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야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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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야마번은 1639년, 가가번의 분할로 설립되어 1871년 폐번치현될 때까지 존속한 일본 에도 시대의 번이다. 초대 번주는 마에다 도시쓰구이며, 에도 시대 중기부터 막부 말기까지 홍수와 자연 재해로 어려움을 겪었다. 번은 한방 의학, 와시 종이, 양잠 등의 산업을 육성하여 수입을 늘리려 노력했고, 메이지 유신 시기에는 황제군 편에 서서 호쿠에츠 전투에 참여했다. 폐번 이후 도야마 현이 되었다가 이시카와현에 통합되기도 했으나, 1883년 다시 도야마 현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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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야마번 - 도야마성
도야마성은 도야마현 도야마시에 위치한 평지성으로, 1543년 축성된 것으로 추정되나 그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센고쿠 시대 쟁탈전을 거쳐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삿사 나리마사에 의해 개축되어 '우키조'라는 별칭을 얻었고, 에도 시대 도야마번 마에다 가문의 거성이었으나 현재는 공원으로 조성되어 모의 천수와 유구가 남아있는 도야마 시의 중요한 유적이다. - 도야마 마에다가 - 마에다 도시쓰구
마에다 도시쓰구는 에도 시대 도야마 번의 초대 번주로, 아버지 마에다 도시쓰네로부터 분봉받아 번을 다스리며 도야마성 개수, 성하 마을 재정비, 번법 제정, 치수 사업, 가신단 재편 등 번정 개혁에 힘썼다. - 엣추국의 번 - 가가번
가가 번은 에도 시대에 마에다 가문이 다스린 도자마 다이묘 번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었던 마에다 도시이에가 하사받아 도쿠가와 막부의 견제 속에서도 세력을 유지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가나자와 현이 되었다. - 엣추국의 번 - 누노이치번
누노이치번은 1600년 히지카타 가쓰히사가 엣추국에 1만 석을 받으며 성립되었으나 1608년 영지 교환으로 폐지되었으며, 현재 도야마현 도야마시 누노이치 일대에 위치했고 히지카타 가문에서 파견된 지방관이 통치했다.
도야마번 | |
---|---|
개요 | |
통칭 | 도야마번 |
유형 | 번 |
국가 | 도쿠가와 막부 하의 일본 |
존속 기간 | 1639년 ~ 1871년 |
시대 | 에도 시대 |
수도 | 도야마성 |
현재 위치 | 이시카와현 일부 |
역사 | |
성립 | 가가번에서 분할 (1639년) |
소멸 | 폐번치현 |
통치 | |
정치 체제 | 다이묘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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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역사
1639년 가가 번의 3대 다이묘 마에다 도시쓰네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중 둘째 아들 마에다 도시쓰구에게 10만 곡의 영지(도야마 번)가 주어지면서 도야마 번이 성립되었다. 초기 도야마 번은 네이군 6만 곡, 니이카와군(구로베강 서안) 1만 6800 곡, 도야마 마을 주변 7개 마을 3170 곡, 가와치국 노미군 2만 곡의 월경지로 구성되었다. 1640년 마에다 도시쓰구는 도야마성으로 이주했지만, 성은 가가 번의 일부였으므로 네이군 내 다른 위치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1659년 니이카와군과 가와치국 월경지를 도야마성 및 주변 2만 7천 곡의 토지와 교환하는 협약을 가가 번과 체결했다. 1661년 도쿠가와 막부는 도야마 성 재건과 새로운 조카마치 조성을 허가했다.
교호 시대(1716-1735)에 도야마 번의 고쿠다카는 신전 개발로 14만 곡으로 평가되었다. 어업, 한방 의학 생산, 와시 종이 생산, 양잠 등 다른 수입원도 있어 실제 고쿠다카는 20만 곡 이상이었다. 그러나 번은 가가 번에 종속되어 추가 수입은 본가의 부채를 갚는 데 사용되었다. 도야마는 잦은 홍수와 자연 재해에 시달렸고, 1831년 화재로 마을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1858년 지진과 홍수로 다시 마을 대부분이 파괴되었다. 마에다 토시아츠 시대에는 가가 번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 농민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 동안 도야마 번은 나가오카 번에 대항하여 호쿠에츠 전투에서 4개 중대(158명)의 병사를 지원하며 황제군 편에 섰다.
