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산 감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회산 감씨는 중국 원나라 때 한림원 태학사 감규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감씨는 크게 강(姜)씨와 희(姬)씨에서 기원한 두 계통으로 나뉘며, 회산 감씨는 감규가 고려에 들어오면서 시작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감경인, 감기현 등 무관과 문관을 배출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감상두, 감영생 등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회산 감씨는 2,113명, 창원 감씨는 2,685명으로 조사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회산 감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가문 명칭 | 회산 감씨 |
| 다른 이름 | 창원 감씨 합포 감씨 |
| 국가 | 한국 |
| 연결된 인물 | 감우성 |
| 기원 | |
| 중시조 | (감철) |
| 관직 | (금자광록대부) |
| 인구 (2000년) | |
| 인구 | 4,892명 |
| 상세 인구 | 창원 감씨: 2,685명 회산 감씨: 2,113명 합포 감씨: 94명 |
| 분관 | |
2. 기원
회산 감씨는 상나라의 '''감반(甘盤)'''을 시조로 하는 강(姜)씨 계통과 주나라 혜왕의 아들 '''숙대(叔帶)'''를 시조로 하는 희(姬)씨 계통이 있다.[4] [5] [6] [7] [8]
2. 1. 강(姜)씨 계통
하나라 초기에 지금의 산시성 후현 남서쪽에 감(甘)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이곳에 살던 사람들은 '''강(姜)씨''' 성의 일파로 후에 동쪽에 있던 지금의 허난성 이양으로 이동하였다. 상나라(은나라) 때에 이르러 감인(甘人)[4]의 수령인 감반(甘盤)은 상나라 왕 소을(小乙)의 신하가 되었고, 이어서 부열(傅說)과 더불어 상나라 고종(高宗) 무정(武丁)의 현신(賢臣)이 되어 무정을 보좌하여 나라의 중흥[5]을 이루었다. 북송(北宋)의 <광운>(廣韻)[6]에 따르면, 감(甘)씨 성은 무정의 신하 '''감반(甘盤)의 후손'''이고, 무정 때 상나라가 은(殷)[7]에 도읍한 연고로 이 계통의 감씨는 안양(安陽)에서 나왔다.2. 2. 희(姬)씨 계통
주나라 혜왕 희랑(姬閬)의 아들 '''숙대(叔帶)의 후손'''이 희(姬)씨 계통 감씨의 기원이다. 史記|사기중국어 주나라 본기(周本紀)에 혜후(惠后)가 숙대를 낳고 혜왕(惠王)의 총애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史記索隱|사기색은중국어에 따르면, 숙대는 주 혜왕의 아들이고, 양왕의 동생으로, 감(甘) 땅에 봉해졌기에 左傳|좌전중국어에서는 감소공(甘昭公)이라고 칭한다. 正義|정의중국어에서는 括地志|괄지지중국어를 인용하여 감성(甘城)은 뤄주 허난현 남서쪽 25리에 있는데 숙대가 감읍(甘邑)에 봉함을 받아 감소공이라 불렸고 이후 읍 이름을 성씨로 삼았다고 설명한다.[4] [5] [6] [7] [8]3. 역사
회산 감씨(檜山 甘氏)의 시조는 원나라 성종 때 한림원(翰林院) 태학사(太學士)를 지낸 감규(甘揆)이다. 감규의 자는 양원(養元), 호는 연강(延岡)이다. 1351년(충정왕 3년) 원나라에 와 있었던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왔다.[9] 이때 감규와 함께 공소(孔紹), 장경(張敬), 황보영(皇甫榮), 독고억(獨孤億), 서문(西門)씨, 남궁(南宮)씨, 변숙(邊肅) 등 8학사가 함께 고려로 들어왔다. 감규는 고려조에서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에 올랐고, 후에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손자인 평장사(平章事) 감흥협(甘興鋏)을 비롯하여 밀직제학(密直提學) 감소연(甘紹延), 중추부사(中樞府使) 감진요(甘震曜), 이부시랑(吏部侍郞) 감침(甘鍼) 등이 관직에 진출하였다. 15세손 감수화(甘受和) 때까지 본관을 연릉(延陵)으로 삼아오다가, 16세손 감철(甘喆)이 북벌을 간하여 중지하게 한 공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오르고 회산군(檜山君)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본관을 회산으로 하고있다.
시조의 묘소는 충청도 공모산에 있었고 어제(御題) 신도비가 무곡산(舞谷山)에 있었다고 하나 없어져 후손들이 세거지인 창원시 내리동에 제단과 신도비를 설치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 향사한다고 되어있다. 병진보(丙辰譜)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감씨가 합포, 충주, 거창, 창녕, 부녕 등 5본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이는 세거지명이라고 하며, 회산 단일본이라고 한다.
