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이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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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쿠이번은 센고쿠 시대에 기타노쇼로 알려진 지역에 위치했으며, 1601년부터 1871년까지 존재했던 일본의 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가 초대 번주가 되었고, 이후 마쓰다이라 씨가 대대로 번주를 역임했다. 후쿠이번은 에도 시대 초기에는 68만 고쿠의 영지를 가졌으나, 번주의 교체와 영지 분할을 거치면서 영지가 축소되었다. 1661년에는 일본 최초로 영지 지폐를 발행하는 등 재정난을 겪었으며, 막말에는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가 번정 개혁을 추진했다.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가담했으며, 폐번치현 이후 후쿠이현의 일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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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이번 | |
---|---|
개요 | |
공식 명칭 | 후쿠이 번 (福井藩) / 에치젠 번 (越前藩) |
유형 | 번 |
존속 기간 | 1600년 - 1870년 |
시대 | 에도 시대 |
관할 지역 | 에치젠 국 |
위치 정보 | |
위치 | 후쿠이성 |
역대 다이묘 | |
초대 번주 | 유키 히데야스 (1601년 - 1607년) |
마지막 번주 | 마쓰다이라 모치아키 (1858년 - 1871년) |
가문 | 마쓰다이라 가문 (도쿠가와 씨) |
역사 | |
주요 사건 | 한 제도의 폐지 (1871년) |
상징 | |
가문의 문장 | 마쓰다이라 가문의 문장 |
현재 | |
현재 위치 | 후쿠이현 |
2. 역대 번주
후쿠이번의 번주는 초대 유키 히데야스(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부터 시작하여 1871년 폐번치현 당시의 17대 마쓰다이라 모치아키까지 에치젠 마쓰다이라가에서 세습하였다.[4] 번주 계승 과정에서 2대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개역, 3대 마쓰다이라 타다마사의 재입봉 및 후쿠이 개칭, 5대 마쓰다이라 마사치카의 7대 번주 재임 등 여러 변화가 있었다. 고쿠다카 역시 초기 68만 석에서 분가 창설, 영지 삭감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32만 석으로 변동되었다.[4]
역대 번주의 상세한 목록과 재위 기간, 고쿠다카 등은 아래 하위 섹션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1. 키타노쇼번 (北ノ庄藩)
후쿠이번은 초기에는 키타노쇼번(ja)으로 불렸으며, 이는 1601년부터 1624년까지의 기간에 해당한다. 이 시기 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13]와 그의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나오[14]가 다스렸으며, 고쿠다카 67만 석의 친판 번이었다. 2대 번주 타다나오의 아들 마쓰다이라 미쓰나가가 잠시 가독을 이었으나[17][18], 막부의 결정으로 상속이 취소되어 공식적인 역대 번주에는 포함되지 않는다.[15]2. 1. 1. 에치젠 마쓰다이라 종가 (越前松平宗家)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ja)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를 시조로 하는 친판 가문으로, 후쿠이번을 다스렸다. 초기 고쿠다카는 67만 석이었다.[5]=== 역대 번주 ===
대수 | 이름 | 생몰년 | 재위 기간 | 비고 |
---|---|---|---|---|
초대 | 유키 히데야스 | 1574–1607 | 1601–1607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13] |