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도야마 번은 도야마 현이 되었고, 1876년 4월 이시카와현과 통합되었다. 1883년 5월 다시 도야마 현으로 분리되었다.
2. 1. 번의 성립과 초기
1639년 가가 번의 3대 다이묘인 마에다 도시쓰네가 은퇴하면서 자신의 영지를 세 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 중 둘째 아들 마에다 도시쓰구에게 10만 곡의 영지(도야마 번)가 주어지면서 도야마 번이 성립되었다. 도시쓰구의 어머니 주히메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차녀였기 때문에, 도시쓰구는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5]초기 도야마 번의 영지는 여러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네이군 6만 곡, 니이카와군(구로베강 서안) 1만 6800 곡, 도야마 마을 주변 7개 마을 3170 곡, 그리고 가와치국 노미군에 2만 곡의 월경지가 있었다.[6] 1640년, 도시쓰구는 가가 번 영내에 있던 도야마성을 빌려 엣추로 들어갔다. 그러나 당시 도야마 성은 가가 번의 영지였기 때문에, 도시쓰구는 네이군 내 햐쿠쓰카에 새로운 성을 건설하려 했다. 하지만 비용 부족으로 축성은 진행되지 못했고, 결국 도시쓰구는 도야마 성에 계속 거주하기로 결정했다.
1659년 2월,[7] 도시쓰구는 거성이 자신의 영지 밖에 있다는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가가 번과 영지 교환을 했다. 가가 번 영지였던 도야마 성 주변의 신카와군 후나하시·미즈하시(2만 7천 석)와 자신의 영지였던 신카와군 우라야마베(1만 6800 석), 그리고 비어 있던 가가국 노미군을 교환하여 번의 영역을 확정지었다.[8] 이후 1661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도야마 성 재건 및 새로운 조카마치 조성을 허가받았다.
2. 2. 에도 시대 중기 ~ 막부 말기
1858년 대지진과 홍수로 인해 도야마는 큰 피해를 입었다.[5] 마에다 토시아츠 시대에는 가가 번에 재정 지원을 요청하고 농민 반란을 진압해야 했다.[5]12대 번주 마에다 토시카타는 1835년 마에다 토시야스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형의 양자가 되어 후계자가 되었고, 형이 사망하자 번주가 되었다. 도야마 번은 흉작, 재정 파탄, 번사들 간의 정치적 문제로 계속 고통받았다. 1857년에는 마에다 나리야스가 가가 번에서 파견되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했고, 에도 파벌 구성원들을 해고했다. 토시카타는 1857년 건강 악화를 이유로 물러났고, 그의 아버지가 그 뒤 2년 동안 통치했다. 1858년 1858년 히에쓰 지진으로 도야마 성과 주변 마을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산사태로 강이 막혔다가 댐이 붕괴되면서 큰 피해가 발생했다. 토시카타는 은퇴했고, 도야마 번은 가가 번의 직접적인 감독을 받게 되었다.[5]
에도 후기부터 막말에는 재정 문제와 그에 따른 권력 다툼(게이에 간모쓰 사건, 도다 헤이부 사건)과 가문 소동(마에다 토시야스 항목 참조) 등이 발생하여 종가(가가 번)의 개입을 초래했다. 마지막 번주가 된 제13대 마에다 도시모치는 가가 번에서 맞이했으며, 도야마 즈메 가로(도야마에 상주하는 가로)의 파견도 받아들였다.[5]
번의 재정은 성립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매약업, 잠종업, 제지업 등에 힘을 쏟아 실질적인 석고는 20만 석 이상이었지만, 분번(分藩) 시 종가로부터 과도한 가신단을 떠맡게 되었고, 번 영지가 급류 하천 지역이라 자주 수해를 입었다. 또한 덴포 2년(1831년)의 대화재, 안세이 5년(1858년)의 대지진과 홍수 등 재해와 잦은 공역(公役) 부담으로 과도한 지출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5]
2. 3. 메이지 유신과 폐번치현
메이지 유신 시기 보신 전쟁에서 도야마 번은 나가오카 번에 대항하여 호쿠에츠 전투에 4개 중대(158명)의 병력을 지원하며 황제군 편에 섰다.[8]1871년 7월 폐번치현으로 도야마 번은 도야마 현이 되었고, 1876년 4월에 이시카와현과 통합되었다. 1883년 5월에 다시 도야마 현으로 분리되었다.[8]

마지막 번주였던 마에다 도시아쓰는 1859년 에도에서 가가 번의 마에다 나리야스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마에다 도시카타의 강제 은퇴로 인해 ''다이묘''로 선택되었다. 그러나 도시아쓰는 당시 겨우 세 살이었기 때문에, 도야마는 사실상 가가 번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다. 1869년부터 폐번치현까지 그는 도야마의 황실 지사로 임명되었고, 이후 도쿄로 이주했다. 1870년 10월부터 1873년 12월까지 그는 파리에서 유학했으며,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런던을 방문했다. 1882년 4월부터 외무성에서 프랑스 담당 비서로 근무했으며, 이후 궁내성에서 근무했다. 1884년에는 ''화족'' 작위 제도를 통해 ''백작(하쿠샤쿠)''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 시타야, 도쿄 자택에서 뇌출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의 서위를 받았다. 그의 아내는 다카사키번의 마쓰다이라 데루토시의 딸이었다. 그의 묘는 도쿄의 고코쿠지 사찰에 있다.[8]
