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리타 공항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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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리타 공항 문제는 1966년부터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에서 시작된 신도쿄 국제공항(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투쟁으로, 산리즈카 투쟁이라고도 불린다. 공항 건설 과정에서 발생한 토지 수용, 소음 문제 등으로 지역 주민들이 반대 동맹을 결성했고, 정부의 강경책에 신좌파가 결합하면서 투쟁이 격렬해졌다. 개항 이후에도 테러와 게릴라 사건이 이어지면서 공항 확장이 지연되었고, 나리타 공항은 국제 공항 경쟁에서 도태되었다. 1995년 정부의 사과와 토지 강제 수용 포기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지만, 반대 운동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으며, 신좌익 세력의 관심 감소, 고령화 등으로 예전만큼의 동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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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 십자로 사건은 1971년 신도쿄 국제공항 건설 반대 시위 중 발생하여 경찰관 3명이 사망하고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으며, 나리타 공항 건설 반대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리타 공항 문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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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주요 내용 | |
원인 |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일본의 급속한 경제 성장으로 인한 수도권의 항공 수요 증가, 기존 하네다 공항의 수용 능력 한계 |
배경 | 일본 정부의 신도쿄 국제공항 건설 계획 발표 (1966년) 공항 건설 예정지 선정 과정에서의 주민과의 소통 부족 및 일방적인 토지 수용 결정 |
경과 |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 학생 운동가, 시민 단체 등의 격렬한 저항 (산리즈카 투쟁) 1978년 개항 이후에도 지속적인 시위와 테러 발생 공항 주변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 심화, 소음 문제, 환경 파괴 등의 문제 제기 |
결과 | 공항 건설 과정에서의 인명 피해 및 사회적 갈등 심화 공항 시설의 부분적인 완공 및 운영 제한 (활주로 부족 등) 공항 주변 지역 개발 지연 및 주민들의 생활 불편 초래 |
영향 |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사회 운동의 새로운 모델 제시 공공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주민 참여와 소통의 중요성 강조 공항 건설 및 운영 과정에서의 환경 보호 및 주민 권익 보호의 필요성 인식 |
상세 내용 | |
신도쿄 국제공항 건설 계획 | 일본 정부는 도쿄의 항공 수요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 새로운 국제공항 건설을 계획하고, 지바현 나리타 지역을 건설 예정지로 선정함. |
산리즈카 투쟁 | 공항 건설에 반대하는 농민들은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 공항 반대 동맹을 결성하여 격렬한 저항 운동을 전개함. 이 과정에서 경찰과의 충돌, 방화, 파괴 행위 등이 발생하며 사회적 혼란이 야기됨. |
공항 개항 | 1978년 나리타 국제공항이 개항되었으나, 반대 세력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공항 시설의 안전 문제, 소음 문제, 환경 문제 등이 지속적으로 제기됨. |
문제 해결 노력 | 일본 정부와 공항 운영 주체는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문제 해결을 모색하고, 소음 대책, 환경 보호 대책 등을 추진함. 또한, 공항 시설 확충을 통해 수용 능력을 확대하고, 이용객 편의를 증진하기 위해 노력함. |
현재 상황 | 나리타 국제공항은 일본의 주요 국제공항으로 기능하고 있으며, 주변 지역과의 공존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고 있음. |
2. 역사
1961년경부터 새로운 도쿄 국제공항 후보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현 우라야스시) 앞바다 매립지, 인바군 도미사토촌·야치마타정(현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 이바라키현 가스미가우라가 후보지로 선정되었으며,[1] 1963년 12월 11일에는 운수성 자문 기관인 항공심의회가 도미사토 안을 가장 적합한 후보지로 결정했다.
1965년 11월 18일, 관계 각료 간담회는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도미사토·야치마타로 내정하고,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지역에 대한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발표였고, 이미 후보지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도미사토·야치마타 지구 주민들은 대규모 반대 운동을 벌였다.
사토 내각 (나카무라 토라타 운수대신)은 반대 운동이 길어지자, 1966년 6월 22일에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같은 현 나리타시 산리즈카로 변경하는 것을 발표하고, 7월 4일에 각의 결정했다. 이는 국유지인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과 현유림의 전용이 가능하고, 그 주변의 주요 토지가 전후 개척으로 이주해온 경제력이 없는 농민의 것이었기 때문에, 민유지의 토지 취득도 쉽게 진행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리즈카에서도 어용 목장 등 국가와 행정이 보유한 토지는 공항 예정지의 40%에 못 미쳤으며, 민유지 토지 취득이 계속해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와 마찬가지로 사전 설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발표되었고, 산리즈카 안을 보도로 알게 된 지역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역 주민들은 개척지의 빚 문제, 토지를 잃는 것과 소음 문제에 대한 우려로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을 결성하고 산리즈카 투쟁을 시작했다.[3]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혁신 정당의 지원을 받던 반대 운동은, 정부의 강권적인 자세에 반발한 농민들이 "힘에는 힘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굳히면서 기존 혁신 정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공안조사청은 1993년 4월에 정리한 '나리타 투쟁의 개요'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들 정당(사회당, 공산당)이 나리타 투쟁을 발판 삼아 각종 선거에서 지지 확대를 꾀하거나 당세를 확대하는 등 당리당략에 치우친 것에 대한 반발에서 (반대파 농민들이) 차츰 기성 정당으로부터 멀어졌다"라고 분석했다.[5]
이러한 상황에서 "폭력 혁명"을 주장하며 하네다 사건 이후 실력으로 정부와 대립해 온 신좌파 여러 정파들이 반대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기존 정당에 불신을 품고 있던 지역 주민들 역시 "지원 단체는 당파를 불문하고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보이며 신좌파 세력의 지원을 수용하였다.[5]
1978년 3월 26일,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4인터내셔널 일본 지부(제4인터) 파를 주력으로 하는 게릴라가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의 관제탑에 침입하여 관제탑 내의 기기를 파괴했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 이 때문에 개항이 3월 30일에서 5월 20일로 연기되었다.[4]
일본 정부는 이 사건으로 "이 폭거가 단순한 농민의 반대 운동과는 다른 이질적인 법과 질서의 파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철저한 검거와 단속을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하고,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항과 안전 확보 대책 요강'을 제정하였다. 국회에서도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처치법'(현·나리타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조치법)이 의원 입법에 의해 성립되었다.[4]
반대 동맹은 개항 후에도 '백일 전투 선언'을 발표하고, 여러 시설에 대한 게릴라나 활주로 연장선상에 애드벌룬을 띄우거나 타이어를 태워 검은 연기로 항공기 이착륙을 방해했기 때문에, 경찰은 엄중한 경비를 펼쳤다.[4] 관제탑 습격 사건을 계기로, 공항의 안전 확보를 목적으로 지바현 경찰경비부에 전담 기동대 '신도쿄 국제공항 경비대'(현·지바현 경찰 나리타 국제공항 경비대)가 7월 18일에 발족했다.[4]
1980년대에도 반대 운동은 2기 공사 착공을 막는 등 일정한 힘을 유지했다. 그러나 반대 동맹은 1983년 3월 8일에 "'일평 재공유화 운동'"과 "'입목 트러스트'"의 찬반 여부를 두고 분열되었다.
