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 다미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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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토 다미키치는 1772년 오와리 국에서 태어난 도공으로, 세토야키 가문의 분가 출신이다. 그는 1801년 나고야로 이주하여 아츠타 봉행의 도움을 받아 청나라의 자기 제법을 배우고 가마를 짓게 되었다. 이후 규슈로 건너가 아마쿠사, 나가사키 등지에서 자기 기술을 습득한 후, 1807년 세토로 돌아와 소메쓰케 자기 제조에 성공했다. 그는 세토에 자기를 가져온 공로로 '자조'로 불리며, 1808년 가토 성을 하사받고 소메쓰케야키를 부흥시켰다. 1824년 사망했으며, 위작 논란과 현지처 설이 존재한다. 그의 생애는 연극, 오페라,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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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토 다미키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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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가토 다미키치 |
후리가나 | 가토 다미키치 |
![]() | |
출생일 | 1772년 3월 23일 (메이와 9년 2월 20일) |
출생지 | 오와리국(아이치현) 가스가이군 세토무라 |
사망일 | 1824년 7월 29일 (분세이 7년 7월 4일) |
사망지 | 오와리국 가스가이군 세토무라 |
직업 | 도공 |
배우자 | 미쓰 |
자녀 | 사토 |
2. 생애
에도 시대 후기의 도공으로, 세토야키(瀬戸焼)의 자기(磁器) 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당시 아리타야키(有田焼) 등 다른 지역 자기와의 경쟁에서 어려움을 겪던 세토 도자기 산업의 부흥을 위해 규슈 지역으로 건너가 새로운 자기 제조 기술, 특히 소메쓰케(染付, 청화백자 기법)를 배워왔다.
세토로 돌아온 후 소메쓰케야키 제작에 성공하여 세토 도자기의 명성을 되찾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 공로로 '자조(磁祖, 자기의 시조)'로 불리며 가토 가게마사(도조, 陶祖)와 함께 세토 지역에서 추앙받고 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세토는 다시 한번 중요한 도자기 생산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2. 1. 초기 생애
메이와 9년(1772년) 음력 2월 20일, 오와리 국 카스가이 군의 세토 촌(현재의 세토시)에 있던 오마츠 가마라는 가마의 차남으로 태어났다[2]. 생가는 세토의 야마토야 가문의 분가에 해당하는 가계였으며[3], 어릴 적 이름은 마츠지로였다.당시 세토 도자기는 히젠 국 아리타의 이마리야키를 비롯한 자기에 밀려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로 인해 "가마 1채당 로쿠로 1대만 허용", "가마는 장남만 계승 가능"과 같은 규제로 생산량이 제한되었다. 큰형인 하루오(가토 키치에몬)가 가마를 잇게 되면서 도공 일을 할 수 없게 된 민키치는 교와 원년(1801년)에 아버지 키치자에몬 등과 함께 아츠타 앞 신전(현재의 나고야시 미나토구)으로 이주하여 정착했다. 비슷하게 일자리를 잃은 다른 도공들도 신전 개척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주 후 민키치 등은 신전 개발을 지휘하던 아츠타 봉행 츠가네 타네오미와 만나게 된다.
2. 2. 규슈에서의 기술 습득
胤臣은 민길 등이 세토의 도공임을 알고, 이전에 입수한 청의 『도설』에 기록된 소메츠케 자기(난징 이시야키) 제법을 가르치고 자금 80냥을 지원하여 아쓰타 신덴의 낡은 둑에 가마를 짓고 시제품 제작을 하게 했다[4]. 그러나 세토시의 다른 도공들이 반발하자, 민길의 친척이자 세토 촌장인 4대 가토 도사에몬이 번에 청원하여 결국 가마를 세토로 옮겨 작업을 계속하게 되었다. "신제 소"로서 오와리 번의 어용을 받기도 했지만, 아리타 등지의 자기 품질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에 규슈에서 기술을 배워오기로 하고, 호린지 10세 학도 조에이로부터 아마쿠사에도 자기 가마가 있으며, 아마쿠사 도코지의 15세 주지 조란 텐츄가 히시노 촌(현재의 세토시 히시노정) 출신이라는 정보를 얻어, 텐츄에게 의탁하여 민길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조에이의 편지를 가지고 민길은 분카 원년(1804년) 음력 2월 22일 세토를 출발했다. 고세키인의 승려 겐몬과 동행하여 약 한 달의 여정 끝에 3월 말 아마쿠사에 도착했다. 텐츄와 우에다 겐사쿠(우에다 기친, 다카하마 촌장이자 가마 주인)의 주선[5]으로 우에다 가문의 사라야마(가마터)에 머물며 발 물레 사용법[6]을 배웠다. 약 4개월 후에는 하루에 찻잔 250개 정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히젠 지역의 기술을 배우고자 텐츄를 통해 기친에게 편지를 부탁했고, 기친으로부터 여비도 받아[7] 9월 초 나가사키 축제 시기에 맞춰 나가사키로 건너갔다[8].
