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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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키국은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현재의 돗토리현 요나고시, 구라요시시, 사카이미나토시, 도하쿠군, 사이하쿠군, 히노군에 해당한다. 7세기부터 1871년 폐번치현까지 존재했으며, 철 생산과 검 제작이 활발했던 지역이다. 호키국은 여러 차례 돗토리현과 시마네현에 편입되었다가 분리되는 과정을 거쳤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돗토리현에 최종적으로 통합되었다. 국부, 국분사, 신사 등 다양한 시설이 있었으며, 여러 씨족과 센고쿠 다이묘들이 이 지역을 다스렸다. 현재는 지역 부흥 운동을 통해 호키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캠페인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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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인도 - 다지마국
다지마국은 현재 효고현 북부 지역에 해당하는 고대 일본의 국으로, 초기에는 두 세력으로 나뉘어 단바국의 지배를 받다 독립, 메이지 유신 후 효고현에 편입되었으며, 현재는 지명으로 사용된다. - 산인도 - 오키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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돗토리 번은 1600년 이케다 가문이 호키국을 영지로 하사받아 시작되어, 영지 교환 후 이케다 가문이 에도 시대 말까지 다스렸으며, 메이지 정부군에 가담 후 폐번치현으로 돗토리현의 일부가 되었고, 이후 이케다 가문은 후작 작위를 받았다. - 돗토리현의 역사 - 다케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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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시국은 현재의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에 걸쳐 있던 일본의 옛 행정 구역으로, 게노국과 통합되어 성립되었으며, 중세에는 무사 집단이 등장했고 근세에는 에도 막부의 중심지였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3개 현으로 나뉘었다. - 율령국 - 사도국
사도국은 7세기 후반 일본 니가타현 사도섬에 설치된 행정 구역으로, 여러 군으로 구성되어 에치고국에 병합되기도 하고 독립하기도 하였으며, 막부 시대에는 수호가 파견되는 등 다양한 시설과 관직이 존재했다.
2. 명칭과 표기
후지와라 궁 터에서 출토된 무술년(문무 천황 2년, 698년) 6월의 연월이 기록된 목간에는 "'''파백길'''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7세기대의 오래된 표기를 많이 남기고 있는 『고사기』에는 이와 다른 '''백기'''국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 편찬되었지만 역시 오래된 표기를 남기고 있는 『선대구사본기』에는 '''파백'''국조가 보인다.[5]
가마쿠라 시대 말, 망명한 고다이고 천황은 오키 제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는 초기의 거점으로 호키를 삼았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야마나 씨족은 명목상 이 지역의 슈고였지만,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매우 약했고, 지역 영주들과 공격적인 이웃들이 종종 야마나의 권위를 찬탈했다.
호키국 풍토기에 따르면 테나즈치(손으로 어루만지는 딸), 아시나즈치(발로 어루만지는 딸)의 딸인 이나다히메를 야마타노오로치가 잡아먹으려 하자 산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 어머니가 늦게 오자 히메가 "어머니 오세요, 어머니 오세요"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여 하하키(母来)의 나라라고 이름 지어졌고, 후에 호키국이 되었다고 한다.
3. 역사
센고쿠 시대에는 이 지역은 아마고 씨족, 모리 씨족 및 오다 노부나가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으며, 노부나가의 장군 하시바 히데요시가 결국 통제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에는 이 지역 전체가 인접한 이나바국의 돗토리 성을 중심으로 하는 32만 코쿠 돗토리 번의 일부로서 이케다 씨족의 지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중요한 사찰이자 순례 중심지인 다이센지는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
메이지 유신과 1871년 폐번치현 이후, 호키는 1871년 8월 29일에 돗토리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돗토리는 1876년 8월 21일에 시마네현으로 통합되었다가 1881년 9월 12일에 다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이름은 법적인 목적으로 그 이후 한동안 계속 존재했다. 예를 들어, 호키는 1894년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4]
메이지 시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교다카 큐료 토리시라베초일본어에 따르면, 국가 자원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평가에서 이 지역은 총 24만 5034 코쿠를 가진 778개의 마을을 가지고 있었다.
