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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포로 교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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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포로 교환은 한국 전쟁 휴전 협상 과정에서 핵심적인 쟁점이었다. 공산군 측은 전원 송환을, 유엔군 측은 자유 송환을 주장하며 대립했고,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이 체결되었다. 7월 27일 정전 협정 체결 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우선 송환 희망자 9만 5천여 명이 판문점을 통해 송환되었으며, 송환을 거부한 2만 2천여 명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졌다.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방위 조약 체결 전 휴전을 반대하며 반공 포로 2만 5천여 명을 석방했고, 이는 국제적 문제로 이어졌다. 이후 미국은 이승만의 휴전 동의를 얻어내고, 리틀 스위치 작전과 빅 스위치 작전을 통해 포로 교환이 이루어졌다. 빅 스위치 작전을 통해 유엔군은 75,823명의 공산군 포로를 인도했고, 공산군은 12,773명의 유엔군 포로를 송환했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들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인도되었으며, 최종적으로 21,839명의 공산군 포로가 서방에 남기로 결정했다.

휴전 협정 당시 유엔군은 8만 2천여 명의 국군 실종자를 추산했으나, 실제 송환된 국군 포로는 8,343명에 불과했다. 미송환 국군 포로 추정 수는 2만 명에서 9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며, 이 문제 해결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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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포로 교환
개요
빅 스위치 작전 지도
"[[파일:Operation Big Switch map.png|섬네일|right|빅 스위치 작전 지도]]"
명칭빅 스위치 작전
기간1953년 4월 20일 ~ 1953년 9월 6일
장소판문점
목표한국 전쟁 포로 교환
교전 세력
유엔군미국
대한민국
영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
기타 유엔군 참전국
공산군중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지휘관
유엔군마크 클라크
맥스웰 테일러
공산군정보 없음 (제공된 문서에 명시되지 않음)
결과
결과한국 전쟁 휴전 협정 체결 및 포로 교환 완료
관련 작전
선행 작전리틀 스위치 작전

2. 휴전 협상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면서 유엔과 공산군 측은 휴전 협상을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포로 교환 문제는 가장 큰 쟁점 중 하나였다.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를 즉각 본국으로 송환하는 '자동 송환'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 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라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여 팽팽하게 맞섰다.

포로 송환 열차, 거제포로수용소


이러한 대립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반공 포로들을 일방적으로 석방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국제적인 논란을 일으켰고, 북한 측은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요구했다. 결국 미국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휴전 동의를 얻어냈다.

각 군에서 포로 최고위 계급자는 다음과 같다.

2. 1. 포로 송환 문제

한국전쟁이 국제전으로 확대되면서 유엔과 공산군 측 사이에 휴전 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서 가장 큰 쟁점 중 하나는 포로 교환 문제였다. 공산군 측은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돌려보내는 '자동 송환'을 주장한 반면, 유엔군 측은 포로 개개인의 자유 의사에 따라 송환 여부를 결정하는 '자유 송환'을 주장하여 양측의 입장이 팽팽하게 대립했다.[2]

1953년 6월 8일, 포로 송환 협정이 체결되어 귀국을 원하는 포로는 휴전 후 60일 이내에 송환하기로 합의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1953년 8월 5일부터 9월 6일 사이에 우선 송환 희망자 9만 5천여 명이 판문점에서 송환되었다. 송환을 거부한 포로 2만 2천여 명은 중립국 송환 위원회에 넘겨져 자유 의사에 따라 행선지를 결정하게 되었다.[2]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 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고,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며 6월 18일 0시에 영천, 대구,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7개 포로 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 2만 5천여 명을 석방시켰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문제를 일으켰고, 북한 측은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에게 휴전 동의를 얻었다.

