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인 이븐 만수르 이븐 바이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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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세인 이븐 만수르 이븐 바이카라는 티무르 왕조의 통치자로, 1438년 헤라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술탄 후세인이며, 친할아버지의 이름인 바이카라를 함께 사용했다. 그는 호라산 지역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여러 세력과 경쟁했으며, 1469년 헤라트를 점령하여 통치를 시작했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예술과 문학을 장려하여 헤라트를 문화의 중심지로 만들었으며, 자미, 알리셰르 나보이 등의 예술가를 후원했다. 만년에 그는 우즈베크족의 위협에 직면하여 어려움을 겪었고, 1506년 사망하면서 티무르 왕조의 호라산 지배는 종식되었다. 그는 12명의 아내와 18명의 아들, 18명의 딸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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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인 이븐 만수르 이븐 바이카라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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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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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호 | 티무르 제국의 아미르 |
전체 이름 | 후세인 미르자 빈 만수르 빈 바이카라 빈 우마르 샤이크 빈 티무르 |
출생 | 1438년 6월 |
출생지 | 헤라트,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
사망 | 1506년 5월 4일 (68세) |
사망지 | 바바 일라히, 대 호라산 |
매장지 | 무살라 복합 단지, 헤라트, 현재의 아프가니스탄 |
종교 | 이슬람 |
통치 | |
즉위 | 1469년 3월 24일 |
퇴위 | 1506년 5월 4일 |
이전 통치자 | 아불-카심 바부르 미르자 아부 사이드 미르자 |
다음 통치자 | 바디 알-자만 미르자 &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 |
가족 관계 | |
왕조 | 티무르 왕조 |
아버지 | 만수르 미르자 |
어머니 | 피루자 술탄 베굼 |
배우자 | 베가 술탄 베굼 출리 베굼 샤르 바누 베굼 파얀다 술탄 베굼 카디자 베기 아가 자이납 술탄 베굼 아파크 베굼 조베이다 술탄 아가차 바바 아가차 라티파 술탄 아가차 망겔리 비 아가차 베기 술탄 아가차 |
자녀 | 바디 알-자만 미르자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 샤 가리브 미르자 아불 하산 미르자 무함마드 무흐신 미르자 아부 타랍 미르자 무함마드 후세인 미르자 페리둔 후세인 미르자 하이데르 미르자 무함마드 마숨 미르자 파루크 후세인 미르자 이브라힘 후세인 미르자 이븐 후세인 미르자 무함마드 카심 미르자 술타님 베굼 아크 베굼 케체크 베굼 베가 베굼 아가 베굼 파티마 술탄 베굼 니자드 술탄 베굼 사아다트 바크트 베굼 아이샤 술탄 베굼 마리암 술탄 베굼 무나와르 술탄 베굼 |
2. 이름
후세인 바이카라의 본명인 '''술탄 후세인'''(سلطان حسین|Sulṭān Ḥusaynfa)은 외할아버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항상 친할아버지의 이름인 '''바이카라'''(بایقرا|Bāyqarāfa)를 함께 사용했다. 따라서 경칭까지 포함하여, 후세인 바이카라가 사용한 정확한 이름은 '''무이즈 알딘 아불가지 술탄 후세이니 바이카라 미르자'''( معز الدين ابوالغازی سلطان حسین بایقرا|Muʿizz al-Dīn Abū l-Ghāzī Sulṭān Ḥusayn-i Bāyqarā Mīrzāfa, Abulgʻoziy Muiziddin Sulton Husayn-i Boyqarouz)이다.[35]
후세인 바이카라는 티무르의 현손이며, 우마르 샤이크를 증조부로, 어머니는 티무르의 삼남 미란 샤의 자손이다.[22]
3. 생애
어린 시절 호라산 지방의 통치자 아불 카심 바부르를 섬겼으며,[24] 1452년부터 헤라트의 지배자인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를 섬겼다. 1457년 바부르가 죽자 사마르칸드를 지배하던 아부 사이드가 호라산을 침공했고, 이후 후세인은 잠시 용병 생활을 했다. 얼마 후 흑양조가 지배하던 고르간과 마잔다란 주를 점령했다.