같은 돗토리현에 포함된 이나바국보다 시마네현에 포함된 이즈모국과 고대 유적의 유사성, 방언 등 문화적 공통점이 많아 운하쿠라는 지역 구분이 있다. 또한 주고쿠 지방 최고봉인 다이센을 경계로 하여, 동백(현 중부)과 서백(현 서부)으로 나뉘며 방언이나 문화 등에 차이가 보인다.
3. 1. 고대
고훈 시대 이전부터 호키 지역은 철 생산과 검 제작을 포함하여 이즈모 문화 지역의 일부였다. "호키 ''후도키''"에 따르면, 히드라 몬스터 야마타노 오로치가 이나다 공주를 호키 산으로 쫓아냈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구하라고 외쳤다. 그녀의 외침 "하하키마세"는 "하하키"로, 결국 "호키"로 줄어들었다. 고대 ''고지키''는 창조주 ''가미''인 이자나미의 매장지가 이즈모와 호키의 경계에 있었다고 한다.[4] 고훈 시대 말에서 아스카 시대에 이르러 호키는 점차 야마토의 지배에 편입되었다.
후지와라 궁터에서 출토된 무술년(문무 천황 2년, 698년) 6월의 연월이 기록된 목간에 "'''파백길'''국"이라고 적혀 있다. 7세기대의 오래된 표기를 많이 남기고 있는 『고사기』에서는 이것과는 다른 '''백기'''국이라는 표기가 보인다. 헤이안 시대에 편찬되었지만 역시 오래된 표기를 남기고 있는 『선대구사본기』에는 '''파백'''국조가 보인다.[5]
호키국 풍토기에 따르면 테나즈치(손으로 어루만지는 딸), 아시나즈치(발로 어루만지는 딸)의 딸인 이나다히메를 야마타노오로치가 잡아먹으려 하자 산으로 도망쳤다. 이때 어머니가 늦게 오자 히메가 "어머니 오세요, 어머니 오세요"라고 말한 데서 유래하여 하하키(母来)의 나라라고 이름 지어졌고, 후에 호키국이 되었다고 한다.
고분 시대 이전에는 고대 출운에 특징적인 사방 모서리 돌출형 봉분 묘가 축조되었으며, 『출운국 풍토기』에도 이 지역에 우뚝 솟은 영봉 호키 오야마의 일화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출운의 문화권으로 여겨진다. 야요이 시대부터 동부 출운과 마찬가지로 철기 제조가 활발했으며, 이 지역의 철이 야마토 정권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시각이 있다. 등장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은 『고사기』이며 이자나미노 미코토의 매장지인 "출운과 호키의 경계의 히바의 산"으로, 현재의 시마네현야스기시와 돗토리현 요나고시의 현 경계 근처로 비정된다. 고분 시대 이후, 율령의 시대가 되자 호키 국조가 있던 영역에 7세기에 호키국을 설치했다. 앞서 언급했듯이 철기 제조가 활발한 지역에 걸맞게,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칼 장인 중 한 명인 오하라 야스쓰나를 배출했다.
3. 2. 중세
고훈 시대 이전부터 호키 지역은 철 생산과 검 제작을 포함하여 이즈모 문화 지역의 일부였다. "호키 ''후도키''"에 따르면, 히드라 몬스터 야마타노 오로치가 이나다 공주를 호키 산으로 쫓아냈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구하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녀의 외침 "하하키마세"는 "하하키"로, 결국 "호키"로 줄어들었다. 고대 ''고지키''는 창조주 ''가미''인 이자나미의 매장지가 이즈모와 호키의 경계에 있었다고 한다. 고훈 시대 말에서 아스카 시대에 이르러 호키는 점차 야마토의 지배에 편입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말, 망명한 고다이고 천황은 오키 제도의 감옥에서 탈출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는 초기의 거점으로 호키를 삼았다. 무로마치 시대 동안, 야마나 씨족은 명목상 이 지역의 ''슈고''였지만,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매우 약했고, 지역 영주들과 공격적인 이웃들이 종종 야마나의 권위를 찬탈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이 지역은 아마고 씨족, 모리 씨족 및 오다 노부나가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으며, 노부나가의 장군 하시바 히데요시가 결국 통제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에는, 이 지역 전체가 인접한 이나바 국의 돗토리 성을 중심으로 하는 320000코쿠 돗토리 번의 일부로서 이케다 씨족의 지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중요한 사찰이자 순례 중심지인 다이센지는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4]
3. 3. 센고쿠 시대와 에도 시대
고훈 시대 이전부터 호키 지역은 철 생산과 검 제작을 포함하여 이즈모 문화 지역의 일부였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마고 씨족, 모리 씨족, 오다 노부나가 사이의 분쟁 지역이었으며, 하시바 히데요시가 결국 통제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에는 인접한 이나바 국의 돗토리 성을 중심으로 하는 32만 코쿠 돗토리 번의 일부로서 이케다 씨족의 지파가 통치했지만, 중요한 사찰이자 순례 중심지인 다이센지는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4]
메이지 초년 시점에서는 국내 전역이 인바 돗토리 번 영토였다(778 마을·245034코쿠·일부는 다이센사 영토 등 사사령).