3. 역대 번주
#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마에다 도시쓰구 | 1639년-1674년 | 아와노카미(淡路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고쿠 |
2 | 마에다 마사토시 | 1674년-1706년 | 오쿠라노쇼유(大蔵少輔)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고쿠 |
3 | 마에다 토시오키 | 1706년-1724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 140,000 고쿠 |
4 | 마에다 토시타카 | 1724년-1744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5 | 마에다 토시유키 | 1745년-1762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40,000 고쿠 |
6 | 마에다 토시토모 | 1762년-1777년 | 아와노카미(淡路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7 | 마에다 토시히사 | 1777년-1787년 | 나가토노카미(長門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8 | 마에다 토시노리 | 1787년-1801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9 | 마에다 토시쓰요 | 1801년-1835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5위하(従五位下) | 140,000 고쿠 |
10 | 마에다 토시야스 | 1835년-1846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11 | 마에다 토시토모 | 1846년-1853년 | 이즈모노카미(出雲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12 | 마에다 토시카타 | 1854년-1859년 | 오쿠라노쇼유(大蔵少輔)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13 | 마에다 토시아쓰 | 1859년-1871년 | 아와노카미(淡路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40,000 고쿠 |
- '''마에다 마사토시'''(2대): 마에다 도시쓰구의 차남으로, 1674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오키'''(3대): 마에다 마사토시의 차남으로, 1706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번주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타카'''(4대): 마에다 마사토시의 다섯째 아들로, 1724년 형의 은퇴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유키'''(5대): 마에다 토시타카의 장남으로, 1745년 아버지의 사후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토모'''(6대): 마에다 토시타카의 넷째 아들로, 1762년 형의 급작스러운 사망으로 임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히사'''(7대): 마에다 토시유키의 장남으로, 1777년 숙부 마에다 토시토모의 은퇴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노리'''(8대): 마에다 토시토모의 장남으로, 1787년 마에다 토시히사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쓰요'''(9대): 다이쇼지번 마에다 토시미치 2세의 여덟 번째 아들로, 1801년 마에다 토시노리 사후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야스'''(10대): 마에다 토시노리의 둘째 아들로, 1835년 마에다 토시쓰요의 양자가 되어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토모'''(11대): 마에다 토시야스의 여섯 번째 아들로, 1846년 아버지의 은퇴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카타'''(12대): 마에다 토시야스의 일곱째 아들로, 1854년 형의 사망으로 다이묘가 되었다.
- '''마에다 토시아쓰'''(13대, 마지막): 가가번 마에다 나리야스의 11번째 아들로, 1859년 마에다 토시카타의 강제 은퇴로 인해 다이묘가 되었다.