1985년 10월 20일 10.20 나리타 현지 투쟁을 계기로 신좌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공격을 가속화했다.[10] 1988년 9월 21일에는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이 발생하여, 변호사 오가와 아키라가 풀 페이스 헬멧을 쓴 수 명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이 테러에 대해 중핵파는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다른 수용 위원들에게도 조직적으로 협박장을 발송하거나 협박 전화를 거는 등 협박 행위를 계속했다. [10]
1980년대 말 냉전 종결과 에토 다카미 운수상이 과거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91년 11월부터 스미야 미키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4명의 학식 경험자(스미야 조사단) 주재로 15회에 걸쳐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1993년 9월부터는 12회에 걸쳐 "나리타 공항 문제 원탁회의"가 개최되어, 향후 신 도쿄 국제공항 정비를 민주주의에 기초한 대등한 대화 절차로 진행할 것이 확인되었다[12]。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정부를 대표하여 과거의 강권적 자세에 대해 사죄하고, 토지 수용법에 따른 행정대집행을 통한 나리타 공항 토지 강제 수용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2. 1. 하네다 공항 재확장 검토
1960년대에는 대형 제트 여객기가 늘어나고 고도 경제 성장으로 국제 항공 수송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활주로를 늘려 더 많은 비행기가 뜨고 내릴 수 있게 해야 했다. 또한, 일본항공이 주문한 콩코드 같은 초음속 여객기가 곧 취항할 예정이라, 더 긴 활주로도 필요했다.[1]그래서 당시 국제선 비행기가 주로 이용하던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을 넓혀서 늘어나는 항공 수요를 감당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제점들이 있었다.
- 하네다 공항을 바다 쪽으로 넓히면 도쿄항의 항만 계획과 맞추기 어렵다.
- 당시의 항만 건설 기술로는 불가능했다.
- 미국 공군 관제 구역(요코타 비행장 상공의 "요코타 공역") 때문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경로를 설정하기 매우 어렵다.
- 넓힐 수 있다고 해도, 공항의 처리 능력은 20% - 30% 정도밖에 늘어나지 않는다.[2]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하네다 공항을 넓히는 것만으로는 앞으로 계속 늘어날 항공 수송 수요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2. 2. 신공항 후보지 검토
1961년경부터 새로운 도쿄 국제공항 후보지에 대한 조사가 시작되었다. 지바현 히가시카쓰시카군 우라야스정(현 우라야스시) 앞바다 매립지, 인바군 도미사토촌·야치마타정(현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 이바라키현 가스미가우라가 후보지로 선정되었으며,[1] 1963년 12월 11일에는 운수성 자문 기관인 항공심의회가 도미사토 안을 가장 적합한 후보지로 결정했다.1965년 11월 18일, 관계 각료 간담회는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도미사토·야치마타로 내정하고, 하시모토 도미사부로 관방장관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이는 지역에 대한 사전 협의 없이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발표였고, 이미 후보지에서 반대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도미사토·야치마타 지구 주민들은 대규모 반대 운동을 벌였다.
사토 내각 (나카무라 토라타 운수대신)은 반대 운동이 길어지자, 1966년 6월 22일에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같은 현 나리타시 산리즈카로 변경하는 것을 발표하고, 7월 4일에 각의 결정했다. 이는 국유지인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과 현유림의 전용이 가능하고, 그 주변의 주요 토지가 전후 개척으로 이주해온 경제력이 없는 농민의 것이었기 때문에, 민유지의 토지 취득도 쉽게 진행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2. 3. 정부의 강권적인 자세와 반대 운동의 시작
1965년 11월 18일, 일본 정부는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지바현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로 내정하고 기자회견을 가졌다. 그러나, 지역에 대한 사전 협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발표되자, 지역 주민들은 대규모 반대 운동을 벌였다.[1]사토 내각은 1966년 6월 22일 신공항 건설 예정지를 나리타시 산리즈카로 변경하는 것을 발표하고, 7월 4일 각의 결정했다. 이는 국유지인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과 현유림의 전용이 가능하다는 점과 그 주변의 주요 토지가 전후 개척으로 이주해온 경제력이 없는 농민의 것이었기 때문에, 민유지의 토지 취득도 쉽게 진행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리즈카에서도 어용 목장 등 국가와 행정이 보유한 토지는 공항 예정지의 40%에 못 미쳤으며, 민유지 토지 취득이 계속해서 최우선 과제가 되었다. 도미사토시·야치마타시와 마찬가지로 사전 설명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발표되었고, 산리즈카 안을 보도로 알게 된 지역 주민들은 격렬하게 반발했다. 지역 주민들은 개척지의 빚 문제, 토지를 잃는 것과 소음 문제에 대한 우려로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을 결성하고 산리즈카 투쟁을 시작했다.[3]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혁신 정당의 지원을 받던 반대 운동이었지만, 반대파의 주장에 응하지 않는 정부의 강권적인 자세에 대해, 반대파 농민들은 차츰 "힘에는 힘으로 대항한다"는 방침을 굳혔고, 이에 따라 기성 혁신 정당은 반대 운동에서 물러섰다.[5]
