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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푸에블로 (AGER-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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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SS 푸에블로 (AGER-2)는 1944년 건조된 미 해군의 정보 수집함으로, 1968년 1월 북한에 나포된 사건으로 유명하다. 원래 육군 화물선으로 건조되어 해군으로 이관된 후 정보 수집함으로 개조되었다. 1968년 동해에서 임무 수행 중 북한에 의해 나포되었으며, 승무원들은 억류되어 고문을 당했다. 미국은 외교적 협상을 통해 승무원을 석방시켰지만, 푸에블로호는 현재까지 북한에 억류되어 있으며, 평양의 전쟁 박물관에 전시되어 반미 선전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사건 이후, 승무원들은 북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여 배상 판결을 받았으며, 이 사건은 여러 문화 콘텐츠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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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푸에블로 (AGER-2) - [배(Ship)]에 관한 문서
개요
푸에블로 함, 2012년
푸에블로 함, 2012년
함명푸에블로
함명 유래푸에블로, 푸에블로 군
소속 국가미국
함종(건조 시) 육군 화물 및 보급선 (FS)
해군 카마노급 화물선 (AKL)
(개조 시) 배너급 환경 연구선
유형(건조 시) 경화물선
(개조 시) 정보 수집 선박
상태활동 중, 취역 (현재 북한에 의해 박물관으로 사용 중)
USS 푸에블로 AGER-2 휘장
USS 푸에블로 AGER-2 휘장
함정 이력
건조Kewaunee Shipbuilding and Engineering
기공1944년
진수1944년 4월 16일
취역1945년 4월 7일
퇴역(없음)
재분류1966년 6월 18일: AKL-44
1967년 5월 13일: AGER-2
나포1968년 1월 23일
현재 상태북한에 나포되어 박물관으로 사용 중
항구 사령관프랜시스 E. 스캔런 대령
훈장국방 근무 훈장
한국 방어 근무 훈장
전투 행동 훈장 (소급 적용)
제원
배수량경하 550톤, 만재 895톤
톤수345톤 dwt
길이177 ft (54 m)
32 ft (9.8 m)
흘수9 ft (2.7 m)
추진2 × 500hp GM Cleveland Division 6-278A 6기통 V6 디젤 엔진
속도12.7 노트 (23.5 km/h; 14.6 mph)
승조원6명의 장교, 70명의 사병
무장2 × .50 구경 (12.7×99 mm) M2 브라우닝 기관총
관련 정보
관련 사건푸에블로호 납치사건

2. 건조 및 초기 활동

미 육군 화물선 ''FP-344''(1944). 1966년 해군으로 이관되어 USS ''푸에블로''(AGER-2)가 됨


이 배는 1944년 4월 16일 위스콘신주 키와니에 있는 키와니 조선 및 엔지니어링 회사에서 미 육군의 화물 및 여객선(FP) ''FP-344''로 진수되었다. 육군은 나중에 FP 선박을 화물 및 보급선으로 재지정하여 명칭을 ''FS-344''로 변경했다.[7] 1945년 4월 7일 뉴올리언스에서 취역한 이 배는 육군을 위해 민간인을 훈련시키는 데 사용되는 해안 경비대가 관리하는 육군 선박으로 복무했다. 첫 번째 지휘관은 USCGR 중위 J. R. 초이트였으며, 1945년 9월 12일 USCGR 중위 J.G. 마빈 B. 바커가 그 뒤를 이었다.[8] ''FS-344''는 1954년에 퇴역했다.

1966년 4월 12일 ''FS-344''는 미 해군으로 이관되었으며, 6월 18일 콜로라도주 푸에블로와 푸에블로 군을 따라 USS ''푸에블로''(AKL-44)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처음에는 1966년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에서 기본적인 개조를 위해 경화물선으로 분류되었다. ''푸에블로''는 경화물선으로 비밀리에 준비되었기 때문에 일반 승무원 배치 및 훈련이 이를 기반으로 이루어졌으며, 처음 배치될 때 44%가 바다에 가본 적이 없었다. 신호 정보 장비 설치는 예산상의 이유로 150만달러의 비용으로 1967년으로 연기되었고, 구어체로 "첩보선"으로 알려진 선박으로 다시 운용을 시작하여 1967년 5월 13일 ''AGER-2''로 재지정되었다.[13]

3. 푸에블로호 사건

1968년 1월, 동해에서 작전 활동 중이던 미국 해군 소속 USS 푸에블로 함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에 의해 나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푸에블로호 사건으로 불린다.