3. 1. 마에다 도시쓰구 (초대)
마에다 가문 (''도자마 다이묘'') 1639년-1871년#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고쿠다카 |
---|---|---|---|---|---|
1 | 마에다 도시쓰구 | 1639년-1674년 | 아와노카미(淡路守) | 종4위하(従四位下) | 100,000 고쿠 |
마에다 도시쓰구(1617년 6월 2일 ~ 1674년 8월 8일)는 도야마번의 초대 다이묘이다.[3] 가가번의 3대 다이묘 마에다 도시쓰네의 차남으로, 1631년 겐푸쿠 의식에서 시종과 종4위의 관위를 받았다.
1639년, 마에다 도시쓰네는 가가 번에서 10만 고쿠의 영지를 분할하여 도시쓰구를 다이묘로 승격시켰다. 1640년 도야마성으로 옮겼으나, 초기에는 성 자체가 가가 번의 일부였고, 네이 군 내 다른 지역에 새로운 성을 건설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1659년 가가 번과 니이카와 군 내 영지 및 가가 국 내 월경지를 도야마 성과 주변 2만 7천 고쿠의 토지와 교환했다.
1661년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성 재건 및 새로운 성읍 건설 허가를 받았다. 재임 기간 동안 1644년 번 법전을 공포하고, 벼농사 토지 개척, 관개 및 홍수 방지 사업, 번 경계 측량에 힘썼다. 1674년 에도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했으나, 시신은 도야마 성으로 옮겨졌고 농민들도 장례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도시쓰구는 야마가타번 다이묘 토리이 타다마사의 딸과 결혼했다.
3. 2. 마에다 마사토시 (2대)
前田 正甫|마에다 마사토시일본어(1649년 9월 8일 ~ 1706년 5월 30일)는 도야마번의 2대 다이묘였다. 1674년 아버지 마에다 도시쓰구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마사토시는 아버지의 토목 공사 사업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도야마번은 재정 문제에 직면했는데, 이는 이 지역의 가장 좋은 농지 대부분이 가가번의 통제하에 있었고, 가가번이 자금이 필요할 때마다 도야마번의 재정을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마사토시는 한방 의학 판매를 포함한 새로운 산업을 육성하려 시도했는데, 이는 훗날 도야마가 유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1681년, 마사토시는 에도 막부로부터 에치고국 다카다번에 군대를 보내 그 번의 재산 몰수를 집행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마사토시는 1706년 5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아내는 오카번 나카가와 히사키요의 딸이었다.
3. 3. 마에다 도시토키 (3대)
前田 利興|마에다 도시토키일본어는 1678년 7월 15일에 태어나 1733년 6월 30일에 사망한 도야마번의 3대 다이묘였다. 1706년 아버지 마에다 마사토시가 사망하자 번을 상속받았다.# | 이름 | 재임 기간 | 관위 | 조정 관직 | 석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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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에다 씨 (도자마 다이묘) 1639년-1871년 | |||||
3 | 前田利興|마에다 도시토키일본어 | 1706년-1724년 | 長門守|나가토노카미일본어 | 従四位下|종4위하일본어 | 100,000 → 140,000 석 |
도시토키는 도야마번의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60명의 가신을 해고하고 세금 징수를 강화했으며, 사치 금지령을 내렸다.[3] 또한 재정 확보를 위해 담배와 간장에도 세금을 부과했다.[3] 그러나 1713년 도쿠가와 막부는 조조지 재건을 도야마 번에 명령하여 재정을 더욱 악화시켰다.[3] 1714년에는 도야마성에 화재가 발생했고, 1723년에는 성벽 재건에 17000곡의 수입이 소요되었다.[3]
도시토키는 1724년에 은퇴하였고, 1733년 56세의 나이로 사망했다.[3]
3. 4. ~ 마에다 도시쓰라 (13대, 마지막)