회산 감씨의 주요 인물로 조선 중기에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우고 원종공신에 녹훈된 내금위 정략장군[9] 감경인(甘景仁)과 군자감 직장에 추증된 감경륜(甘景倫) 형제가 있고, 조선 후기에는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하고 품계가 절충장군[10]에 이른 감재원(甘在元)과 김해부사[11]를 지낸 감기현(甘麒鉉) 부자가 있다.
4. 본관
회산(檜山), 창원(昌原), 합포(合浦) 등 감(甘)씨의 본관은 현재의 경상남도 창원시 일원이다. 신라 때에는 삽량주(歃良州) 굴자군(屈自郡)이었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의안군(義安郡)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금주(金州 : 김해)로 병합되었다가 뒤에 감무가 파견되면서 독립하였다. 1282년에 의안군이 의창현(義昌縣)으로, 합포현이 회원현(會原縣)으로 개칭되었다. 1408년(태종 8)에 회원현을 병합하여 창원부(昌原府)로 승격되었고, 1413년에는 창원도호부가 되었다. 1601년(선조 34)에 창원대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창원군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 창원군이 되었다.[1]
4. 1. 분파
창원 감씨, 합포 감씨, 거창 감씨, 부령 감씨, 충주 감씨, 창녕 감씨 등이 회산 감씨에서 분적되었다.5. 주요 인물
크게 조선시대 인물과 그 이후의 인물들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시대
- 감상중(甘尙中) :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성종 5년(14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 시강원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甘景倫)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웠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 대마도에 파견되어 전후 수습에 힘썼다. 저서로는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13]
- 감경륜(甘景倫) : 조선 중기의 무신이다.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사후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추증되었다. 형 감경인(甘景仁)과 함께 삼렬사(三烈寺)에 봉안되었다.
- 감철(甘喆) : 시조 감규의 16세손으로, 북벌의 중지를 간한 공으로 회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금자광록대부는 1362년(공민왕 11)에 이미 폐지되었고, 북벌은 조선 후기 효종 대의 일이므로 연대상 모순이 있다.
- 감재원(甘在元) :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 공으로 용양위 사과(정6품)를 제수받았다. 1902년(광무 6)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경술국치 후 창원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대한제국에서 김해부사를 지낸 감기현(甘麒鉉)의 아버지이다.
- 감기현(甘麒鉉, 1880∼1964) : 1899년(광무 3) 궁내부 주사로 추천되었다. 1902년(광무 6)에 중추원 의관, 1904년(광무 8) 혜민원 참서, 1907년(광무 11) 초계현감을 거쳐 김해부사를 지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 면우(俛宇) 곽종석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일제강점기 및 현대
- 감상두 : 일제강점기 계몽운동가로,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조직 및 그 후신 조직원 다수가 월북하거나 6.25 전쟁 때 대한민국 전복을 꾀했다. 문재인 정부는 2020년 감상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으나, 그가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논란이 많다.
- 감영생(甘泳生, 1914~1950) : 일제강점기 의열단 소속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이다. 김원봉에게 항일자금을 지원했고 국내, 일본, 만주 등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4일, 빨갱이로 몰려 1,681명과 함께 마산 괭이바다에서 수장당했다.[12] 2017년 '그것이 알고 싶다' 1089회에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관련 내용이 방송되었다.
- 감강찬 : 피겨 스케이팅(페어) 선수
- 감사용 : 야구 선수, 감독
- 감우성 : 배우
- 감한솔 : 축구선수
5. 1. 조선
- 감상중(甘尙中) : 조선 전기의 문신. 성종 5년(147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위현감, 시강원 전적 등을 역임하였다.
- 감경인(甘景仁, 1569∼1648) : 조선 중기의 무신. 1588년(선조 21) 무과에 급제하였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감경륜(甘景倫)과 함께 이순신의 진영에 달려가 공을 세웠다. 원종공신에 책록되었으며, 1606년 대마도에 파견되어 전후 수습에 힘썼다. 저서로는 『삼렬당문집(三烈堂文集)』이 있다.[13]
- 감경륜(甘景倫) : 조선 중기의 무신. 임진왜란 때 활약하였으며 사후 군자감 직장(軍資監直長)에 추증되었다. 형 감경인(甘景仁)과 함께 삼렬사(三烈寺)에 봉안되었다.
