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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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AC/DC는 1973년 맬컴 영과 앵거스 영 형제가 결성한 호주 출신의 록 밴드이다. 1970년대 초 펍 록을 기반으로 하드 록, 블루스 록, 헤비 메탈 등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선보였으며, 단순하고 강력한 사운드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 1980년 보컬 본 스콧의 사망 이후 브라이언 존슨을 영입하여 활동을 이어갔으며, 2014년 맬컴 영의 은퇴, 2017년 맬컴 영의 사망 등 멤버 교체와 위기를 겪었지만, 2018년 브라이언 존슨, 필 러드, 클리프 윌리엄스가 복귀하여 재결합했다. 현재 앵거스 영, 브라이언 존슨, 스티비 영, 클리프 윌리엄스, 필 러드, 크리스 체이니, 맷 로그가 멤버로 활동하고 있으며, "하이 볼티지", "백 인 블랙", "하이웨이 투 헬" 등 다수의 음반을 발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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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데뷔한 시드니 출신 밴드 식 퍼피스는 데모곡 우승과 데뷔 앨범 발매, "All the Same"의 차트 진입, WWE 테마곡 사용 등으로 인지도를 쌓았으며, 보컬 교체 후에도 활동을 이어가 2025년 새 앨범 발매를 앞두고 있다. - AC/DC - 앵거스 영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호주로 이민 간 앵거스 영은 형 맬컴 영과 AC/DC를 결성, 교복과 깁슨 SG 기타를 트레이드마크로 블루스 기반의 파워풀한 기타 연주와 폭발적인 무대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세계적인 록 밴드로 성장하는 데 기여한 기타리스트이다. - AC/DC - 맬컴 영
맬컴 영은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호주로 이민 온 음악가이자 AC/DC의 리듬 기타리스트 겸 작곡가로, 형 앵거스 영과 함께 밴드를 결성하여 37년간 활동하며 음악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으나, 건강 악화와 치매 진단으로 활동을 중단하고 사망했다.
AC/DC - [음악 그룹]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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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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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시드니, 오스트레일리아 |
장르 | 하드 록 블루스 록 로큰롤 헤비 메탈 |
음반 목록 | 음반 및 싱글 노래 |
활동 기간 | 1973년–현재 (2016–2018년 활동 중단) |
레이블 | 앨버트 애틀랜틱 ATCO 이스트 웨스트 일렉트라 에픽 컬럼비아 |
스핀오프 | 마커스 훅 롤 밴드 |
현재 멤버 | 앵거스 영 필 러드 클리프 윌리엄스 브라이언 존슨 스티비 영 |
이전 멤버 | 참조 |
공식 웹사이트 | acdc.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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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어 정보 | |
그룹 이름 | AC/D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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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뉴사우스웨일스주 시드니, 오스트레일리아 |
장르 | 블루스 록 하드 록 헤비 메탈 스타디움 록 |
활동 기간 | 1973년 - 현재 |
레이블 | 앨버트 애틀랜틱 앳코 일렉트라 이스트 웨스트 EMI 에픽 |
공식 웹사이트 | AC/DC 공식 웹사이트 |
멤버 | 앵거스 영 (기타) 브라이언 존슨 (보컬) 클리프 윌리엄스 (베이스) 필 러드 (드럼) 스티비 영 (기타) |
이전 멤버 | 참조 |
한국어 정보 | |
그룹 이름 | AC/D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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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오스트레일리아 |
활동 시기 | 1973년 ~ 현재 |
레이블 | 콜롬비아 레코드 에픽 레코드 애틀랜틱 레코즈 EMI 엘렉트라 레코드 앨버트 레코드 앳코 레코드 이스트 웨스트 레코드 |
장르 | 하드 록 블루스 록 로큰롤 |
구성원 | 앵거스 영 스티브 영 브라이언 존슨 필 러드 클리프 윌리엄스 |
전 구성원 | 맬컴 영 본 스콧 마크 에번스 사이먼 라이트 크리스 슬레이드 |
웹사이트 | www.acdc.com |
2. 역사
1973년 11월, 맬컴과 앵거스 영 형제는 시드니에서 베이시스트 래리 반 크리트, 보컬리스트 데이브 에번스, 전 마스터스 어프렌티스의 드러머 콜린 버지스와 함께 AC/DC를 결성했다.[269] 맬컴과 에번스는 이전에 뉴캐슬을 기반으로 2년 동안 활동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의 멤버였다.[1] 앵거스는 친구들과 잼 세션을 하던 탠트럼이라는 밴드를 시작했었다.[4] 영 형제는 1973년 스튜디오 전용 밴드였던 마커스 후크 롤 밴드에 합류했지만,[5] 앨범 발매 전에 탈퇴했다.