백작 마에다 토시아츠는 도야마번의 13대(그리고 마지막) 다이묘였다. 1859년 에도에서 가가번 마에다 나리야스의 11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마에다 토시카타의 강제 은퇴로 인해 ''다이묘''로 선택되었으나, 당시 겨우 세 살이었기 때문에 도야마는 사실상 가가번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다. 1869년부터 폐번치현까지 도야마의 황실 지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도쿄로 이주했다. 메이지|明治프랑스어 4년(1871년) 10월부터 메이지|明治프랑스어 6년(1873년) 12월까지 파리에서 유학했으며, 일본으로 돌아오기 전에 런던을 방문했다. 1882년 4월부터 외무성에서 프랑스 담당 비서로 근무했으며, 이후 궁내성에서 근무했다. 1884년 ''화족'' 작위 제도를 통해 ''하쿠샤쿠(백작)''으로 승격되었다. 1921년 시타야 자택에서 뇌출혈로 6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며, 사후 종2위에 추서되었다. 그의 아내는 다카사키번 마츠다이라 테루토시의 딸이었다. 묘는 도쿄 고코쿠지 사찰에 있다.[1]
작위는 양자인 백작 마에다 토시오에게 넘어갔다. 시바타번 ''다이묘'' 미조구치 나오마사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그는 1913년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지치부노미야 부관으로 활동했다. 1922년 아버지 사망으로 백작이 되었으며,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작위는 아들 마에다 토시노부와 손자 마에다 아키토시에게 이어졌다.[1]
4. 경제
교호 시대에는 신전 개발로 총고가 14만 석을 넘었고, 매약업, 잠종업, 제지업 등에 힘을 쏟아 실질적인 석고는 20만 석 이상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번의 재정은 성립 초기부터 항상 압박을 받아 상방이나 히다의 호상, 그리고 본가인 가가 마에다 종가로부터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다.
이는 번 재정이 방만했기 때문이 아니라, 분번할 때 종가로부터 과도한 가신단을 떠맡게 된 점, 번령이 급류 하천 지역이라 자주 수해를 입은 점, 덴포 2년(1831년)의 대화재, 안세이 5년(1858년)의 대지진 등 재해와 잦은 공의 보수 지원으로 과도한 지출을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4. 1. 농업
도야마번은 농촌 관리 및 징세 체제로서 종주국과 마찬가지로 십촌제를 채택했다. 번정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신전 개발에 힘썼으며, 총고는 겐로쿠 11년(1698년)에 13만 9천 석 미만, 메이지 3년(1870년)에는 15만 8천 석 이상에 달했다. 연공미 중 1만 석에서 1만 5천 석은 오사카로, 5천 석 정도는 히다로 영외 이출되었다.2대 번주 마사토시는 제약에 관심을 갖고 약 제조법을 영내에 보급하여 엣추 매약의 기초를 닦았다.[2] 번이 지원한 매약업은 겐로쿠 연간에 전국적인 행상권을 확립하여, 이전 다테야마 등 산악 수행자의 수행 매약을 대체하였다.[2] 다른 지역으로 판매된 것으로는 누에씨가 있었으며, 야오정이 그 중심이었다.[2] 그 외의 산물로는 산간부의 제지, 구레하 언덕의 차 재배 등이 있었다.[2] 3대 토시토키 시대에는 은어 초밥과 함께 만들어진 송어 초밥이 현재 역 도시락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2]
히다 방면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쌀과 해산물 외에 가가번에서 생산된 소금(노토 소금)도 도야마번을 통해 판매되었다(히다 등염).
4. 2. 상공업
2대 번주 마에다 마사토시는 제약에 관심을 갖고 약 제조법을 영내에 보급하여 엣추 매약의 기초를 닦았다. 번이 힘을 실은 매약업은 다테야마 등의 산악 수행자에 의한 수행 매약을 대체하고,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적인 행상권을 확립하였다. 야오정을 중심으로 누에씨를 타국에 배치 행상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도 산간부에서는 제지, 구레하 언덕에서는 차 재배 등이 이루어졌다. 3대 토시토키 시대에는 도야마 명산 송어 초밥이 은어 초밥과 함께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히다 방면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쌀, 해산물 외에 가가번에서 생산된 소금(노토 소금)도 도야마번을 통해 판매되었다(히다 등염).
