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레즘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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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화레즘 제국은 1077년 튀르크계 노예 아누쉬 티긴 가르차이가 화레즘 총독직을 장악하며 시작되어,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지역에서 번성한 이슬람 왕조이다. 가즈니 왕조와 셀주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2세기 후반 카라 키타이의 종주권 아래 놓이기도 했다. 1194년 알라 웃딘 테키쉬가 셀주크 제국을 멸망시키며 독립 국가의 기틀을 다졌고, 무함마드 2세 때 영토를 확장하여 1217년에는 시르 다리아 강에서 자그로스 산맥, 힌두쿠시 산맥 북부에서 카스피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통치했다. 그러나 1219년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멸망했으며, 몽골의 침입 이전 호라즘 지역은 페르시아 문학과 아랍어 학술 연구의 중심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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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레즘 제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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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아누슈테긴 왕조 |
원래 이름 | }} (하네다네 아누슈테긴) |
다른 이름 | }} (호라즘샤히안) |
국가 | 호라즘 제국 맘루크 이집트 |
지역 | 중앙아시아 이란 아프가니스탄 이집트 |
모계 | 베그딜리 또는 캉글리 또는 기타 |
현재 수장 | 알 수 없음 |
칭호 | 호라즘샤 샤 술탄 |
창건 | 1077년 |
창건자 | 아누슈테긴 가르차이 |
마지막 통치자 | 사이프 앗딘 쿠투즈 |
해체 | 1260년 |
폐위 | 1231년 (호라즘 제국) 1260년 (맘루크 이집트) |
![]() | |
전통 | 수니 이슬람 (하나피 학파) |
역사 | |
건국 | 1077년 |
대 셀주크 제국 멸망 | 1157년 5월 8일 |
몽골 제국에 의한 사실상 붕괴 | 1219년 |
멸망 | 1231년 8월 15일 |
영토 | |
최대 영토 | [[File:Khwarazmian dynasty (greatest extent).svg|호라즘 샤 왕조의 최대 영토]] |
면적 (1210년) | 2,300,000 km² |
면적 (1218년) | 3,600,000 km² |
인구 | |
인구 (1220년) | 5,000,000명 |
정치 | |
정치 체제 | 과두제 |
수장 칭호 | 술탄 호라즘 샤 |
주요 통치자 | 아누슈 테긴 (1077년-1097년) 아토스즈 (1127년-1156년) 테키슈 (1172년-1200년) 알라 웃딘 (1200년-1220년) 메누베르디 (1220년-1231년) |
수도 | |
수도 | 쿠흐나 우르겐치 (1077년 - 1212년) 사마르칸트 (1212년 - 1220년) 가즈니 (1220년 - 1221년, 1220년-1225년) 타브리즈 (1225년 - 1231년) |
언어 및 종교 | |
공용어 | 페르시아어 아랍어 (종교) 튀르크어 |
종교 | 수니 이슬람교 |
경제 | |
통화 | 디르함 |
현재 | |
현재 국가 |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이란 이라크 아제르바이잔 |
2. 역사
화레즘 왕조는 11세기 말 셀주크 제국의 튀르크 노예 출신인 아누쉬 티긴 가르차이가 화레즘 지역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그 기틀이 마련되었다.[18] 그 이전 화레즘 지역은 1017년 반란 이후 가즈니 왕조 술탄 마흐무드에 의해 점령되어 1034년까지 가즈니 왕조의 속주이기도 했다.[58][59][17][18] 1077년 아누쉬 티긴이 총독이 된 이후, 그의 후손들은 화레즘 샤로서 이 지역을 다스렸다.
12세기 중반,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아흐메드 산자르가 1141년 카트완 전투에서 카라 키타이에게 패배하고[60][19] 1156년 사망하면서 셀주크 제국이 쇠퇴하자, 화레즘은 점차 독립적인 세력으로 성장하며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20] 아누쉬 티긴의 손자 아츠즈는 셀주크 제국과 카라 키타이 사이에서 세력을 키우려 했으며, 그의 아들 대에 이르러서는 본격적인 확장이 이루어졌다.
