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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나리타 현지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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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20 나리타 현지투쟁은 1985년 10월 20일, 나리타 국제공항 2기 공사 반대 시위 과정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열린 집회에 참가한 시위대는 나리타 공항 제3게이트를 향해 진격하다가 경찰과 충돌했으며, 이 과정에서 쇠파이프, 화염병 등을 사용한 격렬한 저항이 있었다. 혁명적노동자협회는 관제탑을 습격하여 공항 운영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241명이 체포되었고, 중핵파는 이후 대규모 시위를 자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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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0 나리타 현지투쟁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명칭10.20 나리타 현지 투쟁
다른 명칭85년 봉기전 (중핵파), 10.20 (중핵파)
기동대와 데모대의 충돌
기동대와 데모대의 충돌 (경찰청 『초점』 제269호)
장소신도쿄 국제공항
나리타시의 산리쓰카 교차로
날짜1985년 10월 20일
요약신좌익 (경찰청의 호칭으로는 "극좌 폭력 집단")과 산리쓰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에 의한 대규모 신도쿄 국제공항에 대한 공격
수단활동가를 대동원하여 산리쓰카 교차로 부근에서 기동대와 충돌한 외, 위장 소방차로 공항에 침입한 별동대가 시한 장치에 의해 관제탑에 손해를 주었다.
무기각목, 쇄석, 철 파이프
병기화염병
위장 소방차 (산탄 발사 장치, 화염 방사기 탑재)
위장 택시 (화염탄 탑재)
표적신도쿄 국제공항 관제탑
부상다수
피해자신도쿄 국제공항 공단
손해관제탑의 일부 손괴
공항 기능의 일시 마비
산리쓰카 교차로 부근의 점포의 손괴
경찰 차량의 손상
동기신도쿄 국제공항의 2기 공사를 저지, 나아가 신도쿄 국제공항을 폐항시키기 위해.
방어경찰청
경시청
지바현 경찰
간토 관구 기동대 등
대처활동가 등 241명을 체포

2. 배경

1960년대부터 일본 정부는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추진했으나, 지역 주민, 학생, 좌익 운동가들의 거센 반대에 직면했다. 이들은 강제 토지 수용, 환경 파괴, 소음 문제 등을 이유로 반대 운동을 전개했다. 1980년대 중핵파 등 극좌파 단체들은 나리타 공항 문제1985년 최대 투쟁 과제로 삼고 나리타 현지에 대규모 인원을 동원해 시위와 게릴라 활동을 벌였다.[5] 특히 같은 해 4월 전국지에 게재된 "나리타는 '지금'"이라는 정부 홍보가 신도쿄 국제공항 2기 공사 착공을 위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위기감을 더한 신좌익 정파는 "2기 공사 저지"를 목표로 투쟁을 격화시켰다.[5]

2. 1. 한국과의 연관성

1980년 대한민국에서 발생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일본 극좌파 활동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5] 이들은 광주 민주화 운동을 민중 봉기의 모범 사례로 여기고, 자신들의 투쟁에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3. 사건 경과

1985년 10월 20일,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 기타하라파는 나리타시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전국총궐기 집회를 개최했다. 치바현경 경비본부는 경시청 기동대 등을 배치하여 경계를 강화했다.[1]

이 집회에는 약 3,900명이 참가했다. 경찰은 검문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중핵파 등은 사전에 숨겨둔 쇠파이프, 화염병 등을 배포하며 폭력 시위를 준비했다. 카마타 마사시 전학련 위원장의 선동에 따라[1] 참가자들은 나리타 공항 제3게이트를 향해 진격했다.

나리타 공항으로 진입하려던 시위대는 산리즈카 교차로에서 경찰 저지선과 충돌했다.[6] 시위대는 통나무, 쇠파이프, 화염병 등으로 격렬하게 저항했고, 기동대는 물대포와 최루탄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기동대 59명이 부상당하고, 장비 3대가 파손되었다. 시위대와 구경꾼들은 시가전을 벌였고, 경찰은 이들을 체포했다.[6] 총 241명이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현행범 체포되었다.[7]

혁노협은 산리즈카 교차로 충돌과 동시에 공항 안팎에서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게이세이 전철 게이세이 나리타역 열차와 공항 근처 산림에 방화하여 항공기 이착륙을 방해했다.