1460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아부 사이드에게 등을 돌리고 1459년에 아부 사이드가 점령한 헤라트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호라즘으로 도망쳤다. 이후 호라산을 약탈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우즈베크족과 친교를 맺었다. 1468년 우즈베크 지도자 아불 하이르에게 원조를 요청했으나, 같은 해 아불 하이르가 사망하여 원군은 오지 않았다.[25]
1469년 아부 사이드가 백양조와 전투에서 사망하자 헤라트를 점령하고, 모스크에서 금요 예배 설교(Khutbah|풋바영어)에 지배자로서 이름을 넣었다.[26] 우준 하산은 샤 루흐 가문의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아부 사이드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후세인은 야드게르 무함마드, 백양조 양쪽과 교전했다. 1470년 야드게르 무함마드가 헤라트로 진군했을 때 헤라트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1개월 반 만에 군대를 모아 아부 사이드의 왕자들과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격파하고,[26] 1470년 헤라트를 탈환했다. 이후 백양조는 후세인의 헤라트 정권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26]
헤라트에서 정권을 수립한 후,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취하며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쾌락에 탐닉하게 되었다.[27] 아무 강 이북, 아스타라바드(고르간) 이서에는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았고,[28] 백양조나 사마르칸드에 정권을 세운 아부 사이드의 일족과 우호를 유지했다.[24] 후세인은 주요 도시나 지방에 왕자나 아미르 (귀족)을 총독(하킴, 다르가)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반쯤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29]
만년에 각지에 통치자로 파견했던 아들들의 반란이 잇따랐고, 북방에서 재흥한 우즈베크에 대한 대응에 뒤쳐졌다.[27] 후세인의 일족과 신하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헤라트 정권의 군사력은 저하되었고, 반란 진압에서 격렬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28] 1506년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을 요격하기 위해 마와라 알나흐르로 진군하지만, 헤라트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30] 바디 우자만 등 종군한 후세인의 아들들은 유의미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연합군을 해산했고, 이듬해 1507년에 헤라트는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공격으로 함락된다.[30]
3. 1. 초기 생애와 혈통
후세인 바이카라는 1438년 6월 또는 7월에 헤라트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투르크-몽골 바를라스 부족 출신의 기야스 앗딘 만수르 미르자와 그의 아내 피루자 술탄 베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중앙 아시아 정복자 티무르의 증손자였으며, 어머니는 타이치우드 부족의 술탄 후세인의 딸이자 티무르의 증손녀였다. 또한 그의 부모는 모두 몽골 제국 황제 칭기즈 칸의 후손이었다.[22]
후세인의 아버지 기야스 앗딘은 그가 7~8세 때 사망했다. 기야스 앗딘은 티무르 왕가에서 주목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기에, 후세인은 그의 할아버지인 바이카라 미르자 1세의 이름을 따서 '바이카라'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후세인이 태어났을 당시, 그의 가계는 정치적인 영향력이 크지 않았다.[23] 그는 소년기의 대부분을 호라산 지방의 통치자 아불 카심 바부르를 섬기며 보냈다.[24]
이후 후세인은 마잔다란, 호라즘으로 세력을 넓혔고, 아부 사이드가 영유하는 호라산에 자주 침입했다. 1468년에는 우즈베크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를 방문하여 원조를 요청하기도 했다.[25]
3. 2. 호라산의 혼란기
만수르는 후세인 바이카라가 7-8세 무렵에 사망했다. 후세인은 1452년부터 헤라트의 지배자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를 섬겼다. 1457년 바부르가 죽자 사마르칸드를 지배하던 아부 사이드가 호라산을 침공했고, 후세인은 잠시 용병 생활을 했다. 얼마 후 그는 흑양조가 지배하던 고르간을 탈취하고 마잔다란 주를 점령했다. 1460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후세인은 1459년 아부 사이드가 점령한 헤라트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호라즘으로 도망쳤다. 그는 호라산을 약탈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1464년부터 이 약탈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는 아부 사이드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우즈베크족과 친교를 맺었다.
1469년 2월, 백양조가 아부 사이드를 죽이자 그의 제국은 붕괴했다. 아들 술탄 마흐무드는 헤라트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도시를 떠났고, 후세인이 헤라트를 차지했다. 술탄 마흐무드의 형제 술탄 아흐마드도 헤라트를 공격하려다 원정 도중 마흐무드를 만나 철군했다. 백양조의 우준 하산은 야드가르 무함마드를 호라산으로 보냈고, 1469년 9월 15일 친나란에서 후세인은 야드가르에게 승리했다. 그러나 우준 하산이 지원군을 보내자 후세인은 병사들의 이탈로 헤라트에서 도망쳤고, 1470년 6월 7일 야드가르의 군대가 헤라트에 입성했다. 6주 후 후세인은 도시를 탈환하고,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승리한 뒤 야드가르를 처형했다.
