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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쓰이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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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쓰이 소동은 쓰시마 점령 사건 이후 쓰시마 후추번에서 발생한 권력 투쟁 사건이다.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후견인인 가쓰이 고바치로와 가로 오우라 가즈노리의 대립으로 시작되었으며, 가쓰이는 에도 막부, 오우라는 조슈 번의 지원을 받았다. 가쓰이는 오우라의 아들을 암살하고 정권을 장악했으나, 히라타 아키히로의 배신으로 토벌되었고, 가쓰이와 히라타 모두 몰락했다. 이 사건은 쓰시마 후추번의 혼란을 보여주며,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대마도 사건 이후 쓰시마 후추번(대마번)에서는 번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번주였던 소 요시나리의 외삼촌이자 후견인인 가쓰이 고하치로(勝井五八郎, 員周|가즈치카일본어)와 번의 가로(家老) 오우라 교노스케(大浦教之助, 和礼|가즈노리일본어)가 주요 대립 축을 형성했다.

가쓰이는 러시아 등 외세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에도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막부 지지 세력(사쿠마)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오우라는 소 씨 가문과 인척 관계에 있던 조슈 번의 지원을 받아 양이(攘夷, 외세 배척)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존왕양이파 세력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존왕양이파는 신분이 낮은 경졸(軽卒) 출신인 가쓰이에 반감을 가진 번사들을 규합하고, 번의 학교인 닛신칸(日新館)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존왕양이파가 번주 요시나리를 스오국으로 잠시 피신시키려는 계획을 세우면서 이에 대한 반감도 존재했다.

번주 요시나리는 점차 번 내 여론에 따라 존왕양이파에 동조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8월 18일의 정변으로 인해 존왕양이파의 주요 세력이었던 조슈 번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실각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중앙 정세의 변화는 쓰시마 후추번의 정치 상황에도 영향을 미쳤고, 특히 막부와의 협력을 중시하던 가쓰이에게 위기감을 고조시키는 배경이 되었다.

2. 1. 쓰시마 후추번의 내부 갈등

쓰시마 점령 사건 이후 쓰시마 후추번에서는 내부 갈등이 심화되었다. 당시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후견인이었던 외삼촌 가쓰이 고바치로(勝井五八郎, 員周|가즈치카일본어)와 가로(家老) 오우라 노리노스케(大浦教之助, 和礼|가즈노리일본어)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가쓰이는 러시아 등 외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에도 막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정책을 내세웠고, 좌막(佐幕, 막부 지지)파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오우라는 소 씨 가문과 인척 관계(소 요시아야의 정실이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의 딸)였던 조슈 번의 지원을 받아 양이(攘夷, 외세 배척)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존왕양이(尊王攘夷)파의 지지를 얻었다. 존왕양이파는 신분이 낮은 경졸(軽卒) 출신인 가쓰이에 반감을 가진 번사들을 규합하고 번교(藩校)인 닛신칸(日新館)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이들이 번주 요시아키라를 일시적으로 조슈 번 영지인 스오로 피신시키려 한다는 구상이 알려지면서 존왕양이파에 대한 반감도 일부 존재했다.

번주 요시아키라는 점차 번 내 여론에 따라 존왕양이파 쪽으로 기울었으나, 중앙 정치 무대에서는 8월 18일의 정변으로 인해 조슈 번이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위기감을 느낀 가쓰이는 겐지(元治) 원년(1864년) 4월 23일, 오우라의 아들이자 간조부교(勘定奉行, 재정 담당)였던 오우라 신로쿠(大浦申禄, 통칭 作兵衛|사쿠베에일본어)를 암살했다. 이후 번의 비령(飛領, 멀리 떨어진 영지)이 있는 히젠 국(肥前国) 다시로(田代, 현재 사가현 도스시)로 출장을 핑계 삼아 도피했다. 다시로에서 오우라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가쓰이는 이를 정권 탈환의 기회로 보고, 그곳의 대관(代官) 히라타 아키히로(平田達弘, 통칭 大江|오에일본어)와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 히라타 역시 존왕양이파였으나, 오우라를 대신하여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이 있어 가쓰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겐지 원년(1864년) 10월 13일, 히라타의 지원을 받은 가쓰이는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에 상륙하여 번주 저택을 점거했다. 스스로 가로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한 그는 번주를 스오로 옮기려던 계획의 중단을 선언했다. 10월 25일, 유폐된 상태에서 항의의 단식을 하던 오우라가 사망하자, 가쓰이는 닛신칸 관계자를 포함한 쓰시마 후추번의 존왕양이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처형하거나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때 희생된 사람은 오우라를 포함하여 107명에 달했다.