축제를 구경한 후, 텐츄의 편지를 가지고 기사키 군 사세보 촌(현재 나가사키현 사세보시)에 있는 사이호지의 16세 주지 지묘 도스이를 찾아갔다. 그 절에 잠시 머물며 도스이의 소개로 하야키 촌의 야쿠오지 주지 현주 슌린에게 의탁했다. 슌린을 통해 히라도번의 어용 가마인 미카와치 사라야마의 이마무라 기우에몬 가마에 고용될 기회를 얻었으나[9], 시간이 남아 일단 아마쿠사로 돌아가 텐츄와 기친에게 미카와치행을 알렸다[7].
12월 16일 미카와치에 들어갔지만, 열흘 만에 촌장으로부터 "다른 나라 사람은 고용할 수 없다"는 통보를 받고 해고되어 야쿠오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슌린의 조언으로 에이나가 촌(후의 히가시소노기군 오리오세 촌 카미게이치후쿠면 아자 에이나가, 현 사세보시 에이나가 정)의 후쿠모토 키에몬을 찾아갔고, 키에몬의 사촌인 마쓰우라군 이치노세 촌[10](현 나가사키현 기타마쓰우라군 사자정)의 후쿠모토 진자에몬에게 소개받았다. 먼저 사자 촌(현 기타마쓰우라군 사자정)의 도코지를 방문하여 승려와 함께 사라야마로 향했고, 12월 28일 진자에몬에게 고용되었다[11].
다음 해인 문화 2년(1805년), 민길은 흙 만들기부터 시작하여 반년이 지났을 무렵에는 하루에 찻잔 300개 정도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소메츠케 구이 기원'에 따르면, 진자에몬은 민길의 꼼꼼한 일 처리를 보고 "비슈(오와리)의 가마 장인임에 틀림없다"고 간파했으며, 민길은 "돌이나 흙, 땔감 등이 풍부하다면 이사 오고 싶다"고 털어놓았다고 한다. 이는 미카와치에서의 경험 때문에 처음에는 오와리 출신임을 숨겼음을 시사한다[12].
같은 해 가을, 진자에몬의 아들(적자인 신자에몬?[13])이 이세 참배를 위해 자리를 비운 사이 가마 작업을 도우며 유약 배합법 등을 알게 되었다. 안거를 위해 도코지를 방문한 텐츄를 통해 진자에몬에게 휴가를 요청했고, 진자에몬도 결국 동의했다. 1년간의 보은 봉공 후, 민길은 문화 4년(1807년) 1월 7일 후쿠모토 가문을 떠났다고 한다[14].
이후 민길은 아리타 도자기의 상회(上絵, 우와에) 기법을 배우려고 아마쿠사 출신이라고 속이고 아리타의 상회 작업장을 방문했지만, 나베시마 번의 엄격한 정보 통제로 인해 배우지 못하고 헛수고로 끝났다. 아리타에 머무는 약 4개월 동안 츠츠미 소우에몬의 가마집에서 30일 정도 숙식하며 마루가마의 축조 방법을 보았다고 전해지지만[15], 나베시마 번이 엄중하게 관리하던 아리타 도자기의 사라야마(皿山, 도자기 산지)에 타국 사람이 숙식했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만약 일했다면 축가마(가마를 짓는 일) 관련 업자의 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6].
약 4개월을 아리타에서 보낸 민길은 다시 아마쿠사를 방문하여 텐츄와 기친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때 기친으로부터 상회 기법을 전수받았으며[17], 세토에서 사용하는 그림 안료(고스)를 구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18][19]. 도코지(東向寺)의 가신이라는 신분의 통행증을 받아 종업원 1명을 데리고 5월 13일 귀로에 올라 6월 18일에 세토로 돌아왔다[20]. 돌아오는 길에는 우토 반도에 있던 아미타야키의 사라야마에 들렀으며[21], 이세 신궁에도 참배했다.