이후 후세인의 제국은 안정되었다. 백양조는 더 이상 적대적이지 않았고, 사마르칸드의 티무르 제국은 내분으로 약해져 확장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백양조와의 국경은 카스피해 남쪽 끝에서 루트 사막 북쪽을 거쳐 하문 호까지, 사마르칸드 정부와의 국경은 아무다리야강이었다. 그는 양쪽 국경을 존중했고, 트란스옥시아나의 혼란에도 북진하지 않았다. 이는 트란스옥시아나를 위협하는 우즈베크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후세인은 여러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1490년 아들 이브라힘 후세인의 근위대 형제 다르비쉬 알리가 히사르 통치자 술탄 마흐무드와 공모해 반란을 일으켰고, 마흐무드는 발흐로 진군했으나 후세인이 격퇴했다. 몇 년 후 후세인의 장자 바디 알자만이 아스타라바드에서 발흐로 이동하라는 명령에 반란을 일으켰고, 바디 알자만의 아들 무함마드 무민도 아스타라바드 통치를 거부했다. 후세인은 두 반란을 진압했고, 무함마드는 처형, 바디는 용서받았으나 1499년 헤라트를 포위했다.
1501년 우즈베크족이 트란스옥시아나를 바부르에게서 빼앗았다. 무함마드 샤이바니 휘하의 우즈베크인들은 호라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노쇠한 후세인은 바부르의 조언에도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우즈베크족은 호라산을 약탈했다. 후세인은 뒤늦게 출정을 결심했으나, 1506년 실행 직전 사망했다. 그의 아들 바디와 무자파르 후세인은 제국 계승을 두고 다투었다. 바부르는 호라산을 지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퇴각했고, 이듬해 후세인의 후계자들은 도망쳤고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헤라트에 입성, 호라산에 대한 티무르 가문의 지배는 끝이 났다.
3. 3. 메르브와 호라즘 시기
만수르는 후세인 바이카라가 7-8세 무렵에 사망했다. 1452년부터 후세인은 헤라트의 지배자인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를 섬겼다. 1457년에 바부르가 죽자 사마르칸드를 지배하던 아부 사이드가 호라산을 침공했고, 이후 후세인은 잠시 용병 생활을 했다. 얼마 후 그는 흑양조가 지배하던 고르간과 마잔다란 주를 점령했다. 1460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후세인은 1459년에 아부 사이드가 점령한 헤라트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호라즘으로 도망쳤다. 이때 호라산을 약탈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우즈베크족과 친교를 맺었다.[10]
후세인은 딸 베카 술탄 베굼과 결혼시킨 메르브의 술탄 산자르 미르자와 합류했고, 그들에게서 바디 알-자만 미르자가 태어났다.[11] 1457년 6월/7월, 산자르가 부재중일 때 후세인에게 도시를 맡겼으나, 후세인은 최고위 관료 하산 아르라트가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의심하여 권력을 잡으려 했다. 산자르에게 충성하는 아미르들이 반란을 일으켜 실패했고, 후세인은 다섯 명의 기병과 함께 도망쳤다. 그러나 도시 밖에서 이란지 지역 상업 캐러밴의 보안 책임자 하산 차르카스와 그의 부하 200명과 합류하여 첫 번째 용병 부대를 결성했다.[11] 그는 하산 차르카스의 딸 아팍 베굼과 결혼하여 관계를 공고히 했다.[12]
후세인은 카라쿰 사막으로 쫓겨 마르브와 히바 사막 사이에 머물렀다.[12] 1468년에는 우즈베크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에게 원조를 요청하여 약속을 받았으나, 같은 해 아불 하이르가 사망하여 원군은 오지 않았다.[25]
3. 4. 티무르-카라 코윤루 분쟁
1469년 2월, 백양조가 아부 사이드를 죽이자 그의 제국은 붕괴했다. 아부 사이드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는 헤라트를 점령하기 위해 출병했으나, 도시 지배를 유지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후 후세인이 헤라트를 손에 넣었다. 술탄 마흐무드의 형제 술탄 아흐마드가 헤라트를 점령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원정 도중에 마흐무드를 만난 뒤 철군했다.[26]
