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분 오미-와카사 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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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은 1662년 6월 16일에 오미국과 와카사국을 중심으로 발생한 지진이다. 이 지진으로 인해 교토, 오미, 와카사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건물 붕괴, 사망 등의 피해가 발생했으며, 지진 규모는 M7.5 이상으로 추정된다. 지진으로 인한 지각 변동과 쓰나미 가능성이 제기되었으며, 아사이 료이의 《가나메이시》는 이 재해의 사회상을 기록한 최초의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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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분 오미-와카사 지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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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명칭 |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 |
로마자 표기 | Kanbun Omi-Wakasa Jishin |
일본어 표기 | 寛文近江・若狭地震 |
지진 정보 | |
발생 일시 | 1662년 6월 16일 (간분 2년 5월 1일) |
진앙 | 35.2 |
규모 | M7.25~7.6 |
피해 정보 | |
사망자 | 700–900명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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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지진의 기록
간분 2년 5월 1일 사시 하각부터 오시 상각 (1662년 6월 16일 10~12시경)에 걸쳐, 오미, 와카사를 중심으로 2차례의 격렬한 흔들림이 발생했다. 이날은 폭우가 쏟아졌고, 교토의 지진동도 강하여 『기희공기』에는 호에이 지진 당시 교토의 흔들림은 간분 지진의 1/5 정도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중일기』에는 교토에서 니조 성의 어번중 오두막 등이 모두 파손되었고, 마을 1,000여 채가 무너졌으며, 사망자 200여 명, 후시미 성도 각지에서 파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미에서 사와산(현 히코네시)의 성이 기울어지고 석축이 5~6백 간 붕괴되었으며, 가옥 1,000여 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0여 명, 오미조 (현 다카시마시)에서는 가옥 1,022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8명, 소와 말도 많이 죽었으며, 구키타니 (현 다카시마시)는 특히 심한 지진동을 겪어 가옥이 무너지고 화재로 인해 주변이 전부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소나 오쓰도 피해가 컸으며, 미나구치 성에서도 문, 담, 어전이 파손되었다.[15]
『낙수잡담 일언집』에는 후시미에서 마을 320여 채가 붕괴, 사망자 4명, 오미 시가, 가라사키(현 오쓰시)에서는 밭 85정 이상이 흔들리고, 일반 가옥 1,570채가 붕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연실록』에는 아타고 신사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가 크게 파손되었으며, 지온인과 기온도 대부분 파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엄유원실기』에 따르면 니조 성은 각처가 파손되었으나, 금리원은 무사했으며, 단바 가메야마 성, 사사야마 성, 셋쓰 아마가사키 성, 오미 제쇼 성, 와카사 오바마 성은 붕괴되었고, 오미국구키타니에서는 구키 진야가 붕괴되었으며, 많은 가신들과 함께 은거하고 있던 선대 영주 구키 노리쓰나가 압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강진은 오미, 와카사 외에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 탄바, 미노, 이세, 스루가, 미카와, 시나노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비라 산 부근에서 현저했다. 『게이엔 략기』에 따르면 니조 성이나 오사카 성도 파손될 정도의 흔들림이었고, 에도에서도 작은 지진이었으며[15], 후쿠야마에서도 유감, 『전중일기』에는 "나가사키에서도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역 | 추정 진도[9] |
---|---|
기나이 | 교토 (5 - 6), 후시미 (6), 우지 (5 - 6), 야와타 (5 - 6), 다카쓰키 (5 - 6), 오사카 (5 - 6), 후세 (5), 야오 (5), 기시와다 (5 - 6), 아마가사키 (5 - 6), 가모 (5), 나라 (5), 야마토고리야마 (5), 덴리 (E), 사쿠라이 (5) |
도카이도 | 도요하시 (S), 오카자키 (4), 도요타 (5), 이누야마 (4), 나고야 (5), 구와나 (5 - 6), 가메야마 (5-6), 스즈카 (E), 쓰 (5), 이세 (4), 우에노 (5) |
도산도 | 미아사 (E), 시라토리 (4), 가이즈 (5), 이마즈 (5 - 6), 구키 (7), 다카시마 (7), 가쓰라가와 (6), 사카모토 (6), 히에이산 (5), 히코네 (7), 오미하치만 (5), 야스 (5 - 6), 미나구치 (5 - 6), 도미카와 (6), 제쇼 (6), 오쓰 (6) |
호쿠리쿠도 | 도야마 (5), 후쿠노 (5), 몬젠 (E), 후쿠이 (5), 쓰루가 (6), 미하마 (6), 미카타 (5), 가미나카 (5 - 6), 오바마 (5 - 6) |
산인도 | 가메오카 (5 - 6), 사사야마 (5), 후쿠치야마 (5), 마이즈루 (E), 고쿠후 (4), 호키 (E) |
산요도 | 오카야마 (E) |
난카이도 | 와카야마 (5) |
S: 강진 (≧4), E: 대지진 (≧4), M: 중지진 (2 - 3), e: 지진 (≦3) |
규모는 가와스미 히로시에 의해 ''M''K = 5.5로 하여 ''M'' = 7.6 (''M'' = 4.85 + 0.5 ''M''K)로 추정되었고[19], 7 1/4 - 7.6[9], 또는 7.4[20], ''M'' 7.5 또는 그 이상[21]으로 추정되지만, 지진계 기록이 없는 역사 지진이므로 그 수치는 불확정성을 포함한다.