맬컴과 앵거스는 여동생 마거릿이 재봉틀의 AC 어댑터에서 "AC/DC"라는 이니셜을 본 후 밴드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3] "AC/DC"는 "교류/직류" 전기를 의미하는 약어이며, 형제들은 이 이름이 그들의 음악에 대한 원기적인 에너지와 힘으로 움직이는 공연을 상징한다고 느꼈다.[273] "AC/DC"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Acca Dacca"로 구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 번에 한 글자씩 발음된다.[274][275] AC/DC 밴드 이름은 "AC"와 "DC"를 구분하는 고압 기호로 스타일화되었다.[276]
AC/DC는 1973년 12월 31일 시드니의 체커스 나이트클럽에서 첫 공식 공연을 했다.[3] 이 무렵, 앵거스 영은 그의 특징적인 교복 무대 의상을 채택했다. 그 아이디어는 그의 여동생 마가렛의 것이었다.[1] 앵거스는 스파이더맨, 조로, 고릴라, 슈퍼앵글이라는 슈퍼맨의 패러디 등 다른 의상들을 시도했다.[271] 초창기에, 밴드의 대부분의 멤버들은 어떤 형태로든 화려하거나 새틴 의상을 입었다.
1974년 중반까지, 밴드는 강한 라이브 명성을 쌓았고, 이것은 방문한 루 리드를 위한 지원 슬롯으로 이어졌다.[3] 1974년 어느 날 마이클 처그의 추천으로 멜버른의 베테랑 프로모터 마이클 브라우닝이 그의 클럽인 하드 록에서 연주하기 위해 밴드를 예약했다. 그는 그들의 글램 록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았고 에번스가 밴드에 적합하지 않은 가수라고 느꼈지만, 영 형제의 기타 연주에 감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밴드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매니저였던 데니스 러플린은 그만뒀고, 그들은 돈 없이 애들레이드에 갇혔다. 브라우닝은 그들을 보석하기로 동의했고 하드 록에서 다른 공연을 위해 그들을 예약했다. 공연 후, 그들은 그들의 형 조지와 해리 반다의 협력으로 그를 새로운 매니저로 데려가기로 동의했다.[277] 영 형제는 멜버른 밴드 스카이훅스에 의해 이미 채택되었던 글램 록 이미지를 버리고 더 단단한 블루스 록 사운드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에번스가 그룹에 적합한 프론트맨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272] 이 무렵, 그들은 또한 그들이 하드 록에서 자주 연주했던 멜버른으로 기지를 옮겼다.
1974년 1월, 밴드는 EMI 스튜디오에서 반다 & 영을 프로듀서로 하여 세션을 녹음했다.[3] 세션 일주일 후, 버지스는 만취로 해고되었고,[1] 그 후 반 크라이드트도 교체되었다.[1] 밴드는 1974년 6월 알버트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었다.[1] 1974년 7월 22일, 밴드의 첫 싱글 "캔 아이 시트 넥스트 투 유 걸"이 발매되었으며, 이 노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켄트 뮤직 리포트 싱글 차트에서 50위권에 들었다.[1]
2. 1. 결성 및 초기 활동 (1973년 ~ 1974년)
1973년 11월, 맬컴과 앵거스 영 형제는 시드니에서 베이시스트 래리 반 크리트, 보컬리스트 데이브 에번스, 전 마스터스 어프렌티스의 드러머 콜린 버지스와 함께 AC/DC를 결성했다.[269] 맬컴과 에번스는 이전에 뉴캐슬을 기반으로 2년 동안 활동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라는 밴드의 멤버였다.[1] 앵거스는 친구들과 잼 세션을 하던 탠트럼이라는 밴드를 시작했었다.[4] 영 형제는 1973년 스튜디오 전용 밴드였던 마커스 후크 롤 밴드에 합류했지만,[5] 앨범 발매 전에 탈퇴했다.맬컴과 앵거스는 여동생 마거릿이 재봉틀의 AC 어댑터에서 "AC/DC"라는 이니셜을 본 후 밴드 이름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3] "AC/DC"는 "교류/직류" 전기를 의미하는 약어이며, 형제들은 이 이름이 그들의 음악에 대한 원기적인 에너지와 힘으로 움직이는 공연을 상징한다고 느꼈다.[273] "AC/DC"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Acca Dacca"로 구어적으로 알려져 있지만 한 번에 한 글자씩 발음된다.[274][275] AC/DC 밴드 이름은 "AC"와 "DC"를 구분하는 고압 기호로 스타일화되었다.[276]
AC/DC는 1973년 12월 31일 시드니의 체커스 나이트클럽에서 첫 공식 공연을 했다.[3] 이 무렵, 앵거스 영은 그의 특징적인 교복 무대 의상을 채택했다. 그 아이디어는 그의 여동생 마가렛의 것이었다.[1] 앵거스는 스파이더맨, 조로, 고릴라, 슈퍼앵글이라는 슈퍼맨의 패러디 등 다른 의상들을 시도했다.[271] 초창기에, 밴드의 대부분의 멤버들은 어떤 형태로든 화려하거나 새틴 의상을 입었다.