우준 하산은 야드가르 무함마드를 호라산으로 보냈다. 1469년 9월 15일, 친나란에서 후세인은 야드가르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하지만 곧 우준 하산이 야드가르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우준 하산은 후세인에게 흑양조 출신 고관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후세인은 이를 거부했다. 야드가르가 백양조 군대를 이용해 호라산을 휩쓸었고, 후세인의 병사들은 이에 겁을 먹고 후세인을 버렸다. 결국 후세인은 헤라트에서 도망쳤고, 1470년 7월 7일, 야드가르의 군대는 헤라트에 입성했다. 하지만 6주 후에 후세인은 도시를 점령했고, 새로 징집한 병사들로 호라산으로 치고 들어오는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후세인은 야드가르를 사로잡았고, 곧 처형했다.[26]
이제서야 후세인의 제국은 안전해졌다. 백양조도 더 이상 그에게 적대적 태도를 취하지 않았고, 사마르칸드의 티무르 제국도 내분으로 너무 약해져 그의 영역으로 확장할 엄두도 내지 못 했다. 백양조와 그의 영토 사이의 국경은 카스피 해의 남쪽 끝에서 시작해 루트 사막 북쪽을 거쳐 하문 호에서 끝이났다. 사마르칸드의 정부와의 국경은 아무다리야강이었다. 그는 양쪽 국경 모두를 존중하는 편이었다. 트란스옥시아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방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아마 트란스옥시아나를 위협하는 우즈베크족 때문이었을 것이다.[24][28]
3. 5. 아부 사이드 미르자와의 갈등
만수르는 후세인 바이카라가 7-8세 무렵에 사망했다. 후세인은 어린 시절 호라산 지방의 통치자 아불 카심 바부르를 섬겼다.[24] 1452년부터 후세인은 헤라트의 지배자인 바부르 이븐 바이순쿠르를 섬겼다. 1457년에 바부르가 죽자 사마르칸드를 지배하던 아부 사이드가 호라산을 침공했고, 이후 후세인은 잠시 용병 생활을 했다. 얼마 후 그는 흑양조가 지배하던 고르간을 탈취하고, 마잔다란 주를 점령했다. 1458년 10월 19일, 후세인 바이카라는 1,000명의 병력을 모아 카라 코윤루로부터 구르간을 점령했다.[15] 그러나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구르간을 침공하자, 후세인 바이카라는 급히 구르간을 포기하고 호라즘으로 도망쳤다. 아부 사이드 미르자는 자신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를 구르간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1460년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후세인은 아부 사이드에게 등을 돌리고 1459년에 아부 사이드가 점령한 헤라트를 공격했으나 패배하고 호라즘으로 도망쳤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아부 사이드 미르자가 그의 친척 무함마드 주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헤라트를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자, 다시 구르간을 공격하여 1461년 5월 자우지 왈리 전투에서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를 격파하고 압달-라흐만 아르군을 이 지역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461년 8월부터 10월까지 헤라트를 포위했을 때 그는 이 승리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후 후세인은 호라산을 약탈하며 생계를 유지했고, 1464년부터 이 약탈은 본격화되었다. 그는 아부 사이드의 공격을 두려워하여 우즈베크족과 친교를 맺었다. 1468년에 후세인은 우즈베크의 지도자 아불 하이르를 방문하여 원조를 요청했다.[25] 일주일간의 술자리에서 취하지 않은 후세인은 원조 약속을 받아냈지만, 같은 해에 아불 하이르가 사망했기 때문에 원군은 보내지지 않았다.[25]
1469년 2월, 백양조가 아부 사이드를 죽이자 그의 제국은 붕괴했다. 아부 사이드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는 헤라트를 점령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도시 지배를 유지하지 못하고 떠났다. 후세인이 그 뒤를 이어 헤라트를 손에 넣었다. 1469년 3월, 아부 사이드가 백양조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은 후세인은 헤라트를 점령하고, 모스크에서의 금요 예배 설교(Khutbah|フットバ영어)에 지배자로서 이름을 넣었다.[26] 술탄 마흐무드의 형제 술탄 아흐마드가 헤라트를 점령하기 위해 사마르칸드에서 출병했지만, 원정 도중에 마흐무드를 만난 뒤 철군했다.