2. 3. 세토로의 귀환과 소메쓰케야키
세토로 돌아온 다미키치는 자기를 번주에게 헌상한 공로로 소메쓰케(染付, 청화백자 기법) 제작을 담당하는 어용달(御用達)이 되었다. 1808년 (문화 5년)에는 한 세대에 한정하여 '가토(加藤)' 성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허가되었다.[22] 또한, 기존에 '신제소(新製焼, 새로 만든 도자기)'라고 불리던 것을 '소메쓰케야키(染付焼)'로, 예전부터 만들어 오던 도기는 '본업(本業)'이라고 부르기로 정해졌다. 이를 계기로 세토의 소메쓰케는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로 출하되기 시작했고, 세토의 도자기 산업은 다시 부흥기를 맞이했다.다미키치는 귀국 후 17년이 지난 1824년 (분세이 7년) 7월 4일, 향년 53세로 사망하여 니시타니(西谷) 마을의 묘지에 매장되었다. 사망 후인 1826년 (분세이 9년), 그가 사망 직전에 청원하여 세워진 요배소(遥拝所, 현재의 요신 신사)에 합사(合祀, 여러 신을 한 곳에 모심)되었다.
세토에 자기 기술을 들여온 공적으로 인해 다미키치는 '자조(磁祖, 자기의 시조)'라고 불리며, '도조(陶祖, 도기의 시조)'인 가토 가게마사와 함께 세토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공적을 기려 1928년 (쇼와 3년) 11월 10일에는 쇼와 천황 즉위에 따라 종5위가 추증되었다.[23]
1953년 (쇼와 28년), 시민들의 기부금으로 데라모토초(寺本町)의 호센지에 도조 가토 가게마사의 묘비와 함께 다미키치의 새로운 묘비가 세워졌다. 그러나 이 묘비는 1995년 (헤이세이 7년)에 요신 신사 경내로 이전되었다.[24]
2. 4. 만년
세토로 돌아온 다미키치는 자기를 번주에게 헌상한 공로로 소메츠케(염부) 어용달이 되었다. 1808년 (문화 5년)에는 1대에 한정된 묘자(苗字, 성) 사용 면제(「가토」성을 공칭하는 것이 허가)를 받았다.[22] 또한, 기존에 '신제소'(新製焼, 새로 만든 가마)라 불리던 것을 '소메츠케야키'(染付焼, 염부)로, 옛날부터 있던 도기를 '본업'(本業)이라고 부르기로 정해졌다. 이로써 세토 소메츠케는 교토, 오사카, 에도 등지로 출하되며 세토 가마는 부흥기를 맞았다. 다미키치는 귀국 후 17년 뒤인 1824년 (분세이 7년) 7월 4일 향년 53세로 사망하여 니시타니 집락의 묘지에 묻혔다. 사망 후인 1826년 (분세이 9년), 사망 직전 다미키치의 청원으로 열린 요배소(遥拝所, 현재의 요신 신사)에 합사되었다.세토에 자기를 도입한 공적으로 '자조'(磁祖)라고 불리며, '도조'(陶祖) 가토 가게마사(藤四郎)와 함께 세토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여겨진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1928년 (쇼와 3년) 11월 10일에는 쇼와 천황 즉위에 따라 종5위가 추증되었다.[23]
1953년 (쇼와 28년), 시민들의 기부로 데라모토초의 호센지에 도조의 묘비와 함께 새로운 묘비가 세워졌으나, 이 묘비는 1995년 (헤이세이 7년)에 요신 신사 경내로 옮겨졌다.[24]
3. 논란과 위작 문제
민키치의 생애와 업적을 둘러싸고 몇 가지 논란이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그가 규슈에서 도자기 기술을 배우던 시절, 자신의 신분과 처자식의 존재를 숨기고 현지 가마의 딸과 결혼하여 기술을 습득한 뒤 세토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25]. 또한, 세토로 찾아온 현지처와 아들이 민키치에게 본처가 있음을 알고 비관하여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비극적인 이야기도 함께 전해져 왔다[25]. 그러나 이러한 현지처 설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과 정황을 근거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더불어 민키치의 작품으로 알려진 도자기 중 상당수가 실제로는 후대에 만들어진 위작이라는 문제도 제기되었다. 특히 특정 낙관이 찍힌 도자기들이나 민키치가 아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대흑상 등은 제작 연대나 관련 인물 기록의 불일치 등을 이유로 진위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32][33][34].