그러나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조슈 번과 후쿠오카 번 등 존왕양이파 여러 번에 쓰시마 후추번의 위기를 알리며 가쓰이 타도를 호소했다. 또한 다시로로 망명해 온 닛신칸 관계자들과 가쓰이의 숙청에 반발하여 이탈한 이들을 모아 종의대(尽義隊|진기타이일본어)를 결성하고 반(反)가쓰이 기치를 내걸었다. 조슈 번과 망명 중이던 산조 사네토미 등에게서 파견된 사자의 질책과 번 내에 확산되는 반(反)가쓰이 움직임에 동요한 번주 요시아키라는 결국 게이오(慶応) 원년(1865년) 5월 2일(혹은 3일) 가쓰이 토벌 명령을 내렸다.

가쓰이 토벌 소식을 들은 히라타는 5월 6일 종의대를 이끌고 쓰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우라와 가쓰이의 공멸이 실은 히라타의 계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실각하게 되었고, 같은 해 11월 11일 죄를 추궁받아 참형에 처해졌다.

2. 2. 중앙 정세의 변화

대마번 내에서는 번주 소 요시나리가 점차 존왕양이파에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중앙 정계에서는 8월 18일의 정변이 발생하여 존왕양이파의 중심 세력이었던 조슈 번이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고 교토에서 밀려나 곤경에 처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대마번의 정세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슈 번의 실각은 대마번 내 존왕양이파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에도 막부와의 협력을 중시하던 가쓰이 고하치로는 조슈 번의 몰락과 번주 요시나리의 존왕양이파 접근에 위기감을 느꼈다. 이를 기회로 판단한 가쓰이는 겐지 원년(1864년) 4월 23일, 정적인 오우라 교노스케의 아들 신로쿠를 암살하고 히젠국 다시로(현재의 사가현 도스시)로 도주했다. 이후 오우라가 병으로 쓰러지자, 가쓰이는 다시로의 대관 히라타 다쓰히로와 손잡고 거병하여 정권 탈취를 시도했다. 이는 중앙 정세의 변화가 대마번 내부의 권력 투쟁을 격화시킨 대표적인 사례이다. 가쓰이의 행동은 결과적으로 대마번 내 존왕양이파 세력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3. 정변의 전개

대마번에서는 대마도 사건 이후 번 내부의 정치적 갈등이 깊어졌다. 번주 소 요시나리의 후견인 가쓰이 고하치로는 에도 막부 의존 노선을, 가로 오우라 교노스케는 조슈 번과 연계한 양이(攘夷) 노선을 주장하며 대립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의 입지가 약화되자 위기를 느낀 가쓰이는 겐지 원년(1864년) 4월, 오우라의 아들을 암살하고 번의 비령지인 히젠국 다시로(사가현 도스시)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다시로 대관 히라타 다쓰히로와 손잡고 거병을 모의한 가쓰이는 같은 해 10월,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오우라를 포함한 존왕양이파 세력에 대한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조슈 번 등 여러 번에 가쓰이 타도를 호소하며, 망명 인사들을 모아 尽義隊|진기타이일본어를 결성하고 반기를 들었다. 외부의 압력과 내부의 반발에 직면한 번주 요시나리는 결국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가쓰이 토벌을 결정했고, 가쓰이는 몰락했다. 이후 쓰시마로 귀환한 히라타 역시 그의 책략이 드러나 실각하고 같은 해 11월 처형되었다.

3. 1. 가쓰이의 정권 장악

쓰시마 후추번에서는 쓰시마 점령 사건 이후 번 내부의 갈등이 심화되었다.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외삼촌이자 후견인인 가쓰이 고바치로와 가로 오우라 가즈노리 사이의 권력 다툼이 치열했다. 가쓰이는 러시아 등 외세로부터 쓰시마를 지키기 위해 에도 막부에 의존하는 정책을 내세우며 좌막파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오우라는 소 씨 가문과 인척 관계(소 요시아키라의 정실이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의 딸)인 조슈번의 지원을 받아 양이(攘夷)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존왕양이파의 지지를 얻었다. 존왕양이파는 신분이 낮은 출신인 가쓰이에 반발하는 번사들을 규합하여 번교닛신칸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웠다. 그러나 존왕양이파가 번주 요시아키라를 조슈 번 영지인 스오로 잠시 옮기려 한 계획은 번 내 일부 세력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번주 요시아키라는 점차 존왕양이파 쪽으로 기울었으나, 당시 중앙 정계에서는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 번이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가쓰이는 겐지 원년(1864년) 4월 23일, 오우라의 아들이자 간조부교(勘定奉行)였던 신로쿠(申禄)를 암살했다. 이후 그는 번의 히젠국 다시로(사가현 도스시에 위치한 비령지)로 출장을 간다는 명목으로 도피했다. 다시로에 도착한 가쓰이는 오우라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권 장악의 기회로 여겨, 다시로의 대관 히라타 아키히로와 거병을 모의했다. 히라타 역시 존왕양이파였으나, 오우라를 대신하여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에 가쓰이와 손을 잡았다.

