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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의 임시 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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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6.25 전쟁 중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각각 임시 수도를 운영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대한민국은 서울에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으며, 1953년 휴전 협정 체결 이후 서울로 환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서울 수복 이후 평양에서 강계로 임시 수도를 옮겼다.

2. 대한민국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수도를 옮겼다. 전쟁 발발 3일만인 6월 28일 조선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였고, 대구 인근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되자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1951년 1·4 후퇴로 다시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갔다. 2개월 뒤인 1951년 3월 16일 서울을 재수복하였지만 전선과 가까워 함락될 가능성을 고려해 부산을 계속 임시수도로 유지했다. 이때부터 현재의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휴전협정이 발효된 1953년 7월 27일 이후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하게 된다.[1]

2. 1. 임시 수도 부산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정했다. 전쟁 발발 3일 만인 6월 28일 조선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했고, 낙동강에 전선이 형성되면서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1]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했지만, 1951년 1·4 후퇴로 정부는 다시 부산으로 이전했다. 1951년 3월 16일 서울을 재수복했으나, 전선과 가까워 함락 가능성을 고려해 부산을 임시 수도로 유지했다.[1] 이후 군사분계선 부근에서 전선이 고착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휴전협정이 발효된 1953년 7월 27일 이후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했다.[1]

임시 수도 기간 동안 대전, 대구, 부산 중 한 곳으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다.[1] 현재 부산에는 임시수도기념관이 있다.

2. 2. 서울 수복과 환도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이 발발하자 서울에서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을 임시 수도로 삼았다. 인천상륙작전으로 1950년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였으나, 1951년 1·4 후퇴로 다시 정부가 부산으로 내려갔다.[1] 1951년 3월 16일 서울을 재수복하였지만 전선이 군사분계선 부근에 가까웠기 때문에 또 다시 함락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부산을 계속 임시수도로 유지했다.[1] 대한민국 정부는 한국휴전협정이 발효된 (1953년 7월 27일) 후에야 1953년 8월 15일 서울로 환도하게 된다.[1]

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인민군은 평양에서 철수를 준비하였다.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38선을 넘고, 10월 7일에는 국제 연합군도 북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였고, 그 즈음 중화인민공화국6.25 전쟁에 개입하여 중공군압록강을 건넜다. 12월 4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은 평양에서 철수하였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는 평양으로 환도하였다.

3. 1. 임시 수도 강계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와 조선인민군은 평양에서 철수를 준비하였다. 10월 1일 대한민국 국군38선을 넘고, 10월 7일에는 국제 연합군도 북진하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강계를 임시 수도로 정하고 평양에서 철수하였다.[2]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평양을 점령하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10월 1일 이후 대한민국과 국제 연합군의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밀리자 도움을 요청 받았으나 거절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만주국으로 옮겨 망명 정부를 수립하라고 지시했다.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만주국으로 옮기고, 환자노인 등은 소비에트 연방으로 가도록 했다.[2]

김일성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10월 19일 평안북도 대유동 근처로 이동하여 중국에 참전을 요청했다. 김정일만주의 장춘으로 피신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뇌부도 평양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중국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었다.

3. 2. 평양 점령과 통치권 논란

1950년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한 후, 평양의 통치권을 둘러싼 논란이 발생했다.[2] 미국트루먼 대통령은 전쟁 중 대한민국의 통치권이 38선 이북인 평양에는 미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10월 21일 평양 시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미국이 평양을 통치하도록 하였다.[2]

3. 3. 외세의 개입

소련의 스탈린은 1950년 10월 1일 이후 대한민국과 국제 연합군에 밀린 김일성의 지원 요청을 거절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만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2]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북한 땅을 포기하고 만주에 망명 정부를 세우려 했으며, 환자와 노인 등은 소련으로 보내려 했다.[2]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38선을 넘자 6.25 전쟁 개입을 결정했다. 1950년 10월 19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이 평양을 점령할 즈음 중공군압록강을 건너 참전했다. 중공군은 10월 25일 온정리 전투를 시작으로 제1차 청천강 전투, 제2차 청천강 전투를 잇따라 일으켰다. 이로 인해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연합군은 1950년 12월 4일 평양 철수를, 12월 15일부터 24일까지 흥남 철수를 감행했다.

김일성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덕천을 거쳐 1950년 10월 19일 평안북도 대유동 근처로 피신하여 중국에 참전을 요청했다. 김정일은 만주의 장춘으로 피신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뇌부도 평양을 버리고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으로 들어가 지원을 기다렸다.

3. 4. 김일성과 수뇌부의 피난

1950년 9월 28일 대한민국 국군과 국제 연합군이 서울을 수복하자, 김일성은 평양에서 평안남도 덕천으로 도주했다. 이후 10월 19일에는 평안북도 대유동 근처로 피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참전을 요청하였다. 한편, 김정일만주 장춘으로 피신했다.[3]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뇌부는 평양을 떠나 중화인민공화국 하얼빈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의 지원을 기다렸다.

참조

[1] 뉴스 충청 60년, 대전일보 60년-⑤ 6·25 전쟁 중의 대전 천도론 http://www.daejonilb[...] 대전일보
[2] Youtube 중국의 참전으로 원자 폭탄 투하까지 고려하는 미국. 세계 100대 다큐멘터리 선정 "한국전쟁 10부작" | 5부 후퇴 KBS 20100622 방송 https://www.youtube.[...] 2010-06-22
[3] 웹사이트 김일성의 패주 행각 http://www.sisapress[...] 199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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