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야스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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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야스토키는 1183년에 태어나 1242년에 사망한 가마쿠라 막부의 무장으로, 호조 요시토키의 아들이자 제3대 싯켄이었다. 그는 조큐의 난에서 막부군의 대장으로 활약하고 로쿠하라 단다이 북방에 취임했으며, 싯켄 취임 후에는 합의제 정치를 도입하고 무사 사회의 기본 법전인 《고세이바이시키모쿠》를 제정하는 등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야스토키는 백성 구제에 힘쓰고 왕위 계승 문제에도 관여했으며, 60세에 사망하여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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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야스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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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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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조 야스토키 |
일본어 | 北条 泰時 |
로마자 표기 | Hōjō Yasutoki |
출생 | 1183년 |
사망 | 1242년 7월 14일 |
묘소 | 가나가와현가마쿠라시 오후나 조라쿠지 |
법명 | 관아(観阿) |
관직 | |
관위 | 스루가노카미, 무사시노카미, 사누키노카미, 사쿄노곤노다이후, 정4위하 |
막부 | 가마쿠라 막부 사무라이도코로 벳토, 로쿠하라 단다이 북방, 3대 싯켄(1224년 - 1242년) |
가계 | |
씨족 | 간무 헤이지, 호조 씨 |
아버지 | 호조 요시토키 |
어머니 | 아와노 쓰보네 |
배우자 | 야베 젠니, 안보 사네카즈의 딸 |
자녀 | 호조 도키우지, 호조 도키자네, 호조 기미요시,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아내, 미우라 야스무라의 아내, 호조 도모나오의 아내 |
기타 정보 | |
초기 이름 | 곤고(金剛), 에마 다이(太)로 요리토키(江間大(太)郎頼時) |
주군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미나모토노 요리이에, 미나모토노 사네토모, 후지와라노 요리쓰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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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호조 요시토키의 장남으로,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총애를 받으며 성장했다. 1218년에는 사무라이도코로의 수장(벳토)이 되었다.
1221년 조큐의 난에서는 교토의 조정에 맞서 막부군을 이끌어 승리했으며[1], 이후 교토에 남아 로쿠하라 단다이를 설치하고 숙부 호조 토키후사와 함께 초대 단다이가 되었다.
1224년 아버지 요시토키와 고모 호조 마사코 사후 싯켄직을 계승했다. 그는 호조 토키후사를 초대 렌쇼로 임명하고, 1225년에는 막부의 합의 기관인 효조슈(評定衆)를 창설했다. 1232년에는 막부의 기본 법전인 고세이바이 시키모쿠를 제정하여 공포하는 등 막부 통치의 기틀을 마련했으며, 공정한 통치로 명망을 얻었다.
1242년 출가하여 '''조쇼보 칸아'''(上聖房観阿)라는 법명을 얻었으나 같은 해 사망했다. 그의 사후 손자인 호조 쓰네토키가 싯켄직을 이었다.
2. 1. 탄생과 성장
주에이 2년(1183년) 요시토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명은 '''곤고(金剛)'''였다. 어머니는 요시토키의 측실로 고쇼의 뇨보였던 아와노 쓰보네(阿波局)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신분이나 출신은 불명확하다. 야스토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요시토키는 21세였으며, 할아버지 도키마사 등 호조 일족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거병을 도와 가마쿠라에 들어간 지 3년째 되는 해였다.야스토키가 10세 무렵, 고케닌 다가 시게유키가 길에서 야스토키를 마주치고도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요리토모에게 질책받는 사건이 있었다. 요리토모는 자신의 외척이자 막부 내 높은 지위를 가진 호조 가문과 다른 고케닌 사이에는 큰 신분 차이가 있다며 시게유키의 행동을 비난했다. 시게유키는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항변하며 야스토키에게 직접 물어볼 것을 청했다. 야스토키는 시게유키가 무례하지 않았으며 자신도 불쾌하게 생각하지 않았다고 답했으나, 요리토모는 시게유키가 변명하고 야스토키가 그를 감싸는 것이라 판단하여 시게유키의 영지를 몰수하고 야스토키에게는 상으로 검을 하사했다. 이 일화는 야스토키의 인품과 요리토모의 그에 대한 총애를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38].