4. 3. 재정
도야마 번은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렸다. 9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요는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논 개발, 새로운 독점 사업, 세금 인상을 추진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과 이러한 재정 조치로 인해 1813년 농민 반란이 일어났다. 1831년에는 도야마의 성곽 도시가 화재로 크게 파괴되었고, 1833년에는 번이 지폐를 발행했다. 같은 해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오사카 출신의 상인 이시다 코자에몬을 재정 고문으로 초청했지만, 번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0대 번주 마에다 도시야스 취임 당시 번은 흉작으로 큰 타격을 입었고, 이는 덴포 대기근의 일부로 1838년까지 이어졌다. 번은 모든 부채를 상환하지 못했고, 1838년에 쇼군 직할로부터 30000료의 차관을, 다음 해에는 25000료를 추가로 빌려야 했다. 1841년, 번은 에도에 대한 필수적인 산킨코타이를 수행할 자금이 없다고 보고했다.[1]
12대 번주 마에다 도시카타 시대에도 흉작, 재정 파탄, 번사들 간의 정치적 문제로 계속해서 고통받았다. 1857년에는 마에다 나리야스가 가가번에서 파견되어 개입했고, 1858년에는 1858년 히에쓰 지진으로 인해 도야마성과 주변의 성하 마을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2]
농촌 관리 및 징세 체제로는 십촌제를 채택했다. 번정 초기부터 신전 개발에 힘써 총고는 겐로쿠 11년(1698년)에 13만 9천 석 미만, 메이지 3년(1870년)에는 15만 8천 석 이상에 달했다. 연공미 중 1만 석에서 1만 5천 석은 오사카로, 5천 석 정도는 히다로 영외 이출되었다.[3]
2대 번주 마사토시는 제약에 관심을 갖고 엣추 매약의 기초를 닦았다. 겐로쿠 연간에는 전국에 걸친 행상권이 확립되었다. 야오정을 중심으로 누에씨도 타국에 배치 행상했다. 그 외의 산물로는 산간부에서의 제지, 구레하 언덕에서의 차 재배 등이 있다. 또한, 현재 역 도시락으로 높은 인지도를 가진 도야마 명산 송어 초밥은 3대 도시토키 시대에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3]
히다 방면과의 교역이 활발하여 쌀과 해산물 외에 가가번에서 생산된 소금(노토 소금)도 도야마번을 통해 판매되었다(히다 등염).[3]
5. 사회
도야마 번은 엣추국 후에키군 6만 석, 신카와군 구로베강 서안 1만 6800석, 도야마 정 주변 7개 마을 3170석, 가가국 노미군 데도리가와 남안 2만 석, 총 10만 석을 영지로 하였다.[6] 1659년, 가가 번 영지였던 도야마 성 주변 신카와군 후나하시·미즈하시(2만 7천 석)와 자령(도야마 번 영지)의 신카와군 우라야마베(1만 6800석) 및 비어 있던 가가국 노미군을 교환하여 번령을 정했다.[7]
1661년, 막부에서 도야마성 개축 허가를 받아 성과 성하町(조카마치) 정비가 본격화되었다. 도야마 정은 엣추 지역 유일의 성하町이었고, 다른 곳은 재향町(자이고마치)이라 불리는 농촌 지역 상인들의 町이었다. 교호 시대에는 신전 개발로 총고가 14만 석을 넘었고, 어업, 매약업, 잠종업, 제지업 등에 힘입어 실질 석고는 20만 석 이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번 재정은 성립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이는 분번 시 종가로부터 과도한 가신단을 떠맡은 점, 번령이 급류 하천 지역이라 잦은 수해를 입은 점, 덴포 2년(1831년) 대화재, 안세이 5년(1858년) 대지진 등 재해와 잦은 공역 부담으로 지출이 많았기 때문이다.