2대 | 마쓰다이라 타다나오 | 1595–1650 | 1607–1623 | 히데야스의 장남[14] |
3대 | 마쓰다이라 타다마사 | 1598–1645 | 1623–1645 | 히데야스의 차남, 타다나오의 동생 |
4대 | 마쓰다이라 미쓰미치 | 1636–1674 | 1645–1674 | 타다마사의 아들 |
5대 | 마쓰다이라 마사치카 | 1640–1711 | 1674–1676 | 미쓰미치의 동생, 7대 번주로 복귀 |
6대 | 마쓰다이라 쓰나마사 | 1661–1699 | 1676–1686 | 타다마사의 손자 (마쓰다이라 마사카쓰의 아들) |
7대 | 마쓰다이라 마사치카 | 1640–1711 | 1686–1710 | 5대 번주 |
8대 | 마쓰다이라 요시쿠니 | 1681–1722 | 1710–1721 | 쓰나마사의 동생 |
9대 | 마쓰다이라 무네마사 | 1675–1724 | 1721–1724 | 쓰나마사의 형 |
10대 | 마쓰다이라 무네노리 | 1715–1749 | 1724–1749 | 히데야스의 4남 마쓰다이라 나오모토계 |
11대 | 마쓰다이라 시게마사 | 1743–1758 | 1749–1758 |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손자 (히토쓰바시 무네타다의 아들) |
12대 | 마쓰다이라 시게토미 | 1748–1809 | 1758–1799 | 시게마사의 동생 |
13대 | 마쓰다이라 하루요시 | 1768–1826 | 1799–1825 | 시게토미의 아들 |
14대 | 마쓰다이라 나리쓰구 | 1811–1835 | 1826–1835 | 하루요시의 아들 |
15대 | 마쓰다이라 나리사와 | 1820–1838 | 1835–1838 |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아들 |
16대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 (슌가쿠) | 1828–1890 | 1838–1858 | 타야스 도쿠가와 가문 출신 (도쿠가와 나리마사의 아들) |
17대 | 마쓰다이라 모치아키 | 1836–1890 | 1858–1869 | 이토이가와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하루의 아들 (히데야스의 동생 마쓰다이라 야스모토계). 메이지 유신 이후 후쿠이 번지사. |
===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에 대한 기록 ===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아들 마쓰다이라 미쓰나가(센치요마루)는 아버지가 개역된 후 잠시 가독을 이었으나[17](1623년), 막부에 의해 상속이 취소되고 에치고 다카다번으로 이봉되었다.[18] 이 때문에 막부의 공식적인 견해로는 미쓰나가를 후쿠이번의 역대 번주로 포함하지 않는다.[15] 당시 호소카와 타다토시나 구보타번의 중신 우메즈 마사카게 등 다른 다이묘들은 미쓰나가가 가독을 이은 것으로 인식했다는 기록도 있지만[16], 현재는 막부의 공식 견해를 따라 역대 번주에서 제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 메이지 유신 이후 ===
17대 번주 마쓰다이라 모치아키는 판적봉환 이후 후쿠이 번지사를 지냈으며, 이후 화족이 되어 백작(1884년), 후작(1888년) 작위를 받았다.
- '''18대 당주: 마쓰다이라 야스다카''' (1867–1930, 당주 1890–1930) - 모치아키의 아들, 2대 후작.
- '''19대 당주: 마쓰다이라 야스마사''' (1893–1957, 당주 1930–1957) - 야스다카의 아들, 3대 후작 (1947년 화족제 폐지).
- '''20대 당주: 마쓰다이라 무네토시''' (1940년 출생, 당주 1957년–현재) - 16대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의 동생 도쿠가와 요시요리의 증손자. 19대 당주 야스마사의 딸 마쓰다이라 토모코와 결혼하여 가독을 이었다.
2. 2. 후쿠이번 (福井藩)
후쿠이번(福井藩)은 에도 시대 에치젠국에 존재했던 번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히데야스가 1601년 67만 석으로 입봉하면서 시작되었다.[13] 신판(親藩) 가문인 에치젠 마쓰다이라가가 1871년 폐번치현까지 통치했다.[4]초대 번주 히데야스 이후 아들 마쓰다이라 타다나오가 뒤를 이었으나[14], 영지를 몰수당했다. 타다나오의 아들 마쓰다이라 미쓰나가가 잠시 뒤를 이었으나, 막부에 의해 상속이 취소되어 공식적인 번주 계보에는 포함되지 않는다.[16][17][18] 이후 히데야스의 차남이자 타다나오의 동생인 마쓰다이라 타다마사가 새로 번주가 되었으며, 그는 거점인 기타노쇼(北ノ庄)를 후쿠이(福井)로 개칭했다.[19]