3. 1. 현지처 설
민키치가 자기 제조법을 알아내기 위해 "오와리에서 온 사실과 처자가 있다는 것을 숨기고 가마터 딸과 결혼하여 제조법을 알게 된 후 세토로 도망쳤다", "세토로 찾아온 모자가 민키치에게 처자가 있음을 알고 연못에 몸을 던졌다"는 이야기가 언제부터인가 세토에 전해져 왔다[25]. 그러나 이 설에 대해서는 여러 의문점이 제기된다.- 신분 은폐 및 도주 여부: 현존하는 텐추가 우에다 기친에게 보낸 의뢰장[5]에는 "나와 같은 고향 사람"이라고 적혀 있어, 민키치가 자신의 출신을 숨기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또한, 기타마츠우라군 이치노세 사라야마에서도 그의 정체는 일찍 드러났다[12]. 민키치는 처자를 버리고 도망친 것이 아니라, 1년간의 보은 봉사를 마친 후인 문화 4년(1807년) 1월 7일에 후쿠모토 가문을 떠났다[14]. 후쿠모토 가문의 후예에게는 "번주[26]로부터 하사받은 하오리가 가토 가문으로부터 보내져 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27], 귀국 후에도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소메쓰케야키 기원』의 기록: 민키치의 여정을 기록한 『소메쓰케야키 기원』에는 세토 귀향 당시 부모 형제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처자에 관한 내용은 전혀 없다. 민키치의 유일한 친자식인 사토는 분세이 9년(1826년)에 19세[28]의 나이로 사망했다[25].
- 친자 지장: 민키치의 자식을 데리고 온 현지처 모자의 동반 자살을 위로하기 위해 건립되었다고 전해지는 "친자 지장"(세토시 신세기 공예관 동쪽 입구 옆 소재) 중 1체에는 민키치가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인물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29]. 이 지장은 원래 태평양 전쟁 중 도로 정비 과정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다른 장소에 있었다.
- 후쿠모토 진자에몬 차녀의 행적: 민키치의 현지처로 알려진 후쿠모토 진자에몬의 차녀(본명 불명)는 나가사키현 사사 마을에 묘가 있으며, 50세에 사망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는 세토에서 아이와 함께 자살했다는 설과 모순된다. 이 여성의 자녀에 대한 기록은 없다.
- 후쿠모토 가마의 역사: 사사의 후쿠모토 가마는 민키치가 떠난 후 쇠퇴했다고 알려졌으나, 민키치 귀국 다음 해인 분카 5년(1808년)에 진자에몬의 적자인 신자에몬은 번주 마쓰우라 기요시로부터 도자기 어용을 명령받았다[30]. 후쿠모토 가마가 폐요된 것은 진자에몬이 사망한 지 2년 후인 분세이 8년(1825년)으로[31], 이것이 쇠퇴설의 근원으로 여겨진다.
한편, 『명암 연 염부』(후술)를 본 도예가 가토 도쿠로는 1928년 사사를 방문했을 때, 규슈 지역에서는 민키치와 딸의 비련에 관한 이야기를 전혀 들을 수 없었다며, 이는 구타니야키의 고토 사이지로 이야기와 혼동된 것이 아닌가 하고 지적했다[25]. 이러한 이야기가 세토에만 전해지는 점을 들어, "이세 참배 등으로 규슈를 떠난 딸이 세토를 방문하여 민키치를 만나려 했던 사실이 와전된 것이 아닐까"하는 추측도 있다.
3. 2. 위작 문제
사자에 현지처 설과도 관련된 "민키치의 작품"이라고 불리는 '''낙관'''이 찍힌 도자기가 여러 점 존재한다. 그러나 민키치의 발자취에 대해 현지 조사를 실시한 가토 쇼조(1901년 - 1979년)[32]는 이러한 낙관이 20가지 이상이며, 도자기 대부분이 산화염으로 소성되었다는 점[33] 등을 근거로 위작이라고 단정했다.또한, 출처가 같은 "민키치가 아들의 수호 본존으로 구운" 대흑상이 있는데, 이는 전후 혼란기에 특정 인물들(당시 사세보시 기하라정에 거주하던 도예가와 그의 숙부)이 퍼뜨린 이야기로, 1956년 (쇼와 31년) 사자마치 교육위원회에서 간행된 『사사마치 향토지』에도 게재되었다. 하지만 가토 쇼조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 이야기에 의문을 제기했다[34].