1974년 중반까지, 밴드는 강한 라이브 명성을 쌓았고, 이것은 방문한 루 리드를 위한 지원 슬롯으로 이어졌다.[3] 1974년 어느 날 마이클 처그의 추천으로 멜버른의 베테랑 프로모터 마이클 브라우닝이 그의 클럽인 하드 록에서 연주하기 위해 밴드를 예약했다. 그는 그들의 글램 록 이미지에 만족하지 않았고 에번스가 밴드에 적합하지 않은 가수라고 느꼈지만, 영 형제의 기타 연주에 감명을 받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밴드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매니저였던 데니스 러플린은 그만뒀고, 그들은 돈 없이 애들레이드에 갇혔다. 브라우닝은 그들을 보석하기로 동의했고 하드 록에서 다른 공연을 위해 그들을 예약했다. 공연 후, 그들은 그들의 형 조지와 해리 반다의 협력으로 그를 새로운 매니저로 데려가기로 동의했다.[277] 영 형제는 멜버른 밴드 스카이훅스에 의해 이미 채택되었던 글램 록 이미지를 버리고 더 단단한 블루스 록 사운드를 추구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에번스가 그룹에 적합한 프론트맨이 아니라는 것에 동의했다.[272] 이 무렵, 그들은 또한 그들이 하드 록에서 자주 연주했던 멜버른으로 기지를 옮겼다.
1974년 1월, 밴드는 EMI 스튜디오에서 반다 & 영을 프로듀서로 하여 세션을 녹음했다.[3] 세션 일주일 후, 버지스는 만취로 해고되었고,[1] 그 후 반 크라이드트도 교체되었다.[1] 밴드는 1974년 6월 알버트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었다.[1] 1974년 7월 22일, 밴드의 첫 싱글 "캔 아이 시트 넥스트 투 유 걸"이 발매되었으며, 이 노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켄트 뮤직 리포트 싱글 차트에서 50위권에 들었다.[1]
2. 2. 본 스콧 시대 (1974년 ~ 1980년)
1974년 9월, 더 발렌타인스(1966~1970)와 프래터니티(1971~1973)에서 보컬로 활동했던 본 스콧[3]이 친구 빈스 러브그로브의 추천과 조지 영의 제안으로 AC/DC에 합류했다.[278][267][279] 스콧은 오디션을 통해 리드 싱어로 승진할 때까지 밴드의 운전사로 일했다.[280][15]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 온 스콧은 영 형제들처럼 블루스 음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작곡가이자 드러머로서의 경험도 있었다.[4] 스콧의 합류로 AC/DC는 데뷔 싱글 〈Can I Sit Next to You, Girl〉 / 〈Rockin' in the Parlour〉를 재작성 및 재녹음했다. 음악 저널리스트 이안 맥퍼레인에 따르면, 스콧의 합류로 "[그들의] 노동 계급 스타일, 부기 록 사운드와 소박한 유머가 제자리를 찾았다."[3]
1974년 10월, AC/DC는 첫 스튜디오 음반 《High Voltage》를 녹음했다.[1] 이 음반은 1975년 2월 17일 싱글 〈Baby, Please Don't Go〉 / 〈Love Song〉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점 발매되었다.[10] 단 10일 만에 완성된 이 음반은[281] 스콧이 가사를 추가하고 영 형제가 작곡한 기악곡을 기반으로 했다. 몇 달 안에 밴드의 라인업은 안정화되었고, 스콧, 영 형제, 베이시스트 마크 에번스, 드러머 필 러드가 참여했다. 1975년 12월 1일, AC/DC는 두 번째 스튜디오 음반 《T.N.T.》를 발매했고, 이 음반 역시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서만 발매되었다.[3]
1975년, 밴드는 선버리 팝 뮤직 페스티벌에서 공연할 예정이었지만, 헤드라이너였던 딥 퍼플의 매니지먼트 및 크루와의 몸싸움 이후 공연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1]
1974년과 1977년 사이에 AC/DC는 몰리 멜드럼의 《카운트다운》에 정기적으로 출연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성공적인 밴드 중 하나가 되었다. 1977년 4월 3일 공연은 20년 이상 동안 그들의 마지막 생방송 TV 출연이었다.[281] 그 해 말에 그들은 싱글 〈It's a Long Way to the Top〉을 발매했고, 이를 위해 밴드가 플랫베드 트럭 뒤에서 노래를 따라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유명한 홍보 비디오가 만들어졌다.[18]

1976년, AC/DC는 애틀랜틱 레코드와 국제 계약을 체결했다.[3] 4월 런던에 도착했을 때,[4] 백 스트리트 크롤러와의 예정된 투어는 그룹의 기타리스트 폴 코소프의 사망으로 취소되었다.[1] AC/DC는 지역 팬층을 구축하기 위해 더 작은 공연장에서 공연을 재개했고, 1976년 6월부터 ''사운즈'' 잡지가 후원하는 록업 유어 도터스 투어를 시작했다.[19] 당시 펑크 록이 등장하여 ''NME''와 ''멜로디 메이커''를 포함한 주요 영국 음악 주간지의 페이지를 장악했다. AC/DC는 영국 언론에 의해 때때로 펑크 록 운동과 연관되어 있었지만, 그들은 펑크 록을 일시적인 유행이라고 생각하며 싫어했다.
