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호조 도키우지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조 도키우지는 가마쿠라 시대의 인물로, 호조 야스토키의 장남이다. 1221년 조큐의 난에서 우지가와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224년 로쿠하라 탐제 북방에 임명되어 교토에서 치안을 담당했다. 1227년 슈리료에 임관하고 와카사국의 슈고를 겸임하며 차기 집권으로 기대를 모았으나, 1229년 부하의 사건으로 엔랴쿠지와 갈등을 겪었다. 1230년 병으로 가마쿠라로 돌아갔으나 회복하지 못하고 2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호조 도키토키가 뒤를 이어 집권하였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03년 출생 - 민다우가스
    민다우가스는 13세기 중반 리투아니아의 통치자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왕국으로 승격시키고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최초의 리투아니아 국왕이 되었으나, 그의 통치는 내외부 갈등과 1263년 암살로 끝맺었으며 리투아니아 국가의 기초를 세운 인물로 평가받는다.
  • 1203년 출생 - 피에트로 2세 디 사보이아 백작
    피에트로 2세 디 사보이아 백작은 13세기에 활동한 사보이아 백작으로, 성직자에서 백작으로 전향하여 영토 확장과 행정 개혁을 추진했으며, 건축, 법률, 재정 개혁을 시행하다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 1230년 사망 - 알폰소 9세
    알폰소 9세는 레온 왕국의 왕으로, 카스티야 왕국과의 갈등 속에서 코르테스 소집, 살라망카 대학교 설립 등의 업적을 남겼으며, 사후 그의 아들 페르난도 3세가 레온과 카스티야 왕국을 통합했다.
  • 1230년 사망 - 오타카르 1세
    오타카르 1세는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보헤미아 왕위를 얻고 신성 로마 황제와 독일 왕위 쟁탈전을 이용하여 왕위를 되찾았으며, 시칠리아 황금 문서를 통해 왕위 세습권을 보장받고 독일인 이주 장려와 도시 발전으로 보헤미아 발전에 기여한 왕이다.
호조 도키우지
기본 정보
호조 도키우지 초상
호조 도키우지 초상
이름호조 도키우지
일본어 표기北条 時氏
로마자 표기Hōjō Tokiuji
이명무사시 타로
계명게츠린지 젠아
시대가마쿠라 시대 전기
출생겐닌 3년 (1203년)
사망간키 2년 6월 18일 (1230년 7월 29일)
관위종5위하, 수리노스케, 와카사슈고
막부가마쿠라 막부로쿠하라 탄다이 기타카타
주군미나모토노 사네토모 → 후지와라노 요리쓰네
씨족호조 씨 (도쿠소)
부모아버지: 호조 야스토키, 어머니: 미우라 요시무라의 딸・야베 젠니
형제자매호조 도키우지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부인
도키자네
기미요시
미우라 야스무라의 부인
호조 도모나오의 부인
이케 요리키요의 부인 외
이부동생: 미우라 모리토키 외
배우자정실: 아다치 가네모리의 딸・마쓰시타 젠니
자녀쓰네토키
도키요리
도키사다 (다메토키)
히와다히메 (구조 요리쓰구의 부인)
딸 (아시카가 야스우지의 부인)
딸 (호조 도키사다 (도키후사 류)의 부인)
딸 (호조 도키타카의 부인)

2. 생애

1203년(겐닌 3년) 호조 야스토키(훗날 제3대 집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21년(조큐 3년) 조큐의 난에서 아버지 야스토키와 함께 도카이도를 공격해 올라갔으며, 5월 21일에 18로 종군했다. 6월 14일 우지가와 전투에서 막부군이 고전하는 가운데, 도키우지 자신이 우지가와를 적전 도하하는 공적을 세웠다.

1224년 6월, 아버지 야스토키가 제3대 집권이 되면서 가마쿠라로 돌아가자, 로쿠하라 탐제 북방에 임명되어 교토로 부임했다. 가로쿠 3년(1227년) 슈리료에 임관하고, 안테이 원년(1228년) 와카사국 슈고가 되었다. 젊은 도키우지는 장래 제4대 집권이 될 것으로 기대받았다.