1953년 3월 28일, 마크 W. 클라크 장군의 요청에 따라 부상 및 환자 포로 교환이 제안되었고,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제네바 협약 조항을 이행할 의향을 밝혔다.[2]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은 모든 포로를 즉시 송환하고, 남은 포로들은 중립국에 넘겨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2]

존 C. 다니엘 소장과 이상이 중공군 연락 장교단이 판문점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고,[2] 1953년 4월 20일, 리틀 스위치 작전이 시작되어 거제도 포로수용소 등에서 인민 지원군(PVA) 및 북한 인민군(KPA) 포로를 북쪽으로 수송하기 시작했다.[2]

1952년 10월 이후 처음으로 판문점에서 정전 협상이 재개되었고, 남일 장군은 정전 협정 발효 후 2개월 이내에 귀환 희망 포로 송환, 이후 비송환자는 중립국으로 보내 6개월간 설득 기회를 제공하는 방안을 제안했다.[2] 유엔군은 60일이면 충분하고 비송환자를 한국 밖으로 보낼 필요가 없다고 반박했다.[2]

1953년 5월 7일, 남일은 비송환자를 중립국으로 수송해야 한다는 요구를 철회하고, 중립국 송환 위원회(NNRC) 설치를 제안했다.[2]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대통령과 고위 관계자들은 이 제안을 수용 가능한 정전 협상의 기반으로 판단했다.[2]

이승만 대통령은 정전 협상에 반대하며 한국 통일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길 원했다.[2] 클라크는 이승만을 설득하려 했으나, 이승만은 한국 비송환자 석방을 거부하며 인도를 중립국으로 인정하지 않았다.[2]

1953년 5월 13일, 유엔군은 인도에게 송환 위원회 의장과 운영 병력을 제공하고, 설명 기간을 60일로 제한하며, 기간 종료 후 남은 비송환자를 석방할 것을 제안했다.[2] 남일은 이를 거부했다.[2]

1953년 5월 25일, 유엔군은 인도에서 모든 무력과 운영 인력을 제공하는 경우 5개국 관리 합의를 수용하겠다고 제안했다.[2] 1953년 6월 4일, 중국과 북한은 이 제안에 동의했고, 1953년 6월 8일 포로에 대한 합의가 서명되었다.[2]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정부의 계획 하에 약 25,000명의 반공주의 조선인민군(KPA) 포로가 유엔군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2] 유엔군 협상단은 즉시 남일에 이 사실을 알렸지만, 북한은 유엔군이 이승만과 공모했다고 비난했다.[2]

이승만의 완강함과 포로 석방은 중국인민지원군(PVA)과 KPA가 금성 전투를 시작하게 했다.[2] 클라크는 이승만에게 미국이 명예로운 조건으로 정전을 체결할 것이며, 한국군은 스스로 싸울 수 없다고 조언했다.[2] 이승만은 정전 협정에 서명할 수 없지만 지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2]

1953년 7월 초,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상호 방위 조약, 경제 원조, 한국군 확장 등의 약속을 받고 정전을 방해하지 않겠다고 합의했다.[2]

1953년 7월 10일, 판문점에서 협상이 재개되었고, 1953년 7월 27일 한국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2]

2. 2. 이승만의 반공포로 석방

이승만 대통령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전에는 휴전할 수 없고, 반공 애국 동포를 북한으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2] 이러한 입장에 따라 1953년 6월 18일 0시, 영천, 대구, 논산, 마산, 부산, 거제도 등 7개의 포로 수용소에 있던 반공포로 2만 5천여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시켰다.[2] 이승만은 한국 측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으면 휴전 교섭 파기를 위해 보다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켰고, 북한 측에서는 포로들을 재수용하라고 요구했다.[2] 이에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경제 원조,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에게 휴전 동의를 얻었다.[2]

1953년 6월 18일, 대한민국 정부의 적극적인 계획과 조율 하에 약 25,000명의 호전적인 반공주의 조선인민군 포로가 부산, 마산, 논산, 상무대의 UN군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했다.[2] 포로 수용소의 경비병으로 배치된 한국군 보안 부대는 탈출을 막는 데 거의 기여하지 않았으며, 한국군 경비병과 포로 사이에 실제 공모가 있었다.[2] 1953년 6월 17일에는 약 35,400명의 한국 비송환자가 수용소에 있었고, 그달 말까지는 8,600명만 남았다.[2] 탈출 시도 중 61명의 포로가 사망하고 116명이 부상을 입었다.[2]