전 세계적으로 배포된 첫 번째 AC/DC 앨범은 1976년 ''하이 볼티지''라는 제목으로 발매되었으며, 1976년 5월 애틀랜틱을 통해 발매되었다.[3] 세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더티 디즈 돈 더트 칩''은 1976년 9월~11월에 발매되었다. 호주와 유럽 버전 모두에서 발매되었으며, 트랙 목록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했다.[21][22]
스웨덴 순회공연을 마치고 런던으로 돌아와 마퀴에서의 레지던시 동안 새로운 출석 기록을 세웠다.[1] 그들은 유럽과 호주 전역을 계속 순회했다. 1977년 1월, 그들은 네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렛 데어 비 록''의 녹음을 시작했다. 같은 해 초, 그들은 영국으로 돌아와 블랙 사바스와 함께 유럽 투어를 시작했다. 스콧과 오지 오스본은 빨리 친구가 되었지만, 각 그룹의 다른 멤버들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한 사건에서 기저 버틀러는 4월 스웨덴 공연 중 말콤에게 접이식 칼을 꺼내 들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설명은 다르지만, AC/DC는 나머지 투어에서 제외되었다.[24]

1977년 5월, 마크 에반스는 앵거스와의 "음악적 차이"와 성격 충돌로 해고되었다.[1] 그의 자리는 영국 밴드 홈(1970~1974)과 밴딧(1976)의 전 멤버인 클리프 윌리엄스가 베이스 기타리스트로서 대체하였다.[3]
AC/DC의 첫 미국 라디오 방송은 1975년 잭슨빌 방송국 WPDQ-FM/WAIV-FM의 빌 바틀렛을 통해 이루어졌다. 2년 후, 그들은 캐나다 그룹 목시의 오프닝 밴드로 1977년 7월 27일 텍사스 오스틴에서 첫 콘서트를 열었다. 그들은 테드 뉴전트, 애로스미스, 키스, 스틱스, UFO, 블루 오이스터 컬트와 같은 록 밴드들을 지원하며 미국 스타디움 순회 공연을 경험했고, 칩 트릭과 공동 헤드라이너로 공연하기도 했다.
AC/DC는 다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파워리지''를 1978년 5월 5일에 발매했다.[26] ''파워리지''의 유일한 싱글은 "록 앤 롤 데미네이션"(1978년 6월)이었다.[3] 파워리지 투어 중 글래스고의 아폴로 극장에서의 공연은 녹음되어 ''이프 유 원트 블러드 유브 갓 잇''(1978)으로 발매되었다.[27]

1979년, 그룹은 프로듀서 로버트 존 "머트" 랭과 함께 여섯 번째 스튜디오 앨범 ''하이웨이 투 헬''을 녹음했고, 1979년 7월 27일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200 차트에서 20위 안에 드는 첫 번째 앨범이 되었고, 결국 17위에 올랐으며,[28] AC/DC를 하드 록 밴드의 최고 순위에 올려놓았다. ''하이웨이 투 헬''은 경솔하고 코믹한 가사에서 좀 더 중심적인 록 테마로 바뀌었고, 백킹 보컬을 더 강조했지만 여전히 AC/DC의 시그니처 사운드인 크고 단순하며 힘찬 리프와 그루브한 백비트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29]
1980년 2월, 멤버들은 스콧이 드럼 대신 보컬을 맡아 일곱 번째 스튜디오 앨범 ''백 인 블랙'' 작업을 시작했다.[30] 2월 18일, 스콧은 런던 캠든 타운의 더 뮤직 머신에서 밤새도록 술을 마신 후 친구 알리스터 키니어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의식을 잃었다. 경찰에 따르면, 키니어는 스콧이 알코올의 영향에서 벗어나도록 차 안에서 밤새도록 자게 두었다.[31] 2월 19일 저녁 스콧을 깨울 수 없게 되자 키니어는 그를 킹스 칼리지 병원(캠버웰)으로 급히 데려갔지만, 스콧은 도착하자마자 사망 선고를 받았다. 사망 원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으로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32] 스콧의 가족은 그가 어렸을 때 이주했던 서호주 프리맨틀에 그를 묻었다.[33]
2. 3. 브라이언 존슨 시대 (1980년 ~ 2016년)