2. 4. 신좌파의 지원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혁신 정당의 지원을 받던 반대 운동은, 정부의 강경한 자세에 반발한 농민들이 "힘에는 힘으로" 대응한다는 방침을 굳히면서 기존 혁신 정당과 결별하게 되었다. 공안조사청은 1993년 4월에 정리한 '나리타 투쟁의 개요'에서 이러한 변화를 "이들 정당(사회당, 공산당)이 나리타 투쟁을 발판 삼아 각종 선거에서 지지 확대를 꾀하거나 당세를 확대하는 등 당리당략에 치우친 것에 대한 반발에서 (반대파 농민들이) 차츰 기성 정당으로부터 멀어졌다"라고 분석했다.[5]이러한 상황에서 "폭력 혁명"을 주장하며 하네다 사건 이후 실력으로 정부와 대립해 온 신좌파 여러 정파들이 반대 운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이들은 "일제의 해외 침략 기지", "노동자와 농민의 연대", "국가 치안의 최전선인 나리타에서 기동대를 격파", "신공항은 일본에 새로운 군사 기지를 만드는 것이다", "전국 주민 운동의 정상 결전" 등의 이유를 내세우며 반대파 농민들을 지원하였다. 기존 정당에 불신을 품고 있던 지역 주민들 역시 "지원 단체는 당파를 불문하고 받아들인다"는 태도를 보이며 신좌파 세력의 지원을 수용하였다.[5]
2. 5. 관제탑 점거 사건
1978년 3월 26일,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제4인터내셔널 일본 지부(제4인터) 파를 주력으로 하는 게릴라가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의 관제탑에 침입하여 관제탑 내의 기기를 파괴했다. 공항 각지에서 신좌파 정파 활동가 약 300명도 난입하였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 이 때문에 개항이 3월 30일에서 5월 20일로 연기되었다.[4]일본 정부는 이 사건으로 체면을 구기고 "이 폭거가 단순한 농민의 반대 운동과는 다른 이질적인 법과 질서의 파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이며, 철저한 검거와 단속을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한다"라고 성명을 발표하고, '신도쿄 국제공항의 개항과 안전 확보 대책 요강'을 제정하였다. 국회에서도 '신도쿄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처치법'(현·나리타 국제공항의 안전 확보에 관한 긴급 조치법)이 의원 입법에 의해 성립되었다.[4]
반대 동맹은 개항 후에도 '백일 전투 선언'을 발표하고, 여러 시설에 대한 게릴라나 활주로 연장선상에 애드벌룬을 띄우거나 타이어를 태워 검은 연기로 항공기 이착륙을 방해했기 때문에, 경찰은 엄중한 경비를 펼쳤다.[4]
관제탑 습격 사건을 계기로, 공항의 안전 확보를 목적으로 지바현 경찰경비부에 전담 기동대 '신도쿄 국제공항 경비대'(현·지바현 경찰 나리타 국제공항 경비대)가 7월 18일에 발족했다.[4]
2. 6. 국민 감정과의 괴리
중핵파는 과격한 파괴 행위를 통한 반대 운동을 주도했고, 이는 경찰력을 이용한 봉쇄 시도로 이어졌다. 1978년 5월 5일, 게이세이 전철이 신공항 개항 후 공항 연락용 특급 열차 "스카이라이너"에 투입하기 위해 제작한 게이세이 전철 AE차가 방화되어 4량 전부가 전소 또는 반소된 게이세이 스카이라이너 방화 사건이 발생했다.[5] 중핵파는 5월 19일에도 게이세이 본선 5개소에서 동시 다발 열차 방해 사건을 일으켰다.지역 열차 내부는 반대파가 사실상 점거하고 있었으며, 차내에서는 죽창을 휘두르며 대립 조직에 대한 "검문"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지역 주민의 생활에 중요한 교통 수단인 게이세이 전철에 대한 테러 행위는 공항 반대 운동의 범위를 넘어 지역 사회 기반 자체를 파괴하는 활동이었다. 이는 공항 주변부 이외의 게이세이선 연선 주민들로부터 반대파에 대한 싸늘한 시선을 초래했고, 신좌익 자체의 쇠퇴와 개항 저지 실패로 인해 '나리타 공항 분쇄'를 외치며 더욱 첨예화되는 반대파에 대해 국민 감정은 점차 멀어져 갔다.
당시 사철을 경비하는 경찰 조직이 미비하여 이러한 테러를 막기 어려웠다. 일본국유철도는 철도 공안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도부현 경찰 소속 철도 경찰대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철도 경찰대는 1987년 4월에 활동 시작). 따라서 게이세이 전철은 지바현 경찰과 연계하여 경비를 실시할 수밖에 없었다.
항공 연료 수송을 담당했던 가시마 임해 철도 가시마 린코 선에서는 선로에 생 콘크리트가 흘러 들어가거나,[6] 모래를 실은 덤프트럭이 돌입하는[7] 등 철도 시설 파괴 및 수송 방해 사건이 잇따랐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 이후 공항 반대파와 신좌익은 동일시되었고, 대다수 국민은 반대 운동을 '특이한 사상을 가진 제한된 인간에 의한 반사회적 테러 행위'로 인식하게 되었다. 정부의 단호한 자세, 개항 및 운용 시작, 공항 주변의 엄중한 경비 태세는 반대파의 존재를 국민들에게서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매스 미디어도 초기에는 반대파 주장에 동정적이었지만, 신좌익과 테러리즘의 그림자만 부각되자 거리를 두게 되면서 반대파는 고립되었다.
신좌익 테러리스트들은 계속해서 테러를 자행했고, 반대파 주민들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놓였다. 순수하게 정부의 일방적인 공항 건설 계획에 반대했던 주민들은 심신이 쇠약해졌고, 반대 운동 자체는 일본 사회에 대한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2. 7. 일평 재공유화 운동과 내부 분열
1980년대에도 반대 운동은 2기 공사 착공을 막는 등 일정한 힘을 유지했다. 그러나 반대 동맹은 주로 "'일평 재공유화 운동'"과 "'입목 트러스트'"의 찬반 여부를 두고 1983년 3월 8일에 분열되었다. "일평 재공유화 운동"을 "토지 매각", "돈벌이 운동"으로 반대한 중핵파는 "기타하라 파"를, "재공유화"를 추진하는 제4 인터파는 "아쓰타 파"를 지지했다.3월 8일, 훗날의 "아쓰타 파"는 "총회"를, 훗날의 "기타하라 파"는 "실행 임원회"를 각각 개최했다. 시바야마정 지요다 공민관에서 열린 "총회"에서는 반대파 농민 160명이 참석하여, "중핵파 지지색이 강하다"고 여겨진 기타하라 코지 사무국장의 해임에 반대파 농가 194호 중 145호가 찬성, 25호가 반대, 24호가 보류하여 해임을 결정했다. 또한, 중핵파와의 공투를 끊는 것도 해당 "총회"에서 확인되었다.