1229년 3월, 도키우지의 부하 미요시 다메키요가 히에이산 승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엔랴쿠지는 도키우지에게 범인 인도를 요구했고, 로쿠하라 탐제는 히에이 산에 미요시 종자 살해범 인도를 요구하며 대립했다. 이로 인해 엔랴쿠지 승병과 로쿠하라 탐제 무사가 충돌했고, 손쇼 호신노는 사임했다. 야스토키는 미요시 다메키요 등의 유배를 조정에 신청했으나, 도키우지가 저항하여 6월에야 처분이 결정되었다.

1230년 3월, 도키우지는 병으로 쓰러져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4월, 가마쿠라에 들어간 도키우지는 병상에 누웠고, 6월 18일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향년 28세였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메이게츠키』에 도키우지가 당뇨병을 앓았다고 기록했으며, 당뇨병 악화로 요독증신장 계통 병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있다.

도키우지 유해는 다이지사 곁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야스토키는 아들의 죽음을 슬퍼했고, 간토에서는 도키우지 죽음을 슬퍼하며 출가하는 자가 수십 명이었다. 도키우지 사후 12년 뒤 야스토키가 사망하고, 도키우지 장남 도키토키가 제4대 집권에 취임했다.

2. 1. 출생과 조큐의 난

1203년(겐닌 3년) 호조 야스토키(훗날 제3대 집권)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221년(조큐 3년) 조큐의 난이 발발하자, 아버지 야스토키와 함께 도카이도를 공격해 올라갔으며, 5월 21일에 18로 종군했다. 이 난의 가장 큰 전투였던 6월 14일 우지가와 전투에서 조정 측의 격렬한 저항과 우지가와의 급류에 막혀 막부군이 고전하는 가운데, 도키우지 자신이 우지가와를 적전 도하하는 공적을 세웠다.

2. 2. 로쿠하라 단다이 기타카타 임명

1224년 6월, 아버지 호조 야스토키가 제3대 집권이 되면서 가마쿠라로 돌아가자, 그를 대신하여 로쿠하라 탐제 북방에 임명되어 교토로 부임했다. 다만, 『아즈마카가미』에는 야스토키와 함께 가마쿠라로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 로쿠하라 탐제 남방 호조 도키후사가 『메이게츠키』 등에 따르면, 7월 13일 시점에 재입경하여 가로쿠 원년(1225년) 6월 15일까지 로쿠하라 탐제로서 교토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키우지가 로쿠하라 탐제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 이후라는 설도 있다.

가로쿠 3년(1227년) 4월 20일에 슈리료에 임관하고, 안테이 원년(1228년)에는 와카사국의 슈고가 되었다. 젊은 도키우지는 장래 제4대 집권이 될 것으로 기대받고 있었다.

도키우지가 로쿠하라 탐제로 재임 중인 교토 주변은 조큐의 난의 여파로 치안이 문란해져, 교토의 경비 담당자로서 치안 단속에 나서는 한편, 도쿠소 가문의 적자였기에 남북 양 탐제의 주도적 입장에 있는 집권 탐제로서 재직했다.

간키 원년(1229년) 3월 23일, 도키우지의 부하인 미요시 다메키요가 빚을 갚는 문제를 둘러싸고 히에이산의 승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엔랴쿠지는 도키우지에게 범인의 인도를 요구했고, 로쿠하라 탐제는 히에이 산에 미요시의 종자 살해 범인 인도를 요구하며 양측이 대립했다. 이로 인해 엔랴쿠지의 승병과 로쿠하라 탐제의 무사가 충돌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당시 엔랴쿠지의 수장이었던 손쇼 호신노는 사태 수습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며 사임했다. 야스토키는 사건에 연루된 미요시 다메키요와 동료 1명의 유배를 조정에 신청하려 했지만, 도키우지가 이에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처분이 결정된 것은 6월이 되어서였다.