번의 고쿠다카는 초기 67만 석에서 시작하여, 분가(分家) 창설이나 개역 등으로 여러 차례 변동을 거쳐 최종적으로는 32만 석이 되었다. 상세한 역대 번주와 고쿠다카 변화는 하위 섹션의 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2. 2. 1. 후쿠이 마쓰다이라 가문 (福井松平家)

대수 | 이름 (원어 표기) | 재임 기간 | 고쿠다카 (단위: 석) | 비고 |
---|---|---|---|---|
1 | 유키 히데야스|結城秀康일본어[4] | 1601년 ~ 1607년 | 680,000[4] |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차남. 유키 가문에서 마쓰다이라 가문으로 성씨 변경.[13] |
2 | 마쓰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일본어[4] | 1607년 ~ 1623년 | 680,000[4] | 히데야스의 장남. 영지를 몰수당하고 은거. |
※ | 마쓰다이라 미쓰나가|松平光長일본어 | (1623년) | - | 타다나오의 아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잠시 번주가 되었으나 막부에 의해 상속이 취소됨. 막부의 공식 기록상 역대 번주로 포함되지 않음.[16][17][18] |
3 | 마쓰다이라 타다마사|松平忠昌일본어[4] | 1623년 ~ 1645년 | 525,280[4] | 히데야스의 차남, 타다나오의 동생. 타다나오 영지 몰수 후 새로 입봉. 기타노쇼(北ノ庄)를 후쿠이(福井)로 개명.[19] |
4 | 마쓰다이라 미쓰미치|松平光通일본어[4] | 1645년 ~ 1674년 | 450,000[4] | 타다마사의 장남. 동생들에게 영지를 나눠주어(분지) 고쿠다카 감소. 자살로 인해 가문이 일시 단절될 뻔했으나, 동생 마사치카의 상속이 인정됨. |
5 | 마쓰다이라 마사치카|松平昌親일본어[4] | 1674년 ~ 1676년 | 450,000[4] | 타다마사의 5남, 미쓰미치의 동생. 분가인 요시오카 번주에서 본가 상속. (요시오카 번 영지를 합쳐 47.5만 석이 되었으나[4], 공식 고쿠다카는 45만 석으로 유지됨) |
6 | 마쓰다이라 쓰나마사|松平綱昌일본어[4] | 1676년 ~ 1686년 | 450,000[4] | 미쓰미치의 장남. 정신 이상 증세를 보여 은거 명령을 받음. |
7 | 마쓰다이라 요시노리|松平吉品일본어[4] | 1686년 ~ 1710년 | 250,000[4] | 5대 번주 마사치카가 요시노리(吉品, 이전 이름 마사아키(昌明))로 개명하고 다시 번주가 됨. 쓰나마사의 은거로 인해 고쿠다카가 대폭 삭감됨 (실질 수입은 30만 석이었다는 기록도 있음[4]). |
8 | 마쓰다이라 요시쿠니|松平吉邦일본어[4] | 1710년 ~ 1721년 | 250,000[4] | 마사치카(요시노리)의 조카. 에치젠 국내의 막부 직할령(천령) 10만 석 남짓을 관리하게 됨(預所).[4] |
9 | 마쓰다이라 무네마사|松平宗昌일본어[4] | 1721년 ~ 1724년 | 300,000[4] | 마사치카(요시노리)의 손자. 분가인 마쓰오카 번주에서 본가 상속. 마쓰오카 번 영지를 합병하여 고쿠다카 증가.[4] |
10 | 마쓰다이라 무네노리|松平宗矩일본어[4] | 1724년 ~ 1749년 | 300,000[4] | 요시쿠니의 장남. 에치젠 국내의 막부 직할령 전부를 관리하게 됨(預所).[4] |
11 | 마쓰다이라 시게마사|松平重昌일본어[4] | 1749년 ~ 1758년 | 300,000[4] | 무네노리의 장남. 어린 나이에 번주가 되어, 관리하던 막부 직할령이 일시적으로 회수됨.[4] |
12 | 마쓰다이라 시게토미|松平重富일본어[4] | 1758년 ~ 1799년 | 300,000[4] | 도쿠가와 무네타다(고산쿄 히토쓰바시가 초대 당주)의 차남. 시게마사의 양자. |
13 | 마쓰다이라 하루요시|松平治好일본어[4] | 1799년 ~ 1825년 | 320,000[4] | 시게토미의 장남. 고쿠다카 증가.[4] |
14 | 마쓰다이라 나리쓰구|松平斉承일본어[4] | 1826년 ~ 1835년 | 320,000[4] | 하루요시의 장남. |
