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대한민국 국군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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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의 대한민국 국군 포로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게 포로로 잡혔으나 송환되지 못한 국군 병사들을 의미한다. 1951년 정전 협정 체결 이후 포로 명단이 공개되었고, 1953년 휴전 협정에 따라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국군 포로가 북한에 억류되었다. 유엔군사령부는 8만 2천여 명의 국군 포로 및 실종자를 추정했지만, 북한은 8,300여 명만 송환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 포로 송환을 위해 노력해 왔으며, 1994년 조창호 소위의 탈출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80여 명이 귀환했다. 현재까지도 5만~7만 명의 국군 포로가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들의 생사 확인과 송환은 남북 관계와 국제 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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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대한민국 국군 포로 | |
---|---|
개요 | |
전쟁 | 한국 전쟁 |
분쟁 | 한국 전쟁 중 국군 포로 문제 |
배경 | |
원인 | 한국 전쟁 중 조선인민군의 국군 포로 억류 |
교전 | 한국 전쟁 |
관련 문서 | |
관련 문서 | 귀환 용사 납북자 문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권 국군포로 송환법 |
주요 인물 | |
관련 인물 |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문재인 윤석열 |
상세 내용 | |
발생 시점 | 한국 전쟁 발발 직후 |
관련 법률 | 국군포로의 송환 및 대우 등에 관한 법률 |
주요 내용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억류된 국군 포로 문제 포로 송환 지연 및 억류 귀환 후 사회 부적응 및 차별 정부의 소극적인 대처 |
영향 | 대한민국 사회의 반공주의 심화 국군 장병의 사기 저하 남북 관계의 지속적인 긴장 국군포로 송환법 제정 |
추가 정보 | |
기타 | 국군포로 송환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6.25 전쟁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
2. 6.25 전쟁과 국군 포로 문제의 기원
6.25 전쟁 당시 전쟁 포로 대우와 송환 문제는 복잡했다.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 모두 1949년 제네바 협약을 준수해야 했지만, 실제로는 예외를 적용했다.[6]
북한은 한국군 포로를 제네바 협약의 보호 대상이 아닌 "자국민에 대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동족으로 간주하고 "재교육"하여 북한군에 자원 편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했다. 많은 한국군 포로들이 강제로 북한군에 편입되었다.
1951년 포로 교환 협상에서 유엔군은 88,000명의 한국군 실종을 추산했지만, 공산군은 7,712명만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이 불일치에 항의했고, 공산군은 유엔 공습과 질병으로 인한 사망, "범죄"를 인정한 포로의 석방 등을 이유로 제시했다.[6]
유엔군은 소수의 전직 포로만 귀환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북한군 징집을 공산군 측 명단 축소의 원인으로 비난했다. 공산군은 북한군 복무 포로들이 자원했다고 주장했다.[6]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인의 북한 비자발적 송환에 반대했고, 1953년 6월 한국의 25,000명 반공 포로 일방 석방은 협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8]
1953년 7월 한국 휴전 협정 체결 후, 유엔군은 75,823명의 공산군 포로를 송환했지만, 공산군은 12,773명의 유엔군 포로만 돌려보냈다. 한국군 송환자는 8,726명으로, 실종자의 10% 미만이었다.[6]
북한은 남한 포로를 "해방 전사"로 간주하며 1949년 제네바 협약 적용을 거부했다.[13] 이들은 최전방 전투 부대나 건설 부대에 배치되어 위험한 작업에 동원되었다.[6]
중국군은 초기 "관용 정책"을 따르다 1952년 7월 제네바 협약을 준수하기로 했다.[6]
조창호 소위는 1952년 탈출 시도 실패 후 13년형을 선고받고 6년간 정치범 수용소에 복역하며 가혹한 환경을 경험했다.[14]
