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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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환범은 후한 말, 위나라 시대의 인물로, 조조 치하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조위 시대에는 중령군상서, 정로장군 등을 역임하며 청렴한 관리로 명성을 얻었다. 조방 시대에는 대사농을 지냈으며, 고평릉의 변 당시 조상에게 조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사마의에게 대항하는 조상 편에 섰다가 반역죄로 처형당했다. 저서로는 《세요론》과 《환범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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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범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환범 |
원어 이름 | 桓範 |
자 | 원칙 (元則) |
출생지 | 수이시 현 |
사망일 | 249년 2월 9일 |
사망 장소 | 뤄양, 허난 성 |
직업 | 관료, 장군 |
관직 | |
대사농 (大司農) | 재무부 장관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249년 2월 5일 |
군주 | 조방 |
기주목 (冀州牧) | 기주 주지사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조예 |
연주자사 (兗州刺史) | 연주 감사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조예 |
동중랑장 (東中郎將) | 동쪽 장군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조예 |
정로장군 (征虜將軍) | 오랑캐 공격 장군 |
임기 시작 | 알 수 없음 |
임기 종료 | 알 수 없음 |
군주 | 조예 |
2. 생애
조조의 승상부에 출사하여 벼슬길에 올랐으며, 연강 중에는 우림군 좌감을 지냈다. 왕상 등과 함께 황람 편집에도 참여했다.[3]
조예 치세에는 중령군상서가 되었으며, 직무를 잘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5] 이후 정로장군 · 동중랑장 · 사지절이 되어 청주와 서주의 군사를 감독하며 하비에 주둔했다. 서주자사 정기와 다투어 참형에 처하려 했으나, 조정에서는 환범이 그르다고 판단해 면직되었다. 연주자사가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하던 차에, 기주목으로 전임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나, 상관이 후배인 여소였기 때문에 취임하지 않으려 했다. 아내의 조언에 분노하여 임신 중인 아내를 폭행하여 낙태시키고, 병을 핑계로 기주목으로 부임하지 않았다.[4]
조방이 즉위하고 정시 연간에는 대사농이 되었다. 재임 중에는 청렴하고 간명하다는 평을 받았다.[5] 조방의 보정 조상은 고향 선배인 환범을 존경했으나, 둘은 그다지 친근하지 못했다.[6] 조상이 형제들과 자주 놀러 나가자, 도성 안에 변고가 생겼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고 간언하여 한동안 조상 형제가 한꺼번에 도성을 비우지 않았다.[7]
249년 정월, 고평릉의 변이 일어났다. 조상 형제가 조방을 모시고 고평릉에 참배를 간 사이 사마의가 거병해 도성을 점거했다.[8] 사마의는 환범을 중령군으로 삼으려 했으나, 환범은 아들의 권유로 조상에게 합류했다. 평창문 관리 사번을 협박하여 도성을 탈출했다.[8][9] 조상에게 허창으로 가 외부 병사를 불러모으고 맞서 싸울 것을 권유했으나, 조상 형제들은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환범은 조상 형제들에게 거듭 결단을 촉구했으나, 사마의의 설득에 넘어간 조상은 결국 항복했다. 환범은 조상이 군사를 해산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다는 말에 크게 슬퍼하며 "조자단은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낳은 것은 당신들 형제들이니 송아지에 불과할 뿐입니다! 어쩌다 오늘날에 당신 형제들에게 연좌되어 일족이 멸망하게 된 겁니까!" 라고 탄식했다.[14]
환범은 조방을 수종하여 황궁으로 돌아갔고, 사마의는 환범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사번의 고변으로 사마의는 환범을 압송하여 정위로 끌고 가게 했다.[15] 결국 환범은 조상의 일당으로 몰려 반역죄로 삼족이 멸해졌다.[8]
허윤이 혼례에서 아내 완씨의 용모를 보고 놀라 신방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환범이 설득하여 들어가게 한 일화가 있다.[16]
2. 1. 조조 · 조비 시대
건안 연간(196년 ~ 220년) 말, 조조를 섬기며 승상부에 들어갔다. 패국 출신 중에서는 조진 다음으로 벼슬길에 올랐다.[3] 연강 (220년)에는 우림 좌감에 임명되었다.[3]조비(문제)가 선양으로 즉위하자, 왕상, 유소 등과 함께 황람 편집에 참여했다.[3]
2. 2. 조예 시대
조예(명제) 치세(226년 ~ 239년)에 환범은 중령군상서(中領軍尙書)가 되었으며, 이때 직무를 잘 처리한다는 평가를 받았다.[5] 이후 정로장군(征虜將軍) · 동중랑장(東中郎將) · 사지절(使持節)이 되어 청주와 서주의 군사를 감독(도독청서제군사, 都督靑徐諸軍事)하며 하비에 주둔했다.서주자사(徐州刺史) 정기와 다투어 사지절의 권한으로 참형에 처하려 했으나, 조정에서는 환범이 그르다고 판단해 면직되었다. 이후 연주자사가 되었으나 만족하지 못하던 중, 기주목(冀州牧)으로 전임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기주목의 상관인 정북장군(征北將軍)은 환범의 후배인 여소였기 때문에, 환범은 취임하지 않으려 했다.