15 | 마쓰다이라 나리사와|松平斉善일본어[4] | 1835년 ~ 1838년 | 320,000[4] | 도쿠가와 이에나리(11대 쇼군)의 아들. 나리쓰구의 양자. |
16 | 마쓰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일본어[4] | 1838년 ~ 1858년 | 320,000[4] | 다야스 도쿠가와 가문 출신. 나리사와의 양자. 막말사현후 중 한 명. 안세이 대옥으로 은거. |
17 | 마쓰다이라 모치아키|松平茂昭일본어[4] | 1858년 ~ 1871년 | 320,000[4] | 요시나가의 양자 (원래는 이토이가와 번주 마쓰다이라 나오하루의 아들). 마지막 번주. |
에치젠국은 센고쿠 시대 아사쿠라 씨 멸망 후 여러 다이묘의 지배를 거쳐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 소 다이묘들에게 분할 통치되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서군에 가담했던 아오키 가즈노리의 영지가 몰수되자, 1601년(게이초 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차남 유키 히데야스에게 에치젠 67만 고쿠를 주어 후쿠이번을 세웠다.[2] 히데야스는 마쓰다이라 성을 사용하며[8]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을 열었고, 기타노쇼성을 개수하여 거점으로 삼았다.[2]
3. 번의 역사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난행과 쇼군 히데타다와의 불화로 1623년(겐나 9년) 영지를 몰수당하고 유배되었다.[2] 이듬해 동생 마쓰다이라 다다마사가 50만 석으로 번을 계승했고[10][11], 거점 이름은 후쿠이(福井)로 바뀌었다.[2] 이때 에치젠 국은 후쿠이번 외 여러 번으로 나뉘었다. 다다마사의 후손들이 막말까지 번을 다스렸으나, 지번 분봉과 상속 문제로 영지는 점차 줄었다. 잦은 재해와 번주의 지출로 재정난이 심해 1661년에는 일본 최초로 한사쓰(藩札)를 발행하기도 했다.[2] 1686년(조쿄 3년)에는 6대 번주 마쓰다이라 쓰나마사의 강제 은거와 영지 반감이라는 오이에 소동을 겪으며 번의 격식도 낮아졌다.[3] 이후 마쓰오카 번 병합 등으로 점차 가격(家格)을 회복했으며, 후대 번주 중에는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 등에서 온 양자들이 있었다.
막말에는 다야스 도쿠가와 가 출신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가 하시모토 사나이, 요코이 쇼난 등을 등용해 번정 개혁을 이끌고 공무합체파의 중심 인물로 활동했다. 보신 전쟁 때는 신정부 편에 서서 싸웠다. 1871년 폐번치현으로 후쿠이번은 폐지되었고, 마지막 번주는 마쓰다이라 모치아키였다. 번의 영지는 행정 구역 개편을 거쳐 현재 후쿠이현의 중심부가 되었다.
3. 1. 초기 역사 (17세기 초)
센고쿠 시대 이후 에치젠국 지역은 여러 다이묘의 지배를 거쳤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가담했던 아오키 가즈노리가 전투 후 영지를 몰수당하면서, 1601년(게이초 6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세키가하라 전투의 공을 인정하여 자신의 차남인 유키 히데야스에게 에치젠 일국 67만 고쿠를 하사했다.[2] 히데야스는 시바타 가쓰이에가 축조했던 기타노쇼성을 약 6년에 걸쳐 대대적으로 개수하여 거성으로 삼았다. 또한 유키 성을 마쓰다이라로 바꾸고[8] 에치젠 마쓰다이라 가문을 창시했다.
히데야스의 뒤를 이은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나오는 오사카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나, 쇼군 히데타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고 난폭한 행동을 일삼아 결국 1623년(겐나 9년) 영지를 몰수당하고 분고국으로 유배되었다.[2]
이듬해인 1624년(간에이 원년), 다다나오의 동생이자 에치고 다카다 번주였던 마쓰다이라 다다마사가 50만 고쿠로 후쿠이번을 계승했다.[10][11] 다다마사가 입성한 후, 성과 주변 조카마치의 이름인 기타노쇼(北ノ庄)는 후쿠이(福居, 후에 福井)로 개명되었다.[2] 이 과정에서 에치젠 국은 다음과 같이 여러 번으로 분할되었다.