서울에서 석방된 반공주의 북한군 포로


UN군 협상단은 즉시 남일에게 탈출 사실을 알리고 그 책임을 한국 정부에 돌렸다.[2] 그러나 북한은 UN군이 미리 계획을 알지 못했고 이승만과 "고의적으로 공모"하여 이를 실행하지 않았다고 믿기를 거부했다.[2]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협상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하지 않았다.[2]

클라크1953년 6월 21일, 자신이 비송환자 석방에 대해 알거나 돕지 않았다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해야 했다.[2] 클라크는 이승만이 언제든지 비송환자를 석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승만이 클라크에게 알리지 않고 UN군 통제 하의 한국군을 포함하는 단독 행동을 취하지 않겠다는 개인적 약속을 위반한 것에 대해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이승만에게 말했다.[2]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메시지는 클라크의 비난을 되풀이하며 이승만이 정전을 체결할 UN군의 권위를 신속하게 받아들이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 다른 조치가 취해질 것이라고 암시했다.[2]

이승만의 완강함과 포로의 일방적 석방은 중국인민지원군조선인민군금성 전투로 알려진 일련의 공격을 시작하게 했다.[2] 클라크는 나중에 "공산주의자들의 공세의 주된 이유 중 하나, 아니 유일한 이유는 한국군에게 '피의 코'를 안겨주고, '북진' - 북으로 가자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그들과 세계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2]

1953년 6월 22일, 클라크와 제8군 사령관 맥스웰 D. 테일러 장군은 세계 언론이 이승만의 포로 일방 석방에 대해 비판적인 논평을 한 후 긴장했다고 느꼈던 이승만을 만났다.[2] 클라크는 미국이 명예로운 조건으로 정전을 체결할 것을 결심했으며, 무력으로 공산군을 한국에서 몰아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며, 한국군은 현재 공격적이든 방어적이든 스스로 싸울 수 없고 더 큰 임무를 수행할 준비를 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2] 이승만은 정전 협정에 서명할 수 없지만, 이는 한국의 분단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지지할 수 있다고 밝혔다.[2]

1953년 7월 초, 이승만은 미국으로부터 다음의 다섯 가지 주요 약속을 받았다.[2]

순서미국의 약속 내용
1정전 후의 미-한 상호 방위 조약 약속
2한국이 장기적인 경제 원조와 2억달러의 첫 할부금을 받을 것이라는 보장
3미국과 대한민국이 실질적인 성과가 없을 경우 90일 후에 정치 회담에서 철수한다는 합의
4한국군 확장의 계획 실행에 대한 합의
5정치 회담이 열리기 전에 공동 목표에 대한 고위급 미-한 회담을 개최한다는 합의



이승만은 정전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합의의 대가로 한국에서 중국인민지원군 병력 철수와 정전 서명 전 한국 통일에 대한 주장을 포기했다.[2] 그는 또한 한국 영토에 인도군이 상륙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설명 기간 동안 한국 비송환자와 중국인 포로를 비무장 지대로 수송하는 것에 대한 반대도 포기했다.[2]

3. 리틀 스위치 작전 (Operation Little Switch)

'''리틀 스위치 작전'''(Operation Little Switch)은 1953년 4월부터 5월까지 6.25 전쟁 기간 동안 부상당하거나 병든 포로들을 교환한 작전이다. 유엔군은 북한군 5,194명, 중국 인민지원군 1,030명, 민간인 억류자 446명 등 총 6,670명을 송환했다. 공산군 측은 한국군 471명, 미군 149명을 포함한 유엔군 포로 684명을 석방했다.[2]

1953년 3월 28일, 마크 W. 클라크 장군이 부상 및 환자 포로 교환을 제안하자, 김일성펑더화이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은 제네바 협약 조항을 이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2]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은 양측이 "적대 행위 중단 직후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를 즉시 송환하고, 남은 포로들은 중립국에 넘겨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을 보장해야 한다"고 발표했다.[2]

