 겹쳐 결국 3월 21일에 위독한 지경이 된 쓰네토키의 치료나 쾌유를 비는 불사(佛事)가 연일 열렸다. 23일에는 쓰네토키의 저택에서 '심비(深秘)의 분부'라는 중대한 비밀 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 쓰네토키의 두 자녀는 아직 어렸기에 동생 호조 도키요리에게 싯켄직을 넘겨준다는 것이 결정되었다. 《아즈마카가미》는 이를 쓰네토키의 제안이었다고 했지만, 해당 기록 자체가 도키요리의 상속을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3월 27일에 쓰네토키는 출가할 뜻을 전임 쇼군 요리쓰네에게 전했고, 4월 19일에 출가하여 법명을 안라쿠(安楽)라 하였다. 그리고 윤4월 1일에 향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였다.[3] 사망과 동시에 미야 소동이 발발하게 된다.

한편 쓰네토키의 두 아들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각기 류세이와 호조 요리스케가 되었다.

3. 인물 평가

쓰네토키는 4년이라는 짧은 싯켄 재임 기간과 어린 나이 때문에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숙부 호조 시게토키는 쓰네토키가 죽었을 때 조정의 정무와 행사를 연기할 필요가 없다고 언급했는데, 이는 그의 정권이 선대 싯켄이었던 요시토키야스토키의 정권과는 다르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교토 조정은 쓰네토키 사후 30일 동안 부정을 피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동생 도키요리가 쓰네토키보다 더 재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아즈마카가미에 따르면, 야스토키는 쓰네토키에게 정무에 대한 훈계를 남긴 지 4일 만에 미우라 씨와 유키 씨·고야마 씨 간에 말다툼이 일어났을 때, 쓰네토키는 미우라 씨 편을 들어 자신의 식구를 보내 도왔지만, 도키요리는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다고 한다. 야스토키는 쇼군의 후견인이라는 중요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초연하고 공평하게 대처해야 하는데, 쓰네토키의 대처는 신중하지 못했다며 그에게 근신을 명했다고 한다. 다만, 이는 도키요리가 싯켄 자리를 이어받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1]

한국 역사학계에서는 쓰네토키의 짧은 재임 기간과 미야 소동 등의 혼란을 들어, 그를 가마쿠라 막부의 권력이 도쿠소케로 집중되는 과도기의 싯켄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4. 가계

항목내용
아버지호조 도키우지
어머니마쓰시타 젠니 (아다치 가게모리의 딸)
아내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딸, 사누키 뇨보
아들다카마사, 요리스케 (생모 불명)


5. 쓰네토키에게서 헨기를 받은 인물


  • 우쓰노미야 '''쓰네'''쓰나 (우쓰노미야 야스쓰나의 아들로 쓰네토키의 의형제, 딸은 제11대 집권 호조 무네노부의 부인)[4]
  • 가와고에 '''쓰네'''시게[5]
  • 사사키 '''쓰네'''야스 (로쿠카쿠 쓰네야스) : 아버지 사사키 야스쓰나가 호조 야스토키(쓰네토키의 아버지)에게서, 동생 사사키 요리쓰나가 호조 도키요리(쓰네토키의 동생)에게서 이름 한 글자를 받는 등, 사사키 씨 로쿠카쿠 류는 호조 씨 도쿠소케와 에보시 오야코 관계를 맺고 있는 가문이었다.[4] 특히 요리쓰나는 도키요리의 저택에서 원복을 치렀는데(『아즈마카가미겐초 2년(1250년) 12월 3일 조), 도키요리가 에보시오야가 되어 "요리" 자를 주었다고 생각된다.[6]
  • 쇼니 '''쓰네'''스케[7]
  • 오토모 지카'''토키'''
  • 모리 '''쓰네'''미쓰

참조

[1] 서적 Handbook to Life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Japan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2] 서적 日本の歴史 7 鎌倉幕府
[3] 서적 時頼と時宗 NHK出版
[4] 간행물 武家社会における加冠と一字付与の政治性について
[5] 웹사이트 河越氏 ~武蔵国秩父党の惣領家~ http://www1.ka6.koal[...]
[6] 서적 日本中世政治文化論の射程 思文閣出版
[7] 서적 蒙古襲来 山川出版社
[8] 문서
[9] 문서
[10] 문서 人物叢書‐北条時頼 吉川弘文館
[1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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