본 스콧(Bon Scott)의 사망 이후, 멤버들은 잠시 해체를 고려했다. 그러나 스콧의 부모님은 그가 밴드 활동을 계속하기를 원했을 것이라고 조언했고, 멤버들은 계속해서 활동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보컬을 찾기 시작했다. 여러 후보들을 고려한 끝에, 밴드는 전 조디(Geordie) 가수 브라이언 존슨(Brian Johnson)을 오디션에 초대했고, 그는 밴드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30] 존슨은 아이크 & 티나 터너(Ike & Tina Turner)의 "넛부시 시티 리미츠(Nutbush City Limits)"와 ''렛 데어 비 록(Let There Be Rock)''의 "홀 로타 로지(Whole Lotta Rosie)"를 불렀다.[35] 앵거스는 나중에 스콧 자신이 존슨의 노래 실력을 칭찬했었다고 회상했다.[36]1980년 3월 29일, 맬컴은 존슨에게 밴드 합류를 제안했고, 가수는 매우 놀랐다. 스콧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밴드는 그를 모방하는 보컬리스트를 원하지 않았다.[1] 존슨은 4월 1일에 AC/DC의 리드 보컬리스트로 공식 발표되었다.[37] 존슨과 함께 밴드는 스콧과 함께 시작했던 ''백 인 블랙(Back in Black)''의 작곡을 완성했다. 스콧의 사망 몇 달 후, 바하마의 컴퍼스 포인트 스튜디오(Compass Point Studios)에서 녹음이 진행되었다. 이 앨범은 역대 두 번째로 많이 팔린 음반이자 하드 록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싱글로는 "헬스 벨스(Hells Bells)", "유 슈크 미 올 나이트 롱(You Shook Me All Night Long)", "록 앤 롤 에인트 노이즈 폴루션(Rock and Roll Ain't Noise Pollution)"과 타이틀곡이 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에서 1위,[38] 미국에서는 4위에 올랐으며, 612주 동안 ''빌보드(Billboard)'' 200 차트에 머물렀다.[28]

AC/DC는 1979년 12월 9일 파리에서 녹화된 첫 번째 공연 실황 영화인 ''AC/DC: 렛 데어 비 록(AC/DC: Let There Be Rock)''을 1980년 9월 1일에 발매했다.[41] 밴드의 여덟 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포 조즈 어바웃 투 록 위 샐류트 유(For Those About to Rock We Salute You)''는 1981년 11월 23일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Billboard)'' 200 차트에서 처음으로 1위를 차지했으며,[28] 두 개의 싱글 "렛츠 겟 잇 업(Let's Get It Up)"과 타이틀곡이 발매되었으며, 영국 차트에서 각각 13위와 15위를 기록했다.[38]

1983년, 필 라드의 알코올 중독과 마약으로 인한 편집증 증세가 심각해지면서 밴드 내부에 갈등이 생겼고, 차기 앨범 녹음이 이미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해고되었다. 후임으로는 NWOBHM 시대에 활동했던 A II Z 등의 활동으로 알려진 사이먼 라이트(Simon Wright)가 영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밴드가 자체 프로듀싱한 『정복자(Flick Of The Switch)』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이전 작품만큼 성공하지 못했고, 어떤 평론가는 "똑같은 앨범을 9장 만든 것"이라고 비꼬았다.[44] 이후 밴드는 한동안 부진을 겪게 된다.
1985년, 『파리 위의 벽(Fly On The Wall)』을 발매했다. 프로듀서로는 영 브라더스(Young brothers)가 참여했다. 1986년, 스티븐 킹 감독 영화 『크리스티나(地獄のデビルトラック)』의 사운드트랙 『후가 누구를 만들었나(Who Made Who)』를 발매했다.
1988년, 오스트레일리아 음반 산업 협회(ARIA)의 ARIA 명예의 전당(ARIA Hall of Fame)에 선정되었다.[53] 같은 해, 프랑스에서 새 앨범 『블로우 업 유어 비디오』 녹음을 시작했다. 프로듀서는 초기 작품을 담당했던 해리 반다와 조지 영이었다. 이 앨범은 『백 인 블랙』에 이어 큰 히트를 기록했다(영국 최고 4위, 미국 최고 12위).