겐지 원년(1864년) 10월 13일, 히라타의 지원을 받은 가쓰이는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에 상륙하여 번주 저택을 점거했다. 그는 스스로 가로(家老) 자리에 올라 정권을 장악하고, 번주 요시아키라를 스오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중단시켰다. 10월 25일, 유폐된 상태에서 항의의 단식을 하던 오우라가 사망하자, 가쓰이는 닛신칸 관계자를 포함한 존왕양이파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오우라를 포함하여 총 107명이 처형되거나 자결하도록 강요받았다.

3. 2. 히라타의 배신과 종의대 결성

히젠국다시로(현재 사가현 도스시)로 도망쳤던 가쓰이 고바치로오우라 노리노스케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권 탈환의 기회로 여겼다. 그는 다시로의 대관 히라타 아키히로와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 히라타는 오우라와 같은 존왕양이파였지만, 오우라를 대신하여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가쓰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겐지 원년(1864년) 10월 13일, 히라타의 지원을 받은 가쓰이는 군사를 이끌고 쓰시마에 상륙하여 번주 저택을 점거하고 스스로 가로가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번주 소 요시아키라스오국으로 옮기려던 계획의 중단을 선언했으며, 10월 25일 유폐되어 단식 항의하던 오우라가 사망하자 닛신칸 관계자를 포함한 쓰시마 후추번의 존왕양이파 107명을 처형하거나 자결하게 하는 숙청을 단행했다.

그러나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는 돌연 태도를 바꾸었다. 그는 조슈번후쿠오카번 등 존왕양이파 여러 번에 쓰시마 후추번의 위기를 알리며 가쓰이 타도를 호소했다. 동시에 다시로로 망명해 온 닛신칸 관계자, 존왕양이파 인사들, 그리고 가쓰이의 숙청에 실망하여 쓰시마를 떠난 사람들을 규합하여 종의대(尽義隊)를 결성하고 반(反)가쓰이를 선언했다.

조슈번산조 사네토미 등이 파견한 사자의 힐문과 쓰시마 번 내에 점차 확산되는 반(反)가쓰이 움직임에 번주 소 요시아키라는 동요했다. 결국 다음 해인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2일(혹은 3일), 번주는 가쓰이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히라타는 5월 6일 종의대를 이끌고 쓰시마로 돌아왔다. 하지만 오우라와 가쓰이 양측의 공멸을 노린 히라타의 책략이었음이 드러나면서 그는 실각했고, 같은 해 11월 11일 죄를 물어 참형에 처해졌다.

3. 3. 가쓰이와 히라타의 몰락

히젠국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 다쓰히로(平田達弘)는 돌연 조슈번후쿠오카번존왕양이파 여러 번에 쓰시마 후추번의 위기를 호소하며 가쓰이 고하치로 타도를 주장했다. 동시에 다시로로 망명해 온 닛신칸 관계자, 존왕양이파 인사들, 그리고 가쓰이가 일으킨 숙청 과정에 실망하여 떠난 사람들을 받아들여 종의대(尽義隊|진기타이일본어)를 결성하고 반가쓰이를 선언했다.

조슈번산조 사네토미 등으로부터 파견된 사자의 힐문과 쓰시마 후추번 내에 퍼지는 반가쓰이 움직임에 동요한 번주 소 요시아키라는 결국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2일(혹은 3일)에 가쓰이 토벌에 나섰다. 이를 지켜본 히라타는 5월 6일 종의대를 이끌고 쓰시마섬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오우라 가즈노리와 가쓰이의 공멸이 실은 히라타의 책동이었음이 밝혀지면서, 히라타는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게이오 원년(1865년) 11월 11일, 히라타는 죄를 추궁받아 참형에 처해졌다.