겐큐 5년(1194년) 2월 2일, 13세에 원복(元服) 의식을 치렀다. 초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직접 에보시오야(烏帽子親)를 맡아 자신의 이름 중 한 글자인 '요리(頼)'를 내려주어 '''요리토키'''(頼時)라는 이름을 받았다[10]. 이후 '''야스토키'''(泰時)로 개명했는데,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아즈마카가미』 기록에 따르면 쇼지 2년(1200년)에는 '요리토키'로 기록된 이름이 겐닌 원년(1201년)에는 '야스토키'로 바뀌어 있어, 이 사이에 개명한 것으로 추정된다[11][12].
원복과 동시에 요리토모의 명으로 유력 고케닌인 미우라 요시즈미의 손녀와 약혼했으며, 겐닌 2년(1202년) 8월 23일 미우라 요시무라의 딸(야베 젠니)을 정실로 맞이했다. 이듬해인 겐닌 3년(1203년)에 적남 도키우지가 태어났으나, 후에 미우라 씨와 이혼하고 안보 사네야스(安保實員)의 딸을 계실로 맞이했다. 차남 도키자네가 겐랴쿠 2년(1212년)에 태어난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이혼하고 재혼한 것으로 보인다.
겐닌 3년(1203년) 9월에는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서 히키씨 토벌군에 가담했다. 겐랴쿠 원년(1211년)에는 슈리노스케(修理亮)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겐랴쿠 2년(1212년) 5월, 이복동생이자 요시토키의 정실 아들로 여겨졌던 아사토키가 3대 쇼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노여움을 사 아버지 요시토키에게 의절당하면서 야스토키의 지위가 더욱 공고해졌다. 겐랴쿠 3년(1213년) 와다 전투에서는 아버지 요시토키와 함께 와다 요시모리 세력을 멸망시키는 데 공을 세워 무쓰국 도다 군(遠田郡)의 지토 직에 임명되었다. 겐포 6년(1218년)에는 아버지에 의해 사무라이도코로의 벳토(別当)로 임명되었고, 조큐 원년(1219년)에는 종5위상 관위와 스루가노카미(駿河守) 관직을 받았다.
2. 2. 조큐의 난과 로쿠하라 단다이
1221년 조큐의 난이 발발하자, 야스토키는 교토의 황실에 맞서 막부군을 이끌었다.[1] 막부군이 승리한 후, 그는 교토에 남아 로쿠하라 단다이를 설치했다. 야스토키는 그의 숙부인 호조 토키후사와 함께 초대 단다이가 되었다.2. 3. 싯켄 취임과 정치 개혁
조오 3년(1224년) 6월, 아버지 호조 요시토키가 급서하자 야스토키는 교토에서 가마쿠라로 돌아왔다. 이때 그의 계모인 이가노 가타와 그녀의 오빠 이가 미쓰무네가 이가노 가타의 친아들 마사무라를 차기 싯켄으로, 사위인 구게 이치조 사네마사를 쇼군으로 옹립하려 모의한 이가 씨의 변이 발생했다. 그러나 야스토키의 고모이자 아마미다이(尼御台)였던 호조 마사코는 야스토키와 그의 숙부 호조 도키후사를 고쇼로 불러들여 각각 싯켄과 렌쇼에 임명하고 이가 씨 일파를 모반인으로 처벌하며 사건을 수습했다. 마사코의 후원에 힘입어 야스토키는 호조씨 가독을 상속받고 42세의 나이로 제3대 싯켄이 되었다. 이가노 가타는 유폐되었으나, 사건에 연루된 이복동생 마사무라나 유력 고케닌 미우라 요시무라 등은 처벌받지 않았고, 유배되었던 이가 미쓰무네도 사면되어 복귀했다.[39] 이러한 관대한 조치는 당시 야스토키의 정치적 기반이 아직 취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야스토키는 아버지 요시토키가 남긴 영지를 동생들에게 대부분 양보하고 자신은 거의 갖지 않았는데, 이는 형제들과의 융화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또한, 호조씨 적통 가문의 사무를 담당하는 '가령'(家令) 직책을 신설하고 신임하는 가신 미토 가게쓰나를 임명하여, 다른 일족과 차별화되는 적통(嫡流) 가문으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는 훗날 도쿠소 가문의 내관령 제도의 기원이 되었다.이듬해인 가로쿠 원년(1225년) 6월과 7월, 막부의 주요 인물이었던 오에노 히로모토와 야스토키의 강력한 후견인이었던 호조 마사코가 연이어 사망했다. 이는 야스토키에게 큰 타격이었지만, 동시에 마사코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 노선을 추구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40]
야스토키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이래 이어져 온 독재 체제에서 벗어나 집단 지도 체제와 합의 정치를 지향했다. 1225년, 그는 숙부 호조 도키후사를 교토에서 불러들여 자신과 함께 싯켄직을 수행하게 했는데, 이는 '양(兩)싯켄' 체제로 불렸으며 도키후사의 지위는 나중에 렌쇼(連署)라는 공식 직책이 되었다. 또한, 미우라 요시무라를 비롯한 유력 고케닌 대표들과 나카하라노 모로카즈 등 막부 사무 관료들을 포함한 총 11명의 고케닌으로 구성된 효조슈(評定衆)를 설치했다. 야스토키와 도키후사(렌쇼)를 포함한 13명으로 구성된 이 '효조(評定)' 회의는 만도코로(政所)에 설치되어 막부의 최고 정책 결정 기구로서 기능하며 정책, 인사, 소송, 법령 제정 등을 합의를 통해 결정했다. 이로써 기존의 만도코로와 몬추조(問注所)는 각각 재정 및 행정과 소송 실무를 담당하고, 중요한 정무와 재판은 효조슈의 합의를 거치는 시스템이 구축되었다. 이는 막부 운영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높이는 중요한 개혁이었다.