4월 6일, 존 C. 다니엘 소장과 이상이 중공군 연락 장교단이 판문점에서 회담을 가졌다. 유엔군은 판문점에서 즉시 시설 건설을 시작하고, 합의 후 7일 이내에 하루 500명의 포로 인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고 밝혔다. 양측은 교환할 포로의 이름과 국적 목록을 교환하고 세부 사항을 논의하기로 합의했다.[2] 4월 11일, 판문점에서 10일 이내에 교환을 시작하기로 합의했으며, 중국과 북한은 한 번에 25명씩 100명을, 유엔군은 하루 500명을 인도하기로 했다.[2]

4월 20일, 리틀 스위치 작전이 시작되었다. 거제도 등에서 인민 지원군 및 북한 인민군 포로들이 북쪽으로 수송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포로들은 셔츠에 "P"자가 새겨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새 의류 지급을 거부하거나, DDT 가루로 몸을 닦는 것을 거부하는 등 유엔군을 당황하게 했다. 일부는 음식이 독극물에 중독되었다고 주장하며 단식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2]

RAAF 간호사가 부상당한 RSAAF 출신 전쟁 포로를 후송하는 항공기 안에서


유엔군은 당초 5,800명 이상의 포로를 송환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마크 W. 클라크 장군은 선의를 보여주기 위해 더 많은 인원을 포함하기로 결정했다.[2]

4월 23일, 중국과 북한은 당초 제출한 600명 규모를 초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4월 26일, 이형근 장군은 갑자기 교환 몫을 완료했다고 통보했다. 유엔군 측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이형근 장군은 이를 일축했다. 결국 5월 3일, 유엔군은 마지막 포로 그룹을 인도했다.[2]

최종 집계 결과, 유엔군은 총 6,670명의 포로를 송환했고, 공산군 측은 684명의 유엔군 포로를 송환했다. 한편, 물라 작전의 영향으로 일부 공산군 포로들은 귀환을 거부하기도 했다.[2]

4. 빅 스위치 작전 (Operation Big Switch)

'''빅 스위치 작전'''(Operation Big Switch)은 한국 전쟁의 모든 잔류 포로들을 송환한 작전이다. 1951년 공산 진영과 UN군 간의 휴전 회담에서 포로 송환은 주요 난제였다. 공산 진영은 모든 포로를 본국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주장했고, UN은 계속 남길 원하는 포로가 있을 경우 이를 허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2]

회담이 이어진 지 2년 후, 중화인민공화국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한 발 물러서면서 1953년 7월 27일에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빅 스위치 작전은 1953년 8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되었으며, 공산군 포로 75,823명(북한군 70,183명, 중공군 5,640명)과 유엔군 포로 12,773명(한국군 7,862명, 미군 3,597명, 영국군 946명)이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공산군 중 22,600명 이상이 송환을 거부했는데, 이들 대부분은 국공 내전에서 공산군에 맞서 싸웠던 중화민국 군인이었다. 유엔군 측에서도 미군 23명, 영국군 1명, 한국군 333명이 송환을 거부하였다. 송환 거부 포로에게는 90일간 의사 변경 기간이 주어졌고, 이 기간 동안 중국 병사 137명이 중국으로, 미군 2명과 한국군 8명이 서방으로 돌아갔다. 나머지 한국군 325명, 미군 21명, 영국군 1명은 공산 진영에 남았다.[6][7]

1953년 3월 28일, 마크 W. 클라크 장군의 요청에 따라 부상 및 환자 포로 교환을 제안하자, 김일성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제네바 협약 조항을 이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2] 3월 30일,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은 양측이 "적대 행위 중단 즉시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를 즉시 송환하고, 남은 포로들은 중립국에 넘겨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을 보장해야 한다"고 성명을 발표했다.[2]

4월 5일, 클라크는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연락 장교 회담을 제안하고, 비송환 문제에 대한 공산주의 측의 처리 방식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유엔군에 제공할 것을 요청했다. 클라크와 참모들은 부상 및 환자 이송에 대한 연락 장교 회담을 준비하면서, 교환될 각 포로를 판문점으로 데려와 건강 상태와 치료에 대한 의료 표식을 제공하고, 표시가 없는 의류를 제공하는 계획을 수립했다.[2]