같은 해, 해당 앨범 발매 투어를 오스트레일리아 퍼스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4월, 유럽 공연 종료 후 말콤 영이 알코올 중독 치료에 전념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밴드를 떠났다. 대타는 영 형제의 조카인 스티비 영이 맡았다.

또한 사이먼 라이트가 디오의 새 앨범 녹음에 참여하기 위해 탈퇴했다. 후임은 베테랑 세션 드러머인 크리스 슬레이드였다.

투어 종료 후 다음 작품 제작에 착수했다. 프로듀서는 애로스미스와 본 조비와의 작업으로 유명한 브루스 페어번이었다. 1990년, 『레이저스 에지(The Razors Edge)』를 발매했다. 미국에서는 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며 전작을 뛰어넘는 대히트를 기록했다(영국 최고 4위, 미국 최고 2위).

이 작품은 이혼 소송 중이던 브라이언이 작곡에 참여하지 못했고, 모든 곡을 영 형제가 작곡했다. 또한 같은 해,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주연 영화 「라스트 액션 히어로」의 사운드트랙에 "Big Gun"을 제공했다.
1994년, 필 럿드(Phil Rudd)가 복귀했다. 1995년, 블랙 크로우스(Black Crowes)와 슬레이어(Slayer)의 작업으로 알려진 릭 루빈(Rick Rubin)을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앨범 『볼브레이커(Ballbreaker)』을 발매했다. 이 앨범 또한 미국에서 최고 4위를 기록하는 히트 앨범이 되었다.
1997년, 본 스콧(Bon Scott)을 위한 헌정으로 제작된 5장짜리 CD 박스 세트 『본파이어 ~본 스콧에게 바치는 노래~(Bonfire)』를 발매했다.
2000년, 조지 영(George Young)을 프로듀서로 맞이하여 앨범 『스티프 어퍼 립(Stiff Upper Lip)』을 발매했다 (미국에서는 최고 7위를 기록했다).
2003년, 과거에 발매된 앨범의 디지털 리마스터 버전이 발매되었다. 2003년 후반, AC/DC는 록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에 헌액되었다.[201]
2008년 10월, 약 8년 만의 스튜디오 앨범 『악마의 얼음(Black Ice)』을 발매했다. 동시에 선행 싱글 "Rock'n Roll Train"이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호주를 비롯해 미국, 영국, 일본(洋楽 차트) 등 29개국에서 1위를 차지했다.
전 세계 초기 출하량은 약 500만 장을 기록했으며,[232] IFPI의 2008년도 전 세계 연간 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2위를 차지했다.[233]

2010년 블랙 아이스 월드 투어(Black Ice World Tour)가 끝날 무렵, 맬컴은 폐암 진단을 받았다. 초기 단계에서 치료를 받았고, 수술은 성공적이었으며 암 조직이 제거되었다. 또한 특정되지 않은 심장 문제가 있어 인공 심박 조율기(Artificial cardiac pacemaker)를 이식받았다.[108]
2. 4. 맬컴 영의 탈퇴와 사망, 그리고 밴드의 위기 (2014년 ~ 2017년)
2014년 4월, 맬컴 영이 심각한 질병으로 더 이상 공연을 할 수 없게 되자, 팬들은 그룹 해체 가능성을 추측했다.[109] 하지만 브라이언 존슨은 맬컴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밴쿠버로 돌아가 16번째 스튜디오 앨범인 ''록 오어 버스트(Rock or Bust)'' 녹음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110] 7월, AC/DC는 앨범 녹음을 마쳤고 스티비 영이 맬컴을 대신해 스튜디오 작업에 참여했다고 발표했다.[111] 9월 23일, AC/DC 멤버들은 맬컴이 공식적으로 은퇴했음을 확인했다.[112] 맬컴이 그룹과 함께한 마지막 공연은 2010년 6월 28일 스페인 빌바오에서였다.[113] 2014년 11월 28일, 6년 만의 새 앨범, ''록 오어 버스트''가 발매되었다. 이 앨범은 스티비 영이 합류하여, 처음으로 맬컴 없이 제작되었다.[237]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곡들은 앵거스와 맬컴의 공동 작곡으로 표기되었다. 이 앨범은 오스트레일리아,[116] 캐나다,[117] 독일,[118] 영국[38]에서 1위를 차지했다. 밴드는 또한 스티비 영이 맬컴을 대신하여 록 오어 버스트 월드 투어(Rock or Bust World Tour)를 진행할 것이라고 발표했다.