알라 앗딘 테키쉬는 1194년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 토그룰 3세를 격파하고 호라산과 서부 이란 지역을 정복하여 셀주크 제국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다.[61][19] 그의 아들 무함마드 2세는 1200년 즉위한 후, 고르 왕조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20][21] 종주국이었던 카라 키타이마저 1210년 탈라스 전투에서 격파했다.[63][22] 이후 카라한 칸국(1212년)과 고르 왕조(1215년)를 완전히 멸망시키고,[65][24] 1212년 수도를 구르간즈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기며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24] 이 시기 화레즘 제국은 트란속사니아와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대부분을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자그로스산맥, 동쪽으로는 시르다리야, 북쪽으로는 카스피해, 남쪽으로는 힌두쿠쉬 산맥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지배했으며,[25] 1218년 기준 제국의 인구는 약 500만 명에 달했다.[66][25] 그러나 이러한 번영은 오래가지 못하고, 곧이어 시작된 몽골 제국의 침입으로 제국은 급격히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2. 1. 건국과 초기 발전
화레즘 왕조의 정확한 건국 시기는 명확하지 않다.[58][27] 왕조의 기원은 셀주크 제국을 섬기던 튀르크계 맘루크 아누쉬 티긴 가르차이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1077년, 과거 가즈니 왕조의 영토였던 화레즘 지방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27] 하지만 그 이전, 1017년 화레즘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아불 압바스 마문과 그의 아내이자 가즈니 왕조 술탄 마흐무드의 누이인 후라지가 살해되자, 마흐무드는 화레즘 지역을 침략하여 점령했다.[58][17] 이로 인해 화레즘은 1017년부터 1034년까지 가즈니 왕조의 속주가 되었다.[59][18] 1042년 혹은 1043년부터는 셀주크 제국이 화레즘 지역의 총독직을 장악했으며,[18] 1077년 아누쉬 테긴이 총독으로 부임한 것이다.아누쉬 테긴 사후, 그의 아들 쿠트부딘 무함마드가 1097년경 셀주크 제국에 의해 화레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화레즘 샤'를 자칭하기 시작했다.[28] 쿠트부딘 무함마드의 뒤를 이은 아츠즈는 1135년경 셀주크 제국으로부터 자립을 시도했으나, 1138년 셀주크 술탄 아흐메드 산자르에게 패배하여 다시 복속했다.[29] 1141년, 산자르가 카트완 전투에서 카라 키타이(서요)에게 패배하자 아츠즈는 다시 자립을 꾀했으나, 결국 카라 키타이 장군에게 패배하여 카라 키타이에 조공을 바치는 신하가 되었다.[60][19][30] 아츠즈는 카라 키타이의 군주 야율대석의 봉신이 되었다.[19]
1156년(혹은 1157년[30]) 술탄 산자르가 사망하면서 셀주크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화레즘 샤는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20] 그러나 여전히 중앙아시아의 강자로 부상한 카라 키타이에게 복속해야 했다. 1172년부터는 아츠즈의 아들들인 술탄 샤와 알라 앗딘 테키쉬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다. 테키쉬는 서부에서 자립하여 처음으로 술탄 칭호를 사용했다. 오랜 다툼 끝에 1189년 테키쉬가 술탄 샤와 화해하여 왕위를 인정받았고, 1193년 술탄 샤가 사망하면서 마침내 화레즘 제국을 재통합했다.
테키쉬의 치세 동안 화레즘 제국은 이란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1194년, 아제르바이잔의 일데니즈 왕조의 요청을 받아[31] 레이에서 이라크 셀주크 왕조의 마지막 술탄 토그룰 3세를 격파하고 살해하여 셀주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란 서부까지 영토를 넓혔다.[61][32] 1197년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이라크와 호라산 지역의 술탄으로 공식 인정받아, 대 셀주크 제국의 후계자임을 공인받았다. 테키쉬의 군사력은 아랄해 북쪽의 튀르크계 유목민인 칸클리와 킵차크에 크게 의존했으며, 그의 아내 중 한 명인 텔켄 하툰도 칸클리 출신이었다.