4월 6일, 존 C. 다니엘 소장과 이상이 중공군 연락 장교단이 판문점에서 만났다. 유엔군은 판문점에서 시설을 건설하고 7일 이내에 하루 500명의 포로 인도를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다니엘은 양측이 교환할 포로의 이름과 국적 목록을 넘겨주고 행정적 세부 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장교를 임명할 것을 제안했다. 리는 공산군이 제네바 협약 109조와 110조에 따라 자격이 있는 모든 부상 및 환자를 송환하기를 원한다고 지적했다.[2] 4월 7일, 다니엘은 중국과 북한에 유엔군이 두 조항에 따라 자격이 있는 모든 포로를 송환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개인의 의사에 반하여 송환하지 않는다는 단서를 적용한다고 통보했다. 4월 11일, 판문점에서 10일 이내에 교환을 시작하기로 합의했으며, 중국과 북한은 한 번에 25명씩 100명을, 유엔군은 하루 500명을 인도하기로 했다.[2]

4월 20일, 유엔군은 '리틀 스위치 작전'을 시작했다. 거제도 등에서 인민 지원군(PVA) 및 북한 인민군(KPA) 포로를 부산을 거쳐 문산으로 수송했다. PVA/KPA 환자들은 귀향 준비 과정에서 유엔군을 당황시키려 했다. 일부는 "P"자 표시가 없는 의류 지급을 거부하거나, DDT 가루 소독을 거부했다. 포로들은 상륙함에 승선할 때 선전 메시지가 숨겨진 물품을 버리고 미국을 비난했다. 부산에서는 병원 시설 검사 권리를 요구했고, 일부 PVA는 음식이 독극물에 중독되었다고 주장하며 단식 투쟁을 벌였다. 마지막 기차를 타고 문산으로 갈 때, 많은 포로들이 자신들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려고 했다.[2]

유엔군은 5,800명 이상의 PVA/KPA 포로를 송환할 수 있었다. 마크 W. 클라크 장군은 유엔군의 선의를 보여주고 중국과 북한이 총 송환자 수를 늘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추가 인원 포함에 동의했다.[2]

리틀 스위치 작전은 4월 20일에 시작되었다. 유엔군 부상자와 환자들은 판문점에 도착 후 문산으로 이송되었다. 일부는 일본으로 이송되었고, 한국 환자들은 한국의 기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2]

4월 23일, 중국과 북한은 600명 규모를 초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유엔군은 더 많은 적 포로를 추가했지만, 4월 26일, 이형근 장군은 교환 몫을 완료했다고 밝혔다. 다니엘 제독이 송환 가능한 유엔군 부상자와 환자가 더 있다고 항의하자, 이 장군은 이를 근거 없는 비난이라고 일축했다. 유엔군은 5월 3일, 마지막 포로 그룹 인도를 완료했다.[2]

최종 집계 결과 유엔군은 총 6,670명(조선인민군 5,194명, 중국인민지원군 1,030명, 민간인 억류자 446명)을 송환했다. 이 환자들 중 357명이 들것 환자였다. 중국과 북한은 684명의 유엔군 부상자와 환자(미국인 149명 포함)를 송환했다.[2]

4. 1. 중립국 송환 위원회

중립국 송환 위원회는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의 최종 의사를 확인하고 처리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 위원회는 인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스위스, 스웨덴 5개국으로 구성되었으며, 1953년 9월부터 활동을 시작했다.[2]

5. 포로 통계

(리틀 스위치 작전)6844712136,6705,6401,030일반 포로 송환
(빅 스위치 작전)12,7737,8624,91175,82370,1835,640추가 포로 송환12102765296469총계13,4698,3435,12683,25876,1197,139