[119]2014년 11월 6일, 필 러드의 자택에 대한 경찰 급습 이후 살인 위협, 메탐페타민 소지,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기소되었다.[120] AC/DC 멤버들은 ''록 오어 버스트''(Rock or Bust) 홍보 투어를 계속 진행할 것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러드가 참여할지 여부나 여전히 멤버인지 여부는 밝히지 않았다.[121] 이후, 필 러드는 거주지인 뉴질랜드에서 지인 남성 2명에 대한 살해를 청부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자택에서는 마약도 압수되었다.[234] 사건의 영향으로 필이 재판과 조사 때문에 예정되어 있던 월드 투어를 중단하게 되었고, 대타로 크리스 슬레이드가 복귀했다.[235][236] 2015년 4월, 러드는 마약 및 살인 위협 혐의를 인정했다.[123] 그 직후, 밴드 웹사이트에는 러드가 슬레이드로 교체되었다는 내용이 게시되었다.[124] 2015년 7월 9일, 러드는 8개월의 집행 유예를 선고받았다.[125]
2016년 3월 7일, 밴드는 브라이언 존슨의 의사가 즉각적인 투어 중단을 명령함에 따라 록 오어 버스트 월드 투어의 마지막 10회 공연이 연기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계속 투어를 진행하면 완전한 청각 상실 위험이 있었다.[126] 4월, 브라이언 존슨이 오랫동안 앓아왔던 청력 장애가 악화되어 의사의 진찰/치료 권고를 받아 투어를 중단했고, 액슬 로즈 (건즈 앤 로지스)가 대타로 활동했다.[238][239] 건즈 앤 로지스(Guns N' Roses)의 프런트맨 액슬 로즈가 2016년 투어 일정의 나머지 기간 동안 리드 보컬로 합류한다고 발표되었다.[127]


2016년 7월, 클리프 윌리엄스는 잇따른 멤버 교체로 인해 활동 의욕을 잃고 투어 종료 후 밴드를 떠나 음악계에서 은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243] 클리프 윌리엄스는 ''Gulfshore Life''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40년 동안 해왔던 일이지만, 이번 투어를 마치면 투어와 녹음에서 물러날 것입니다. 맬컴을 잃고, [러드]와의 일, 그리고 이제 [존슨]과의 일까지, 상황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직감적으로 이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언급했다.[128] 록 오어 버스트 월드 투어가 끝날 무렵, 그는 탈퇴를 확인하는 비디오 성명을 발표했다.[129] 휴식기에 들어가기 전 그의 마지막 AC/DC 공연은 2016년 9월 20일 필라델피아에서였다.[130] 2016년 투어를 마친 후 AC/DC는 휴식기에 들어갔다.
2017년 10월 22일, 조지 영이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31] 얼마 지나지 않은 2017년 11월 18일, 치매로 투병 중이던[114] 맬컴 영이 사망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향년 64세.[244]
2. 5. 재결합과 현재 (2018년 ~ 현재)
2018년 8월, 전 멤버 브라이언 존슨과 필 러드가 밴드와 다시 작업하고 있다는 추측이 있었다. 밴쿠버의 더 웨어하우스 스튜디오 근처에서 그들이 목격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132] 2018년 12월, 존슨과 클리프 윌리엄스가 함께 있는 사진이 공개되면서 윌리엄스도 밴드에 합류했음을 시사했다.[133] 2020년 9월 30일, AC/DC는 앵거스 영, 스티비 영과 함께 존슨, 러드, 윌리엄스의 복귀를 공식 발표했다.[134] 브라이언 존슨의 청각 문제는 청각 전문 제조업체인 "에이시어스(Ausias)"가 개발한 최신 장비로 해결되었다.[246]2020년 9월 28일, 밴드는 소셜 미디어에 티저 비디오를 게시했다.[135] 10월 1일, AC/DC는 새 노래 "샷 인 더 다크"의 일부를 공개했다.[136] 10월 7일, 밴드는 11월 13일에 새 스튜디오 앨범 ''파워 업''을 발매하고, "샷 인 더 다크"를 첫 싱글로 공개했다.[137] 앨범은 2018년 8월~9월에 밴쿠버의 더 웨어하우스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고, 201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139][140] ''파워 업''은 미국과 영국을 포함한 전 세계 21개국에서 차트 1위를 기록했다.[248]