다음 해 간키 2년(1230년) 3월 28일, 도키우지는 로쿠하라 탐제 재직 중에 병으로 쓰러져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로쿠하라 수호 차제』에는 가마쿠라로 내려가는 도중 미야지산 (현재의 아이치현도요카와시)에서 발병했다고 한다. 한편, 『아즈마카가미』에는 4월에 가마쿠라에 들어가고 나서 며칠도 안 되어 병이 들었다고 하며, 『메이게츠키』에는 저자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아네노코지 사네요로부터 3월 17일에 도키우지와 만나 28일에 가마쿠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었고, 28일에 도키우지가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병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해의 『아즈마카가미』 윤정월 26일 조에 따르면, 다키구치에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야스토키가 유력 고케닌의 자제들을 상경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엔랴쿠지와 대립하여 조정의 의향에도 저항한 도키우지를 로쿠하라 탐제에서 해임하기 위한 야스토키의 포석이었다고 보는 설도 있다. 또한, 3월 11일 단계에서 도키우지의 후임으로 호조 시게토키가 교토에 파견되었고, 2월 19일에는 시게토키의 취임과 출발을 축하하는 이누오이모노가 유이가하마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에, 도키우지의 교체는 2월 시점에서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동으로부터 1년 후의 해임은 도키우지를 완전히 배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언젠가 야스토키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가마쿠라 중앙 정권에서의 요직에 취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이동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2. 3. 로쿠하라 단다이 재임과 엔랴쿠지와의 갈등

1224년 6월, 아버지 호조 야스토키가 제3대 집권이 되어 가마쿠라로 돌아가자, 그와 교체되어 로쿠하라 단다이 북방에 임명되어 교토로 부임했다. 다만 『아즈마카가미』에는 야스토키와 함께 가마쿠라로 돌아갔다고 되어 있는 로쿠하라 단다이 남방의 호조 도키후사는, 『메이게츠키』 등에 따르면 7월 13일 시점에서 재입경하여, 다음 가로쿠 원년(1225년) 6월 15일까지 로쿠하라 단다이로서 교토에 머무르며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도키우지가 로쿠하라 단다이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그 이후라는 설도 있다.

가로쿠 3년 4월 20일에 슈리료에 임관하고, 안테이 원년에는 와카사 국의 슈고가 되었다. 젊은 도키우지는 장래에 제4대 집권이 될 것으로 기대받고 있었다.

도키우지가 로쿠하라 단다이로 재임 중인 교토 주변은 조큐의 난의 여파로 치안이 문란해져, 교토의 경비 담당자로서 치안 단속에 나서는 한편, 도쿠소 가문의 적자였기에 남북 양 탐제의 주도적 입장에 있는 집권 탐제로서 재직했다.

간키 원년 3월 23일, 도키우지의 부하인 미요시 다메키요가 빚을 갚는 문제를 둘러싸고 트러블이 발생하여, 대주인인 히에이 산의 승려를 살해했다. 그 때 양쪽의 종자들도 다툼이 벌어져, 미요시의 종자도 살해되었다. 히에이 산의 혼쇼인 엔랴쿠지는 도키우지에게 미요시의 인도를 요구하고, 로쿠하라 단다이는 히에이 산에 미요시의 종자 살해의 범인 인도를 요구하여, 양자는 대립했다. 이로 인해 엔랴쿠지의 승병과 로쿠하라 단다이의 무사가 충돌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당시 엔랴쿠지의 수장이었던 텐다이좌주였던 손쇼 호신노는, 사태 수습에 책임질 수 없다며 사임해 버렸다. 야스토키는 사건에 연루된 미요시 다메키요와 동료 1명의 유배를 조정에 신청하려고 했지만, 도키우지가 이에 격렬하게 저항했기 때문에, 처분이 겨우 결정된 것은 6월이 되어서였다.