환범의 아내는 환범에게 예전에 다른 관리와 다투다가 실패한 점을 들어 조언했지만, 환범은 분노하여 칼고리로 임신 중인 아내의 배를 들이받아 낙태시켰다. 그리고 병을 핑계로 기주목으로 부임하지 않았다.[4]
2. 3. 조방 시대와 고평릉 사변
조방이 즉위하고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환범은 대사농이 되었다. 재임 중에는 청렴하고 간명하다는 평을 받았다.[5] 조방의 보정(輔政) 중 하나인 대장군 조상은 고향 선배인 환범을 9경(九卿) 중에서도 특히 존경했으나, 둘은 그다지 친근하지 못했다.[6] 조상이 형제들을 자주 거느리고 놀러 나가자, 환범은 도성 안에 변고가 생겼을 때의 낭패를 생각하도록 간하여 이후로는 한동안 조상 형제가 한꺼번에 도성을 비우지 않았다.[7]249년 정월, 고평릉의 변이 일어났다. 조상 형제가 모두 조방을 모시고 고평릉(高平陵)에 참배를 간 사이 사마의가 거병해 도성의 무기고를 점거하고 낙수의 부교에 주둔했다.[8] 사마의는 환범이 사리에 밝으므로 태후(太后)의 조서(詔書)로 불러 중령군(中領軍)으로 삼으려 했다. 환범도 이에 응하려 했으나, 아들이 황제를 끼고 있는 조상에게 붙도록 간하여 도성을 탈출해 남쪽으로 가 조상 측에게 합류했다. 평창문(平昌門)을 지키는 관리 사번(司蕃)이 환범을 막았으나, 옛날에 환범 아래에 있던 사람이라 환범이 거짓으로 조서에 의지하고 무기로 협박하자 못 이기고 문을 열어줬다.[8][9]
조상을 만난 환범은 조상에게 황제를 끼고 있는 장점을 살려서 허창으로 가 외부의 병사들을 불러모으고 맞서 싸울 것을 권유하였으나, 조상 형제들은 유예하고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조희에게 이 사건은 조상 일족이 멸망할 위기라고 말하여 결단을 촉구했으나, 조상 형제들은 반응이 없었다. 다시 조희에게 조희의 직속 별군과 낙양전농(洛陽典農)은 성 밖에 있으므로 쓸 수 있으며[11] 허창에 가면 무기가 있고 군량은 자신의 직임(대사농)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여전히 듣지 않았다. 사마의가 許允 (曹魏)|허윤중국어과 진태, 장제를 보내 조상을 설득하고 윤대목을 보내 목숨을 해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이에 전의가 없는 조상은 사마의가 자신들의 권력만을 뺏을 뿐 해치지는 않을 것이라고 믿고, 마침내 황제에게 죄를 청하였고, 파면되어 후의 직위로 돌아갔다.[8][12][13] 이때 조상이 군사를 해산하고 부귀를 누릴 수 있다고 하자, 환범은 소리내어 울었다.[14]
환범은 조상이 파면되고 나서 황궁으로 돌아가는 조방을 수종(隨從)했고, 사마의는 환범을 복직시켰다. 그러나 사번이 환범의 말을 고변했고, 사마의는 환범이 자신이 반역했다고 한 말에 분노하여 환범을 압송하여 정위(廷尉)로 끌고 가게 했다.[15] 환범은 결국 조상의 일당으로 반역자로 몰려 삼족(三族)이 멸해졌다.[8]
3. 가문
동진(東晉)의 거대 문벌 환씨(桓氏)인 환온(桓溫) · 환현(桓玄) 등이 환범의 후예일 것이라고 티엔위칭(田余慶)이 추측했다.[17] 이에 따르면, 이들과 마찬가지로 전한 시대의 환영을 시조로 삼는 패국 환씨의 일원이 된다. 환범은 고평릉 사변으로 삼족이 멸족되었기 때문에 직접적인 후손에 대한 기록은 없다.
4. 저서
환범은 《세요론》(世要論) 12권과 《환범집》(桓範集) 2권을 저술했다.[18][19] 《세요론》과 《환범집》은 모두 소실되었으며, 《세요론》은 《태평어람》에 일부가 인용되어 현전한다.
5. 평가 및 일화
환범은 정직하고 검소한 관리로 명성을 얻었으며, "지혜 주머니"(智囊|지낭중국어)라고 불릴 정도였다.[1] 황제 조방의 섭정을 맡았던 장군 조상은 환범을 정중하고 존경스럽게 대했지만, 그와 가깝지는 않았다.[1] 섭정 기간 동안 조상과 그의 형제들은 자신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주 외출했다.[1] 환범은 그들에게 신중해야 한다고 조언했지만, 그들은 그의 말을 무시했다.[1]
249년, 사마의가 고평릉의 변을 일으켰을 때, 환범은 조상을 돕기 위해 낙양을 빠져나갔다.[1] 그는 조상에게 허창으로 가서 황제의 이름으로 조서를 발표하고 사마의를 역적으로 규탄하며, 조위의 모든 군사력에게 사마의를 공격하라고 촉구했다.[1] 또한 자신이 대사농으로서 식량 보급을 완전히 통제하고 있으므로 식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조씨 형제들을 안심시켰다.[1] 그러나 조상은 사마의에게 항복했고, 환범은 "조진과 같은 영웅이 어찌 너희 같은 돼지와 개를 아들로 두었겠는가? 언젠가 너희 때문에 그의 가문이 멸망할 것을 어찌 예견하지 못했는가!"라고 울면서 말했다.[1] 결국 환범은 조상 및 그의 형제들과 함께 반역죄로 기소되어 가족들과 함께 처형되었다.[1]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
[2]
서적
晋書
[3]
서적
위략
[4]
문서
[5]
문서
[6]
문서
[7]
서적
위진세어
[8]
삼국지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
[9]
서적
상게서
[10]
서적
진기
[11]
문서
[12]
서적
상게서
[13]
서적
상게서
[14]
서적
위씨춘추
[15]
서적
상게서
[16]
서적
위씨춘추
[17]
서적
東晉門閥政治
[18]
수서
수서 권34 지제29 경적3
[19]
수서
수서 권35 지제30 경적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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