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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워드 마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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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J. 하워드 마셜은 미국의 기업인이자 변호사, 학자였다.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나 예일 로스쿨을 졸업하고, 법조인과 학자로서 경력을 쌓았다. 뉴딜 정책에 참여하여 내무부 차관보를 지냈으며, 석유 기업인으로 활동하며 여러 석유 회사의 임원을 역임했다. 코흐 인더스트리의 지분을 소유하기도 했다. 세 번의 결혼을 했으며, 안나 니콜 스미스와의 결혼과 유산 분쟁으로도 유명하다. 1995년 사망 후, 유산 분쟁과 모교 기부 약속 분쟁이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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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하워드 마셜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4년의 마셜
1954년의 마셜
본명제임스 하워드 마셜 2세
출생일1905년 1월 24일
출생지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사망일1995년 8월 4일
사망지미국 텍사스주 휴스턴
학력하버포드 칼리지 (문학사)
예일 대학교 (법학사)
직업기업인, 정부 관료, 변호사, 법학자
배우자엘리너 피어스 (1931년 결혼, 1961년 이혼)
베티 보해넌 (1961년 결혼, 1991년 사별)
안나 니콜 스미스 (1994년 결혼)
자녀제임스 하워드 마셜 3세
E. 피어스 마셜

2. 생애

제임스 하워드 마셜 2세는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에서 태어나 퀘이커 배경에서 성장했다. 하버포드 칼리지와 예일 로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예일 대학교에서 법학을 가르치고 연구하며 법적 실재론 분야에 기여했다.[1][2]

뉴딜 정책 시기에는 미국 내무부에서 활동하며 석유 산업 규제 정책 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1][5][6] 이후 민간 분야로 돌아와 스탠다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애슐랜드 오일, 시그널 오일 & 가스 등 여러 주요 석유 기업에서 임원으로 활동하며 경력을 쌓았다.[7]

특히 코크 인더스트리와의 관계는 그의 후기 경력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레이트 노던 오일 주식회사를 통해 코크 인더스트리의 주요 주주가 되었으며,[9] 이후 회사 경영권을 둘러싼 가족 간 분쟁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흐 형제를 지지했으며, 이는 그의 재산 상속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마셜의 1926년 하버포드 칼리지 졸업사진


제임스 하워드 마셜 2세는 펜실베이니아주 저먼타운에서 태어나 퀘이커 교도로 자랐다.[1]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뉴타운에 있는 퀘이커교 계열 사립 고등학교인 조지 스쿨을 다녔다. 이후 퀘이커 학교인 하버포드 칼리지에 진학하여 인문학을 전공하고 1926년에 졸업했다. 조지 스쿨과 하버포드 칼리지 재학 시절, 그는 학교 신문을 편집하고 토론팀 주장을 맡았으며, 미식축구에서는 올 아메리카 선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프로 선수 빌 틸든의 지도를 받아 테니스 선수로도 활동했다.[1]

1928년 예일 로스쿨에 입학하여 1931년 마그나 쿰 라우데로 졸업하였다.[1] 예일 로스쿨 재학 중에는 예일 로 저널의 사례 편집자로 활동했으며, 법경제학의 선구자인 월턴 헤일 해밀턴과 함께 공부했다.[1]

2. 2. 법조인 및 학자 경력

1931년 예일 로스쿨을 마그나 쿰 라우데급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졸업 후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모교 예일 대학교 법학대학원에서 보조 학장(Assistant Dean)으로 근무하며 상법, 금융, 절차 관련 과정을 지도하였다. 이 시기 그는 영향력 있는 법적 실재론(Legal Realism) 학파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논문을 발표했다.[2] 미래의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이 될 윌리엄 O. 더글러스와 함께 1932년 "파산 행정의 사실적 연구와 몇 가지 제안"이라는 논문을 공동 집필했다.[3] 또한 노먼 마이어스(Norman Meyers)와 함께 1931년 "석유 생산의 법적 계획"이라는 제목의 논문 두 편을 발표했다.[4] 이 연구들은 당시 석유 산업에서 통제되지 않은 생산으로 인해 발생하던 극심한 경기 순환 문제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며 주목받았다.