3대 쇼군 사네토모 암살 이후 공석이었던 쇼군 자리에는 교토의 섭가 출신인 8세의 미토라(三寅)를 맞이하여 1225년 원복(元服)을 행하고 후지와라노 요리쓰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당시 원복은 12~13세 전후에 행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쇼군 임명을 서두르기 위해 이례적으로 어린 나이에 원복을 치렀다.[41] 요리쓰네는 가로쿠 3년(1226년) 정식으로 세이이타이쇼군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야스토키는 요리토모 시대부터 사용된 오쿠라 고쇼에서 쓰루가오카 하치만구 남쪽 와카미야 대로 동쪽의 우쓰노미야 대로(宇都宮辻子)로 막부 청사를 이전했다. 쇼군 요리쓰네가 새 막부 청사로 옮긴 다음 날 첫 효조슈 회의가 열렸으며, 이는 쇼군 중심의 정치에서 벗어나 싯켄 중심의 합의제 정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음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된다.
1232년에는 무사 사회의 관습과 도리를 바탕으로 한 최초의 무가법전인 고세이바이 시키모쿠(御成敗式目) 51개 조를 제정, 공포했다. 이는 지토와 고케닌 간의 분쟁 해결 기준을 제시하고 막부 통치의 법적 근거를 마련함으로써 이후 무로마치 막부 시대까지 이어지는 무가 사회의 기본법 역할을 했다. 공정한 정의를 추구했던 야스토키의 통치는 이 법전 제정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으며, 그는 이로 인해 명군으로 칭송받게 되었다.
2. 4. 고세이바이시키모쿠 제정
당시 일본은 수년간 이어진 기후 불순으로 피폐했으며, 특히 1230년에는 '간키 기근'이라 불리는 대기근이 발생하여 사회가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혼란을 배경으로 호조 야스토키는 1232년, 무사 사회의 관습법과 초대 쇼군 요리토모 시대의 선례를 바탕으로 총 51개 조로 구성된 고세이바이시키모쿠를 제정하여 공포했다. 이는 쇼군 정권 최초의 체계적인 법전으로서 이후 무사 정권 통치의 기본법 역할을 수행했으며, 야스토키는 이를 통해 공정한 정치를 구현하려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2. 5. 만년과 죽음
닌지 2년(1241년) 6월 27일, 야스토키는 건강이 악화되어 소동이 일어났으나(『아즈마카가미』), 7월 20일에는 회복되었다(『아즈마카가미』).닌지 3년(1242년) 5월 9일, 출가하여 '''조쇼보 칸아'''(上聖房観阿)라는 법명을 얻었다(『가마쿠라 시대기』이서). 이때 야스토키의 이복동생인 아사토키를 비롯해 야스토키의 가신 약 50명도 그를 따라 출가했다. 교토의 공가 일기인 『헤이토기』 닌지 3년 5월 17일 기록에는 아사토키가 다른 고케닌들보다 하루 늦게 출가한 것에 대해 "평소 소원했던 형제인데"라며 놀라움과 의문을 표하는 소문이 돌았다고 전한다.