한편, 나리타시덴진봉 "현지 투쟁 회관"에서 개최된 "실행 임원회"에는 반대파 농민 58명이 참가했다. "일평 재공유화 운동"을 추진하는 청년 행동대의 이시이 신지를 "반대 동맹에서 제명했다"고 하고, 22명을 "반대 동맹의 직위에서 해임했다"고 했다.
중핵파의 "재공유화" 반대론은 "재공유화 운동"에 대한 "공항 용지 내 농민"의 반발을 배경으로 "기타하라 파"의 중심 부분은 "용지 내 농민"이었지만, 이시이 타케시처럼 "용지 내 농민"으로 "아쓰타 파"에 가담한 자도 있었다. 반대로 "일평 재공유화"를 추진한 "용지 외 소음 지역 농민·주민"의 다수는 "아쓰타 파"에 가담했지만, "기타하라 파"에 가담한 "소음 지역 농민·주민" (토무라 잇사쿠 부인 등)도 존재한다.
또한, 중핵파는 제4 인터파를 "(공항) 공단에 토지를 매각하려는 새로운 유형의 반혁명"으로 규정하여, 1984년 1월, 전국 일제히 5곳의 제4 인터파 멤버 자택을 습격, 한 명에게 두개골 함몰을 입히는 중상을 입혔다. 7월에 다시 일제히 3곳의 제4 인터파 멤버 자택을 습격, 한 명에게 다리 절단의 중상을 입히는 폭행을 가했다. 제4 인터의 후신인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JRCL)에 따르면, 중핵파는 전국의 "일평 공유자"에게 "다음은 너다", "죽여주겠다" 등 조직적으로 협박을 가했다[10]。
용지 내 농민을 중심으로 형성된 "기타하라 파"이지만, 1987년 9월에, 역시 중핵파에 대한 반발을 배경으로, 용지 내 농민의 대다수가 이탈하여 "오가와 파"가 결성되었다. "기타하라 파" 반대 동맹 및 중핵파는, "아쓰타 파" 농민과 함께 "오가와 파"에 대해서도 "탈락파"로 규정하여, 격렬하게 비난·공격했다.
그러나, 1998년에 중핵파는 "탈락파의 재공유화에 응한 사람들을 포함한 전국 1,200명의 일평 공유자에게 호소한다. 그 권리를 절대 지켜내는 것은 인민의 정의이며, 산리즈카 투쟁 승리를 위해 불가결하다"라고, "일평 재공유화 운동"에 대한 태도를 180도 전환했다. 다만, 제4 인터파에 대한 테러 사건, 비 기타하라 파 반대파 농가에 대한 협박 및 恫喝에 대해서는, 일절 사과를 하지 않았다[10]。
2. 8. 수용위원회에 대한 테러
1985년 10월 20일 지바현 나리타시 산리츠카 교차로에서 공항 반대 동맹(기타하라파) 지원 신좌익 정파와 경시청 기동대가 충돌하는 사건(10.20 나리타 현지 투쟁)이 발생했다.[10] 이 사건을 계기로 신좌익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 공격을 가속화했다.1988년 9월 21일에는 지바시 노상에서 당시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이었던 변호사 오가와 아키라가 풀 페이스 헬멧을 쓴 수 명에게 습격당했다.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 쇠파이프로 온몸을 맞아 양다리와 왼쪽 팔이 골절되는 중상을 입은 오가와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3년 2월 입수자살했다. 이 테러에 대해 중핵파는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다른 수용 위원들에게도 조직적으로 협박장을 발송하거나 협박 전화를 거는 등 협박 행위를 계속했다. [10]
이로 인해 수용 위원 전원이 사임하면서 지바현 수용위원회는 2004년 재시동되기까지 16년 동안 완전히 기능이 정지되었다.
2. 9. 원탁회의와 정부의 사과
1980년대 말 냉전 종결과 에토 다카미 운수상이 과거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계기로 대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나리타 공항 문제 해결을 위해 1991년 (헤이세이 3년) 11월부터 스미야 미키오 도쿄 대학 명예교수 등 4명의 학식 경험자(스미야 조사단) 주재로 15회에 걸쳐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었다. 구 아쓰타 파, 운수성, 공항공단, 지바현이 참여한 공개 토론회에서 구 아쓰타 파는 "2기 공사 토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떠한 상황에서도 강제적 수단을 취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국가로부터 받아냈다. 1993년 (헤이세이 5년) 9월부터는 12회에 걸쳐 "나리타 공항 문제 원탁회의"가 개최되어, 향후 신 도쿄 국제공항 정비를 민주주의에 기초한 대등한 대화 절차로 진행할 것이 확인되었다[12]。1995년 (헤이세이 7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당시 총리가 정부를 대표하여 과거의 강권적 자세에 대해 사죄하고, 토지 수용법에 따른 행정대집행을 통한 나리타 공항 토지 강제 수용을 포기한다고 발표했다.
3. 반대 운동의 현재
산리즈카 투쟁은 1966년부터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의 농촌 지역인 산리즈카 및 그 부근에서 발생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지역 주민 및 신좌파 활동가들에 의한 신도쿄 국제공항(통칭 나리타 국제공항)의 건설 또는 존속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나리타 투쟁'''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신좌익 정당에 의한 테러·게릴라 사건 등이 다발하여 공항 건설 및 정상적인 공항 운영에 지장을 초래했지만, 스미야 단장을 비롯한 중립 위원들의 노력과 정부의 사과 등으로 인해 반대파 주민들의 이주와 반대 운동에서의 이탈도 진척되었다.[3] 다만, 최근에도 테러를 지속하는 조직도 있어, 2008년에는 혁노협이 나리타 공항 부지 내에 박격포탄을 발사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1980년대에 들어서도 반대 운동은 일정한 힘을 유지하며 2기 공사 착공을 한동안 막았지만, 반대 동맹은 주로 "일평 재공유화 운동"과 "입목 트러스트"의 시비를 두고 1983년에 분열되었다.