법적 실재론은 뉴딜 정책 지지자들 사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마셜의 연구 역시 정부의 관심을 끌었다. 1933년 마셜은 예일 대학교를 떠나 해럴드 L. 잌스 내무부 장관 밑에서 차관보로 임명되어 뉴딜 정책에 참여했다. 그는 석유 산업 공정 경쟁 규약(Code of Fair Competition for the Petroleum Industry, 1933) 초안을 작성했고,[5] 이후 미국 연방 대법원이 전국 산업 부흥법(NIRA)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리자, 마셜은 주 간 석유 거래를 규제하여 불법적인 '핫 오일(hot oil)' 유통을 막고 유가 안정을 도모하는 코널리 핫 오일 법 (1935)의 입안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1] 잌스 장관은 당초 정부가 직접 석유 최저 가격을 설정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마셜은 주 간 상거래로 운송되는 합법 생산 석유에 대한 통관 증명서 발급을 의무화하는 규제 방식을 제안하여 관철시켰다.[6]

1935년 정부를 떠나 민간 분야로 자리를 옮겨,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스탠다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Standard Oil of California, 현재 셰브론)의 사장 케네스 R. 킹스버리(Kenneth R. Kingsbury)의 특별 변호사로 활동했다. 1937년에는 스탠다드 오일의 외부 법률 자문을 맡고 있던 로펌 Pillsbury Madison Sutro(현재 Pillsbury Winthrop Shaw Pittman)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

2. 3. 석유 기업인 활동

1935년 마셜은 정부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의 스탠다드 오일 오브 캘리포니아(현재 셰브론) 사장 케네스 R. 킹스버리의 특별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1937년에는 해당 회사의 외부 변호사 업무를 담당하던 로펌 필스버리 매디슨 수트로(Pillsbury Madison Sutro, 현재 Pillsbury Winthrop Shaw Pittman)의 파트너 변호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인 1941년, 그는 다시 정부의 부름을 받아 워싱턴 D.C.로 가서 전쟁 석유 행정부의 변호사로 활동했다. 이 시기 그는 콜 파이프라인 법(1941) 제정을 포함하여 미국의 전시 에너지 정책 수립에 기여했으며, 이후 배상 위원회 및 미국 석유 협회의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1944년에는 폴 G. 블레이저와 함께 켄터키주 애슐랜드로 이주하여 애슐랜드 오일 앤 리파이닝(Ashland Oil and Refining Co., 현재 애슐랜드)을 공동 설립하고 부회장 겸 사장을 역임했다.[7] 1946년에는 미국 전국 석유 위원회 창설의 근거가 된 행정 명령을 직접 작성하기도 했다.[7]

1952년 마셜은 사무엘 B. 모셔가 이끄는 시그널 오일 & 가스(Signal Oil & Gas)의 전무 이사가 되었다. 1961년에는 유니온 텍사스 석유(Union Texas Petroleum)의 사장으로 취임하며 텍사스주 휴스턴으로 거처를 옮겼다. 1967년에는 Allied Chemical(현재 Honeywell)의 전무 이사를 맡았다. 그는 또한 코스탈 코퍼레이션(Coastal Corporation)의 이사로도 활동했다.[7]

마셜은 여러 석유 회사의 임원을 거치며 그레이트 노던 오일 주식회사(Great Northern Oil Co.)를 비롯한 미국 북부 정유 회사들의 주식 지분을 상당수 확보했다. 특히 그는 코크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s)의 주식 16%를 보유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가족 간의 분쟁을 겪기도 했다. 그의 아들 제임스 하워드 마샬 3세가 빌 코크와 손잡고 코크 인더스트리를 인수하려 했으나, 프레드릭 코흐, 찰스 코흐, 데이비드 코흐 형제의 반대로 실패하자, 마셜은 아들에게 증여했던 주식을 회수하고 사업에서 배제했다. 대신 그는 다른 아들 피어스 마샬과 함께 찰스 코흐, 데이비드 코흐 형제의 편에 섰다.

1984년, 마셜은 자신이 보유한 코크 인더스트리 지분을 관리하기 위한 지주 회사인 마셜 석유(Marshall Petroleum Inc.)를 설립했다.

2. 4. 코흐 인더스트리와의 관계

1952년, 마셜은 그레이트 노던 오일(Great Northern Oil Company)을 공동 설립했으며, 1955년에는 미네소타주 로즈마운트에 무겁고 황 성분이 많은 캐나다 원유를 정제할 수 있는 정유 공장을 건설했다.[8] 1959년, 코흐 인더스트리의 창립자인 프레드 코크(Fred C. Koch)는 500만달러에 그레이트 노던 오일 지분 35%를 인수했다. 이후 유니온 오일(Union Oil)이 그레이트 노던의 과반수 지분을 확보하며 인수를 시도했지만, 마셜과 코크는 회사를 비공개로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이를 막았다. 1969년, 프레드 코크의 아들 찰스 코크(Charles Koch)는 유니온 오일의 지분을 사들였고, 마셜과 사업 철학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며 마셜이 보유한 그레이트 노던 오일의 나머지 지분과 코흐 인더스트리(Koch Industries) 지분을 교환했다.[9] 이를 통해 마셜은 코흐 인더스트리의 주요 주주가 되었으며, 소유 지분은 약 16%에 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대 코흐 인더스트리 내부에서는 경영권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마셜의 장남인 제임스 하워드 마셜 3세(J. Howard Marshall III)는 빌 코흐, 프레더릭 R. 코흐 등 다른 코흐 가문 일원들과 손잡고, 당시 회사를 경영하던 찰스 코크와 데이비드 코흐(David H. Koch) 형제를 상대로 회사를 상장 회사로 전환하고 배당금 지급을 요구하며 경영권 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인 J. 하워드 마셜은 찰스와 데이비드 코흐 형제의 편에 섰다. 그는 이전에 장남에게 증여했던 코흐 인더스트리 주식을 당시 가치로 할증된 가격으로 간주되는 800만달러에 다시 사들였고, 결국 장남을 유언장에서 제외했다. 반면, 마셜의 막내아들인 E. 피어스 마셜(E. Pierce Marshall)은 이 분쟁에서 아버지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훗날 마셜이 사망했을 때 당시 16억달러로 평가받던 아버지 재산의 대부분을 상속받았다.