출가한 지 약 1개월 반 후인 6월 15일에 향년 60세로 사망했다. 공교롭게도 아버지 요시토키, 이모 마사코, 오에노 히로모토 등 호조씨 정권의 중요 인물들이 야스토키처럼 6월에서 7월 사이에 사망했고, 조큐의 난에서 세 상황이 유배된 것도 같은 시기였으며, 6월 15일은 야스토키가 우지 강을 돌파하여 교토에 입성한 날이었기 때문에, 세상에서는 고토바 상황의 원령에 의한 재앙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나 실제 사인은 교토 공가의 일기 『게이코쿄키쇼』 6월 20일 기록에 따르면, 평소의 과로에 이질이 겹쳤기 때문이었다. 같은 일기 6월 26일 기록에는 고열에 시달렸으며, 그 모습이 마치 다이라노 기요모리의 최후와 같았다고 전한다. 황위 계승 문제가 큰 심려가 되었던 것도 원인 중 하나로 여겨진다. 『헤이토기』 5월 26일 및 28일 기록에 따르면, 막부 측은 야스토키의 위독함이 알려지자 교토와 가마쿠라 사이의 교통을 차단했으며, 쇼군 요리쓰네의 아버지인 구조 미치이에의 사자조차 가마쿠라에 들어오지 못하게 돌려보냈다고 한다.
야스토키가 사망한 다음 날, 그의 손자이자 요절한 장남 도키우지의 맏아들인 호조 쓰네토키가 제4대 싯켄으로 취임했다(『손비분맥』, 『계도찬요』). 한편, 야스토키의 위독 소식을 듣고 로쿠하라 탄다이에서 가마쿠라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것은 시게토키뿐이었으나, 이전에 야스토키에게 연서 취임을 거절당했던 도키후사의 아들 도키모리가 무단으로 가마쿠라로 돌아와 다시 연서직에 오르려 했으나 거부당하고 실각하는 사건이 있었다(닌지 3년의 정변).
3. 평가
호조 야스토키는 인격적으로 뛰어나 무가(무사)와 공가(구게) 모두로부터 인망이 두터웠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동시대 산기(參議)였던 히로하시 쓰네미쓰 등은 그를 고대 중국의 성인군자인 요나 순에 비유하며 칭찬했다. 야스토키의 정치는 당시 가마쿠라 무사들의 질박하고 현실적이며 강건한 이상을 구현한 것으로 여겨졌으며, 그의 뛰어난 인격을 보여주는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사석집》은 야스토키를 "진실로 현인이다. 백성의 한탄을 자신의 한탄처럼 여긴 만인의 부모와 같은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며, 재판 시에는 '도리'라는 말을 반복하고 그러한 이야기에 감동하여 눈물까지 흘렸다고 전한다.
《사석집》에는 다음과 같은 야스토키 관련 일화가 실려 있다.
- 규슈의 충성스럽고 근면한 젊은 무사가 아버지가 팔았던 영지를 다시 사서 돌려주었으나, 아버지는 동생에게 영지를 모두 물려주었다. 형제가 영지를 두고 다투게 되어 야스토키에게 재판을 받게 되었는데, 야스토키는 형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고세이바이시키모쿠에 따라 정식 절차를 밟은 동생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형의 생활을 계속 돌봐주었고, 나중에 영주 없는 땅이 생기자 그에게 주었다. 형이 "그동안 고생한 아내에게 밥이라도 배불리 먹여주고 싶다"고 감사하자, 야스토키는 "입신하면 조강지처를 잊는 사람이 많은데 당신의 생각은 참으로 훌륭하다"며 여비와 말까지 챙겨주었다.
- 어떤 지토와 료케(領家)가 다투었을 때, 료케의 주장을 들은 지토가 즉시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자, 야스토키는 "훌륭한 패배다. 명백히 패소인데도 변명하는 것이 보통인데, 스스로 패소를 인정한 그대는 실로 훌륭하고 정직한 사람이다. 오랫동안 재판을 해왔지만 이렇게 기쁜 일은 처음이다"라며 눈물을 흘리며 감동했다.
- 19세 때, 미나모토노 요리이에가 축국에 빠져 정치를 돌보지 않자 이를 우려하여 간언한 적이 있다. 간키 기근 때는 피해가 심한 지역의 백성들에게 세금을 면제하고 쌀을 나누어 주어 많은 사람을 구했다. 이때 그는 검소함을 중시하여 다다미나 옷을 새로 만들지 않고 밤에도 등불을 쓰지 않았으며, 연회나 유람을 금지했다. 만년에는 도로 공사 때 직접 말을 타고 흙과 돌을 운반하기도 했다.