이러한 반대 운동의 미로에 싫증이 난 이전 지권자도 있었다. 지가의 급등과 더불어, 정부와의 협의에 의해 토지 수용법의 사업 인가가 실효되어 가격 고정제가 없어진 것도 있어, 전 반대파 농민들은 거액의 보상금을 받았다.[8]
냉전 종결과 에토 다카미 운수상이 과거의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을 계기로, 1980년대 말경부터 대화의 기운이 다시 생겨나, 반대파의 일부와 관계자들 사이에서 나리타 공항 문제 해결이 모색되었다. 1991년 11월부터 스미야 미키오 도쿄 대학 명예교수 외 4명의 학식 경험자(스미야 조사단) 주재 하에 15회에 걸쳐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이 개최되어, 구 아쓰타 파·운수성·공항공단·지바현에서 공개 토론회가 열렸다. 1993년 9월부터 12회에 걸쳐 개최된 "나리타 공항 문제 원탁회의"에서, 향후 신도쿄 국제공항의 정비를 민주주의에 기초한 대등한 대화 절차로 진행해 나갈 것이 확인되었다.[12]
원탁회의의 결론을 받아, 1995년 당시의 총리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지금까지의 강권적인 자세를 정부를 대표하여 사죄했고, 토지 수용법에 근거한 행정대집행에 의한 나리타 공항의 토지 강제 수용 수단을 포기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현재도 주로 잠정 활주로 연장선 직하의 소음 지대에 있는 히가시미네 부락 주민을 중심으로 하는 반대파 농가는 "현재의 잠정 활주로 건설과 북측 연장을 진행하는 수법도 당초부터의 정부의 방식과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비판하며, "나리타 공항 폐항"을 완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리타 주변에 수많은 공항 관계자·항공 관계자도 살게 되면서, "공항과 지역의 공생", "공항의 활성화에 의한 지역 경제의 부양"이라는 의견이 지역의 다수 의견으로 내걸어지고 있는 가운데, 반대파는 이미 완전히 고립화된 상황이며, 반대 운동 전성기부터의 관계인 열심인 지원자나 조직에 의해 어떻게든 지탱되고 있는 것이 실정이다.
과거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제4인터 일본지부(현 JRCL) 등의 신좌익은 오키나와 본섬의 반기지 운동, 반원전 운동에 힘을 쏟고 있어, 나리타 공항 문제의 취급이나 관심은 대체로 낮다.[13] 또한, 반대 운동 초창기부터 지원했던 국철 지바 동력차 노동조합도 조합원 및 구성원의 감소에 제동이 걸리지 않고 있다. 반대 운동 전성기로부터 반세기를 맞이하여, 반대파 농가나 지원 조직의 대부분도 운동원의 고령화 및 사망에 직면하고 있다.
공항 예정 부지의 미매수지 및 반대 동맹 내에서 공항 건설 계획 이전부터의 지역 주민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지만, 2002년의 평행 활주로(B 활주로) 공용 개시 후에도, 일부의 1평 공유지 및 단결 오두막을 제외하고, 텐진미네 지구 및 히가시미네 지구(히가시미네 신사를 포함)의 B 활주로 남단 및 B 활주로 유도로의 예정 부지가 미매수로 남아 있으며, 반대 동맹(기타하라파, 구 아츠타파)이 반대 운동을 하고 있다.
4. 연료 수송 문제
나리타 국제공항은 내륙에 건설되었고, 발착 횟수가 많고 장거리 노선 비율이 높아 항공 연료 취급량이 많았다. 이 때문에 당초부터 지바 항에서 파이프라인을 부설하여 연료를 충당할 계획이었으나, 건설이 지연되어 개항 지연의 요인이 되었다.[16]
1978년 개항 당시에는 파이프라인이 완전히 개통되지 않아, 연료 중계 기지까지 철도를 이용해 수송했다. 이 잠정 수송은 1983년 8월 8일 본격 파이프라인(B계)이 개통될 때까지 계속되었다.[16] 철도로 운반된 항공 연료는 총 950만 킬로리터에 달했다. 1981년도에 관계 철도에 지불된 화물 운임은 32억엔이었으며, 국철 지바 철도 관리국 화물 수입의 22%를 차지했다.[16]
5. 낙하물 문제
나리타 국제공항(나리타 공항) 주변에서는 개항부터 2017년 2월까지 확인된 것만 158건의 항공기 낙하물 사고가 발생했다.[17]
특히 고고도를 장시간 비행하는 국제선 항공기의 경우, 비행 중 항공기에 붙은 얼음 덩어리가 착륙 장치를 펼칠 때 떨어지는 경우가 있다.[18] 이를 방지하기 위해 나리타 공항에서는 도착 항공기가 태평양 상공에서 착륙 장치를 내리도록 하는 조치(해상 착륙 기어 내리기)를 시행하고 있다. 착륙 장치를 내리면 공기 저항이 증가하여 연비가 나빠지지만, 국토교통성과 나리타 국제공항 주식회사(NAA)는 해안에서 항공기의 해상 착륙 장치 내리기 실시 상황을 육안으로 확인하는 자체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17] 이 외에도 공항에 도착한 항공기에 얼음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도 병행하고 있다.[17][19] 이러한 노력으로 연간 낙하물 발생 수는 감소하고 있지만, 연간 약 3건(대략 10만 편당 1회) 정도 발생하고 있다.[20][21]
낙하물로 인해 건물 등에 피해가 발생한 경우에는 항공사가 보상한다. NAA는 항공기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는 물체를 발견한 경우, 함부로 손대지 말고 국토교통성 도쿄 항공국 나리타 공항 사무소 지역 조정과, NAA 지역 공생부 공생 기획 그룹, 가까운 시정촌, 경찰서 중 한 곳에 연락하도록 안내하고 있다.[22]
낙하물 피해는 주로 지붕 기와, 비닐하우스, 자동차 앞 유리 파손 등이며,[23] 2021년까지 인명 피해는 발생하지 않았다.[22]
NAA는 2018년 4월 1일에 "항공기 낙하물 피해 구제 지원 제도"를 만들어 낙하물 보상 제도를 강화했다.[24]
6. 지역의 새로운 우려
2000년(헤이세이 12년), 하네다 공항 재확장과 하네다 발착 정기 국제선 부활 및 24시간 운용 소식이 전해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바라키현에서는 수도권 제3공항으로 항공자위대 햐쿠리 비행장의 군민 공용화를 통한 이바라키 공항 개항이 결정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나리타 공항 건설 초기와는 정반대로, 하네다 공항 재확장과 이바라키 공항 개항으로 인해 나리타 공항의 지위가 하락할 수 있다는 새로운 우려를 낳았다.[26]
6. 1. 하네다 확장과 국제선 부활