- 감철(甘喆) : 시조 감규의 16세손. 북벌의 중지를 간한 공으로 회산군에 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금자광록대부는 1362년(공민왕 11)에 이미 폐지되었고, 북벌은 조선 후기 효종 대의 일이므로 연대상 모순이 있다.
- 감재원(甘在元) : 조선 후기의 무신. 1888년(고종 25)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고종 31) 동학농민운동을 평정한 공으로 용양위 사과(정6품)를 제수받았다. 1902년(광무 6)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가 경술국치 후 창원으로 낙향하여 은거하였다. 대한제국에서 김해부사를 지낸 감기현(甘麒鉉)의 아버지이다.
- 감기현(甘麒鉉, 1880∼1964) : 1899년(광무 3) 궁내부 주사로 추천되었다. 1902년(광무 6)에 중추원 의관, 1904년(광무 8) 혜민원 참서, 1907년(광무 11) 초계현감을 거쳐 김해부사를 지냈다. 1907년 고종이 퇴위하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5. 2. 일제강점기 및 현대
일제강점기에는 의열단 소속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감영생(甘泳生, 1914~1950)이 있다. 그는 김원봉에게 항일자금을 지원했고 국내, 일본, 만주 등지에서 함께 활동하였다. 그러나 6.25 전쟁 중이던 1950년 7월 24일, 증조부 기일 밤에 빨갱이로 몰려 1,681명과 함께 마산 괭이바다에서 수장당했다.[12] 2017년 '그것이 알고 싶다' 1089회에서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다루면서 관련 내용이 방송되었다.계몽운동가 감상두는 일제강점기에 조선공산주의자통일동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고, 그가 조직했거나 그의 조직의 후신 조직원 다수가 월북하거나 6.25 전쟁 때 대한민국 전복을 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 감상두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문재인 정부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활동을 한 이들도 일제의 박해에 맞서 계몽운동을 했다는 논리를 내세웠으나, 감상두가 실제로 독립운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논란이 많다.
현대 인물로는 피겨 스케이팅(페어) 선수 감강찬, 야구 선수이자 감독인 감사용, 배우 감우성, 축구선수 감한솔 등이 있다.
6. 과거 급제자
| 인물 | 급제년도 | 시험 종류 | 비고 |
|---|---|---|---|
| 감상중(甘尙中) | 성종 5년(1474년) |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3위 | 본관 합포(合浦) |
| 감덕후(甘德厚, 1519년생) | 명종 10년(1555년) | 식년시(式年試) 3등 | 자 후지(厚之), 본관 창원(昌原) |
| 감경무(甘景茂, 1556년생) | 선조 22년(1589년) | 증광시(增廣試) 3등 | 자 희수(希秀), 본관 창원(昌原), 부친 안일호장(安逸戶長) 감흔(甘昕) |
7. 인구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창원을 본관으로 하는 감(甘)씨는 창원 감씨 2,685명, 회산 감씨 2,113명, 합포 감씨 94명으로 총 4,892명이었다. 창원 이외 지역으로는 거창 감씨 522명, 창녕 감씨 372명, 충주 감씨 112명, 부녕 감씨 65명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창원 감씨에서 분파되어 세거지명을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8. 항렬표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43세 | 44세 | 45세 |
|---|---|---|---|---|---|---|---|---|---|---|
| 현(鉉) | O영(泳) | 상(相) | O병(炳) | 동(東) | O희(熙) | 채(埰) | O석(錫) | 호(浩) | O근(根) | 형(炯) |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회산감씨 檜山甘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2]
간행물
A Comparison of the Korean and Japanese Approaches to Foreign Family Names
http://www.sciea.org[...]
2014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15
[4]
문서
감(甘) 땅에서 살다 동쪽으로 이동해 온 일족.
[5]
문서
무정중흥(武丁中興) 또는 무정성세(武丁盛世)라고 한다.
[6]
문서
대송중수광운(大宋重修廣韻)의 약칭이다.
[7]
문서
지금의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 일대.
[8]
문서
현재의 허난성 뤄양시.
[9]
문서
무신 종4품 상계의 품계명
[10]
문서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
[11]
문서
부사는 정3품 지방관직이다.
[12]
문서
소(宗) 가문의 제20대 당주이며 쓰시마(대마도) 후추 번의 초대 번주이다.
[13]
웹사이트
감경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
[14]
문서
1등 의관은 칙임관으로, 2•3등 의관은 주임관으로 보하였다.
[15]
문서
무신 정3품 당상관의 품계명
[16]
문서
중추부의 첨지사. 정3품 관직이다.
[17]
문서
현감은 종6품 지방관직이다.
[18]
문서
부사는 종3품 지방관직이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