3. 4. 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유신과 1871년 폐번치현 이후, 호키 국은 1871년 8월 29일에 돗토리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돗토리는 1876년 8월 21일에 시마네 현으로 통합되었다가 1881년 9월 12일에 다시 분리되었다. 이 지역의 이름은 법적인 목적으로 그 이후 한동안 계속 존재했는데, 예를 들어 1894년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4]메이지 시대 초기의 旧高旧領取調帳|교다카 큐료 토리시라베초일본어에 따르면, 국가 자원에 대한 공식적인 정부 평가에서 이 지역은 총 245,034코쿠를 가진 778개의 마을을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 유신 직전의 영토는 현재의 돗토리현 요나고시, 구라요시시, 사카이미나토시, 도하쿠군, 사이하쿠군, 히노군에 해당한다.
「구고구령취조장」|구고구령취조장일본어의 기재에 따르면, 메이지 초년 시점에서는 국내 전역이 인바 '''돗토리번''' 영토였다(778 마을·245,034코쿠여·일부는 다이센사 영토 등 사사령).
- 가와무라 군 (108마을·28,645코쿠여), 구메 군 (120마을·46,044코쿠여), 야바세군 (108마을·35,482코쿠여), 아세리군 (75마을·27,900코쿠여), 아이미군 (185마을·70,839코쿠여), 히노군 (182마을·36,121코쿠여)
1871년 7월 14일(1871년8월 29일) - 폐번치현에 의해 '''돗토리현'''의 관할이 된다.
1876년 8월 21일 - 제2차 부현 통합에 의해 '''시마네현'''의 관할이 된다.
1881년 9월 12일 - '''돗토리현'''의 관할이 된다.
4. 영역
메이지 유신 직전 호키국의 영역은 현재의 돗토리현 요나고시, 구라요시시, 사카이미나토시, 도하쿠군, 사이하쿠군, 히노군에 해당한다.[1]
구고구령취조장 기재에 따르면, 메이지 초기에는 호키국 전체가 인바 '''돗토리번''' 영토였다(778개 마을, 245,034석, 일부는 다이센사 영토 등 사사령).[1]
5. 시설
호키국의 주요 시설은 다음과 같다.
- '''국부(国府)'''는 구메군에 있었으며, 현재 구라요시시 국부(こう)에서 유적이 발견되었다.
- '''호키 국분사지'''는 호키 국 국가의 동쪽에 위치해 있다.
- '''엔기시키 신묘초'''에는 소사 6좌 6사가 기재되어 있다. (호키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 '''소샤'''는 국청 우라 신사로, 구라요시시 고후에 있었다.
- '''이치노미야'''는 '''와시즈 신사''' (가와무라군)이다.
- '''니노미야'''는 오카미야마 신사 또는 하바키 신사이다.
- '''산노미야'''는 와시즈 신사 (구메군)이다.