1984년, 마셜은 자신이 보유한 코흐 인더스트리 지분을 관리하기 위한 지주 회사로 마셜 석유(Marshall Petroleum)를 설립했다.[7]

3. 결혼 및 사생활

마셜은 1931년 엘리너 피어스와 결혼하여 1961년에 이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J. 하워드 마셜 3세(1936년 2월 6일 출생)와 E. 피어스 마셜(1939년 1월 12일 – 2006년 6월 20일) 두 아들이 있다. 그의 두 번째 결혼은 베티 보하논과 1961년부터 그녀가 알츠하이머병으로 사망한 1991년까지 이어졌다.

1982년, 그는 스트립 클럽에서 만난 "레이디" 다이앤 워커에게 알츠하이머병을 앓던 아내 베티가 사망하면 결혼하겠다고 제안했다. 마셜은 몇 년에 걸쳐 워커에게 1500만달러 상당의 보석과 기타 선물을 주었다. 워커는 1995년 안면 성형술 합병증으로 5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이 선물에 대해 증여세가 납부되지 않아 국세청(IRS)의 조사를 받게 되자, 마셜은 해당 금액이 선물이 아닌 "컨설팅 비용"이었다고 주장했다.

1994년, 89세의 나이에 그는 26세의 모델 안나 니콜 스미스와 결혼했다. 이는 그의 세 번째 결혼이자 스미스의 두 번째 결혼이었다. 그들의 결혼 생활은 마셜이 사망하기 14개월 전까지 지속되었다.

4. 사망 및 유산 분쟁

1995년 8월 4일, 마셜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90세의 나이로 폐렴으로 사망했다.[10] 그는 생전에 안나 니콜 스미스에게 자신의 재산 절반을 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고 알려졌으나, 최종 유언장과 신탁에는 스미스와 또 다른 아들 J. 하워드 마셜 3세의 이름이 없었다. 대신 대부분의 재산은 그의 사업 동반자이자 후계자로 여겨진 아들 E. 피어스 마셜에게 상속되었다. 마셜이 장남 J. 하워드 마셜 3세를 상속에서 제외한 것은 1980년대 코흐 산업 경영권 분쟁 당시 장남이 자신과 다른 입장을 취했기 때문으로 알려졌다. 당시 마셜은 장남에게 증여했던 회사 주식을 되사들였고, 반면 자신을 지지했던 차남 E. 피어스 마셜에게는 막대한 재산을 남겼다.

마셜 사후, 안나 니콜 스미스와 J. 하워드 마셜 3세는 유언과 신탁의 무효를 주장하며 E. 피어스 마셜을 상대로 긴 법정 싸움을 시작했다. 2001년, 텍사스주 법원에서 6개월간 진행된 배심원 재판 결과, 스미스와 J. 하워드 마셜 3세는 모두 패소했다.[11]

유산 상속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스미스는 캘리포니아 연방 법원에 파산 신청을 했다. 파산 법원은 E. 피어스 마셜이 증거 개시 과정에서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스미스에게 4.74억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12] 그러나 2002년, 미국 지방 법원은 이 판결을 판결 무효로 보고 배상액을 8800만달러로 감액했다.[13] 2004년 12월, 미국 제9연방 항소 법원은 연방 법원이 주 법원의 유산 상속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는 '유산 상속 예외 조항'을 들어 지방 법원의 결정을 다시 뒤집었다. 또한, 제9 연방 항소 법원은 텍사스 법원의 판결, 즉 스미스가 상속인이 아니며 E. 피어스 마셜의 부적절한 행위도 없었다는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고 판시했다.[14]

하지만 이 법정 다툼은 미국 연방 대법원까지 이어졌다. 2006년 5월 1일, 대법원은 ''마셜 대 마셜'' 사건에서 제9 연방 항소 법원의 판결을 뒤집고, 스미스가 연방 법원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제기할 권리가 있다고 판결했다. 이로써 사건은 다시 제9 연방 항소 법원으로 돌아갔다.[15][16] 이 소송이 진행되는 동안 주요 당사자들이 사망했는데, E. 피어스 마셜은 2006년 6월 20일에, 안나 니콜 스미스는 2007년 2월 8일에 사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 피어스 마셜의 가족들이 소송을 이어갔다.