4. 결과 및 영향

가쓰이 소동은 쓰시마 후추번 내 주요 정치 세력 간의 극단적인 대립과 유혈 숙청으로 이어졌다. 가쓰이 고하치로는 일시적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반대파인 존왕양이파 인사 107명을 처형하거나 자결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가쓰이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고, 협력자였던 히라타 다쓰히로의 배신과 조슈번 등 외부 세력의 개입, 번 내부의 반발이 겹치면서 결국 번주 소 요시나리에 의해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토벌되었다. 소동을 주도했던 가쓰이뿐만 아니라, 그와 대립했던 오우라 노리노스케 세력, 그리고 두 세력의 공멸을 꾀했던 히라타 다쓰히로마저 숙청되거나 같은 해 11월 처형되면서 쓰시마 후추번의 정치 지형은 크게 변화하고 극심한 혼란을 겪게 되었다.

4. 1. 쓰시마 후추번의 혼란

쓰시마 점령 사건 이후 쓰시마 후추번 내부의 분쟁이 심화되었다. 당시 번주 소 요시나리의 후견인이었던 외삼촌 가쓰이 고하치로와 가로 오우라 노리노스케 사이에 치열한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가쓰이는 러시아 등 외세로부터 쓰시마를 지키기 위해 에도 막부에 의존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며 좌막파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오우라는 소 씨 가문과 친척 관계(번주 요시나리의 정실이 조슈번 번주 모리 나리히로의 딸)였던 조슈번의 지원을 받아 양이(攘夷)를 실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존왕양이파의 지지를 얻었다. 존왕양이파는 경졸(軽卒) 출신인 가쓰이에 반발하는 번사들을 규합하여 번교닛신칸을 거점으로 세력을 넓혔다. 그러나 이들이 번주 요시나리를 잠시 조슈번 영지인 스오국으로 피신시키려 하자, 이에 대한 반감 역시 존재했다.

번주 요시나리는 점차 번 내 여론에 따라 존왕양이파 쪽으로 기울었으나, 중앙 정계에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이 고립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위기감을 느낀 가쓰이는 겐지 원년(1864년) 4월 23일, 오우라의 적자이자 간조부교(勘定奉行, 재정 담당)였던 오우라 신로쿠를 암살하고, 번의 비령(飛領, 월경지)이 있던 히젠국 다시로(현 사가현 도스시)로 출장을 핑계 삼아 도피했다. 다시로에 도착한 가쓰이는 오우라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정권 탈환의 기회로 여겨, 그곳의 대관이었던 히라타 다쓰히로와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 히라타 역시 존왕양이파였으나, 오우라를 대신하여 파벌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이 있어 가쓰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겐지 원년(1864년) 10월 13일, 히라타의 지원으로 군사를 일으킨 가쓰이는 쓰시마에 상륙하여 번주 저택을 점거하고 스스로 가로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번주를 스오로 옮기려던 계획의 중단을 선언했다. 10월 25일, 유폐된 상태에서 항의의 단식을 하던 오우라가 사망하자, 가쓰이는 닛신칸 관계자를 포함한 쓰시마 후추번 내 존왕양이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여 처형하거나 자결하게 만들었다. 이 숙청으로 오우라를 포함하여 총 107명이 희생되었다.

그러나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조슈번후쿠오카번 등 존왕양이파 여러 번에 쓰시마 후추번의 위기를 알리며 가쓰이 타도를 호소했다. 동시에 다시로로 망명해 온 닛신칸 관계자들과 가쓰이의 숙청에 반발하여 이탈한 세력을 규합하여 '종의대'(尽義隊)를 결성하고 반(反)가쓰이 기치를 내걸었다. 조슈번과 망명 중이던 산조 사네토미 등이 파견한 사자의 문책, 그리고 번 내에 확산되는 반가쓰이 움직임에 동요한 번주 요시나리는 결국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2일(혹은 3일) 가쓰이 토벌령을 내렸다. 이를 지켜보던 히라타는 5월 6일 종의대를 이끌고 쓰시마로 돌아왔으나, 오우라와 가쓰이의 공멸을 유도한 그의 책략이 드러나면서 실각했다. 결국 히라타는 게이오 원년(1865년) 11월 11일 죄를 추궁당하여 참형에 처해졌다.