5. 1. 교육
1773년에 창설된 도야마 번의 번교인 광덕관은 무사들을 위한 교육 기관이었다. 이는 전국에서 62번째 번교였으며, 종가인 가가 번의 메이린도(1792년)보다 20년이나 빨랐다. 6대 번주 토시요가 인재 양성을 위해 재정난 속에서도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설립하였으며, 에도의 쇼헤이코를 본받았다. 그 외에 사숙으로 린치거, 오카다 숙 등이 있었다.[1]엣추 지역 서민들의 교육 기관으로는 데라코야가 있었는데, 농민 출신 스승이 많다는 특징이 있었다. 일반적인 데라코야에서는 승려, 신관, 낭인이 스승이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엣추는 진종 왕국으로 여겨짐에도 불구하고 승려 출신 스승은 적었고, 대부분 유력 농민이나 지주가 맡았다. 또한 스승은 거의 남자였으며, 여자 스승은 1명만 알려져 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읽기, 쓰기, 셈하기 중 산술을 중시했으며, 도야마 마을에서는 일반적인 교본 외에, 『약명장』, 『조합약부』와 같은 지역 산업인 매약업을 고려한 교재가 사용되었다는 특징도 있었다.[1]
6. 군사
간에이 16년(1639년)으로 추정되는 기록에 따르면, 도야마 번은 기마 170기, 철포 350정, 활 60개, 창 150자루, 깃발 20개로 구성된 군역 규정을 따랐다. 이는 도쿠가와 가문의 후다이·하타모토에 대한 간에이 10년(1633년) 군역 규정의 10만 석과 동일하며, 표고 상당의 막부 군역 규정을 준수했음을 보여준다.
도야마 번은 다카다 성 인수(1681년), 안에이 소동(1773년)에서의 출병 및 에조치 출병 준비(1804년~1818년)와 같은 군사 활동을 수행했다. 보신 전쟁에서는 신정부 측에 가담하여 번병 4개 소대(158명)가 가가 번과 함께 호쿠에쓰 전쟁에 참전, 에치고 나가오카 번을 공격했다.[5]
7. 영역
領域일본어
대부분의 한과 마찬가지로, 도야마 번은 정기적인 토지 조사와 예상 농업 수확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를 제공하기 위해 계산된 단속적인 영토로 구성되었다.[1][2] 도쿠가와 막부 말기에, 번은 다음과 같은 영지를 소유했다.
도야마 평야의 일부를 종횡으로 나누면서도, 대체로 현재의 도야마시 내를 흐르는 크고 작은 하천을 경계로 삼았다. 구체적으로는, 남쪽 끝에서 엣추국과 히다국의 국경을 기점으로 할 경우, 진즈 강 (사사즈의 약간 하류 지점까지) - 평야부를 횡단 (나가바시, 시모타스기, 야기야마, 히가시오쿠보, 고다가 번령) - 구마노 강 - 평야부를 횡단 (아오야기신, 마키타, 아오야기, 누노메, 오우라, 하나자키, 아라야가 번령) - 조간지 강 (미무로아라야에서 마세구치 부근) - 시미즈마타 용수 - 이타치 강 - 아카에 강 - 진즈 강과 같이 산간부에서 평야부를 종단하여, 북쪽 끝에서 도야마만의 연안부를 종점으로 하는 라인이었다. 평야부에서는, 옛날에는 가가 번령과의 경계를 식별할 수 있도록, 나가바시에서 고다에 걸쳐 사카이마쓰가 심어졌다. 또한, 오쇼에는 사카이즈카가 축조되었다.[10]
대체로 도나미・이미즈 양군과 네이군과의 군 경계가 적용되었다. 단, 이미즈시의 기타노・야마모토・시이도・쓰치다이 지구는 번령이었다. 또한, 이미즈 평야에서는, 스미요시・가네쿠사 등 구레하 언덕에 가까운 쪽이 번령으로 지정되었다. 하나기는 경계선상에 있었다. 노구치・후타쓰야・혼고・나카오키・누노메, 그리고 도야마만에 이르러, 우치데까지가 번령이 되었다. 하리야마신은 도야마 번의 비지였다.
고대부터 이어지는 엣추국과 히다국의 국경이 적용되었다. 단, 시라키미네의 남쪽, 오나가타니 강・구후스 강의 수원지대, 즉 나라토게 이북의 만바 고원은, 주로 벌채지의 경계를 둘러싸고 히다 측과의 분쟁이 빈번했다.[11][12] 엔포 2년 (1674년)의 재결로, 도야마 측의 영유 주장이 막부에 의해 거부된 후, 번은 이 지역을 논지산으로 별도로 취급했다.