『속사우초』에는 "그 후에도 밤낮으로 흔들림이 계속되어 7월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은 12월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21]
2. 1. 피해 상황
간분 2년 5월 1일(1662년 6월 16일) 오미, 와카사를 중심으로 2차례의 격렬한 흔들림이 발생했다. 이날 폭우가 쏟아졌고, 교토의 지진동도 강하여 호에이 지진(1707년) 당시 교토의 흔들림은 간분 지진의 1/5 정도였다고 한다.교토에서는 니조 성의 오두막 등이 파손되었고, 마을 1,000여 채가 무너졌으며, 사망자 200여 명이 발생했다. 후시미 성도 각지에서 파손되었다. 아타고 신사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가 크게 파손되었으며, 지온인과 기온도 대부분 파손되었다. 대불은 1596년 게이초 후시미 지진에 이어 또 다시 파손되어, 이후 목조로 재건되었다. 파손된 대불의 동재는 간에이 통보(문전)의 재료로 이용되었다는 풍설이 있으나, 원자재의 화학적인 성분 분석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오미에서는 성이 기울어지고 석축이 붕괴되었으며, 가옥 1,000여 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0여 명이 발생했다. 오미조 (현 다카시마시)에서는 가옥 1,022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8명이 발생했으며, 구키타니 (현 다카시마시)는 화재로 인해 주변이 전부 소실되었다. 오쓰도 피해가 컸으며, 미나구치 성에서도 문, 담, 어전이 파손되었다. 구키타니에서는 구키 진야가 붕괴되며 은거하고 있던 선대 영주 구키 노리쓰나가 압사했다.[15]
강진은 오미, 와카사 외에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 탄바, 미노, 이세, 스루가, 미카와, 시나노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오사카 성도 파손될 정도의 흔들림이었다.[15] 나가사키에서도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피해 전체 규모는 사망자 880여 명, 붕괴 가옥 약 4,500채로 추정된다.[9]
아사이 료이의 『가나메이시』(간분 2년 8월부터 같은 해 말까지 완성)는 재해의 사회상을 전달하는 최초의 자료 지진지이다.[16]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은 12월까지 기록되어 있다.[21]
지역 | 추정 진도[9] |
---|---|
기나이 | 교토 (5 - 6), 후시미 (6), 우지 (5 - 6), 야와타 (5 - 6), 다카쓰키 (5 - 6), 오사카 (5 - 6), 후세 (5), 야오 (5), 기시와다 (5 - 6), 아마가사키 (5 - 6), 가모 (5), 나라 (5), 야마토고리야마 (5), 덴리 (E), 사쿠라이 (5) |
도카이도 | 도요하시 (S), 오카자키 (4), 도요타 (5), 이누야마 (4), 나고야 (5), 구와나 (5 - 6), 가메야마 (5-6), 스즈카 (E), 쓰 (5), 이세 (4), 우에노 (5) |
도산도 | 미아사 (E), 시라토리 (4), 가이즈 (5), 이마즈 (5 - 6), 구키 (7), 다카시마 (7), 가쓰라가와 (6), 사카모토 (6), 히에이산 (5), 히코네 (7), 오미하치만 (5), 야스 (5 - 6), 미나구치 (5 - 6), 도미카와 (6), 제쇼 (6), 오쓰 (6) |
호쿠리쿠도 | 도야마 (5), 후쿠노 (5), 몬젠 (E), 후쿠이 (5), 쓰루가 (6), 미하마 (6), 미카타 (5), 가미나카 (5 - 6), 오바마 (5 - 6) |
산인도 | 가메오카 (5 - 6), 사사야마 (5), 후쿠치야마 (5), 마이즈루 (E), 고쿠후 (4), 호키 (E) |
산요도 | 오카야마 (E) |
난카이도 | 와카야마 (5) |
S: 강진 (≧4), E: 대지진 (≧4), M: 중지진 (2 - 3), e: 지진 (≦3) |
2. 2. 피해 규모