다다마사의 후손들이 도쿠가와 막부 말기까지 후쿠이번을 통치했지만, 이후 지번 분할과 상속 문제 등으로 영지는 더욱 축소되었다. 잦은 홍수, 흉작, 전염병 발생과 더불어 역대 번주들의 지출 문제까지 겹쳐 번의 재정은 만성적인 어려움을 겪었다.[2] 1661년에는 재정난 타개를 위해 일본 최초로 번 차원의 지폐인 한사쓰(藩札)를 발행하기도 했다.[2]
1686년(조쿄 3년)에는 6대 번주 마쓰다이라 쓰나마사가 정신 이상을 이유로 강제 은거당하고 영지가 25만 고쿠로 반감되는 오이에 소동을 겪었다.[3] 이때부터 번의 격식이 낮아져 에도 성 내 다이묘들의 대기실인 쓰메쇼(詰衆)가 오오로카(大廊下)에서 오히로마(大広間)로 변경되었다. 이후 후쿠이번의 번주 중 다수는 고산쿄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3. 2. 중기 역사 (18세기-19세기 초)
1686년, 번주 마쓰다이라 쓰나마사가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물러나면서 영지는 계승 위기를 맞았고, 이 오이에 소동으로 인해 고쿠다카는 47만 5천 석에서 25만 석으로 크게 줄어들었다.[3] 이후 후쿠이번은 잦은 홍수, 흉작, 전염병 발생과 더불어 번주의 낭비 등으로 인해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았다.[2] 후대의 번주 중 상당수는 고산쿄 중 하나인 히토쓰바시 도쿠가와 가문에서 양자로 들어왔다.
3. 3. 막말과 메이지 유신 (19세기 중후반)
막말 시기, 후쿠이 번은 다야스 도쿠가와 가에서 양자로 들어온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슌가쿠)가 이끌었다. 슌가쿠는 하시모토 사나이 등을 등용하고, 구마모토 번에서 요코이 쇼난을 초빙하여 번의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안세이 대옥에 연루되어 은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 근신에서 풀려난 후에는 공무합체파의 주요 인물로서 막부 정치에 참여하며 영향력을 행사했다.
보신 전쟁이 발발하자 후쿠이 번은 사쓰마와 조슈가 주도하는 메이지 신정부 측에 가담했다. 막부 세력과의 전쟁에서 신정부군으로 참전했으며, 에도가 무혈 개성된 후 우에노의 간에이지에 은거하며 저항하던 쇼기대 토벌에도 참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1871년 폐번치현이 단행되면서 후쿠이 번은 폐지되었다. 번의 영지는 후쿠이현이 되었다가 이후 아스와현으로 개칭되었고, 다시 쓰루가현을 거쳐 이시카와현에 편입되었다. 그러나 이후 구 에치젠 지역과 와카사 지역이 후쿠이현으로 다시 분리될 때, 옛 후쿠이 번의 영역이 그 중심지가 되었다. 후쿠이 번의 마지막 번주는 마쓰다이라 모치아키였다.
4. 주요 가신
후쿠이번의 가신단 중 최고위 가문은 에치젠 후추 2만 석을 영지로 받은 필두가로 혼다 구라노스케 가문(혼다 씨)이었다. 이 가문은 메이지 유신 이후 남작 작위를 받았다.
- 혼다 가문 계보: 혼다 토미마사 (시게츠구의 조카) → 마사나가 → 나가카즈 = 나가노리 → 소조 → 소주 = 소큐 → 소쇼 → 토미야스 = 소겐 (히타치 후추번주 마츠다이라 요리사토의 차남)
번 내에서 가로를 배출할 수 있는 최고 가격(家格)인 고치세키(高知席)는 17가문이 있었다. 이들은 후추 영주 혼다 가문보다는 아래 서열에 해당한다.
- 혼다 히다 가문: 혼다 나리시게의 다섯째 아들 시게카타가 초대.
- 혼다 슈리 가문: 혼다 토미마사의 차남 마사후사가 초대. 혼다 타카요시 등이 이 가문 출신이다.