당시 미국 해군미국 국가안보국의 공동 계획의 일환으로 첩보 활동을 수행 중이던 푸에블로호는, 1968년 1월 23일 원산시 앞바다에서 북한 해군에 의해 포위되었다. 북한은 푸에블로호가 자국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하며 발포했고, 이 과정에서 미 해군 병사 1명이 사망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했다. 결국 푸에블로호는 나포되었고, 승무원들은 포로로 억류되었다.[13]

이 사건으로 인해 미국과 북한 간에는 긴장이 고조되었으며, 케산 전투 및 구정 공세와 함께, ''푸에블로'' 사건은 미국 여론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도록 하고 린든 B. 존슨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 포기를 선언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핵심 요인이었다.[35]

3. 1. 사건 발생

1968년 1월 5일, ''푸에블로''는 일본 요코스카 해군시설을 떠나 사세보 해군시설로 이동했고, 1968년 1월 11일 쓰시마 해협을 통과하여 동해로 북상했다.[10] ''푸에블로''는 쓰시마 해협에서 소련 해군의 활동을 감시하고 북한으로부터 신호 및 전자 정보를 수집하라는 구체적인 명령을 받았다.[10]

1968년 1월 16일, ''푸에블로''는 42°N 위도에 도착하여 순찰을 준비했다. 이 순찰은 북한 해안을 따라 41°N에서 39°N으로 이동한 후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는데, 북한 해안에서 13nmi 이내로 접근하지 않고, 밤에는 에서 떨어진 거리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1968년 1월 20일 17:30, 북한의 개조된 SO-1급 소련식 잠수함 추적함이 ''푸에블로''에서 약 3657.60m 이내로 접근했으며, 위치는 마양도에서 남동쪽으로 약 15.4nmi, 39°47'N, 128°28.5'E였다.[13]

푸에블로 호가 사건과 관련하여 작성한 정보 보고서


1968년 1월 22일 오후, 북한 어선 ''쌀 밭 1''호와 ''쌀 밭 2''호가 ''푸에블로''에서 약 27.43m 이내로 접근했다.

미국 측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 날인 1월 23일, ''푸에블로''에 잠수함 추적함이 접근하여 국적을 질문했다. ''푸에블로''는 미국 국기를 게양하고 민간 해양학자들에게 갑판 윈치를 사용하여 물 샘플 채취 절차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9] 그 후 북한 선박은 ''푸에블로''에게 철수하거나 발포하겠다고 명령했다. ''푸에블로''는 기동을 시도했지만 잠수함 추적함보다 훨씬 느렸다. 여러 발의 경고 사격이 가해졌다. 또한, 수평선에 3척의 어뢰정이 나타나 추격전에 가담했고, 이어서 공격이 시작되었다.[13]

곧 공격자들은 2대의 조선인민군 공군 MiG-21 전투기의 지원을 받았다. 잠시 후 수평선에 네 번째 어뢰정과 두 번째 잠수함 추적함이 나타났다. ''푸에블로''의 탄약은 갑판 아래에 보관되어 있었고, 기관총은 방한용 방수포로 덮여 있었다. 기관총은 무인 상태였으며, 이를 운용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북한이 ''푸에블로''가 영해 12nmi 내로 진입했다고 보고한 17곳을 보여주는 차트