미군 포로 사망률은 40%에 달했고, 식단과 의료 환경은 열악했다.[15] 1951년부터 중국은 포로 대우 개선을 시도하고, 포로 수용소 설립 및 세뇌 교육을 실시했다.[16][17] 1952년 포로 올림픽은 선전 행사였지만, 포로들에게는 동료 생존 확인 기회였다.[18]
북한 건설 부대 편입 남한 출신 병사들은 협상 과정에서 포로로 보고되지 않아, 생존 포로 대다수가 송환 또는 중립국 송환 위원회로 인도되었음에도 일부는 포로 교환 사실조차 몰랐다.[19]
2. 1. 전쟁 기간 중 포로 명부
1951년 7월부터 시작된 정전 협정 과정에서 유엔군과 공산군 양측이 각각 포로수용소에 수용하고 있는 포로들의 명부 교환에 합의하였고,[45] 1951년 12월부터 1952년 1월까지 국군 포로 명부가 언론에 보도되었다.[46]- 국군 포로 명부 (1)
- 국군 포로 명부 (2)
- 국군 포로 명부 (3)
- 국군 포로 명부 (4)
- 국군 포로 명부 (5)
- 국군 포로 명부 (6)
- 국군 포로 명부 (7)
- 국군 포로 명부 (8)
- 국군 포로 명부 (9)
- 국군 포로 명부 (10)
- 국군 포로 명부 (11)
- 국군 포로 명부 (12)
- 국군 포로 명부 (13)
- 국군 포로 명부 (14)
- 국군 포로 명부 (15)
- 국군 포로 명부 (16)
- 국군 포로 명부 (17)
- 국군 포로 명부 (18)
- 국군 포로 명부 (19)
- 국군 포로 명부 (20)
- 국군 포로 명부 (21)
3. 휴전 협정과 국군 포로 송환
1953년 휴전 협정이 체결되면서 유엔군과 공산군은 전쟁 포로를 교환했지만, 북한은 송환해야 할 국군 포로 대다수를 송환 대상에서 제외했다.[41]
1949년 제3차 제네바 협약에 따라 전쟁 포로를 대우해야 했지만, 양측 모두 예외를 적용했다.[6] 북한은 한국군을 적군이 아닌 "자국민에 대한 전쟁 범죄"를 저지른 동족으로 여겨 "재교육" 후 북한군에 편입시키는 것을 정당화했다.
1951년 전쟁 포로 교환 협상에서 유엔군은 88,000명의 한국군 실종자를 추산했지만, 공산군은 7,712명만 억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유엔군은 공산군 측의 주장에 항의하며, 많은 한국군 포로들이 북한군에 강제 징집되었다고 비난했다.[6]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 회담에 소극적이었고, 특히 한국인의 북한으로의 비자발적 송환에 반대했다. 1953년 6월 18일, 한국은 25,000명의 반공주의 전쟁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여 협상을 복잡하게 만들었다.[8]
결국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유엔군과 공산군은 송환을 원하지 않는 전쟁 포로들을 중립국 송환 위원회로 넘기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송환된 국군 포로는 8,343명으로, 전체 실종자의 10% 미만이었다.
6.25 전쟁 이후 북한에 억류된 국군 포로의 정확한 생존자 수는 알려져 있지 않다. 대한민국 정부는 현재 북한에 560명의 국군 포로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하지만,[1] 실제 수는 더 많을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9][10][11]
1994년 조창호 소위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80여 명의 국군 포로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40]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 포로 귀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특히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부가 비전향장기수 64명을 북송했지만, 국군 포로 송환에는 뚜렷한 노력을 보이지 않았다는 비판이 있다.
북한은 국군 포로 문제가 비전향 장기수와는 별개이며,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는 모두 자발적으로 북한을 선택한 '해방전사'(인민군)로 편입되었고, 따라서 휴전협정에서 송환한 8,726명 외에는 포로가 없다고 주장한다.
한편, 재미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는 2011년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인권 이사회(UNHCR)에 북한을 상대로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하여, 생존 국군 포로 500여 명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했다.[42]
미국 국방부 기밀 해제 문서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수천 명의 국군 포로와 연합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52][53] 1996년 뉴욕 타임스는 기밀 해제된 문서를 인용하여 북한에 미국군 포로가 있을 가능성을 보도하기도 했다.