이처럼 성실하게 직무를 수행했기에 공가나 민중으로부터도 평판이 좋았고, 야스토키가 심은 버드나무 그늘에서 쉬는 여행자가 그에게 감사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하지만 긍정적인 평가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임 간파쿠였던 고노에 가네쓰네는 조큐의 난 이후 조정에 대한 강경한 조치에 불만을 품고 야스토키를 다이라노 기요모리와 같다고 비난하며 "극악무도한 자라 고열로 숨진 것"이라고 악평했다. 이러한 일부 공가의 악감정은 야스토키의 죽음이 고토바 상황의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으로 퍼지기도 했다. 또한 조큐의 난 당시 야스토키는 신중론을 펼쳤는데, 가미요코테 마사타카는 즉시 출격론을 주장한 오에노 히로모토에게 밀린 이 태도가 야스토키 생애 최대의 과오였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뒤, 호조 씨에 대한 평가는 주로 황실에 대한 처우를 둘러싼 대의명분론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후대의 호조 다카토키 등이 암군으로 평가받는 것과 달리, 야스토키는 '덕정'으로 칭송받는 경향이 있다. 남북조 시대 남조 측의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신황정통기》에서 야스토키를 "심성이 바르고 정직한 정치를 하며 사람에게 자비를 베풀고 사치를 하지 않는 인물"로 칭송하며, 그의 덕분에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에도 시대에 무가 정치를 비판했던 아라이 하쿠세키조차 야스토키에 대해서는 "그가 현인이었던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에도 시대 국학의 발전 과정에서는 모토오리 노리나가나 라이 산요 같은 국학자들이 야스토키를 비판하기도 했다.
한편, 호조 씨에 의해 편찬된 역사서 《아즈마카가미》에는 야스토키에 관한 미담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다른 인물의 일화를 가져다 쓴 경우도 있고[20], 야스토키에게 불리한 사실을 숨기거나 왜곡했을 가능성도 지적된다. 예를 들어, 《아즈마카가미》에는 후지와라노 요리쓰네가 가스가타이샤에 참배할 때 야스토키가 동행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요리쓰네의 아버지 구조 미치이에의 일기 《교쿠요》에는 야스토키가 교토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사실과 다를 수 있다.
동시대 공경 후지와라노 쓰네미쓰는 야스토키를 "성품이 청렴하고 정직하며, 도리를 먼저 생각한다. 당나라 요·우순의 재탄생이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민경기》 닌지 3년 6월 20일조)라고 극찬했지만, 고노에 가네쓰네는 "극악무도한 자" (《민경기》 닌지 3년 6월 26일조)라고 혹평하며 그의 죽음을 다이라노 기요모리에 비유했다. 남북조 시대에 성립된 《태평기》는 야스토키가 고세이바이시키모쿠 제정을 통해 공정한 재판을 실현하고 법을 준수하여 태평성대를 이루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권 제35)
고미 후미히코는 야스토키가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의 덕정을 배우고 이를 계승하여 《고세이바이시키모쿠》를 제정함으로써 무가 정권을 안정시켰다고 평가하면서도, 막부 창설기의 정치와 문화를 배우고 무가 사회의 초석을 다진 사네토모의 역할 역시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언급했다.[21]
4. 헨기(偏諱)를 받은 인물
가마쿠라 시대의 무사 사회에서는 주군이 부하에게 자신의 이름 한 글자(휘)를 주는 헨기(偏諱)라는 관습이 있었다. 싯켄(執権, 막부의 최고 권력자)이었던 호조 야스토키 또한 자신의 이름 중 '야스(泰)' 또는 '토키(時)' 자를 여러 고케닌(御家人, 쇼군의 가신)에게 수여했다. 이는 당시 호조 씨가 막부 내에서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야스토키로부터 헨기를 받은 주요 인물은 다음과 같다.