미 해군이 보고한 ''푸에블로''의 위치


미 해군 당국과 ''푸에블로''의 승무원들은 나포되기 전에 ''푸에블로''가 북한 영해에서 수 마일 떨어져 있었다고 주장한다. 북한은 해당 선박이 북한 영해 내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북한 선박들은 ''푸에블로''에 탑승하려 했지만, 2시간 이상 탑승을 저지하기 위해 기동했다. 그러자 잠수함 추적함은 57 mm 대포로 발포했고, 소형 선박들은 기관총을 발사하여 신호병 리치의 왼쪽 종아리와 오른쪽 상단을 부상시켰다. 부처 함장도 약간의 파편상을 입었지만 무력화될 정도는 아니었다. ''푸에블로''의 승무원들은 민감한 자료를 파기하기 시작했다. 선상에 있던 자료의 양이 너무 많아서 전부 파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포격으로 인해 ''푸에블로''는 정지하고, 명령에 따라 신호를 보내고 북한 선박을 따라야 했다. ''푸에블로''는 민감한 자료를 파기할 시간을 더 확보하기 위해 북한 영해 바로 바깥에서 다시 정지했지만, 잠수함 추적함의 즉각적인 공격을 받았고, 해군 병사였던 듀안 호지스가 사망했다. 이후 ''푸에블로''는 북한 선박을 다시 따라갔다. 선박은 마침내 05:55 UTC (현지 시간 오후 2시 55분)[15]에 어뢰정 및 잠수함 추적함의 병력에 의해 탑승되었다. 승무원들은 손이 묶이고 눈을 가린 채 구타를 당하고 칼로 찔렸다.

3. 2. 미국의 대응 및 협상

미국 정부는 푸에블로호 사건에 대해 초기에는 군사적 대응을 고려했으나, 승무원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하여 외교적 해결을 모색했다.[18]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인질로 잡힌 승무원들의 사망 가능성을 우려하여 북한에 대한 보복 공격을 자제했다.[18]

판문점에서 북한과의 협상이 진행되었지만, 북한은 미국의 사과, 영해 침범 인정, 재발 방지 약속("3A")을 요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29][47] 미국은 협상 타결을 위해 '사전 반박' 계획, 즉 문서에 서명하되, 서명 직후 구두로 문서 내용을 부인하는 방안을 제시했다.[13][30]

평양 전쟁 박물관에 전시된 나포된 승무원의 사진


타임지의 기사에서 하와이 행운의 표시에 대한 비밀을 폭로한 사진과 함께 실린 USS ''푸에블로'' 포로의 북한 선전 사진. 선원들은 북한의 억류에 대한 은밀한 항의 표시로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고, 그들의 대우와 죄에 대한 선전을 했다. 북한은 몇 달 동안 가운데 손가락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고 사진을 찍었지만, 선원들은 이 표시가 하와이에서 행운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결국 1968년 12월 23일, 미국은 북한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는 문서에 서명함과 동시에 구두로 문서 내용을 부인했고, 북한은 승무원 82명과 사망자 1명의 시신을 송환했다.[13][30][31] 승무원들은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통해 대한민국으로 귀환했다.[31]

로이드 M. 부처 함장을 비롯한 승무원들은 해군 조사 위원회에 출두했으나, 존 채피 해군 장관은 "그들은 충분히 고통받았다"며 군사 재판 권고를 거부했다.[32]

다음은 미국과 북한 간의 협상 과정을 요약한 표이다.

