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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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테렌티아 씨족 출신으로, 퀘스토르, 안찰관 등을 역임한 로마의 정무관이었다. 기원전 218년 프라에토르를 거쳐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로마군을 지휘했으나 한니발에게 대패했다. 이후에도 아풀리아 방어, 외교 사절단 활동, 식민지 건설 책임자 등으로 활동했으며, 칸나이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국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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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출생 | 불명 |
사망 | 불명 |
국적 | 로마 공화국 |
민족 | 로마인 |
직업 | |
분야 | 정치, 군사 |
직책 | 로마 집정관 |
경력 | |
콰이스토르 | 기원전 222년 |
평민 아에딜리스 | 기원전 221년 |
쿠루리스 아에딜리스 | 기원전 220년 |
법무관 | 기원전 218년 |
집정관 | 기원전 216년 |
전 집정관 | 기원전 215년-213년 |
전 법무관 | 기원전 208년-207년 |
레가투스 | 기원전 203년, 200년 |
식민시 건설 삼인 위원 | 기원전 200년 |
군사 경력 | |
소속 | 로마 공화국 |
참전 전투 | 제2차 포에니 전쟁 |
주요 전투 | 칸나에 전투 |
2. 초기 생애 및 경력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평민 가문인 테렌티아 씨족 출신으로, 그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중요한 위치에 오른 인물이었다.[1]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었던 것으로 전해지며,[2][26] 바로는 아버지가 남긴 유산을 바탕으로 공직에 나아갔다.[3][27] 그는 퀘스토르(재무관), 아이딜리스(안찰관) 등 로마 공화국의 주요 정무관 직책을 차례로 역임하며 경력을 쌓았다.[3] 기원전 218년에는 프라에토르(법무관) 직을 맡았으며, 이때 사르데냐에서 근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5]
2. 1. 초기 경력
가이우스 테렌티우스 바로는 평민 가문인 테렌티아 씨족 출신으로, 그의 가문에서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었다.[1] 리비우스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는 정육점 주인이었고, 바로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가게에서 심부름 같은 천한 일을 도왔다고 전해진다.[2][26] 이러한 낮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사망한 후 그는 상속받은 재산을 이용하여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신분을 가진 사람들을 기소하여 이름을 알렸으며,[3][27] 정무관의 각 단계를 차례로 밟아나갔다.세르비우스는 바로가 제1차 일리리아 전쟁에 참전했을 가능성을 언급한다.[4] 기록상 확인되는 그의 초기 경력은 다음과 같다.
- 늦어도 기원전 222년까지 퀘스토르(재무관)를 역임했다.
- 기원전 221년까지 평민 아이딜리스(안찰관)를 역임했다.
- 기원전 220년까지 쿠룰리스 아이딜리스(상급 안찰관)를 역임했다.[3][27]
안찰관 시절, 로마 축제를 준비하면서 유피테르 신상 마차에 아름다운 배우를 태웠던 일이 있었는데, 훗날 사람들은 이 일이 여신 유노의 분노를 사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군이 참패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했다.[28]
기원전 218년에는 프라에토르(법무관)로 선출되었으며, 당시 다른 법무관들의 담당 지역을 고려할 때 그는 사르데냐 섬에 파견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5]
기원전 217년, 프라에토르 임기를 마친 바로는 마르쿠스 미누키우스 루푸스를 독재관으로 추대하는 움직임을 지지했다. 이는 당시 소수의 원로원 의원만이 동조했던 일로, 바로의 지지는 개인적인 신념보다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평민들의 대중적 지지를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였던 것으로 보인다.[3]
3. 집정관 시절과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2년 후, 바로는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가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지연 전술'을 사용하여 Cunctator|쿤크타토르la(지연자)라는 별명을 얻은 다음 해였다. 바로와 파울루스는 각자 지휘하던 두 개의 집정관 군대를 하나로 합쳐, 한니발에 맞서 싸울 약 8만 5천 명 규모의 대군을 편성하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다. 당시 관례에 따라 두 집정관은 격일로 번갈아 가며 군대의 지휘권을 행사했다.[6][7] 이들은 이후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의 군대와 격돌하게 된다.