1200년 테키쉬가 사망하고, 텔켄 하툰 소생의 아들 무함마드 2세가 제7대 술탄으로 즉위했다. 무함마드 2세는 고르 왕조와 충돌하여 1204년 아무다리야에서 패배했다.[61][20] 그는 자신의 종주국인 카라 키타이에 도움을 요청했고, 지원군을 얻어 헤자라스프(Hezarasp)에서 고르 왕조에 승리하여 화레즘에서 몰아냈다.[62][21]
그러나 카라 키타이와의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함마드 2세는 다시 카라 키타이와 충돌했고, 1210년 카라한 칸국의 도움을 받아 탈라스에서 카라 키타이 군대를 격파했다.[63][22] 하지만 사마르칸트는 잠시 카라 키타이에 점령되기도 했다(1210).[64][23] 이후 무함마드 2세는 1212년 카라한 칸국을,[65][24] 1215년에는 고르 왕조를 멸망시켰다.[24] 1212년에는 수도를 구르간즈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 이를 통해 트란속사니아 대부분과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지역을 제국에 통합했다. 1217년까지 서부 페르시아 정복을 완료하여, 제국의 영토는 시르다리야에서 자그로스산맥까지, 힌두쿠쉬 북부에서 카스피해까지 확장되었다. 1218년 제국의 인구는 약 500만 명에 달했다.[66][25]
2. 2. 셀주크 제국으로부터의 독립과 확장
1156년, 셀주크 제국의 술탄 아흐메드 산자르가 사망하면서 제국이 혼란에 빠지자, 화레즘 샤(Khwarezm-Shah)들은 남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1172년부터는 알라 앗딘 테키쉬와 그의 이복 형 술탄 샤 사이에서 왕위 계승 분쟁이 벌어졌으나, 1193년 술탄 샤가 사망하면서 테키쉬가 최종적으로 제국을 통합하였다.테키쉬의 통치 아래 화레즘 제국은 이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혔다. 1194년, 테키쉬는 레이에서 셀주크 제국의 마지막 술탄 토그룰 3세를 격파하고 살해하여 셀주크 왕조를 멸망시켰으며, 호라산과 이란 서부 지역을 정복했다.[32][19] 1197년에는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로부터 이라크와 호라산의 술탄으로 공식 인정받으며, 대 셀주크 제국의 후계자임을 공고히 했다. 당시 화레즘 군사력의 핵심은 아랄해 북쪽의 칸클리나 킵차크 같은 투르크계 유목민이었으며, 테키쉬의 아내이자 다음 술탄의 어머니인 테르켄 하툰 역시 칸클리 출신이었다.
1200년, 테키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알라 앗딘 무함마드 (무함마드 2세)가 제7대 술탄으로 즉위하며 화레즘 제국은 최성기를 맞이했다.[33] 무함마드 2세는 고르 왕조와의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1204년 아무다리야에서 고르 왕조에게 패배했으나[20][61], 당시 종주국이었던 카라 키타이에 도움을 요청하여 군대를 지원받았다.[21][62] 이 지원군을 바탕으로 무함마드 2세는 헤자라스프에서 고르 왕조에 승리하고 그들을 화레즘 영토 밖으로 몰아냈다.[21]
그러나 카라 키타이와의 동맹은 오래가지 않았다. 무함마드 2세는 카라한 왕조와 손을 잡고 1210년 탈라스에서 카라 키타이 군대를 격파했다.[22][63] 비록 사마르칸트가 잠시 카라 키타이에 점령되기도 했으나[23][64], 1212년에는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24][65] 수도를 구르간즈에서 사마르칸트로 옮겼다.[36] 이를 통해 아무다리야와 시르다리야 사이의 마와라안나흐르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동쪽으로 눈을 돌려, 1215년에는 고르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중부 지역까지 정복했다.[24] 1217년까지 서부 페르시아 정복을 완료하면서, 화레즘 제국의 영토는 시르다리야에서 자그로스산맥까지, 그리고 힌두쿠시 북부에서 카스피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으로 확장되었다.[25] 1218년 당시 제국의 인구는 약 500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정된다.[25][66]