2009년 6월, 제9 연방 항소 법원은 환송된 사건에 대한 구두 변론을 다시 열었고,[17] 2010년 3월, 캘리포니아 파산 법원이 해당 사건에 대한 관할권이 없었으며, 연방 지방 법원 역시 텍사스 유산 상속 법원의 결정을 재검토할 수 없다는 취지로 판결하며 다시 E. 피어스 마셜 측의 손을 들어주었다.[18]

결국 이 사건은 다시 미국 연방 대법원으로 올라갔다. 2010년 9월 대법원은 재심리를 결정했고,[19] 2011년 6월 23일, ''스턴 대 마셜'' 사건에서 5대 4의 결정으로 최종적으로 마셜 가문(E. 피어스 마셜 측)의 승소를 확정했다. 대법원은 미국 의회가 주법에 근거한 반소(counterclaim)에 대한 최종 판결 권한을 미국 헌법 제3조에 따른 법관이 아닌 파산 판사에게 부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20]

한편, 마셜의 장남 J. 하워드 마셜 3세 역시 텍사스 유산 상속 법원에서 패소했으며, 악의적인 사기 혐의로 제기된 반소에서도 패했다. 배심원단은 E. 피어스 마셜에게 3500만달러의 손해 배상을 평결했으나, 법원은 이를 1000만달러로 감액했다. J. 하워드 마셜 3세는 이후 캘리포니아에서 파산 신청을 하여 파산 면책을 받았고, 이 결정은 미국 제9 연방 항소 법원에서 확정되었다.

5. 모교 기부 약속 분쟁

1976년, 마셜은 자신의 모교인 하버포드 대학교에 400만달러를 기부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1995년 그가 사망할 당시, 마셜은 약속한 금액의 절반인 200만달러만 기부한 상태였다. 이에 하버포드 대학교는 휴스턴 유산 법원에 그의 유산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03년 4월, 배심원단은 하버포드 대학교가 마셜의 기부 약속에 의존하여 행동하지 않았으므로, 약속 불이행으로 인한 실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판결했다.[21]

참조

[1] 뉴스 More Than Anna Nicole Smith's Husband: The Oil-Soaked Life of J. Howard Marshall https://www.usnews.c[...] 2009-03-02
[2] 서적 History of the Yale Law School: The Tercentennial Lectures https://books.google[...] Yale University Press 2008-10-01
[3] 학술지 A Factual Study of Bankruptcy Administration and Some Suggestions http://digitalcommon[...]
[4] 학술지 Legal Planning of Petroleum Production https://digitalcommo[...]
[5] 뉴스 Oil Tycoon J. Howard Marshall Ii https://archive.seat[...] Seattle Times 1995-08-07
[6] 뉴스 Put 'hot oil' lessons to use in debate on climate policy https://www.chron.co[...] 2009-11-13
[7] 뉴스 J. H. Marshall, 90, An Oil Executive https://www.nytimes.[...] 1995-08-08
[8] 뉴스 Koch Brothers' Activism Protects Their 50 Years in Canadian Heavy Oils https://www.reuters.[...] 2012-05-10
[9] 뉴스 Koch Industries: A 'crown jewel' of America's 4th wealthiest woman https://www.newsday.[...] 2012-09-17
[10] 뉴스 J. H. Marshall, 90, An Oil Executive https://www.nytimes.[...] 1995-08-08
[11] 판례 Marshall v. MacIntyre (In re Estate of Marshall)
[12] 판례 Marshall v. Marshall (In re Marshall)
[13] 판례 Marshall v. Marshall
[14] 판례 Marshall v. Marshall
[15] 웹사이트 Marshall v. Marshall, 547 U.S. 293 https://supreme.just[...] 2006
[16] 뉴스 A Modern-Day Bleak House https://spectator.or[...] 2009-03-05
[17] 웹사이트 Marshall v. Marshall 9th Circuit Second Oral Argument on Remand https://www.ca9.usco[...]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Ninth Circuit 2009-06-25
[18] 웹사이트 Marshall v. Marshall 9th Circuit Second Opinion on Remand http://cdn.ca9.uscou[...] United States Court of Appeals for the Ninth Circuit 2010-03-19
[19] 뉴스 Supreme Court to hear Anna Nicole Smith estate case https://www.reuters.[...] 2010-09-28
[20] 웹사이트 Supreme Court Docket 10-179 https://www.supremec[...]
[21] 뉴스 College Finally Got Alumnus To Pledge; Next Job: Collecting https://www.wsj.com/[...] 2003-0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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