8. 주요 인물
- '''마에다 도시야스''': 도야마 번의 10대 다이묘. 덴포 대기근 시기 흉작으로 번 재정이 악화되자 쇼군 직할령 및 본가로부터 차관을 도입하여 재정난을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박물학과 곤충학에도 조예가 깊어 필리프 프란츠 폰 지볼트의 일본 동물지와 일본 식물지를 연구하기 위해 네덜란드어와 프랑스어를 공부했으며, 자연의 체계를 일본어로 번역하기도 했다.[5]
- '''마에다 토시아츠''': 도야마 번의 13대(마지막) 다이묘. 본가 출신으로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어 사실상 가가 번의 통제를 받았다. 폐번치현 이후 도쿄로 이주하여 외무성과 궁내성에서 근무했으며, 화족 작위 제도에서 백작 작위를 받았다.[5]
- '''마에다 토시오''': 마에다 토시아츠의 양자로 백작 작위를 계승했다. 도쿄 제국 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지치부노미야 부관 등을 역임했으며, 귀족원 의원으로 활동했다.[5]
9. 가신
간에이 16년(1639년), 가가 번 제3대 번주 마에다 도시쓰네가 은거할 때 차남 마에다 도시쓰구에게 도야마 10만 석을 분봉하면서 도야마 번이 성립되었다.[5] 도시쓰구는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외손자였기 때문에 마쓰다이라 성을 받았다.
도야마 번의 가신단은 번 성립 초기에 본가인 가가 번으로부터 과도하게 떠맡겨진 탓에 번 재정에 큰 부담을 주었다.[8] 주인고가 10만 석인데 비해 초기 가신단의 지행고(知行高) 합계는 9만 석에 달했고, 막말까지 3만 5천 석을 정리해야 했다.[8]
에도 후기부터 막말에는 재정 문제와 권력 다툼으로 인해 종번(宗藩)인 가가 번의 개입을 초래하기도 했다. 게이에 간모쓰 사건이나 도다 헤이부 사건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다음은 도야마 번의 주요 가신 명단이다.
가문 | 석고(石高) |
---|---|
도다 시모후사 | 3,000석 |
곤도 오이 | 2,500석 |
무라 사효에 | 2,000석 |
가니에 주젠 | 1,400석 |
도다 토요타로 | 1,000석 |
이쿠타 사콘 | 900석 |
사와키 카즈마 | 800석 |
타키가와 토쇼 | 800석 |
토미타 효부 | 800석 |
와다 쇼사에몬 | 800석 |
후와 나이키 | 700석 |
곤도 키츠바 | 600석 |
호리타 칸베에 | 600석 |
카와무라 시즈마 | 500석 |
코즈카 주덴 | 500석 |
이리에 곤베에 | 450석 |
츠다 고햐쿠키 | 450석 |
오바타 사키치 | 400석 |
오쿠무라 모쿠자에몬 | 400석 |
테라니시 사젠 | 400석 |
노무라 마타베에 | 400석 |
카토 사몬 | 330석 |
우라카미 한고자에몬 | 300석 |
카게 토미키 | 300석 |
스즈키 곤사 | 300석 |
타카사와 산타유 | 300석 |
토가 우몬 | 300석 |
후와 오리마 | 300석 |
무라 젠자에몬 | 300석 |
참조
[1]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2]
서적
Warlords, Artists, & Commoners: Japan in the Six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1987
[3]
간행물
An Official Guide to Eastern Asia
Imperial Japanese Government Railways
1914
[4]
웹사이트
博物館だより 第二十三号 収蔵品紹介『富山藩領絵図』
https://www.city.toy[...]
富山市郷土博物館
1998-12-25
[5]
서적
ふるさと石川歴史館
北國新聞社発行
2002-06-10
[6]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 16 富山県の地名
平凡社
1994
[7]
서적
富山県の歴史
山川出版社発行
1997-08-10
[8]
서적
富山県の歴史
山川出版社発行
1997-08-10
[9]
문서
第2章 富山藩の成立
1974
[10]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 16 富山県の地名
平凡社
1994
[11]
서적
越中史料 巻2
1909
[12]
서적
日本歴史地名大系 16 富山県の地名
平凡社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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