4. 2. 조선과의 관계

쓰시마 후추번은 전통적으로 조선과의 외교 및 무역에서 중요한 창구 역할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에도 시대 말기, 쓰시마번 내부에서는 격렬한 정치적 갈등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바로 가쓰이 소동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전체를 휩쓸었던 존왕양이 운동과 막부 체제 유지 세력 간의 대립이 쓰시마번 내부에서 폭발한 것이었다.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외삼촌이자 후견인이었던 勝井 五八郎|가쓰이 고바치로일본어러시아 등 외세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 에도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좌막(佐幕)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번의 가로였던 大浦 和礼|오우라 가즈노리일본어(오우라 노리노스케)는 조슈번존왕양이 세력과 연계하여 외세를 배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대립은 단순한 정책 노선 차이를 넘어 번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비화되었다.

겐지 원년(1864년), 중앙 정치에서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이 고립되자 위기감을 느낀 가쓰이는 오우라파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그는 오우라의 아들을 암살하고 히젠에 있던 번의 영지 중 멀리 떨어진 곳인 다시로(田代, 현재 사가현 도스시)에서 군사를 일으켜 쓰시마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가쓰이는 오우라를 포함한 존왕양이파 인사 100여 명을 처형하거나 자결하게 하는 등 공포 정치를 펼쳤다.

하지만 가쓰이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와 함께 거병했던 平田 達弘|히라타 아키히로일본어가 배신하고, 조슈번 등 외부 세력의 개입과 번 내부의 반발에 직면하면서 결국 게이오 원년(1865년) 번주 요시아키라에 의해 토벌되었다.

이처럼 가쓰이 소동은 쓰시마번 자체를 극심한 혼란으로 몰아넣었다. 전통적으로 조선과의 외교를 전담했던 쓰시마번의 내부 분열과 혼란은 대조선 외교 기능의 약화를 초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이 사건이 조선과의 관계에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격동의 메이지 유신 전후 시기 쓰시마번의 복잡한 내부 사정을 드러냄으로써, 이후 변화하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5. 평가

가쓰이 소동은 막부 말기 일본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폭력성을 쓰시마 후추번이라는 특정 지역을 통해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 사건은 당시 일본 중앙 정치의 좌막파와 존왕양이파 간의 첨예한 대립이 지방 번의 권력 투쟁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타난 양상을 보여준다. 정치적 이념이 권력 장악의 명분으로 활용되면서 암살과 대규모 숙청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막부 말기 사회의 불안정성과 이념의 변질 가능성을 드러낸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외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쓰시마번의 내부 분열과 혼란은 번의 외교적 기능 약화를 초래했다. 이는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중앙 정부가 조선에 대해 강경 노선을 취하고, 나아가 정한론운요호 사건 등으로 대표되는 침략적 팽창 정책을 추진하는 배경 중 하나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적 관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가쓰이 소동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 격변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 특히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될 수 있다.

5. 1. 다양한 관점에서의 조명

가쓰이 소동은 막부 말기 일본의 정치적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특히 쓰시마 후추번(대마번)이라는 작은 번 내부에서 벌어진 권력 투쟁이 당시 중앙 정치의 동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사건은 중앙 정치와 지방 번의 역학 관계, 그리고 존왕양이 운동의 한계와 지역적 특성을 드러낸다.

쓰시마 점령 사건 이후 쓰시마 후추번에서는 내부 갈등이 격화되었다. 번주 소 요시아키라의 외삼촌이자 후견인이었던 가쓰이 고바치로(가즈치카)와 가로 오우라 노리노스케(가즈노리)는 번의 진로를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가쓰이는 러시아 등 외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에도 막부에 의존하는 정책을 주장하며 좌막파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반면, 오우라는 소 씨 가문과 인척 관계(번주 요시아키라의 정실이 조슈 번주 모리 나리히로의 딸)인 조슈번의 지원을 받아 양이(攘夷)를 단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존왕양이파의 지지를 얻었다. 이는 당시 일본 중앙 정치 무대에서의 좌막파와 존왕양이파 간의 대립 구도가 쓰시마라는 지방 번에 그대로 투영된 것이었다.