2023년 10월 2일, AC/DC는 인디오에 "하이 볼티지 다이브 바(High Voltage Dive Bar)"라는 다이브 바를 오픈했다.[141] 10월 7일, 인디오의 엠파이어 폴로 클럽에서 열린 파워 트립 음악 페스티벌에서 공연했는데, 이는 7년 만의 공연이었다.[142] 맷 로그가 러드를 대신하여 드럼을 연주했다.[144] 밴드는 2024년 또 다른 투어를 암시했고,[145] 뮌헨 시장 디터 라이터는 2024년 6월 12일 올림픽 스타디온에서 공연을 예약했다고 확인했다.[146] 창립 멤버인 드러머 콜린 버지스가 2023년 12월 16일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47]

2024년 2월 6일, 밴드는 소셜 미디어에 티저를 게시했다.[148] 2월 12일, 파워 업 투어가 발표되었고, 제인스 어딕션의 베이시스트 크리스 채니가 윌리엄스를 대신하게 되었다.[150] 투어의 유럽 공연은 5월 17일에 시작하여 8월 17일에 종료되었으며, 더 프리티 레클리스가 오프닝을 맡았다.[151] 2024년, 8년 만에 개최된 유럽 투어는 하루 만에 150만 장의 티켓이 매진되었다.[250] AC/DC는 50주년을 맞아 2024년 3월 15일, 6월 21일, 9월 27일에 전체 음반 목록을 골드 바이닐로 재발매했다.[152][153][154]

3. 음악 스타일
AC/DC의 음악 스타일은 초기 글램록의 영향을 잠시 받았지만, 주로 오스트레일리아 펍록에 기반을 두고 있다.[1][3] 1970년대 초 빌리 소프의 그룹 아즈텍스의 로비 로이드가 개척한 스타일[156]로, "펍 관객들은 피를 원했다"는 밴드의 언급처럼, "진정한 오스트레일리아 펍 사운드를 재현"하고자 했다.[4] 글렌 A. 베이커는 그들의 음악을 "갈비뼈를 부수고, 피를 얼리고, 뇌를 손상시키는, 허튼소리 없는, 천둥 같은 록"이라고 표현했다.[160]
올뮤직의 스티븐 토마스 얼와인은 AC/DC의 음악이 "더러운" 기타 리프, "으르렁거리는" 보컬, 그리고 "중독성 있고, 앤세믹한" 후크를 사용한다고 평가했다.[158] 데이비드 마르체세는 밴드의 단순한 사운드가 드러머의 베이스 드럼과 스네어 드럼 연주, 베이시스트의 꾸준한 다운피킹 8분 음표 연주, 앵거스 영의 "명확한 구조와 약간의 스윙, 광적인" 리드 기타, 그리고 말콤 영의 "추진력 있는" 리듬 기타로 구성된다고 설명했다.[159]
말콤 영은 마샬 슈퍼 베이스 헤드를 사용하여 리듬 기타를 증폭시켰는데, 이는 그의 시그니처 기타 톤을 정의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60] 1978년부터 1980년까지는 마샬 2203 100와트 마스터 볼륨 헤드를 사용하여 ''파워리지''와 ''백 인 블랙'' 앨범에서 "약간 더 왜곡되고 어두운" 기타 톤을 만들어냈다.[160]
AC/DC의 음악은 하드록,[163] 블루스록, 헤비메탈[164] 등 다양하게 묘사되지만, 밴드 스스로는 "그저 록 음악 밴드일 뿐"이라고 말한다. 알렉시스 페트리디스는 그들의 음악이 "날카롭고 의도적으로 기본적인 블루스록"이며, 유머러스한 성적 암시와 로큰롤에 대한 가사가 특징이라고 평가했다.[166] 음악 학자 로버트 맥팔랜드는 밴드의 사운드를 영 형제의 헤비록 기타, 겹쳐진 파워 코드, 강렬한 보컬로 정의했다.[159]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에 걸쳐 번영을 누린 하드록, 특히 "블루스를 기반으로 한 묵직하고 견고한 로큰롤" 부분을 더욱 원시적으로 추출하여 철저하게 구현한 음악을 지향하며 데뷔부터 현재까지 경질적이고 투박하며 심플한 로큰롤을 중심으로 연주해 왔다.
1970년대 후반, 펑크록 붐으로 들끓는 영국에서 많은 하드록 밴드가 사라지는 가운데, AC/DC는 살아남는 데 성공했다. 이는 밴드가 영국 전역에서 열렬한 팬을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이며, 팬이나 음악 잡지 등으로부터 오리지널 펑크와 동일시되었다는 측면도 있었다. 특히 라이브 공연은 펑크적인 인상이 강했고, 본 스콧의 공연은 섹스 피스톨즈의 조니 로튼을 강하게 연상시켰다. 앵거스 영은 관객에게 엉덩이를 드러내는 퍼포먼스로 악명이 높았다.
1980년 전후에는 "세계에서 콘서트로 인해 사망자가 가장 많은 밴드"로 기네스북에 인정받았다.
4. 구성원
잉글랜드 게이츠헤드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잉글랜드 런던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미국 산타모니카
미국 플로렌스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웨일스 카마르선
미국 캘리포니아
오스트레일리아 시드니
스코틀랜드 킬리뮤어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
웨일스 론다 캐넌 타프
잉글랜드 맨체스터
미국 인디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