날짜수석 협상가사건 / 각 정부의 입장
1968년 1월 24일
(오전 11시 현지 시간)
스미스 제독북한의 청와대 습격 사건을 "악랄하다"고 비난하며, 체포된 북한 군인의 자백 테이프를 재생한다.
"박 동지에게 말하는데, 당신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이제 나는 매우 심각한 성격의 문제를 하나 더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국제 수역에서 ... 푸에블로의 범죄적 탑승 및 압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귀하의 정권은 다음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 선박과 선원을 즉시 반환합니다. 둘, 이 불법 행위에 대해 미국 정부에 사과하십시오. 미국은 국제법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보유합니다."[47]
1968년 1월 24일
(오전 11시 현지 시간)
박 장군"'우리 속담에 미친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흘 전 열린 이 위원회 260차 회의에서, 나는 귀측이 우리 연안 수역에 다수의 무장 스파이 보트를 침투시킨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가장 명백한 미국 제국주의 침략군의 행위는 한반도의 긴장을 악화시키고 또 다른 침략 전쟁을 촉발하기 위해 계획된 것입니다... "
"미국은 푸에블로가 북한 영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침입에 대해 사과하며, 이러한 침입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약속해야 합니다. (인정, 사과 및 약속("3A"))[47]
1968년 4월 말스미스 제독에서 미국 육군 길버트 H. 우드워드 소장으로 수석 협상가 교체
1968년 8월 29일우드워드 장군미국 국무부 차관 니콜라스 카첸바흐가 초안한 "덮어쓰기" 전략 제시.
"귀측과 우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문서로 승인을 인정한다면, 모든 선원을 풀어줄 준비가 되셨습니까?"[47]
1968년 8월 29일박 장군"음, 우리는 이미 당신이 서명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47]
1968년 10월 31일우드워드 장군"귀측과 우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문서로 선원의 수령을 인정한다면, 모든 선원을 풀어줄 준비가 되셨습니까?"[47]
1968년 10월 31일박 장군"미국은 푸에블로가 북한 영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침입에 대해 사과하며, 이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약속해야 합니다."[47]
1968년 12월 17일우드워드 장군국무부 한국 국장 제임스 레너드의 "사전 반박" 계획 설명: 미국은 문서에 서명하는 데 동의하지만, 우드워드 장군은 포로가 석방된 후 이를 구두로 비난할 것.[47]
1968년 12월 17일박 장군[50분간 휴식 후]
"귀하가 제 문서에 서명하실 것을 알립니다... 합의에 도달했습니다."[47]
1968년 12월 23일우드워드 장군은 미국을 대표하여 3A 문건에 서명하고, 동시에 북한은 푸에블로의 포로들을 미국 측에 반환한다.[47]


3. 3. 사건의 여파

푸에블로호 사건은 미 해군 통신 보안에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과 소련이 미국의 암호화 장비 및 통신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36][37][38] 이 사건은 미국의 대북 정책 및 한미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악화시키고,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1968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 포기를 선언하는 데 영향을 미친 요인 중 하나로 평가된다.[35] 승무원들은 석방 후 북한에서의 가혹 행위를 폭로했으며, 북한의 선전 활동에 이용당했음을 밝혔다.[26]

로이드 M. 부처 사령관은 자백을 강요받기 위해 가짜 처형을 포함한 심리적 고문을 받았다. 북한은 부하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고, 부처는 "그와 승무원의 과오를 자백"하기로 했다. 부처는 "자백"은 자백자가 직접 써야 한다는 정의에 따라 자백서를 작성했다. 북한은 그가 쓴 내용의 의미를 확인했지만,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말장난을 알아차리지 못했다.[27] (부처는 "'찬가'"를 "''오줌''"으로 발음했다.)[28]

승무원 석방을 위한 협상은 판문점에서 열렸다. 미국 관리들은 협상에서 제외된 것에 불만을 품은 대한민국을 달래는 것에 대해 우려했다. 주 대한민국 미국 대사관의 정치 고문이자 ''푸에블로'' 협상 운영 책임자인 리처드 A. 에릭슨은 구술 역사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 한국은 우리가 무엇을 할지 분노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들은 북한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이 상황을 이용하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우리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동맹에 대한 믿음을 잃었습니다. 청와대 습격 사건에 대해 한국이 보복하지 않도록 하고 불안감을 완화하는 문제도 있었습니다. 비무장 지대가 허술하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고 더 많은 장비와 지원을 원했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었습니다.[29]

미국이 ''푸에블로''가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서면 인정, 그리고 앞으로 스파이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사과를 하자, 북한 정부는 82명의 승무원을 석방하기로 결정했지만, 서면 사과에 앞서 석방을 확보하기 위해서만 그렇게 했다는 구두 진술이 있었다.[13][30] 1968년 12월 23일, 승무원들은 버스를 타고 대한민국과의 한국 비무장 지대 국경으로 이동하여 납치 당시 사망한 화부 듀안 D. 호지스의 시신을 운반하며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포로로 잡힌 지 11개월 후, 함장은 승무원들의 행렬을 이끌었고, 마지막으로 다리를 건너는 사람은 부함장 에드 머피 중위였다.[13][31]