존왕양이파는 신분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쓰이에 반발하는 번사들을 규합하고 번교닛신칸을 거점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그러나 이들이 번주 요시아키라를 일시적으로 스오국(조슈 번 영지)으로 피신시키려는 계획을 세우자, 이에 대한 반감도 번 내에 존재했다. 이는 존왕양이 운동이 각 지역의 특수한 상황과 결합하면서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번주 요시아키라는 점차 번 내 여론에 따라 존왕양이파에 기울었지만, 중앙 정치 상황이 급변했다. 8월 18일의 정변으로 조슈번이 교토에서 축출되고 정치적으로 고립되면서, 조슈 번과 연계된 오우라 파는 위기에 처했다. 이를 기회로 본 가쓰이는 겐지 원년(1864년) 4월 23일, 오우라의 아들이자 간조부교(勘定奉行, 재정 담당 관리)였던 신로쿠(申禄)를 암살했다. 이후 번의 비령(飛領, 멀리 떨어진 영지)이 있는 히젠국 다시로(田代, 현재 사가현 도스시)로 출장을 핑계 삼아 도피했다. 다시로에서 오우라가 병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들은 가쓰이는 정권 탈환의 기회로 여기고, 그곳의 대관(代官)인 히라타 다쓰히로(平田達弘)와 함께 거병을 모의했다. 히라타 역시 존왕양이파였지만, 오우라를 대신해 존왕양이파의 지도자가 되려는 야심을 품고 가쓰이와 손을 잡았다.

겐지 원년(1864년) 10월 13일, 히라타의 지원을 받아 군사를 일으킨 가쓰이는 쓰시마에 상륙하여 번주 저택을 점거하고 스스로 가로(家老)에 임명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번주를 스오로 옮기려던 계획을 중단한다고 선언했다. 10월 25일, 유폐된 상태에서 항의의 단식을 하던 오우라가 사망하자, 가쓰이는 닛신칸 관계자를 포함한 쓰시마 후추번의 존왕양이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처형되거나 자결한 이들은 오우라를 포함해 107명에 달했으며, 이는 막부 말기 정치 투쟁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러나 가쓰이의 권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시로에 남아 있던 히라타가 갑자기 태도를 바꿔 조슈 번과 후쿠오카번 등 존왕양이파 여러 번에 쓰시마의 위기를 알리며 가쓰이 타도를 호소했다. 동시에 다시로로 망명해 온 닛신칸 관계자 등 존왕양이파 인사들과 가쓰이의 숙청에 반발하여 이탈한 사람들을 규합하여 '종의대'(尽義隊)를 결성하고 반(反)가쓰이를 선언했다. 조슈 번과 망명 중이던 산조 사네토미 등 중앙의 존왕양이파 인사들이 파견한 사자의 질책과 번 내에 퍼지는 반가쓰이 움직임에 동요한 번주 요시아키라는 결국 가쓰이에게 등을 돌렸다.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2일(혹은 3일), 번주 요시아키라는 가쓰이 토벌 명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히라타는 5월 6일 종의대를 이끌고 쓰시마로 귀환했다. 하지만 오우라와 가쓰이가 서로 싸우다 몰락하게 된 것이 실은 히라타의 책략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히라타는 정계에서 은퇴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게이오 원년(1865년) 11월 11일, 죄를 추궁받아 참형에 처해졌다.

가쓰이 소동은 막부 말기 일본 사회가 겪었던 극심한 혼란과 폭력성, 중앙 정치의 동향이 지방 번의 정세에 미치는 영향, 그리고 존왕양이 운동이라는 이념이 현실 정치 속에서 권력 투쟁의 명분으로 이용되거나 변질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복합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5. 2. 한국사적 관점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의 외교에서 독점적인 창구 역할을 수행하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쓰시마번은 막부 말기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며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가쓰이 소동은 이러한 전환기에 쓰시마번 내부에서 벌어진 극심한 혼란과 권력 투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당시 쓰시마번 내부에서는 에도 막부와의 관계를 중시하는 좌막파와 천황 중심의 존왕양이를 내세우는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었다. 원본 소스에서 상세히 묘사된 가쓰이 고바치로와 오우라 가즈노리의 대립은 이러한 정치적 혼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암살과 대규모 숙청이 벌어지는 등 극단적인 양상이 나타났으며, 이는 쓰시마번의 정치적 불안정성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쓰시마번의 내부 혼란은 결과적으로 번의 독자적인 외교 역량을 약화시키고, 새롭게 들어선 메이지 정부의 중앙 집권적 통제를 강화하는 배경으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전통적으로 조선과의 우호적 외교를 중시했던 쓰시마번의 역할이 축소되면서, 일본 중앙 정부는 점차 조선에 대한 강경 노선을 추구하게 된다. 이는 이후 정한론의 대두와 운요호 사건 등으로 이어지는 일본의 대외 팽창 정책 및 조선 침략 야욕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가쓰이 소동은 일본 내부의 정치적 격변이 동아시아 국제 질서, 특히 한일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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