이름 | 관계/소속 | 비고 |
---|---|---|
호조 사네야스 | 실제 동생, 가나azawa류 시조 | 처음 이름은 사네요시(実義)였다. 원래 장군 미나모토노 사네토모에게서 사네(実) 자를 받았으나, 이후 야스토키로부터 야스(泰) 자를 받아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가나자와류 호조 씨가 장군이 아닌 도쿠소 가(호조 가문 본가)를 에보시오야(烏帽子親, 성인식 후견인)로 삼는 가계로 자리매김했음을 보여준다.야스토키의 동생・사네요시(후의 사네야스)는 장군・미나모토노 사네토모를 에보시 오야로 하여 그 한 글자(「実」자)를 받았지만, 차대 사네토키 이후의 가나자와류 호조 씨의 당주는 도쿠소가의 당주를 에보시 오야로 하여 그 한 글자를 받고 있다. 이것은 호조 씨의 일족 중에서 장군을 에보시 오야로 하여 한 글자를 받는 것이 도쿠소 가문과 아카바시류 호조 씨 당주에 한정되어, 가나자와류 호조 씨의 당주는 다이부쓰류 호조 씨의 당주와 함께 그보다 한 단계 낮은 도쿠소 가문을 에보시 오야로 하는 가문으로 위치 지어졌고, 사네요시에서 사네야스로의 개명도 그 방침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된다。 |
호조 사네토키 | 조카 (사네야스의 아들) | 1233년 야스토키의 저택에서 겐푸쿠(성인식)를 치르고, 에보시오야가 된 야스토키로부터 토키(時) 자를 받았다.[10]『아즈마카가미』덴푸쿠 원년(1233년)12월 29일 조에, 사네토키가 야스토키의 저택에서 겐푸쿠한 뜻의 기사가 보이며, 이때 야스토키가 에보시 오야를 맡아 「토키」의 한 글자를 주었다고 한다 |
아시카가 야스우지 | 외손 또는 조카, 아시카가 씨 적통 | 가마쿠라 시대 아시카가 가문의 당주는 도쿠소 가 당주의 헨기와 가문의 통자인 우지(氏)를 이름에 사용했다.가마쿠라 시대의 아시카가 적류 가문의 역대 당주의 휘는 "도쿠소 가 당주의 헤응+통자의 「씨」"로 구성되어 있었다。[25] |
아다치 야스모리 | 아다치 씨 | [26] |
우쓰노미야 야스쓰나 | 우쓰노미야 씨 | [27] |
우쓰노미야 야스치카 | 야스쓰나의 조카 (형 토키쓰나의 아들) | |
오토모 야스나오 | 오토모 씨 | |
노쓰하라 요시야스 | ||
다키타 친야스 | ||
오다 야스토모 (야스치카) | 히타치 오다 씨 | |
가와고에 야스시게 | 가와고에 씨 | [25][28] |
구도 미쓰야스 | 구도 씨 | [29] |
사사키 야스쓰나 | 사사키 씨 로쿠카쿠류 | [25] |
사사키 야스키요 | 사사키 씨 요시키요류 | [25] |
다카오카 야스시게 | 오다 야스토모의 동생, 히타치 다카오카 씨 시조 | |
다케다 노부토키 | 다케다 씨 | [30] |
지바 야스다네 (센다 야스다네) | 지바 씨 | [25][31] |
지바 야스히데 | 히데타네의 아들 | |
나가이 야스히데 | 나가이 씨 | [25] |
나가이 야스시게 | 나가이 씨 | [25] |
니카이도 유키야스 | 니카이도 씨 | [25] |
하타케야마 야스쿠니 | 사촌 | [32] |
히라가 고레야스 | 아키 히라가 씨 | 1232년 야스토키의 저택에서 겐푸쿠를 치르고 에보시오야인 야스토키로부터 야스 자를 받았다.「히라가 씨 계보」(『히라가 가문 문서』이 네 여덟 호[33])의 고레야스의 부기에, 조에이 2년(1232년)7월 11일에 무사시노마에노 쓰카사 뉴도전(=야스토키)의 저택에서 겐푸쿠한 뜻의 기재가 있어, 그 이름에서 에보시 오야인 야스토키로부터 「야스」자를 받았다고 생각된다。 |
미우라 야스무라 | 처음에는 의제, 나중에는 사위, 미우라 씨 | [26][34][35][36] |
야스토키가 싯켄으로 재임하던 시기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은 후지와라노 요리쓰네였다. 연구에 따르면, 야스토키의 이름자인 '야스(泰)'는 도쿠소 가(得宗家, 호조 가문의 본가)의 당주가 고케닌에게 수여하는 헨기임이 확실하며, 이는 '도쿠소 → 고케닌'이라는 위계질서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37]
또한, 위에 언급된 인물 중 다수는 야스토키를 겐푸쿠 때의 에보시오야로 삼았다. 야스토키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42세에 도쿠소 가문의 당주이자 싯켄이 되었기 때문에, 헨기를 받은 인물 중에는 아시카가 야스우지처럼 실제로는 야스토키의 아들인 호조 도키우지나 손자인 호조 쓰네토키, 호조 도키요리와 비슷한 세대인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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