''푸에블로''호의 통신 장치 역설계를 통해 북한은 해당 통신 장치 복제를 주도하여 소련과 지식을 공유했다. 미국 해군이 해당 시스템을 개정하기 전까지 두 국가가 미국 해군 통신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었다. ''네이벌 히스토리 매거진'' 2010년 6월호에서 존 프라도스는 ''푸에블로''호 나포가 함정에 탑재된 암호 장치를 확보하기 위해 실행된 것이라고 주장했다.[36]

석방된 승무원들을 심문한 후, 미국은 2006년 말에 기밀 해제된 "암호 손상 평가"를 준비했다.[40] 보고서는 승무원들이 기밀 자료를 파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41] 대부분 암호 장비 및 간행물에 익숙하지 않고, 적절한 파기 훈련을 받지 않았으며, 북한이 대부분의 기밀 자료를 회수하는 것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루마니아 국립 문서 보관소에서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1968년 한국에서의 적대 행위 재개를 장려한 것은 소련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었으며, 중국은 한국에서 적대 행위가 재개될 경우 북한에 물질적 지원을 약속했다.[24] 푸에블로호 사건은 청와대 습격 사건과 함께 소련 지도부와 북한 간의 갈등이 심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푸에블로호 사건과 관련하여 미국과 북한 간의 협상 과정을 요약한 표이다.

날짜수석 협상가사건 / 각 정부의 입장
1968년 1월 23일
(현지 시간 정오 경)
푸에블로는 북한 원산 인근 해역에서 북한군에 의해 나포된다.
1968년 1월 24일
(오전 11시 현지 시간)
스미스 제독"악랄한" 청와대 습격을 항의하고, 체포된 북한 군인의 "자백" 테이프를 재생한다.
박 동지에게 말하는데, 당신 북한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증거는 압도적입니다... 나는 매우 심각한 성격의 문제를 하나 더 제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국제 수역에서 ... 푸에블로의 범죄적 탑승 및 압류와 관련이 있습니다. 귀하의 정권은 다음을 수행해야 합니다. 하나, 선박과 선원을 즉시 반환합니다. 둘, 이 불법 행위에 대해 미국 정부에 사과하십시오. 미국은 국제법에 따라 보상을 요구할 권리를 보유합니다.
박 장군'우리 속담에 미친 개가 달을 보고 짖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나흘 전 열린 이 위원회 260차 회의에서, 나는 귀측이 우리 연안 수역에 다수의 무장 스파이 보트를 침투시킨 것에 대해 강력히 항의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범죄 행위를 즉시 중단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미국은 푸에블로가 북한 영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침입에 대해 사과하며, 이러한 침입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약속해야 합니다.
인정, 사과 및 약속("3A").
1968년 3월 4일북한이 사망 및 부상 포로의 이름을 제공한다.
1968년 4월 말스미스 제독은 수석 협상가로서 미국 육군 길버트 H. 우드워드 소장으로 교체된다.
1968년 5월 8일박 장군우드워드 장군에게 미국이 푸에블로가 북한 수역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침입에 대해 사과하며, 그러한 침입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는 문서를 제시한다. 그것은 3A를 해결의 유일한 기반으로 인용하고 다른 모든 "범죄"에 대해 미국을 비난했다.
1968년 8월 29일우드워드 장군미국 국무부 차관 니콜라스 카첸바흐가 초안한 제안 [ "덮어쓰기" 전략]이 제시된다.
귀측과 우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문서로 승인을 인정한다면, 모든 선원을 풀어줄 준비가 되셨습니까?
박 장군음, 우리는 이미 당신이 서명해야 할 것을 말했습니다...
1968년 9월 17일박 장군귀하가 저희 문서를 서명하면, 무언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1968년 9월 30일박 장군귀하가 문서를 서명하면, 동시에 사람들을 넘겨줄 것입니다.
우드워드 장군'우리는 우리가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말하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원을 가족과 재회시키기 위해 승인 수령 고려할 수 있습니다.
1968년 10월 10일우드워드 장군(박 장군에게 서명의 성격을 시연)
나는 여기에 82명의 남자와 시체 1구의 수령을 인정한다는 것을 씁니다...
박 장군귀하는 귀하 측이 저지른 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궤변과 사소한 술책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1968년 10월 23일"덮어쓰기" 제안이 우드워드 장군에 의해 다시 제시되고 박 장군은 다시 이를 "사소한 책략"이라고 비난한다.
1968년 10월 31일우드워드 장군귀측과 우리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문서로 선원의 수령을 인정한다면, 모든 선원을 풀어줄 준비가 되셨습니까?
박 장군미국은 푸에블로가 북한 영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 침입에 대해 사과하며, 이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약속해야 합니다.
1968년 12월 17일우드워드 장군국무부 한국 국장 제임스 레너드의 제안을 설명: "사전 반박" 계획. 미국은 문서에 서명하는 데 동의하지만, 우드워드 장군은 포로가 석방된 후 이를 구두로 비난할 것이다.
박 장군[50분간 휴식 후]
귀하가 제 문서에 서명하실 것을 알립니다... 합의에 도달했습니다.
1968년 12월 23일우드워드 장군은 미국을 대표하여 3A 문건에 서명하고, 동시에 북한은 푸에블로의 포로들을 미국 측에 반환한다.