간분 2년 5월 1일(1662년 6월 16일) 오시 상각(10~12시경), 오미와 와카사를 중심으로 2차례의 격렬한 지진이 발생했다.[15] 이날 폭우가 쏟아졌으며, 교토에서도 강한 진동이 감지되었다. 호에이 지진(1707년) 당시 교토의 진동은 길었지만 건물 파손은 없었던 반면, 간분 지진은 호에이 지진의 1/5 정도 강도였음에도 건물이 붕괴될 정도였다고 한다.[9]교토에서는 니조 성의 오두막 등이 파손되고 1,000여 채의 가옥이 붕괴, 200여 명이 사망했으며, 후시미 성도 각지에서 파손되었다.[15] 오미에서는 사와산성이 기울고 석축이 붕괴되었으며, 가옥 1,000여 채가 무너지고 30여 명이 사망했다. 오미조 번(현 다카시마시)에서는 가옥 1,022채가 붕괴되고 38명이 사망했으며, 구키 번(현 다카시마시)은 지진과 화재로 주변이 소실되었다.[15] 오쓰시도 피해가 컸으며, 미나구치 성에서는 문, 담, 어전이 파손되었다.[15]
아사이 료이의 『가나메이시』(간분 2년 8월~말 완성)는 재해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최초의 자료이다.[16]
대불은 게이초 후시미 지진(1596년)에 이어 또다시 파손되어 목조로 재건되었다.[17] 파손된 대불의 동재는 간에이 통보(문전)의 재료로 이용되었다는 풍설이 있으나,[17] 화학적 성분 분석 결과, 대불과 간에이 통보(문전)의 원자재 산출지가 달라[18], 대불의 동재가 주전 원료로 사용되었더라도 극히 일부에 불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8]
지진은 오미, 와카사 외에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 탄바, 미노, 이세, 스루가, 미카와, 시나노 등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했다.[15] 비라 산지 부근에서 특히 피해가 컸으며, 오사카 성도 파손될 정도였다.[15] 나가사키시에서도 지진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15] 전체 사망자는 880여 명, 붕괴 가옥은 약 4,500채로 추정된다.[9]
여진은 12월까지 기록되어 있다.[21]
지역 | 추정 진도[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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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이 | 교토 (5 - 6), 후시미 (6), 우지 (5 - 6), 야와타 (5 - 6), 다카쓰키 (5 - 6), 오사카 (5 - 6), 후세 (5), 야오 (5), 기시와다 (5 - 6), 아마가사키 (5 - 6), 가모 (5), 나라 (5), 야마토고리야마 (5), 덴리 (E), 사쿠라이 (5) |
도카이도 | 도요하시 (S), 오카자키 (4), 도요타 (5), 이누야마 (4), 나고야 (5), 구와나 (5 - 6), 가메야마 (5-6), 스즈카 (E), 쓰 (5), 이세 (4), 우에노 (5) |
도산도 | 미아사 (E), 시라토리 (4), 가이즈 (5), 이마즈 (5 - 6), 구키 (7), 다카시마 (7), 가쓰라가와 (6), 사카모토 (6), 히에이산 (5), 히코네 (7), 오미하치만 (5), 야스 (5 - 6), 미나구치 (5 - 6), 도미카와 (6), 제쇼 (6), 오쓰 (6) |
호쿠리쿠도 | 도야마 (5), 후쿠노 (5), 몬젠 (E), 후쿠이 (5), 쓰루가 (6), 미하마 (6), 미카타 (5), 가미나카 (5 - 6), 오바마 (5 - 6) |
산인도 | 가메오카 (5 - 6), 사사야마 (5), 후쿠치야마 (5), 마이즈루 (E), 고쿠후 (4), 호키 (E) |
산요도 | 오카야마 (E) |
난카이도 | 와카야마 (5) |
S: 강진 (≧4), E: 대지진 (≧4), M: 중지진 (2 - 3), e: 지진 (≦3) |
지진의 규모는 가와스미 히로시에 의해 ''M''K = 5.5, ''M'' = 7.6으로 추정되었으나,[19] 지진계 기록이 없는 역사 지진이므로 불확정성을 포함한다.[9]
2. 3. 진도 분포
간분 2년 5월 1일 사시 하각부터 오시 상각 (1662년 6월 16일 10~12시경)에 걸쳐, 오미, 와카사를 중심으로 2차례의 격렬한 흔들림이 발생했다.[15] 이날은 폭우가 쏟아졌고, 교토의 지진동도 강하여 『기희공기』의 호에이 지진 기록에 "옛날 30여 년 전(세는 나이) 5월 1일, 큰 지진이 있었다. 