3. 1. 관련 통계
1953년 정전 협정 회담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국군 실종자를 '''8만 2,000'''여 명으로 추산했으며, 북한 역시 전쟁 기간 대략 '''1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했지만, 막상 송환 시점이되자 숫자를 터무니없이 줄이고 '''8,343'''명의 국군 포로만 송환하였다.[43]미송환된 실제 국군 포로 추정 수치는 추계(推計)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데 많게는 '''6만 9,000~9만 4,000명''', 적게는 '''2만~4만 1,000'''명으로, 대략 '''4만~5만 명'''으로 추정한다.[44]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특별보고관의 〈유엔북한인권상세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억류한 국군 포로의 수를 '''5만~7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공산 측은 한국전쟁 초기에 '''5만 명'''의 한국군 포로를 전선에서 석방하여 공산군에 강제 편입시킨 바 있었다”고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적시하였다.
또한 공산군 측 역시 휴전회담에서 '''5만여 명'''에 달하는 국군 포로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유엔군 측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현장에서 석방했다”고 주장했다.
다음은 1953년 휴전협정에 의거 송환된 포로 수치이다. (출처: 국방부 발행 국군포로의 실상과 대책 자료, 단위: 명)
구분 | 공산측 → 유엔측 | 유엔측 → 공산측 | ||||
---|---|---|---|---|---|---|
소계 | 한국군 | 유엔군 | 소계 | 북한군 | 중공군 | |
부상병 포로 송환 (리틀 스위치 작전) | 684 | 471 | 213 | 6,670 | 5,640 | 1,030 |
일반 포로 송환 (빅 스위치 작전) | 12,773 | 7,862 | 4,911 | 75,823 | 70,183 | 5,640 |
추가 포로 송환 | 12 | 10 | 2 | 765 | 296 | 469 |
총계 | 13,469 | 8,343 | 5,126 | 83,258 | 76,119 | 7,139 |
4. 북한에 억류된 국군 포로의 삶
북한은 억류된 국군 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이들을 '해방전사'로 간주하여 조선인민군에 편입시켰다고 주장한다.[40] 북한은 휴전협정에 따라 송환한 8,726명의 국군 포로 외에는 단 한 명의 포로도 없다고 주장한다.[40]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국군 포로들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북한에 억류되었다.[41]
1949년 제네바 협약은 군사적 목적으로 포로의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을 제한하고 있지만,[13] 북한은 국군 포로들을 탄광, 철도 및 비행장 수리, 불발탄 처리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에 강제 동원했다.[6][42] 생환 포로들은 '괴뢰군 포로'라는 딱지가 붙은 채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았다고 증언한다.[42]
1994년 북한에서 탈출한 조창호 소위는 미국 의회 증언에서, 탈출 시도 실패 후 정치범 수용소에서 6년간 복역하며 비위생적이고 영양실조에 시달렸다고 밝혔다. 함께 수감된 다른 남한 장교 포로 4명은 모두 수감 중 질병으로 사망했다.[14]
국군 포로들은 북한의 카스트 제도에서 최하층 계급으로 분류되어 국가안전보위부의 감시를 받았다. 이들의 이동과 거주는 외딴 지역으로 제한되었고, 감시는 계속되었다.[21] 이러한 차별은 자녀들에게까지 이어져 직업 선택, 조선로동당 가입, 대학 입학, 군 복무 등에서 불이익을 받았다.[11] 2001년 대한민국으로 탈출한 전 포로 고을원 씨는 자녀들이 포로의 자녀라는 이유로 군대에서 거부당해 탄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22]
미국 국방부 비밀해제 문서에 따르면, 한국 전쟁 당시 수천 명의 국군 포로와 연합군 포로들이 북한에서 소련의 수용소로 보내진 것으로 보고되었다.[52][53]
5. 대한민국 정부와 국제사회의 송환 노력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 포로 문제를 자국민 보호와 관련된 "기본적인 국가적 책임"으로 간주하고, 한국 전쟁 종전 이후 여러 회담에서 북한에 이 문제를 제기해 왔다. 1953년부터 1964년 사이에 대한민국은 국군 포로 송환을 11차례 요구했다.[23][24] 그러나 북한은 국군 포로를 억류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했다.