1960년대, 일본항공이 발주한 콩코드를 비롯한 초음속 여객기 취항 예상과 고도 경제 성장으로 인한 국제 수송 수요 증가에 따라, 당시 국제선 주력 공항이었던 도쿄 국제공항(하네다 공항) 재확장이 검토되었다. 그러나 하네다 공항의 해상 확장은 도쿄항 항만 계획과의 조정 문제, 당시 기술의 한계, 미국 공군 관제 구역(요코타 비행장 상공의 "요코타 공역")으로 인한 제약, 확장하더라도 처리 능력 증가의 한계 등의 이유로[2] 장기적인 항공 수송 수요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졌다.2000년(헤이세이 12년), 하네다 공항 재확장과 하네다 발착 정기 국제선 부활 및 24시간 운용 소식이 전해졌다. 이로 인해 나리타 공항 지위 저하 우려가 제기되었다. 나리타 공항은 도쿄 도심과의 거리, 나리타 신칸센 계획 무산 등으로 인해 "멀고 불편하며 교통비가 비싸다"는 비판을 받아왔다.[25][26]
2009년 (헤이세이 21년) 10월 13일, 마에하라 세이지국토교통대신은 대한민국의 인천국제공항에 일본의 허브 공항 지위를 빼앗기고 있다며, 하네다 공항을 일본의 허브 공항으로 정비하겠다는 발언을 했다.[27]
2014년 (헤이세이 26년) 3월 30일, 하네다 공항 국제선 운항 횟수 확대에 따라 하네다 국제선이 증편되었고, 반대로 나리타 공항에서는 일본항공이 13편, 전일본공수가 25편을 감편했다.[28]
6. 2. 이바라키 공항 개항
2000년 이바라키현에서는 수도권 제3공항으로 항공자위대 햐쿠리 비행장의 군민 공용화를 통한 "이바라키 공항" 개항이 결정되었다.[25] 하네다 공항의 재확장과 이바라키 공항 개항에 따른 나리타 공항의 "지위 저하"라는, 건설 시작 당시와는 정반대의 우려가 지역에서 나왔다.2010년 개항한 이바라키 공항은 항공사들에게 착륙료가 나리타의 60%임을 내세우고, 저가 항공사를 중심으로 신규 노선 및 시장 점유율 확보를 꾀하며 이용을 촉진하고 있다. 또한, 공항 부지 내 주차 요금을 무료로 하고, 도쿄역까지의 고속버스 이용객에게는 운임을 500JPY으로 설정하는 등, 나리타 공항보다 더욱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편의를 제공하여 수도권 수요를 흡수하려 하고 있다.
6. 3. 나리타 공항 진흥책
2000년 (헤이세이 12년), 하네다 공항의 재확장과 하네다 발착 정기 국제선 부활 및 24시간 운용 소식이 전해졌다. 거의 같은 시기에 이바라키현에서는 수도권 제3공항으로 항공자위대햐쿠리 비행장의 군민 공용화를 통한 "이바라키 공항" 개항이 결정되었다. 지역의 우려는 하네다의 재확장과 이바라키 공항 개항에 따른 나리타 공항의 "지위 저하"라는, 건설 시작 당시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26]압도적인 국내선 네트워크를 갖추고 24시간 운영이 이루어지는 하네다 공항에서 국제선 운항이 재개되었기 때문에, LCC 취항으로 이타미 공항에 이어 국내선 처리량(2016년 기준, 국내 7위)을 갖게 되었지만[29], 야간 발착 제한도 있는 나리타 국제공항의 지위는 상대적으로 하락하고 있다.[26]
이러한 국내외 공항과의 경쟁에 직면한 가운데, 나리타 국제공항의 이용 여객 수 및 항공기 발착 횟수는 2018년 현재에도 증가 추세를 유지하고 있지만,[30] 2017년 나리타 국제공항 통과객(국제선 환승객)이 400만 명을 밑돌아 384만 명으로 감소하는 등, 지위 하락에 위기감을 느낀 NAA는 나리타 국제공항으로서 세계에서의 생존을 걸고 "추가 기능 강화"로서 제3 활주로 정비 및 운영 시간 연장 등을 포함한 확장 정책을 지역과 조율하면서 모색하고 있다.[31]
이 구상이 실현될 경우, 연간 발착 횟수는 현재 30만 회에서 50만 회로 증강되고, 공항 부지 면적은 현재 1400ha에서 2400ha로 확대될 것이다.[32] 일본 국토교통성의 견해에 따르면, 이를 통해 수도권의 발착 횟수는 능력 증강 후의 하네다 공항과 합쳐 연간 100만 회가 확보되어, 구미 주요 도시권의 공항 수준이 될 것이다.[33]
이 "추가 기능 강화"는 국가 및 NAA에 의한 제안 수정과 200회를 넘는 주민 설명회를 거쳐, 2018년 3월 13일에 지바현, 국가, 지역 9개 시정촌, NAA로 구성된 4자 협의회에서 합의되었다.[34][35]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산리츠카 투쟁을 지속하는 반대 동맹(기타하라파・구 아츠타파), 중핵파 및 공산당 계열 단체는 항의 행동을 벌이고 있다.[36][37][38][39][40] 주민 측의 움직임으로는, 새롭게 소음 구역이 되는 자치체에서는 일부 반대 의견이 보이지만,[41] 용지 매수의 대상이 되는 세대에서는 반대 표명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집단 이전 등의 요구와 함께 "마을을 재건할 좋은 기회"라는 목소리도 들리고 있다.[42][43] 이전 보상의 대상이 되지 않는, 두 개의 비행 경로 사이에 끼인 소위 "계곡 지구"에서도, 오히려 이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44]
2020년 1월 31일, 국토교통성은 나리타 국제공항의 추가 기능 강화에 따른 시설 변경을 허가하고, 시설 공용의 목표는 2028년도 말로 정해졌다.[45]
7. 반대 운동의 영향
산리즈카 투쟁은 일본의 공공 정책, 특히 공공사업 추진 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과정에서 정부의 강경한 자세와 지역 주민들의 격렬한 반대 운동은 일본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3]
당초 지역 주민들은 공항 건설 부지 선정 과정 및 부지 내 민유지 취득 문제, 소음 문제 등에 반발하여 일본 사회당, 일본 공산당 등 혁신 정당의 지원을 받아 반대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반대 운동은 신좌파 정파와 결합하며 과격화되었고, 이는 양측에 사망자가 발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3]
개항 이후에도 테러, 게릴라 사건이 계속되어 공항 확장이 지연되었고, 이는 한때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나리타 공항이 국제 경쟁에서 뒤처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지역 사회에 주민 간 갈등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투쟁은 공공사업의 본질에 대한 논의를 촉발시켰고, 독일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 공항 건설 등 다른 나라의 공공사업 추진에도 영향을 주었다.[3]
결국, 일본 정부는 강제적인 토지 수용 대신 대화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1991년부터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과 원탁회의가 개최되어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공항 정비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12] 1995년에는 당시 총리였던 무라야마 도미이치가 정부의 강권적인 자세에 대해 사과하고, 토지 강제 수용 포기를 선언했다.