백양조의 우준 하산은 샤 루흐 가문의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아부 사이드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후세인은 야드게르 무함마드, 백양조 양쪽과 교전했다. 1469년 9월 15일, 친나란에서 후세인은 야드가르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하지만 곧 우준 하산이 야드가르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우준 하산은 후세인에게 흑양조 출신 고관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후세인은 이를 거부했다. 1470년 7월, 야드게르 무함마드가 헤라트로 진군했을 때, 후세인은 헤라트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야드가르가 백양조 군대를 이용해 호라산을 휩쓸자 후세인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후세인을 버렸다. 결국 후세인은 헤라트에서 도망쳤고, 1470년 6월 7일, 야드가르의 군대는 헤라트에 입성했다. 하지만 6주 후, 후세인은 도시를 점령했고, 새로 징집한 병사들로 호라산으로 치고 들어오는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후세인은 1개월 반 사이에 군대를 모아 아부 사이드의 왕자들과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격파하고,[26] 1470년 안에 헤라트를 탈환했다. 후세인은 야드가르를 사로잡았고, 곧 처형했다. 헤라트 탈환 후, 백양조가 후세인이 헤라트에 수립한 정권에 개입하는 일은 없어졌다.[26]
3. 6. 호라산의 통치자
1469년 아부 사이드가 백양조와의 전투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세인은 헤라트를 점령하고, 모스크에서의 금요 예배 설교(Khutbah|풋바영어)에 지배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26] 우준 하산은 샤 루흐 가문의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아부 사이드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후세인은 야드게르 무함마드, 백양조 양쪽과 교전했다. 1470년 야드게르 무함마드가 헤라트로 진군했을 때 후세인은 헤라트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후 1개월 반 만에 군대를 모아 아부 사이드의 왕자들과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격파하고,[26] 1470년 안에 헤라트를 탈환했다. 헤라트 탈환 후, 백양조는 후세인이 헤라트에 수립한 정권에 더 이상 개입하지 않았다.[26]
헤라트에서 정권을 수립한 후, 후세인은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취하며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쾌락에 탐닉하게 되었다.[27] 아무 강 이북, 아스타라바드(고르간) 이서에는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았고,[28] 백양조나 사마르칸드에 정권을 세운 아부 사이드의 일족과 우호를 유지했다.[24] 후세인은 주요 도시나 지방에 왕자나 유력 아미르 (귀족)을 총독(하킴, 다르가)으로 파견했고, 이들은 반쯤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29]
3. 7. 아크 코윤루 및 야드가르 무함마드 미르자와의 분쟁
1469년 2월, 백양조가 아부 사이드를 죽이자 그의 제국은 붕괴했다. 그의 아들 술탄 마흐무드는 헤라트를 점령하고자 출병했으나, 도시 지배를 유지할 방법을 찾지 못해 떠났다. 이후 후세인이 헤라트를 손에 넣었다. 술탄 마흐무드의 형제 술탄 아흐마드가 헤라트를 점령하기 위해 출병했지만, 원정 도중에 마흐무드를 만나 철군했다.[26]
이때 백양조의 우준 하산이 야드가르 무함마드를 호라산으로 보냈다. 1469년 9월 15일, 친나란에서 후세인은 야드가르에게 패배를 안겼다. 하지만 곧 우준 하산이 야드가르에게 지원군을 보냈다. 우준 하산은 후세인에게 흑양조 출신 고관들을 넘길 것을 요구했고, 후세인은 이를 거부했다. 야드가르가 백양조 군대를 이용해 호라산을 휩쓸자, 후세인의 병사들은 겁을 먹고 후세인을 버렸다. 결국 후세인은 헤라트에서 도망쳤고, 1470년 7월 7일 야드가르의 군대가 헤라트에 입성했다. 하지만 6주 후 후세인은 도시를 재점령했고, 새로 징집한 병사들로 호라산으로 쳐들어오는 아부 사이드의 아들들에게 패배를 안겨줬다. 후세인은 야드가르를 사로잡아 처형했다.[26]
3. 8. 안정된 제국
1469년 3월에 아부 사이드가 백양조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자, 후세인은 헤라트를 점령하고, 모스크에서의 금요 예배 설교(Khutbah|풋바영어)에 지배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넣었다.[26] 백양조의 우준 하산은 샤 루흐 가문의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아부 사이드의 후계자로 세우려 했고, 후세인은 야드게르 무함마드 및 백양조와 교전했다. 1470년 7월에 야드게르 무함마드가 헤라트로 진군했을 때, 후세인은 헤라트를 포기하고 철수했다. 후세인은 1개월 반 만에 군대를 모아 아부 사이드의 왕자들과 야드게르 무함마드를 격파하고,[26] 1470년 안에 헤라트를 탈환했다. 헤라트 탈환 후, 백양조는 후세인이 헤라트에 수립한 정권에 개입하지 않았다.[26]
헤라트에서 정권을 수립한 후, 후세인은 소극적인 대외 정책을 취하고, 금욕적인 생활에서 벗어나 쾌락에 탐닉하게 되었다.[27] 아무 강 이북, 아스타라바드(고르간) 이서에는 군대를 진군시키지 않았고,[28] 백양조나 사마르칸트에 정권을 세운 아부 사이드의 일족과 우호를 유지했다.[24] 후세인은 주요 도시나 지방에 왕자나 유력 아미르 (귀족)을 총독(하킴, 다르가)으로 파견했고, 그들은 반쯤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29]
4. 통치와 행정
후세인 바이카라는 "훌륭한 왕,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자"로 여겨졌으며, 유명한 학교를 포함한 수많은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재위 20년 동안 팔다리 마비로 고생했다.[16] 그는 여러 차례의 반란과 침략에 대처해야 했다.