4. 북한에서의 억류 및 전시



''푸에블로''는 원산시 항구로 예인되었고, 승무원들은 포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승무원들은 석방 후 북한 억류 동안 굶주림과 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했다. 이러한 가혹 행위는 북한이 선원들이 선전용 사진에서 몰래 "가운데 손가락"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더욱 심해졌다.[26]

로이드 M. 부처 사령관은 자백을 강요받기 위해 가짜 처형을 포함한 심리적 고문을 받았다. 북한은 부처 앞에서 부하들을 처형하겠다고 위협했고, 부처는 "그와 승무원의 과오를 자백"하기로 했다. 부처는 "자백"은 자백자 자신이 직접 써야 한다는 정의에 따라 자백서를 작성했다. 그들은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찬양합니다.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했을 때 말장난을 알아차리지 못했다.[27] (부처는 "'찬가'"를 "''오줌''"으로 발음했다.)[28]

승무원 석방을 위한 협상은 판문점에서 진행되었다. 주 대한민국 미국 대사관의 정치 고문이자 ''푸에블로'' 협상 운영 책임자인 리처드 A. 에릭슨은 구술 역사에서 한국이 북한에 의해 대한민국에 불리하게 상황이 이용될 것을 우려하여 미국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고 언급했다.[29] 그는 판문점 회담이 북한의 특정한 협상 스타일 때문에 비생산적이었다고 말했다. 북한 협상가들은 개인적인 판단이나 일반적인 지침에 따라 행동하거나 말할 권한을 받지 못했고, 항상 답변을 미루어야 했다.[29]

에릭슨과 미국 부대사 조지 뉴먼은 1968년 2월 미국 국무부에 협상이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하는 전보를 보냈다. 북한은 미국이 작성한 문서를 서명하도록 요구할 것이고, 변경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선전 목표를 위해 상황을 이용하고 미국과 대한민국 사이에 균열을 일으키려 할 것이라고 예측했다.[29]

미국의 사과와 ''푸에블로''가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서면 인정, 그리고 앞으로 스파이 행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에 따라, 북한 정부는 82명의 승무원을 석방하기로 결정했다.[13][30] 1968년 12월 23일, 승무원들은 비무장 지대의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포로로 잡힌 지 11개월 만이었다.[13][31]

''푸에블로''는 1999년 10월 남포시 항구로 예인되었다가, 평양시로 이전되어 대동강에 정박했다. 2012년 말에는 보통강으로 옮겨져 조국 해방 전쟁 박물관 옆에 배치되었다.[5]