3. 1. 칸나이 전투
기원전 216년,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 2년 후, 바로는 루키우스 아에밀리우스 파울루스와 함께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이는 독재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베루코수스가 한니발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는 '지연 전술'을 사용한 다음 해였다. 바로와 파울루스는 각자의 군대를 합쳐 약 8만 5천 명 규모의 대군을 편성하여 한니발에 맞서는 이례적인 조치를 취했으며, 관례에 따라 두 집정관이 격일로 군대를 지휘했다.[6][7]기원전 216년 8월 2일, 두 군대는 칸나이에서 격돌했다. 바로는 카르타고 군과의 결전을 원했고, 자신이 지휘권을 잡은 날 경험 부족에도 불구하고 동료 파울루스의 신중론을 누르고 짧은 전투 대형을 명령하며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했다. 한니발은 이를 이용하여 로마군을 완벽하게 포위했고, 로마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에서 파울루스는 전사했지만, 바로는 약 4,500명의 병력과 함께 베누시아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8][9][10] 이후 카누시움(현 카노사 디 푸글리아)에 더 큰 규모의 로마군 패잔병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생존자들을 이끌고 합류하여 약 1만 명 규모의 군대를 재편성했다.[11][29]
바로는 칸나이에서의 패배, 동료 파울루스의 전사, 자신이 카누시움에서 패잔병을 모았으나 통솔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카르타고와 포로 몸값 및 전리품 협상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로마에 보고했다. 이 소식에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으나, 원로원은 혼란 확산을 막기 위해 상복 착용 기간을 30일로 제한했다.[30] 오스티아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카누시움으로 파견되어 패잔병 지휘권을 인수했으며, 바로에게는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31] 원로원은 칸나이 전투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패배의 책임이 있는 바로가 공포에 휩싸인 로마로 소환되자[12], 많은 시민들이 광장에 모여 그를 맞이했다. 시민들은 그가 "공화국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고" 자살하지 않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는데, 이는 그가 계속 싸울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되었다.[13][32] 일각에서는 전투에 반대했던 파울루스는 죽고 패배의 책임자인 바로가 살아남아 감사까지 받은 것을 포르투나 여신의 총애 덕분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33]
바로는 로마에 머물며 재난 수습을 위해 마르쿠스 유니우스 페라를 독재관으로 임명하는 데 기여했다. 그해 말, 칸나이 전투에서의 손실로 부족해진 원로원 의석을 충원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원로원 의원 명부 개정은 감찰관의 역할이었으므로, 현존 인물 중 가장 오래된 감찰관 경험자를 독재관으로 선출하여 임무를 맡기기로 결정되었다. 독재관 선출은 집정관의 권한이었기에, 아풀리아에 주둔 중이던 바로가 다시 로마로 소환되어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를 독재관으로 임명했다.[14][34] 부테오가 원로원 명부를 개정한 후, 바로는 다음 해 선거 관리를 원치 않아 다시 자신의 임지로 돌아갔다.[35]
다음 해인 기원전 215년, 바로는 프로콘술로서 임페리움이 연장되어 계속 아풀리아를 수비했다.[36] 그 후, 법무관이었던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에게 군대를 인계하고, 아드리아해에 면한 피케눔으로 파견되어 기원전 213년까지 프로콘술로서 그 지역을 방어했다.[37]
4. 칸나이 전투 이후
칸나이 전투에서 패배한 후, 바로는 패잔병을 카누시움(현 카노사 디 푸글리아)으로 모았다.[29] 그는 로마에 동료 집정관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가 전사했고, 자신은 카누시움에서 약 1만 명의 병사를 모았으나 통솔이 어려운 상황이며, 카르타고와 포로 및 전리품 협상을 진행 중이라고 보고했다. 이 소식에 로마는 큰 혼란에 빠졌고, 원로원은 혼란 확산을 막기 위해 상복 착용 기간을 30일로 제한했다.[30]
오스티아에서 함대를 지휘하던 법무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가 카누시움으로 파견되어 패잔병을 인수했으며, 바로는 가능한 한 빨리 로마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31] 로마는 칸나이 전투 포로들의 몸값을 지불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많은 동맹 도시들이 로마를 등졌음에도 불구하고, 바로가 로마에 도착하자 시민들은 그가 대패의 책임자임을 알면서도 "공화국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며 감사를 표하며 그를 맞이했다.[32] 전투에 반대했던 파울루스는 전사하고 패배의 책임자인 바로가 살아남아 감사까지 받은 것은 행운의 여신 포르투나의 가호 덕분이라는 말도 있었다.[33]
기원전 215년, 바로는 프로콘술로서 임페리움(지휘권)이 연장되어 계속해서 아풀리아 지역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36] 이후 법무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레비누스에게 군대를 넘겨주고, 아드리아해에 면한 피케눔 지역으로 파견되어[37] 기원전 213년까지 프로콘술로서 해당 지역을 방어했다.