- 혼다 겐시로 가문: 혼다 슈리 가문의 분가.
- 사카이 게키 가문: 사카이 시게나리가 초대.
- 사카이 마고시로 가문
- 코마야마 조 가문: 코마 타카스미가 초대. (키타코마 또는 미나미코마 설[20]). 묘소는 후쿠이시 키타의 츠우안지.
:: 코마 가문은 전국 시대 야마토국에서 6만 석을 소유한 다이묘였으나, 덴쇼 13년(1585년) 토요토미 히데나가의 야마토 입국 시 영지를 몰수당한 코마 사네히데가 게이초 7년(1602년) 에치젠으로 이주했다고 전해진다[20]. 사네히데의 아들인 코마 타카스미(1581-1659)가 후쿠이 코마 가문의 시조로, 마츠다이라 타다마사의 가신이 되어 후에 가로가 되었다[20][21]. 손자 코마 사다스미가 뒤를 이었으나, 그의 자손 코마 마사사다가 폐적되어 분가하면서 서자 코마 토모타카가 본가를 이었고, 이후 후계자들은 이름에 '효(孝)' 자를 사용했다[20]. 교토 제국대학 공학부 교수이자 메이지 정련 사장이었던 아베 마사요시(1860-1909)는 이 가문 출신이다[22][23].
:: 사다스미의 막내아들 쵸온이 마사사다의 가독을 이어받았고, 이후 후계자들은 이름에 '스미(純)' 자를 사용했으며, 마사사다의 통칭 중 하나였던 타테와키를 통칭으로 삼았다[20].
- 아시다 시노노 가문: 초대 당주는 카토 야스히로 (요다 야스카츠).
- 마츠다이라 슈마 가문: 나가사와 마츠다이라 가문 일족인 마츠다이라 마사요가 초대. 에치고 타카다번주 마츠다이라 타다테루가 개역된 후 마츠다이라 타다마사를 섬겼다.
- 야마가타 사부로에 가문: (사사지 다이젠 가문) 사사지 마사토키 (사사지 다이젠)가 초대. 10대 후에 야마가타로 성을 바꾸고 야마가타 마사카게의 자손이라 칭했다. 최대 1만 석.
- 이나바 우쿄노스케 가문: 이나바 마사나리의 넷째 아들 마사후사가 초대.
- 아리가 나이키 가문: 아리가 마사나리가 초대.
- 아카시 쇼겐 가문: 원래 지번인 마쓰오카번의 가로였으나, 마쓰오카번이 본가에 재병합된 후 본가의 가로 가문이 되었다.
- 하기노 코시로 가문: 오기노 나가미치가 초대.
- 스기타 이키 가문: 마츠다이라 타다마사의 후다이 가신 스기타 미츠마사가 초대.
- 오타니 단게 가문: 오타니 시게마사가 초대. 『화정요약』에 따르면 토리이 코지 테루타카의 아들로, 세이렌인 문적 방관 오타니 타이친의 양손으로 여겨지는 오타니 시게마사의 아들이라고 한다. 오타니 요시츠구의 자손을 칭한다.
- 오카베 분고 가문: 오카베 나가오키[24] → 아와지[25] = 야스나오 (아와지의 동생) → 사다노리 = 키헤이 (아와미 헤이 나이의 아들) → 슈테이 → 테이키 (난가쿠) = 코우키 (코마 타카아키 차남) → 나가 (나가시)
가신단의 서열 구조후쿠이번의 가신단은 다음과 같은 서열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 혼다 가문 (후추 영주, 필두 가로)
- 고치세키 (高知席, 가로 배출 가능 가문, 17가)
- 고케 (高家)
- 요리아이세키 (寄合席)
- 조자 반가이세키 (定座番外席)
- 반시 (番士) 역 외번 (役番外 大番) 등
- 신반 (新番)·신반격 (新番格)
- 의사·화가 등
- 요리키 (与力)
- 코야쿠닌 (小役人)
- 잇토메미세키 (一統目見席)
- 코잔, 보즈, 시모다이 (小算・坊主・下代)
- 여러 조 (諸組) (足軽)
가에이 5년(1852년) 기준으로, 아라코, 주겐 등 코모노 973명을 제외한 가신단 총수는 2,700명(사(士) 802명, 졸(卒) 1,898명)이었다.