그 당시 지진의 1/5 정도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에이 지진 당시 교토의 흔들림은 진동이 길었지만 파손이 있을 정도였고 건물이 붕괴될 정도는 아니었으나, 교토에서는 호에이 지진조차 간분 지진의 정도의 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전중일기』에는 교토에서 니조 성의 어번중 오두막 등이 모두 파손되었고, 마을 1,000여 채가 무너졌으며, 사망자 200여 명, 후시미 성도 각지에서 파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오미에서 사와산(현 히코네시)에서 성이 기울어지고 석축이 5~6백 간 붕괴되었으며, 가옥 1,000여 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0여 명, 오미조 (현 다카시마시)에서는 가옥 1,022채가 무너지고 사망자 38명, 소와 말도 많이 죽었으며, 구키타니 (현 다카시마시)는 특히 심한 지진동을 겪어 가옥이 무너지고 화재로 인해 주변이 전부 소실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소나 오쓰(현 오쓰시)도 피해가 컸으며, 미나구치 성에서도 문, 담, 어전이 파손되었다.[15]
『낙수잡담 일언집』에는 후시미에서 마을 320여 채가 붕괴, 사망자 4명, 오미 시가, 가라사키(현 오쓰시)에서는 밭 85정 이상이 흔들리고, 일반 가옥 1,570채가 붕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연실록』에는 아타고 신사와 이와시미즈 하치만구가 크게 파손되었으며, 지온인과 기온도 대부분 파손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엄유원실기』에 따르면 니조 성은 각처가 파손되었으나, 금리원은 무사하다는 내용, 또한 단바 가메야마 성, 사사야마 성, 셋쓰 아마가사키 성, 오미 제쇼 성, 와카사 오바마 성은 붕괴되었고, 오미국구키타니에서는 구키 진야가 붕괴되었으며, 많은 가신들과 함께 은거하고 있던 선대 영주 구키 노리쓰나가 압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강진은 오미, 와카사에 더하여, 야마시로, 야마토, 가와치, 이즈미, 셋쓰, 탄바, 미노, 이세, 스루가, 미카와, 시나노에 걸쳐 광범위하게 발생했으며, 비라 산 부근에서 현저했다. 『게이엔 략기』에 따르면 니조 성이나 오사카 성도 파손될 정도의 흔들림이었고, 에도에서도 작은 지진이었다고 하며[15], 후쿠야마에서도 유감, 『전중일기』에는 "나가사키에서도 지진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지역 | 추정 진도[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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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나이 | 교토 (5 - 6), 후시미 (6), 우지 (5 - 6), 야와타 (5 - 6), 다카쓰키 (5 - 6), 오사카 (5 - 6), 후세 (5), 야오 (5), 기시와다 (5 - 6), 아마가사키 (5 - 6), 가모 (5), 나라 (5), 야마토고리야마 (5), 덴리 (E), 사쿠라이 (5) |
도카이도 | 도요하시 (S), 오카자키 (4), 도요타 (5), 이누야마 (4), 나고야 (5), 구와나 (5 - 6), 가메야마 (5-6), 스즈카 (E), 쓰 (5), 이세 (4), 우에노 (5) |
도산도 | 미아사 (E), 시라토리 (4), 가이즈 (5), 이마즈 (5 - 6), 구키 (7), 다카시마 (7), 가쓰라가와 (6), 사카모토 (6), 히에이산 (5), 히코네 (7), 오미하치만 (5), 야스 (5 - 6), 미나구치 (5 - 6), 도미카와 (6), 제쇼 (6), 오쓰 (6) |
호쿠리쿠도 | 도야마 (5), 후쿠노 (5), 몬젠 (E), 후쿠이 (5), 쓰루가 (6), 미하마 (6), 미카타 (5), 가미나카 (5 - 6), 오바마 (5 - 6) |
산인도 | 가메오카 (5 - 6), 사사야마 (5), 후쿠치야마 (5), 마이즈루 (E), 고쿠후 (4), 호키 (E) |
산요도 | 오카야마 (E) |
난카이도 | 와카야마 (5) |
S: 강진 (≧4), E: 대지진 (≧4), M: 중지진 (2 - 3), e: 지진 (≦3) |
규모는 가와스미 히로시에 의해 ''M''K = 5.5로 하여 ''M'' = 7.6 (''M'' = 4.85 + 0.5 ''M''K)로 추정되었고[19], 7 1/4 - 7.6[9], 또는 7.4[20], ''M'' 7.5 또는 그 이상[21]으로 추정되지만, 지진계 기록이 없는 역사 지진이므로 그 수치는 불확정성을 포함한다.