2000년 6월 15일 남북 정상 회담 이후, 대한민국은 비전향장기수 63명을 북한으로 돌려보냈다. 이는 선의의 표시였지만, 대한민국 정부가 국군 포로나 민간인 납북자들의 귀환을 얻어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았다.[25]
북한은 송환된 비전향장기수들에 대한 보상을 요구하며 국군 포로 문제 논의를 거부했다.[26]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은 김정일에게서 답변을 얻지 못했다.[27]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북한을 자극하는 것에 지나치게 신중하고 국군 포로 송환에 "결단력이 부족하다"는 비판을 받았다.[28][29]
이명박 정부는 국군 포로 및 납북자 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남북 대화의 주요 의제로 제기했다. 북한을 설득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대한민국 통일부 내에 관련 기구를 신설했다.[30][31]
여러 비정부 기구(NGO)들도 대한민국 국군 포로 송환을 촉구했다.
- '''대한적십자사''': 1999년, 북한에 억류된 남한 국민 송환에 관심을 가져달라고 국제 기구에 호소했다.
- '''대한민국 국회''': 2000년 12월 8일, 북한에 억류된 모든 국군 포로 송환 촉구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 '''세계재향군인회''': 1997년 11월, 제22차 총회에서 북한에 억류된 남한 국군 포로 및 납북자 송환 촉구 성명을 발표했다.
- '''국군포로가족회''': 2005년 2월 19일 설립. 2005년 6월 23일, 남북 장관급 회담이 열린 호텔 앞에서 억류 포로 즉각 송환 촉구 기자 회견을 열었다.[32]
- '''국제 한국전쟁 재단 한국전쟁 포로 문제 위원회''': 조창호 소위가 2006년 미국 의회에서 증언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33]
- '''물망초''': 남한 국군 포로를 위한 비영리 단체
6. 북한을 탈출한 국군 포로
1994년 조창호 소위가 북한을 탈출하여 대한민국으로 귀환한 것을 시작으로, 2015년까지 80여 명의 국군 포로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40] 이들은 대부분 북한에서 강제 노역과 차별에 시달렸다고 증언했다.[42]
대한민국 정부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를 540여 명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북한은 국군 포로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41] 북한은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는 모두 스스로 원하여 북한을 선택한 '해방전사'(인민군)이며, 휴전협정에 따라 송환된 8,726명의 국군 포로 외에는 단 한 명의 포로도 없다고 주장한다.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 이후 김대중 정부가 비전향장기수 64명을 북송한 것과 비교하여, 국군 포로와 납북자 송환 문제는 진전이 없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재미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는 2011년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인권위원회(UNHCR)에 북한을 상대로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하여, 억류된 국군 포로의 송환과 인권 탄압 중단을 촉구했다.
탈북 국군 포로들은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군 복무에 대한 소급 급여와 연금을 받지만, 건강 문제와 북한에 남은 가족에 대한 걱정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10년 7월에는 한 국군 포로 출신 탈북자가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되어 요덕 수용소로 보내진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35][36]
2000년에 북한을 탈출한 유영복 씨는 자서전 ''지옥의 별밤 아래''를 출판했고,[37] 2012년에는 ''피눈물: 한국 전쟁 포로의 자유, 가족, 그리고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영어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22] 그는 2013년 유엔 북한 인권 조사 위원회에 전문가 증언을 제공했다.[38]
6. 1. 휴전 이후 귀환자 명단
귀환 연도 | 귀환자 | 계급 | 비고 |
---|---|---|---|
1994년 10월 23일 | 조창호 | 소위 | [47] |
1997년 12월 24일 | 양순용 | 일등병 | |
1998년 9월 30일 | 장무환 | 일등병 | |
1998년 12월 14일 | 김복기, 박동일 | ||
1999년 4월 7일 | 손재술 | ||
1999년 5월 10일 | 허판영 | ||
2000년 3월 31일 | 김기호 | ||
2000년 ?월 ?일 | 유영복 | 일등병 | |
2000년 7월 29일 | 허재석 | 하사 | |
2000년 9월 2일 | 강상권, 김인준, 노준기, 유진호, 허형직 | (가명) | |
2001년 1월 31일 | 박기출, 이기형 | ||
2003년 12월 24일 | 전용일 | 이등병 | |
2004년 4월 30일 | 백종규 | 일등병 | 유골 송환 |
2005년 ?월 ?일 | 장선생 | 중위 | [48][49] |
2011년 | 김모 | [50] |
7. 국군 포로 출신 수기 및 회고록
다음은 6.25 전쟁 국군 포로 출신들의 수기 및 회고록 목록이다.