1953년 3월 28일, 마크 W. 클라크 장군의 요청에 따라 부상 및 환자 포로 교환을 제안하자, 북한 지도자 김일성과 중국 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제네바 협약 조항을 완벽하게 이행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2] 같은 해 3월 30일,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장은 양측이 "적대 행위 중단 직후 송환을 주장하는 모든 포로를 즉시 송환하고, 남은 포로들은 중립국에 넘겨 포로 송환 문제에 대한 공정한 해결을 보장해야 한다"고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2]

4월 6일, 존 C. 다니엘 소장과 이상이 중공군 연락 장교단이 판문점에서 만났으며, 4월 11일에는 판문점에서 10일 이내에 교환을 시작하기로 합의했다. 중국과 북한은 한 번에 25명씩 100명을, 유엔군은 하루 500명을 인도하기로 했다.[2]

4월 20일은 유엔군이 명명한 '리틀 스위치 작전'의 시작일로 정해졌다. 작전 준비를 위해 거제도 및 기타 해안 섬에서 인민 지원군(PVA) 및 북한 인민군(KPA) 포로를 북쪽으로 수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PVA/KPA 환자들은 귀향을 준비할 때조차 "P"자가 셔츠에 새겨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의류 지급을 거부하거나, DDT 가루로 몸을 닦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등 유엔군을 당황시켰다. 또한, 본토로 수송하기 위해 대기 중인 상륙함에 타면서는 미국을 "굶주림, 억압, 한국 국민에 대한 야만적인 행위"로 비난하는 선전 메시지가 숨겨진 물품을 버리기도 했다.[2]

유엔군이 귀환 자격이 있는 모든 PVA/KPA 포로를 모았을 때, 5,800명 이상이 송환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마크 W. 클라크 장군은 유엔군의 선의를 보여주고 중국과 북한이 총 송환자 수를 늘리도록 유도하기 위해 새로운 수치를 도입했다.[2]

5. 1. 미송환 국군 포로 문제

1953년 6.25 전쟁 정전 협정 회담 당시 유엔군사령부는 포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국군 실종자를 8만 2,000여 명으로 추산했으며, 북한 역시 전쟁 기간 대략 10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선전했지만, 막상 송환 시점이 되자 숫자를 터무니없이 줄이고 8,343명의 국군 포로만 송환하였다.[8]

미송환된 실제 국군 포로 추정 수치[9]는 추계(推計) 방식에 따라 달라지는데, 많게는 6만 9000~9만 4000명, 적게는 2만~4만 1000명으로, 대략 4만~5만 명으로 추정한다. 2014년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COI) 특별보고관의 〈유엔북한인권상세보고서〉에서는 북한이 억류한 국군 포로의 수를 5만~7만 명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휴전협정 당시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 대장은 “공산 측은 한국전쟁 초기에 5만 명의 한국군 포로를 전선에서 석방하여 공산군에 강제 편입시킨 바 있었다”고 회고록 《다뉴브강에서 압록강까지》에서 적시하였다.

또한 공산군 측 역시 휴전회담에서 5만여 명에 달하는 국군 포로들의 행방을 추궁하는 유엔군 측에게 “인도적 차원에서 현장에서 석방했다”고 주장했다.

참조

[1] 서적 Korea - where the American century began Hardie Grant Books
[2] 서적 United States Army in the Korean War: Truce Tent and Fighting Front https://history.army[...] United State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3] 웹사이트 Operations Big and Little Switch @ korea.mil http://korea50.army.[...]
[4] 웹사이트 Operation big switch @ koreacoldwar.com http://www.koreacold[...]
[5] 문서 이 전쟁에서 양측 포로 중 유일한 장성급 장교이다.
[6] 웹인용 Operations Big and Little Switch @ korea.mil https://web.archive.[...] 2017-11-29
[7] 웹사이트 Operation big switch @ koreacoldwar.com http://www.koreacold[...]
[8] 뉴스 잊혀진 영웅⑤ 北 "돌아갈 사람" 묻더니, 기관총 난사…'괴뢰군 포로' 딱지 대물림 https://n.news.naver[...]
[9] 간행물 金씨 3代는 국제형사재판소에 보내야 할 범죄자들 http://monthly.chos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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