공격 대상이 되었던 옛 관제탑 (2010년 사진)


혁노협은 위장 택시와 가짜 신분증으로 공항 검문을 통과, 차량 방화 후 소방관으로 변장하여 위장소방차로 관제탑을 공격했다. 위장소방차에는 화염방사기산탄총이 장착되어 있었다.[8] 산탄총 공격으로 관제탑 창문이 파괴되었으나, 화염방사기 고장으로 관제탑 방화는 실패했다. 공항 기능은 일시 마비되었다. 혁노협은 공항 제5게이트 공격도 계획했으나, 부대 간 합류 실수로 실행되지 않았다.

3. 1. 궐기대회

산리즈카 제1공원


1985년 10월 20일,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 기타하라파 주최의 전국총궐기 집회가 나리타시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개최되었다. 치바현경 경비본부는 경시청 기동대 등 각 부대를 산리즈카 제1공원에서 산리즈카 교차로까지, 치바현경의 각 기동대를 나리타공항 구 제5게이트(현 시바야마치요다역 부근)에 배치했다. 또한 치바현경 신도쿄국제공항경비대(현 치바현경 나리타국제공항경비대)의 6개 공항기동대(대대)와 관동관구기동대 3개 대대를 나리타공항 북쪽에서 동쪽까지 배치하고, 헬기 5대로 상공을 경계했다.

이 궐기대회에는 약 3,900명이 참가했다. 경찰은 집회 전 검문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려 했으나, 오후 4시 10분경 중핵파를 비롯한 정파들은 사전에 숨겨둔 쇠파이프, 통나무, 화염병 등을 꺼내 참가자들에게 배포했다. 카마타 마사시 전학련 위원장 등의 선동 연설에 따라[1] 궐기대회 참가자들은 폭력 시위대로 돌변, 나리타 공항 제3게이트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중핵파는 흰색 헬멧을 참가자들에게 배부하고 '중핵'이라고 쓰게 했으며, 선글라스와 검은 재킷을 입은 중핵파 부대를 선두로 1,000명 이상이 공원을 나섰다.

3. 2. 교차로 충돌

나리타 공항으로 진입하려던 시위대는 신고된 행진 경로를 벗어나 동쪽으로 가기 위해 산리즈카 교차로로 진입했다. 이곳에서 시위대는 경찰 저지선과 충돌했다.[6]

교차로에서는 경시청 기동대가 방패로 저지선을 만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정면 돌파를 시도했고, 오후 4시 20분경 양측은 충돌했다.[6] 시위대는 통나무를 공성추처럼 사용하고 쇠파이프로 무장하여 기동대를 공격했다. 기동대는 물대포와 최루탄을 사용하며 진압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대는 끈질기게 저항하며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격렬하게 대응했다.[6]

이 과정에서 기동대 59명이 부상당했고, 살수차와 장갑차 3대가 파손되었다. 한편, 산리즈카 제1공원 주변 시가지 곳곳에서 궐기대회 참가자 및 일부 구경꾼이 가두선전차로 선동을 하고, 전국 각지에서 증원된 경찰 부대와 싸움을 벌이면서 시가전 양상이 되었다. 기동대가 교차로를 제압하고 제1공원까지 진입하자, 시위대는 돌과 오물을 뿌리며 저항했지만, 오후 5시 이후 기동대가 공원에 진입해 활동가들을 체포해 갔다.[6]

이 과정에서 남자 195명, 여자 46명 총 241명이 공무집행방해 등으로 현행범 체포되었다.[7]

3. 3. 관제탑 습격

혁노협은 산리즈카 교차로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과 동시에 공항 안팎에서 게릴라 공격을 감행했다.

혁노협은 오후 5시경 게이세이 전철 게이세이 나리타역 구내에 정차한 열차에 발화장치로 방화하고, 공항 근처의 산림이나 폐타이어에 방화해 연기로 항공기 이착륙을 방해했다.

오후 5시 30분경 혁노협 멤버들이 택시로 위장한 차량과 가짜 신분증으로 공항 검문을 통과하고, 5시 35분경 여객터미널 건물 주차장에 자신들이 타고 온 차량과 다른 차량에 2개의 발화장치를 설치하고 도주했다.

차량에 설치한 장치가 작동하여 차량이 화염에 휩싸이자, 소방관으로 변장한 혁노협 결사대가 사전에 준비한 나리타소방서 차량을 닮은 위장소방차와 위장소방지휘차를 몰고 공항으로 왔다. 위장소방차에는 화염방사기산탄총이 장착되어 있었다. 감쪽같은 위장에 공항경비대는 혁노협 결사대를 진짜 소방대로 오인하고 공항 침입을 허용했다.[8]

결사대는 관제탑 앞에 위장소방차를 주차하고 장치를 설치한 위장소방지휘차로 도주하여 잠적했다. 8분 후 소방호스 노즐로 위장한 산탄총에서 발사된 200개의 꿩탄이 관제탑 창문을 파괴했다. 혁노협의 계획대로라면 파괴된 창문으로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어 관제탑이 잿더미가 되어 관제 기능을 상실한 나리타 공항은 사실상 폐항되는 수순이었다. 그러나 화염방사기가 고장으로 작동하지 않아 관제탑을 불태우는 것은 실패했지만, 공항 기능은 일시 마비되었다.