5. 1. 국부(国府)
국부는 구메군에 있었으며, 유적은 현재 구라요시시 국부(こう)에서 발견되었다. 구라요시 평야의 거의 중앙에 있으며, 해발 40미터 정도의 구릉상에 위치한다. 발굴 조사는 1973년 가을에 국청 뒤편에서 기둥 구멍이 발견된 것을 계기로 1978년까지 실시되었다. 국아의 터는 폭 2미터, 깊이 1미터 정도의 도랑에 의해 동서 273미터, 남북 149미터의 직사각형으로 구획되었으며, 그 동쪽 변에 동서 51미터, 남북 149미터의 돌출부가 설정되었다. 구획의 거의 중앙부에는 의례를 행하는 국아 정청(국청)이 설치되었고, 주변에 조사 건물군이 배치되었다. 발굴된 유구는 흙기둥 건물, 초석, 문, 담, 도로, 축지조 유구, 도랑, 토광 등 다수이며, 8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사이에 네 시기의 변천이 확인되었다.- 1기는 8세기 중반부터 말기까지이다. 동서 84미터, 남북 95미터로 흙기둥 담으로 구획되었으며, 남문·전전·정전·후전이 나란히 있고, 정전의 동서에 가늘고 긴 옆전과 그 남쪽에 누각풍 건물을 배치하고 있다. 건물은 모두 흙기둥 건물로, 정전을 중심으로 コの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다.
- 2기는 9세기 초 무렵이다. 남문·전전·정전·후전을 같은 위치에 다시 짓고, 동서 양 옆전의 북쪽에 누각풍 총주 건물을 새로 설치했다.
- 3기는 9세기 중반이다. 국청의 외주에 폭 2미터, 깊이 1미터 정도의 도랑을 파고, 안쪽에 축지 담을 둘러 동서 84미터, 남북 108미터로 구획하고 있다. 그리고 남문을 제외한 건물을 초석 건물로 바꾸고, 전전을 없애고, 정전까지 돌을 깔아 넓게 했다.
5. 2. 국분사(国分寺)
호키 국 국가의 동쪽으로 약 300m 떨어진 곳에 호키 국분사지가 위치해 있으며, 니사지는 승려 사찰과 니사찰[7]이 떨어져서 건립되도록 정해져 있지만, 북쪽으로 약 50m로 근접해 있다.5. 3. 신사(神社)
엔기시키 신묘초에는 소사 6좌 6사가 기재되어 있으며, 대사는 없다. 호키국의 식내사 일람 참조.- 가와무라군 와시즈 신사 (도하쿠군 유리하마정 미야우치)
- 가와무라군 하바키 신사 (구라요시시 후쿠니와)
- 구메군 와시즈 신사 (구라요시시 시즈)
- 구메군 구니사카 신사 (도하쿠군 호쿠에이정 구니사카)
- 아이미군 무나카타 신사 (요나고시 무나카타)
- 아이미군 오카미야마 신사 (요나고시 오다카)
- 소샤: 국청 우라 신사 - 구라요시시 고후.
- 이치노미야: '''와시즈 신사''' (가와무라군)
- 니노미야: 오카미야마 신사 또는 하바키 신사
- 산노미야: 와시즈 신사 (구메군)
6. 지역
돗토리현에 속한 이나바국보다 시마네현에 속한 이즈모국과 고대 유적의 유사성, 방언 등 문화적 공통점이 많아 운하쿠라는 지역 구분이 있다.
또한 주고쿠 지방 최고봉인 다이센을 경계로 동백(현 중부)과 서백(현 서부)으로 나뉘며, 방언이나 문화 등에 차이가 보인다.
6. 1. 군(郡)
6. 2. 장원(荘園)
- 도고 장원
- 야오쿠리 장원
- 우다가와 장원: 한뉴 군 (현재의 요나고시 요도에 정 동부)을 중심으로 한다.
- 나카마 장원: 아이미 군 (현재의 요나고시 동부)
- 가야 장원: 아이미 군 (현재의 요나고시 동부)
- 이나즈미 장원
- 구나가 미쿠리야
6. 3. 에도 시대의 번(藩)
에도 시대에 이 지역 전체는 인접한 이나바 국의 돗토리 성을 중심으로 하는 32만 코쿠 돗토리 번의 일부로서 이케다 씨족의 지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중요한 사찰이자 순례 중심지인 다이센지는 독립 상태를 유지했다.[4]
메이지 유신과 1871년 폐번치현 이후, 호키는 1871년 8월 29일에 돗토리 현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돗토리는 1876년 8월 21일에 시마네 현으로 통합되었다가, 1881년 9월 12일에 다시 분리되었다.