『속사우초』에는 "그 후에도 밤낮으로 흔들림이 계속되어 7월에 이르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여진으로 보이는 지진은 12월까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21].
2. 4. 여진
3. 지각 변동
미카타 다섯 호수의 구구시 호에서는 약 3m, 스이게츠 호 동부에서는 3 - 4.5 m 융기했다.[9][22] 와카사 미카타에서 기록된 『지두지각(地頭之覚)』에는 "우리나라는 기야마 강 어귀에서 1장여 융기했다"라고 적혀 있으며, 히나타 호, 스이게츠 호, 스가 호의 각각 동쪽 융기가 커서, 스가 호에서 동쪽의 구구시 호로 유입되던 기야마 강이 막혀, 미카타 호, 스이게츠 호, 스가 호의 호수가 갈 곳을 잃고 넘쳐, 호안의 우미야마, 이라세키, 타이, 토리하마 등 11개 마을이 침수되었다. 오바마 번 주사카이 타다나오는 운하 개삭을 명령하여, 2년에 걸친 공사로 스이게츠 호 동쪽의 우라미 언덕을 파내 운하(우라미 강)를 통해 구구시 호로 물을 흘려보내게 되었다.[23]
이러한 지각 변동은 바다 측으로까지 뻗어, 쓰나미가 발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701년의 다이호 지진 등과 함께 와카사 만을 덮친 역사 쓰나미의 검토 후보로도 거론되고 있다.[24]
아도가와 상류의 쿠츠키 계곡에서는, '마치이 붕괴'라고 불리는 대규모 붕괴가 발생하여, 붕괴 토사의 직격으로 사망자 약 560명이 발생했다. 또한, 하도 폐색 (자연 댐)이 형성되어, 제방 막힘과 붕괴에 의한 피해가 발생했다.[25]
4. 지진의 원인과 특징
오바마에서는 고문서에서 다섯 시(7 - 9시경)에 갑자기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교토에서는 뱀시경(9 - 11시경), 울림과 함께 약한 진동이 이어진 후에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오바마에서는 교토보다 초기 미동 시간이 짧고, 단층 파괴 시작점, 즉 진원에 가깝고, 단층 파괴는 북쪽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
또한 와카사의 기록에서는 발진 시각이 뱀시 이후부터 뱀시(9 - 10시경)인 것이 많고, 혹은 뱀시부터 말시(12시경)까지 지진이 계속되어 기록이 있으며, 한편 오미에서는 말시 이후부터 말시, 교토, 오사카, 나고야에서는 뱀시부터 말시, 와카야마, 오카야마, 에도 등 원방에서는 말시의 기록이 나타나, 먼저 뱀시경에 북부의 휴가 단층 등이 역단층(서쪽이 침강)으로서 활동하고, 말시경에 남부의 하나오레 단층 북부가 우측 엇갈림 단층으로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14]。원지에서는 말시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후자의 하나오레 단층의 활동 쪽이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26]。
한편 1185년의 분지 지진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되는 비와코 서안 단층대에 대해서는 가타타(현 오쓰시)에서 본 지진에 의한 지반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중세 이후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27]。
4. 1. 단층 운동
오바마 번에서는 고문서에서 오전 7시에서 9시경 갑자기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교토에서는 오전 9시에서 11시경, 울림과 함께 약한 진동이 이어진 후에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바마에서는 교토보다 초기 미동 시간이 짧고, 단층 파괴 시작점, 즉 진원에 가깝고, 단층 파괴는 북쪽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14]와카사의 기록에서는 발진 시각이 오전 9시 이후부터 오전 9시에서 10시경인 것이 많고, 혹은 오전 9시부터 12시경까지 지진이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한편 오미에서는 12시 이후부터 12시, 교토, 오사카, 나고야에서는 오전 9시부터 12시, 와카야마, 오카야마, 에도 등 원방에서는 12시의 기록이 나타난다. 먼저 오전 9시경에 북부의 휴가 단층 등이 역단층(서쪽이 침강)으로서 활동하고, 12시경에 남부의 하나오레 단층 북부가 우측 엇갈림 단층으로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14] 원지에서는 12시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후자의 하나오레 단층의 활동 쪽이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26]