5. 막말의 영지
대부분의 번처럼 후쿠이번 역시 정기적인 지적 조사와 예상 농업 생산량을 기준으로 할당된 고쿠다카에 맞춰 여러 곳에 흩어진 영토로 구성되었다.[6][7] 막말 당시 후쿠이번의 주요 영지는 에치젠국 내에 다음과 같이 분포했다.
군 | 촌 수 | 비고 |
---|---|---|
아스와군 | 158개 촌 | |
요시다군 | 136개 촌 | |
난조군 | 57개 촌 | |
이마다테군 | 57개 촌 | 이 중 2개 촌은 혼보 현에 편입 |
뉴군 | 93개 촌 | |
오노군 | 8개 촌 | |
사카이군 | 168개 촌 | 이 중 2개 촌은 혼보 현에 편입 |
또한 후쿠이번은 도쿠가와 막부를 대신하여 에치젠국 내의 광대한 천령(막부 직할령) 영토를 관리했다. 이 영토는 명목상의 고쿠다카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번에게 상당한 추가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맡았던 천령 지역은 난조군 12개 촌, 이마다테군 18개 촌, 뉴군 14개 촌, 오노군 13개 촌, 사카이군 69개 촌 등이었다. 다만, "구고구령취조장"은 제1차 부현 통합 이후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어, 아래 언급된 변천 외의 자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일부 영지의 변동이 있었다. 난조군 3개 촌(구 니시오 번령 1개 촌, 하타모토령 1개 촌, 후쿠이번 예소 관할의 구 막부령 1개 촌)과 오노군 11개 촌(후쿠이번 예소 관할의 구 막부령)이 추가로 편입되었다.
참조
[1]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Papinot
1906
[2]
서적
Military Intervention in Pre-War Japanese Politics
https://books.google[...]
2004
[3]
서적
https://books.google[...]
[4]
서적
Dictionnaire d'histoire et de géographie du Japon
http://www.unterstei[...]
Papinot
1906
[5]
웹사이트
Genealogy (jp)
http://reichsarchiv.[...]
[6]
서적
The Bakufu in Japanese History
https://books.google[...]
1987
[7]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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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1987
[8]
문서
秀康は生涯結城姓であったとする説もある。
[9]
문서
『国事叢記』
[10]
문서
忠直の嫡男松平光長には越後高田26万石が与えられ、高田藩を立藩した。
[11]
문서
松平光長を福井藩3代と数える説もあり、光長が一旦継承したと読むことも可能な史料もあるが、継承の件自体が後世、幕府により否定されているので公式とはならず、逆に「忠直 - 忠昌 - 以降」が幕府の公式見解である。
[12]
문서
このとき、福井藩の領主の家格が越前国主より福井城主へ降格した。
[13]
문서
秀康時代の主な家臣
[14]
문서
忠直時代の主な家臣
[15]
서적
越系余筆
松平文庫
1806
[16]
서적
福井県史 通史編3・近世一
[17]
서적
徳川諸家系譜
[18]
문서
津山松平氏家譜 元和9年7月29日条徳川家光黒印状
[19]
문서
忠昌時代の主な家臣
[20]
웹사이트
松旭斎天一と福井藩陪臣牧野家 再読『松旭斎天一の生涯』
https://www.library-[...]
福井県郷土誌懇談会
2012-02-25
[21]
웹사이트
狛伊勢
https://www.library-[...]
デジタルアーカイブ福井
[22]
웹사이트
阿部正義
https://dl.ndl.go.jp[...]
玉雪堂
[23]
웹사이트
阿部正義
https://www.library-[...]
デジタルアーカイブ福井
[24]
문서
岡部長次とも。母親が岡部貞綱の娘の大姥局。1700石。大坂の陣直後に福井藩抜け駆け戦功の責任を取って吉田好寛と共に入水自殺
[25]
문서
秀康死去時に殉死を禁じられたことを不服として、大坂の陣に出陣時に突撃戦死
[26]
웹사이트
福井藩家臣団の家格別人数
https://dl.ndl.go.jp[...]
福井県文書館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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