4. 1. 현재 상태

''푸에블로''는 대동강으로 옮겨진 이후 평양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48] 2012년 11월 말 ''푸에블로''는 대동강 부두에서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관보통강의 케이스먼트로 옮겨졌다. 2013년 7월 말, 배는 북한의 시각을 담은 영상[49]과 함께 관광객들에게 공개되었다. 한국 전쟁 기념일을 기념하기 위해 배에는 새로운 페인트칠이 더해졌다.[50] 방문객들은 배에 탑승하여 상부 구조, 비밀 암호실 및 승무원 유물을 볼 수 있다.[51] 조선인민군 해군 수병들과 조선인민군 장교들이 관광객들에게 배를 안내한다.[52]

북한 평양의 USS ''푸에블로''


"푸에블로"는 북한 수도 평양시 내 대동강 연안, 조국 해방 전쟁 승리 기념관 부지에 계류되어 있으며, 공개 이후 250,000명 이상의 관광객이 방문하는 주요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또한 교육의 일환으로 현지 학생들이 단체로 견학을 오는 경우도 많다. 암호 기계 및 무선 장치가 설치된 비밀 통신실(일부는 북한 측에 의해 재조립됨)을 비롯하여 브리지나 선수 부분의 기총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공개되어 있다. 푸에블로호 사건 때 처음 탑승한 것으로 알려진 조선인민군 퇴역 군인이 상주하고 있어, 당시의 상황을 직접 들을 수도 있다. 또한 선내에서는 함을 나포한 경위를 설명하는, 당시의 영상을 담은 15분짜리 DVD를 보게 된다. 북한에 의한 반미프로파간다의 장이기도 하여, 함선 안팎에서의 사진 촬영에 특별한 제한은 없다.

5. 반환 제안 및 소송

2005년 8월, 전 주한 미국 대사 도널드 그레그는 북한과의 외교 회담에서 북한 고위 관리들로부터 미국 국무장관과 같은 고위 미국 정부 관계자가 평양을 방문하여 고위급 회담을 갖는다는 조건으로 북한이 ''푸에블로''호를 미국에 반환할 의사가 있다는 구두 신호를 받았다. 미국 정부는 여전히 현역으로 운용 중인 해군 함선의 반환을 여러 차례 우선순위로 밝혔지만,[53] 2018년 4월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의 방문에서 이 문제가 제기되었다는 징후는 없었다.

''푸에블로''호 전 승무원 윌리엄 토머스 매시, 더니 리처드 턱, 도널드 레이먼드 맥클라렌, 로이드 부처는 북한 정부를 상대로 억류 기간 동안 그들이 겪은 학대에 대해 소송을 제기했다. 북한은 이 소송에 응하지 않았다. 2008년 12월, 미국 워싱턴 D.C.의 헨리 H. 케네디 주니어 지방 법원 판사는 원고들에게 6500만달러의 손해 배상금을 지급하라고 판결했으며, 북한의 부당한 대우를 "광범위하고 충격적"이라고 묘사했다.[54] 2009년 10월 현재, 원고들은 미국 정부에 의해 동결된 북한 자산으로부터 판결금을 회수하려 시도하고 있었다.[55]

2021년 2월, 미국 법원은 생존자들과 그 가족들에게 23억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그들이 북한으로부터 돈을 회수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56]

6. 문화적 묘사

스타 트렉: 오리지널 시리즈의 에피소드 "엔터프라이즈 인시던트"(1968년)는 푸에블로호 사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D. C. Fontana가 각본을 쓴 이 에피소드에서 제임스 T. 커크 함장은 허가 없이 우주선 USS 엔터프라이즈호를 적대적인 로뮬란 영토로 이끌었다.[57]

1973년에는 ABC 텔레비전 드라마 "푸에블로"에서 푸에블로호 사건을 극화했다. Hal Holbrook이 로이드 부처 함장 역을 맡았다. 이 2시간짜리 드라마는 에미상 3개 부문 후보에 올랐고, 그 중 2개 부문을 수상했다.[58][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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