한편 1185년의 분지 지진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되는 비와코 서안 단층대에 대해서는 가타타(현 오쓰시)에서 본 지진에 의한 지반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중세 이후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27]
4. 2. 진원
오바마에서는 고문서에서 오전 7시에서 9시경에 갑자기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읽을 수 있지만, 교토에서는 오전 9시에서 11시경, 울림과 함께 약한 진동이 이어진 후에 강한 진동이 덮쳐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어, 오바마에서는 교토보다 초기 미동 시간이 짧고, 단층 파괴 시작점, 즉 진원에 가깝고, 단층 파괴는 북쪽에서 시작되어 남쪽으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된다.[14]와카사의 기록에서는 발진 시각이 오전 9시에서 10시경인 것이 많고, 혹은 오전 9시부터 12시경까지 지진이 계속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오미에서는 낮 12시 이후, 교토, 오사카, 나고야에서는 오전 9시부터 낮 12시, 와카야마, 오카야마, 에도 등 원거리 지역에서는 낮 12시의 기록이 나타난다. 먼저 오전 9시경에 북부의 휴가 단층 등이 역단층(서쪽이 침강)으로서 활동하고, 낮 12시경에 남부의 하나오레 단층 북부가 우측 엇갈림 단층으로서 활동했다고 추정된다.[14] 원거리 지역에서는 낮 12시에만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후자의 하나오레 단층의 활동 쪽이 규모가 컸던 것으로 추정된다.[26]
분지 지진에서 활동했다고 추정되는 비와코 서안 단층대에 대해서는 가타타(현 오쓰시)에서 본 지진에 의한 지반 변동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되어, 중세 이후 활동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27]
5. 지진 흔적
시가현 각지에서 간분 오미·와카사 지진의 흔들림으로 보이는 액상화 현상의 흔적과 사맥이 발견되었다.[23] 오쓰시의 아나오 유적에서는 선상지 퇴적물에서 헤이안 시대의 지층을 찢는 액상화 흔적이, 호타니 유적에서는 사맥이 헤이안 시대의 지층을 찢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구사쓰시 가라스마자키 유적에서는 점토층이 수평으로 미끄러져 13~14세기 지층에 올라탄 흔적이 발견되었다. 가모군 아즈치정(현 오미하치만시) 고난 유적에서는 6~8세기 부두 형태 유구에서 에도 시대 전기의 지층과 함께 액상화로 판재가 밀려 올라간 흔적이 발견되었다. 다카시마시 비와호 호저에는 수몰된 취락인 미쓰야센겐 유적이 있다.
6. 사회적 영향
7. 이후의 역사 지진과의 관련성
난카이 해곡이나 일본 해구 등을 진원으로 하는 해구형의 거대 지진이 발생하기 수십 년 전부터 해구 안쪽의 일본 열도 내부 곳곳에서 비교적 큰 내륙 지각 내 지진이 빈발하는 지진 활동기에 접어든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이미 이 해(1662년) 가을에는 해구형 간분 휴가나다 지진이 발생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후반에는 에치고 국, 무쓰 국, 닛코, 미카와 국, 아키 국 등 일본 전국 각지에서 비교적 큰 지진이 발생했으며, 이윽고 사가미 해곡 거대 지진인 겐로쿠 지진 (1703년), 난카이 해곡 거대 지진인 호에이 지진 (1707년)으로 이어진다고 이해하게 된다.[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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