산리즈카 투쟁은 강제적인 방식이 당연시되던 일본의 공공사업 방식을 변화시킨 사건으로 평가받는다.[3] 이후 일본에서는 고속도로, 철도, 원자력 발전소, 댐 건설 등에서 신좌익 세력의 개입을 경계하고, 주민과의 대화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변화되었다.[9]
8. 관련 사건
산리즈카 투쟁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 나리타 데모 사건
- 시바야마정장댁 앞 임시파출소 습격사건
-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
- ABCD 문제
- 자유민주당 본부 방화습격사건
- 10·20 나리타 현지투쟁
- 키노네 결전
- 일본비행기 전무댁 방화 살인 사건
1978년 3월 26일, 개항 직전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제4인터내셔널 일본 지부)(제4인터) 파를 주력으로 하는 게릴라가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의 관제탑에 침입하여 관제탑 내의 기기를 파괴했다. 또한 공항 각지에서 반대파 농민을 지원하는 신좌익 정파 활동가 약 300명이 난입하는 '소란 상태'가 되었다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사건). 이 때문에 개항이 3월 30일에서 5월 20일로 연기되었다.

1985년 10월 20일에는 지바현 나리타시의 산리츠카 교차로에서 공항 반대 동맹(기타하라파) 지원의 신좌익 정파와 경시청 기동대가 충돌한 사건이 발생 (10.20 나리타 현지 투쟁).
1988년 9월 21일에는 지바시내의 노상에서 당시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이었던 변호사 오가와 아키라가 풀 페이스 헬멧을 쓴 수 명에게 습격당했다.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 습격 사건). 온 몸을 쇠파이프로 얻어맞아 양 다리와 왼쪽 팔을 골절당하는 중상을 입은 오가와는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3년 2월에 입수자살했다. 이 테러에 대해 중핵파는 범행 성명을 발표하고, 다른 수용 위원들에게도 조직적으로 협박장 발송 및 협박 전화를 거는 등의 협박 행위를 계속했다.
9. 관련 인물
- 토무라 잇사쿠: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 초대 위원장이었으나, 분열 이후 기타하라 파에 속했다. 그의 부인은 소음 지역 농민·주민 출신으로 기타하라 파에 가담했다.
- 키타하라 코우지: 산리즈카 시바야마 연합공항반대동맹 사무국장이었으나, 중핵파 지지색이 강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이후 기타하라 파를 이끌었다.
- 스미야 미키오: 도쿄 대학 명예교수로, 나리타 공항 문제 심포지엄 및 원탁회의를 주재하여 문제 해결을 모색했다.
- 이시이 신지: 청년 행동대원으로 일평 재공유화 운동을 추진하다 반대 동맹에서 제명되었다.
- 오가와 아키라: 지바현 수용위원회 회장으로, 1988년 중핵파로 추정되는 인물들에게 습격당해 중상을 입었다.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다 2003년 입수자살했다.
10. 관련 시설
- 나리타 국제공항 : 1966년부터 일본 지바현 나리타시 산리즈카 및 그 부근에서 지역 주민과 신좌파 활동가들이 신도쿄 국제공항(현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및 존속에 반대하는 산리즈카 투쟁의 대상이다.
- 궁내청 시모후사 어료목장 : 공항 예정지의 40%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 및 행정 보유 토지 중 하나였다. 1969년에 궁내청 다카네자와 어용 목장으로 이전되었다.
- 단결 오두막 : 산리즈카 투쟁 과정에서 반대파 농민과 신좌파 활동가들이 설치한 거점 시설물이다.
- 텐진미네 현지 투쟁 본부 : 2009년 촬영, 2011년 철거되었다.
- -
- 이와야마 철탑터 : 현재 "이와야마 투쟁 기념관"이 있다.

- 요코보리 철탑 : 나리타 국제공항 부지 내에 위치한다.

11. 관련 법률
신도쿄국제공항공단법과 나리타 국제공항의 안전확보에 관한 긴급조치법이 산리즈카 투쟁과 관련된 주요 법률이다.
12. 관련 작품
; 오가와 신스케 감독 작품
; 기타
- 가시마 파라다이스 (1972년, 베니 데스왈트, 얀 르 마송 공동 감독, 프랑스 작품)
- 저항의 대지 ~산리즈카 강제 수용 저지의 기록~ (1971년, 산리즈카 투쟁에 연대하는 회 제작)
- * 촬영: 오가와 고헤이
- * 해설: 이와타 나오지
- * 구성: 고가 진
- * 삽입곡: 킨사쿠 캇포레 (노래: WSHAKODA)
- * 32분 54초
- * 1970년의 제2차 강제 측량, 제3차 강제 측량, 1971년의 제1차 행정 대집행, 제2차 행정 대집행의 투쟁을 컬러와 흑백 영상으로 제작.