- 전쟁 기간 중 탈출한 국군 포로
- * 이기봉 - 장백산에서 임진강까지(1976) : 제7보병사단 직할 공병대대 하사 출신
- * 박정인 - 풍운의 별(1990) : 제6보병사단 19연대 소령(작전장교) 출신
- * 최춘영 - 포로의 수기(2003) : 제8보병사단 21연대 대위(정훈장교) 출신
- 포로 교환 때 귀환한 국군 포로
- * 권경호 - 한국전쟁과 국군포로 - 지옥의 증언(1999) : 제2보병사단 32연대 소위(통신장교) 출신
- * 박진홍 - 돌아온 패자 - 6.25 국군포로 체험기(2001) : 제7보병사단 배속 학도병 출신
- * 임익순 - 내 심장의 파편(2013) : 수도사단 26연대 대령(부사단장) 출신
- 정전 후 탈북한 국군 포로
- * 조창호 - 돌아온 사자(死者)(1995) : 육군본부 직할 101포병대대 소위(관측장교) 출신
- * 허재석 - 내 이름은 똥간나새끼였다(2008) : 수도사단 26연대 하사(소총수) 출신
- * 유영복 - 운명의 두 날(2011) : 제5보병사단 27연대 일등병(소총수) 출신
- * 유영복 - 지옥의 별밤 아래(2010) : 제5보병사단 27연대 일등병(소총수) 출신, 유영철이라는 필명으로 출간. 2012년 ''피눈물: 한국 전쟁 포로의 자유, 가족, 그리고 정의를 위한 투쟁''이라는 제목으로 영어 번역 출판.[22]
8. 결론 및 향후 과제
1994년 조창호 소위를 시작으로 2015년까지 80여 명의 국군 포로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40]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파악한 북한 생존 국군 포로는 540여 명, 휴전 후 납북된 민간인도 400여 명으로 추산되는 등, 아직 많은 이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6.25 전쟁 국군 포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남북 관계와 국제사회의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국군 포로 송환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고,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강화해야 한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과거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반성을 통해 국군 포로 문제 해결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북한은 국군 포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한국 전쟁 당시 북한에 남은 국군 포로는 모두 스스로 원하여 북한을 선택해 '해방전사'(인민군)로 편입되었으며, 휴전협정에서 송환한 8,726명의 국군 포로 이외에는 단 한 명의 포로도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1953년 체결된 휴전협정에 따라 전쟁 포로 송환이 이루어졌으나, 수많은 국군 포로들이 송환 대상에서 제외되어 오늘날 북한에 억류된 채 남아있다.[41] 6·25전쟁 국군 포로 문제는 국가가 국군 포로 송환에 필요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반드시 해결되어야 할 사안이다.
고령의 국군 포로 당사자들 가운데 이미 상당수가 사망하였으며, 생존자들도 수명 연한이 얼마 남지 않았다. 더욱이 국군 포로들은 북한 체제의 전체주의적 속성으로 인해 인권적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다.
우리는 북한에 생존해 있는 국군 포로의 생사 확인, 가족 상봉, 송환 문제 해결, 제3국으로 탈북한 국군 포로와 가족의 안전한 송환, 귀환한 국군 포로의 안정적인 정착 지원 등 국군 포로가 처한 상황에 맞는 해결책을 강구해야 한다. 아울러 북한 지역에 있는 국군 유해 발굴 사업도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한편, 재미 국군 포로 송환위원회가 2011년 2월과 4월, 국제형사재판소(ICC)와 유엔 인권 이사회(UNHCR)에 북한을 상대로 고소장과 진정서를 제출하여,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500여 명을 조속히 송환할 것을 촉구했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당시 유엔군사령부가 유엔에 제출한 자료는 6·25전쟁 국군 포로 및 실종자를 8만 2,000여 명으로 추정했고, 북한은 이 중 8,300여 명만 송환했다. 북한에 억류된 7만 명이 넘는 국군 포로들은 '괴뢰군 포로'라는 딱지를 붙이고 불발탄 처리, 탄광의 발파공, 벌목공 등 위험하고 고된 작업을 강요받으며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환 포로들은 증언했다.[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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