다른 번을 제외한 모든 번은 폐번 후 소령이 이케다 가문의 속령으로 병합되어 돗토리번에 속하게 되었다.
7. 인물
호키국의 인물은 다음과 같다.
- 야마노우에노 오쿠라
- 오하라노 스쿠나마로: 호키 7년(776년) 임관
- 요시미네노 히데타카: 간페이 8년(896년) 임관
- 타마노 아리나리: 엔기 22년(922년) 임관
- 후네노 사네히라: 텐랴쿠 원년(947년) 임관
- 후지와라노 키미아키: 안나 원년(968년) 임관
- 미나모토노 요리미츠
- 후지와라노 타카사: 칸닌 원년(1017년) 임관
- 후지와라노 스케요리: 치안 2년(1022년) 임관
- 후지와라노 노리에이: 만주 2년(1025년) 임관
- 타이라노 타다모리: 1115년경
- 타이라노 치카노리: 큐안 4년(1148년) 임관( ~ 호겐 원년(1156년))
- 타이라노 모토치카: 헤이지 원년(1159년) 임관( ~ 지안 원년(1166년))
- 타이라노 토키이에: 안겐 2년(1176년)
- 타이라노 치카무네: 지안 2년(1167년) 임관
- 타이라노 타다노리: 지쇼 3년(1179년) 임관
- 미나모토노 미츠나가: 쥬에이 2년(1183년) 임관
- 나와 나가토시: 겐코 3년(1333년) 임관
- 나와 아키오키: 나와 나가토시의 손자
- (권개) 사카노우에노 아키카네: 큐안 2년(1146년) 임관
호키노카미(伯耆守)를 역임한 인물, 호키노스케(伯耆介)를 역임한 인물, 슈고(守護)를 역임한 인물, 국인(国人),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 직봉 다이묘(織豊大名), 무가 관위(武家官位)로서의 호키노카미(伯耆守)는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이름만 나열한다.
7. 1. 국사(国司)
고훈 시대 이전부터 호키 지역은 철 생산과 검 제작을 포함하여 이즈모 문화권에 속했다. "호키 후도키"에 따르면, 히드라 몬스터 야마타노 오로치가 이나다 공주를 호키 산으로 쫓아냈고, 그녀는 어머니에게 자신을 구해달라고 외쳤다. 그녀의 외침 "하하키마세"는 "하하키"로, 결국 "호키"로 줄어들었다. 고지키에는 창조주 이자나미의 매장지가 이즈모와 호키의 경계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지와라 궁터에서 출토된 무술년(문무 천황 2년, 698년) 6월의 목간에는 "'''파백길'''국"이라고 적혀 있다.고분 시대 말에서 아스카 시대에 이르러 호키는 점차 야마토 정권의 지배에 편입되었다.
가마쿠라 시대 말, 망명한 고다이고 천황은 오키 제도에서 탈출하여 가마쿠라 막부에 대항하는 초기의 거점으로 호키를 삼았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야마나 씨족이 이 지역의 슈고였지만, 통제력은 매우 약했고, 지역 영주들과 이웃들이 야마나 씨족의 권위를 찬탈하는 경우가 많았다.
센고쿠 시대에는 아마고 씨족, 모리 씨족, 오다 노부나가 사이에 분쟁이 벌어졌으며, 노부나가의 장군 하시바 히데요시가 결국 통제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에는 이나바 국의 돗토리 성을 중심으로 하는 32만 코쿠 돗토리 번의 일부로서 이케다 씨족이 통치했지만, 다이센지는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했다.
메이지 유신과 1871년 폐번치현 이후, 호키는 1871년 8월 29일에 돗토리 현의 일부가 되었다가, 1876년 8월 21일에 시마네 현으로 통합되었다. 이후 1881년 9월 12일에 다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호키라는 이름은 법적인 목적으로 한동안 계속 존재했다. 예를 들어, 1894년 일본과 미국 간의 조약, 일본과 영국 간의 조약에서 명시적으로 인정되었다.[4]
메이지 시대 초기 旧高旧領取調帳|큐다카 큐료 토리시라베초일본어에 따르면, 공식적인 정부 평가에서 이 지역은 총 코쿠다카 245,034 코쿠를 가진 778개의 마을을 가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