혁노협은 공항 제5게이트에 돌입할 계획도 세우고 준비했지만, 병참부대와 돌격행동부대 간의 합류 실수가 발생하여 실행되지 않았다.

4. 사건 이후

이 사건으로 경찰은 사전에 징후를 감지하지 못했다는 여론의 맹렬한 비판을 받았다. 주변 주민들은 시위대와 경찰 양측에 분노했다.[6]

이 사건을 계기로 나리타시에서는 조례를 개정하여 극좌파와 결합하는 반대동맹 키타하라파의 공원 사용을 제한했다. 그래서 키타하라파는 그 뒤로 맹원의 밭에서 집회를 하게 되었다. 산리즈카 부근에서 영업을 하는 주민들은 키타하라파의 집회가 인근 공원에서 더 이상 열리지 않아 지역이 안심했다고 말했다.[8]

평온을 되찾은 산리즈카 교차점(2009년)

4. 1. 중핵파의 쇠퇴

이 사건은 나리타 공항 개항 이후 최대 규모의 공항 반대파와 경찰 간의 충돌이었다. 중핵파는 이 10·20 투쟁에서 전례없는 전력을 동원해 기동대와 충돌했다. 중핵파는 이듬해부터 도쿄 정상회담, 쇼와 천황 재위 60주년 기념식, 천황의 오키나와 국체 방문, 국철분할민영화를 저지하기 위해 대대적인 투쟁을 수행했으며, 10·20은 그 "전초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중핵파는 구성원이 1만 명으로 알려져 있었지만, 집회나 시위에는 소위 "공개적 부대"밖에 참여하지 않기에 그 내실은 현재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10·20 때 체포된 241명 가운데는 국가공무원 5명, 지방공무원 22명도 포함되어 있었고 개중에는 교사도 4명이었다.[7][8] 일교조 조합원도 아닌 동북지방 산골의 소학교 교사 등의 "비공개" 활동가도 있었다. 이 교사처럼 체포당하면서 무단결근되어 주위에 중핵파임이 처음 밝혀진 사람도 있었다.

다음 달 4일 중핵파 기관지 『전진』에서는 “10·20 결전의 승리에 의해 노동자계급 인민의 총궐기를 기축으로 혁명군의 혁명 게릴라·빨치산 전쟁과 대중적 무장투쟁을 상승적으로 발전시키는 싸움, 선제적 내전 전략의 고차 단계(페이스 2)의 진가를 발휘하는 과정에 돌입했다는 것이다”라고 자화자찬했지만, 비공개 활동가까지 대량 체포된 데 따라 조직의 타격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중핵파는 현재까지 대량의 체포를 발생시키는 투쟁을 더 이상 실시하지 않고 있다. 중핵파의 시가전은 바로 다음 달에 있었던 국전 동시다발 게릴라사건이 마지막이다.[8]

사건 10년 후인 1995년(헤이세이 7년) 6월 카마타 마사시(사건 당시 중핵파 전학련 위원장) 등 16명의 유죄가 확정되었다.

4. 2. 재판

사건 10년 후인 1995년(헤이세이 7년) 6월, 카마타 마사시(사건 당시 중핵파 전학련 위원장) 등 16명의 유죄가 확정되었다.[6]

참조

[1] 간행물 開港以来の大混乱 1985-10-21
[2] 뉴스 "市街戦"に住民憤然 投石・火炎・ガス弾 屋内まで煙の異臭 閉店や避難も 1985-10-21
[3] 웹사이트 朝日新聞デジタル写真特集「朝日新聞の紙面で振り返る成田空港の歴史」 http://www.asahi.com[...] 2021-02-08
[4] 간행물 "痛み"大きい後遺症 1985-10-22
[5] 문서 昭和61年 警察白書
[6] 뉴스 "市街戦"に住民憤然 投石・火炎・ガス弾 屋内まで煙の異臭 閉店や避難も 1985-10-21
[7] 웹인용 昭和63年 警察白書 https://www.npa.go.j[...] 2018-06-12
[8] 서적 成田 あの1年 崙書房出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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