- 대의의 봄 3.26 산리즈카 (1978년, 간사이 산리즈카 투쟁에 연대하는 회 제작)
- * 해설: 이와타 나오지
- * 삽입곡: 관제탑의 노래 (작사·작곡: 다카하시 유지, 노래: 나카야마 치나츠)
- * 31분 3초
- * 1978년 3월의 투쟁을 나리타 공항 관제탑 점거 사건을 중심으로 말한다.
- 풀 뽑는 책 (1985년, 후쿠다 가쓰히코 감독)
- 산리즈카에 산다 (2014년, 오쓰 고시로, 다이시마 하루히코 공동 감독)
- 산리즈카의 이카로스 (2017년, 다이시마 하루히코 감독)
- 나리타 필드 트립 (2010년, 니나 피셔 & 마로안 엘 자니, 영상 작품)
- 라이엇 - NARITA (1979년)
- 산리츠카 - YOS-MAG (2020년)
- 에도 계 야광 반딧불이 - 아야메 18번(2020년, 각본·연출: 호리코시 료)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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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東京国際空港の建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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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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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70年 千葉の出来事】成田闘争(下) 公共事業のあり方一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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共産党が破防法に基づく調査対象団体であるとする当庁見解
https://www.moj.go.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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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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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戦後70年 千葉の出来事】成田闘争(上) さながら白昼の市街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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産経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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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뉴스
鹿島臨海線 線路上に生コン 燃料輸送ゲリラ?
1978-09-12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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線路内にダンプ 成田燃料輸送を妨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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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新世紀に持ち越した成田空港問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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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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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核派は再共有運動への敵対とテロを自己批判せ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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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里塚物産社長 平野靖識さん 映画監督 代島治彦さん : 地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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過激派、福島にターゲット 不安あおり浸透図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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ドキュメンタリー監督、代島治彦さんに聞く(前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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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ウラカタ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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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里塚のイカロス」代島治彦監督に聞く「あの時代の悪霊を、もう蘇らせたくな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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空から部品や氷が… 航空機の落下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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都心上空飛ぶ羽田便、落下物・騒音に募る不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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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洋経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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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JECTS4 目標は「落下物ゼロ」で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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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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環境対策等の実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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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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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JECTS2 落下物はどのくらいある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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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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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3]
웹사이트
成田空港は今:機能強化策の陰で/中 落下物の防止対策 「対応は発生後」が実情 /千葉
https://mainichi.jp/[...]
2017-07-06
[24]
웹사이트
「航空機落下物被害救済支援制度」の創設について
https://www.naa.jp/j[...]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018-03-30
[25]
뉴스
「成田は不便」は思い込み 払拭へ共同PR 国交省
https://trafficnews.[...]
2015-12-09
[26]
웹사이트
成田空港開港40年:日本の表玄関は今/1 米航空大手デルタの成田離れ 相対的な地位低下懸念 /千葉
https://mainichi.jp/[...]
2018-05-17
[27]
보도자료
大臣会見 前原大臣会見要旨
https://www.mlit.go.[...]
국토교통성
2009-10-13
[28]
뉴스
成田、国際線夏ダイヤは8便減の1428便、羽田響く-LCC比率は約2割に
http://www.travelvis[...]
2014-03-30
[29]
보도자료
空港管理状況
https://www.mlit.go.[...]
국토교통성
[30]
웹사이트
2017年暦年 空港運用状況
https://www.naa.jp/j[...]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018-01-25
[31]
웹사이트
成田空港の明日を、いっしょに
https://www.narita-k[...]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32]
웹사이트
成田空港の更なる機能強化に関する調査報告について(その3)
https://www.narita-k[...]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016-09-27
[33]
웹사이트
『航空と宇宙』2017年1月号「年頭の辞」
http://www.sjac.or.j[...]
日本航空宇宙工業会
2017-01
[34]
웹사이트
2018年3月13日に四者協議会が開催されました。
https://www.narita-k[...]
成田国際空港株式会社
2018-03-13
[35]
웹사이트
成田拡大案 協議会で最終合意
http://www3.nhk.or.j[...]
NHK
2018-03-13
[36]
웹사이트
NAA報告「需要50万回」はデマ 狙いは成田の軍事転用
http://www.zenshin.o[...]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全国委員会
2016-04-25
[37]
웹사이트
三里塚3月決戦に立ち上がろう 農地死守・空港「強化案」白紙撤回へ
http://www.zenshin.o[...]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全国委員会
2018-02-19
[38]
웹사이트
住民無視の「機能強化受け入れ方針」許すな!
http://www.sanrizuka[...]
三里塚芝山連合空港反対同盟(北原派)
2018-01-25
[39]
웹사이트
報告:18年反対同盟旗開き
http://blog.livedoor[...]
三里塚芝山連合空港反対同盟大地共有委員会(2)(旧熱田派)
2018-01-25
[40]
웹사이트
成田空港機能強化案 運用時間拡大やめて 住民ら国交省に署名提出 畑野、山添氏出席
https://www.jcp.or.j[...]
しんぶん赤旗
2018-02-21
[41]
웹사이트
千葉)成田機能強化、深まる苦悩 横芝光 騒音下の住民
https://www.asahi.co[...]
2017-12-30
[42]
웹사이트
成田空港の足元で何が起きているか 急速に進む移民社会化と自然死するむら
https://news.yahoo.c[...]
2019-09-17
[43]
웹사이트
多古町「移転共生の会」 瓜生弘道さん 元空港公団職員 前田伸夫さん : 成田開港40年 それぞれの思い
https://www.yomiuri.[...]
読売新聞社
2018-05-21
[44]
웹사이트
成田空港は今:機能強化策の陰で/上 移転の選択肢なく 飛行ルートの「谷間地区」 /千葉
https://mainichi.jp/[...]
2017-07-05
[45]
웹사이트
報道発表資料:成田国際空港の施設変更許可について~成田国際空港の更なる機能強化に向けて~
https://www.mlit.go.[...]
国土交通省
2020-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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