주장 내용 | 반박 근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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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코지 주지 이름이 야마다 게이칸이다. | 도코지의 역대 주지 기록에 해당 이름이 없으며, 승려가 야마다 같은 성을 사용한 것은 메이지 유신 이후이다. 당시 주지는 17대 고호 다이간이었다[35]. |
민키치가 수행한 곳은 야마다 게이칸의 소꿉친구인 이치노세 사라야마의 시이바 죠자에몬 가마이다. | 실제 수행처는 후쿠모토 진자에몬의 가마이며[11], 당시 이치노세에서 가마를 운영한 것은 진자에몬뿐이었다. |
민키치에게 기술을 가르치기 위해 이치노세에서 도망친 시이바 죠자에몬이 나중에 미카와치 지역에서 대대로 가마를 가졌다. | 미카와치는 히라도 번의 번 가마가 있던 곳으로, 도망자가 가마를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 |
시이바 죠자에몬 도주 후, 어떤 거상이 그의 자산을 매입했고 대흑상은 그 딸의 혼수품이 되었다. | 딸의 시집 간 곳으로 알려진 기하라정의 혼가에서는 그 이야기 자체를 전면 부정하고 있다[36]. |
실존했던 시이바 죠자에몬은 미카와치의 기하라정(구 기하라촌)에 대대로 이어져 온 요업가이다. | 자손들에 따르면 일족이 다른 곳으로 이사한 적은 없다고 한다[37]. |
앞서 언급된 도자기 중 문화재로 지정되었던 것은 나중에 지정 해제되었다[37]. 대흑상에는 "爲'''椎葉'''丈吉, 文化三"이라고 새겨져 있어[38], 민키치의 수행처가 시이바 죠자에몬의 가마이고 현지처가 그의 딸(혹은 손녀)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지만, 이러한 의문점들이 해소되지 못해 결국 위작으로 단정되었다[38].
한편, 사사마치 구가 로쿠조 가문에 민키치 작품으로 전해지는 『품에 깃든 잣나무 향부』[39][40]는 진품일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진다. 그 근거로는 출처가 데쓰이 오하시(도코지 16대 주지를 지낸 선승)라는 점, 상자에 "오와리의 민키치가 만들었다"고 적혀 있는 점, 오리베야키 기법을 사용하고 환원염으로 소성되었다는 점 등이 제시된다[41]. 참고로, 『품에 깃든 잣나무 향부』에는 낙관 등이 없으며, 세토에서 초대 민키치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다른 도자기에도 낙관을 포함한 명칭 등은 없다[42].
민키치가 뛰어난 공적에도 불구하고 마을이나 가마 동료들의 직책에 오르지 못했다는 점, 1818년 (분세이 원년) 후카가와 신사 15대 궁사 니노미야 모리쓰네가 민키치의 규슈행에 대해 기술한 『염부소기원』이 '''민키치의 구술'''을 기록한 것이며 그 안에서 민키치가 "동행한 인물에게 숙박부를 대필하게 했다"고 언급한 점, 인명이나 지명 등에 오자가 많은 점(민키치가 확인하지 않았을 가능성), 덴추에 대한 답장조차 아버지 요시자에몬의 이름으로 보내진 점 등 서류를 포함하여 초대 민키치가 직접 쓴 문장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민키치는 문맹이었을 가능성이 지적된다[43]. 이것이 그의 작품에 명칭이나 낙관이 없는 이유 중 하나로 추정된다.
4. 가토 다미키치를 그린 작품
가토 다미키치의 생애와 업적은 연극, 오페라, TV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작품의 소재로 다루어졌다.
4. 1. 연극
ふたおもて えにしのそめつけ|명암 연염부일본어는 1927년 (쇼와 2년) 10월에 오사카 나카자에서 상연된 연극이다.[44]"'''사사의 악마, 세토의 가마신'''"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연극은 히라도 마쓰우라 번의 어용 가마에 가명으로 잠입한 민키치가 가마 주인의 딸 치즈루와 결혼하여 히라도 야키의 기술을 훔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이로 인해 가마 주인 닌자에몬과 그의 아들 고스케는 영구 투옥되고, 마을 사람들은 치즈루에게 민키치의 후미에를 밟으라고 강요하며 치즈루는 울부짖는다(서막). 이후 민키치의 아들 카조를 데리고 세토를 방문한 치즈루는 민키치와 영원히 이별하게 된다(제2막).