다음 해 간키 2년 3월 28일, 로쿠하라 단다이 재직 중에 병으로 쓰러져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로쿠하라 수호 차제』에서는, 가마쿠라로 내려가는 도중의 미야지산 (현재의 아이치현도요카와시)에서 발병했다고 한다. 그 한편, 『아즈마카가미』에서는 4월에 가마쿠라에 들어가고 나서 며칠도 안 되어 병이 들었다고 하며, 『메이게츠키』에는 저자인 후지와라노 사다이에가 아네노코지 사네요로부터, 3월 17일에 도키우지와 만나 28일에 가마쿠라로 내려간다는 소식을 듣고, 또한 28일에 도키우지가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적었지만, 병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해의 『아즈마카가미』 윤정월 26일 조에 따르면, 다키구치에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야스토키가 유력 고케닌의 자제들을 상경시키고 있으며, 이것을, 엔랴쿠지와 대립하여 조정의 의향에도 저항한 도키우지를 로쿠하라 단다이에서 해임하기 위한 야스토키의 포석이었다고 생각하는 설도 있다. 또, 3월 11일 단계에서 도키우지의 후임으로 호조 시게토키가 교토에 파견되었고, 게다가 이에 앞서 2월 19일에는 시게토키의 취임과 출발을 축하하는 이누오이모노가 유이가하마에서 열리고 있기 때문에, 도키우지의 교체는 2월 시점에서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소동으로부터 1년 후의 해임은 도키우지의 폐적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야스토키의 후계자로 삼기 위해 가마쿠라 중앙 정권에서의 요직에 취임시키는 것을 염두에 둔 이동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다.

2. 4. 갑작스러운 죽음과 영향

1229년 3월 23일, 도키우지의 부하인 미요시 다메키요가 빚 문제로 히에이산의 승려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히에이산엔랴쿠지는 도키우지에게 범인 인도를 요구했고, 로쿠하라 탐제는 히에이 산에 미요시의 종자 살해 범인 인도를 요구하며 양측이 대립했다. 이로 인해 엔랴쿠지의 승병과 로쿠하라 탐제의 무사가 충돌하는 소동이 벌어졌고, 당시 엔랴쿠지의 수장이었던 텐다이좌주 손쇼 호신노는 사태 수습에 책임을 질 수 없다며 사임했다.

아버지 호조 야스토키는 사건에 연루된 미요시 다메키요와 동료 1명의 유배를 조정에 신청하려 했지만, 도키우지가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처분이 늦어졌다.

1230년 3월 28일, 도키우지는 로쿠하라 탐제 재직 중 병으로 쓰러져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로쿠하라 수호 차제』에 따르면, 가마쿠라로 돌아가는 도중 미야지산 (현재의 아이치현도요카와시)에서 발병했다고 한다. 반면, 『아즈마카가미』에는 4월에 가마쿠라에 도착한 후 며칠 지나지 않아 병이 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월 11일 가마쿠라에 들어간 도키우지는 병상에 누웠고, 야스토키는 여러 치료와 기도를 시켰지만 회복되지 않았다. 결국 6월 18일 술각(오후 8시경)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했다. 향년 28세였다. 후지와라노 사다이에는 자신의 일기 『메이게츠키』에 도키우지가 소갈병(당뇨병)을 앓고 있었다고 기록했으며, 당뇨병 악화로 요독증 등 신장 계통의 병이 발병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도키우지의 유해는 6월 19일 인각(오전 4시경)에 다이지사 근처 산기슭에 매장되었다.

호조 가문의 후계자로 기대받던 아들의 죽음에 야스토키는 매우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간토에서는 도키우지의 죽음을 슬퍼하며 출가하는 자가 수십 명에 달했다는 기록도 있다(『메이게츠키』 6월 29일 조).

도키우지가 죽은 지 12년 후 야스토키가 사망하고, 도키우지의 장남인 도키토키가 제4대 집권에 취임했다.

3. 경력


  • 겐닌 원년(1224년) 6월 29일, 막부의 로쿠하라 탄다이 북방으로 부임했다.
  • 안테이 원년(1227년) 4월 20일, 종5위하에 서임되고, 수리권료에 임관했다.

4. 가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