후세인 바이카라는 술을 마시는 것[17]과 수염을 깎는 것을 금지했다.[18][19] 그는 "''일부'' [다른 통치자] ''시대에는 샤리아의 원칙과 이슬람 공동체가 이단자들의 자비에 맡겨졌지만'' ... (그의 시대에는) ''성스러운 율법과 예언자의 법의 힘이 매우 강하여''...."라고 말하며 자신의 경찰이 어떻게 도덕성을 유지했는지 자랑했다.[19]
4. 1. 반란
후세인은 "훌륭한 왕, 평화와 정의를 사랑하는 자"로 여겨졌으며, 유명한 학교를 포함한 수많은 건물을 지었다. 그러나 그는 재위 20년 동안 팔다리 마비로 고생했다.[16] 그는 여러 차례의 반란과 침략에 대처해야 했다.1490년, 후세인의 아들 이브라힘 후세인의 후견인 다르비쉬 알리가 당시 히사르를 통치하던 술탄 마흐무드와 공모했다. 마흐무드는 이브라힘이 거주하던 발흐를 공격했고, 이에 후세인은 마흐무드에 대항하기 위해 군대를 소집해야 했다. 몇 년 후, 후세인은 장남 바디 알자만을 아스타라바드(1937년 고르간으로 개명)에서 발흐로 옮겼으나, 바디는 그의 아들 무함마드 무민이 아스타라바드의 통치를 거부당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후세인은 처형된 무함마드와 화해한 바디를 모두 물리쳤다. 그러나 휴전은 깨졌고, 1499년 바디는 헤라트를 포위했다.
만년에 각지에 통치자로 파견했던 아들들의 반란이 잇따랐고, 북방에서 재흥한 우즈베크에 대한 대응에 뒤쳐졌다.[27] 후세인의 일족과 신하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헤라트 정권의 군사력은 저하되었고, 반란 진압에서 격렬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28]
4. 2. 우즈베크족의 위협과 몰락
1501년, 우즈베크족은 바부르로부터 트란스옥시아나를 정복했다.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지휘 아래, 우즈베크족은 호라산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노쇠한 후세인은 바부르가 행동을 촉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상대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우즈베크족은 그의 왕국을 침략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마음을 바꾼 후세인은 그들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진격을 시작한 직후인 1506년에 사망했다. 그의 제국의 상속은 그의 아들 바디 알자만과 무자파르 후사인 사이에서 분쟁이 일어났다. 후세인을 지원하기 위해 원정을 시작했던 바부르는 형제 간의 내분을 알아차리고, 해당 지역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퇴각했다. 이듬해, 무함마드 샤이바니는 헤라트를 정복하고 후세인의 후계자들이 도망가게 하여 호라산에서 티무르 왕조의 지배를 종식시켰다.[30]
만년에 각지에 통치자로 파견했던 아들들의 반란이 잇따랐고, 북방에서 재흥한 우즈베크에 대한 대응에 뒤쳐졌다.[27] 후세인의 일족과 신하들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헤라트 정권의 군사력은 저하되었고, 반란 진압에서 격렬한 전투는 일어나지 않았다.[28] 1506년에 후세인은 우즈베크의 무함마드 샤이바니 칸을 요격하기 위해 마와라 알나흐르로 진군했지만, 헤라트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다.[30] 바디 우자만 등 종군한 후세인의 아들들은 유의미한 군사 행동을 하지 않은 채 연합군을 해산했고, 이듬해 1507년에 헤라트는 무함마드 샤이바니의 공격으로 함락되었다.[30]
5. 문화
후세인 바이카라는 예술과 문학, 특히 시인들을 후원하여 헤라트에서 문학 문화가 번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의 궁정에는 자미(1492년 사망)와 알리셰르 나보이(1501년 사망)와 같은 주요 시인들이 있었다. 자미는 마지막 위대한 고전 페르시아 시인으로 꼽히며, 알리셰르 나보이는 차카타이어 문학의 창시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31] 후세인 바이카라 시대에 튀르크와 페르시아 문화 영역의 융합은 정점에 달했는데, 이는 그가 두 언어의 문학 문화를 모두 지원하고 참여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어가 이 지역의 지배적인 언어로 남아 있었다.