이 연극의 각본은 오모리 치세츠가 썼으며, 민키치 역은 초대 나카무라 간지로가, 치즈루 역은 3대 나카무라 후쿠스케가, 민키치의 본처 오시나 역은 3대 나카무라 자쿠에몬이 연기했다.
당시 침체되어 있던 세토 지역에서는 이 연극의 선전 효과를 기대하며 무대 소품으로 사용할 항아리 등을 제공했다. 그러나 이 연극은 민키치가 현지 아내를 두고 기술을 훔쳐 달아난다는 이미지를 고착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또한, 이 연극은 줄거리가 조금씩 바뀌면서 대중 연극으로 여러 지역에서 공연되었고, 이 과정에서 원래 이야기와는 다른 민키치의 이미지가 더욱 확산되었다.[45]
이후 1988년(쇼와 63년)에는 극단 테아토르 하카타에 의해 사사초 문화회관에서 관련 연극이 상연되었다.[46] 이시야마 코이치로가 원작을 쓰고 노지리 토시히코가 연출한 이 연극은 기본적인 줄거리는 『명암 연염부』와 비슷하게, 사라야마에 잠입한 민키치와 후쿠모토 니자에몬의 딸 이토 사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었다.
4. 2. 오페라
가토 쇼조의 『민키치 가도』 등을 원전으로 한 "세토 시민 오페라"로서 1997년에 세토시 문화센터에서 상연되었다. 2005년에는 각본을 수정하여 아이치 엑스포 나가쿠테 회장의 EXPO홀에서도 재상연되었다.[47]4. 3. TV 드라마
1960년부터 1961년까지 NHK에서 방송된 드라마 시리즈 '이 빛은 사라지지 않고'의 한 편으로, 가토 다미키치를 다룬 작품이 총 5화에 걸쳐 방영되었다.4. 4. 소설
- ''도공 민키치'' - 구니에다 간지 (1937년)
5. 2대 이후
초대 가토 다미키치(민길)와 아내 미츠 사이에는 아들이 없었다. 외동딸 사토의 남편으로 삼기 위해 형 하루오의 차남 요시지로를 양자로 들였다. 하지만 사토는 출산 후 건강이 악화되어 사망했고, 태어난 아이도 일찍 세상을 떠나 초대 다미키치의 직계 자손은 남지 않게 되었다.
3대 사쿠시로는 2대 요시지로와 그의 후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4대 요네지로(米次郎)는 술버릇이 좋지 않았고, 결국 집을 나가 방랑 생활을 했다. 그는 1931년 (쇼와 6년) 야마구치현 아사군 아즈마 촌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5대 겐고는 4대 요네지로의 조카, 즉 여동생 부부의 차남이었다.[3] 5대 이후 가토 가문은 도자기 만드는 일(陶業)에서 손을 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세대 | 이름 |
---|---|
2대 | 요시지로 |
3대 | 사쿠시로 |
4대 | 요네지로 |
5대 | 겐고 |
6대 | 쿄메이 |
참조
[1]
웹사이트
加藤民吉生誕250年事業で要望 瀬戸の6団体 市に提出
https://www.chukei-n[...]
中部経済新聞
2020-04-02
[2]
웹사이트
瀬戸焼1300年の伝統と技術・磁祖加藤民吉
http://www.city.seto[...]
[3]
서적
加藤(2004)
[4]
서적
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5]
서적
加藤(2004)
[6]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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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加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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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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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々町郷土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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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々町郷土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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加藤(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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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々町郷土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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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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佐々町郷土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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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34]
서적
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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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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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38]
서적
佐々町郷土史
[39]
웹사이트
民吉作の皿
http://www.sazacho-n[...]
[40]
문서
『瀬戸市史』では「重ね柏葉の小皿」と表記。佐々町の銘菓『民吉もなか』はこの小皿をかたどった形をしている。
[41]
서적
瀬戸市史 陶磁史篇 三
[42]
문서
2代民吉の作陶とされるものには銘が入ったものがある。
[43]
서적
加藤
2004
[44]
서적
加藤
2004
[45]
서적
佐々町郷土史
[46]
웹사이트
早稲田大学演劇博物館 現代演劇上演記録
http://enpaku.waseda[...]
2016-03-05
[47]
웹사이트
オペラ「民吉」~コンサート形式~第1回 EXPO 2005 AICHI, JAPAN
http://www.expo2005.[...]
[48]
간행물
町制施行70周年記念 長崎県佐々町町勢要覧2011 本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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