2. 3. 몽골 제국의 침입과 멸망
1218년(혹은 1216년), 시르다리야 강변의 오트라르에서 화레즘 제국의 총독 이날추크가 몽골 제국이 파견한 상업 사절단을 간첩으로 의심하여 살해하고 상품을 약탈하는 사건(오트라르 사건)이 발생했다.[42][43][44] 칭기즈 칸은 이날추크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는 사자를 보냈으나, 알라 앗딘 무함마드는 칸클리족 출신인 왕비 테르켄 카툰의 친족이었던 이날추크의 인도를 거부하고 사자를 살해하거나 모욕하여 돌려보냈다.[45] 이 사건은 오랫동안 중앙아시아 침공 기회를 엿보던 몽골 제국에게 침략의 명분을 주었다.[39]1219년, 칭기즈 칸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화레즘 제국을 침공했다.[39] 알라 앗딘 무함마드는 칸클리족 등 유목민 부족 연합체로서의 국가적 한계로 인해 내부 분열과 반란의 위험을 안고 있었다.[46] 이 때문에 몽골군을 맞아 야전에서 싸우기보다는 병력을 사마르칸트, 부하라 등 주요 도시에 분산시켜 농성하는 전략을 택했다.[47] 그러나 이는 치밀한 계획을 세운 몽골군의 각개 격파 전술 앞에 무력했으며, 주요 도시들은 차례로 함락되고 파괴되었다. 화레즘 제국은 제대로 된 방어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단기간에 사실상 붕괴 상태에 이르렀다.[47] 알라 앗딘 무함마드는 이란 방면으로 도주했으나, 결국 카스피해의 한 작은 섬에서 사망했다.[47]
알라 앗딘 무함마드의 아들 잘랄 웃딘 밍부르누는 몽골군의 침략에 맞서 저항을 이어갔다.[48] 그는 아프가니스탄 방면에서 몽골군과 싸우며 남쪽으로 후퇴하여 한때 인더스 강을 건너 인도까지 들어갔다.[49] 잘랄 웃딘은 인도의 노예 왕조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오히려 노예 왕조와 인도의 다른 세력들은 그를 몰아내려 했다.[50]
결국 잘랄 웃딘은 이란으로 돌아와 이스파한에서 독립을 꾀하던 동생 기야스 웃딘을 격파하고 세력을 규합했다. 이라크를 거쳐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한 그는 1225년 현지의 아타베크 정권인 일데니즈 왕조를 멸망시키고 타브리즈를 거점으로 삼았다.[51] 잘랄 웃딘은 아제르바이잔을 기반으로 조지아 왕국을 공격하여 남코카서스에서 동아나톨리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1227년, 동생 기야스 웃딘의 배신으로 몽골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52] 그는 기야스 웃딘을 다시 격파하고 이라크로 진출했으며, 아나톨리아 중부의 룸 술탄국과 혼인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영토 문제로 결렬되었다.[53] 1230년, 잘랄 웃딘은 동부 아나톨리아의 에르진잔 근교에서 룸 술탄국과 다마스쿠스의 아이유브 왕조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며 군대의 절반을 잃었다.[54]
1231년, 칭기즈 칸의 뒤를 이은 오고타이 칸은 초르마간을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이란 방면으로 파견했다. 재상 샤라프 알 물크를 비롯한 측근들과 몽골군의 접근을 알게 된 아제르바이잔 주민들은 잘랄 웃딘에게 등을 돌렸다.[55]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 동부 아나톨리아의 아미드(현재의 디야르바키르) 근교 산악지대로 도망쳤으나, 그곳에서 원한을 품은 현지 쿠르드족에게 살해당했다.[56] 잘랄 웃딘의 죽음으로 화레즘 제국은 완전히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쿠트 앗딘 아불-파트
알라 앗둔야 와 알딘 아불-무자파르
타즈 앗둔야 와 알딘 아불-파트
알라 앗둔야 와 알딘 아불-무자파르
잘랄 앗둔야 와 알딘 아불-카심
처음에는 그의 어머니인 투르칸 하툰의 섭정을 받았다. 그는 상부 호라산에서 테키쉬의 이복 동생이자 경쟁자였다.
알라 앗둔야 와 알딘 아불-파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