후세인 바이카라의 통치 기간 동안 티무르 왕조의 문화는 성숙기에 접어들었다.[31] 후세인이 통치하던 헤라트는 건축, 문학, 미니어처, 서예, 음악 등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24] 헤라트는 인구가 늘면서 거주 구역이 넓어졌고, 공공시설 건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도시의 번영은 국외에서도 널리 알려질 정도였다.[29]
헤라트의 궁정에는 친구인 미르 알리 시르 나와이를 비롯하여 자미, 비흐자드, 미르호온드 등 뛰어난 문인, 학자,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후세인 자신도 후사이니라는 필명으로 시를 짓기도 했다.[32] 후세인의 쾌락적인 행동은 샤리아(이슬람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지만, 울라마, 사이드(예언자 무함마드의 자손), 수피(신비주의자) 등 종교계 인사들도 후세인의 보호를 받았다.[28] 후세인은 수피를 존경하고, 신앙심을 고취하는 수피의 묘를 건설함으로써 울라마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22]
티무르 왕조가 멸망한 후에도 헤라트의 궁정 문화는 무굴 제국, 사파비 왕조, 샤이바니 왕조에 계승되었다.[24] 무굴 제국의 창시자인 바부르는 젊은 시절 후세인의 궁정을 방문했으며, 훗날 『바부르 나메』에서 당시의 모습을 회상하기도 했다.[33]
6. 가족
배우자 | 출생 | 사망 | 비고 |
---|---|---|---|
베가 술탄 베굼 | 1488년 | 1457년 결혼, 이혼; 티무르의 후손 | |
툴라크 베굼 | 이혼; 아작의 수장 후세인 수피의 딸 | ||
샤르 바누 베굼 | 1469년 결혼, 이혼;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딸 | ||
파얀다 술탄 베굼 |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딸 | ||
하디자 베기 아가 | 아부 사이드 미르자의 미망인 | ||
자이나브 술탄 베굼 | 아미르 타지-알-딘 하산의 딸 | ||
아파크 베굼 | 아미르 타지-알-딘 하산의 딸 | ||
조바이다 술탄 아가차 | 샤반 술탄 가문의 하산의 딸 |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자한 샤의 친척 | ||
망겔리 비 아가차 | 우즈베크 첩, 샤르 바누 베굼의 전 노예 | ||
바바 아가차 | 아파크 베굼의 양누이 | ||
베기 술탄 아가차 | 첩, 아프라시야브 미르자의 어머니 |
구분 | 이름 | 어머니 | 비고 |
---|---|---|---|
아들 | 바디 알-자만 미르자 | 베가 술탄 베굼 | |
샤 가리브 미르자 | 하디자 베기 아가 | ||
무자파르 후세인 미르자 | 하디자 베기 아가 | ||
아불 하산 미르자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
무하마드 무흐신 미르자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
아부 타랍 미르자 | 망겔리 비 아가차 | ||
무하마드 후세인 미르자 | 망겔리 비 아가차 | ||
페리둔 후세인 미르자 | 망겔리 비 아가차 | ||
하이더 무하마드 미르자 | 파얀다 술탄 베굼 | ||
무하마드 마숨 미르자 | 바바 아가차 | ||
파르루크 후세인 미르자 | 바바 아가차 | ||
이브라힘 후세인 미르자 | 바바 아가차 | ||
이븐 후세인 미르자 | 바바 아가차 | ||
무하마드 카심 미르자 | 바바 아가차 | ||
아프라시야브 미르자 | 베기 술탄 아가차 | ||
마숨 알리 미르자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
술탄 자한기르 미르자 | 하디자 베기 아가 | ||
자한기르 후세인 미르자 | 하디자 베기 아가 | ||
딸 | 자이나브 술탄 베굼 (술타님 베굼) | 툴라크 베굼 | 미란 샤의 후손들과 결혼 |
아크 베굼 | 파얀다 술탄 베굼 | 무하마드 카심 미르자와 결혼 | |
케체크 베굼 | 파얀다 술탄 베굼 | 물라 크와자에게 시집감 | |
베가 베굼 | 파얀다 술탄 베굼 | 바바르 미르자와 결혼 | |
아가 베굼 | 파얀다 술탄 베굼 | 술탄 무라드 미르자와 결혼 | |
파티마 술탄 베굼 | 맹글리 비 아가치 | 야드가르 파르루크 미르자와 결혼, 미란 샤의 후손 | |
마리암 술탄 베굼 | 맹글리 비 아가차 | 사이드 압둘라 미르자와 결혼 | |
술탄 니자드 베굼 | 바바 아가차 | 이스칸다르 미르자와 결혼 | |
사아다트 바흐트 베굼 (베굼 술탄) | 바바 아가차 | 술탄 마흐무드 미르자의 아들 술탄 마수드 미르자와 결혼 | |
무나와르 술탄 베굼 | 바바 아가차 | 울루그 베그의 후손과 결혼 | |
아이샤 술탄 베굼 | 조바이다 술탄 아가차 | 카심 술탄, 부란 술탄과 결혼 | |
하눔 술탄 베굼 | 하디자 베기 아가 | ||
사아다트 니자드 베굼 | 바바 아가차 | ||
살리마 술탄 베굼 | 바바 아가차 | ||
바디 알-물크 베굼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
움 살리마 베굼 | 라티파 술탄 아가차 | ||
무니사 술탄 베굼 | 주바이다 술탄 아가차 | ||
쿠르시드 바흐트 베굼 | 바바 아가차 |
7. 가계도
1. 술탄 후세인 바이카라 |
2. 기야스 우드 딘 만수르 미르자 |