4. 1. 원로원 충원
잇따른 패배로 원로원의 의원 수가 크게 줄어들어 새로운 의원을 뽑아야 했다.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원로원 의원 명단을 새로 만드는 것은 본래 감찰관의 임무였으므로, 살아있는 사람 중 가장 먼저 감찰관을 지낸 경험이 있는 사람을 독재관으로 뽑아 이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독재관을 뽑는 것은 집정관의 역할이었기 때문에, 아풀리아에 있던 바로가 로마로 소환되어 마르쿠스 파비우스 부테오를 독재관으로 선출했다[34]. 부테오가 명단을 새로 만들자, 바로는 다음 해 선거 관리를 맡기 싫어하여 다시 자신의 임지로 돌아갔다[35].5. 기원전 215년 ~ 207년
기원전 215년에 프로콘술로서 임기가 연장되어 아풀리아에서 군대를 지휘했다.[15] 이후 새로운 병사를 모집하고 지역 방어를 위해 피케눔으로 파견되었다.[16]
기원전 214년과 213년에도 임기가 연장되어 피케눔에서 군단을 계속 지휘했다.[17][18][19][20]
기원전 208년, 에트루리아에서 반란 조짐, 특히 아레초의 움직임이 불안하다는 보고가 있자, 프라에토르의 권한을 가진 프로프라에토르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그는 아레초에서 120명의 인질을 확보하여 로마로 보냈고,[38] 이후 로마 원로원에 에트루리아의 불안이 여전히 남아있다고 보고했다.[21] 에트루리아의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바로는 1개 군단을 이끌고 아레초를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고 그곳에 주둔했다.[21][38]
기원전 207년, 전년에 전사한 집정관 티투스 퀸크티우스 크리스피누스의 군대를 타란토에서 인계받게 된 가이우스 호스틸리우스 투불루스를 보좌하기 위해, 바로는 다시 프로프라에토르로서 에트루리아로 파견되었다.[39] 그는 2개 군단을 이끌고 에트루리아를 방비했으며,[39][22] 이후 다음 해 프로콘술로 부임한 마르쿠스 리비우스 살리나토르에게 군단을 인계했다.[40]
6. 말년
바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나머지 기간 동안에는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그러나 기원전 200년에 두 가지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된다.
하나는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3인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이다.[23] 이 사절단은 카르타고와 누미디아를 방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상세 내용은 하위 '외교 활동' 섹션 참조)
다른 하나는 베누시아로 돌아가 식민지 건설을 책임지는 3인 위원(''triumviri coloniae ducendae'') 중 한 명으로 활동한 것이다.[24]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황폐해진 베누시아 지역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새로운 식민지 주민을 정착시키는 임무였다. 바로와 함께 이 임무를 수행한 인물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와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였다.
또한, 바로가 기원전 197년까지 동전을 만드는 역할(동전 주조자)을 했을 가능성도 제기되었다.[25]
이후 바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정계에서 은퇴했거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6. 1. 외교 활동
기원전 203년,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그리스 국가들은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가 자신들의 지원 요청 사절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카르타고에 4,000명의 원군을 보냈다고 로마에 알렸다. 이에 로마는 필리포스 5세의 조약 위반을 추궁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바로는 이 사절단의 일원으로 활동했다.기원전 200년, 바로는 북아프리카로 파견된 3인 외교 사절단의 일원으로 임무를 수행했다.[23] 이 사절단은 카르타고와 누미디아 양측 모두를 방문하는 임무를 맡았다.
우선 카르타고에서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기원전 201년에 종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 장군 하밀카르가 여전히 갈리아에서 군사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카르타고로 도망친 로마인들이 송환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당시 활발했던 반(反)로마파 인물들의 인도를 요구하는 협상을 진행했다.[23]
다음으로 누미디아에서는 자마 전투에서 로마를 도와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마시니사에게 누미디아 왕이 된 것을 축하하는 선물과 메시지를 전달했다.[23] 또한,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 전쟁을 시작하게 되면서 누미디아 기병의 지원을 요청하고, 이전의 누미디아 왕 슈팍스의 아들인 웰미나와도 협상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이 임무를 위해 바로가 포함된 사절단에게는 5단 노선 사용이 허가되었다.
7. 평가
프론티누스(Sextus Iulius Frontinus|섹스투스 율리우스 프론티누스la)에 따르면, 바로는 칸나이 전투 패전 이후에도 국가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머리카락과 수염을 손질하지 않고, 식사 때도 눕지 않았으며, 사람들이 주는 영예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오직 국가를 위해 헌신하며 "국가에는 자신보다 더 행운이 따르는 정무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43]. 또한 독재관 직책 제안을 거부했다는 일화도 있다. 이러한 행동으로 사람들은 그를 용서했으며, 그의 인격은 높이 평가받았다고 한다[4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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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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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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