3. 피루자 술탄 베굼 |
4. 무함마드 바이카라 1세 |
5. 쿠틀루그 술탄 베굼 |
6. 술탄 후세인 타이치우드 |
7. 쿠틀루그 술탄 베굼 |
8. 우마르 셰이크 미르자 1세 |
9. 말리카트 아가 |
10. 알리 |
11. 비비 파티마 |
12. 아미르 무함마드 베그 |
13. 아카 베굼 |
14. 미란 샤 |
15. 우룬 술탄 하눔 |
16. 티무르 (= 26, 28) |
17. 톨룬 아가 |
18. 키르 호자 칸, 무굴리스탄의 칸 |
19. (정보 없음) |
20. 엘지게데이 부족의 아미르 이스칸다르 |
21. (정보 없음) |
22. 카탈라니의 왕 카이-호스로우 |
23. 투만 쿠틀루그 하눔 (케벡 칸의 손녀) |
24. 타이치우드의 아미르 무사 |
25. (정보 없음) |
26. 티무르 (= 16, 28) |
27. 투르미쉬 아가 |
28. 티무르 (= 16, 26) |
29. 멩글리 하툰 |
30. 수유르가트미쉬 칸, 서차카타이 칸국의 칸 |
31. (정보 없음) |
참조
[1]
서적
[2]
서적
The Archaeology of Afghanistan from Earliest Times to the Timurid Period
[3]
간행물
The Begims of the Mystic Feast: Turco-Mongol Tradition in the Mughal Harem, The Journal of Asian Studies Vol. 69, No. 1
[4]
서적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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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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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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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1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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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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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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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The history of Persia. Containing, the lives and memorable actions of its kings from the first erecting of that monarchy to this time; an exact Description of all its Dominions; a curious Account of India, China, Tartary, Kermon, Arabia, Nixabur, and the Islands of Ceylon and Timor; as also of all Cities occasionally mention'd, as Schiras, Samarkand, Bokara, &c. Manners and Customs of those People, Persian Worshippers of Fire; Plants, Beasts, Product, and Trade. With many instructive and pleasant digressions, being remarkable Stories or Passages, occasionally occurring, as Strange Burials; Burning of the Dead; Liquors of several Countries; Hunting; Fishing; Practice of Physick; famous Physicians in the East; Actions of Tamerlan, &c. To which is added, an abridgment of the lives of the kings of Harmuz, or Ormuz. The Persian history written in Arabick, by Mirkond, a famous Eastern Author that of Ormuz, by Torunxa, King of that Island, both of them translated into Spanish, by Antony Teixeira, who liv'd several Years in Persia and India; and now render'd into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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ティムール帝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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